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와 언더우드
[2013,1.17일 100주년 기념교회 이만열 강연]
머리말
1883년 10월 24일부터 28일까지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열린 전국신학교동맹 (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서 미 감리회의 아펜젤러와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가 만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미국 개혁교회신학교(The Seminary of 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에서 교육받은 신학도로서 이 대회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했고 아펜젤러는 역시 뉴저지주의 드루 신학교에서 신학생으로 정열을 바쳐 교회의 성장에 힘썼다. 이 대회에는 베렌즈(A.F.Berends) ․ 뉴턴(Richard Newton) ․ 핫지(A.A.Hodge) ․ 타운젠드(L.T.Townsend) . 고든(A.J.Gorden) 등 각 교파를 대표하는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여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집회를 인도했다. 이곳에서 만나 두 사람은 1885년 4월 5일 같은 배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오게 되었다.
一.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1. 한국 도착:
1858년 2월 6일 펜실바니아주 수더튼(Souderton)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고조부 제이콥(Jacob)이 1735년에 이민온 스위스 아펜젤 출신이다. 그의 모친은 메노나이트(Menonite)파 집안 출신으로 자녀들에게 독일어 성경공부와 경건한 삶을 훈련시켜 뒷날 아펜젤러가 성경언어에 능통하고 프랑스어도 소화할 수 있게 했다. 웨스트 체스터 사범학교(West Chester Normal School)에 진학, 그 곳 장로교회에 출석했으나, 1878년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Lancaster)에 있는 프랭크린‧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입학한 후 랭카스터의 감리교도들과 교제하면서 감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옮길 무렵의 “감리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교회에서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882년에 뉴저지주 메디슨(Madison) 소재 드루(Drew)신학교에 입학, 뉴저지주의 산악지대와 메디슨 근교의 지역을 차례로 책임 맡아 토요일에는 심방하고 주일에는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는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와 멜로디온으로 연주하며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한 사람의 감리교도이며 살아있는 찬송가’로서 순식간에 교회를 성장시켰다.
한국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 확정될 무렵, 1884년 12월 17일 랭카스터의 제일감리교회에서, 침례교도였던 엘라 닷지(Ella Dodge)양과 결혼식을 올렸다. 1885년 1월 14일 드루신학교 교수와 동료 학생들이 주최한 선교사 환송 특별예배를 가진 후 아펜젤러 부부는 기차를 타고 서부로 향해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한국으로 향했다.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2월 3일, 같은 미감리회 선교사인 스크랜튼(W.B.Scranton) 부부와 함께 퍼시픽 메일 소속의 아라빅(Arabic)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2월 27일 저녁에 그들은 24일간의 여행을 끝내고 일본에 도착, 요코하마(橫濱)와 도쿄(東京)에서 머무르며, 한국 선교회의 부감리사로 임명받았다. 3월 23일, 아펜젤러 부부는 요코하마에서 출발,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며칠 머문 후 3월 31일 다시 한국행 정기선[S. Maru 호]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는데, 승객 중에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스커더(Scuder) ․ 테일러(Taylor) 등의 선교사, 그리고 아마도 갑신정변 후 일본에 파견된 특명전권대사였던 서상우(徐相雨)와 부사 묄렌돌프(von Moellendorf: 穆麟德)도 동승했다. 아펜젤러는 4월 2일 부산에 도착, 잠시 하륙하여 그 곳 세관장 로바트(W.N.Lovatt)를 방문하고 마을을 돌아본 후 그 이튿날 다시 출발, 한국의 남해안을 거쳐 4월 5일 부활절 정오에 한강 입구로 들어왔고, 오후 3시에 제물포 앞바다에서 닻을 내렸다. 제물포 항구에서 3마일[혹은 1.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정박한 기선으로부터 다시 거룻배를 옮겨 타고 1시간 정도 나온 후에야 육지에 이르렀다.
아펜젤러 부인이 먼저 바위 위로 내렸다. 아펜젤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이르는 여행과정을 보고하면서 그 글 끝에, 자신이 한국에서 행할 사역의 방향과 한국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받아야 할 축복을 다음과 같은 기원문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하여 주옵소서”[아펜젤러, <한국도착보고-1885년 연례보고서> - 이만열, 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연세대 출판부, 1985), pp. 268-269]
2. 초기의 선교 활동과 교회설립
외국인에 대한 전도 활동: 한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갑신정변 후 외국인에 대한 한국 상황과 임신한 그의 부인의 안전을 고려하여 나가사키((長崎)로 물러났다가 그 해 8월에 재입국했다. 그 해 8월과 이듬해 4월에 학교일과 외국인에게는 이미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1886년 초에는 매주일 일본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하게 되었고, 4월초에는 주일 오후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일본인이 3명이나 되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성경공부반이 일본 영사의 집으로 옮겨졌고, 참석자는 한 모임에 12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886년 미 북감 연례보고서 및 1886년 9월 14일자 아펜젤러 일기] 그가 한국인 선교에 앞서 한국 주재 일본인들에게 선교했다는 사실은 한국교회사에서는 새로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성경공부 모임이 진행되면서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는 ‘한국에서의 최초의 세례’가 베풀어졌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스크랜튼 박사의 딸 마리온(Marion Fitch Scranton)과 자신의 첫딸인 앨리스(Alice Rebecca) 그리고 일본인 하야가와(Hayakawa Tetzya)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국인에 대한 전도활동과 교회 설립: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출석 학생이 3명밖에 되지않던 1886년 6월 중순까지 “종교를 가르칠 생각은 아직 하지 못하고 매일 한 시간씩 영어만 가르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受洗者’로 알려져 있는 노 도사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노 도사 춘경이 수세한 것이 헤론의 집에서 언더우드에 의해 집례되었다는 것은 알렌이나 언더우드의 증언과 비슷하지만, 수세일자가 <1886년 7월 18일>이라는 것은 언더우드의 증언과는 다르다. 아펜젤러의 증언이다.
“지난 일요일, 7월 18일 오후 언더우드 형제가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한 세례를 노씨에게 베풀었다. 나는 세례식을 도와주는 기쁨을 누렸다. 이 사람은 새로운 교리를 듣고는 알렌 박사로부터 복음서 한 권을 몰래 가져다가 조심하면서 열심히 읽고 더 많은 교훈을 받기 위해서 언더우드를 찾아 갔으며, 또 일요일에는 우리의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이번에 스스로 자원해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기를 청원한 것이다. 세례식은 엄숙한 관심으로 가득 찼다. 그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의 분노 가운데 자신을 내어놓는 커다란 위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불러 새 생명을 주신 주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1886년 7월 24일자 아펜젤러 일기]
(1887년 2월 21일, 한국 국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의 교명을 하사받은 아펜젤러는 이를 자신의 사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으로 간주하고 한국인에게 복음전도 활동에 박차를 가하는 기회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용경과 박중상을 복음의 진리로 인도한 것은 이 무렵이다. [자세한 내용은 1887년 2월 21일, 7월 24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참조]
1887년 3월경, 아펜젤러는 김주사(Chusah)에게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칠 집을 구하도록 했고, 1887년 9월에 시내 남쪽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한국인이 모여 예배드릴 수 있도록 수리를 시작했다. 1887년 10월 2일 주일날 저녁에 제자 한용경에게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 세례식에서 아펜젤러는 “나는 언문으로 번역된 세례예식서를 가졌으며, 한국말로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했다. ‘한글’로 된 세례 예식서로써 ‘한국어’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그가 이해 3월에 이미 한국어로 된 교리문답서를 처음으로 반포해 갖고 있었다는 증언 못지않게 한국 교회사상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주일), 전에 성경사업(Bible work)을 위해 매입한 바 있는 집‘벧엘(Bethel)’에서 오후 예배를 시작했다. 아펜젤러가 ‘감리교 선교부에 의해 열린 최초의 종교집회’라고 언급한[1887년 10월 11일자 아펜젤러 일기] 이 모임이야말로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공중예배였다. 이 전에는 한국인들은 가끔 50여명까지 모이는 외국인들의 연합교회 예배에 같이 참석, 기독교에 대한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한국인만의 독자적인 모임은 아직 없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인‘최초의 종교집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방 8자 되는 방에 모여서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1887년 10월 1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등]
이 날의 예배모임은, 순서의 일부에서 외국어로 진행되었지만,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의 합작에 의해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 발전하였다. 이 예배모임은 “정동제일 감리교회의 첫 예배인 동시에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가 되는 셈”이었고, 이를 계기로 정동제일교회는 10월 9일을 창립일로 잡고 있다.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첫 예배 장소인 ‘벧엘’ 예배당이 지금의 남대문 상동 근처였다는 것이다.
그 일주일 후인 10월 23일에는 ‘감리교의 요람’인 벧엘교회에서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예식을 가졌다. 이 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our liturgy)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제 ‘벧엘’에서 공중예배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거기서 한국인 형제들과 더불어 교회공동체가 누려야 할 성례 -세례식과 성찬식- 를 거행했다. 스크랜튼 의사와 최․장․강․한씨 등과 최씨의 아내가 참석했던 이 성찬예식은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1887년 10월 31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결국 1887년 10월에 이르러 한국인 공동체는 세례식과 성찬식도 행하여,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죄 씻음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동참하는 공동체, 즉 교회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세례받은 신자와 성례전이 있으며, 믿는 이들이 같은 이름으로 예배할 장소(예배당)가 있는,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이 갖추어진 명실상부한 한국 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10월에 이렇게 탄생했다.
3. 培材學堂의 설립과 교육활동
배재학당의 설림: 도착한 지 한 달이 채 안된 1885년 8월(일자 미상), 자기 학교에는 벌써 4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 공사관의 무관이었으며 대리공사를 맡고 있던 폴크(George Foulk)의 중간 역할 때문에 가능하였다. 아펜젤러는 폴크를 통해 고종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고, 고종이 이를 허락했다.
아펜젤러의 학교 사업은 1886년 4월경부터 이미 학교가 시작되었으나 공식보고서에는 이 해 6월 8일에 시작, 7월 2일에 첫 학기를 끝낸 것으로 되어 있다. 설립 당시, 한국에는 영어의 필요성이 제고되어 영어를 잘하는 것은 ‘벼슬을 얻는’ 수단이 되었다. 그 학교는 10월 6일 현재, 20명 재적에 18명이 출석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에 1887년 2월 21일, 국왕으로부터 학교의 이름을 하사받았다.
“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外務衙門督辦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학당 혹은 “Hall for Rearing Useful Men”이다. … 오늘 외무부의 서기요, 통역관인 김씨가 커다란 한자로 쓰인 학교 이름을 가지고 왔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한국인들 앞에서의 설 자리를 얻은 것이 된다. 이제 비록 국립학교는 아니지만, 사립학교가 아닌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1887년 2월 21일 아펜젤러 일기]
“이 이름은 커다랗게 한자로 쓴 후 보기 좋게 나무에 짜서 정문 위에 걸려 있는데, 이것은
우리 교육사업의 조용한 보호자이다.”[미 감리회 해외선교부 1887년도 연례보고서]
1886년 9월 1일 단 한 명의 등록으로 새 학기를 시작한 학교는, 그 해 11월 6일에는 32명, 1887년 6월 24일 방학할 때에는 재적 43명에 실제 출석 학생 수는 38명이었고, “잠깐 동안만 출석하고 명예롭게 떠난 학생들”을 포함하여 1년간 63명이 등록했다. [1887년 6월 25일자(토) 아펜젤러 일기] 아펜젤러는 학생들이 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게 되고 또 많은 한국인들이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해 입학 신청을 한 것을 두고 보람을 느꼈다. 그런 자부심을 갖는 이면에는 1886년에 문을 연 국립학교인 육영공원과의 경쟁심리도 다소 작용한 듯하다. 그 점은 “나의 학생들은 가난하고 관직이 없는 데 반해서 국립학교 학생들은 잘 살고, 공부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벼슬을 할 게 확실하다”는 데서 보인다.
그는 학교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건물을 짓고 근로장학의 방법을 모색한다. 1887년 그는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르네상스식 1층 건물을 짓기 시작, 이 건물에 예배실, 강의실 4개, 도서관 및 산업부를 위한 반지하실도 넣으려고 했다. 1887년에는 재적생이 63명으로 늘어났고, 평균 최고 출석수는 40명이었으며, 37명의 어른과 소년들이 입학했다. 이 해에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학생 두 사람이 나오게 되어 고무되었다. 그는 ‘유용한 인재는 구원받은 인간’이어야 한다면서 미션교육의 본질을 강조한다.
“지난 한 해[1887] 동안 2명의 학생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현재 우리 교회 예비교인으로 되어 있다. 이들은 내가 최초로 세례를 준 한국인들이다. 나는 또한 우리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가운데서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개교 첫해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학생들 가운데서 구원사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유용한 인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의 피로써 구원받지 않고는 ‘양육될’ 수 없다. 다른 학생들은 길을 묻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기도와 심령의 소원은 이 학교를 특별한 영적인 힘이 넘치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다.”[미 감리회 선교부 1887년도 연례보고서, pp. 313~314]
1887년 9월 워렌(Warren) 감독이 내한했을 때 준공식을 가진 건물에는 교실 외에 기숙사와 근로장학생을 위한 산업부를 두어 출판 일을 시작하여 더 많은 학생을 고용하게 되었다. 1885년 8월경에 시작된 그의 교육활동은 1889년경에 이르면 거의 그 틀을 잡아가게 되었고, 학교의 평판은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교육의 이념과 고등교육의 이상: 초기에 한국인들은 이 학교의 영어 교육을 통해 출세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1886년 연례보고서에 “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합니까” “벼슬을 얻으려고” 라고 적혀있는 것은 이 학교의 교육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아펜젤러는 교육 이념을 부각시켰다. 그는 자조(自助, self-support)적 이념을 먼저 부각시키려고 했다. 자조정신은 바로 아펜젤러 교육사업의 중요한 이념이 되었다. 기숙사가 만들어지고 산업부가 생겨 근로장학생들을 수용한 것은 그의 자조훈련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의 하나였다. 자조․자주정신은 뒷날 배재 등 선교학교의 반침략 자주독립의 근대정신으로 발전되었다.
아펜젤러는 또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섬기며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갖도록 교육 이념을 정립해 갔다. 그는 예수의“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7~28절)의 이 교훈을 배재학당의 “欲爲大者 當爲人役”의 堂訓으로 발전시켰다. “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은 앞서의 성경구절의 정신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는 또 학생들을 통역관이나 교환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혁적인 교양인으로 양성하는 데 뜻을 두었다. 봉건적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현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가 기대했던 교육은 통역관이나 교환수 등의 기능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인 시민(교양인)과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또 그는 학생들이 자기 전통을 충실하게 이해하는 기반 위에서 서구의 이른바 개화된 문명을 수용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교육 이념으로 반영하였다. 아펜젤러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이 점에 주목하면서, 전통의 기반이 무시된, 서구문화의 일방적인 주입교육이 가져올 한계와 모순을 예견하였던 것 같다. 한국인의 교양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한문고전 과목이 필수로 주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배재학당의 목적은 한국 학생들에게 서구의 과학과 문학의 교육과정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제공하는 것인데, 현존하는 한국의 학교체제의 본질적인 특성과 결합시킨 것이다. 이 목적에 따라서, 비록 수업의 대부분이 영어를 전달매체로 하고 있지만, 한문고전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한문고전 과목을 공부해야 된다.”[배
재학당의 첫 연례보고서 1888-1889, pp. 3-4 - 이만열, ‘아펜젤러’, p. 331]
이러한 교육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아펜젤러는 올린저(Franklin Ohlinger)목사와 존스(George Heber Jones) 목사 외에 벙커(D. A. Bunker), 노블(W. A. Noble) 등 동역자의 협찬을 얻어 학교의 여러 과정과 교과과정도 구상하였다. 과정은 예비과정(preparatory department), 교양과정(academic dept.) 및 대학과정(college dept.)으로 나누고, 각 과정에는 적당한 과목들을 개설하였다. “일 년 후에는 대학의 개교 소식을 전하기를 희망한 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89년 현재 대학과정은 구상단계로 아직 교과과정이 마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비과정과 교양과정의 교과과정은, 그 기본 교과목이 영어․한문․언문 세 과목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 영어만 과정에 따라서 교과내용과 그 정도가 달리 나타나 있을 뿐이었다. 즉 예비과정에서는 독본만 있는 데 비해 교양과정에는 독본에다 문법, 철자(spelling), 펜습자 및 노래부르기, 산수초보(Rudiments of Arithmetic) 등도 영어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배재학당에는 예비과정과 교양과정 외에 여러 가지 부서(department)가 보이는데 근로장학생을 위한 산업부(Industrial dept.), 1889년 보고서에는 의학부(Medical dept.)와 일본어부도 보이고 있다. 1896년 연례보고서에서는 신학부(Theological dept.)의 경영 내용이 보이며, 1897년에는 영어부(English dept.)와 한문부도 있었다. 기포드(D. L. Gifford)는 3개 학부 ―한문부․영문부․신학부― 가 있음을 증언하였다.
배재학당에서 대학과정을 두었던 것은 흥미롭다. 1889년에 발간된 배재학당 첫 연례보고서에서는 일 년 후에는 대학과정(collegiate school)의 개설 소식을 전하기를 희망한다고 했고, 같은 해의 연례보고서(p. 291)에는 “4명의 학생은 내년에 대학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이 될 것이다”라는 것으로 보아 이 해에 개설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 후 1897년의 연례보고서에서 배재대학(Pai Chai College)이라는 말이 시작되어 그 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감리교가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 나라 720만의 사람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교양 및 대학과정, 신학과정(academic, collegiate, and theological work)이 있는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아직 한국에서는, 적어도 최고 수준의 대학은 운영되지 않은 듯이 보인다.
아직 학제와 교과과정 등이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신앙적인 바탕 위에서 학문적으로도 훌륭한 교육기관을 수립하여 운영해야겠다는 아펜젤러의 꿈은 원대하였다. 1898년에 ‘서울
대학교’(Seoul University)를 꿈꾸었던 그는, 1900년 제16차 연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정규 대학이나 대학교(A Regular College or University)를 개교하려는 것 등 원대한 교육 계획을 세우고 이들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총 25,000달러 상당의 금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44세의 나이로 비명(非命)에 갔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최초로 정규 대학을 설립하려는 구체적 계획이 그의 서거와 더불어 좌절된 것은 근대 한국을 위해서 막대한 손실이요, 큰 비극이었다.
다른 활동: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적극 지원한 결과, 학생들은 안으로는 반봉건․사회개혁의 역군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외세의 침략 앞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반침략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협성회 운동을 통해 독립협회 운동에 나선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된다. 그는 한국인의 충군애국적이고 자주독립적인 운동을 뒷받침하여 배재학당 학도들로 하여금 황제의 萬壽聖節에는 경축회에 참석토록 하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 懸燈하고 연설하는 등의 경축행사를 갖기도 하였다. 또 1896년 이후 독립협회를 지원하였다.
1896년 11월 21일에 독립문 정초식이 열렸을 때, 아펜젤러와 학생들은 이 정초식에 초청받아 5-6천 명이 회집한 이 모임에서 조선가(진보가)를 부르기도 했고 아펜젤러는 조선말로 하나님께 축수하는 순서를 맡아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께서 성체가 안강하시고 조선독립이 몇 만 년을 지내도 무너지지 않게 되며 조선 전국 인민이 점점 학문이 늘고 재산이 늘어 새 사람들이 되게 하여 줍소서”라고 기도했다.[독립신문〉1권 100호, 1896.11.24 일자 논설]
배재학당의 학생 가운데 만민공동회 운동에 가장 앞장선 이는, 아펜젤러가 가장 아끼는 학생인 李承晩이었다. 그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入獄되었을 때 아펜젤러는 그의 가족을 도왔다. 배재학당은 만민공동회 운동과 관련이 있었을 뿐 아니라 이승만 등의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여 도망쳤던 ‘죄수’들이 그곳으로 도망치기도 했던 곳이다.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는 아펜젤러가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렇게 자기 지도하에 있는 젊은이들을 애국․개화 운동과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토록 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98년 만민공동회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배재학당과 그 학생들은 여기에 관련을 맺게 되었다. 따라서 반대파들이 아펜젤러와 배재인들이 만민공동회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학부의 洪禹觀이 아펜젤러에게 편지를 보내, 만민공동회에 배재 학생들이 많이 참석했는데 즉각 해산하라는 칙명이 있으니 교사들을 동원하여 해산시키기 바란다고 하였던 것은 아펜젤러와 배재학생들이 만민공동회 운동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펜젤러의 활동은, 성경 번역과 그 출판에 크게 조력했고, 배재학당 안에 삼문출판소를 두어 전도문서와 정기간행물 등을 인쇄했고 출판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897년 2월 2일부터 한국인 신자와 독자들을 위해 《죠션그리스도인회보》를 출간하여 성경공부와 성경번역 및 교계 소식과 해외소식을 전해 주었다. 또 독립협회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던 그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한 때 <독립신문〉의 편집을 책임졌다. 그러나 선교부의 간섭으로 윤치호에게 물려주었다. 이것은 독립협회 운동을 뒤에서 도왔던 아펜젤러에게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아펜젤러는 성경 번역을 위해 1902년 6월 11일 목포행 기선[구마가와마루: 熊川丸]에 올랐다. 이에 앞서 그가 무어(David H.Moore) 감독을 모시고 6월 1일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기 담당 구역인 ‘무치내’로 행했을 때, 일본 노동자들과의 충돌이 있지 않았더라면 6월 첫 주에 목포에 갔어야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며칠 늦게 되어 6월 11일에 출발했는데, 이날 저녁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해에서 충돌사고가 났다.
이 때 아펜젤러와 같은 배에 승선했던 운산 광산의 기술자 보을비(J.F. Bowlby)는 아펜젤러가 깨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배[기소가와 마루: 木曾川丸]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그의 조사[조한규]와 그가 정신여학교 교장
도티로부터 부탁받은 한 여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가 구조되지
못했던 것이다.
1902년 6월, 그가 먼저 간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한국의 선교계나 한국의 독립운동계로서는 대단히 애석했지만, 그 죽음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그의 죽음은 원대한 포부를 가진 정열적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애석하게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 선교사이자 크리스챤 지도자 중에서 죽어서까지 아펜젤러만큼 깨끗한 이름을 남긴 이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고 난 뒤에도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지도자로서 우리 뇌리 속에 인각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혼탁한 기독교계에 무언으로 현대적 의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이만열 편, 『아펜젤러 -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연세대 출판부, 1985)
이만열,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과 한국감교회의 설립」「아펜젤러의 교육사업」『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두레시대, 1998) 소수
이만열, 「아펜젤러의 생애와 활동」 『아펜젤러 순직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
(2002)
二.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 게일과 백낙준의 언더우드관
언더우드(1859-1916)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한국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한국에 도착하여 기독교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설립하고 성경번역과 근대교육, 문서활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고, 의료선교사로 있던 그의 부인과 함께 궁중에 드나들면서 한말 정치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던 분이다.
“장재(壯哉)라 위재(偉哉)라 원 목사여, 번역에 최선 착수도 원 목사요 전도에 열심함도 원 목사요 학교와 신문을 설시(設施)도 원 목사요 거대 재정을 모집도 원 목사요 다수 선교사를 파견케도 원 목사라. 연(然)이나 여성경학원을 창설치 못도 유감이오 장로 감리를 합일케 못함도 대유감이오 조선셔 별세치 아니고 뉴욕에서 별세도 동(同) 목사와 오(吾) 조선인의 일반유감이라 노라.”[奇一 牧師, 「元牧師行狀」 『언더우드-한국에 온 첫 선교사』(이만열 역, 기독교문사, 1990) 390쪽]
이 글은 언더우드가 돌아간 후 게일(J.S.Gale, 奇一)이 지은 행장의 일절이다. 게일은 언더우드를 번역가요, 전도자요, 학교 설립자요 신문창설자며, 모금운동의 탁월성을 보인 분이며, 다수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이끌었던 분이라 했다. 언더우드에 대한 평가는 백낙준 박사의 <원두우박사소전(元杜尤博士小傳)>에서도 보이는데 이는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 50주년을 기념할 때 쓰여진 것이다. 백 박사는 <사업에 나타난 원 목사>를, 선교사, 학자, 교육가, 성경번역자,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 평화의 사자 등 여덟 분야로 말했는데, 그 중 ‘정치가’로서의 언더우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언더우드는 남장로회 선교사와 가나다장로회 선교사를 한국으로 유인했고, 한국선전사업을 전개하여 많은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자립적 한국토착교회의 설립, 교파의 연합과 협동, 서해안의 선교사들의 피서지 매입, 한국기독교청년회의 창립을 주도했다는 것이다.[백낙준, 「원두우소전」(『언더우드 - 한국에 온 첫 선교사』) 371쪽-372쪽]
백 박사는 또 언더우드의 <성격과 이상>을 용기의 인(人), 신앙의 인, 다방면의 인, 연합사업의 주창자라고 하면서, 연희대학교 동상의 글로써 대신한 바 있다.
게일이나 백 박사의 지적에는 언더우드의 생애가 잘 녹아나 있다. 그는 성경번역가요, 복음전도자며, 교회와 학교의 설립자며, 신문과 잡지를 창설한 언론가며, 열정과 냉정을 겸한 운동가였고, 성령에 사로잡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있는 신앙인이었다. 독단적이라거나 조소(粗疎), 호강(豪强)하다는 비판과 오해도 있었으나, 그는 원칙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에큐메니즘을 조화시켰고 소망 중에서 비전을 실천했던 지도자였다.
2. 언더우드의 생애 - 선교사역 개관
언더우드의 선교사로서의 생애를 그의 본국 휴가를 중심으로 시대 구분해서 살펴보겠다. 본국 휴가는 그의 선교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고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그의 본국 휴가는 제1기 1885년-1891년, 제2기 1891년-1901년, 제3기 1901년-1906년, 제4기 1906-1912년, 마지막 제5기 1912년-1916년으로 된다.
제1기(1885-1891): 그가 한국 선교의 기초를 닦는 기간이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 4월 7일 서울로 들어온 언더우드는, 당시 알렌과 한국 정부 사이에서 그 설립이 논의되던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이 4월 10일경에 개원되자 알렌을 도와 하루에 70여명의 환자를 보았다.[1885년 4월 26일자 언더우드→엘린우드 편지] 출발 전에 의학을 배운 적이 있는 그는 광혜원에서 진료실 일을 돕는 한편, 의학생들에게 영어와 물리, 화학 등을 가르쳤다. 아직 신교(信敎)가 허락되지 않았고 거기에다 선임(先任) 알렌이 선교에 불타고 있던 후배들이 복음전도에 나서는 것을 만류하는 상황에서, 언더우드 선교의 제1기가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 5월에는, 뒷날 언더우드 학당 혹은 밀러(민로아)학당으로 그리고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된, 정동 고아원을 개원했다. 그 무렵 소극적이지만 복음전도에 나섰던 그는 1886년 7월 18일[언더우드 부인은 7월 11일]에는 노춘경에게 비밀리에 세례를 베풂으로써 한국인에게 최초의 세례식을 베풀게 되었고, 아펜젤러와 함께 1886년부터 이수정 역 <신약 마가젼복음셔언해>의 개역작업을 벌여 그 이듬해 봄에 <마가의 젼 복음셔언해>를 요코하마에서 간행했다. 이어서 1887년 한국에서 성서위원회를 조직(2.7)하고 그 회장에 취임했다.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푼 이후 언더우드는 1887년 1월부터 9월 26일까지 1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이만열, 「서상륜의 행적에 대한 몇 가지 문제」『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 1991) 98쪽 표3 참조] 이를 토대로 1887년 9월 27일 저녁에는 14명의 수세자로 정동장로교회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새문안교회다. 두 사람의 장로가 이날 저녁 선출됨으로 한국 최초의 ‘정규조직교회(a regularly organized church)’가 조직되었다.
그는 서울 교외에 나가 전도에 힘쓰는 한편, 북부지방 전도에도 나섰다. 1887년 10월과 1888년 봄 그리고 이해 11월에도 제 3차 전도여행을 감행했다. 1889년 3월 릴리아스 S. 호튼(1888.3.27 내한한 의료선교사)과 결혼한 그는 신혼여행을 겸하여 다시 북부지방 전도길에 올라 의주 교인 30여명을 배에 태워 압록강을 건너가 세례를 베풀었다. 이런 상황에서 1888년 6월에는 서울에서 영아소동’이 일어나 전도에 큰 지장이 되기도 했다.
1889년 여름, 언더우드는 한국어 사전과 문법서 편집에 몰두했다. 이는 한국인들의 성경번역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번역사업에는 사전과 문법서 편찬이 시급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1890년 4월에 요코하마로 가서 『한영자전』, 『영한자전』, 『한글문법서』와 한글 소책자 2권을 출판하여 이 해 5월에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그는 1890년 6월에 죠션셩교셔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문서운동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부부는 1890년 9월 아들(호레이스 호튼, 원한경)을 얻게 되었다. 그런 기쁨 속에서 그는 중국 지푸를 여행하기도 하고 그 이듬해 2월에는 베어드와 함께 부지 구입을 위해 부산에 가기도 했으나, 1891년 3월 아내의 관절염 악화로 미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났다.
제2기(1893-1901): 1891년 미국으로 돌아간 언더우드는 이 해 6월 모교인 뉴욕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를 받고, 그 해 9월에는 내쉬빌에서 개최된 미국신학교선교연맹 대회에서 연설, 젊은 신학도들에게 선교현장으로 나오도록 권유, 1892년 1월에는 남장로교에서 4명의 젊은이가 한국 선교를 자원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이해 9월 토론토에서 열린 장로교회연맹의 집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고 그곳에서 만난 에비슨을 권유, 한국 선교에 나서도록 했다. 에비슨은 1893년 한국에 부임하여 제중원 원장이 되었고 뒷날 세브란스 병원을 건축했으며, 세브란스교장, 연희전문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며, 1935년 은퇴할 때까지 한국의 선교현장에서 일했다.
1893년 5월에 한국에 돌아온 언더우드는 이해 10월, 곡조찬송가인 『찬양가』를 출판했다. 그는 또 『누가복음』(1896)과 『요한공부』(1899)를 번역 출간했는데, 1900년 9월 9일 ‘신약전서완역 기념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노력이 컸다. 1895년 10월 18일 저녁 민비가 시해되자,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이 얼마간 고종을 호위하게 되었다. 언더우드 부인의 증언이다.
“수인(囚人)이 되다시피한 왕은 궁궐에서 준비되는 모든 음식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과 언더우드의 집으로부터 번갈아가며 음식을 가져 갔다. 그 음식은 주석 금고에 넣어 예일(Yale)제 자물쇠로 잠근 다음, 열쇠는 언더우드가 직접 왕에게 건네 주었다. 또한 매일 밤마다 두 명의 외국인이 왕 곁에 남아 왕을 지켰다. …언드우드는 자주 한밤중에 경계를 섰다.”[L.H.언더우드 지음, 이만열 옮김, 『언더우드-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 158쪽]
이러한 상황에서 왕을 구출하여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왕당파가 궁궐을 공격하려 했다는, ‘춘생문 사건’이란 것이 일어났는데, 이 때 언더우드는 에비슨 헐버트와 함께 왕과 왕자의 안녕을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은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한국의 정치에 관련되었다. 1896년 9월 2일과 그 이듬해 8월 23일의 고종탄신 축하행사가 추진된 데에는 그 배후에 언더우드와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또 언더우드는 1897년 의화군의 교육을 위해 일본에 갔고 1897년 11월에 거행된 ‘명성황후 추도회’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언더우드는 1897년 4월 1일 주간 <그리스도신문>을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1901년 연합운동에 발맞춰 <대한그리스도인회보>과 통합, <그리스도신문>이라는 제호로 계속되었다. 이 신문은 교계 소식 외에 농업을 비롯한 산업과 국내외 문제까지 다루었다. 한국 정부는 이 신문을 일반 국민에게도 보급했다.
언더우드는 이 시기에 왕성하게 교회설립을 추진했다. 1894년부터는 고양, 김포, 황해도 곡산군에도 전도, 무릉리교회와 곡산읍교회를 설립했다. 1895년에 새문안교회에 영신학당을 설립하고 장연군 신화면 의동교회, 1897년에는 고양군 행주교회와 토당리교회, 김포읍교회, 곡산군 화촌면 도리동교회 등을 설립했으며, 1898년에는 곡산군 서촌면 화천리교회와 은율읍교회, 1901년에는 김포군 송마리교회와 파주군 문산리교회를 각각 설립했다. 연합운동에도 힘을 쏟은 언더우드는 1898년 가을, 캐나다 장로교의 함경도 선교 개시를 지원했고, 1899년 9월에는 장로회 4개 선교부의 공의회의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1년 <장로회공의회>에 한국인을 참여시키게 된 것이나 이해 5월 평양에 연합장로교신학교를 개교하게 된 것도 언더우드의 에큐메니칼 정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런 연합활동을 바탕으로 1900년 4월에는 뉴욕 에큐메니컬 선교대회에는 <한국교회 자급>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다. 1901년 5월, 이스라엘과 유럽을 거쳐 제2차 안식년 휴가에 들어갔다.
제3기(1902.12-1906.7): 천주교와의 갈등에 직면, 1903년 2월에는 해서교안 문제에 관여했다. 언더우드는 연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YMCA 이사 피선(1903.10), 대한교육학회 회장에 피선(1904), 한성감옥소 전도를 통해 전직 고위관리와 양반층을 옥중 개종시키는 데에 도 관여했다. 이 무렵 감리교 2개교단과 장로교 4개교단이 하나의 교단을 설립하자는 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는데, 이 때 언더우드는 1905년 9월 15일에 한국복음주의총공의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하나의 ‘대한예수교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하나의 교단을 만들려는 현지 선교사의 노력은 본국 선교부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언더우드 부부는 출판활동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언더우드가 The Korea Review 편집과 The Korea Mission Field 창간(1905)에도 관여했고, 문필가인 그의 부인은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의 출간(1904)에 이어 With Tommy Tomkins in Korea도 출간(1905)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이 때 신약전서 공인본 출간(1905)에도 관여했다. 1906년 7월 세 번째 안식년 휴가에 들어간 그는 1908년 가을, 뉴욕대학교(팀즈철학기금)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동아시아 종교를 강의했고 이 때 The Call of Korea 를 출간했다.
언더우드는 1905년 남대문 밖 복숭아 골에 지은 새 집으로 이사했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이 기간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4년 김포군 처산리교회와 시흥읍교회, 1905년 시흥군 영등포교회와 광명교회, 1906년 시흥군 가학리교회, 노량교회, 김포군 용강교회, 파주군 죽원리교회, 괴산군 청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제4기(1909.8-1912.4): 귀임한 그 다음달 장로교 독노회에서 그는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존 디 웰즈학교(경신학교)의 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백만명 구령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여기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뉴욕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강의한 것을 기초로 1910년 The Religions of Eastern Asia를 출간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용산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1912년 4월 다시 제 4차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12년 6월, 아들(원한경)의 뉴욕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휴가 기간 동안 그는 서울에 기독교연합대학[연희전문대학]을 건립하려는 기금을 모금했다.
제5기(1912.8-1916.4): 1912년 9월, 그는 새로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초대 총회장에 선임했다. 이는 장로교 첫 선교사에 대한 예우의 뜻도 있었다. 그는 『기독신보』 주필에, 『한영문법』개정판 출간(1914), 번역위원장으로서 구약 번역을 계속했다. 제 5기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그가 많은 북장로교선교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연희전문학교를 개교한 것이었다. 그는 평소 그를 지원했던 언더우드타자기회사의 형으로 부터 대학기금 50,000달러의 희사를 받고 신촌에 대학부지(19,320평)를 매입, 대학 발전을 꾀했다. 한편 그는 일본어의 필요를 느끼고 이에 대한 공부를 위해 일본에 갔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그의 건강을 극도로 악화시켜 1916년 4월 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언더우드는 1916년 10월 12일 뉴저지주 애틀란틱시에서 향년 57세를 마감했다. 그를 선교사로 파송한 뉴욕시 라파예트 장로교회는 1916년 10년 15일 그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그를 뉴왁의 그로브
교회 묘지에 안장했다.
참고문헌:
릴리 언더우드 저, 이만열 역, 『언더우드-한국에 온 첫 선교사』(기독교문사, 1990)
언더우드 저, 이광린 역, 『한국개신교 수용사, The Call of Korea』(일조각, 1989)
이광린 저,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연세대 출판부, 1991)
이만열, 「선교사 언더우드의 초기 선교 활동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14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2)
최재건 저, 『언더우드이 대학설립-그 이상과 실현』(연세대 출판문화원,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