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성과 본관
씨성(氏姓)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하고 있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성씨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요,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하면, 반대로 이족 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하여보면 다음과 같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동족의 동성동본과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과 이 족의 이성동본과 이성이본 등 8가지 경우가 있다 본관의 연원을 추적해보면,
첫째 성을 사용하기 전인 7세기 이전에는 그 사람의 출신지(거주지)가 신분의 표시로서 성의 구실(신라의 6부 같은)을 하였으며,
둘째 본관이란 시조의 출신지 또는 그 씨족이 대대로 살아온 고장을 가리킨 것이며,
셋째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성이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혈족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동성이 많이 생겨남으로써 이 족의 동성과 구별하기 위하여 동족의 표시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징세 조역의 필요상 일반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 자료는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이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 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벽성과 함께 천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가는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개관(改貫)하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조씨, 한(韓)은 청주한씨, 심(沈)은 청송심씨, 문(文)은 남평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우리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격(家格)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 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案), 공씨는 곡부(曲阜), 천시는 영양(潁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함평이씨 기성군파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