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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 무슨 얘기. 누나랑 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독서실 구석에 숨어 뽀뽀했던 얘기?
유미: 야, 김동욱!
동욱: 키스였나, 뽀뽀였나? 가물가물해. 뭐였지?
유미: 뭐였긴, 실수였지.
동욱: 충동이었고?
유미: 객기였고, 십대들의.
동욱, 얼굴이 어두워진다. 한참 회상의 필름 어딘가를 더듬더니 고개를 흔든다.
동욱: 좀 더 용길 냈어야 해.
유미: (불안해서) 그만 하자, 구질구질한 얘기라면 이제 귀가 짓무를 것 같아.
동욱: 하나만 묻자.
유미: 묻지 마.
동욱: 하나만.
유미: 안 돼!
유미, 동욱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붙잡아 늘인다.
아파하는 동욱. 손을 떼는 유미.
유미: 괜찮, 니?
동욱: 안 괜찮아. 그러니까 묻자, 좀!
유미: 묻지 마, 좀!
동욱: 이대로 묻을 일 아니잖아.
유미: 이대로 묻어질 일도 아니지. (차갑게) 그러니까 굳이 파낼 것도 없어.
동욱: 두렵니?
유미: (극도의 불안으로) 아무 얘기도 꺼내지 마,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어주라, 응?
동욱: (상처받아서) 비겁하긴. 전화했어도 안 받았을 거다, 넌.
유미: 그래도 했어야 한다, 넌.
동욱: 정말 내 전활 기다렸어?
유미: 샤워할 때도 전화길 가지고 들어가야 했어.
동욱: 왜 니가 먼저 하진 않고.
유미: ……무서웠어.
동욱: 왜.
유미: (조용히) 안 받을까봐.
동욱, 유미를 끌어다 안는다. 얼른 그 품을 빠져나오는 유미.
동욱, 다시 잡지 않는다.
동욱: (힘없이 웃으며) 제일 가는 겁쟁이네.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너무 가혹해.
유미, 괴로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일어나 마네킹에게로 간다.
그저 웃음소리일 뿐인 웃음소리를 낸다.
유미: 유재석 나오는 예능 프로보다두 웃기지? 오십줄은 되는 인간들 하는 짓이, 꼭 눈에 뵈는 거 없는 철딱서니들 꼴이야. 자기들이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그 애들두 반대만 없었어봐. 그렇게 물고 빨고 뒈지고 난리 브루스를 쳤을 거 같아?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은 거야. 불륜도 불장난도, 금지된 거니까 부득부득 넘고 싶은 거라구.
동욱: 우리가 불장난이란 얘긴, 이제 철마다 트는 영화보다도 지루하다.
유미: 그럼 재밌는 얘기! 나 초등학교 다닐 때, 뽑기를 무지막지 좋아했다. 이렇게 백 원짜릴 넣구 끼리릭 뿅! 튀어나오는 동그란 캡슐, 꼭 기계가 알을 낳는 거 같애. 그걸 밟아 으깨는 맛에 빠져서, 동전만 생겼다 하면 쪼르르 문방구행이었어.
동욱: 나도 소싯적 그 맛에 재산 탕진 좀 했지.
유미: (깔깔 웃으며) 응, 재산 탕진. 그래서 하루는 울 엄마가 뽑기 금지령을 내렸어. 한 번만 더 하다 걸리면!
동욱: 오른 손목을 포기해라?
유미: (절레절레) 웨딩 피치 시청권을 박탈하겠다……!
동욱: (과장해서) 맙소사! 세상에! 웨딩 피치를!
유미: 가혹한 일이었지, 소녀에겐. 하아. 생각하니까 담배 땡기네.
동욱: 줘?
유미: 너 피는 김에 한 모금.
동욱,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유미에게 건넨다.
유미, 정말이지 꼭 한 모금을 빨아들이곤 되돌려준다.
유미: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은 거야. 꿈에서도 홈에다 백 원을 넣고 있어, 내가. 입 안이 바짝바짝, 수시로 손이 떨리고.
동욱: 오바.
유미: 뭐든 간절하면 그리 되는 것이야.
동욱: 몰래 한 적은?
유미: 있지! (회상에 젖어) 있지. 몰래 먹는 쪼꼬렛이 더 달잖아? (사이) 어느 날엔간 진짜 못 참겠길래, 아빠한테 통 사정을 했어. 원 없이 뽑기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럼 진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빠 엄마 심부름도 잘하겠다고 공수표를 빵빵 날렸지.
동욱: 아빠는 딸 편! 효과 있었어?
유미: 아빠가 만 원을 죄 백 원짜리 동전으로 바꿔 왔어.
동욱: (웃음을 터뜨리고 박수치며) 브라보! 아저씨답다!
유미: 그날 진짜 땅거미 질 때까지 울 동네 문방구란 문방구 뽑기는 내가 다 거덜냈다. 이만한 사과 박스가 가득 찰 때까지 뽑고 뽑고 또 뽑고.
동욱: 이야. 소원 풀이 제대로 했네.
유미, 탁자로 가 앉아 동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유미: 근데 이상해.
동욱: 응?
유미: 하나도.
동욱: 응.
유미: 진짜 하나도.
동욱: …….
유미: 기쁘지가 않았어. 조금도. 요만큼도.
동욱, 말없이 유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담배를 피운다.
유미, 마네킹을 바라보다 자조적으로 미소 짓는다.
유미: 실컷 만나고 실컷 자고 실컷 사랑하고. (잠시) 그 사람들, 행복해질까?
유미, 동욱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어 깊숙이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끈다.
동욱, 간절함을 담아 유미의 어깨를 붙든다.
동욱: 열일곱 독서실 그날부터 8년이야. 널 안기까지 8년이 걸렸어.
유미: (뿌리치며 왈칵) 대체 왜 전활 안 했냐구! 별생각이 다 들더라. 난 왜 얘 전활 기다리고 있나. ……하긴 우리가 언제부터 연락 꼬박꼬박 주고받은 사이라고. 하지만 우린……. 하 웃겨, 시발. 우리가 뭐지? 우리가 뭔데? 이제 잤으니까 연락해야 된다는 건가? 정유미, 추해. 원나잇 후에 쩔쩔매는 한심한 여자애 꼴이야! 내가, 김동욱이한테. 내가…….
동욱: 후회 해?
유미: (약해지지 않으려) 그래.
동욱, 담뱃갑을 손안에서 쥐었다 놓았다 한다. 괴롭게 말을 고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욱: ……무서웠어. 난 니 그런 대답, 그런 대답 듣는 게 무서웠어. 그래서 전화 못 했어.
유미: 동욱아.
동욱: 그날도 말했지만, 난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나도 그렇잖아?
유미: 김동욱.
동욱: 더 빨리 너랑 안 그런 게 후회돼 죽을 것 같더라, 난. 스무 살 때라도, 아니 열일곱 때라도 우리 후딱 일 치고 막말로 임신이라도 해버렸으면,
유미: (애써 웃으며) 끔찍한 소리 마.
동욱: 그랬으면 적어도 우리가 먼저겠지.
유미: (비아냥거리며) 이게 무슨 먼저 애 가지면 이기는 게임이야?
동욱: 봐, 넌 내가 한발 다가가면 꼭 이렇게 뒷걸음질을 쳐. 내가 전활 안 했기 때문에 넌 이리 한 발 올 수 있었던 거야. 언제나. 똑같아!
유미, 마네킹을 망연히 보더니 그리 간다.
슬픔으로 온몸이 깨질 것 같지만 눌러 참는다.
감다 만 전선줄을 잡고 만지작거리더니 동욱 쪽을 돌아다본다.
유미: 이거 이대로 친친 감을 작정이야?
동욱: ……궁리 중이야. 머리는 남겨 둘지.
유미 내가 좀 해본다?
유미, 동욱이 그러했듯 진지한 태도로 두 마네킹을 친친 동여맨다.
네 줄 정도 감더니 결심한 듯 손을 멈추고 동욱을 본다.
동욱도 말없이 유미를 바라본다.
유미: 나. 정우씨한테 프러포즈 받았어. 정식으루.
유미, 동욱 가까이로 와 앉더니 블라우스 속에 감춰졌던 목걸이를 꺼내 보여준다. 줄에 반지가 걸려 있다.
유미: (무릎 꿇고) 유미씨, 우리 이제 같이 살까? 어차피 할 결혼, 몇 개월 좀 앞당긴다고 손해 볼 것도 없겠지 싶은데. (웃더니) 하여간에 멋대가리라곤 약에 쓸 것도 없어요. 그래두 뭐, 첨부터 그 점이 맘에 들었던 거니까. 오케이! 해버렸어.
동욱, 오로지 반지만을 뚫어져라 본다.
유미: ……녹겠다. 계속 그러구 볼 거야?
동욱: (쓰디쓰게) 축하해. 잘 됐네. 다이아 끼워줄 남잘 그렇게 바라더니.
유미: 땡. 다이아 아냐.
동욱: 그럼?
유미: 크리스탈.
동욱: (놀라서) 그런데 오케일 했다고?
유미: 어어.
동욱: 누나 그 새끼 사랑해?
유미: (깔깔 웃으며) 얘 좀 봐, 사랑으로 결혼을 해?
동욱: 크리스탈에 넘어갈 니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야.
유미: 그래, 맞아. 크리스탈로 결혼할 거였음 죽어라고 공부하고 코 높여서 아나운서 된 보람이 없잖아.
동욱: 이마에 부채 넣고 앞트임한 얘긴 왜 쏙 빼?
유미: 개새끼. 누가 그 말 들음 나 성형 중독인 줄 알겠다.
동욱: 누가 그 말 들음 아닌 줄 알겠다.
유미: 그래, 나 중독이야! 가슴도 넣고 싶었는데, 지성미가 떨어질까 애써 눌러 참았다!
동욱: (웃으며) 지금이 딱 좋아. 내 손에 싹 들어오는 사이즈.
유미: 정우씨는 너보다 손이 커.
동욱: 시발. 샌님 같이 생긴 게. (문득) 그것도 크냐?
유미: 자, 따라해 봐. 매, 형!
동욱: 매형은 얼어 죽을. 다이아도 스킵하는 새끼랑 왜 결혼하겠단 건데?
유미: 그 사람을 알아, 나는. (반지를 만지작대며) 정우씬 완전히 자기 것이 된 거에만 투자를 해, 그게 돈이든 애정이든. 본인 소유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빗장을 풀고 쏟아지는 타입이거든. 그 점이 난 좋아. 안심이 돼. (반지 도로 블라우스 속에 넣는다.) 이 반지를 지니고 있는 한 이제 그 사람을 비롯 그 사람의 모든 건 다 내 차지가 돼, 미래까지도. 단단히 손에 쥐어지는 내 차지.
동욱: (빈정거리며) 장기 투자가 적성에 맞나 보네. 결혼 1주년에야 받을 다이아를 바라보고 크리스탈에 보험을 드는 여자라! 역시 너 다워. 형체도 없는 감정으로 가슴 들썩일 때보다야, 단단한 돌 하날 쥐고 있는 편이 너는 행복하겠지. (벌컥 화가 나서) 누나 너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유미: 속물이라고?
동욱: 속물이지! 허세지!
유미: (바로 받아서) 허영심이고? 그 대산 이제 닳아 빠져 화도 안 난다. 넌 내가 전공 상관없이 이대 택할 때도 그 말로 날 찔렀고, 다섯 달 알바해서 샤넬 2.55 손에 넣던 날도, 맞선 본지 일주일 만에 정우씰 애인 삼았을 때도 지금 그 얼굴로 날 비웃었어. 원하는 걸 얻으려고 손 뻗는 게 뭐가 나빠? 이렇게 골방에 틀어박혀 마네킹이나 주무르는 삶. 이게 꿈이고 열정이지, 너한텐? 난 아냐. 떳떳한 학벌, 폼 나는 직장, 잘 나가는 애인! 그런 게 난 필요해. 남들 앞에 네모 반듯, 반짝반짝 윤나게 닦인 나를 전시할 거야! 그리고 그 침 흘리는 낯짝들을 구경하는 거! 그게 내 꿈이야. 이게 내 추구고, 열정이고, 열망이야! (슬퍼서) 나한텐 보이는 게 진짜야. 진짜인 걸 갖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동욱: 넌…… 어떻게 됐어. 정상이 아냐.
동욱, 벌떡 일어나 마네킹에게 가더니 전선줄을 바쁘게 동여 감는다.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던 유미, 다가가 동욱의 등에 살짝 기댄다.
동욱은 동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체, 전선을 감을 뿐이다.
유미: 결혼식엔 올 거 없어. 너도, 아빠도, 아줌마도, 전부 다 내 인생에서 퇴장할 캐릭터들이야.
동욱: (묵묵히 전선을 감으며) 신랑한테 니 손 맡길 아버진 필요할 거 아냐.
유미: 그게 아빠가 맡은 마지막 역할이 되겠지.
동욱: 내 마지막 씬은 이렇게 너한테 등 빌려주고선 지금이야?
유미: ……아주 아주 나중에, 에필로그 정도에 슬쩍, 아주 슬쩍 등장하는 것 정돈 고려해볼게.
동욱: 내 생각엔 말야. 이대로라면 엔딩씬이 너무 밋밋해.
동욱, 유미를 매트리스 위로 쓰러뜨리고 그 위로 무너진다.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동욱의 손을 잡아 저지하는 유미.
유미: 미친놈……. 이런 엔딩은 시청률도 안 나와.
동욱: 그래?
유미, 동욱의 위로 올라탄다.
동욱, 웃음을 터뜨린다.
동욱: 이건 광고비 좀 나와?
유미: 글쎄…….
유미, 동욱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싼다.
유미: 이런 엔딩은 어때?
유미, 동욱의 목을 누른다.
동욱: 미동 않고 참아보지만 점차 숨이 막힌다.
유미의 팔을 부여잡고 힘으로 뜯어낸다.
몸을 일으켜 컥컥대며 숨을 몰아쉰다.
멍하니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유미.
유미: 일주일 전 널 안고 있는 내내 생각했어. 동욱이, 죽였음 좋겠다.
동욱, 뒤로 털썩 누워버린다. 크게 한숨을 쉰다.
유미: 너무 좋았거든. 니 입술이 내 몸 여기저길 닿던 순간, 니 손바닥이 내 머리카락을 헤집던 순간, 귓속에서 웅얼대는 목소리랑…… 니가 꽉 들어찬 그 느낌. 널 정말 이렇게 안고 있어도 되나.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기억 나? 육학년 때 한강 폭죽놀이. 반짝! 터진 후엔 길고 짙은 어둠뿐이야.
동욱: (혼잣말로) 반짝 행복…….
유미: 절벽을 알면서두 내달리는 말이 될까 두려웠어.
동욱: (쓸쓸하게) 왜 살려뒀어.
유미: (웃으며) 정말로 죽이면 나 두 사람이랑 다를 바 없는 거잖아? 철부지 늙은 로미오와 줄리엣. (잠시) 있지. 난 네가 몇을 상상하든, 그것보단 많은 남자를 상대해봤어. 이게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나 자면서 좋아본 건 니가 처음이다! 처음 알았어. 여자도 기분 좋을 수 있단 거.
동욱: 나도 처음이야, 좋았던 거…….
유미: 거짓말하면 손목 잘려.
동욱: 진짜야. 남자라고 무조건 다 좋은 줄 아냐.
유미: 몸이 꼭 맞아떨어진 모양이네.
동욱: (일어나 앉으며 유미 팔 붙잡고) 그런 게 아냐. 잘 들어, 정유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좋을 수 있는 거야. (설득하려고) 사랑하는 사이니까.
유미: (외면하며) 또 역겨운 사랑 타령이야!
동욱: (절박하게) 널 안는 내내 머리가 멎을 것 같더라. 너니까 이러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랑, 너니까 이래도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부딪쳤어. ……처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었던 걸까? 우린 누군가의 경솔한 손에 들린 피규어들이고…… 우리 주인은 해피엔딩 따위엔 취미가 없어. 어떻게 생각해? 응? 너는 날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모르는 순간마저 너는 알잖아? (힘주어) 단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유미야.
유미, 동욱을 떨쳐내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쿡쿡 웃는다.
아니 운다.
웃는다.
아니, 우리는 그녀가 지금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다.
유미, 손을 뗀다. 울었는지 웃었는지 알 수 없다.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유미: 난 아빠 핸드폰을 몰래 뒤져보는 딸이었어. 어느 날엔 문자 수신함에 걸린 비밀번홀 풀었고. 아빠가 너희 엄마랑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알게 됐어. 고등학생 때 얘기야. 너랑 키스하기 훨씬 전의 일이고. ……멍청한 김동욱. 키스였어, 바보야. (힘없이 웃으며) 아빠랑 아줌마가 그리도 긴 세월 질리지도 않고 속삭거린 문자들, 구구절절 걸작이야. 난 그 유행한 귀여니 소설 한 권을 안 읽고도 로맨스를 익혔다. ‘나는 너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이 대산 공식이니?
동욱: 유미야.
유미: (외면하며 괴롭게) 내 이름 부르지 마.
동욱: 하나만 묻자.
유미: …….
동욱: 아니, 하나만 부탁하자.
유미: …….
동욱: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야. 니 말대로 오늘 우리 쫑났어. 끝이야, 다신 안 봐, 약속해. 그러니까 들어주라.
유미: 들어줄 수 있는 것만.
동욱: 들어줄 수 있을 거야.
유미: 말 해봐.
동욱: 말 해줘, 우리 사랑이었다고.
유미,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조용히 일어나 마네킹으로 가 천천히 전선줄을 감는다.
손이 자꾸만 떨린다. 팔도 가슴도 입술도.
유미: (떨림을 누르며) 그깟 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동욱: 어떤 사람들한텐, 중요한 거야.
유미: 어떤 사람들한텐, 숨이 막혀도?
동욱: 어떤 사람들한텐, 숨이 다 해도 지키고 싶은 거잖아.
유미, 잠시 손과 숨을 멈춘다.
고통스러운 속을 감추고, 전선줄을 팽팽하게 감는다.
감고 또 감는다. 감고, 또 감는다.
유미: (바람처럼 천천히, 공들여서) 사랑이었어. 그 어떤 칼보다도 쉬이 상처를 내는. 제일로 오래 가는 흉터를 새기는. 사랑이었어. 그래, 사랑이었어.
유미, 어느새 전선으로 두 마네킹의 머리까지를 전부 동여 감쌌다.
매듭을 짓고는 살짝 미소를 짓는 유미.
유미:(쾌활하게) 행복하니? (바라보다) ‘칼과 칼’이 좋겠다, 제목은. 너흰 영원히 서로를 겨눈 칼끝이야. 서로에게 수도 없는 흠집을 남기겠지. 흠집에 흠집이 나더라도 멈추지 못하겠지, 그만두지 못하겠지. 그건……. 보통은 너희를 ‘사랑’이라 부르는 까닭이야.
유미, ‘칼과 칼’ 내지는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힘없이 굽은 등을 하고 앉은 동욱.
유미, 그를 보지 않고 탁자 곁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건 후 미련 없는 발걸음으로 현관까지 걷는다.
현관에 놓인 구두에 발을 하나씩 넣고 잠시 그대로 섰다가, 퇴장한다.
홀로 남은 동욱 위로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
동욱, 벌떡 일어난다. 잠시 좁은 방 안을 서성이다 ‘칼과 칼’, 아니 그에게는 ‘사랑’일 그것 앞으로 걸어간다. 완벽하게 동여진 두 사람을 가만히 쓰다듬던 동욱, 바닥에 놓인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환하게 불 밝힌 ‘사랑’의 모습.
꼬마전구들이 발하는 황홀한 주홍빛에 에워싸인 둘을 멍하니 바라보고 선 동욱.
어디선가 장작불 타들어가는 소리 들린다. <끝>
당선 소감 - 벼랑 끝서 잡아준 손들 …계속 고맙습니다
'슬기야, 글 써라' 하는 분께 '못 쓰겠습니다' 하고 돌아와 시작된 감기 몸살. 절절 끓는 전기장판 위에 조기 마냥 누워 규슈 6박7일 도주를 궁리했다. 연말부터 연초에 걸쳐 이 땅을 뜰 절호의 기회, 괜찮은데? 가만. 돈이 없잖아. 요즘 단기 알바는 '케이크 팔이 아가씨'가 대세네. 성탄 시즌 3일 내내 길 위에서 케이크를 팔면 10만원 획득. 후.
넷북을 끄고 휴대폰도 끈 후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거랑 잘 쓰는 건 다른 얘기……악! 암전. 이런 이유로 당선 전화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아가씨가 대신 받아주셨다. 에? 13단지 사는 김슬기씨요? 신춘문예요? 아가씨께 맛난 빵을 사다 드리련다.
'난 너 언젠가 일 낼 줄 알았어, 근데 좀 빠르긴 하다?' 한 최상미 어머니, '법대 나와 사법고시 패스한 거랑 비슷한 거잖아?' 한 김중배 아버지, 하이파이브해준 김종혁 동생, 야옹 최델리 동생. 내 가족 해줘 고맙습니다. 친언니 솜저메, 문주희 작가, 인텔리전트 지영, 임나진 작가, 공식 미녀 태희, 복승아언니, 맹언니, 랴옹, 근영오빠 등 동대 문창식구 모두 고마워요. 10년 지기 써니, 소울메이트 엽이, 야늘, 망고, 울동생 수호, 개쥬, 미친근, 마들경아, 이주영 감독, 정신적 지주 로찌, 뮤즈 재민이 고마워. 이만희 선생님, 이종대 선생님, 이원 선생님을 비롯한 문창과 선생님들 존경합니다. 후진 극 안에서 유미랑 동욱이 참 고생했어.
임영웅 선생님, 이강백 선생님! 벼랑 끝에서 잡은 힘센 손들이셔요, 제겐…. 죄송하고 죄송하고 계속 고맙습니다. 끝으로 전국에 계신 문우 여러분, 세상에 이런 글도 됐어요! 건필!
▲1986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 선정적 소재를 재치있는 성적 판타지로
좋은 음악을 듣는 순간 어떤 정서가 우리를 감싸듯 잘 쓴 희곡 또한 그 구성과 리듬으로 어떤 정서를 생산한다. 그래서 희곡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어떤 고양된 정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서툴게 쓴 희곡은 사건을 보여주기에 급급해서 어떤 2차적 정서도 스며 나오게 하지 못한다.
김현경 작 ‘라일락 향기의 오후’와 김슬기 작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최종심에 올려 논의했다. ‘라일락 향기의 오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가 그들의 아들이요 남편인 남자의 묘소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죽음보다 고독이 두려운 그녀들에게서 감춰두었던 원망과 갈등이 표출되지만 끝내 화해에 이르는 드라마가 맛깔스럽게 전개된다. 그러나 이 희곡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정서는 우리나라 현대 희곡의 발생기부터 면면히 있어온 익숙한 정서였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은 선정적일 수 있는 소재를 감정 과잉이 되지 않도록 억누르는 소위 쿨한 작품 전개가 돋보인다. 남녀 두 명의 등장인물로 단조로울 수 있는 극을 리드미컬한 대사, 재치있는 행위들, 성적 판타지 등을 어우러지게 하여 발랄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오랜 논의 끝에 우리 희곡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새로움, 냉정한 정서를 높이 사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정상미 작 ‘일곱째 날’과 임채영 작 ‘코끼리 낳는 방법’도 최종적으로 논의되었지만 단막극이 아닌 장막극에 가까워 응모 규정에 맞지 않았다.
/ 임영웅(연출가)·이강백(극작가·서울예대 극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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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하지만 헤어져야하는 어딘가 쌉싸름한 기분이 드는 글이군요.
감사합니다. 좋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