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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인 협회’ 세미나 발제 평론(2012년 10월 19일. 영월)
‘하이퍼 시’의 시사적 위상과 그 미학
오 양호(문학평론가. 인천대 명예교수)
‘하이퍼 시’는 월간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대시 혁신 신시운동이다. 현재 한국문단에는 근 3백여 종류에 이르는 문예지가 발행되고 있지만 ‘하이퍼 시’라는 이름의 시 갈래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시문학』의 이런 신시운동은 이 잡지가 내걸고 있는 ‘현대시의 길 닦기, 길 잡기, 길트기’와 호응한다.
문학은 종적인 지속성과 횡적인 변화 속에 존재한다. 앞 시대의 문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 시대의 변화를 수용한다. 그러니까 문학은 과거의 것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것이다.
한국 현대시사에서『시문학』이란 이름의 시 전문지는 3개다. 첫 번째는 1930년 박용철이편집 겸 발행인으로 창간한 동인지『시문학』이고, 두 번째는 1965년 4월에 문덕수가 주재 편집하고, 정태진이 발행한(청운출판사)『시문학』이며, 세 번째는 1971년『현대문학』(현대문학사)의 자매지로 조연현 주간으로 발행된『시문학』이다.
첫 번째 『시문학』은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정인보, 이하윤 등이 중심 멤버였고, 두 번째는 순수심리주의 경향, 또는 현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시적 미학으로 내면세계를 개척하고 있던 교수시인 문덕수가 신진의 적극적 육성, 시단의 전위적 역할을 내세우며 발행했던 문예지다. 1966년 12월 통권 20호로 종간된 이 시 잡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시인으로 양왕용, 홍신선, 오순탁, 민윤기 등이 있다.
세 번째 『시문학』은 통권 제 24호부터 현대문학사서 독립하여, 발행인 김규화, 주간 문덕수에 의해 시문학사에서 발행해 오고 있는 문예지다. 2012년 10월 현재 통권 495호를 발행했다. 이 문예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문인을 열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한국시단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시인을 거의 다 열거해야 하는 까닭이다.
세『시문학』을 관통하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첫째는 순수시의 지향이고, 두 번째는 전위 시의 지향이다. 한국시문학사에서 ‘시문학파’로 지칭되는『시문학』은 우리가 잘 알듯이 카프의 목적성, 도식성, 획일성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옹호한 모태가 된 동인지다. 정지용으로 대표되듯이 이 잡지는 한국시사에서 시를 언어의 예술로 자각하고, 그것을 심화시키는 창작 활동과 함께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한국시를 변화 발전시키는 기수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문학』은 실재로 문덕수의 시 쓰기로 대표된다. 두『시문학』을 관리한 문덕수의 도저한 순수지향의 글쓰기를 여기서 논하는 것은 췌사贅辭이다. 한국문단이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덕수가 앞서고『시문학』출신 시인 일단이 그와 동행하고 있는 현재의 ‘하이퍼시 클럽’의 시 쓰기는 사정이 다르다. 1930년대 이래『시문학』이란 이름을 단 세 종류의 잡지가 모두 그 나름의 전위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하고 있지만 ‘하이퍼 시’만큼 한 시대의 시에 전위성이 강한 창작 활동을 집단적으로 벌린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이 일단의 시인들이 생산하고 있는 새로운 형식의 시를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는 까닭이다.
1930년대 박용철의 『시문학』이 목적문학의 대척점에 있었듯이 문덕수의『시문학』은 참여문학과 맞서면서 한국 시문학의 한 축을 떠받쳐 왔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의『시문학』이 남긴 문학사적 위상을 현재의『시문학』이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연유로 나는 현재 시문학 출신 시인 일단이 전개하고 있는 이 ‘하이퍼 시 클럽’을 편의상 ‘신시문학파’로 명명한다. 1930년대의 시문학이 모더니즘 실현으로 시단의 전위 역할을 하였듯이 현재의 시문학도 하이퍼 시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렇게 선언적 진술을 한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30년대『시문학』의 모더니즘은 한국현대시사에서 아주 뚜렷한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지만, 현재『시문학』의 신시운동은 범 문단의 공인 속에 그런 양식의 시 쓰기가 아직 확대, 심화되는 조짐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신시문학파의 엔솔로지『하이퍼 시』(시문학사, 2011)를 중심 텍스트로 그 시사적 위상과 미학을 간단히 검토해 보겠다.
1, 하이퍼 시의 정체성
하이퍼 시는 공간적으로 서정시와 동일 상한象限에 놓여있고, 시간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병치되어 있다. 그리고 창작 방법으로는 사물시를 모태로 한다. 그렇다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사물시事物詩·physical poetry다.
‘사물시’란 무엇인가. 모두 주지하고 있겠지만 논리 전개상 이 용어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언급해야겠다. 사물시는 랜섬J,C Ransom이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반대되는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로 구분하면서부터 규정지어진 용어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로 이루어지는, 곧 언어에 의한 조형의 시가 사물시다. 사물시의 대표적인 예가 이미지즘 시이고, 이 이미지즘 시의 기법은 흄T.E.Hulme, 파운드E.L.Pound의 이론으로 대표되듯이 이 시는 관념보다 시어의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시에서 주관적 주체인 시적 자아는 뒤로 물러나고, 사물들이 객관적인 진술을 통해 엄격히 묘사되는 이런 시의 기법은 릴케R.M.Rilke의『신시집』(1907)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경우 김춘수의 초기 시가 그러하고, 문덕수의 시가 이런 시학에서 출발하였고, 지금은 21C의 시의 키워드로 사실, 생명, 현장을 제시하면서 시인의 사상,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에서 새로운 시의 원점을 찾는 진중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1)
사정이 이러하다면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적통嫡統의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 상한에 서 있는 공간성이다.
포스트모던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 시대 예술전반을 통어하는 전위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이퍼 시는 언어예술로 나타나는 전위시 운동의 한 현상이라 하겠다. 전위성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관습에서 멀고, 이해가 어려운 것이라면, 하이퍼 시의 정체는 이런 신기성新奇性·novelty, 곧 ‘전위성’과 관련된다. 하이퍼 시의 한 수용자가 이 시를 비판한다며 글의 표제를 ‘아방가르드 시의 몰락’이라했다는 사실이 하이퍼 시의 이런 성격을 반영한다.
한국이 IT 강국이 되어 PC가 널리 보급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몇몇 앞서가는 문인들에 의해 ‘신기성’의 하이퍼텍스트 문학, 특히 하이퍼텍스트 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말의 컴퓨터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keup language(HTML)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하는 시다. 이런 시는 하이퍼링크, 곧 연결기능이 들어있어 그것이 텍스트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 기계적으로 나타난다. 이런 글쓰기를 그 때 몇 몇 문인들이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글쓰기는 시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 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 할 수 있을까?2)
사정이 이러하지만 오남구, 김규화, 심상운, 최진연, 이솔, 안광태, 송시월, 이선을 중심으로 한 신시문학파, 특히 하이퍼 시의 미학을 줄기차게 탐색하고 있는 심상운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이런 폐기선언에 새로운 시학으로 맞서며 ‘종이 하이퍼 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지털의 감각과 이미지의 결합, 하이퍼텍스트의 문학적 기능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하이퍼+시는 현실을 바탕으로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3)
심상운의 이 말을 요약하면 그가 주장하는 하이퍼 시는 ‘극사물시’ 또는 ‘극하이브리드 시’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극사물시’를 ‘완전한 탈 관념 지향 시’로 ‘극하이브리드 시’를 ‘이질적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 또는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에 의한 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시의 기법은 아직 ‘신기성’으로 기호분해가 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물시’가 랜섬, 흄, 파운드, 릴케와 관련되어 있고, 우리의 경우 이런 하이브리드hybrid문제는 시문학파의 이미지즘으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고, 그것이 조향, 김춘수, 문덕수로 수용, 변화, 지속되면서 그 적통성이 이어졌다고 할 수있지만 오늘의 하이퍼 시는 경우가 좀 다르다. 극하이브리드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신시문학파의 시학은 ‘이방가르드’성의 긍정만이 아니라, 그 변화와 굴절이 너무 강하여 독자와 시가 이반될 부정적 요소도 함께 가지고 있다.
3. 하이퍼 시의 몇 가지 문제점
1) ‘하이퍼 시’ 란 용어
하이퍼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라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4) 그런데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바로 위에서 보았듯이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하기는 어렵다며 이미 폐기된 글쓰기 형식이다. 그러나 심상운으로 대표되는 신시문학파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를 ‘하이퍼 시’로 발전시키면서 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신시창작 기류를 ‘현대시 혁신의 뜨거운 대열’ 이고, ‘하이퍼적 몸짓은 한 마디로 경이롭다’5)며 자평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이 현대시 혁신의 대열에 참가하고 있는 시인은 신시문학파 외에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고, 연구자들도 하이퍼텍스트 시 연구를 하면서 전자하이퍼텍스트 시만 대상으로 삼고 있다.6) 이런 현상은 하이퍼 시의 시미학과 관련되는 문제겠지만, 그것보다 종래의 한국 서정시와의 심한 편차성 문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실 오늘의 많은 독자는 아직도 관습적 시 읽기, 가령 서술시적 시에 익숙해져 있다. 80년대, 저 시에도 ‘역시 문제는 리얼리즘이다’라고 외치던 현실주의 문학의 그늘이 아직 우리문단에 짙게 깔려있고, 실재로 거의 일 만 명에 육박할 시인들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시운동을 전향적 반성 위에 공격적으로 논리개발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2) 하이퍼 시의 상이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에 의한 다선구조로 초래되는 무의미성; 하이퍼 시의 내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김춘수의 무의미 시, 문덕수의 이미지의 상호충돌의 전위성과 관련된다.
김춘수의 경우 시의 언어는 기호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그림과 같이 어떤 실재로서 만들어진 사물로서 그냥 거기에 존재시켜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싸르뜨르가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는 산문의 언어와 다른 조립된 언어가 시의 언어이며, 이 언어들은 무엇을 의미하기 위하여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된 구성물로서 단지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란 그런 논리에 따르고 있다. 이렇게 자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시는 의미론적으로 어디에도 연관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언어를 균형과 불균형의 결합으로 시를 조립했다7). <물또래>와 같은 작품이 전형적인 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하늘로 가라
하늘에는
주라紀의 네 별똥 흐르고 있다.
물또래야 물또래야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
천 구백 팔십 일년 봄
大餘 金 春 洙8)
‘물또래’와 ‘주라기의 별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금송아지 등에 업혀 하늘로 가라’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을 ‘ 하늘로 가라.’고 되풀이함으로써 무의미의 리듬을 형성시킨다. 모순된 이미지가 겹쳐져서 사물자체가 그냥 거기에 존재하고 있듯이 설명할 수 없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존재하고 있다. 어떤 의미가 전제되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몇 개의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있을 뿐 그것들의 통일된 의미는 없다. 시간적 원리에 입각한 언어의 통사적 기능을 배제하고, 이미지들을 하나의 동시성의 공간 속에 둠으로써 그것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곧 무의미 뒤에 음향적인 잔상만 남아있는 형태다. 의미의 인식보다는 주술적 율동이 더 강함으로써 독자들은 ‘별똥, 주라기, 금송아지’ 등의 이미지를 통해 자기 나름의 의미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문덕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벌써 20대부터 ‘맑은 허무’ 또는 ‘이름 붙이기’ 등으로 불리는 시를 썼고, 자신은 그런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 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심리적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9).
이미지를 하나의 실재로 보는 점은 김춘수와 같고, 이런 작품을 허무의 응시, 가치중립, 불명의 존재로 보는 점도 김춘수와 다르지 않다. 이런 점은 문덕수의 제2시집『선·공간』(1963)에서 특징적으로 형상화된다. 연작시 <선에 관한 소묘,1~5>를 통해 잠간 살펴보자.
벽 못에서
풀려나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때의 누나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10년전의 누나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선에 관한 소묘,Ⅴ>에서
우리가 이 시에서 어떤 명확한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이 ‘노끈’으로, ‘치마끈’으로, ‘경부선 레일’로, ‘살의 나뭇가지’로 연상되는 수법은 앞에서 말한 ‘이름 붙이기’라 할까 아니면 일상적 관념이 거세된 심층심리의 세계가 자동기술로 나타난 형태,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면세계의 미학’이 시적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선· 공간』은 순수시의 시사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할 시집이다. 문덕수의 이런 시 쓰기를 한 연구자는 이렇게 평한다.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를 병치시키며 그 이미지의 상호충돌에 의해 돌발적인 의미의 충격을 주는 수법을 구사하는 것이 그의 시법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러한 시 작법은 당연히도 시인의 주제의식이라든가 세계관을 작품에 선행시키지 않는다. 어느 정도, 무의미 내지 탈의미의 시가 시도되는 것이다.10)
사정이 이렇지만 김춘수가 말년에 ‘나의 무의미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된11) 그런 변용이 문덕수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제되어 가는 상태다.
그래서 마침내 문덕수는 한국시는 이제 ‘사물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거느린 관념을 보는 경향이 우리문화나 시창작의 대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 폐단은 개혁되어야 합니다’12)라는 탈관념의 단계에 다다라 있다. 그는 이런 시쓰기 기법을 장시「우체부」에 적용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12년 시월 바로 현재 이 하이퍼시 운동을 ‘현대시 혁신의 뜨거운 대열’로 평가하면서 하이퍼시클럽이 벌리는 ‘본의의 세계에서 유의의 세계로 초월transcendence하고, 다시 두 세계를 통합하는 본의의 세계로 돌아오는 하이퍼적 몸짓은 한 마디로 경이롭다’고 극찬한다.
3) ‘탈관념은 시가 아니다’는 반응에 대한 반론의 시학. 곧 보편성적 시론 형성 문제
하이퍼 시 쓰기와 이론을 병행하는 심상운은 이 창작 기법을 ‘의식의 흐름이 들어있는 옴니버스omnibus 기법’으로 명명한다. 그는 30대의 문덕수가 쓴 문제적 평론 <내면세계의 미학>이 키워드로 내건 ‘대상에서의 해방’을 내면세계의 무의식의 표출이라면서 이것을 하이퍼 시 운동의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시작 노트를 참고 해 보자.
하이퍼 시는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는해방된 상상과 공상의 세계를 시에 담아보려는언어작업의 산물이 된다. 그 작업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관념의 제로지대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기호의 세게가 초현실의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존재의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객관적 공감을 얻지 못할 때, 언어의 박제剝製가 되어 허무 속으로 빠져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노출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상의 세계, 객관적 공감, 언어의 박제’ 이다. 가령 해리포터 시리즈가 공상소설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권선징악이란 주제가 깔려있다. 시에서의 객관적 공감 역시 리어리즘의 논리가 완전히 배제되면 이해불가능이 된다. 언어의 박제도 의미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다. 시가 이렇게 나타날 때 아무리 무목적의 목적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그런 시는 결국 독자로부터 멀어진다. 심상운은 이런 문제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언어의 박제’현상을 피해야 한다고 스스로 경고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상 이런 3가지 점을 전제하면서 하이퍼 시 몇 편을 통해 현재의 실상을 검토해 보겠다.
4. 하이퍼 시의 현장.
이 글의 중심 텍스트가 된 하이퍼시 클럽의 엔솔로지『하이퍼시』(시문학사. 2011)에는 시인 20인의 작품 100수가 수록되어있다.『시문학』이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의 <특집 하이퍼 시>, 2009년 11월부터 2010년 2월까지 기획 특집으로 발표한 <확산 하이퍼 시>가 그렇다. 이런 신시 운동의 뒤에는 <매미소리>(『시문학』 2008,8)와 같은 시니피앙 하이퍼시를 창작하면서 지면을 대폭 할애한 『시문학』의 발행인 김규화의 시적 야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그룹의 합동시집이 간행된 바는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엔솔로지는 시사적 자리가 유별나다. 우선 시의 기법이 종래의 그것과 아주 다른 변화refraction에 기인하는 참신성 때문이다.
나의 가방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내 몸의 태엽을 풀어 놓고
나는 권태로운 생일을 관리한다.
지하철 입구 젖은 양동이에 담겨
나이 수대로 계산되는 꽃송이처럼
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혼자 듣는 뻐꾸기 소리는 저녁과 함께 사라졌다.
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의 끝을 따라
나는 거울 속을 통과하고 있다.
위상진 <가방 속의 탁상시계> 7~10연
이 작품은 현대 대도시인의 소외(‘나는 국수를 세며 먹는다’), 가방 속에 들어간 탁상시계 같은권태(‘내몸의 태엽을 풀어 놓고’) 를 문제로 삼으면서 그런 사회의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감성보다 이성이 강하여(‘등을 보이지 않는 소리’), 주지적이고, 진술에 의하지만 시적 긴장이 늘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주제의식이 다선구조로 교차됨으로써 시적 상상을 여러 갈래로 풀어 재미를 준다. 도시의 삶을 문제 삼는 종래의 시가 감성에 너무 기대는 것과 많이 달라 감정의 추락을 막는다. 그래서 주지적이다. 이 엄혹한 현대를 감성으로 산다면 살아남을 자 얼마나 될까.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이 시대의 앞자리에 서 있다.
신시문학파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심상운의 경우는 어떤가.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린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 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 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께를 감싸고 있다.
( )
<맨살에 링크하기> 전문
이 작품은 네 연으로 되어있다. 제1연의 중심 이미지는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이고, 제2연은 ‘맨살의 향기’며, 제3연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이다. 그러나 제 4연은 ( )로 비어있다. ( )로 구성된 부분은 독자가 링크할 연이다. 그래서 작자는 작품 끝에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라는 주를 달아 놓았다. 이 작품은 하이퍼 시의 작법과 감상법의 기법의 한 제시로 보인다. 하이퍼 시의 시성詩性poeticity 담론을 충실히 수행하는 시 쓰기, 곧 상이한 이미지의 충돌에 의한 다선 구조, 독자와의 소통, 공간이동, 연결고리link로 주관적 의미와 정서로부터 탈출을 모색하면서 시적 상상력 확산에 의해 가독성可讀性 촉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작에 오면 이런 현상이 심화, 확대된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신전神殿의 원형을 복원한 화려한 채색 조각상 그래픽이 TV모니터 속에서 가볍게 빙빙 돌고 있는 오전 10시 30분
횡단보도를 건너온 30대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구겨진 풍경화風景畵에서 청계산 숲속 산새 몇 마리 나와 삐삐삐 쪼로롱 삐삐삐 쪼로롱 허공에 반짝이는 초록물방울 뿌리며 빌딩사이를 지나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K화백이 지난 밤 하얀 화선지 위에 내려놓은 검은 묵향墨香의 산 속에서는 걸망을 맨 한 사내가 나와 사방을 둘러보다 징검다리를 건너 빨간 노을이 물든 여진女眞의 마을 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이른 봄 햇살의 눈부신 바늘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저수지 수초 속에서 발가숭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나오는 그림을 그리다가 채소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창밖을 본다
<오전 10시 30분의 그래픽> 전문
이 시는 의식의 흐름이 중심이 된 옴니버스omnibus 기법이라 하겠다. 현실적 공간과 시간의 질서를 뛰어넘는 상상과 공상, 현실성이 배제된 이미지가 형성하는 초현실적 세계, 관념의 제로지대를 무의식의 표출에 의해 형상화하고 있다. 마치 한 사발의 물을 증류수로 만드는 작업과 같다. 도덕, 관념, 일상의 잡다한 현실이 사상捨象된 속에 한 이미지의 순수성이 다른 이미지와 병행되면서 그걸 뛰어 넘는 또 다른 유의의 세계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점은 대상에서 해방되고, 현실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순수이미지를 시적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 특히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한 단선구조의 탈출이라는 면에서 문학적 성취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증류수는 미네랄이 없는 죽은 물이라 우리 몸에 무해무득하다.
이 시는 대체적으로 외래적 체취에 휩싸여 있다. 시제詩題에서부터 ‘그리스 신전’, ‘빌딩’, ‘여진 마을과 같은 어휘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시 전체를 지배하는 어조語調·tone 역시 외래(서구)적 성향을 띄고 있다. 얼른 조향의 <바다의 층계>의 시적 취의趣意·sense가 감지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다분히 문화에서의 변화refraction의 축이 그 중심부에 가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굳이 프레이저Frazer의 논리13)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문학은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의 것이다. 지속과 변화, 이 원리는 시인이나 작품이 갖추어야할 역사성 그 자체다. 이런 점에서 심상운의 시 기법은 앞 시대의 조향의 어떤 면을 연상시킨다. 이런 성격은 그 나름의 지속성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나 조향의 시는 한국의 전통시 미학으로 보면 여러 가지 한계점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심상운의 시 역시 그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더니즘의 전형前型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지털의 감각과 이미지를 결합하는 과정을 벌써 통과했고, 이제는 하이퍼 시라는 새로운 기법을 단단히 구축해 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도전적 전위성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이브리드적 시 쓰기는 그가 우려하는 것처럼 ‘언어의 박제’ 위험 앞에 놓여 있다.
이 문제를 문덕수의 경우를 통해 검토해 보자. 우리가 잘 알듯이 문덕수의『우체부』의 기본 기법은 하이퍼 시의 그것이라 하겠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가 현실(현상)의 실상을 ‘불연속적인 공의 변화’라는 랜즈를 통해 응시하고 있다는14) 심상운의 지적에 우리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문덕수의 최신 시집『아라의 목걸이』(시문학사,2012)는 경우가 다르다. 이 시집에는 하이퍼 시의 기법에 기대고 있는 시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시도 많다.
칼칼하면 몽고정 물 한 모금으로 족하고
땀 밴 옷 홀랑 벗어 애들처럼 다 내어놓고
합포만에 알몸 던지리
저만치 돌섬을 헤엄쳐 네댓번 안아보고
중앙부두 쯤에선 그날의 의거의 발자국을 따라
우체부 가방 덜렁거리며
남성동 비탈길이 다 닳아 내려앉도록 오르내리리
내 꿈의 무지개 마산서
우체부로 떠돌고 싶다
<마산에 가고파>에서
나는『아라의 목걸이』에서 <마산에 가고파>를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다. 우선 쉽고 재미있다. 누가 그건 당신의 시 감상수준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문제는 시인과도 관계가 있다. ‘감상수준’ 이란 말을 한 속내에 은근한 부정적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한 시집이 명편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리고 명편은 독자가 만든다. 평론가도 독자고, 일반 독자도 독자다. 독자가 많으면 명편에 가까워진다. 내가 왜 이 시에 강하게 끌렸을까. 아마 그건 내 무의의식 속에 잠재된 한국시의 지속적 요소, 어떤 의미의 발견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 보다 이 시의 캐릭터 우체부가 내뿜는 무상의 행위, 다르게 말해 도덕 이전의 세계, 불가사의한 삶의 원리에 끌리는 언어 이전의 정서가 내 속의 낭만적 기질bohemian temper을 자극한 때문인지 모른다. 낭만적 기질은 인간의 본성, 본질적 의미가 아니던가.
한 시대 문화가 외래적인 변화만 중시되고, 종적인 지속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전통의 단절이 된다. 상이한 이미지의 상호 충돌에 의한 다선구조가 아닌 무엇, 쉽게 잡히는 주제가 독자를 끌어안았다고 한다면 그건 뒤진 정서 때문이라기보다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 감성, 불변의 가치 때문일 것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이런 성격은 이 시집에 많은 시조가 수록된 사실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조가 가장 한국적인 시형식이라고 할 때 그 기법이 비록 하이퍼 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비한국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한국시의 미학을 대표하는 기본형식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문덕수는 이와 같이 지속과 변화를 은밀히 아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이 시집『아라의 목걸이』의 서문은 단 세 문장인데 그 두 문장은 ‘수록 시가 모두 하이퍼라고는 할 수 없지만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발생적인 부분도 있으나 시는 “가치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이다. ‘가치 있는 기록’이란 무엇인가. 이런 점을 말년의 김춘수가 ‘나의 무의미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또 의미의 세계로 발을 되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그런 진술과 같은 의미로 본다면 비약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문덕수가 하이퍼적 시 쓰기만 하지 않기에, 나 같은 뒤처진 독자도 자신의 팔로워follower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시는 일차적으로 향수享受되어야 한다. 극 하이브리드 시가 독자와 거리를 둔다면 그건 언어의 박제와 유관한 현상일 것이다.
이 솔의 하이퍼 시는 하이브리드로 인한 이런 우려는 없어 보인다.
부드러운 막에 싸인 까만 눈으로 날 보고있다
도우넛 모양의 알다발 속에서 까만 눈을 굴리며
소주에 취해 이선생 몸보신으로 넘어간다
이선생은 촉촉한 그 까만 눈을 보지 못한다
인도 델리역 깡마른 짐꾼은 짐을 이고 뛰듯 간다
붉은 상의 터번 아래 검고 깊은 눈동자
맨발의 어린 소녀는 “기브 미 원달러”를
인도의 검은 눈동자는 모두 축축하게 번져 있다
검은색이 흙빛을 만나면 살아난다
알다발 속에서 까만 눈으로 마주하는
터질 듯 미끈거리는
인도의 그 생명으로
검은 껍질을 트고 꽃이 된 너 그리고 나
<도롱뇽 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에서
이 시를 이루는 중심 이미지인 눈은 3개다. 첫째는 소주와 함께 이선생 몸보신으로 넘어가는 눈이고, 둘째는 인도인의 검은 눈이고, 셋째는 검은 껍질을 트고 꽃이 된 눈이다. 첫째 눈은 죽음의 눈이고, 둘째 눈은 비애에 젖은 눈이고, 셋째의 눈은 소통하는 상생의 눈, 생명의 눈이다.
하이퍼 시의 특성을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이라고 할 때15) 이 시는 이런 하이퍼성이 다소 약화된 상태다. 하이퍼 시의 극순수성, 언어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는 탈관념, 증류수와 같은 절대무의미성의 상황이 아니다. 세 개의 눈은 결국 생명의 눈, 죽음의 검은 빛을 트고 나와 꽃이 되었다. 단 한 순간일 뿐인 순수의 상태 자체에 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고귀함을 누리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극 탈관념에 이르지 않고, 가치 있는 기록, 곧 이 시는 생명의 고귀함을 테마로 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숨을 돌려 하이퍼 시 일변도의 논리를 뒤 돌아 보자. 신규호는 <하이퍼 시에 관한 나의 생각>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문제는 하이퍼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명제에 관한 나의 견해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이퍼 시’가 표현해야 하는 IT시대의 시적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먼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음에 이전 시대와 달라진 영상시대의 정서적 특질을 찾아서 그것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16)
위의 인용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하이퍼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 시도 시인만큼 시다워야 ··’는 말이 순한 논리의 모순에 빠져 있긴 하지만, ‘시다워야 한다’는 말의 밑바닥에 깔린 시의 의미가 하이퍼 시가 지향하는 탈관념시, 무의미시를 지칭하지는 않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 두 문장의 핵심어가 ‘표현’, ‘정서’이고, 시의 창작 ‘방법’이고, 이글의 결론이 ‘어디까지나 실험은 실험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문화적 격변기에 구태를 벗고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를 창작하고자 실험한다는 것은 시사적으로 뜻있는 일’이라며 시대와의 호응하려는 시도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하이퍼 시를 어디까지나 실험적 시 쓰기로 간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솔의 작품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는 무의미 세계의 탈출, 가치 있는 기록을 선언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문덕수처럼 지속과 변화를 아우르는 상한象限에 그의 시가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이상 논의한 작품들 외에도 논의할 대상이 많다. 특히 하이퍼 시가 주로 산문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인데 이 문제는 하이퍼 시가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소설적인 서사를 활용하고, 현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시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는 아주 문제적이다.
5. 마무리
지금까지 신시문학파가 중심이 되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고, 그들이 간행한 문제적 합동시집『하이퍼 시』를 중심으로 그 문학적 위상을 내 나름대로 고찰해 보았다. ‘내 나름’이란 말이 문제일 수도 있지만 논의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하이퍼 시의 전위성·실험성, 새로운 기법의 모색은 30년대 시문학파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일이 문학이 일차적 과제로 삼아야한다는 그 전위적 성격과 동일함이 발견되었다. 이런 점은 한국 시에 변화refraction을 주면서 한국시의 세계성, 곧 보편성을 추구하는 도저한 창작행위라는 점에서 시사적 의미가 크다.
둘째, 하이퍼 시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에 호응하는 시의 반응이라는 점, 그리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이 폐기처분한 글쓰기 기법을 종이 하이퍼 텍스트 문학으로 변용 수용함으로써 한국의 시문학의 외연을 확장하고, 그것을 의식의 흐름과 링크하여 인간의 심층감정을 소설적 서사를 활용하여 묘사하는 점은 다른 시가 시도하기 어려운 시적 기법이다. 이런 점에서 그 전위성을 평가할만하다.
셋째, 하이퍼 시적 기법을 활용하면서 극순수·극탈관념과 다소의 거리를 두는 시 쓰기가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효과가 있음이 드러났다. 이런 점은 극하이브리드적 시가 언어의 박제가 될 수 있는 한계를 극복한 하이퍼 시의 다른 변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조심스러우나 꼭 지적해야할 문제는 문학의 큰 패러다임을 지속과 변화의 틀로 이해할 때, 하이퍼 시는 변화의 축이 너무 비대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전통성이 약화된 작품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이것은 30년대의 시문학파가 당시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 감성과 정서를 더 강하게 지속시켰다. 우리는 정지용의 시에서 시적 성취를 이룬 그 모범적 사례를 본다. 신시문학파의 경우도 시문학파와 같은 경우의 시인과 작품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더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신시문학파의 사화집 『하이퍼 시』에는 이상에서 논의한 시인 외에 강영은, 고종목, 김금아, 김규화, 김기덕, 김영찬, 김은자, 박이정, 손해일, 신규호, 신진, 이선, 정연덕, 조명제, 최진연의 문제적 시가 있다. 그러나 이들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논의는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함께 다룬다면 너무 큰 작업이 되기 때문이다.
1) 문덕수, <정서에서 언어로, 다시 ‘사물’로>『오늘의 시인총서-문덕수 시 99선』(2004) 후기 참조
2) 정과리,『컴퓨터와 문학-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1996) 참조
3) 심상운,『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푸른사상. 2010). 110쪽 참조
4) 심상운, 위의 책,109쪽
5) 문덕수, 한국 하이퍼시클럽,『하이퍼 시』(시문학사,2011). <하이퍼 시 개관>. 209쪽
6) 이성우,『한국 현대시의 위상학』(역락,2007). 류현주,『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2000).
김종국 ,<하이퍼텍스트 시의 변화양상 연구>(대구대 교육대학원. 2009) 등이 모두 그런 예이다
7) 권기호, <절대적 이미지-김춘수의 무의미 시를 중심으로>『김춘수 연구』(학문사, 1982) 참조.
8) 대여가 붓으로 쓴 이 시는 오양호가 액자로 보관하고 있다. 1981년 陶南 趙潤濟선생 문학상 기금 마련을 위해 제출된 두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시인 이기철이 구입했는데 그 작품은 글자 하나가 잘못되어 X 표를 하고 다시 옆에 그 글자를 썼기에 ‘물또래’를 구입했다. 그런데 이기철의 것은 보관을 잘못해서 상당히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오양호의 것이 대여가 남긴 유일한 액자이다. ‘물또래’는 ‘사전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은 곤충의 이름’이라고 말함.
9) 문덕수, <내면세계의 미학>『사상계』. 1966년 3월호
10) 이숭원, <기하학적 상상력과 가치중립적 세계>『문덕수 문학연구』(시문학사,2004). 107쪽
11)『김춘수 시 전집』」(현대문학사,2004). ‘서문’
12) 문덕수, <하이퍼 시 개관>,한국하이퍼시 클럽,『하이퍼시』(시문학사,2011). 200쪽.
13) 프레이저Frazer, sir James George,『황금가지 The golden bough,1890』가 핵심논리로 하는 지속conventional과 변화refraction의 이론. 13권의 이 방대한 문화인류학의 연구 결과는 20세기 모든 학문, 특히 정신분석, 철학, 역사,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문학비평의 경우 원형비평, 신화비평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니까 문학작품을 분석심리학의 원형무의식 이론으로 원형을 찾아내었고는데 그 원형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어 그것이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는 논리다. 같은 시기에 T·S 엘리어트의 『황무지』J·조이스의『율리시즈』가 간행되었는데 이 저서들이 프레이저의「황금가지」에 큰 영향을 받았거나, 그 저서에 나오는 중요테마들을 모티프로 삼았다.
14) 오세영 외,『우체부 평설』(시문학사, 2009). 58쪽
15) 문덕수, 앞의 글. 194쪽
16) 신규호, <하이퍼 시에 관한 나의 생각>『한국현대시』(한국현대시인협회,2012·상반기호).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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