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전북문화관광해설사 3-4기 해외 현장교육은 중국 산동성이었습니다.
산동성은 춘추전국시대에 노나라와 제나라 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魯.齊 시대의 인물들과, 그 인물들과 연관된 사건과 역사적 사실,전설 등을 위주로, 여행 코스에 맞춰, 이 글을 썼습니다. 너무나 방대하고 스스로 둔하여 보고 듣고 느낀대로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한번에 다 올리지 못하고 나누어 올립니다. 독자님들의 넓으신 혜량 있으시기 바랍니다.
중국 산동성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1)
이 명 철
고창 해리면 동호의 영신당할머니 사당에서 새벽에 들으면 닭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가까운 곳, 중국 산동성에 간다.
고창에서 군산까지는 약 1시간가량이었다.
군산항에서 최종 인원 점검을 했다. 29명이었다.
산동성(山東城) 석도(石島)가는 배를 탔다.
중국 훼리호, 냄새가 나고, 내부 시설이 약간 불쾌한 건 사실이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같으나, 역시 외국은 외국이며, 해외는 해외다. 12시간을 배를 타야 한단다.
저녁에 산동에 관한 대강을 듣고, 책자를 한 권씩 받았다.
그 순간이 바로 오리엔테이션이며 교육의 시작이었다.
책자는 우리가 교육을 받아야할 현장의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었다.
메모를 책에다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 진지한 표정들이다.
강의를 들으며 먹을 수도 없으니 음식들이 그득하다.
10일 09:00경 석도(石島)항에 도착 예정이다.
배를 타고 외국여행도 처음이지만, 중국 배를 타보는 것도 처음이다.
선실은 군대식 2층 침상이다.
흔들리나 멀미는 하지 않았다.
배 안에는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관광객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시끌벅적하다.
갑판에 서서 밤바다를 바라본다.
캄캄한 바다.
비도 내렸는지 갑판에 물기가 있다.
배에서 새벽을 맞는다.
중국 영해에서 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 은빛 물결로 반짝인다.
육지가 보인다.
구름 사이로 산이 침묵이다.
간간히 고깃배들인지 아련히 떠 있고, 중국 바닷가 정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배에서 내리기 전에 캠코더에 최대한 경치를 담아보려고 애를 써본다.
우리나라와의 시차는 1시간이다.
산동성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노제대지(齊魯大地)라 칭하며, 공맹학설(孔孟學說)의 발상지라고도 말한다.
또 산동성에는 제노(齊魯시절에서 지금까지도, 아니, 인류가 존재하는 한 그 이름과
사건을 잊지 못할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전설과, 유명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러한 인물들과, 그 인물들과 연관된 사건과 역사적 사실,
전설 등을 위주로, 여행 코스에 맞춰, 이 글을 써 갈까 한다.
황하는 유유히 흘러 산동성(山東省)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며 중국 대운하(大運河)도 산동성을 통과한다.
사상가인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 제나라의 시조인 저 유명한 강태공(姜太公),
춘추전국시대 첫 패자(覇者)인 제환공(齊桓公), 그를 도와 패권을 잡게 한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관포지교(管鮑之交)이야기,
제자백가 중 한 사람인 묵자(墨子), 병법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손자<(孫子:손무(孫武)>, 그의 손자이면서 같은 병법가 손빈(孫臏), 필법하면 왕희지(王羲之) 등이 바로 이곳 산동성 출신들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현장에서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산동성의 인구가 얼마나 됩니까?”
“1억이 넘으면 자치구로 지정해야 되니까 그런 줄은 몰라도 10년 전에도 9,900만 명, 지금도 9,900만 명, 그러니까 인구를 확실히 모릅니다.”라고 해학적으로 답한다.
곡부(曲阜)와 추성(鄒城)은 각각 공자와 맹자(孟子)의 고향이며, 태안(泰安)에는 오악(五岳)의 으뜸인 태산(泰山)이 있고, 태산은 역대 황제들이 봉선제(封禪祭)를 지냈으며, 일반 백성들이 매일 아침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따라서 민간신앙이 살아있는 대표적인 곳이므로 민속여행을 위한 귀중한 자원이 있는 곳임을 감안하여 좀 더 자세히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산동인들은 “제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이리(利里)에 밝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는 제나라 지역, 특히 연해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장사꾼들의 활동도 있었다지만,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 재상이었던 제나라 출신 범여(范蠡)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범려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나라가 멸망할 무렵인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대에 활동한 사람이다.
월왕 구천을 오패(五覇)의 하나로 빛나게 한 1등 공신이 왜 처자식을 버리고까지 멀리 떠났을까. 말할 것도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떠난 것이다. 그는 떠나면서, 월왕구천을 도운 월나라 공신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남긴다.
“사냥꾼이 영리한 토끼를 잡고 나면 그 다음은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토사구팽兎死狗烹).며, 문종도 월왕구천에게서 떠날 것을 당부한다. 왕이 편안해지면 세력 있는 신하들을 의심한다. 일단 의심 받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헤어날 길이 없다며,
“월왕의 상호는 목이 길어서 욕심이 많고 질투심이 강하며, 특히 참는 힘만은 대단한 사람이오. 그러므로 고생은 함께 할 수 있으나 함께 부귀를 누릴 인물은 못되오.”
그러면서 범려는 문종에게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지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불행을 면치 못하리라.”
과연 문종은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남아 있다가 신하들의 참소와 월왕구천의 의심으로, 월왕구천이 보낸 촉루검(囑鏤劍)을 물고 엎어져 죽었다.
범려는 고향인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에서 이름을 치이자피(鵄夷子皮)로 고쳤다. 개간사업을 하여 많은 돈을 벌어 개간한 땅과 함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나라에서 상경 벼슬을 주었다.
얼마 후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에 들어가서 목축을 했다. 범려는 목축을 하면서 식리(殖利)를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여기서 범려는 또 이름을 바꿨는데,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자칭했다. 여기서도 부를 나누어 도산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후세 사람들은 부자 되는 법을 기록한 책을 말할 때 도주공이 남긴 술법이라고도 하는 것이 바로 범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렇듯 범려는 재상의 자리까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름까지 바꿔가며 개간을 하고 목축을 해서 그 부를 혼자 갖지 않고 나누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떠한가!
권력과 부에 온 몸을 던져 몸부림치다가 권력과 부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그 수렁 속에서 죽는 걸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정과 부패는 결코 하늘이 용서치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인심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범려는 월왕구천을 도와 오왕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후 오나라 사람들은 오강에다 범려의 사당을 짓고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
오나라 사람들이 만일 망해버린 자기나라에 대하서 무궁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면, 오강의 강변에다 범례 대신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를 모셔야만 했을 것이다.
<❈鵄夷子皮:치이(鵄夷)는 말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다. 즉 범려는 지난날에 오자서가 오왕부차에게 충성으로 간하다가 오왕부차가 보낸 촉루검으로 목을 찌르고 자결하자, 오왕부차는 오자서의 시신을 치이에 넣어 강물에 던져진 걸 잊지 못하고 자기를 또한 오자서에 비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후에 범려는 사람을 시켜 월나라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데려왔다. 그런데도 소문은 무성한 것이어서, “범려가 서시를 데리고 오호(五湖)에 가서 함께 놀며 살았다.”고 하는 얘기가 있다.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당시 범례는 처자식까지 버리고 멀리 제나로 떠난 사람이 아니던가.
오왕부차를 타락하게 만든 서시(西施)는 월왕구천의 부인 월부인이 서시의 등에 바윗돌을 묶어 강물에 던져버렸던 것이다.
봉래(蓬萊)에는 신선이 산다.
석도(石島)에서 봉래로 이동한다. 무려 2시간 30분이나 소요된다고 한다.
“가다가 휴게실도 없으니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십시오.”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고속도로에 차가 많지 않으니 휴게실도 필요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이드는
“산동성 관광은 엉덩이 관광이요(차만 타고 앉아서 이동하니까)
북경관광은 귀관광이며(듣기만 하니까)
계림관광은 눈관광이고(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만 보아야 하니까)
장가계 관광은 와~와~관광(감탄사만 연발하니까)입니다.”라고 말한다.
적산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상이 보인다. 부처님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저 산의 산신이거나, 도가사상의 어떤 신선이겠지...내 맘대로 생각한다.
중국 사람들은 봉래각을 중심으로 남쪽은 황해, 북쪽은 발해라고 부른다. 우리는 단순히 서해 도는 황해바다라고 부른 것을 그들은 이렇게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은 끝없이 이어진다.
“산동성의 소재지는 제남(濟南)이고, 차 번호판에 노(魯)자는 공자님을 추모하기 위한 것입니다. 산과 들에 자라는 파란 농작물은 벼가 아니고 옥수수입니다. 모래가 섞인 사석 땅이기 때문에 물이 고이지 않아 황하강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옥수수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산에 큰나무가 별로 없는 걸 보면서, 구릉지대와 지평선의 들판 사이의 고속도로를 쉼없이 달리며, 교육은 계속되었다.
홍보활동에 필요한 자기소개를 중국말로 해보는 것이다.
“나는 한국 전라북도 문화관광해설사 이명철입니다.”
‘韓國 全羅北道 文化觀光解說師 李明哲’
워쓰 한꿔 춴뢰베이또우 원화관꽝 지어 쑤어 쓰 리밍저
바른 표기나 발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열심이었고, 나와서 한 사람씩 해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로 발음을 들으며 웃어쌓는 바람에 어느덧 봉래에 도착하였다.
봉래(蓬萊)하면 금강산의 여름산인 봉래산(蓬萊山)이 생각난다.
중국에서 봉래산 이름은 옛날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을 말한다.
한무제(漢武帝:사마천의 사기는 오제로부터 시작하여 한무제의 대에 끝난다)가 이곳에 와서 신선산을 보려고 했으나 실제로 보이지 않자, 경치가 수려한 이곳을 ‘봉래’라 명하였다 하며, 한무제는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불로장생 약을 얻기 위하여 이곳에 왔었다.
진시황도 바다에는 봉래ㆍ영주ㆍ방장이라는 신산(神山)이 있고, 신산에는 선인(仙人)들이 거주하며, 불로장생 약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진시황이 이곳에서 불로초를 구하려고 했으나, 불로초는 구하지 못하고 전국을 순시하다 갑자기 죽었다는데, 이곳 어디일까? 그 행적을 문헌에서 더듬어 본다.
진시황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든 것이다.
그리하여 서시(徐市)에게 소년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동해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不老長生)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약을 구하지 못한 서시는 돌아와 거짓말로 둘러댔다.
“동해바다의 봉래섬에 가면 영약(靈藥)을 구할 수 있는데, 항상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가 가로막아 갈 수가 없습니다. 활을 잘 쏘는 사람과 가야할 듯합니다.”라고 말하여 활 잘 쏘는 사람과 같이 떠난 뒤 일본 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 뒤 진시황은 시황제 37년 10월, 다섯 번째 지방 순시에 나서 회계산에 다녀오는 길에 해안을 끼고 북상하여 사구지방에 이르렀다. 그는 어느 민가에서 쉬면서, 민가집 두 딸이 미녀임을 알고 그 두 딸을 품었는데, 누가 알았으랴, 진시황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순시의 길목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일 줄이야!
자매는 표 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독약을 타서 진시황의 음식에 넣었든 것이다. 그리하여 진시황은 차츰 독약에 중독되어 죽게 되었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그가 50세(만49세)의 나이로 순시하다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요.
간신 이사와 조고는 죽은 것을 숨기고 썩은 생선으로 관을 덮어 시찰은 계속하다 궁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과연 진시황이 여기 봉래를 들렸을까? 여기에 만일 신선이 산다면, 진시황이나 한무제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것인가!
봉래의 선경을 가장 극대화한 옛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봉래각에 오른다.
동해의 봉래가 바로 여기인가!
여덟 명의 신선이 제각기 다른 재능을 자랑하며 놀았다는 팔선과해(八仙過海). 산과 바다가 아우러진 아름다운 선경은,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만큼 아름답고, 사람이나 신선이 살만한 곳이란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봉래산의 봉래수성(蓬萊水城)에는 고건축물들이 있는데, 미타사(彌陀寺)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미타사에는 아미타부처님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설법인을 취하고 계셨다.
바닷가의 사찰에는 어김없이 모셔진 관세음보살, 그 본존불이 아미타 부처님이며,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좌협시, 우협시로는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이다. 그러면 왜 해변가 사찰에는 관음보살을 모시는 것일까!
남인도에서 남중국으로 건너온 관음보살(불교성전. 2010. 전북해설사 보수교육 자료집 송화섭 전주대 교수 24쪽부터 참조)
남인도의 포타락카(Potalka)산, 산정에 연못이있고, 연못 옆에 천궁(天宮)이 있는데, 관자대보살이 왕래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소원성취를 시켜준다. 이 관자재보살은 말라야 산의 천궁에 거주하면서 남해의 바닷길을 열어주는 해신이었다. 이 포탈락카에 거처하는 남해의 해신 관자재보살이 바닷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것이 중국의 포타락카이다.
남인도에서 남중국 사이의 바다는 남해에 속한 바다이다.
그리고 인도인들에게 화신(化身)에 능한 관자재보살은 힌두신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때로는 시바신, 비슈누신으로 변모하여 중생구제에 적극 나투는 일이 많았다.
남인도의 관자재보살이 거인으로 화신하여 세 걸음으로 중국 보타락카 산으로 건너 뛰어오는 설화가 보타도에 전해오고 있다. 이 설화는 남인도의 포탈락카 지형의 관음신앙이 당대(唐代)에 중국 남쪽지방으로 올라와 새로운 포탈락카라는 관음성지가 조성된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를 기념하듯이 중국 보타산에는 관음보살이 남해에서 건너와 주산군도를 관음성지로 성성하고자 1,000개의 섬을 뛰어다니며 숫자로 센 것을 기념하는 관음도(觀音跳)유적이 있다. 이 관음도는 관음보살로 화신한 비슈누(질서와 조화신)의 발자국이라고 본다. 비슈누(Vishunu),가 거인 관음보살로 응화신하여 세 걸음만에 주산군도로 건너온 것이다. 주산군도에 관음성지가 조성되면서 보타산과 락가산이란 지명이 생겨났으며, 두 섬의 관음성지를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이라 부르고 있다.
남인도에서 출항한 배는 바닷길 따라 관자재보살의 보호하에 남중국으로 건너왔으며, 보타산과 락가산 사이의 바닷길을 통과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바닷길에서 바라보면, 보타산은 마치 포타락카 해안지형과 흡사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해양지리 및 지형적 여건에 의해 주군산도에 관음성지가 조성되었고, 보타산의 조음동과 범음동이 있는데, 이곳 동혈(洞穴) 지형이 남인도의 말라야 산과 흡사하여 보타락가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이후 대승불교를 믿는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는 해변 가에 사찰을 조성하고 보타락가산의 관자재보살을 조성한 사찰에 모셔왔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그 예로 신라상인들이 오고간 길 따라, 통일신라 시기인 672년에 의상대사가 중국 보타도의 관음상을 한반도 동해안의 낙산사로 이식시켜 관음성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낙산사라는 지명도 보타락산의 줄임에서 나온 사찰 명칭이다.
용왕궁(龍王宮), 천후궁(天候宮), 봉래각(蓬萊閣, 삼청전(三淸殿), 여조전(呂祖殿) 등의 건물이 있는데, 각 건물마다 중국 고유의 선가(仙家)와 도가(道家) 사상에 의한 신선들을 모셔 놓았다. 그러니 전체로 보면 산과 바다가 아우러진 인간 선경의 신선사상에 불교의 신(身)들이 함께 하는 전설적 아름다움이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신선이 되어본다. 그러나 성(城)이란 군사시설이 나를 신선에서 밀어버린다.
봉래각(1061년)은 호남의 악양루(岳陽樓:220년), 강서 남창의 등왕각(騰王閣:653년), 호북 무안의 황학루(黃鶴樓:223)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명루라고 한다.
봉래각 안에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액자와 비문 등이 즐비하였으나, 시간도 없고, 읽지도 못하고, 촬영만 정신없이 하고는 개 바위 지나가듯 지나쳐 버렸다.
봉래각에서 내려다 본 발해만의 아름다운 바다, 과연 팔선과해(八仙果海)라, 8명의 신선이 모여 회합을 가질만한 절경이다.
의상대사가 귀국할 때, ‘선묘낭자’가 혼인을 간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봉래각 앞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사랑 이야기, 천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가슴에 아련히 남는다.
봉래각 관광을 마치고 유방으로 이동하였다. 무려 4시간이나 버스를 타야한다. 처음에는 좀 졸도록 내버려 두더니, 또 교육을 시작한다.
“워쓰 한꿔 춴뢰베이또우 원화광꽝지어쑤어쓰 리밍저”
여행이든 교육이든 그 중 가장 즐거운 것은 먹고 자는 것이다. 교육이라면 장관도 졸고 대학교수도 존다고, 내일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 저도 중국은 6회정도 다녀왔습니다만. 산동성은 아직이네요 언제인가 갈 기회가 있겠지요? 기대하며 글을 읽노라니 갑자기 손자병법에서 들은 오자서 이름에 놀랐습니다. 글 고맙게 잘읽고 갑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고
사진 찍고, 메모하고
그 또한 저의 취미생활인 것 같습니다.
두서없는 글을 항상 칭찬해주시니 감사하고
다음 선생님들의 교육 코스도 산동성일 가능성이 많을 것 같습니다.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잘보았습니다.
선생님의 해박한 깊이는 어디까지일까요???
부처님의 깊이에 이르러서야 알까요....
띰어 갑니다
중생 모두가 부처의 성품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항상 읽으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자료 정리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합니다.
그만큼 해설사들에게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매번 고맙습니다.
우리같은 이들이 하나씩 쌓아갈 수 있게 도와줘서요.
선생님들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는 것 같습니다. ^.^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매번 긍정적 평을 해주시니
글을 써야할 힘을 얻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진실로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명철선생님의 산동성 기행기를 읽으며
"우리집은 소금을 아끼지 않습니다"라고 써 붙였다던 산동성에서 오신 옆집 중국 아저씨 생각이 나요.
선생님 존경합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계서서 빛이 납니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해외 현장교육답사기는 갔다 온 전북문화관광해설사는
누구나 써야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 과제를 나름 성실히 이행한 것이란 생각에 홀가분 하기도 합니다.
해외현장교육 답사기는 (4)부로 작성했습니다.
단번에 올리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하여 (2),(3),(4)부를 올리곘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답사기는 언제나 피가되고 살이 됩니다.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왔던 저의 답사를 항상 뉘우치고 깨우치게 하기도 하구요^^
다음 답사기가 벌써 기다려지네요.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좋은 댓글로 용기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애쓰셨습니다. 저도 같은곳 갔다왔지만 주마간산식 여행으로 겉만보고 왔네요.
선생님의 자세한 현장 기록은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덕분에 공부 잘하고 갑니다.
선생님의 사진 속에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지요.
눈은 대상을 비출뿐 보는 건 마음인데
저는 선생님의 사진을 보면서 선생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밝은 웃음과 미소, 그리고 관대한 성품! 항상 기억하며 존경합니다.
답사때 바쁘게 메모하시고 촬영하시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명철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사실 최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바에 미치지 못하지만
긍정적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강복남샘과 함께 찍어 주신 제 사진도 있네요.
제게도 한 장 보내주세요.
가져가기가 안되어서요.^^::
열어놓겠습니다.
가져가세요.
바삐 찍고 기록하신 선생님 덕분에 그날의 추억들을 다시 회상합니다..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즐겁게요~~
선생님도 답사기 작성해 놓으셨죠?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