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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북정맥 마지막 회 . (산악회 공지 기준 12,13회차)
2013.6.29(솔고개..노고산..옥녀봉..숫돌고개...농협대학 정문..탄약대대 입구)
2013.7. 6(탄약대대 입구..현달산..고봉산..일산가구단지 ..장명고개 )
흰 눈이 온 천지를 뒤덮은 1월 13일,
무릎까지 빠지던 눈을 헤치면서 시작한 수피령 능선이 아직도 생생한데
마지막 2회가 남았음을 알리는 공지를 보니 벌써(?) 라는 생각이 앞선다.
흐르는 물 같이, 쏜 화살 같이 세월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말이 실감이 된다.
겨울에 시작한 정맥 산행이 꿈같은 봄 날을 타고 넘어서 성하盛夏의 계절로 들어선 것이다.
아무래도 무더운 여름날은 산행을 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흘러 내리는 땀과 그 냄새를 쫓아 끊임없이 달라 붙는 하루 살이들이 성가시기 그지 없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끊임없이 타는 목이 더욱 힘들게 하는 여름산행,
대미를 장식하는 산행에도 변함없이 많은 회원들로 성황을 이룬다.
구파발 역에서 의정부 행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를 스친다.
의상봉 용출봉 암봉을 지나 원효봉 너머로 3개의 봉우리가 우뚝하다.
3개의 봉우리가 우뚝한 탓에 삼각산이라고 불렀다는 북한산,
서울 시내 방향에서 조망하던 원경에 비해 산 허리에서 올려다 보는 모습은 신비스런 자태로 다가온다.
서울과 산 하나를 두고 아침 공기가 이렇게 신선하고 맑을 수가 없다.
군 부대를 지나 솔고개에 하차하니 길 건너편에 또 다른 군부대가 있다.
서울 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예비군들 에게는 이곳이 매우 익숙한 곳이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 하려고 남파 되어서 온 나라를 불안에 떨게 하던 1968년 1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예비군을 창설하고 제대 군인들이 해마다 입소하여 훈련을 받던 곳이다.
뒤돌아보니 상장능선의 줄기가 도로까지 이어 내려온다.
금지 구간이라서 산행을 하지 못한 저 능선도 언제가는 함께 걸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솔 고개(노고산 등상로 입구에 있는 부대)
도로 건너 군 부대 정문을 살짝 지나 그린교회 간판을 보고 샛길로 접어든다.
드문 드문 늘어선 주택 사이로 난 시멘트 포장 길을 지나 새로 단장하는 등로 입구로 접어든다.
원래 한북정맥은 군 부대 정문을 통과하여 능선을 타고 노고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 이지만
부대가 들어선 탓에 샛 길로 우회하는 것이다.
논밭 사이로 들어선 집과 마을길을 따라 이어 가다가 이정표를 보고 좌측 산으로 들어선다.
마을 길에서 바라 본 사패선 방향 도봉 능선.
산 골짜기를 지나고 곧 능선으로 올라 서서 나무 벤치에 앉아서 복장을 재 점검 한다.
잠시 후에 능선 정상에서 군 부대 철망 펜스를 만나 우측, 교현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철망 옆으로 오롯이 난 등로가 수 많은 정맥 산꾼들의 발 자취를 말해준다.
등로는 완만한 내리막길로 이어 지다가 절개지로 떨어진다.
군 부대로 출입하는 쪽문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경고문이메달려 있고
우측으로는 청룡사와 일영 유원지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다.
살짝 올라서서 능선을 이어 가다가 낮은 정상에 도착하니 지하 참호에서 솟은 환기통이 서있고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철망 펜스가 끝나고 내리막 안부로 이어진다.
넓직한 임도에 도착하여 우측으로 올라가는 길로 방향을 바꾼다.
임도 옆에는 통나무 계단을 따라 유격 훈련장을 짐작하게 하는 하선망이 설치 되어있고
아래로도 훈련장 시설물이 여기 저기 드러나 보인다.
그
노고산 정상으로 향하는 임도 옆 군 훈련 시설
시멘트 포장 길을 따라 한 동안 올라 가다가 노고산(487m) 정상에 있는 군 부대 직전에서
안내판의 지시에 따라 좌측 참호로 이어지는 임시 등산로(?)로 들어선다.
참호를 지나고 군 부대 찰조망을 따라 사면길을 이어 가다가 넓직한 헬기장에 도착한다.
노고산 정상(안테나 있는 곳) 과 헬기장
헬기장 오른쪽은 웃 자란 풀숲이 시야를 가로 막지만
좌측으로 드러난 인수봉과 자운봉으로 이어지는 도봉 주능선이 한폭의 그림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백운대와 인수봉이 그 높이를 서로 겨루는 듯 우뚝하고
우이령에서 살짝 내려 앉았다가 솟구치는 도봉 주 능선이 자운봉에서 다시 높이를 자랑한다.
사패산을 뒤로 하고 여성봉과 오봉 능선으로 이어지는 실루엣이 환상적이다.
오봉능선 방향
암록색 숲을 허리에 두르고 하얀 암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자못 신기한 기운을 뿜어낸다.
좌로 우로, 그리고 또 다시 좌우로 시야를 움직여 보아도 가슴 뭉클하다.
아침 햇살을안고 바라보는 암봉들의 실루엣이 몽환적이다.
서양인들이 절경을 바라 보면서 inspiration point 라고 표현 하듯이
영감靈感을 불러 일으킬만한 모습이다.
지방 자치 단체가 경쟁을 하듯 세워 놓은 정상석도 조망도眺望圖 하나도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인수봉 방향 원경
한 동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본다.
헬기장 좌측으로 내려서서 완만한 내리막 등로를 이어간다.
살짝 솟은 봉우리에 도착하니 헬기장의 잔재가 깔려있다.
조금 후에 삼하리 방향으로 난 세 갈래 길에 도착하니 그곳에도 폐 헬기장 잔재가 남아 있고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하여 제법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니
세 번째 헬기장에는 노고산을 1.3km 지났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다.
완만하게 내려서는 등로 주변으로 넝쿨 식물이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 가지를 감싸고
고즈녁한 숲은 적막에 쌓인 듯 정적이 흐른다.
이 아름답고 고요한 숲길은 아픈 역사를 함께 간직하고 있다.
1968년 북한이 남파한 간첩 31명이 이 길을 따라 청와대를 습격 하려 한 소위 “김신조 루트”이다.
김 신조 루트
1968년 1월 21일 평창동을 넘어 자하문 고갯길에서 군경과 대치, 사살된 북한 간첩 31명은
17일 밤 오전 개성을 출발, 밤 11시에 분단 철책선을 넘었으며
19일 밤 9시에 법원리 삼봉산 뒷산에서 나무꾼 3형제에게 발견되어 신고가 되었으나
북 노고산, 앵무봉과 한강봉 사이 능선을 따라 남하 하다가
마지막으로 노고산, 흥국사, 북한산 진관사 계곡을 지나고
사모바위 옆 능선을 타고 넘어 승가사를 거쳐 청와대를 향하다가
21일 밤 10시에 자하문 고개에서 우리 군경에 의해 저지당한 것이다.
노고산 정상에서 3개의 헬기장을 지나고 전망 바위에서 살짝 내려서면
좌측 흥국사로 향하는 샛길이 있는 이 구간이 김신조 루트의 일부인 것이다.
그 후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교련이 실시되고 향토 예비군이 설치된 것이다.
조금 더 내려서니 군 부대에서 사격장 구역임을 알리는 경고판이 서있다.
사격 훈련을 알리는 깃발이 게양되면 위험하니 이 구간을 우회하여 통과 하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 경고판에 이르니 등로가 좌우로 갈라져서
낡은 철조망이 남아있는 우측 등로를 따라 계속 내려선다.
조금 후에 송전탑(39번)을 지나고 좌측 사면길을 따라 진행을 하다가 안부, 중고개에 도착한다.
중 고개
지축동과 오금동 사이를 왕래하는 고개로서
스님(중)들이 이 길을 많이 다녔다고 하여 중 고개라고 부른다. (안내판 내용)
잠시 휴식을 한 후 가지런히 정비된 통나무 계단길을 따라 오른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옥녀봉 정상은 정면에는 군 부대 철망이 가로막고 있어서
옥녀봉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철망을 따라 우측으로 내려섰다가 잠시 후에 오른쪽에서 합류하는 임도를 만나서
안부를 지나 경사면을 오른다.
완만하게 올라선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옆에는 군 부대에서 설치한 훈련용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가다가 좌측 방향으로 틀어서 도로 절개지 상단의 배수로를 따라 내려서고
곧 이어서 잘 가꿔진 묘지 7-8기를 지나 4차선 도로로 내려선다. (매내미 고개)
매내미 고개
도로를 가로 질러 완만한 임도로 들어선다.
차량이 통과 할 정도로 넓고 평탄한 임도에는 군데군데 체육 시설과 함께 정자도 설치되어 있고
오가는 마을 사람들을 수시로 만난다.
두 번째 체육 시설을 지나고 아카시아 숲이 우거진 임도를 한동안 이어 가다가
북한산 전망대, 옛길, 이라고 쓴 설명판이 설치된 곳을 지나서 여석정 정자에 오른다.
정자 아래는 3호선 전철역 지축역과 그 주변으로 마구 파 헤쳐진 신 도시 개발지역이
시야를 혼란 스럽게 한다.
여 석 정
옛 길
서울에서 신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는
벽제관을 거쳐 개성, 평양, 신의주로 이어지는 주 도로는 관리들과 양반들이 다녔던 길이고
서민들이나 상인들은 번잡하고 까다로운 대로를 피해서
주변의 샛길로 다녔다고 한다.
정자에서 내려서서 아스팔트 도로(배반고개)를 가로 질러 작은 능선에 올라 서니
주변으로는 주택이 빼곡이 들어선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풀숲으로 뒤 덮힌 등로를 버리고 마을로 내려서서 우회하다가
다시 등로로 접어 들어서니 묘를 이장하는 지 온통 벌거벗은 흙 산이 앞을 가로 막는다.
지난번에 이 길로 지나간 우리 산악회의 종이 표지를 발견하고
숲으로 다시 들어 갔다가 조금후에 고개를 넘는 차량 소리가 시끌시끌한 도로, 숫돌고개로 내려선다.
군 부대가 자리 한 숫돌고개(국도 1번, 통일로)
숫돌고개(礪石嶺여석령)
한양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주요 간선 도로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고 오던 고갯길이다.
홍제동 고개를 넘어 이곳을 지나고 지금의 벽제역 부근 벽제관을 거치고
파주, 임진나루터를 거쳐 개성, 평양, 의주로 향하던 역사의 길이다. (현재의 78번 도로)
중국 사신도 이 길을 따라 벽제관에서 하루를 묶고 의관을 정재 한 후 한양으로 들어 왔다고 한다.
고려시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의주대로는
실학자 이 수광이 명나라에서 천주실의를 가지고 온 길이다.
조선시대에는 추사 김정희가 1809년(당시24세) 중국 사신을 따라 다녀 왔으며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도와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한 성삼문도 이 길로 다녔고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은 1780년에 왕래한 길이다.
그런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몽고가, 조선시대에는 청태종이 침략을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가서 10년후에 귀환한 길이며
아녀자들이 애닮은 아픔을 안고 돌아와 환향녀라는 이름이 생겨난 길이다.
조선의 국토를 유린한 왜군들의 침략의 길이자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명 나라의 이 여송장군이 도움을 준 길이다.
한양에서 신의주 까지는 당시 릿수로 1,080리의 멀고 먼 길이다.
고개 마루에 자리 한 군 부대 정문을 우측으로 끼고 마을로 내려선다.
50여 미터를 내려 섰다가 전신주에 붙은 꼬리표를 따라 우측으로 들어선다.
나즈막한 공터에 올라서서 다시 마을 주택 사이로 내려 섰다가 우측으로 올라서니
1자형 기외집 한 채가 있고 벽에는 육화사라고 쓰여 있다.
건물 외벽에 절사자 표시를 하지 않았으면 절 인지 민가인지 잘 구분이 안 되는 건물이다.
고구마와 고추를 심어 놓은 밭 사이를 지나 밋밋한 고개를 넘는다.
숫돌고개 군 부대 담장 아래에 있는 육화사
갈참나무와 잡목이 빼곡한 동네 야산 같은 길을 이어간다.
여석 표지판을 지나고,농협대학 정문이 1.86km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판 옆에는
고양 수릿길이라고 쓴 꼬리표가 등로를 안내한다.
아마도 고양시에서 이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구간에 달아 놓은 듯 하다.
숫돌고개에서 시작한 군 부대는 낮은 산의 능선 전부를 차지하여 등로는 그 옆 사면길 숲속을 이어간다.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거북바위와 설명판, 돌탑, 송전탑 13번을 지나고 나서 Eco Bridge를 만난다.
파란 잔디와 각종 야생화가 다리 양쪽 둑에 지천으로 피어 아름답다.
에코 브릿지와 야생화
다시 숲으로 들어서서 조금 후에 Y자 갈림길에서 고민을 한다.
우측으로 가면 골프장 철망 펜스와 농협대학 팬스를 넘어 농협 대학 정문으로 이어지는 정맥 능선이다.
그러나 펜스가 높고 위험하여 대 부분의 정맥 꾼들이 그랬듯이 좌측으로 내려서서 약수터에 도한다.
마을길로 살짝 들어 섰다가 교회 수련장을 지나서 낮은 능선을 넘으니
능선 주변으로 하얀 밤 꽃이 만개,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매내미 고개에서 이곳 까지는 정맥 길을 따라 고양 누릿길이라는 꼬리표가 수시로 있어서
길을 찾는데는 큰 무리가 없지만 동네 뒷산 산책로 같은 느낌을 주는 구간이다.
밤 나무 꽃
정든 숲속으로 발길 옮기니
진한 오 유월의 밤꽃 향내여!
긴 목 내밀어
누구를 애태우려 하는가
달콤한 벌과의 입맞춤을 갈망 하였던가
정겨운 아낙네 가슴 술렁이게 하려
그 토록 기다렸던 오뉴월인가
아찔한 그대 향내여!
견디기 힘겨운 밤의 유혹이여...
밤 꽃 향의 유혹(김 한나)
삼송리에서 농협대 정문 앞을 지나 원당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나 우측으로 이어간다.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가 서로 맞 닿을 정도로 우거진 도로를 따라
농협 대학 정문을 지나고 서삼릉 입구 3거리에 도착한다.
정면으로 난 정맥 숲길은 한양 골프장 측에서 철조망으로 막아서 출입이 불가하여
그 옆으로 난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서삼릉 임구 3거리(좌측 숲이 원래 정맥 등로 임)
서삼릉 입구 3거리에서 왼쪽길로 접어 들면서 허브 나라, 표고농장, 보리밥집,
한국 스카웃 연맹 중앙 훈련원 입구, 남양 유업, 외곽 순환도로 아래를 순차적으로 지나고
교외선 철길을 건너 지방도로 363번에 위치한 탄약대대 입구에 도착한다.
이 구간은 정맥 길과 완전히 분리된 길로서 차량이 다닐 수는 있으나
도로 폭이 좁고 농로를 겸한 구간이 많아서 정맥 구간으로서의 의의는 다소 떨어진다.
탄약대대 입구
탄약대대 입구 앞 3거리에서 부대 방향으로 난 아스팔트 길을 따라 이어간다.
좌측 숲 속에 있는 테니스 장 옆을 지나고 20여분 후에 군 부대 정문에서 우측 숲으로 들어선다.
철조망을 따라 숲길로 들어서니 웃 자란 들풀이 어께까지 넘친다.
낮은 능선에 세워진 전주 이씨 묘를 지나고
군 부대 초소가 있는 지점에서 오른쪽 숲으로 갈래치는 3거리에 도착한다.
이 곳은 부대 건너 오른쪽 능선의 공양왕릉이 있는 곳에서 올라 오면 만나는 지점이다.
철조망 옆 길을 따라 한 동안 이어 가다가 폐쇄된 군 부대 후문을 지나 지방도로로 내려선다.
군부대 정문에서부터 후문까지 구간도
정맥 능선은 군 부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등로는 철망 옆을 따라 이어지는 곳이다.
차량 통행이 빈번하고 커브 길이라 다소 위험 한 도로를 건너
낮은 능선을 올라서니 동물의 인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수선한 숲을 헤치고 내려서서 광 목장 입구에 도착한다.
마을에서 올라온 임도가 광 목장 입구에서 세 갈래로 갈래친다.
정면의 임도를 따라 들어서서 바라보는 광 목장은 가지런하게 자란 농작물이 초록으로 뒤덮혀 있고
밤 나무 숲이 우거진 임도를 지나 산소까지 가서 완만한 등로로 올라선다.
곧 이어서 산불 감시 카메라와 운동 시설이 설치 된 현달산 정상에 도착한다.
풀 숲으로 싸여있는 정상은 조그만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고
지하 벙커 시설물도 이리 저리 솟아 있다.
시야는 웃 자란 풀숲으로 인하여 제로 상태이다.
현달산 원경(탄약 대대 후문에서 바라 본 모습)
현달산 見達山(132m)
본달산 · 견달산 · 현달산 등 이 산의 다양한 이름은 견달산(見達山)으로 쓰고,
부르기는 현달산으로 하기로 고양시 지명위원회에서 정하였다.
이 산의 남쪽으로는 견달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견달산은 중국의 황제가 세숫대야에 비춰져 그 기운이 중국에까지 도달했다고 하여
견달산으로 부르며 하늘과 잘 통한다고 하여 고양시에 비가 오지 않을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산으로도 유명하다.
고양시 지명유래에서
정상 부분의 가파른 경사를 내려서서 완만한 등로를 이어 가다가
차량 소리가 요란한 문봉재에 도착한다.
길 건너 시멘트 담 벼락에는 백마상이 그려진 군 부대 마크와 함께
행군을 하는 군인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이채롭다.
문봉재 3거리(정맥길은 길 건너 도로 방향)
길을 건너 군 부대 담 벼락과 나란히 하는 아스팔트 도로를 이어간다.
우측의 공장 지대를 지나고 연 이어서 좌측의 친 환경 이엔티 와 동성 산업이 자리한 구간은
운행하는 차량과 덤프 트럭으로 인하여 매우 위험한 길이다.
도로는 2차선 이지만 인도가 거의 없고 빈번한 차량 통행으로 인한 먼지로 매우 곤욕스러운 길이다.
약 2km 정도의 길을 지나고 예빛 교회 첨탑이 있는 지점에서 우측 임도로 들어선다.
임도 중간 지점 좌측에 있는 원각사를 지나고
조금 더 진행하니 군 부대 철조망 펜스 뒤로 초소가 드러난다.
철조망 펜스를 따라 이어 가지만 등로 흔적을 찾을수 없을 정도로 웃 자란 풀이 앞을 가로 막는다.
스틱으로 웃 자란 풀숲을 헤치면서 낮은 능선을 타고 넘었다가 내려서서
군 부대 철문을 지나 다시 철조망 옆으로 난 등로로 올라선다.
두 번째 초소를 지나 우측 숲으로 들어섰다가
잠시 후에 차량 소리가 요란한 지방 도로로 내려서니 도로 표지판에는 성석동이라고 쓰여 있다.
석성동 고개와 고봉산 입구(시멘트 길)
도로를 가로 넘어 다소 경사가 있는 시멘트 길을 따라 고봉산으로 들어선다.
만경사를 지나고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등산객을 위한 벤치와 함께 공원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고
정상으로 향하는 시멘트 길에는 군 부대가 출입을 통제한다.
좌측 임도(등산로)와 군 부대 정문 사이 조그만 샛길을 따라 사면길을 이어 간다.
군 부대 참호로 사용 되는 듯한 사면길을 이어 가다가
정상 아래 넓직한 바위와 운동 시설이 있는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한 후
좌측의 증산마을 이정표를 따라 내려선다.
고봉산 지나서 헬기장에서 바라 본 고봉산 정상
고봉산(209m)
고양시 일산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옛부터 태미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이다.
이곳 고봉산은 높은 산봉우리 또는 봉화를 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는 직사각형 석축 형태의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고봉현과 덕양(행주)현으로 구분 되어있었다가 태종 13년 때(1413년)부터
고양이라는 지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고봉현 일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로 불렷다고도 한다.
군데 군데 나무 계단과 로프가 설치된 하산길은 동네 뒷산같이 평탄하다.
헬기장을 지나고 고봉정高峰亭을 지나 잠시 후에 조리읍으로 향하는 도로 (98번)에 내려선다.
일산에서 파주시 조리읍으로 가는 넓은 도로를 건너 통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서서
나무 기둥과 대형 설명판이 설치된 금정굴에 도착한다.
어느 단체에서 만들어 놓은 설명에 따르면
6.25때 북한군에 부역을 한 주민 153명을 처형 하였다고 알려진 토굴이다.
금정굴 3거리에서 황룡산 이정표를 따라 우측 등로로 이어 간다.
산 중턱 오른쪽에 있는 골프 연습장을 스치면서 운동시설과 휴게 시설이 있는 곳을 지나고
군 부대 철조망을 만나서 조금 더 가다가 좌측 일산 동東 고교 방향 이정표를 따라 내려선다
산을 완전히 벗어나서 학교 앞 탄현동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다.
98번 도로에서 금정굴, 그리고 하산 지점 까지도 마을 뒷산 정도로 여겨지는 평탄한 구간이다.
호곡중학교로 떨어지기 직전 군 부대 철조망
이곳부터 성재암 입구 까지는 시가지와 도심을 통과 하는 구간으로서
저마다 통과하는 방법이 각각이다. 그래서 인지 참으로 고민이 많이 되는 구간이다.
시가지를 따라 일산 가구 단지 4거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중간에 문산, 개성, 평양, 신의주로 잇는 경의선 철도를 지나서 일산 가구 단지 4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서 파주시 교하읍으로 이어지는 대로를 따른다.
약 15분 정도를 가다가 야당 4거리를 만나서 좌측으로 꺽고
와석 초등학교 앞을 지나 고갯길을 넘은 다음 경기 인력 개발원 표지를 따라 우측 도로로 접어든다.
직진을 하여 지산 중학교 이정표를 따라 가다가 목동 3거리에서 좌측 도로를 따라 간다.
약 30분 후에 월드 메르디앙 1차 아파트를 지나고 2차 입구로 들어선다.
일산 가구 단지 4거리
이 구간은 운정 택지개발 단지로 명명되어 개발이 시작 된 이후
낮게 형성된 동리 뒷산같은 지형은 없어지고 옛 동리 이름도 모두 현대식으로 변경되어서
지도상으로 찾아갈 방법이 없고 선답자의 꼬리표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새로 개발된 이곳에도 유심히 살펴보면
정맥길로 짐작되는 부분은 대 부분 주요 도로로 모습이 바뀌었고
일부 구간은 공원이나 편의 시설로 변형되어서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도시화로 변형된 구간 중도에 설치한 시원한 분수대 앞에서 잠시 더위를 피해 본다.
단지를 가로 질러 고인돌 산림 욕장 숲길을 따라 진행을 한다.
공원 부지를 지나고 들꽃 어린이 집을 지나 숲길을 벗어난 지점에 이르니
동서로 56번 도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위로 새로 개설 된 동물 이동 통로를 건너
성재암으로 향하는 숲길로 들어선다.
지도에는 이동 통로(다리)가 없고 좌측으로 100여 미터 이동하여 도로 아래를 지나
오른쪽으로 꺽어서 성재암으로 향하는 옛날 길이 표시되어 있으나 어느 길로 가도 무방 하다.
성재암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에 표시된 숫자를 들여다보니 월드 메르디앙 아파트까지 1.5 km거리이다.
에코 브릿지와 성재암 가는 길 (다리 건너 좌측 임도)
차량 통행이 가능한 비포장 길, 성재암 가는 숲길은 아름드리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이 시원하다.
낮은 야산이지만 정맥 등로로 판단 될 만큼 지형도 뚜렷하다.
성재암 쪽에서 하나 둘씩 무리를 지어 내려오는 주민들의 밝은 웃음이 더위를 잊게 한다.
조금 후에 등로에서 우측으로 살짝 벗어난 성재암에 내려가서
등나무 넝쿨이 시원한 평상에서 땀을 말리고 시원한 우물물을 들이킨다.
암자치고는 제법 큰 극락전 앞 마당에는 파란 잔디가 깔려 있는 것이 이채롭다.
성재암 극락전
다시 임도로 돌아와서 조금 더 진행을 하니
좌측으로 파평윤씨 교하 종중 묘역이라는 입석 표지판이 서있고
그곳에서 좌측으로 300m쯤 들어가니 잘 가꾸어진 묘지 수십 기가 정연히 잠들어 있다.
이 지역에는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파평 윤씨 교하종중 묘역, 파평 윤씨 교하문중 사유지등을
알리는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등로 주변에 잠들어 있는 묘지의 주인도 대 부분 파평 윤씨이다.
파평 윤씨
파주는 조선조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태어난 고향이라 하여
“파주목”으로 승격시켜 그 때부터 지금의 “파주”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파주(坡州)의 옛이름은 파평(坡平)이며,
“파평 윤씨”가 이곳 파주 땅을 세거지(世居地)로 삼고난 후 불린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파주시 임진강 변에 파평면으로 이름이 남아 있다.
잠시 묘지를 둘러 보다가 임도로 돌아와 느긎하게 진행한다.
비포장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서있는 고인돌, 지석묘 표지판을 따라 발 걸음을 옮겨 본다.
전북 고창이나, 경기도 강화의 고인돌에 비하면 그 모양이나 크기가 다소 실망 스럽지만
자치 단체에서 나름대로 보전에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등로 옆에 분산되어 있는 고인돌의 일부
고인돌이 있는 능선에서 내려와서 좌측 학교 담장을 따라 진행을 하다가
학교 정문 쪽으로 가서 간판을 보니 "다율 방과후 학교"라고 쓰여 있다.
다율은 이곳이 다율리 인것으로 판단이 되지만
방과 후 학교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학교 담장과 나란히 하는 군 부대를 따라 이어지는 도로로 진행을 하다가차량 소리가 요란한 핑 고개에 도착한다.
차량 소통이 매우 많은 핑 고개(교하 읍에서 문발 IC간 도로)
도로를 가로 질러서 공장 지대 길로 내려가다가 우측 숲길로 들어선다.
거미줄과 나무 가지가 얼굴을 할키는 숲을 지나고 웃 자란 풀이 뒤 덮힌 묘지를 지나
낡은 산불 감시소가 있는 곳에 올라 섰다가 비 포장 길로 내려선다.
흙 먼지로 뒤 범벅인 이곳은 파주시에서 폐기물을 분쇄하여 버리는 곳으로서
그 동안 쌓인 폐기물이 장명산 코 앞까지 쌓여 있다.
먼지도 그렇지만 코를 찌르는 악취는 참으로 고약하다.
폐기물을 쌓아놓은 곳 건너편이 장명산 정상 이지만
덤프 트럭이 수시로 폐기물을 옮겨와서 쌓는 현장을 가로 질러 건너 갈 방법이 없다.
좌측으로 내려서서 유진 골재 공장을 통과하여 정문 부근에서 산 자락으로 붙는 방법이 있고
좌측 능선을 따라 반 원을 그리면서 유진 골재 정문으로 내려섰다가 장명산 능선으로 갈 수도 있다.
좌측 능선을 따라 진행 하다가 골재 공장 입구에서 장명산으로 올라 가려하니
초입에 등로가 없어서 풀숲을 마구 헤치고 올라선다.
중턱에 이르니 폐기물 처리장 방향에서 이어지는 등로에 꼬리표가 달려 있어서
그곳부터 정상까지는 수월하게 갈 수 있다.
곡릉천으로 떨어지는 한북정맥의 끝, 장명산 (102m)
장명산
장명산은 원래 이름은 단명산 이었다.
예전에 교하군과 고양군이 한 사람에 의해서 관리 될 때 군수가 교하 사람들만 우대하여
고양 사람들이 군수를 단명산으로 끌고가 죽이려고 하였는데
교하사람들이 총을 들고 와서 살려냈다.
그때 이후로 단명산을 장명산으로 바꿔서 불렀다.
높이는 낮지만 주변의 구룽지에 솟아 있어서 산이 높아 보인다.
Naver. 지식 백과에서...
어렵게 올라 온 정상은
장명산이라고 쓴 표지석과 많은 이들의 발 자취가 서린 수많은 꼬리표가 메달려서 반긴다.
오랜 세월동안 이곳을 스쳐간 많은 산악인들의 자취가 뭇어나서 콧 날이 시큰하다.
정상 북서쪽 방향으로는 공릉천이 한강 방향으로 한가롭게 흐르고
넓은 들 건너에는 오두산 전망대 방향으로 희미한 산 그림자가 드러난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강 건너편 북한땅이 흐릿한 실 안개 속에서 아스라하다.
장명산에서 조망 한 곡릉천, 한강, 그리고 임진강과 북한 땅 개풍군(가장 먼 곳 능선)
우측 봉우리 끝 부분 돌출된 곳은 오두산 전망대 (사진, 뭉클)
교하, 파주, 문산, 임진강, 화석정.오두산 전망대...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와 애환이 많이 담겨진 지명이다.
임진 왜란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간 화석정 임진강 나루,
한양 천도설이 나 돌았던 교하, 통일로 가는 길목의 임진강 주변은
허균의 묘소가 있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파주시 교하읍이 천도 물망에 오른 것은 광해군 때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역적들의 변란이 잇달아 꼬리를 물었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당을 가르고, 사방의 산들이 벌겋게 벗어진 것은
한양의 지기가 쇠했기 때문이므로 교하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광해군의 마음은 움직였지만 천도가 실현되지는 않았다.
근래에는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씨가 통일 수도의 적지로 교하를 지명하기도 하였다.
노고산 자락 매내미 고개에서부터는 군 시설물, 도시 개발과 산업화 이후의 변형된 지형 때문에
한북 정맥의 기운이 퇴색 된 것이 다소 씁쓸하지만
한북 정맥이 끝나는 장명산에 이르니 그래도 감회가 새롭다.
더구나 한북정맥 능선과 주변은
횟수를 거듭 할수록 또 다른 면을 보고 느끼는 점이 그때마다 달라서 참으로 소중한 산행 이었다
후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마지막 2회차 산행은 회원님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나 홀로 산행을 하면서 한북정맥을 마무리 하는 의미로 정리 하였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의 한북 정맥 산행은
백두대간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정맥의 기운을 느끼고
북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산군들을 스치면서
통일에 대한 새로운 염원을 일으켜 준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복계산에서 눈에 잡힐 듯 바라 본 북한의 오봉산,
불과 40-50km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북 분단선,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북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남은 생에 북한 쪽 백두대간을 밟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매 회차마다 40명 이상의 회원님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룬 한북 정맥 산행,
최고령 나이에도 수시로 사전 답사를 통해 안전 산행을 위해 애쓰신 대간 9정맥 완주자 이 영환 고문,
산행 준비와 뒷 풀이 식사까지 원활한 진행을 위해 애쓰신 운영진들의 노고에 힘 입어
전 구간을 안전하게 산행을 마친 것에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이번 산행을 통해 정맥 산행의 묘미를 깨달은 회원님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많이 참여하여 분위기를 쇄신 시켜준 그 고마움은
7년차 우리 산악회의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8월이면 또 다른 정맥길에서 만나게 될 회원님들,
어떤 이는 다른 길을 택하고 어떤 이는 남아서 함께 하겠지만
산에서 만나서 산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아름 다움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 보다 더 바랄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간 산행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한 지혜와
흘린 땀을 통해서 채득한 고귀함을 오랫동안 간직하며
힘든 산행을 하면서 크고 작은 허물을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주신 회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걸어도 걸어도
그대 세상 끝에 이를 수 없으니
그대 거기 이를 수 없기에 고苦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
그러나 지혜가 깊고 세상을 바로 보는 이
진실로 그 끝을 보도다
청정한 삶을 살아온 이
평온한 마음으로 윤회의 끝남을 알게 되리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가려고 하지 않으리
초전 법륜경에서,,,
부처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명의 제자 들에게 설법한 최초의 법문
낙산사 의상대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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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엇그제 다녀왔건만 억쑤같이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걸었던
기억밖에는 없는데 글을 읽으면서 ,,사진을 감상하면서
요런 곳들을 걸어 왔는가 싶을 정도로 새롭네요
기억을 되살려 주심에 감사드리구요
아울러 함께한 산우님들 수고 하셨습니다~~~~~~!!!^^^^
온누리님이 정성을 기울여 작성한 한북 마지막 산행기 --![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2.gif)
거웠습니다.![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2.gif)
거운 산행기의 기록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히 보았습니다.
사진을 보고 글을 읽으며 온누리님의 꼼꼼하면서 세세한 성품을 느낍니다.
온누리님처럼 이렇게 산행을 해야 좀더 산행에 대하여 기억에 오래남을 것인데---
기분죤 산악회에서 그야말로 기분이 좋은 산우님들과 온누리님과 함께하여
온누리님이 앞으로도 건강하고 무탈하게 산행을 하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