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대구시 수성구 황금동 586번지(*전 윤호일 발토로메오 자택, 현 헬로 케이블TV 북쪽)
대구부 수북면에 속한 지역으로 황청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지천동을
병합하여 황청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 구역의 확장에 의
해서 대구에 편입되었다.
한편 홈골(은곡)은 소기내 서쪽에 있는 부락으로 논에 물이 없어서 홈통을 놓고 골짜기 물을
끌어서 대었으므로 홈골이라 한다고 했다. 황청동 안에 봉촌이라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이곳은 주봉지 동쪽에 있는 마을로 논에 물이 없어서 농사때 하늘에서 비오기만 바랐으므로
봉천(奉天)이라고 했다 한다.
1893년 11월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경상도 지방을 처음으로 사목방문할 때 이곳 봉천
을 지나 대구시내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는 청도 매전면 관하에 살면서 천주교를 믿어서 구룡공소에 다녔던 윤호일 발토
로메오(*김종분 가타리나의 夫)의 윗대 가정이 이곳 황청동으로 이사온 뒤부터 인 것 같다.
그의 집안은 대단히 열심한 신자가정으로 처음엔 자기 집에서 주일 첨례를 드렸다. 즉 윤호일
발토로메오의 조부 윤흥진 필립보는 청도에서 대구 황청동의 홈골로 이사와서는 혼인하지 않고
동정으로 살면서 자기 집에서 공소 첨례를 드리고 지산, 범물, 중동, 상동, 범어동 일대에서
전교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는 침술에 능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낫게 했으므로 더욱 전교가 잘 되었다.
그는 양자로 윤도화 소시모를 들였는데 그 역시 범어본당 지산공소 회장을 맡아 교회일에 봉사
했다.
이 집안은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때 경남 밀양 단장으로 귀양와서 순교한 김범우 토마스의
손자 김동엽의 처가댁인 윤흥정과 관계되는 집안인 것 같다.
이 가문에는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 소속의 윤종일 디토 신부(*황금본당 배출 첫 사제)가
탄생하였다.
1910~1911년 로베르 신부의 교세통계표에 의하면 신자수 13명, 사규 고백 11명, 사규 성체 8명, 재고백 19명, 재성체 19명, 성인세례 4명, 예비자 5명 이었다.
(출처: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기초자료집 - 옛공소의 어제와 오늘(1815~1910), 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영남교회사연구소, 200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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