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서사】서산 중고제 맥을 찾아서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 방진관, 심상건, 심화영 선생
3일 주말 아침 겨울비가 내리다 멈췄다. 하늘은 검고 바람이 부니 스산하다.
“제1회 중고제 국악축제를 앞두고 서산 중고제 명창 유적 답사 가는 날인데, 날씨도 춥고.......” 비 맞은 중마냥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부산하게 출발 준비를 했다.
서산시청 앞에 도착하니 문화해설사님은 우산을 쓰고 느티나무 아래 벌써 나와 있다. (사)중고제판소리보존회 백종신 부회장님도 건너 길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고, 서산승무 이애리 선생도 대기하던 자가용에서 쏙 고개를 내민다.
# 중고제 문화유산 ‘낙원식당’ 복원을 기도하며
우선 중고제 전통가무악의 명문 심정순 家의 상징이었던 읍내동 율방 ‘낙원식당’부터 들리기로 했다. ‘낙원식당’은 심정순이 중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장남 심재덕과 함께 운영했던 당시에는 서산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읍내동에 있던 율방이다.
하지만 읍내동 2-14번지. ‘낙원식당’의 옛 모습은 간데없다. 현재는 사유지로 카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절로 난다.
2017년 12월. 읍내동 2-14번지에 위치한 구옥 낙원식당은 필자를 비롯한 지역문화예술인들의 보존 호소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말았다. 문화유산 보존에 뜻 있는 분들과 심화영 선생이 2005년 서산시 읍내동 2-14번지(85.98㎡)에 대해 유허지 문화재 지정을 충청남도에 신청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낙원식당’은 중고제 전통예인들의 사랑방으로 내포 지역의 명소였다. 당시 낙원식당에 드나들던 예인으로는 명창 이동백을 비롯 김창룡, 한성준, 이화중선 등 당대 내노라 하는 명인·명창들이 총망라되었다. 그런 율방 ‘낙원식당’은 1930년대 들어 전통예술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 핍박이 거듭되면서 심화영이 오빠 심재덕과 함께 청진으로 이사를 가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청진권번은 조선의 전통예인들이 핍박을 피해 집결해던 곳이다. 그곳에서 한성준은 춤사범으로, 심재덕은 악기사범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청진권번 또한 1940대 초반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됐다.
# 중고제의 꽃을 피운 심씨 가문
심정순(沈正淳, 1873~1937)은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마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해인 1873년 서산의 읍내리(현 서산시 읍내동) 학돌재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다가 26세 무렵부터 부친 심팔록에게 국악을 배운 심정순은 소리를 비롯 피리와 통소에 능통했다. 『매일신보』의 「예단일백인(藝端一百人)」에는 심정순과 관련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전한다. 충남 서산이 고향이고, 25세에 음악을 시작하여 조선 팔도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중고제 국악명인 심정순은 중앙무대에서 가야금, 가야금병창, 판소리 명창으로 일가를 이뤘다. 전통 기법을 고수하는 한편, 판소리 개작 운동에도 앞장섰다. 1910년 장안사 소속으로 ‘심정순 일행’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는 심정순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그밖에도 음반취입, 방송출연, 신문연재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1912년 『매일신보』에 판소리 사설을 연재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문학인 이해조가 산정(刪定)한 심정순 판소리 사설은 「강상련(심청전)」, 「연의각(흥부전)」, 「토의간(수궁가)」 등이었다. 이는 ‘듣는 판소리’에서 ‘읽는 판소리’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심정순의 예맥은 후손에게 이어졌다. 장녀 심매향(沈梅香, 1907~1929)은 조선권번 소속의 이름난 예기(藝妓)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심매향은 악가무를 섭렵하고 공연과 음반취입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명성을 얻었다. 안타깝게도 20대 초반에 요절했다. 사망 소식이 조선일보에 기사화될 정도로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심정순의 장남 심재덕(沈載德, 1899~1967)은 국민가수 심수봉의 부친이다. 다소 뒤늦게 국악의 길로 들어선 그는 부친 심정순에게 기예를 익히고 명무 한성준 그리고 여동생 심화영과 청진권번, 진남포권번 등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중반 낙향하여 아버지와 서산에서 낙원식당을 운영하며 소위 ‘서산율방시대’를 주도했다.
심재덕은 한때 이화학당에서 국악이론을 가르쳤을 정도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보기 드문 예인이었다. 심정순의 막내딸 심화영(沈嬅英, 1913~2009)은 오빠 심재덕에게 중고제 단가, 가야금 등을 배웠다. 그의 승무는 단아하고 정갈한 미감의 고제 형식으로 이채롭다.
또 한 분 주목되는 인물은 바로 심상건(沈相健, 1889~1965)이다. 그는 부친 심창래가 작고하자 숙부 심정순 밑에서 성장한다. 숙부 심정순에게 국악 전반을 사사하고, 서울 무대로 진출하여 국악계의 주요 인물로 우뚝 섰다. 특히, 딸 심태진과 더불어 1948년 조택원무용단 일원으로 도미(渡美)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심상건, 심태진은 해방 이후 해외에 진출한 최초의 국악인으로 기록된다.
심상건은 신무용가 조택원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은 인물로 특별한 존재다. 1949년 뉴욕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된 조택원의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는 심상건의 토속적인 장고가락에 토대하여 안무된 신무용 명작이다. 가야금의 명인 고(故) 황병기는 심상건에 대해 ‘해학과 파격의 산조 스승’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한편, 심상건은 즉흥연주의 달인으로 통한다.
마지막으로 심화영(沈嬅英)은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후 18세 무렵인 1945년에 충청남도 서산으로 내려와 큰오빠 심재덕에게 악(樂)·가(歌)·무(舞)를 배웠으며, 또한 당시 충청도 지역에서 춤 잘 추기로 유명했던 방모 씨를 통해 승무를 전수 받았다. 「심화영류 승무」가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심화영 승무보존회가 결성되었으며, 전수 조교인 외손녀 이애리와 이수자인 서은희 등 10여 명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 ‘고수관이 춤추고 노래를 하면 황소가 웃는다’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읍내동 ‘낙원식당’을 떠나 명창 고수관(1764~1849)의 생가터가 있는 고북면 초록리로 발길을 돌렸다. 짓뿌렸던 하늘이 갠다.
가는 도중 왼쪽으로 정순왕후 생가가 있는 음암면 유계리 마을이 보인다. 정순왕후(1745~1805)는 1759년에 14세의 나이로 영조의 계비가 된다.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주 원씨의 딸로 추사 김정희의 증대고모뻘 되는 인물이다.
고수관은 조선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삼년상을 치룬 해 지금의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草綠里)에서 태어났으니 초록리와 유계리의 거리만큼 한 시대의 하늘 아래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살았다.
초록리는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을 띤 연암산(燕岩山) 아래 새초풀(억새의 방언)이 파랗고 무성하게 자라서 ‘새푸르기’라 불렸던 마을이다. 초록리 뒷산은 연암산으로 산속 깊은 곳에 천장사가 자리잡고 있다. ‘하늘이 숨긴 절’이라는 천장사는 한국불교 선종을 중흥한 경허(鏡虛)(1849~1912)가 수도하면서 수많은 일화를 남겼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고수관이 사망한 해에 경허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경허는 고수관이 걸었던 그 숲길을 또 다른 걸음으로 걸었을 것이다.
초록리에서 나서 초록리에서 득음을 한 고수관은 당대 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 말은 초록리 근방에서 소리를 배웠다고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726년 홍성 결성에서 판소리의 효시라 칭하는 최선달(1726~1805)이 태어났다.
최선달은 초기 판소리 명창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조선창극사』에서는 광대의 효시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후일 전도성(全道成, 1864-?)의 구술에 의하면, 박만순(朴萬順, 1830?-1898?)과 이날치(李捺致, 1820-1892)가 과거 역대 명창들을 일일이 호명하는 소리풀이를 할 때, 하한담(河漢譚)과 최선달을 꼽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귀중한 기록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고수관의 배움의 소릿길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예헌 이철환(1722~1779)이 260여 년 전인 1753년 10월 9일부터 이듬해 1월 29일까지 충남 내포 가야산 일대를 유람한 후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유람기인 <상산삼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철환은 18세기 초부터 가야산 인근 절에는 스님들이 입으로만 사람소리, 새소리, 짐승소리를 내는 ‘구기 공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2월 4일 밤에 승려의 연희를 구경했다. 회잠(會岑)과 여옥(呂玉) 두 사미가 있는데, 나이는 각각 17세였다. 용모가 단정하였고 두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염불하는 목소리가 각기 맑고 고와 사람 됨됨이와 같았다. 회잠은 또한 입술을 오므려 기운을 북돋아 나각(螺角) 소리들을 흉내냈는데 천연스럽게 절묘하여,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니 칭찬하곤 했다. 옛날에 대웅씨(부처님)가 가릉빈가의 선음(仙音)으로 무루법회(無漏法會)를 노래하니 사부대중이 미증유의 경지를 얻어 큰 환희심을 일으켰다.” - <상산삼매> 중 일락사 도리연희를 보고 이철환이 기록한 글
이철환은 또한 사찰에서 시행된 음악연주와 연희, 꼭두각시놀이를 비롯한 사찰 관련 전설과 스님들의 기예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락사 경학 스님이 뽕잎 차를 내면서 “소리란 깨우는 것이다. 요즘은 덜 하지만 예전엔 공부를 하기 위해, 수양을 하기 위해, 많은 기예를 가진 분들이 절을 찾아 오랜 시간 묵는다. 일락사를 비롯하여 가야산 사찰에서 다양한 기예나 소리가 전수되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수관은 고향과 한양을 중심으로 소리판을 옮겨 다니며 창을 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수관이 춤추고 노래를 하면 황소가 웃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 소문은 어전으로까지 번졌다.
하루는 왕이 신하를 불러,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야겠다”고 하며 고수관을 궁으로 불러 소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신하는 고수관을 찾아가 어명을 전했다. 임금의 뜻을 들은 고수관은 몹시 걱정하였다. 자신의 소리에 대한 항간의 명성은 고마운 일이지만 실제 황소가 웃는 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왕 앞에서 소리로 황소를 웃기지 못한다면 어떤 벌을 받게 될까 염려되어 전전긍긍하였다.
이처럼 고민을 하던 차에 묘안이 떠올렸다. 그는 발정 난 암소의 분비물을 구하여 춤출 때 입을 옷의 소매 끝에 발랐다. 그리고는 궁정에 들어가 왕 앞에서 춤을 추며 대기해 놓은 황소의 코끝에 옷소매가 스치도록 춤사위를 반복하였다.
그러자 황소는 그 냄새에 취하여 소리를 지르며 요동하였다. 이와 같은 황소의 행위와 표정은 마치 황소가 고수관의 소리에 취하여 격동하는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왕 또한 황소의 흥분한 몸짓을 보면서, “과연 고수관은 명창이로구나!”라고 하였다 한다. 전해 오는 이야기의 사실을 떠나 명창에 대한 전설이 된 것이다.
고수관에 대한 평가도 대단했다. 판소리를 집대성한 이론가였던 동리 신재효 선생(1812~1884)은 고수관의 구수하고 은근한 창법이 당나라 시인 백거이에 비견된다고 극찬했다. 순조 26년(1826) 고수관의 절친이었던 대학자 신위가 쓴 「관극시(觀劇詩)」, 그리고 1827년에 작성된 「팔도재인등장(八道才人等狀)」에도 고수관에 대해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고수관 같은 명창은 없다’라는 격찬이 나온다.
한편, 정노식이 쓴 『조선창극사』(1940)에도 그와 관련한 기록이 전한다. 고수관이 대구감사 부임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생점고를 불렀다는 것이다. 『조선창극사』에는 고수관 이름 옆에 ‘딴청 일수’라고 기록해 놓아 흥미를 더한다. 이는 ‘딴 목청’, 즉 ‘엇청’에 능통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고수관은 자신이 체득한 소리를 바탕으로 이른바 창작의 자율성을 즐기며 변용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 일락사에서 득음한 방만춘 명창
고수관에 이어 서산 해미 출신 소리꾼 방만춘(方萬春, 1825~?) 또한 주목할 인물로 손색이 없다. 방만춘(方萬春)은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 1825년(조선 순조) 충남 서산시 해미면에서 태어났다. 19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며,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세습예인 집안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방진관(方進寬, 본명은 방응교(方應敎, 1860?-?)의 조부이다.
방만춘은 11세에 해미 일락사(日落寺)에 들어가 10여 년 간 소리 공부를 하였다. 22세 때 「적벽가(赤壁歌)」까지 공부한 뒤 상경하여 이름을 알렸다. 하루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답답한 마음에 절 기둥을 안고 전력을 쏟아 소리를 지르다가 기절하였다. 목공이 산에서 나무를 베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내려와 보니, 방만춘이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다.
방만춘은 목청을 잦혀 가면서 힘차게 내는 소리인 아귀성과 가늘고 약하지만 매우 선명하게 들리는 살세성 같은 곡을 잘하였다. 「적벽가」 중 ‘적벽화전’을 부를 때는 소리판이 불바다가 되는 것처럼 실감 났다고 한다.
소리꾼 방만춘은 ‘미성’을 타고 났다고 알려진다. 판소리에서 미성에만 치우치면 미학적으로 다소 결핍된 것으로 인식된다. 이를 고려한 방만춘은 일부러 투박한 아구성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적벽가’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고전을 있는 그대로 부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윤색하고 개작하여 불렀다. 한마디로 변용의 귀재였던 것이다. 방만춘의 예맥은 그의 손자 방진관(혹은 방응규)으로 이어졌다. 또 방만춘은 판소리 5대가의 하나인 「심청가(沈淸歌)」를 윤색·개작하여 완성도를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방진관이 취입한 고음반이 여럿 남아있다. 방진관은 홍성 출신 명고수·명무 한성준의 추천으로 경성방송국에 출연하는 등 서울 무대에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당시 전통예술계에서 한성준의 영향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일락사 경학 스님은 이 대목에 대해 한마디 소중한 이야기를 남겼다.
“일락사는 소리를 깨우치는 명당임이 틀림없다. 일락사를 포근히 감싸주고 있는 산세는 하나의 소리통이 되어 소리꾼들의 내는 목청을 앞산으로 울려 퍼지게 한다. 스님이 이곳에서 경을 읽으면 앞산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들리는 곳이 일락사”라고 설명했다.
# 에필로그
서산 중고제 명인·명창인 고수관, 방만춘, 심정순, 방진관, 심상건, 심화영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전해지는 기록이 일천하고, 심씨 가문을 제외하고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전해 줄 후손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중고제의 기록을 찾아 오랜 시간과 열정을 쏟아 주신 학자 분들 덕분에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했던 중고제가 복원과 부활을 꿈꾸고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오는 11일(일) 오늘 걸었던 ‘서산 중고제 소릿길’을 여러분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뜻있는 분들의 참여가 있기를 기대한다. (연락처 : (사)중고제판소리보존회 이애리 사무국장 010-9328-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