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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보충 자료 II
복음의 본질인 선교와 영적 전쟁의 특성
(2000)
1. 선교 이해에 있어서 바울의 두 가지 축(軸)
선교학에서 선교라는 말이 전문적인 학술 용어로 쓰이다보니 그 원래의 성경적인 개념이 희석된 듯한 느낌을 많이 받는다. 선교학에서 말하는 선교의 개념은 많은 경우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부수적인 요소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 물론 이 모든 부수적인 요소들은 선교를 바로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선교학의 한 학도로서 이슬람권과 아프리카권 선교에 필요한 “현상학(phenonemology)” 차원에서의 연구를 하고 논문들을 쓰고 있다. 필자의 다음 강의는 이 부분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본 강의에서 나누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모든 필요한 도구들 위에 존재하는 복음 그 자체의 의미와 복음의 내용, 그리고 복음이 갖고 있는 내재적이며 본질적인 “선교성(being of mission)”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교적인 의미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선교학(missiology)보다도 선교신학(mission theology)의 영역이 될 것이다.
먼저 선교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중심으로 한 이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로써 선교의 개념이 성경적인 개념에서 많이 벗어나 인위적인 정의를 많이 따르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며, 많은 경우 선교에 대한 이해가 본질적이기보다도 비본질적인 것들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보고자 한다. 다음에 우리는 복음 그 자체를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건 자체가 선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복음에 내재된 선교의 개념들을 유추하여 선교를 보다 본질적으로 정의하여 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 자체가 보여주고 있는 영적 차원이다. 다시 말하여서 선교는 영적인 차원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차원이라 함은 선교의 신학적, 문화인류학적, 사회학적 차원 등을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앞에서 지적한대로 선교에 관련된 모든 차원들 위에 존재하여 있는 복음 그 자체의 영광을 중심으로 하여 선교를 우선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는 일차적으로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패러다임의 이해를 또한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복음 안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선교의 개념과 이 선교의 영적 전쟁의 차원, 이 두 분야를 논의하는 것이 본 강의의 주된 내용이 된다.
이 중요한 선교 이해의 두 가지 축(軸)은 바울의 탁월하며 균형잡힌 선교철학 속에 아주 명확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우선 그의 사역 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그는 복음전파라 하는 것은 영적인 씨름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3-5).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사상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지식과 그분의 주권 아래에 무릎을 꿇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의 선교는 확실히 영적 전쟁이었다.
둘째, 바울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사랑하고자 하였다. 그의 인간 접근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오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물론, 이를 위하여서 바울은 먼저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였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하는 접근을 항상 시도하였다. 바울을 고린도전서 9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합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9:19-23).
이러한 “성육신적인 선교 방법”은 복음 자체의 내용이기도 하다. 바울은 복음을 이해하였고 그 복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의 선교 방법 역시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의 기본을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하는 복음주의 교회의 전통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물론 이 “전파”의 개념이 단순히 언어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도), 선교는 복음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여서 선교란 복음이 가시적으로 표현되고 보여지는 교회의 모든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David Bosch(1991)가 그의 대작 Transforming Mission에서 말하고 있는 선교의 다면적인 패러다임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표현한다면, 선교는 복음의 메시지 내용을 그대로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의 표현의 수단이 되는 선교의 방법 자체가 복음 메시지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복음의 메시지와 복음 전달이라고 하는 선교의 방법은 결코 분리된 적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이러한 복음과 선교의 관계를 재조명하고자 하며, 나아가서 복음 자체가 갖고 있는 영적 전쟁의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선교의 영적 전쟁 차원이 단순한 능력대결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사상 및 확신의 전쟁임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다루기 이전에 먼저 간단히 선교 이해에 대한 부정확한 접근들을 살펴봄으로써, 혹시라도 선교에 대한 비본질적인 이해를 선교의 핵심인 것처럼 오해한 부분이 우리 가운데는 없는지 먼저 점검해보고자 한다.
2. 선교 개념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들
먼저 선교학에서 말하는 단수로서의 “선교(mission)”와 복수로서의 “선교들(missions)”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선교”라 함은 하나님의 선교를 의미한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것으로서 보다 폭넓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evangelism)” 만을 지칭하는 것 이상으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교들”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반적인 선교의 개념이 될 것이다. 즉, 이 “선교들”이란 교회의 존재 의미이자 목적인 선교의 수행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수인 “선교”보다는 더욱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선교의 행위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우리는 교회의 선교 행위를 말하는 “선교들”을 그저 단수 명사인 “선교”로써 표현할 것이다. (그 이유는 국어의 일반적인 사용례를 따르는 것으로서, 영어의 “a mission”의 개념과 상통할 것이다.)
본 장에서는 선교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들이 어떠한 것들이 있어 왔고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매우 간략히 다룸으로써, 오늘날 선교를 수행하는 우리 한국 교회와 선교후보생들 및 선교사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오류들을 지적하여 보고자 한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지난 백여년 동안 선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를 불러왔던 내용인데, 그것은 선교와 서구화가 혼돈되었던 사실이다. 서구 기독교인들의 비서구 사회에서의 선교는 서구화의 지름길로서 인식되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화(Westernization)는 곧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라는 공식이 암암리에 하나의 진리처럼 받아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단 비서구인들만의 인식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많은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서구의 문명과 기독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문화로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의하여 지대한 영향을 받은 부산물로서의 서구 문화는 곧 기독교의 유일한 표현으로서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그 비근한 예가 아마도 잘 알려진 Livingstone의 3C 정책일 것이다. 즉,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는 곧 상업화(Commercialization)와 문명화(Civilization)를 함께 동반하는 것으로서 인식되었다. 물론, 후자의 두 가지는 경제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 복음의 부산물로서 자연히 뒤따라올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가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유럽 사회와 문화의 요소들만이 기독교의 유일한 표현인 것처럼 여겼다는 점은 그 후에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아프리카 교회의 신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하게 재고되는 부분들로서 그 연구 및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서구의 현대화와 맞물려서 함께 발전하여 온 서구 교회의 세계 인식은 곧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신령한 소명의식과 함께 그 방법에 있어서도 서구의 현대식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려진대로 서구의 기독 교회들은 세속 식민 정부와 비록 다른 사상과 동기로 비서구 세계를 찾아갔지만 비서구 사회의 현지인들에게는 같은 식민 세력으로 비추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실제로 세속 식민정부의 비호를 받은 선교사들은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득불 심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선교의 목표를 좁은 의미에서의 “전도”에만 국한함으로써 선교의 “수단” 혹은 “방법”이 끼칠 수 있는 복음에 대한 이미지를 간과한 것이 선교의 큰 방해 요소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가 서구화 내지는 현대화라는 도구로써 소위 “미개함”으로부터 비서구 사회가 탈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문화우월주의(cultural paternalism)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문화우월주의는 오늘날 양식 있는 서구 선교학자 및 선교사들에 의하여 깊이 반성되고 있으며 선교학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선교가 복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인 메시지로부터 벗어나서 주변적인 비본질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선교가 아닌, 어떤 특정한 기독교 문화를 심게 되는 비성육신적인 선교 행위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불행히 아직도 이러한 사상이 선교를 수행하는 서구 뿐만 아닌 비서구의 교회에도 은연 중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교회 역시 이 점을 유념하여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을 벗어버리지 못하였던 과거의 서구교회 선교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두 번째로 지적할 선교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는 선교는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이 선교라고 하는 개념이다. 이미 1950년대 말 선교학자요 교회사가인 Neill이 지적한 대로, 모든 것이 선교라면 그 어느 것도 선교가 아니다. Bosch는 이러한 선교의 오해를 늘 염두에 두면서, 그의 거작 Transforming Mission에서(1991) “변화를 추구하는 선교”의 역동적인 개념을 주창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교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행위로서 이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선교 그 자체는 항상 변화 및 성장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교는 “transforming mission”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행위가 단순히 선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복음의 선교성을 약화시키는 진술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구체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으며 이 메시지는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복음은 진취적이며 적극적이며 목적적이다. Bosch가 말한대로 선교의 목적은 변화(transformation)에의 추구인 것이다. 따라서 선교라 하는 것은 교회 내의 특별한 행위 영역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선교적인 행위 외에 많은 것들을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선교의 범주에 넣는 것은 선교의 특수한 성격과 행위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실제로 선교의 개념 정의는 현실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쉬운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히 20세기에 들어와서 논의되었던 선교의 개념 정의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하였다. 예를 들어 1928년에 개최되었던 국제선교공회(IMC)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본 회는 선교를 “종합적인 접근”으로 봄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모든 선교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보고자 시도하였고, 그 후 1947년도의 위트비 회의(the Whitby Meeting)에서는 “케리그마(선포)” 및 “코이노니아(교제)”의 개념을 사용하여 선교에 대한 이해를 요약하여 보고자 하였다. 그 후 1960년대 중반에 Howekendijk가 “디아코니아(섬김)”의 개념을 첨가하였고, 윌링겐 대회(the Willingen Conference)에서 선교는 선포와 교제 및 섬김을 통한 “마르튀리아(증거)”라고 정의되었다. 이 개념은 지난 수십년동안 약간의 변형과 첨삭이 있었지만 거의 선교의 정통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Bosch의 책 511-512 쪽 참조)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선교의 정의들은 복음 자체가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선교성을 반영하기보다는, 비서구-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선교의 수행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서구 교회를 중심하여 논의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선교의 다양한 측면을 너무 편의주의적으로 축약(reductionism)시키거나 혹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교회와 선교를 동일시하는 개념으로까지 확대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였다. 선교는 다양한 인간의 행위를 내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교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분명히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복음의 구속적인 메시지를 중심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장에서 이미 전제한 것처럼 이러한 선교학적 내지 선교 신학적 논의가 선교의 수행에 필요한 여러 부수적인 분야들을 정당하게 필요로 함을 배제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 축(軸)이 복음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서 복음의 메시지와 그 역사적 사건에서 하나님이 이미 보여주신 “선교성”에서 우리는 선교의 본래적인 의미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서구 교회의 선교에 대한 논의들을 귀감 삼아 비서구 교회의 입장에서--선교를 받아본 피선교지인의 입장에 더욱 서 봄으로써--오늘날 전통주의와 현대주의 및 후현대주의가 혼합적으로 작용하는 세계를 향한 선교의 의미들을 성경으로 돌아가 새롭게 조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선교는 20세기까지의 선교의 양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20세기까지의 선교의 양상은 선교가 일방적인 방향성을 갖는다고 하는, 소위 “기독교적 국가” 및 “비기독교적 국가”로 세계를 나누는 양분론이다. 다시 말하여서, 선교라고 하는 것은 그 방향이 서구의 기독교 국가에서 비서구 국가들로 가는 것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교회들은 실제적으로 그 성장이 마이너스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계이다. David Barrett의 1980년대의 통계를 보면 유럽과 북미에서 매주 53,000명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에 비하여 남미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회의 성장은 서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교회는 대표적인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질적인 면에서 아직 약하다고 하겠지만, 그 기준도 많은 경우에는 서구적인 문화우월주의적인 시각이 많이 도사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필자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의 지난 약 십년간의 사역을 돌아볼 때에 필자 자신과 우리 한국 교회보다 훨씬 성숙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났다고 확언할 수 있다. 또 문화적으로 우리의 것들과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영적인 체험들을 그들도 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제 선교는 소위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의 선교가 아니다. 선교는 그 자체가 복음에서 보듯이 “겸손”한 행위이다. 선교는 우월감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다. 선교는 그러므로 배움을 전제로 한다. 선교사는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그들의 문화를 배움으로써 그리스도 없는 이들의 삶의 배경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 없이 살도록 만든 그 문화적 배경과 그 배후의 어두움의 권세에 대한 이해와 인간 이해가 있을 때에, 선교사는 비로소 그리스도 없는 이들을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바꾸어 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선교사가 자신을 겸손히 드리는 것이 선교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선교사의 의미도 서구교회의 “파송” 개념과는 다른 의미에서 재해석되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유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오늘날의 선교는 쌍방적이며 “그리스도가 있는 이”로부터 “그리스도가 없는 이”에게로라는 개념이, 바로 성경적인 개념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음 장에서 이제 우리는 선교의 복음적인 의미들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3. 복음으로서의 “하나님의 선교”와 “상황화” 이슈
필자는 선교란 교회가(신학적인 의미에서든 제도적인 의미에서든) 그리스도 없는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그 구속의 경험 위에서 새로운 삶을 창출하도록 돕는 모든 사역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선교는 Bosch가 말한 것처럼 다면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Bosch의 Transforming Mission, 제 12장 참조). 선교의 행위들은 서로 다른 문화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다양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으며, 또 선교의 내용 자체가 과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나타나는 양상이 공간과 시간에 의하여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교의 다양한 얼굴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의 의미와 그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이해되고 수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을 때에, 자칫 잘못하면, 선교는 선교수행이라고 하는 수행 자체에 그 초점이 맞추어지고 말 수도 있다. 이러한 선교의 의미를 복음의 빛에 비추어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선교는 앞에서 언급한 단수로서의 “선교”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o)”를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선교가 인간의 신앙 혹은 종교 행위라고 하는 차원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면, 선교 사역은 많은 오류들을 겪게 될 것이다. 지난 서구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이에 대한 많은 사례 및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선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Hiebert가 지적한 것처럼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먼저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이 사실은 선교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Evangelism, Church, and Kingdom.” The Good News of the Kingdom에 있는 논문. 1993:159). 즉,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이라고 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계시하신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선교의 중심이 된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곧 하나님의 선교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선교의 수행자이시며 장차 완성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일들과 그분의 방법이 교회의 모든 선교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서 역사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구속 행위가 곧 “하나님의 선교”인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삼위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를 가질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선교의 패러다임들을 원칙들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삼위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깨어진 관계의 회복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관계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조건 없이 우리 인간들을 용서하심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행위, 곧 과거의 “하나님의 선교”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화요일 저녁 메시지에서 다루기로 되어 있으므로 본 강의에서는 생략한다.) 그러므로 선교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계속 다가 오신 것이다. 인간의 종교들이 신(神)을 찾아 위를 향하여 끝없이 올라가며 좌절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인간들을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신 것이다. 선교는 따라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친히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소식들이 그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또, 하나님의 선교는 “수용자 중심(receptor orientatation)”의 선교였다. 구원의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우선 그것이 어떤 사람이라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인 옷을 입고 다가 왔다는 사실이다. Kraft는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의 문화를 선택하시고 인간들과 관계하실 때에는 거의 대부분 자기 자신을 그 문화의 범위 안에 국한시키셨다”고 하나님의 선교를 묘사하였다(Christianity in Culture, 1979). 성자 하나님이 자신을 히브리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을 때에, 그분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신현시(神現時)에 임시적으로 천사의 형태를 빌은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교의 극치가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어 히브리 사람들의 관습을 어려서부터 익히고 배웠고 히브리인들의 옷을 입었고 히브리인들의 언어를 말하셨으며 히브리인들의 음식을 드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완전한 히브리인이 되신 것이다. 즉,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실 때에 천국의 언어나 천국의 기준을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셨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기준에서 당신의 의사들을 전달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과의 상호작용의 행위가 바로 복음이자 동시에 선교였던 것이다. 이렇게 복음과 선교는 하나로서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곧 복음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Gilliland가 잘 지적하였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의 본질, 곧 복음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의 선교는 “부성적 우월감을 갖거나(paternalizing) 지배적이거나(dominating) 외국식이며 의존적인 교회(foreign and dependent church)를 세우는” 위험들로부터 좀더 자유해질 수 있을 것이다 (Pauline Theology and Mission Practice, 1983:13). 위에서 언급한 “수용자 중심”의 선교가 곧 하나님의 선교 방법이었음을 우리는 복음의 내용 그 자체를 통하여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를 염두에 둘 때에 교회의 선교(missions)는 하나님의 선교(mission)의 수단이라고 하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의 선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선교, 곧 복음이 모든 사람들의 심령의 깊은 곳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것은 소위 말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이슈가 된다. 필자는 상황화라는 말이 오늘날 기독 교회 내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을 많이 목격하였다. 상황화의 개념이 어떻게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본 강의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상황화의 개념은 복음의 의미전달을 위한,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의 내용과 그 영적/신학적 의미의 전달이라는 차원에서의 상황화를 말한다. 이것은 이미 바로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아드님이 히브리 문화권 속에 성육하여 오신 하나님의 구속 행위와 다름 아닌 것이다. 즉, “수용자 중심”의 선교가 곧 “상황화”의 개념이다. 따라서 “상황화”의 목표는 복음을 듣는 이들이 분명히 성경적인 의미로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복음전달자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상황화의 과정은 따라서 매우 전문적이고 난이도가 높은 사역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제 선교는 필요한 모든 부수적인 방법들을 동원하며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들을 투자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 이슬람권에서 어떻게 하여야 복음이 저들에게 성경적인 의미로서의 기쁜 소식으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계속하여 연구하여 왔으며, 이를 위하여 지금도 계속 리서치와 적용과 수정과 재적용을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또 수용자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상황 속에서는 어떠한 방법을 고용하여야 저들에게 복음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바로 상황화 작업이 풀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상황화는 어떤 고정된 틀이 있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상황화의 성공적인 사례를 통하여 많은 모델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의 모델이 다른 상황 속에서 성공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단, 상황화의 성경적인 원리만큼은 분명히 성경에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상황화의 원리 가운데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선교사 개인 혹은 현지에 정착하고 있는 선교회의 모습과 자세이다.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적용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선교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오셨지만 무죄하시고 완벽하신 구세주로서 오신 신이시며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항상 필요로 하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성육신의 원리를 적용한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자세와 그 가슴을 우리의 자세에 적용시킴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와 같은 완벽한 문화적 동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유일무이한 구속적 사건이므로 선교사의 성육신이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면 틀린 것이며 불경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단, 선교에 있어서 성육신을 언급하는 것은 선교사의 자세가 성육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표현할 수 있는 진실된 사랑과 동점감(empathy)을 가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교사가 현지의 삶 속에 들어가 최선의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성육신의 원리는 따라서 형식적인 원리가 아니라 내면의 원리인 것이다. 선교사가 다른 문화권에서 경제적 혹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낮아진 삶을 사는 것을 성육신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것도 매우 부정확한 표현이다. 이러한 낮아짐은 하나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교사의 내면의 진실이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다. 선교사는 과연 현지의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그리하셨던 것처럼 존중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자신의 삶의 일부로 느끼고 끌어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끝으로 상황화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오늘날의 상황화 이론 혹은 상황화 신학에 대한 논의는, 많은 경우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의 교회의 형식(form)과 의미(meaning)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피선교지에서의 대부분의 교회는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여 먼저 설립이 되고 한참 후에 가서야 현지 지도자들이 그 교회들을 떠맡게 되는데, 교회의 지도력이 현지 지도력으로 이양될 때에 바로 이 상황화의 이슈가 대두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화 신학의 이슈는 “복음의 의미 전달”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과제보다도 교회의 형식과 의미의 영역에 더 그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데 이것은 성경적인 상황화의 원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필자의 입장인 것이다.
상황화는 그 성경적인 원리 면에서 고찰하여 본다면, 앞에서 이미 다룬 것처럼, 근본적으로는 복음의 의미를 수용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황화는 수용자의 문화적 의미들(cultural meanings)을 깊이 연구하고 고려하여 그 결과 그 수용자의 문화적 형식과 의미들을 복음의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복음의 의미가 그 문화적인 토양에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황화라고 하는 작업은 또 다른 중요한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복음의 의미가 제대로 수용자들에게 전달되게 되면, 복음은 수용자의 문화의 심층구조인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다 주기 시작한다. 복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힘이요(cf. 롬 1:16) 성령의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황화라고 하는 것은 이제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통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현지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가를 목격하면서 성령께 많은 여지를 드리는 신앙의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황화는 복음의 정확한 의미전달을 위하여 현지의 문화적 형식과 의미들을 최대한 고용하고 활용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현지 교회에 하시는 일들에 민감히 반응하고 순종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구체적인 선교 방법에 관하여서는 Roland Allen과 Dean Gilliland의 저서들을 보라.)
교회 설립 이후의 상황화의 과제는 교회가 과연 어떻게 복음의 의미를 유지하고 또 복음을 표현하는 공동체로 발전하고 성장할 것인가 하는 점에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즉, 그 교회의 신앙고백이 그 표현에 있어서 자기 문화권에 적합하며, 동시에 변화와 도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들인지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서구적인 모습을 더 갖고 있는가 아니면 토착적인 모습을 더 갖고 있는가 하는 이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막 탄생한 교회가 진정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는 예배 공동체임과 동시에 또한 “선교” 공동체인가 하는 질문을 교회 설립 초기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은 그 자체가 선교적이며 선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이 어떠한 문화적인 상징들과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황화의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번역한 신앙고백서에서 신앙 고백이 끝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앙의 고백은 그 자체가 바로 선교적이며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현지 지도력을 돕는 입장에서 현지 지도자들과 함께 그 문화적인 표현들에 대하여 깊이 연구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사의 입장은 실제로 “상황화”를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현지 지도자의 역할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지의 상황화의 이론을 외부에서 온 선교사들이 개발하고 선교지에 적용하고 있는 반면에, 그 지역 사회의 주체가 되는 피선교지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것을 선교지에서 종종 본다. 이것은 또다른 정신적 식민주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이점을 특히 주의하여야 된다고 믿는다. 물론 소위 말하는 신학적 “혼합주의”의 오류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실제로 그러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지만, 복음의 의미가 성경적으로 전달이 되고 있다면, 그리고 이에 대한 점검의 장치가 정확하기만 하다면, 상황화는 복음이 그 토양에서 복음적으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초기에 복음의 의미가 정확히 성경적으로 전달되었고 그 뿌리를 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점검하는 일들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또 다른 한 시간 분량의 실제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본 강의는 시간과 지면의 제약상 이 부분은 다루지 않기로 한다. 결국 선교사들은 상황화 신학이나 이론들을 개발할 때에는 반드시 현지 영적/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4. 영적 전쟁으로서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 곧 인간의 구속(救贖)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영적이며 초자연적인 신적 역사이다. 인간의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정사와 권세”를 이기는 차원의 일이다 (cf. 골2:15). 즉, 힘 혹은 능력(power)과 관계된 영역의 일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이 “능력들(powers),” 즉, “정사”와 “권세” 등으로 표현되는 이 힘들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 “능력들”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그룸은 이 능력들을 사단의 악의 세력으로 봄으로써 “정사”나 “권세” 등으로 표현되는 성경적인 용어는 인간 사회의 제도 및 문화를 통하여 역사하는 시스템(system)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다 (Hendrikus Berkhof, Michael Green, Walter Wink, Bill Kellermann 등). 또 다른 그룹의 학자들은 이 능력들을 인격적인 악한 영들로 해석한다 (Peter Wagner, Tom White, John Dawson, Frank Peretti, Clinton Arnold 등). 다른 부류의 학자들의 해석이 있지만 대체로 이 두 가지로 대별된다고 보인다. 필자의 견해는 성경의 각 단어 그 자체는 문맥에 따라서 전자 혹은 후자를 뜻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두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자세한 신학적 및 해석학적 논의는 참고도서 목록에 있는 저서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러나 명백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정사와 권세들로 나타나는 “능력들”은 분명히 영적인 차원의 것들이며 따라서 선교는 영적인 차원의 사역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과 교회사 속에서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이 선교를 방해하는 엄청난 힘의 세력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초자연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하는 세력들, 곧 사단의 세력에 대한 승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선교를 수행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확신을 갖고 나가 그 승리를 선포하는 행위가 된다. 결국은 확신의 싸움인 것이다. 이것은 1장에서 언급한대로 바울이 고린도 후서 10장에서 이미 확언한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인간들의 사상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유일성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도 선언 혹은 선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서 복음 전달자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궁극적으로는 확신의 대결이다. 복음에의 확신, 즉 구원의 확신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자신감이 곧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영적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나오는 “담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법적인 허락 혹은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성소에 나갈 수 있는 담력이라 함은 곧 구속의 확신과 이에 따른 하나님을 향한 자신감을 내포한다.) 이 영적 확신은 복음 전달자가 극한 어려움 속에 빠져 있을 때에도 복음의 증거를 멈추지 않도록 하며, 결국은 교회의 선교의 실질적인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이 확신을 갖고 있을 때에 교회의 선교는 다음의 몇 가지 대결을 치루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선교는 선교의 내용인 복음에 대한 확신 때문에 진리의 대결이 불가피하게 된다. 만일 복음의 사건이 사실이라면 이 복음의 전달자는 확신 없이 선교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 21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상대주의의 세대를 사는 우리들은 확신이 없이는 선교의 깊은 곳을 들어갈 수가 없다. 하나의 실례를 든다면, 이슬람권에 들어가 무슬림들과 깊은 사상적 대화와 논쟁을 경험한 서구의 어느 선교사는 결국 무슬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무슬림 사상가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과 심오한 종교 토론을 하였던 선교사 출신인 미국인 선교학 교수 한분은 무슬림들과 논쟁할 때마다 항상 확신에 도전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그만큼 복음 전달자는 타종교의 지도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확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 확신의 대결, 곧 사상전(思想戰)을 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진리의 대결을 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인격이나 문화를 모독하는 행위나 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확신이 강할수록 오히려 감정의 조절은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확신 속에서 두려움없이 그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때때로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인들의 삶의 배경인 문화와 종교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오직 그들의 변화에만 관심을 갖고 일방적인 선교를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들의 배경과 세계관의 심층구조를 잘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리의 대결은 오히려 연기(延期)되어 버리는 것이다. 내면에 숨겨져 있는 비진리는 들어날 필요가 있으며 진리 앞에서 완전히 파쇄(破碎)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서 복음전달자인 선교사는 복음수용자의 내면의 깊은 곳을 이해하기 위한 종교문화인류학(religio-cultural anthropology)적 연구 및 심리문화인류학(psychological anthropology)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피선교지의 복음없는 이들의 내면이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혹은 무엇이 진리를 수용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가 하는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중요한 선교의 도구들이 된다.
둘째로, 선교는 또 좁은 의미에서의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을 피할 수 없다. 즉, 영적인 존재들의 방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며 이 세상을 꾀는 자이기 때문에 그와 그의 졸개들인 악령들은 비진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가 선포될 때에 어두움의 세력들이 그 정체들을 들어내는 경우를 선교 현장에서 우리는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능력 대결은 진리의 대결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능력의 대결을 단순히 신유나 축사와 같은 기적적인 현상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너무 편협한 정의가 될 것이다. 능력의 대결은 확신의 대결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능력의 나타남은 곧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영광과 주권의 나타남이다. 능력 대결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승리를 전제한 확신의 표현인 것이다. 그 결과 때로는 한 징표로서 많은 이적들이 따르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능력의 대결을 진리의 대결과 분리하여 추구하는 이들은 자칫 잘못하면 이분법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특별히 이 점을 유의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영적 전쟁에 있어서 또 한가지의 모습은 경건한 삶의 대결이다. 이것은 진리 및 능력의 대결과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현지인들의 눈은 예민하다. 타문화권에서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많은 삶이다. 선교사의 삶은 항상 노출되어 있는 삶이다. 피할 곳이 없다. 유명인들이 끼치는 도덕적 차원에서의 영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선교사의 삶은 영적인 영향력을 항상 갖고 있다. 따라서 선교사는 그가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현지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표현들을 취하여야 하며, 이 표현들은 선교사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선교사는 그의 충성된 일군이라는 메시지를 직접 간접으로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슬람권이나 공산권과 같은 지역에서는 드러내어 놓고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된 삶을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매우 간접적으로라도 선교사의 삶이 어떤 확신에 근거하고 있음을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곧 성령의 열매의 삶이며 타자를 위하여 헌신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삶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의 표현은 될 수 있는대로 현지에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의 삶의 모습과 비슷할 필요가 있다. 즉 선교사는 (그가 목사 선교사이든 아니면 비목사 선교사이든간에) 영적인 권위가 있는 자로서 비추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극도로 세속화된 소수의 서구 사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2/3세계는 영적인 세계가 아직도 그들의 중요한 삶의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선교사의 모습은 영적인 모습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표현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 그 내적인 내용이 현지 영적 지도자들과 비교될 수 있도록 그 삶의 모습과 내용들을 많이 연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경건한 삶의 대결은 곧 복음의 메시지로 언젠가는 연결되게 될 것이다.
5. 맺음말
필자는 본 강의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교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매우 기본적인 원리들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간단히 살펴보았다. 바울의 선교 철학의 두 축을 중심으로 하여 선교가 곧 복음 메시지의 내용이며 따라서 선교의 방법도 복음 안에 있는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본 것이다. 또 이 선교는 곧 영적인 차원의 일이므로 영적인 대결이 불가피한데, 영적 대결은 확신의 대결이며 이것은 곧 진리, 능력, 경건의 대결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강조하였다.
이제 필자의 두 번째 강의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어떻게 선교의 대상인 “인간”을 이해할 것인가를 이슬람권에서의 선교를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무슬림들)을 문화인류학이라고 하는 연구도구를 사용하여 그 내면의 심층구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의 소원은 본 강의들이 선교사님들이나 선교사 후보생들 그리고 선교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에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자극과 도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특별히 선교사로 헌신하는 분들은 더욱 준비할 각오와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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