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처서가 지나니 완연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불렀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되는 계절이다. 그래선지 요즘 새벽공기가 쌀쌀하다. 농부들은 익어가는 곡식을 바라보며 농기구를 씻고 닦아서 둘 채비를 한다고 하는데 올해는 비로 인해 농작물이 늦어지고, 비가 그치자 병충해 소독이 한창이다. 계속되는 비 탓이다. 옛 조상들은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서 풀이 더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밭두렁이나 산소의 벌초를 한다고 했다. 지난주에 뒤늦게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를 피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비도 피할 요량이었지만, 올해는 어쩔 수없는 비와의 조우가 외려 운전하기엔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연세가 더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지는 어머님을 모시고 집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주로 드라이브 위주로 여행길 계획을 잡았다. 3박4일의 여행일정을 소개해드릴까 한다. 계획은 서산, 서천을 지나 군산, 부안, 영광, 법성포, 신안, 증도, 무안, 목포, 고창, 익산, 그리고 서울로 되돌아 오는 4박 5일의 여정이다.
8월 18일 오후 1시경 서산 해미로 첫 방향을 잡고 출발, 해미읍성 바로 앞에 있는 영성각(041-688-2047)에서 짬뽕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했다. 인터넷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짬뽕이라는 극찬을 받고 있는 곳이다. 역시 신선한 해물 탓이고, 풍성한 양이 그걸 전설로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나 한번 가보시면 만족하실 것이다. 이어서 서천역 주변을 둘러보고 동백정 인근 모텔에 도착, 거기서 하루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들른 동백정은 1974년 학생시절 두어 번 캠핑했던 곳. 당시 텐트를 쳤던 모래사장 해수욕장은 1978년 서천화력발전소가 생겨나고, 산언덕배기에 500년 이상된 울창한 동백나무 몇 십 그루만이 동백정을 지키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동백정은 까마득히 잊었던 옛날 친구들과의 추억을 회상케 하였다.
동백정은 전설에 의하면 약 500년 전 이 지방의 관리가 꿈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꽃다발을 보고, 바닷가에 가보니 정말 꽃이 있어서 가져와 심었는데, 그 꽃이 동백이었고 현재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해마다 음력 1월에 이곳에 모여 제사를 올리며 고기잡이에 재앙이 없기를 빌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애절한 전설과 함께 500여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동백나무 85그루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이 동백나무꽃의 만개기간은 남해안 보다 한달 늦은 3월말에서 5월 초순으로 이 기간 동안 선홍빛 동백꽃의 요염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동백나무숲으로 동백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식물분포학적 가치 또한 높은 곳이다.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언덕 마루턱에 정자를 지어 그 누각을 冬柏亭이라 명하므로 일명 "冬柏亭(동백정)"으로 불린다.
이 누각은 1965년에 한산 읍성에 있던 누각을 옮겨 세워 편액을 冬柏亭이라고 한 것으로 전해지며, 冬柏亭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조선전기에 이미 冬柏亭이라는 누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언젠가 붕괴되어 없어지고 다시 1965년에 누정을 옮겨 세우게 되었다. 동백정 주변의 기암괴석은 신혼부부들의 단골 야외촬영장일 정도로 해안경관이 빼어나,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서해안의 낙조는 가히 환상적인 풍경이다. 이곳의 바닷물은 동해안으로 착각할 정도로 맑고 깨끗하여 동백정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하였는데 지금은 서해화력발전소가 들어서 자취를 잃어버린 것이 다소 아쉽기도 하다. 동백나무씨를 발아시켜 동백나무묘목을 생산하여 관광상품으로 판매하고 있고, 매년 봄, 동백꽃이 만개하면 동백정에선 동백꽃 쭈꾸미 축제가 열린다.
막 동백정을 나서는데 비가 흩뿌리기 시작하였으나, 춘장대해수욕장을 찾아 둘러보고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해결하였다. 이미 해수욕객은 모두 떠나가고, 호젓해진 바닷가 구경과 함께 식당 아주머니의 올 여름 폭우와 태풍으로 영업이 엉망이라는 한숨 섞인 소리를 듣는 것과 자판기 커피 한잔으로 소화를 도왔다.
다음 행선지는 영광 법성포를 목적으로 비인을 지나 군산을 경유하면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근대건축물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일제강점기에 수탈기관으로 활동하였던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또한 1932~40년대의 건축물로서 의미 있는 군산세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일본제18은행, 미즈상사, 대한통운창고 등이 소재하고 있으며, 군산세관 인근에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10월 개장할 예정이란다.
군산 돌아보기를 마치고 군산항과 연결된 새만금방조제로 방향을 돌렸다. 망망대해를 가로 막아 끝이 보이지 않는 방조제 도로의 질주는 중국이나 시베리아 대지를 종단하는 기분이었다. 새만금방조제는 대한민국 사람에게 숨겨진 대륙기질의 야망을 확인하는 듯 했다.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에서 도로나 다리 하나를 만들어도 ‘대로’, ‘대교’ 부치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우리 민족이 멀리 중앙아시아에서 넘어온 반증이기도 하다. 조용하시던 어머님도 감탄과 함께 한 수 거드신다. 탁트인 전경에 답답하고 움추려 있었던 가슴이 활짝 펴지면서 마음이 환해지셨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왔고, 앞으로도 숱한 고난의 역정을 밟아야 하는 새만금사업이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갈 거대 프로젝트임이 확실하게 감지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난날 둑공사장을 가로막아 서서, 치기어린 반대시위를 벌이던 도올 김용옥이 떠오르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를 외치면서 공사장에 드러누웠던 옛 정치인들의 근시안적 치졸함이 생각되어 지면서, 그들이 그랬던 과거의 행태들을 그들이 지금은 어떻게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하는...지금이나 예전이나 비생산적인 정치판이 벌이는 한심한 짓들은...씁쓸한 감회가 한순간 다가왔으나, 잠시뿐, 소중한 미래의 대한민국이 지금의 국민 여망대로 화려하게 펼쳐지기를 염원해보는 담콤한 생각에 잠겨 보는 시간이었다.
[새만금간척사업개요]
새만금 개발 사업은 만경강과 동진강의 하구지역인 전라북도 군산시·김제시·부안군 일대에 발달한 간석지를 종합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정부의 계획사업으로 군산~부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 33㎞를 축조하여 간척토지 28,300ha와 호소 11,800ha를 조성하고, 여기에 경제와 산업,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비상할 녹색성장과 청정 생태 환경의 글로벌 명품 새만금을 건설하는 국책사업이다. 개발기간 <1단계> 2010년~2020년 : 용지 23,800ha(84.1%) 개발, <2단계> 2021년이후 : 용지 4,500ha(15.9%) 개발. 새만금의 위치 : 서해안 중앙부(전북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 일대), 새만금 면적 : 401㎢(뉴욕맨하탄의 5배, 파리의 4배, 바로셀로나의 3배, 세종시의 5.7배, 송도신도시 16배, 파주출판도시 250배), 지정학적 의미 : 환황해 생산유통중심, 서해안산업벨트의 중심, 비전 : 동북아 경제중심지(미래, 기회, 약속의 터 새만금), 전략목표 : 글로벌 신경제체제의 중심 거점, 매력적인 복합문화관광 메카, 저탄소 녹색성장의 선도지역, 청정생태의 보고로 조성, 세계적 명품 새만금 이미지 제고, 무결점 사업관리체계 구축.
지나는 차도 별로 없는 터라 다소 과속을 내면서 새만금방조제를 지나 부안을 거쳐 영광 법성포로 향했다. 예전 법성포에서 맛보았던 여러 음식점 중 가장 입맛에 맞았던 음식점과, 음식으로는 어머님을 모시고 꼭 한번 드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것이 굴비정식이다. 물론 인근의 다른 식당들도 맛에서는 거의 비슷하고 반찬내용도 그러기도 하다. 다만 깍두기식당(061-356-7944)은 주인 부부의 인정이 유별나다. 유별나기보다는 순박하다함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법성포는 우리나라 조기의 7~80%를 공급하는 곳으로 읍내 전체가 모두 조기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몇 년 전에는 상점수가 3백 여 군데 정도 될 것이라 했는데, 지금은 더 늘어서 4백80여 군데는 족히 될 것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 잡혀도 이곳의 손질을 거치면 모두가 영광굴비가 된다고 한다. 노르스름하게 생겨서 고소하고 감칠맛을 내는 영광굴비는 이곳만이 자랑하는 영광 고유의 특산품이다. 이곳 분들 나름의 노하우가 있을 테지만, 아마 바닷물이나 기후 탓이리라 생각이 된다. 깍두기식당 주인에게 그 맛의 이유를 알아보니, 첫째 법성포의 특수한 자연환경과 지리적 기상이 원인이라고 한다. 서해의 하늬바람 영향으로 건조조건이 월등하단다. 둘째로 예부터 전수해 내려오는 1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염장하여 제조기법이 독특하고 특별한 맛을 유지하기 때문이란다. 마지막으로 오염되지 않은 물로 세척하기 때문이다. 역시 영광굴비가 최고의 굴비로 자리 잡기까지는 나름의 비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판매되는 상품과 손질한 뒤 바로 구어 먹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 먹으면 더욱 고소하고 감칠맛 난다는 이야기로 더욱 맛을 돋구웠다. 어머님도 집사람도 어느새 밥 한 그릇 휘딱 비우고 밥을 추가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이런 맛을 언제 다시 맛볼까하는데, 한번 과식하면 어떠냐는 식당아주머니 말에 그만 과식의 길로 들어섰다.
법성포로 들어오는 길가에는 예전과 달리 모싯잎송편떡집이 대량으로 생겨나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싯잎송편은 일반적으로 송편보다 두 배 가량 크며, 옛날 농가에서 머슴들의 노고를 위로해주기 위해 만든 음식으로 '머슴송편' 또는 '노비송편'으로도 불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푸르고 청정한 빛깔이 돋보이는 데다 맛도 별나 떡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왔다. 다년생 풀인 모시는 옛 선조들의 여름옷 재료로 쓰였다. 단백질과 회분무기질 등의 성분이 일반 야채보다 월등히 높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으며, 모싯잎 송편은 이것의 잎을 따다가 깨끗이 씻어 삶은 다음, 쌀과 함께 곱게 갈아서 반죽하고 그 안에 동부(콩)를 넣어 찌는 떡이다. 모시잎 송편은 서천군이 한산모시와 함께 특산물인데, 오히려 영광군인 이곳에서 특산물로 사업을 벌이는 것으로 보인다. 도로가의 곳곳이 새로 단장한 모싯잎 송편 떡집들이다. 지역주민에게 물어보니 대략 170여 군데에 이른다고 한다. 영광굴비와 함께 모싯잎 송편을 웰빙상품으로 영광군 핵심 정책 사업으로 키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군민이 합심해 벌이는 사업으로 한발 빨리 움직이는 영광군 공무원들의 부지런함이 부럽게 여겨진다. 모싯잎 송편은 한국식품연구원의 성분 분석 결과 칼슘의 경우 100g당 우유에 들어 있는 칼슘보다 무려 48배나 많이 함유되어 있고, 모싯잎을 꾸준히 섭취할 경우 골다공증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천연 식이섬유가 들어 있어 배변에 도움이 되어 변비, 다이어트에도 효능이 있다고 한다. 깍두기식당에서도 후식으로 모싯잎 송편 각 1개씩 내어 준다.
다음 코스인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군으로 직행하여 지도읍을 거쳐 해저유물 인양으로 유명해진 증도로 향하였다. 지도읍은 1975년 육지와 연륙했고, 증도는 2010년 연륙교가 설치되었다.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증도는 모든 것이 속도를 모낮추고 정지된듯 천천히 움직이는 마을이다. 이곳엔 우리나라 단일염전 최대의 소금 생산지인 광활한 태평염전을 보유하고 있다. 간척지로 생긴 염전과 농지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으며, 태양과 바람에 의해 자연 그대로 생산되는 천일염과 친환경 농수산물,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과 섬 특유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는 슬로시티의 섬이다.
섬의 명칭은 예로부터 이곳은 물이 적은 섬이라 하여 시리섬(시루섬)이라 부르다가 앞시리, 뒷시리, 우전도 3개의 섬이었으나, 앞시리와 우전도가 합해져서 전증도가 되고, 뒷시리가 후증도가 되어 2개의 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다가 전증도와 후증도가 간척사업으로 합해지면서 크게는 여러 섬이 합쳐졌다는 의미로 증도로 불렸다. 증도는 2010년 증도대교 개통으로 배를 타지 않고 지도, 사옥도를 지나 증도대교를 건너 갈 수 있게 되었다.
증도에는 간척지로 생긴 염전과 농지가 조화 있게 펼쳐져 있으며, '80년대 이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으나, 섬 전체가 어족이 고루 풍부하여 전체 가구의 26%가 어업에 종사합니다. 염전 사이를 지나 한참 가다보면 우전리에 위치한 우전해수욕장이 보인다. 백사장 길이 4km, 폭 100m의 우전해수욕장은 90여 개의 무인도들이 점점이 떠있는 수평선이 매우 아름다우며, 맑은 물과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 때문에 시원스러운 여름날의 피서를 마음껏 맛볼 수 있다. 또한, 방축리 도덕도 앞 송·원대유물매장해역(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74호)은 600여 년 간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송·원대 도자기 등 23,024점의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바 있다. 목포에서 43km 떨어진 도덕도 앞 해상은 수심이 20~24m이며 조류가 세찬 곳이어서 당시 이곳을 항해하는 중국선박이 풍랑을 만나 침몰했던 것으로 보인다. 송.원대 유물은 이 지점의 해저 갯벌에 묻혀 있던 침몰선박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을 인양해 낸 것으로, 도자기는 송·원대의 중국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철 또는 청동을 주조하여 만든 금속유물과 동전 등도 많이 발굴된 바 있다.
증도는 4면이 바다이므로 염전이 많습니다. 그래서 특산물은 우선 소금을 들 수 있고 해태양식도 잘된다. 또한, 주변에서 잡은 생선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에서 나는 관계로 생선회 맛으로는 일품이다. 낚시터로는 내ㆍ외갈도, 명덕섬, 대섬, 부남도, 명섬 등이 있으며 농어와 장어낚시가 잘된다. 민물낚시터로는 증동 염산지가 유명한데 붕어와 장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태평염전은 체험관광 및 소금박물관 등 소금과 관련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문화관광지로 개발하여 방문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색다르고 특별한 체험공간이다.
증도는 금연의 섬이고 주민의 90%이상이 기독교 신자로 타종교가 없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섬이므로 ‘천사의 섬’이라 부른다. ‘자동차 없는 섬’으로도 추진할 계획으로 있다. 슬로시티 증도를 순례하는 길은 4개의 테마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1코스가 ‘노을이 아름다운 사색의 길’입니다. 2코스는 ‘보물선 순교자 발자취 길’이다. 3코스는 ‘천년의 숲길’이다. 4코스는 ‘갯벌공원 길’이다. 5코스는 ‘천일염 길’이다.
우리는 5코스와 4코스를 돌고 숙박할 곳을 정한 뒤에 저녁식사로 제철인 민어회와 탕을 먹기로 하고 스마트폰을 통해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안성식당으로 향했다. 1kg에 9만원이었습니다. 조금 비싸다 생각했는데...현지 사정에 둔하니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음식값 깍으면 깍은만큼 손해본다는 생각에 그대로 시켰다. 민어는 옛날 늙은 어부가 바다에 꽂은 긴 대롱에 귀를 대고 찾는 데, 수심 100m 진흙바닥에서 울리는 ‘소 울음소리’를 듣고, 활처럼 휘는 낚싯대를 당기면 사람만한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고 한다. 이 물고기를 바로 임금님 보양식으로 올려서 ‘민어’라고 지칭하였다. 이름에 백성 民이 있지만 그 의미와는 달리 ‘삼복더위에 양반은 민어탕, 상놈은 보신탕을 먹는다.’는 속설이 전해질 만큼 임금이나 양반 계층이 즐긴 고급 어종이다. 6~10월까지가 제일 맛있는 시기입니다. 민어는 크기가 커서 민물고기의 고래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목포 임자도 근처에서 잡히는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따라서 이맘때가 되면 미식가들은 제대로 된 민어회를 즐기러 목포로 찾아든다.
“10kg은 넘어야 맛이 있죠. 큰 것은 20kg도 넘어요.” 목포에서 2대에 걸쳐 40년 동안 민어회를 요리하는 영란횟집(061-244-0311) 박영란 대표(58)의 말입니다. 1대 사장인 그녀의 어머니는 단연 선어회의 원조입니다. “민어는 활어보단 선어회가 더 맛있어요.” 민어는 7~8월 주로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데 성질이 급해서 건져 올리는 순간 죽어버린다. 이런 특성 때문에 곧바로 피를 빼 하룻밤 숙성시키면 쫄깃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혀끝을 감돈다고 한다. 또한 전으로 부치면 살이 퍽퍽해지는 농어나, 광어와 달리 민어는 살이 익어도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홍어하고 동동주, 상어를 파셨어요. 그땐 민어를 탕으로나 했지 회로는 잘 안 먹었어요. 민어회를 드셔본 분들 반응이 아주 좋더라고요. 거기에 우리만의 비밀 무기를 곁들였죠.” 영란횟집의 비밀무기는 바로 ‘막걸리 식초로 만든 초장’. “동동주를 담가 6개월간 발효를 시키면 식초가 돼요. 여기에 태양초 고춧가루와 물엿을 섞어 만들면 그 맛이 아주 독특하죠.” ‘막걸리 식초 초장’은 민어회만큼이나 영란식당의 명물이 돼 손님들의 반응이 뜨겁다. “직접 오신 손님은 물론이고 전화주문을 하시는 분들도 꼭 초장을 더 달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다보니 1년에 2천근 정도의 고춧가루가 들어가네요.” 선홍빛에 입에서 살살 녹는 민어회와 ‘막걸리 식초 초장’의 앙상블은 전국 각지의 손님을 끌어 모았다고 한다. “민어가 본래 임금님이 ‘복달임’으로 드셨던 것이에요. 저희 집 역시 여름이 최고 성수기죠. 한창 바쁠 때는 하루에 100KG이상씩 나가요. 개그맨 남희석 씨는 맛을 보시더니 너무 맛있다고 바로 부인께서 운영하시는 치과로 택배를 보내시더라고요.” 입소문은 돌고 돌아 전화주문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청와대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목포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신안비치호텔에 계셨는데 저희 가게가 좁아서 직접 오실 수는 없고 수행원들이 와서 포장을 해갔죠.” 김 전 대통령의 민어회 사랑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종종 전화주문을 하시곤 했어요. 복날도 주문을 하시고요. 또 국회의원들이 사서 보내기도 했고요. 잊지 않고 다시 찾아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요.” ‘영란횟집’의 음식은 무엇 하나 사는 것이 없단다. 된장, 고추장은 물론 김치, 밑반찬 여기에 후식으로 나가는 차도 직접 만든다고 한다. 또한 설탕까지 유기농만을 사용한단다. “사람 입에 들어가는 거잖아요. 깨끗하고 맛있는 것을 드려야죠. 매년 메주를 띄워 장을 담그고 매실이나 유자, 대추도 제철에 구매해서 직접 다려요.” 이런 정성은 재료비도 많이 들뿐 아니라 몸도 힘들 것이다. 왜 이런 수고를 감수하는 것일까? “민어가 어획량이 많이 줄어서 어떤 때는 아예 없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식당 문을 닫을 수밖에 없죠. 전국에서 먼 길 오신 손님들이 식당 문이 닫혀 발길을 돌리시려면 얼마나 화가 나시겠어요. 그래도 우리 집 민어회 맛을 잊지 못한다고 또 오세요.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데 당연히 정직한 음식으로 보답해 드려야죠.”
이러한 정성이 가득 찬 목포의 영란횟집의 맛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작년에 먹어본 경험도 있고 해서, 특히 이곳이 민어 최상품의 산지인지라 많은 기대 속에 민어회를 주문하였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내 입맛에도 넌적넌적하는 것이 경험했던 민어회의 촉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 드셔보는 어머니의 입맛은? 집사람 입맛은? 결국 민어회는 내 독차지가 되었다. 미흡하지만, 어쩌냐, 그 비싼 민어회를...어머니와 집사람은 민어탕으로 저녁을 때우고, 나는 밥대신 민어회로 배를 채웠다. 보양식으로 먹는 민어탕은 그런대로 입맛에 닿은 게 다행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목포는 숙성과정을 거치는데 이곳은 바로 회를 뜨기 때문에 다소 다른 맛을 낸다고 한다. 그래도 목포에서의 민어회 맛이 더욱 그리워진다. 저녁식사 후 숙박할 곳은 한옥 민박이었다. 규모가 대단히 큰 엘도라리조트가 있었지만, 이미 예약이 가득 차서 머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휴가철이 지났는데도 만원사례라니 이곳이 유명세를 탈만한 곳이긴 하는가보다.
증도를 빠져나와 목포로 향하였다. 초의선사 출생지를 목표로 삼았다. 초의선사 출생지는 무안읍에서 목포방면으로 18km 떨어진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로 격동하는 조선후기 침체된 당시의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승으로 근근이 그 명맥만 유지해 오던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킨 다성이었으며, 깊고도 명징한 시ㆍ서ㆍ화를 남긴 한국문화에 깊이 각인된 초의선사가 지난 97년 5월 문화인물로 선정된 계기로 현창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생가 추모각을 복원하고 기념전시관 등을 건립하였다. 유적지 안의 초의선사기념관에는 그의 친필과 그림, 저서, 그리고 선사께서 사용하던 다기들을 재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초의선사(草衣.1786~1866. 속가명 張意恂)는 조선 정조 10년인 1786년 4월 5일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나, 15살에 벽봉민성 스님을 은사로 나주 운흥사(雲興寺)에서 출가했다가 해남 대흥사(大興寺)로 옮겨 완호윤우(玩虎倫佑) 문하에서 수행을 한 뒤 이름을 떨쳤다. 초의는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의 작은 아들인 유산 정학유와 동갑나기로 평생을 돈독한 우정 가운데 살았다.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40여 년 간 수행하면서 도교는 물론 유교 등 범서에도 능통, 선사상과 차에 관한 저술에 몰두하여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어느 날 두 스님이 조주 스님을 방문하였다. 조주가 한 스님에게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예, 왔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럼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하였다. 다른 스님에게도 “예전에 이곳에 온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그 스님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그렇다면 차나 마시고 가게”라고 하였다고 한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스님이 “어찌하여 이곳에 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온 적이 없는 사람이나 차나 마시고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주 스님이 “자네도 차나 마시고 가게”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가 당나라의 스님 조주(趙州, 778~897)의 어록에 나오는 그 유명한 '끽다거(喫茶去: 차나 마시고 가게)'로서, 이 ‘끽다거’는 나중에 선(禪)을 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화두(話頭)가 되었다. 이 일화에서 '차 마시는 것과 선(禪)하는 것은 다 같은 것(茶禪一味)'란 표현이 나온다. 그 차선일미의 경지를 우리나라에 제대로 열어준 분이 바로 두륜산에 은거한 초의선사였다.
하늘빛은 물과 같고 물은 연기와 같다 天光如水水如煙
이곳에 와서 지낸 지도 어느덧 반 년 此地來遊已半年
좋은 밤 몇 번이나 밝은 달 아래 누웠나 良夜幾同明月臥
맑은 강가에서 물새를 바라보며 잠이 드네 淸江今對白鷗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 원래 없었으니 嫌猜元不留心內
비방하고 칭찬하는 소리 응당 듣지 않았네 毁譽何曾到耳邊
소매에는 뇌소차가 아직 남아 있으니 袖裏尙餘驚雷笑
구름에 기대어 두릉의 샘물을 담는다네 倚雲更試杜陵泉
................石泉煎茶(돌샘물로 차 끓이다)
젊은 시절 전국의 산천을 유람하였던 초의는 두륜산으로 돌아와 산자락에 두어 칸 모옥(茅屋)을 짓고 그곳에서 차밭을 일구며 늘 차를 마시면서 생활하였다. 산허리 돌 사이를 졸졸 흘러내리는 석천(石泉)의 물을 길어다 차를 끓여 마시고 있으면 비방하고 칭찬하는 속세의 소리는 저 멀리 아득한 발 아래로 작아지고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밝은 달, 그러한 이곳에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그곳 작은 암자의 이름을 일지암(一枝庵)이라 하였으니, 옛날 8세기말 당나라를 살았던 한산스님(寒山)이 그의 시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에만 있어도 편하다"에서 느끼는 뱁새의 편안한 마음 그대로가 아닌가? 차를 마시는 것은 곧 선의 참 맛을 느끼는 것이다. 불법은 고차원의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곳에 있으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초의는 39살이 되던 1824년 이곳에 정착하며 81살에 생을 마감 하실 때까지 40년간을 이곳에 구름처럼 머물렀다.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一傾玉花風生腋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身輕已涉上淸境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다시 나의 벗이 되고 明月爲燭兼爲友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둘렀구나 白雲鋪席因作屛
...........東茶頌 第16頌
겨드랑이에 바람이 인다는 표현은 당나라 시인 노동(盧仝, 795~835)의 시에 나오는 귀절 七椀喫不得 也唯覺兩腋習習淸風生(일곱째 찻잔은 다 마시기도 전에 두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이는 걸 깨닫겠네)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해마다 봄이 되면 산자락에 자라는 야생차를 따서 차를 만드셨는데, 그 솜씨가 대단하여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머물기 아홉 해 전에 서울에서 만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그 뒤 이 스님의 매니아가 되었다. 스님이 가르쳐준 차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이다. 특히 일지암에 머문 이후에는 해마다 차를 보내달라고 닦달을 한다.
“인편으로 편지를 받으니 선사가 사는 산중이나 내가 사는 이곳이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늘을 이고 그리워하면서도 어찌해서 지난날은 그처럼 격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세밑 추위가 기승을 부려서 벼루 물고 술을 얼리고도 남을 정도랍니다. 선사가 사는 남쪽은 들판에서도 이런 일은 없겠지요. 그러니 따뜻한 암자 속에서이겠습니까. 요새 청아하고 한가한 복을 입어 방석과 향등(香燈)이 한결같고 가볍고 편안하신지요? 그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몸은 계속 서울에만 있으니, 설이나 지내고 봄이 오면, 다시 한 번 호남으로 갈 신과 지팡이를 매만질까 합니다. 차는 이 갈증이 난 폐부를 적셔 주어 좋지만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한입니다. 향훈 스님과 전에 차에 대해 약속했는데, 왜 아직 소식이 없는지. 부디 이 뜻을 전하고 차 바구니를 뒤져서라도 봄에 이리로 오는 인편에 보내 주면 고맙겠습니다. 글씨 쓰기도 어렵거니와 인편도 바빠서 이만 줄입니다. 그런데 새로 딴 차는 왜 돌샘과 솔바람 속에서 혼자만 즐기면서 먼 곳에 있는 사람 생각은 하지 않는 것입니까? 서른 대의 매를 아프게 맞아야 하겠구려.”
완전히 생떼를 쓰는 수준이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서로 먼저 먹겠다고 싸우는 차원이다. 이런 차를 들려놓고 추사는 그가 늘 자랑하던 다반향초에 빠져드는 것이다.
靜座處茶半香初 고요히 앉았으니 차는 반으로 줄어도 향기는 그대로
妙用時水流花開 신묘한 작용이 일어나서 마치 물 흐르고 꽃 피는 듯
1866년 스님의 입적으로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폐허가 된 것을 안타까워하던 차인(茶人)들이 1979년 뜻을 모아 일지암을 복원했다. 해남의 다인으로 활동하던 김봉호(1924~2003), 서울에서 차문화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하는 명원(茗園) 김미희(金美姬,1920~1981)여사(쌍용그룹의 창업자인 김성곤 회장의 부인), 미국에서 돌아온 박동선씨 등이 참여했다. 명원 김미희 선생이 일지암 터를 찾기 위해 버선발로 오르다 발이 아파 김봉호 선생이 업고 오른 것은 우리나라 현대 차 역사의 전설이 되었다. 여기에는 진주에서 차문화운동을 한 아인 박종한도 참여해, 당시 아흔 살이 넘은 박응송스님을 업고 다니며 일지암 터를 확인했다고 한다. 1979년 4월 일지암 터가 확인되자, 1979년 6월 5일 공사를 시작하여 연말에 완공하였다. 초가로 된 작은 집을 짓고 그 뒤의 석천을 찾아 돌확을 따라 흘러내리게 하였다. 그 이듬해부터 용운 스님이 상주하면서 이곳을 차의 성지로 가꾸었다.
사흘을 줄기차게 다니다 보니 어머니께서 체력에 무리가 되셨는가보다. 당초 계획은 진도 경유해서 강진을 지나 구례, 곡성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선 점심을 목포에서 하고, 진로를 변경하여 익산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목포 북항의 횟집촌으로 가는데, 이번은 회보다는 생선구이를 주문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북항에서 생선구이집을 찾았으나, 모두가 횟집이고 매운탕집이었다. 목포에서 유명한 하당의 미도정을 찾아 칼치조림을 맛보았다. 주인장은 무뚝뚝한 편이지만, 예상대로 유명세를 탈만한 집이고, 음식 맛이 다소 짜다 싶지만, 괜찮았다. 함께 나온 푸짐한 돌게장도 별미였다. 어머니가 좋아 하시니까 더욱 맛이 있어 보였다. 어머니 소원이 풀리시는가보다. 연신 맛있다는 표현이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제 익산으로 향했다. 미륵사지 발굴 중에 다녀왔는데, 미륵사지(彌勒寺址)는 사적 150호로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소재의 백제 601년(무왕 2)에 세운 미륵사가 있던 터이다. 이곳에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익산은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인 전주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논산시와 인접해 있는 인구 30만의 도시이다. 익산은 백제 말기인 무왕 대에 이르러 사비(부여)에서 익산으로 백제의 수도가 천도되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와 관련하여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등 고고학적 발굴성과도 주목해볼 만한 곳이다. <서동설화>로 잘 알려진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1300년 전의 로맨스의 비밀을 간직한 미륵사지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공간이다. 백제는 의자왕대에 신라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데, 무왕은 의자왕의 바로 전 대의 왕으로 백제 말기의 왕이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의 탄생 설화로 <서동설화>의 내용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었다. “어머니가 과부로 남쪽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교통하여 무왕을 낳았고, 어렸을 적 이름이 서동인 그의 기량을 헤아릴 수 없었으며 마를 캐어서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하다가 미모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선화공주와의 사랑을 동요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여 선화공주와 결혼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일화를 통해 창건된 것으로 그동안 알려져 왔다. 무왕의 탄생설화가 기록된 <삼국사기>에 미륵사의 창건 설화가 역시 기록되어 있다.
“서동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에 지명법사를 만나러 행차하였는데 그들이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그 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였고, 왕후가 그것을 보고 ‘이 곳에 큰절을 세웠으면 하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라고 하여 왕이 이를 수락하고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라고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동안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알려졌는데, 최근에 그 내용을 반박할 수 있는 유물이 미륵사 석탑에서 나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문점이 생기고 있다.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적심 부재와 심주석을 조사하던 중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택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후략)”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녀의 딸로 명시 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삼국유사>에서 밝혀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륵사는 무왕이 익산을 백제의 도읍으로 삼았는가? 라는 문제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동설화>에 대해서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라는 물음표를 던져주고 있다. 현재 미륵사는 남아있지 않고, 석탑과 건물이 있었던 곳만 확인되고 있어서 미륵사지라고 명명하여 부르고 있으며 발굴을 통해 미륵사의 규모를 확인하고 복원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미륵사지 인근 왕궁리에 소재하는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20년 동안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다 후대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는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하고 중요 출토유물을 전시하여 왕궁리유적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고 백제기와를 관람객이 직접 만져보면서 기와 제작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목판찍기 체험도 준비되었다. 백제 왕궁터는 우리나라 고대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함께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건물지를 비롯한 14개의 백제 건물지와 백제 최고의 정원유적, 금, 유리, 동 등을 생산하던 공방지,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화장실 유적 등이 조사되어 왕궁의 축조 과정과 왕궁에서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유물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중 300여점을 선정·전시하였는데, 왕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금제품, 유리제품, 수부(首府)명 인장와, 전달린토기 등과 함께 연화문 수막새, 각종 인장와와 토기류, 금과 유리제품을 생산하던 도가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다양한 형태의 금제품,유리제품과 이를 생산하던 각종 도가니, 인장와, 명문와, 수막새, 전달린토기, 완,합, 등잔, 대형토기 등 왕궁리유적 출토유물 약 1,4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 王宮里 五層石塔)은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
익산 왕궁리유적을 돌아 본 뒤 익산보석박물관을 관람하였는데, 보석박물관은 미륵사지 석탑, 왕궁리 5층석탑 등 백제문화유적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여 관람객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 뿐 아니라 보석에 대한 상징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총 부지면적 141,990㎡ 규모의 왕궁보석테마관광지 내에 1996년부터 시작하여 2002년 5월에 완공 개관하였다. 주요시설로는 지하1층 지상2층 연면적 6,215㎡ 규모의 보석박물관 지하에는 수장고와 기계실이 있으며 1층에는 기획전시실과 보석판매코너, 2층 상설전시실에는 진귀한 보석과 원석을 전시하고 있으며, 연면적 932㎡ 규모의 화석전시관은 화석 및 공룡모형 등을 전시하여 청소년들에게 상상의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2004년에 보석관련 강좌를 통한 사회교육기능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체험관 시설을 완공하여 모든 방문객들에게 살아 있는 체험강좌를 제공하고 있다. 그 밖에도 식당, 보석광장, 야외무대, 칠선녀상 등 조형물들과 화석전시관 주변에 공룡 테마공원을 조성하여 보석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에게 편안한 휴게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익산보석박물관을 마지막으로 익산IC로 진입 3박 4일의 여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였다. 철늦은 여름휴가로 사람들로 붐비지 않은 덕택에 마음에 닿는 길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고, 가는 곳마다 친절한 접대를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번 여행길은 어머니와 집사람이 함께한 여행이어선지 많이 걷거나 높은 곳은 되도록 피할 수밖에 없어, 피곤하거나 힘든 여행이 아니었으며, 특히 맛집으로 연결된 먹거리여행과 볼거리 여행을 겸했던 행복한 여름휴가길이었다.
녹색자연과 문화유적이 함께 어우러진 지역의 이번 여행은 언제 가까운 분들과 다시금 떠나고 싶은 멋진 여행코스였다. 이에 상세한 내용의 여행후기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 관심 있는 분들의 여행길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처서가 지나면서 매미소리도 잠재워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가을로의 이행이 본격화될 것입니다. 점차 일교차가 심해집니다. 이런 때일수록 감기에 더욱 조심하시고 다정한 사람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 만들어 가시기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