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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반도 갈등구조표. 출처: <생애를 넘는 경험에서 지혜를 구하다> (미래지향, 2012) |
앞서 한반도 좌파의 원류는 고려시대까지 국경 밖에 있었던 非한자 문화권 북방人이고 신라시대이후 우리 문화의 중심을 이뤘던 세력이 우파에 해당함을 추정했다. 하지만 한반도의 각 분파세력은 단순히 좌우 양파로 분류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한반도갈등구조표>는 필자가 2008년 5월2일 조갑제닷컴의 회원토론방에 처음 발표한 이후 약간의 수정을 지나 2012년 11월 저서에 위와 같이 게재되었다. 이후에도 크게 수정할 필요성은 없이 所信이 유지되고 있다.
다만 첫 번째의 진보좌파 - 고대 한반도 토착인 항목은 해당민족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여겨지고 정치역학의 측면에서도 영향력이 없으므로 그리 의미가 있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관련한 현상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한국인광우병취약괴담, 奧地 원주민의 恨에 由來
지난 날 한국인이 광우병에 더욱 취약하다며 미국쇠고기 수입을 반대했던 소위 한국인 광우병 취약 괴담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보수진영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모독이며 정신병자들의 주장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정신병은 맞지만) 영적 관점에서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오지의 원주민은 오랫동안 평화적으로만 살아왔기에 전쟁을 모르고 각종 질병에도 취약했다. 이러한 원주민을 침략자들이 질병을 퍼뜨리는 방법으로 몰살한 일은 인류 역사상 적지 않았다. 그러한 전생을 가진 자들로서는 강한 외지인의 침략과 수탈의 가능성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모든 불합리한 갈등요소는 과거의 역사를 반추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개인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심리증상이 전생 등 과거의 기억을 상기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집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태극기집회의 중심지 大漢門, 자주독립 선언의 의미 담겨
두 번째의 친북좌파 항목에 관해서는 이미 우리 한국사회 좌파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설명했다. 나머지 세 항목이 우파를 형성하는 세 부류가 되는데 여기서 대체로 보아도 한국사회에는 우파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세 번째 민족주의우파 항목에 속하는 부류는 정통 한자문화권이 아닌 것은 두 번째의 친북좌파와 마찬가지이지만 한반도 가까이 기생(寄生)하지 않고 열등감이 없이 광활한 지역을 활동했으며 일정기간은 대륙의 지배자이기도 했으니 우파적 성향을 띤다.
우파 부류에 쓰인 移住漢族이란 표현이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사실 漢族이라는 칭호는 漢나라 이후 漢字를 쓰는 민족연합체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漢族이 중국 내의 특정민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說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 한반도에는 漢나라 이전의 춘추전국 시대에도 이주해왔으니 漢字를 쓰는 문화공동체의 개념은 우리도 이미 공유해왔다고 할 것이다.
‘漢’을 우리 민족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視角이 우리에게 형성된 것은 역시 좌파문화 측의 어떤 의도에 의해 진행되어 온 것이다. 漢陽 漢城 漢江은 무엇인가. 그리고 태극기 집회의 중심지가 되었던 大漢門은 본래 大安門이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天安門에서 한 획이 적은 것으로서 중국의 속국을 의미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고종 시대에 大漢門으로 고쳐 중국의 天安門과는 무관하게 자주독립의 상징이 되게 했다. 漢藥을 韓藥으로 바꾸는 것 등도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다.
인종이나 민족은 엄격한 디지털 분류가 아니다
여기서 또 오해를 풀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분류가 엄격한 분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국민 개개인의 유전자 승계와 輪生경력은 다양한 것이고 다만 그 주된 흐름이 있다고 추정될 뿐이다(한반도나 관련지역 아닌 다른 지역의 윤생경력이 있어도 그 지역에서 처했던 입장이 유사하여 위의 다섯 항목 중 한 가지의 성향을 더할 수 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시대에 백인 부부에게서 태어난 흑인아이의 실화에 관한 영화 <스킨>이 있다. 학교에서 주인공을 흑인으로 분류하니 부모는 자기들을 따라 백인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반대한다. 분류하는 측에서는 피부색만으로는 분명한 구분이 안 될 수 있으니 연필을 머리카락 속에 넣어서 곱슬머리에 걸려 떨어지지 않으면 흑인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인종이나 민족은 엄격히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근래 좌우파 성향보다 민족성향이 우선되는 현상 일어나
한국에서 우파를 이루는 ‘민족’이 이렇듯 過半을 점하니 안정된 보수주의사회가 되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은 역시 각 부류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데다가, 놀라운 것은 좌우파보다도 민족간의 대립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이 표를 작성할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지금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분류보다 민족분류가 더 강해져서 세 번째 항목의 부류가 두 번째 항목의 부류의 편이 되는 듯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오세훈 前시장 나경원 의원 등을 ‘우파이면서 좌파를 도운’ 인물들로 들었지만 같은 계파의 큰 인물인 이명박 前 대통령에 관하여는 과거 대통령 취임시부터 추측했던 이야기가 있다. 다소 비약으로 보일 가능성도 있지만 ‘딱딱한 이념 이야기’ 중에 쉬고 돌아가는 說話 정도로 보아도 된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우파정권을 연 지도자에게의 긍정과 기대를 가지는 관점이었다.
이명박 前 대통령과 만주족
널리 알려진 자서전 <신화는 없다>의 후반부에는 연해주를 비롯한 북방개척에 대한 기업인시절 이명박 대통령의 열정이 비중 있게 서사되어 있다. 만주지방에 깊은 인연이 있지 않고는 있기 어려운 강한 애착이다.
군사평론가 지만원 씨가 이명박 대통령의 집안내력을 조사 발표한 것에 허위가 있다 하여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이 대통령의 부친의 본명이 ‘떡쇠’였을 거라는 주장에 대해선 반박이나 해명이 없다. (“아버지 이름은 원호적에 덕쇠(德釗)였고 33세에 일본에서 법원의 허락을 득해 충우로 바꾸었다. 덕쇠라는 이름은 떡쇠, 마당쇠 돌쇠와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양반과는 거리가 멀다.” 지만원 박사 주장)
한반도에서 양반 사대부를 이룬 족속이 아닌, 상민과 천민을 이룬 족속 중에 ‘떡쇠’라는 말이 타나내는 덩치 큰 족속이라면 북방계이고 또한 만주족이 연상된다. 만주족은 원래 여진족이지만 조선초 우리 국경 부근의 여진족과는 달리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중국을 점령하여 청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중국의 관점에서는 ‘잘생긴’ 李 대통령
大選시기에 항간에 膾炙(회자)되는 ‘이명박이 못생겼다’는 소리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총명한 자로서의 반듯한 용모인 그가 무엇이 못생겼다는 말인가.
속칭 잘생기고 못생기고는 상대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부러워하면 잘생기게 보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근세에는 유럽인이 세계를 지배해 왔으니 세계적으로 유럽인形의 용모가 가장 잘생긴 걸로 여겨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귀하고 잘생겼다고 여겨지는 용모는 사대부 계층의 용모인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젊었을 때 태국에서 근무할 때 중국 여인과의 짧은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서 이대통령은 중국 여인에게 “당신은 이렇게 예쁜데 나는 못생겼다. 특히 눈이 작아서 당신의 아름다운 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 하며 한탄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중국 여인은 “당신 얼굴에서 제일 매력적인 것이 맑은 눈이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못생겼다고 하느냐?” 하고 반문하며 그동안 가족 등에서도 못생겼다는 말을 들어왔던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특히 작아서 놀림감이 되어온 눈을 잘생기고 매력적이다고 말해준 것은 이제까지 한국에서 들어본 적 없는 말로서 중국 여인이 최초로 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긴 얼굴에 작은 눈의 북방형 용모를 중국 여인이 좋아한 것은 특별한 우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만주족은 근세까지 중국에서 최고의 신분계층이었다. 중국인들에게 만주족形의 용모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 운세가 기운 만주족 왕족이나 귀족이 한족으로부터 핍박받아 한반도로 피난 와서 살았기에 이후 ‘근본 없는 집안’이 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머슴 등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소설적 설정도 가능하다.
이 대통령이 재임 중에 중국에서 연설하면서 “그 때 중국 여인과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중국의 국가주석이 되었을 것”이라는 발언도 결코 지나치거나 실없는 농담이 아닌 것으로서 이 대통령은 충분히 근세에 중국의 지도자도 할 만한 本性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강희제의 결점’ 보완한 李 대통령
이 대통령의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근대 중국최고의 聖君으로 알려진 강희제(康熙帝)에 비유하기도 했다. 프랑스 선교사가 강희제를 알현하고 그 덕망에 감화하면서 ‘기독교만 믿으면 理想的인 군주가 되었을 텐데…’ 라고 했다. 이 아쉬움을 구체화하면, 이 ‘유럽에도 없었던 훌륭한 군주’가 이 점만을 보완하여 만약 그 때 중국에 기독교식 국가개혁을 했다면 이후 西勢東占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이것이 강희제의 생애의 여한(餘恨)이 된다. 다만 이 대통령은 이미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것이 다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는 黨의 집권이 유력해진 시기에 주류사회 인물들과 외모가 다른 약점을 극복하고 본선보다 더 지독한 경선을 여성 상대자와 치르고 대통령에 오른 것이 공통된다고 하였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제의하여 성사하였을 때는 운이 닿았으면 더 큰 나라에서 더 오래도록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지도자가 되었을 텐데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지도자를 해주는 인물이라는 ‘찬양’의 글을 블로그에 올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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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日 頂上會談의 意義
- 李대통령, 현실에서 최선 다하는 모범 국민에게 보여 (2008-12-14)
韓中日 三國회담이 定例化되었고 특히 경제 분야의 협력에 대한 합의가 두드러졌다. 이제 한국은 한중일경제권이라는 넓은 범위에서 위험부담을 공유하는 안정적 경제권에 들어가게 된다는 조심스런 전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회담은 한국의 李明博대통령이 주도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李대통령의 리더십이 강해서가 아니라 한국이 이들 두 나라보다 삼국협력을 더 아쉽게 필요로 하는 입장이어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까지 한국은 두 나라보다 현저히 적은 본바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상대적으로 강한 接美와 親西歐化에 의지하여 이들 두 나라에 比肩되는 지위를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美歐 경제 권력이 몰락 및 재편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외세’에 의존하여 東北亞에서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어려워졌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이 李明博대통령의 겸손한 리더십이었다. 형식적인 주최자는 일본 아소총리였지만 실질적으로 주인이 손님을 대하는 듯한 겸손과 양보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두 政經大國의 頂上을 和氣롭게 이끌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 本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운세에 따라 世俗에서의 起復이 있다. 같은 本을 지녔다고 해도 運勢의 高潮 혹은 低潮에 따라 인간사회에서의 지위와 역할은 차이가 날수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李대통령은 운세가 고조기에 다다랐기에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섣불리 인간의 本을 가늠할 수는 없다. 만약 李대통령의 本으로서 지금보다 더 나은 운세를 가정하면 더 젊은 시절부터 더 큰 나라에서 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더욱 오래 집권할 수 있었으리라고 어찌 否定할 수 있을까.
반면에 本에 비하여 지나치게 고조된 운세로 인하여 대통령직에 오른 경우는 대통령의 지위에 도취되어 동북아균형자 운운하며 국제사회에서 교만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직위는 실천의 직위다. 어떤 意圖를 가지면 그것을 지시하여 실현되게 하는 지위이다. 물론 대통령의 한마디는 어느 누구의 말보다 더 중요하게 언론에 보도되지만 그것은 실천과 실현을 바탕에 두어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本分을 잊은 대통령의 경우 대통령이 실천과 실현을 위한 지시보다는 수시로 특강을 베풀거나 역사평론적 혹은 문학적인 修辭를 전파하며 공무원과 국민에게 訓示하는 일이 있었다. 물론 대통령은 국민의 가장 큰 지도자이지만 대통령은 訓示나 敎示로 국민을 이끄는 직위가 아님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李대통령은 직접 국민이 겸손하게 자기본분을 지켜야 함을 모범으로 보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의 마땅한 소유수준에 못 미치는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겸허히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국민각자가 가질 때 한국경제도 구원될 수 있고 나아가 한국이 가진 본바탕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계에 크게 기여할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필자가 이와 같이 칭송한 바 있는 이 대통령이었지만 근래 들어 대한민국 수호세력과의 화합에는 의문부호를 주고 있다. 북방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좌우파 이념보다 우선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새로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의 민족주의 우파 부류가 우리 국가의 좌우파 편향에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형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재임시의 세종시 계획 폐지 시도는 우파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었고 오히려 이것을 반대하여 무산시킨 당시의 박 대통령에게서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이것으로 보면 이 대통령측이 전통수도의 가치를 ‘주류보수’보다 잘 지키는 것이 아닌가도 볼 수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미 이 대통령측은 자기네 분파의 희망대로 서울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해놓았기 때문에 굳이 서울을 버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漢城을 首尒로 바꾼 것은 서울을 非한자권 민족의 도시로 바꾼 것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때 서울의 중국에서의 호칭을 漢城에서 首尒로 바꿔 불러달라고 중국에 요청했다. 애초에 이런 한국의 요구는 무리일 듯싶었다. 어느 나라가 자기들의 주권사항인 언어를 외국이 시키는 대로 바꿀 수가 있나. 그런데 중국은 이를 얼른 수용했고 벌써 대다수 首尒를 쓰고 있다.
중국어로 표기된 중국지도를 펴보면 尒를 사용한 音譯地名은 서북, 동북 기타 奧地(오지)의 지명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만주의 哈尔滨(하얼빈) 齐齐哈尔(치치하얼)이 있다. 漢城은 백제세대부터 있던 地名으로서 한자로 표기된 중국과 한국의 지도 전체를 보았을 때 서울이 정통 한자문화의 지역임을 나타난다.
大韓民國은, 동양문화의 源流地라 하는 중국이 서구 공산사상을 따른 圖案을 國旗로 삼고 있는 형편에서, 동양문화의 精髓인 太極을 國旗로 삼고 있는 正統東洋文明의 국가이다.
중국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당장 그들이 전통문화를 그들 사회의 핵심에 자리 잡게 하면 현존의 질서가 흔들릴 위험이 있어 당분간 공산체제의 유지는 해야겠고, 계속 그렇게 나아가자니 동양정통문화의 宗主權을 혹 한국에 빼앗길까 걱정하던 차에 이런 반가운 제안이 들어오니 얼싸쿠나 하며 한국의 청을 받아들여준 것이다.
이천년 한자문화 국가의 도시가 단번에 비한자 문화권 부족의 도시로 한자문화권 전체에 각인되는 결과가 되었다.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중국인 혹은 漢字만 알고 한국의 역사는 잘 모르는 서구인이 중국어 세계지도를 보면 서울은 이미 만주족의 도시와 같이 된 것이다.
중국어 地名에서는 歐美의 도시이름도 유서 깊은 문화적 대도시에는 尒을 쓰지 않는다. 아프리카 등지의 혹은 근세 세계문화에 의미가 없는 도시들의 이름에는 尒를 사용한 表音이 빈번히 사용되지만 전통문화국가의 주요도시는 각기 나름대로 尊重의 의미를 두어 표기하고 있다. 聖書에서의 바울이 保尔로 표기될 듯해도 保羅로 표기된 것은 존중할 대상의 이름에는 뜻을 함유한 문자를 쓰지 음역한 글자인 尔는 좀처럼 쓰지 않는 것이다.
이 밖에 재임시절 황석영 씨와 함께 알타이문화연합의 이름하에 몽고 등지를 방문할 때 우파 측에서는 우파 대통령이 왜 좌파 문인과 함께 다니느냐고 비판했지만 황석영 씨는 스스로 밝히듯 만주 출신으로서 ‘같은 종족’끼리의 유대와 특혜는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서울시장 시절 조선 오백년 문화의 상징인 남대문을 격하하여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불타게 함으로써 이 땅의 주류문화의 상징을 줄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李 대통령측이 대한민국 수호에 어떤 영향 미칠지 아직 모른다
아직은 이대통령 쪽의 민족성향이 대한민국 수호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모른다. 비록 근래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의심되더라도 앞으로 치러질 조기대선의 결과에 따라 (앞서 오세훈 나경원의 행위도 결과론적으로 해석되었듯이) 그가 어느 편의 역할을 했는가의 역사적 사실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