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상권
8.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다툼이 없는 행
【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수다원과를 성취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며, 물질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곧 수다원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증득한 사람이 내가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사다함이라 부르니, 이것을 사다함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아나함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아나함이라 부르니, 이것을 아나함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실로 아무 법도 없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과를 성취한 사람이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곧 ‘나다, 남이다, 중생이다, 오래 사는 것이다’라고 하는 모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제가 무쟁(無諍)삼매를 얻어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말씀하셨으며, 세존께서는 제가 곧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저는 욕심을 여읜 아라한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아라한을 증득하였다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면 세존께서는 곧 저에게 다툼이 없는 행[無諍行]을 하는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나,
수보리는 실제로 행한 바가 없으므로 수보리를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論】
앞에서 말하기를
“성인은 무위법(無爲法)으로써 이름을 얻었으니,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그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는데
‘만약 수다원 등의 성인이 스스로 과를 취했다고 한다면, 그 법은 취할 수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이미 증득한 것처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성취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것이므로
여기서부터 아래로는 경문에서 이런 의심을 끊어주기 위하여,
그 법은 취할 수도 없는 것이요,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취할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다는 것은
스스로 성취한 과업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착하고 좋은 것에 의지한 사람이기에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다고 말했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그 이름을 얻었으니, 그런 까닭에 한 법도 취하지 않는다.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6진(塵)의 경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니,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역류(逆流)를 취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경에서
“물질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부르며 나아가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한 법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인은 무위법까지 취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취한 과(果) 때문에 만약 성인이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
‘나는 과를 증득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나라고 생각하는 따위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뜻은 어떤 것인가?
사번뇌(使煩惱)는 현행하는 번뇌가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그가 증득하였을 때에 나라는 따위의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이 없어도
‘나는 과를 증득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번뇌(使煩惱): 결사(結使)라고도 하며, 마음을 제멋대로 부려서 악업을 짓게 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무슨 까닭에 존자 수보리는 몸소 수기를 얻은 것을 찬탄하면서 자신이 과를 증득했다고 말했는가?
저런 이치 가운데에서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었다.
무슨 까닭에 오직 다툼이 없는 행(行)만을 말했는가?
으뜸가는 공덕을 밝히기 위한 까닭이며, 깊은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무슨 까닭에 수보리는 실제로 행한바가 없는데,
수보리는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그는 착하고 좋은 것에 의지한 사람이기에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두 가지 장애’란,
첫째는 번뇌장(煩惱障)이요,
둘째는 삼매장(三昧障)이다.
이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기 때문에 행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장애라 불렀고 두 가지 장애를 여의었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는 행을 한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