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조선 최대의 사학 기관
서원은 조선조 선비들의 혼이 깃든 곳으로 선비들의 문화와 영욕과 함께했으며, 우리 교육사에서 빛과 어둠의 두 자취를 함께 남겨 놓았다. 16세기 인물들의 문집을 읽어 보면 초창기 서원은 선비정신이 충만한 학문의 도장이었다. 맑고 형형한 눈빛을 지닌 선비들이 성리학의 세계 속에서 성인(聖人)을 향한 구도의 열정을 불태웠다.
유가의 사상과 철학은 서원에서 잉태되고 개화했으며, 선비들은 현실세계의 모순과 갈등을 뛰어넘는 구원(久遠)의 정신적 가치를 모색하고자 서원에 몰려들었다. 서원교육을 통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질서, 이른바 이(理)를 체인(體認)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서원은 양반 관료제 사회를 지탱하는 지식인 관료집단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장소이자 국가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 즉 국가의 원기(元氣)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서원이 이러한 밝은 면만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이미 17세기 인조 연간부터 서원의 사회적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 양인들을 불법적으로 점유함으로써 양역(良役)의 폐해를 유발하고, 자격 없는 인물들을 우후죽순 격으로 제향(祭享)하거나, 동일인을 여기저기에 배향함으로써 첩설(疊設)의 폐해를 가중시켰다.
1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한 군현에 수십 군데의 서원이 난립하여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낭비되고, 많은 서원들이 권력화된 정치집단으로 변질되어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서원 본래의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선현들을 제사지내는 제향기능만 변질되어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서원은 국가의 원기가 아니라 오히려 국가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우환으로 인식되었다. 숙종과 영조 연간의 서원에 대한 통제책과 훼철론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특히 개항 이후 근대교육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서원은 더욱 부정적 평가를 받으며 봉건성과 전근대성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서원은 양반 계층이 스스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이를 통해 하층민을 억압하는 기재로만 활용되었다는 따가운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당국은 서원을 봉건교육의 틀 속에 가두고 퇴영적인 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서원의 낡은 시스템은 결코 근대교육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근대교육의 시작과 더불어 서원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근대 이행기의 이러한 현상은 중국과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난다.
중국의 경우에는 청조 말 이른바 중체서용(中體西用)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기존의 서원교육을 근대교육과 접목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진행되었다. 청 말의 거유 장지동(張之洞)이 설립한 광아서원(廣雅書院)의 경우, 중국의 혼과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융합하고자 하는 야심적인 노력이 나타났다. 반면 우리의 경우에는 서원교육의 형식과 내용에서 자생적인 근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한 채, 결국 서원은 역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은 폐허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 서원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효율성과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근대교육은 아이들을 황폐화시키고 사회를 각박하게 만들고 있다.
교육을 국가발전과 성장의 도구로만 인식한 근대교육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는 지금, 서원을 통해 오늘날 교육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선비들을 흔히 도학자(道學者)라고 한다.
말 그대로 참다운 학문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참다운 학문이란 이념적으로는 지식과 덕성이 분리되지 않고, 현실 속에서는 지식과 실천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앎과 삶이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인간, 이것이 서원에서 길러 내고자 하는 인간상이었다.
배운 만큼 덕성이 함양되고, 배운 바의 진리를 곧바로 현실 속에서 실현하고자 애쓰는 인간, 이것이 유학이 염원하는 교육의 이상이었다. 선비들은 그 표준을 공자를 비롯한 성인(聖人)에 두었고, 그 성인들의 계보도가 곧 서원에서 가장 중시하는 도통(道統)이었다. 조선조 특유의 공부론(工夫論)은 바로 ‘성인’이 되기를 갈구하는 공부방법이다. 조선조에 서원교육을 태동시킨 퇴계의 공부론도 예외가 아니다.
서원을 조선조 사회에 굳게 뿌리내리게 한 인물은 퇴계 이황이다. 특히 그의 도산서원은 조선조 서원교육의 한 전범을 보여 준다. 도산서원의 출발은 도산서당에서 비롯되었다. 퇴계의 나이 57세 때, 벼슬살이를 정리하고 향리에 은거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지금 남아 있는 『연보』에는 이 시기 퇴계의 정신이 이미 세속의 온갖 얽힘과 장애를 훌쩍 뛰어넘은 자유로운 경지에 들어서 있었음을 보여 주는 일화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정신세계는 이 세계와 주객이 분별 없이 함께 어우러지고 일체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퇴계의 공부론과 수양론에서 알 수 있듯이, 서원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천명을 깊이 이해하고 그 속에서 아무런 구애 없이 노니는 정신의 높은 경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들은 결코 현실의 세계를 부정한 초월의 세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자연 속에서 배우고자 한 것은 자연의 무욕성(無欲性)과 사심 없는 순결성이었다.
퇴계는 그러한 공부의 요체를 경(敬)공부에 두었다. 경이란 마음을 투명하게 두어 어떤 순간에도 사심(私心)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는 마음공부를 의미한다. 또한 경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자기 자신을 이기고 마침내 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퇴계의 도산서원은 이러한 그의 경 공부를 실현시킬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퇴계의 공부론은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 즉 성인이 되기 위한 방법을 드러낸다.
퇴계가 생각하는 선비는 성인을 꿈꾸면서 부단히 극기복례하는 인물이다. 선비는 극기복례를 실현하여 마침내 인간과 세계의 합일을 지향한다. 선비들은 공부론을 통해 그들이 꿈꾸는 예치주의의 실현, 욕망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통제의 메커니즘을 성취하고자 했으며, 경의 공부론을 통해 공부가 삶과 분리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따라서 서원의 교육도 인간의 기본적 윤리를 다하고 인간관계를 선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을 요구한다.
이에 서원교육의 핵심은 평범한 ‘일상’의 세계와 ‘도’의 세계를 어떻게 연결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렇게 두 세계를 결합하기 위해서는 사욕을 버리고 이 세계를 깨어 있는 의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수행과 수양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경이다.
서원은 곧 이러한 경 공부를 실현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다. 경을 통해서 두 차원의 세계가 마주한다.
경의 실현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뒤따른다.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이겨내야 한다는 점에서 초인적 수행을 요구한다. “만약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가지 사욕이 불길 없이도 차가워지고, 털끝만큼이라도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삼강(三綱)이 무너지며 구법이 퇴폐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조그마한 사욕도 개입할 수 없도록 이렇게 언제나 지경(持敬)의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학자들에게는 큰 고통이 따르는 학습과정이다.
서원의 스승들은 이 과정을 스스로 감내하면서 경을 통한 마음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스승으로서 퇴계의 공부방법은 서두르지 않고 조그마한 효과를 계산하지 않으며, 다만 원대한 것을 스스로 기약하면서 차근차근 쌓아 올려서 결과를 기다렸다고 한다. 또한 쉽게 잊지도 말고[勿望], 급히 성취하고자 작위적으로 일을 만들지도 말 것[勿助]을 제자들에게 당부하면서 성인으로 향하는 교육의 길을 묵묵히 밟아 나갔다.
그러나 성인의 길은 멀고 아득하여 제자들에게는 좀더 현실적으로 다가설 수 있고, 정신적 귀감을 삼을 수 있는 표적이 필요하다. 서원에서의 스승이 곧 그들이다. 산장(山長), 사장(師長), 혹은 동주(洞主)등의 이름으로 불린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학문의 단계를 깨우쳐 주고 길을 열어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흔히 서원에서의 스승은 매우 권위적이고 고답적인 인간 유형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잘 알려진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에 의하면, 스승의 역할은 “도를 전하고[傳道], 업을 전하며[受業], 의혹을 풀어 주는[解惑]” 사람이다. 특히 도를 전하는 것을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인식하고 있었다.
지식을 축적하는 초학의 단계에서 스승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일방적 훈육을 담당하나, 도의 세계에 발을 들
여놓는 단계에서는 이끌어 주고 지켜보는 선각자일 뿐이다. 스승은 제자가 그의 길을 스스로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일 뿐이다. 퇴계는 스승을 산속의 옹달샘과 같은 존재로 비유했다. 즉 스승은 마치 산속의 샘터와 같아 제자들은 각기 자신의 양만큼 물을 마시고 떠나가는[여군음어하 각충기량-如群飮於河 各充其量] 터전으로 비유된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동도(同道)의 길에서 서로의 완성을 도와주는 상보적 관계인 것이다.
서원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에는 각자의 능력에 맞춰 교육[수재수학-隨材授學]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반드시 마음을 집중하고[응신정려-凝神靜慮], 깊이 사색하여[침잠완색-沈潛玩索], 공부한 것이 마음속 깊이 체인되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사제간의 관계를 통해서 조선조의 선비문화는 활짝 꽃피고 사상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
퇴계나 남명 그리고 율곡의 문하에서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진지함 이외에는 그 어떤 욕망도 개입되지 않은 사제간의 인격적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봉 기대승은 스승 퇴계의 은혜를 “마치 부모나 천지의 은혜와 같다”라고 했고, 퇴계 역시 고봉은 동방의 끊어진 학문을 이을 수 있는 ‘통유(通儒)’라고 하여 그를 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외우(畏友)이며 지기(知己)로 대우했다.
이렇게 서원에서의 교육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품격 높은 선비문화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서원교육에서는 깊이 있는 철학에서 우러나는 향기가 난다. 서원교육에서의 공부론은 유한한 현실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넘어서는 참다운 정신의 세계, 진리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 준다. 즉 인간적인 욕망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진리의 세계가 존재함을 말해 준다.
또한 우리는 서원교육을 통해 오늘날 우리 교육에서 상실된 소중한 가치들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사제간의 전인격적 만남, 그것을 통한 정신의 성숙 등은 교육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서원에 녹아 있던 다양한 교육적 경험과 삶의 체험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새로운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면, 서원은 근대교육을 넘어서서 새로운 지적 모델로 우리 앞에 당당하게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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