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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70.8>
그 남자 이야기 (1)
여 정 건
1. 사람들은 들꽃이 예쁘데요. 왜 그럴까요?
뽀얀 먼지를 달고 달려온 버스는 망향사 입구에서 정차했다. 초가을 등산객들이 내리자 버스 안은 텅 비고 운전사만 남았다. 운전사는 버스 안을 휘둘러보고 차를 몰았다. 버스는 뽀얀 흙먼지 바람을 남기고 산 끝자락을 돌아 사라졌다. 정류장에서 대로를 건너가자 경사진 좁은 등산로가 나왔다. 등산로는 험준했다. 백옥처럼 하얀 돌과 검고 은빛이 박힌 주먹만 한 돌들이 불규칙하게 솟아있어 걷기가 매우 불편했다. 아마 장마철이나 비가 오는 날 흙은 쓸려가고 돌만 남은 모양이었다.
협곡을 따라 쭉쭉 뻗은 암갈색의 전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전나무에서 풍기는 깊고 은은한 피톤치드와 흙냄새가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피톤치드 향을 마시러 오는 것 같다. 가을 햇살이 전나무 사이로 빗금을 긋고 내려와 작은 나무들 잎사귀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이름 모를 벌레들이 낙엽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에 바스락 소리는 벌레들이 ‘내가 있으니 조심’ 해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골짜기 실개천은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내려 갔다. 거기엔 작은 물웅덩이가 보였다. 물에 잠긴 떡갈나무 잎 밑에 가제가 있다. 가제는 긴 더듬이를 움직였다. 가제는 넓적한 다리를 흔들며 송사리를 부르는 듯했다.
무성한 나무숲을 지나자 협곡과 준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파른 계곡엔 웅장한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등산로를 가로막고 불끈 솟아있다. 이 바위를 타고 오르면 곧바로 산 정상이다. 사람들은 안전을 기해 암벽을 우회전해서 중봉을 향해 올라간다. 등산로는 앞사람의 궁둥이를 치받치고 올라야만 했다. 한발 딛고 멈추어 숨을 몰아쉬기를 수없이 해야만 한다. 산 중턱에서 잠깐 서서 숨을 고르고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내처 정상에 오르면, 일망무제의 전망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솟아오른 산봉우리는 마치 바다의 거친 파도가 겹쳐 넘실거리는 듯했다. 하늘과 산의 경계를 짐작할 수가 없다.
산정상의 솔솔바람은 몸을 휘감고 돌아간다. 산과 산 사이에 가라앉은 회색 구름 사이로 괴이하게 생긴 노송들은 겁 없이 절벽 바위 끝에 몇 그루가 태연하게 서서 새를 부르는 듯 가지를 흔들고 있다.
영수는 마당바위 모서리에 강을 바라보고 걸터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싸 온 음식을 먹고들 있다. 영수도 등산로 입구에서 사 온 김밥 한 줄을 먹었다. 서쪽 산 밑에 작은 호수가 있다. 호수를 바라보며 세워진 별장 몇 채가 보였다. 별장들은 초가을단풍에 취한 듯 지붕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발밑에 펼쳐진 계곡의 물줄기는 더욱 아름답다. 맑은 계곡물은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하며 흘러간다. 그윽한 숲속의 향기는 바람에 밀려 골짜기 기류를 따라 상승한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향에 취해 야호 소리를 지른다.
차디찬 강바닥에 들어앉은 망향산 그림자는 뭉게구름을 덮고 있다. 산 그림자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조용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산 그림자가 사라지는 모습이 자기 모습 같아 가슴에 고드름을 박는 것처럼 찡해왔다. 황홀난측하여 마음을 사로잡던 황혼마저 산마루로 넘어가고 있다.
골짝 기마다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산을 알리는 신호가 울린 것처럼 등산객들은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정상엔 영수뿐이었다. 마지못해 엉거주춤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그는 빠른 코스를 택하여 하산할 생각을 했다. 오목눈이 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긴 꼬리를 껍죽대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영수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 여인의 가냘픈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새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영수는 숨을 죽이고 양손을 귀에 바짝 붙이고 들었다. 틀림없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살려 주세요~”
가냘픈 목소리는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져 왔다.
“살려 주세요~”
영수는 숨죽여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여다. 애달프게 부르짖는 목소리를 쫓아가며 주위를 살폈다. 분명히 여자의 울음 석긴 목소리였다. 영수는 소리를 따라 발을 옮겼다. 오목눈이 새도 따라왔다. 굵은 모래가 깔린 바위는 빙판처럼 미끄러웠다. 주위에는 빨간 글씨로 『접근금지』 푯말이 세워져 있다. 살려달라는 소리를 쫓아 바위 끝까지 다가갔다. 등산로에서 훨씬 벗어난 3m 절벽 아래 바위틈 사이에 걸쳐있는 여자가 보였다. 영수는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영수는 바위 모양과 연결을 자세히 살피고 머릿속으로 진로를 설정했다. 도마뱀처럼 바위에 몸을 찰싹 붙이고, 내려가며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또한, 다람쥐처럼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몸을 날리며 신속하게 내려갔다. 작은 바위는 절벽 바위틈 사이에 불완전하게 보였다.
그녀의 왼뺨에서 흘러내는 선혈에 흰 티셔츠는 붉게 물들었다. 여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창황실색이었다. 공포에 질려 부득부득 이빨을 교치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겨우 의지한 바위는 움직일 때마다. 곧 떨어질 듯이 흔들흔들했다.
“어쩌다가?”
“미끄러졌어요.”
“저런.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
“아파도 참아요. 움직이면 둘 다 죽습니다.”
여자는 신음하듯 길게 대답했다.
“음~ 네~.”
영수는 여자를 번쩍 안아 올려 목말을 태웠다. 여자는 상상외로 가벼웠다.
“아프지 않은 손으로 내 이마를 단단히 잡으세요, 그리고 몸을 최대한 내 목에 찰싹 달라붙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자는 신음하듯 대답했다. 영수는 내려왔던 바위를 타고 이쪽에서 저쪽 바위로 옮겨가며 올라갔다. 안전한 장소에 내려놓자 여자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왼발과 왼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뭇가지를 꺾어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부목을 대고 러닝셔츠를 벗어 고정했다. 또한, 발목에서 무릎 밑까지 부목을 대고 허리띠로 고정했다. 부목을 대며 보니까. 등산 차림이 아니었다. 얄팍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서울은 화려한 불빛의 바다였다. 여자를 업고 험한 길을 내려가기란 쉽지가 않아 보였다. 시간이 걸려도 안전을 위해 위험하지 않은 길을 택했다.
어둠은 골짜기를 덮고, 하늘엔 하나둘씩 짝지어 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오자 나무 사이사이로 총총히 박힌 별들이 보였다. 잔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고 나뭇가지는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냈다. 이름 모를 새는 나뭇가지에 앉아 구슬피 울며 돌아오지 않는 짝을 부르고 있었다.
등산로는 희뿌옇게 보였다. 영수는 여자를 업고 더듬거리며 비탈길을 내려왔다. 등에 업힌 여인은 영수가 발을 옮길 때마다 다친 손발이 흔들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발소리에 민감한 새는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가고, 작은 짐승들은 바스락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등에 업힌 여인은 깜짝 놀라며 뭐냐고 묻곤 했다.
영수는 친절하게 아기에게 말하듯이 푸드덕 소리는 새가 놀라서 날아가는 소리고, 바스락 소리는 들쥐나 토끼들이 놀라서 도망가는 소리라고 말해줬다. 그때마다 여자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냐고 물었다. 군에서 야간 산행훈련 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굴속 같은 험한 산길을 벗어나자 대낮 같은 마을의 가로등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제야 그들은 안도의 긴 한숨을 쉬었다.
마을 앞 도로에는 드물게 자가용이 지나갔다. 작은 다리를 건너 십 여분 걸었을 때야 4차선대로가 나왔다. 길게 늘어선 가로등이 나타났다. 건널목에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가 있다. 영수는 큰소리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중앙선을 넘어 그들 앞에 차를 세웠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물었다.
“가까운 외과병원이요.”
잠시 후에 병원응급실 앞에 택시를 세웠고, 응급실 요원들이 달려 나왔다. 검사결과는 한 시간이 넘어서 나왔다. 요골과 경골에 폐쇄성 골절이라고 말했다.
영수는 여자에게 가족에게 연락하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밤 두 시가 넘어 여자 가족에게 연락했다.
“집에서 가족이 온다고 했어요. 전 이만 가겠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연락처를 주세요.”
영수는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며.
“빠른 회복을 빕니다.”
강 여사의 심리적 긴장 상태가 폭발 직전까지 상한선을 긋고 숨만 헐떡거렸다. 15층에서 양주잔을 들고 내려다보았지만, 영수는 보이지 않았다. 찻길에는 라이트 빛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 앞 슈퍼도 불을 끊지 오래되었다. 양주를 마실수록 마음은 수묵화처럼 어두워져 왔다. 매일 보는 한강 다리의 화려한 조명도 오늘은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다. 한참 나이에 혼자 자리에 드는 게 싫었다. 홀짝거린 양주에 뇌는 마비되고 불안은 한 옥타브 높아져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영수는 새벽 세시가 훨씬 넘어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잠이 든 강 여사를 살며시 안고 안방 침대 위에 눕혔다. 옷을 훨훨 벗어 침대 옆 의자에 던졌다. 하얀 러닝셔츠와 팬티 차림으로 강 여사 옆에 누었다.
새벽에 눈을 뜬 강 여사는 빙긋이 웃었다. 가로누운 영수의 쭉 뻗은 다리와 잘 다듬어진 근육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 조각품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인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넓적다리 근육을 더듬었다. 그의 살결은 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따듯했다. 영수의 몸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영수의 뺨에 살며시 입술을 댔다. 그의 따듯한 온기가 입술을 통해 전이되어오면서 욕정도 뒤따라왔다. 그녀는 방문을 나서며 입가에 야릇한 표정을 새겼다.
식탁에 상을 차리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은 푸석하며 양 눈 밑으로 거무튀튀하게 다크서클 현상이 보였다. 거울에 바짝 붙어 인지로 살짝 눌러보았다. 푸석한 눈 밑은 움푹 들어갔다가 한 참 후에 나왔다. ‘저놈이 늙었다고 나를 피하나! 하기야 20살 차이니까.’ 하면서도 강 여사는 불안해 오기 시작했다.
‘술도 마시지 않고 늦은 시간 어디서 무슨 짓을.’ 여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자가 생겼나?’ 눈앞이 아찔해졌다. ‘사람을 붙여 뒤를 미행해야겠어.’ 상을 차려놓고 평상시처럼 미장원으로 출근했다. 강 여사는 미장원에 출근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었다. 사람 미행은 불법이기 때문에 행동 비용을 많이 요구했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일 처리를 해 주겠다는 말에 의뢰했다.
영수는 미군 특수부대 부사관 출신이다. 제대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보육원 출신이라 믿기 어렵다는 솔직한 말은 안 하지만, 모두가 연락드리지요. 했다. 영수는 오피스텔 월세방에서 몸을 뒹굴고 지냈다. 두 달 동안 자란 머리는 단정하지 못했다.
영수는 어느 날 오후, 면접을 보기 위해 머리 손질을 하러 오피스텔과 마주 보이는 한마음빌딩 이 층 미장원에 갔다. 영수가 미장원 문을 열자 미장원 안에는 여자 손님들로 가득했다. 화사한 차림의 미녀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영수는 머뭇거리며 뒷걸음쳤다. 미용사가 쪼르륵 따라오며 “어서 오세요.” 했다.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주인인 뜻한 여자가 사뿐히 발을 옮겨 거울 속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미용사에게 말했다.
“저쪽 끝 손님 머리를 봐 드려.”
강 여사는 머리 손질을 하러 왔을 때, 첫눈에 영수에게 마음이 쏠렸다.
거울 속 미용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살을 그녀에게 던졌다. 그리고 엉덩이를 흔들거리며 지정해준 구석진 장소로 갔다. 거울 속주인 여자는 윙크하듯 눈웃음쳤다. 밉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인은 아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영수는 빙긋 웃었다. 강 여사는 귓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떤 형을 원하시나요?”
편하게 알아서 해달라고 했다.
“어디 사세요?”
“길 건너 오피스텔.”
강 여사는 휴대전화기를 내밀며 전화번호를 입력해달라고 했다. 영수는 휴대전화기에 번호를 입력해줬다. 강 여사는 휴대전화기를 받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영수의 휴대 전화기에서 자이언트 주제곡이 휘파람으로 경쾌하게 울렸다. 거울 속 강 여사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내가 확인했어요. 호호~. 벨 소리가 특별하군요. ”
영수는 눈을 감고 편안하게 앉았다. 강 여사는 영수의 얼굴에 박힌 티라도 찾으려는 듯 쳐다봤다. 계란형의 자그마한 얼굴은 귀엽게 보였고, 가무잡잡한 피부는 외국인을 연상케 했다. 코는 오뚝하게 솟았고, 눈썹은 유난히도 숱이 많았다. 쌍까풀은 선명하게 선을 긋고, 속눈썹도 길게 뻗었다. 귓가에서 강 여사의 숨소리와 가위 소리가 리듬에 맞추어 경쾌하게 삭삭 소리를 냈다. 영수는 살며시 잠이 들어있었다.
“눈떠보세요. 어때요?”
“마음에 듭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강 여사의 미용 연출이 소문나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그즈음, 영수는 운전면허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택시 운전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연수를 끝내고 오후에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려고 냄비에 물을 받았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그때 휴대 전화기에서 휘파람이 경쾌하게 울렸다. 아니 휴대전화기를 구매하고 두 번째 울렸다. 첫 번은 미용실 여자가 확인한 전화였다. 취업 면접을 보면 전화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전화를 구매했지만,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길 건너 미장원.”
웬일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호호거리며 올라가도 되냐고 물어왔다. 층을 알려주며 올라오라고 했다. 잠시 후 띵 똥 벨이 울렸다. 싱크대와 식탁이 한쪽 구석에 놓여있다. 일인용 침대 머리맡에는 작은 책상이 있고 그 위에 알 수 없는 몇 권의 영어책이 보였다. 출입문 옆에 샤워할 수 있는 화장실 문이 빼 꾸미 열러 안이 보였다. 여자는 제자리에 서서 몸을 돌려 방 구경을 했다. 도복을 입고 미군과 찍은 사진과 낙화훈련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는 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가 물었다.
“미군에게 태권도를 가르쳤나요?”
“네.”
“낙하산 부댄가 거기도 계셨나 봐.”
영수는 대답 대신 그녀를 쳐다보고 빙긋 웃었다. 그녀도 눈웃음치며 싱크대 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물이 팔팔 끓었다. 냄비를 쳐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물이 끓고 있어요.”
영수는 라면 봉지를 들고 여자에게 물었다.
“라면······?”
그녀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저녁 살게. 나가요”
그녀의 눈빛은 애교스러운 별처럼 반짝거렸다. 거절할 틈도 없이 그녀는 가냘프고 뽀얀 손으로 가스 스위치를 돌려 껐다. 용암처럼 끓던 물방울은 수면 속으로 사라졌다
“이름이 뭐죠?”
여자는 당돌하게 이름을 물었다.
“저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영수.”
“난, 강 옥수, 그냥 강 여사라고 불러요.”
영수는 순간 생각했다. ‘이래도 되나?’ 여자는 앞장서 서 방문을 나서며.
“뭘 먹고 싶은지 말하세요.”
강 여사는 영수의 말도 듣지 않고 앞장서서 승강기를 탔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택시를 잡았다. 강 여사는 택시 안에서 휴대전화로 식당 좌석을 예약했다. 10분 후에 도착한 곳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화려한 일식집 같았다.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미국 시카고의 셰드 수족관처럼 홀 중앙에는 50평 정도의 큰 유리 수족관이 보였다. 수족관 안에는 희귀한 종류의 어류들이 놀고 있었다. 안내인의 말투로 보아 이 여자가 단골로 다니는 일식집이라고 짐작했다.
단정한 복장을 한 안내원이 앞장섰다. 안내원을 따라 꼬불꼬불한 통로를 지나자 별채가 나왔다. ‘ㄷ’자 모양의 한옥 중앙에는 원형의 정원이 보였다. 정원엔 홰나무가 버티고 있었고. 나비 모양의 황백색 꽃이 빽빽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팔랑거렸다.
안내된 방은 조용했다. 특이하게 실내가구는 우아하지도 않았다. 단출하면서 고상한 분위기는 안전감을 주었다. 작은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는 2인용 식탁이 놓여있다. 안내원이 벽에 붙은 비밀스러운 여닫이문을 열자 작은 방이 보였다. 방에는 침대가 있고 화장실과 욕실 푯말이 보였다. 안내인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뒷걸음으로 방문 앞까지 가서 다시 묵례하고 옆으로 서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앉아요.”
강 여사는 의자를 당기며 옆에 앉으라고 했다. 영수는 계면쩍어하며 의자를 당겨 마주 앉았다. 강 여사는 영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그때 음식이 들어왔다. 넓은 식탁 위에는 작은 접시에 음식이 쪼금씩 맛깔스레 담겨 식탁이 풍성하다기보다는 아름답게 보였다. 간장 베이스로 짜지 않게 적당히 익은 식감들 우엉과 돼지 삼겹살부터 생선회가 풍미를 더 해주었다. 여자는 위스키 잔에 양주를 따르며 물었다.
“몇 살이지요?”
“28살.”
“내가 나이가 많으니 누나라고 불러줘.”
영수는 입가를 움직여 웃었다. 강 여사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물었다.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묻고 여자를 품고 잔적이 있느냐고도 했다. 고향은 어디며 부모님은 살아 계시냐고도 물었다.
영수는 지극히 눈을 감고 대꾸도 하지 않자. 그녀는 말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현 직업이 뭐야?”
“제대 후에 직업을 못 가졌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려고 하는 중이죠.”
“택시! 그건 위험해.”
조잡한 이야기를 하며 술잔이 오갔다. 음식이 몇 차례 새로 들어왔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정원 나뭇가지에 참새 떼들이 몰려와 짹짹거리며 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화장실에서 나온 강 여사는 침대에 누워서 영수를 바라보며 오라고 손짓했다. 영수는 무심히 강 여사를 쳐다보았다. 강 여사가 빙긋이 웃으며 영수를 향해 말했다.
“잠깐 눈 좀 붙일게.”
영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정원의 나무와 참새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정원을 가운데 두고 독실 방이 보였다. 나이 많은 영감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조금 있더니 중년의 여인이 아들 같은 젊은 청년과 팔짱을 끼고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세상은 요지경 속이라고 영수는 생각했다.
한동안 정원을 바라보던 영수는 고개를 침대 쪽으로 돌렸다. 침대 위에 놓인 허연 허벅지는 영수의 가슴에 불을 지른 듯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창가에 어깨를 기대서서 팔짱을 끼었다. 침대 쪽을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강 여사의 숨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오금이 저린 사람처럼 정원을 보며 서성거렸다. 그때 침대 옆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강 여사는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고 “예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심부름하는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강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잘 먹었어요.” 하며 핸드백에서 몇 장의 만 원권 지폐를 꺼내 주었다. 강 여사는 영수 앞에 바짝 다가서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놈을 손안의 호두알 굴리듯 조몰락거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강 여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발돋움해 영수의 목을 끌어안았다.
“동생 나 좀 꼭 안아줘.”
영수는 강 여사를 가슴에 품었다. 강 여사는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입술을 더듬었다. 영수는 피하지 않았다. 강 여사의 혀는 입술을 헤집고 깊숙이 들어와 이빨과 혀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받아들인 여자의 혀는 전류처럼 짜릿짜릿했다. 몽롱한 꿈길 속을 걷는 듯도 했다. 뜨거운 피는 빠르게 온몸을 돌고, 더운 입김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늦여름 서산을 넘어가는 태양의 열기 속에서 강 여사 몸은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떨어져 시치미를 떼고 강 여사가 대답했다.
“예. 나갑니다.”
밖은 어둑어둑했다. 택시를 잡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택시 뒷좌석에 앉았다. 서로는 말이 없었다. 강 여사는 슬그머니 영수의 손을 끌어다 손깍지를 끼었다. 그리고 영수의 어깨에 얼굴을 얹었다. 속삭이듯 말했다.
“나. 술 취했나 봐. 졸려.”
“······.”
강 여사는 택시를 세웠다. 멀리 영수의 오피스텔 건물이 보였다.
“동생.”
“예.”
“우리 모텔에서 눈 좀 붙이고 가자. 나 정말 졸려.”
백미러 속의 택시기사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기사는 눈치 빠르게 모텔 앞에 차를 세웠다. 강 여사는 영수의 팔짱을 끼고 거침없이 모텔 문을 들어섰다. 강 여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산대에 다가서 계산을 했다. 남자 종업이 말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렸다. 복도는 어둠침침해 사람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종업원은 구석진 복도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저기 의자에 앉아 계시면 청소 후 안내하겠습니다.”
의자를 향해가던 강 여사는 발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영수를 보고 눈웃음을 보이던 강 여사 눈에 독기가 서렸다. 강 여사는 영수를 비켜서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영수는 뒤돌아서서 달려가는 강 여사를 멋졌게 쳐다보았다. 어둠침침한 속에서 남녀가 보였다. 강 여사는 소리쳤다.
“이것들이.”
마치 독수리가 양 날개를 활짝 펴고 병아리를 채듯이 양팔을 벌렸다. 남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야~ 이 새끼야! 이게 사업이냐?”
조용하던 복도에 강 여사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남녀의 비명이 복도에 가득했다. 몇 개의 방에서 문을 살그머니 열고 반짝이는 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방을 청소하던 종업원이 달려와 말렸으나 강 여사 손아귀에 잡힌 머리는 풀지 못했다. 곧이어 경찰이 달려왔다. 영수는 빠른 걸음으로 층계로 내려와 밖으로 나왔다. 강 여사는 숨을 헐떡거리며 두 손을 비벼 머리카락을 털며 모텔 문을 나왔다, 그 뒤로 남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경찰에 끌려 나왔다. 그들은 경찰차에 올라탔다. 차는 사이렌 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모텔 사건이 벌어 진지 며칠 지나서였다. 늦은 밤 영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 동생 나야.”
“늦은 시간에 웬일로?”
“잠깐 내려와.”
영수는 추리닝 차림으로 내려왔다. 가로등과 초승달 달빛에 화사하게 웃는 강 여사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영수 앞에 바짝 다가섰다.
“우리 술 한잔해!”
영수는 강 여사를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옷 좀 갈아입고······.”
강 여사는 괜찮다며 택시를 잡았다. 퇴근 시간이라 차도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 도착한 곳은 강변 고층 아파트 단지였다. 아파트 단지 내 곳곳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자리 잡고, 노송 주위에는 하얀 벤치가 놓여있다. 벤치에는 노인들이 대여섯 명씩 모여 앉아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지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택시는 강이 바라보이는 아파트 앞에 정차했다.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멈추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 평인지 짐작은 못 하지만 오피스텔 열 배는 되는 것 같다고 영수는 생각했다. 거실에는 가죽 소파와 이탈리아식 장식장이 벽면에 바짝 붙어있다. 널찍한 주방은 깔끔하게 보였다. 주방 벽면에는 처음 보는 주방용품들이 가득했다. 거실 창가에는 다과를 즐길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영수는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서울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 조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보였다. 색색의 조명들이 서로 어울려 다리를 더욱 아름답고 황홀하게 보였다. 강 위에는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떠가는 유람선은 한강의 밤경치를 더해주었다. 공원에도 많은 사람이 보여 있고, 젊은이들은 농구도 하며 자전거도 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난생처음 보는 한강 야경에 매혹되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리 와요.”
강 여사는 영수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식탁에서 풍기는 향긋한 냄새는 영수의 주린 창자를 유혹했다. 두 사람은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강 여사가 적포도주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와인을 한잔하며 천천히 스테이크를 먹자고.”
스테이크에 와인 몇 잔을 마시고 난 뒤 강 여사는 말했다.
“그 날 놀랬지!”
“······!”
“그 남자와 3년 동안 살았어.”
영수는 한강 다리 조명만 바라보고 있었고, 강 여사는 고백이라도 하듯이 계속 조잘거렸다.
“최근엔 사업을 한다며 돈을 물 퍼가듯 가지고 갔지만, 한 푼도 가지고 오지 않았어. 내가 준 돈을 가지고 여자들과 놀아 난 거야. 그래서 그날로 짐 싸서 내보냈어.
강 여사는 몇 잔을 자작하더니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내 마음을 달래줄 사람은 동생뿐이니 나를 포근히 감싸줘.”
영수는 강 여사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시로 술잔을 들어 강 여사 잔에 부딪혔다.
“누님 애들은 출가했나요?”
“출가? 난 결혼한 적이 없어. 지난번 모텔 남자와는 두 번째 동거남이었지. 난 고아나 마찬가지야.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강원도 산골에서 아빠와 엄마가 화전을 일구며 어렵게 살았어. 내 밑으로 초등학교 일학년 남동생 민구가 있었지. 낮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 들어 폭우로 변했어. 한밤중에 우주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면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어. 잠에서 깬 우리 식구는 꼭 끌어안고 벌벌 떨고만 있었지. 잠시 후 조용해졌어. 우리 식구는 고단한 몸을 방바닥에 눕혀 막 잠이 들 때였어. 신호하듯 번개 불이 찢어진 문틈으로 번쩍번쩍했어. 천둥소리가 방문 가까이서 폭탄이 터지듯 우르르 쾅 했을 때는 이미 우리 가족은 흙더미에 묻혔어.”
강 여사는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뽀얗고 가냘픈 손가락을 뻗었다. 보조 탁자 위 티슈 통에서 인지와 중지 사이로 티슈를 뽑았다. 눈썹에 아침이슬처럼 대롱대롱 매달리며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꼭꼭 찍어 닦아냈다. 그리고 술병을 들어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고 또 따라 마셨다. 연거푸 몇 잔을 마시고 고문당하는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며 꼭 담은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어디선가 잔인하게 고문하는지 아우성치며 울부짖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어. 실내는 어슴푸레하게 사물이 보였지. 목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지. 교탁이 보였고 그 위에 태극기가 보였어. 그 아래로 교훈 액자가 걸려있어서 나는 직감적으로 학교 교실임을 알았지. 교실 안에 부상자들이 아우성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했어. 나 역시 꽉 다문 덧니 사이로 않는 소리가 새어 나왔지. 산사태에 밀려 커다란 바위가 우리 집을 덮쳤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어머니 옆에 자던 동생도 바위에 깔려 아얏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어. 옆집 미굿이네, 그리고 마음씨 착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는 집도 차례로 바위에 깔려 처참하게 죽었다고 누군가 말해줬어. 모두 이십여 명이나 죽었다고 했지.”
강 여사는 한강 다리 불빛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강 물속에서 잃어버린 식구를 찾는 것처럼 젖은 눈동자로 강물 위를 더듬었다. 강 여사의 맑은 눈물이 양쪽 관자놀이 사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강 여사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해 보였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히 걸어가 진열장에서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영수는 한강물 위로 보트의 라이트 불빛이 물 위에서 출렁거리는 것과 보트 뒤로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몇 대의 보트가 한강 물을 뒤집고 다니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강 여사는,
“우리 좀 독한 술로 마셔요!”
강 여사의 외로운 마음을 알 것 같아 “좋아요.” 독주 한 잔을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강 여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잔을 비우고 말을 계속했다.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산사태 사건이 일어난 지오일 만이었어. 나도 모르게 큰 병원으로 옮겨 왔지. 왼쪽 빗장뼈 수술과 왼쪽 정강이뼈 오른쪽 경골 수술을 했어. 수술 시점에 혈액 내 세균 수치가 높아 곧바로 수술을 못 했었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연고가 없는 사망자는 모두 합장을 시켰데. 난 용기가 나지 않아 아직도 합장한 묘를 가보지 못했어.”
강 여사는 눈물이 가득 담긴 눈을 껌뻑거리자 낙숫물처럼 눈물이 뺨으로 흘러 떨어졌다. 영수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강 여사는 코맹맹이 소리로 “고마워.”라고 말하고 의자를 영수 옆으로 옮기고 나란히 않아 머리를 영수 어깨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병원에서 육 개월은 있다가 춘천 보육원으로 옮겨갔어. 보육원에서 삼 년이란 길다 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을 보냈지.”
강 여사는 티슈를 뽑아 눈물과 콧물을 찍어내듯 닦았다. 그리고 강 여사는 자기 술잔에 술을 채웠다. 미동도 없이 한강의 야경에 취해 앉아있는 영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영수가 물었다.
“그래 어찌 됐어요?”
“우리나라의 유명한 미용사가 나를 양딸로 호적에 올렸어, 원장 어머니 친구였지. 양 엄마는 혼자 살고 있었는데. 커다란 집에 일하는 사람이 둘씩이나 있었지. 양 엄마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자였어. 재산도 많은데 남자에게 매여 살 필요가 없다고 했어. 엄마는 많은 유산을 남겨줬지.”
“그래서. 누님도 양모처럼 인생을 즐기다 가겠다고요?”
“난, 아니야 동생이라면‧‧‧‧‧‧. 우리 첫날인데 분위기 있게 술 마시자.”
강 여사는 식탁 위에 골동품 같은 촛대를 올려놓았다. 촛대 뒤판은 나비가 날개를 쫙 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실내등을 모두 껐다. 촛불에 반짝이는 두 눈만 보였다. 한결 운치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술맛도 있는듯했다.
“운전 학원에 다닌다고 했던가?”
“네.”
“택시 운전 할 생각은 말아, 필요한 돈은 내가 줄게. 낮에 심심하면 산에 다녀. 내일 등산에 필요한 것 주문해 줄게.”
영수는 강 여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촉촉하며 반짝거렸다. 강 여사는 자리를 옮겨 영수 옆으로 와서 앉았다. 강 여사는 가슴을 부풀려 호흡을 조절했다.
“나하고 여기서 살면 어때? 언제고 떠나고 싶으면 간다는 말만 남겨 줘.”
그날 밤 영수는 강 여사의 품속에 안겨 28년간 고이 간직했던 동정남을 무릎을 꿇고 받쳤다. 그리고 강 여사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운전 연수를 하고 오후에는 망향산에 오르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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