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소설부문 당선작] 이지윤 이재윤
■당선작
어혈
이지윤 학생(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우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지현은 피를 뽑고 있었다. 그녀는 이십 분이 넘도록 단단한 침대 바닥에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지현은 엎드려 있는 동안 흉부가 압박돼 숨을 쉬기가 힘들었고, 등살이 조이는 느낌에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간호조무사가 커튼을 젖히며 어디 불편한 곳이 있냐고 물어올 때면 그녀는 자신의 몸부림이 부끄럽게 느껴져 말을 흐렸다.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그랬다는 말에 간호조무사는 지현의 허리춤을 바라보며 독소가 많이 쌓이셨나 보다, 하고 속삭였다. 간호조무사는 그녀의 오른쪽 팔꿈치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자세를 바꿀 것을 알렸다. 지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로 누워 밀린 숨을 토해냈다. 벨이 울리자 한의사가 다가왔다. 한의사는 지현의 곧은 척추 선을 따라 박힌 수십 개의 바늘을 뽑아낸 다음, 비슷한 위치에 다시금 바늘을 찔러넣었다. 둥근 플라스틱 기계 서너 개가 바늘을 촘촘히 모아 감싸면 곧이어 살이 조이는 압력이 가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검붉은 피 대신에 맑은 핏물이 기계 안에 고였다. 지현은 일주일에 세 번 피를 뽑았다. 피는 한 번 뽑을 때마다 삼십 분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한의사의 가운 오른쪽 주머니는 밑단이 터져 손을 넣을 때마다 손가락이 허공에 보였다. 이곳에 누워 있을 때면 지현은 한의사의 구멍 난 주머니를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한의사의 손가락이 힘차게 허공을 향해 나올 때면 숨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면서 은은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지현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응시하며 지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한의사의 구멍 난 주머니를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했을 땐 이미 우진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다는 문자에 지현은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답장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의원에 있다는 사실을 우진에게 알리지 않았다. 언젠가 그로부터 자신을 믿지 못하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창가에 앉아있을게」
지현은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한의원을 나섰다.
지현은 간헐적으로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대체로 목에서 시작된 통증은 척추를 따라 내려오다가 꼬리뼈를 찌르는 방향으로 뻗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 통증을 미끄럼틀에 비유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사포처럼 까슬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데 하필 맨 밑에 커다란 송곳이 박혀있는 거예요. 나는 그 송곳에 매번 찔려요. 대학병원 의사는 지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사는 그녀의 증상을 빈 종이에 적으며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표현력이 좋은 환자네요. 의사들로부터 몇 번의 불쾌한 진찰이 이어졌지만, 지현은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옮겨 가며 x-ray부터 초음파, ct, mri까지 할 수 있는 검사는 몇 번이고 받았다. 그녀의 증상을 들은 신경외과, 영상의학과, 마취통증의학과의 소견은 전부 달랐지만, 그들 모두가 사용한 공통의 단어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신경성이었다.
그 무렵 지현은 통증이 심해져 다니던 회사를 휴직했다. 수입이 끊기는 것보다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이 더욱 심각했다. 조금도 의자에 앉아 은행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근무했던 지점은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나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당장에 휴직 말고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매일 밤 허리를 부여잡고 우는 지현에게 우진은 한의원을 권했다. 그게 다 몸에 독소가 쌓여서 그런 거라고, 한의원에 가서 몇 번 바늘에 찔리다 보면 몸이 개운해지는 것이 느껴질 거라고. 우진은 내심 그녀가 자신의 한의원에 방문하길 바랐지만, 지현은 우진에게 허리를 내보이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침을 맞기 위해 바지를 엉덩이 가운데까지 내리고, 상의를 속옷 아래까지 들어 올리는 것은 연인 간 잠자리를 위해 살을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행위였다. 굳이 남자친구의 한의원이 아닌 다른 한의원을 찾아간다는 그녀에게 친구들은 한 마디씩 말을 거들었다. 사랑이 절절하진 않은 것 같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절절하니까 엉덩이는 못 깐다는 말까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지현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그를 못 믿는 건가?
그들은 소개팅으로 만났다. 지현은 원체 연애에 관심이 없었기에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을 바라지도 않았고, 나서서 누군가를 만나려고 노력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십 대 초반, 술자리에서 분위기에 취해 선배의 고백을 받아들인 것으로 연애를 시작했다. 이십 대 중반엔 취업 스터디 회원의 끈질긴 구애로 두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삼십 대가 되고 시작한 세 번째 연애 상대가 우진이었다. 지현은 친구의 부탁으로 나간 소개팅에서 우진을 만났고, 지금까지 삼 년간 무탈하게 연애를 이어왔다. 과거의 연애와 다른 점이라면 누구 한 명의 마음이 앞서지 않고, 두 사람 모두 동시에 서로를 좋아했단 것이었다. 그 점이 지현을 설레게 했다. 연애 기간이 삼 년이 넘어가면서부터 우진은 조심스레 결혼 이야기를 꺼내왔다. 지현보다 두 살 많은 우진은 결혼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또래 중 가장 먼저 결혼한 그녀의 친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며 곧 청혼을 받게 될 거라고 지현을 재촉했다.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대답하는 지현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 속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우진은 문자대로 창가에 앉아있었다. 그새를 못 견디고 아메리카노를 마셔서인지 커피의 양은 머그잔의 반보다도 적게 들어 있었다. 지현은 차가운 페퍼민트 티를 주문해 음료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로 다가갔다. 바쁘지 않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요일에 여는 병원도 있나.”
있을 걸, 어딘가엔. 우진이 지현을 바라봤다. 그들은 말없이 목을 축였다. 며칠 전부터 우진은 지현에게 일요일에 시간을 빼놓으라고 당부했다. 지현은 그날 아버지를 만나기로 해서 어렵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말은 거짓말도, 그럴싸한 변명도 아니었다. 이번 주 일요일은 아버지의 생신이었고, 지현은 모처럼 고향으로 내려갈 차표를 예매해 놓았다. 그 문제를 제치더라도, 우진이 기대하는 낭만적인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가 원하는 방식의 하루를 보내기엔 허리가 몹시 아팠다. 우진이 정장 안 주머니를 더듬었다. 지현은 그가 꺼내는 물건을 담담히 바라봤다. 이런 곳에서 주고 싶진 않았는데……. 우진이 멋쩍은 듯 목덜미를 긁으며 테이블에 반지를 내려놓았다. 빨리 주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지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진의 표정이 초조함에 일그러졌다. 우진이 입을 떼기 전, 지현이 먼저 말했다.
“지금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지?”
*
지현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녀의 어머니가 사라졌다. 장을 봐 오겠다던 사람이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하나둘씩 마루에 나가 그녀의 어머니를 기다렸다. 불침번을 서는 사람들처럼 그녀의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돌아가며 마루로 나갔다. 이튿날 저녁까지 소식이 없자 그녀의 할머니는 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며느리가 지새끼를 버리고 도망친 게 틀림없다. 지현은 조부모와 함께 트럭을 타고 시내 중심에 있는 경찰서로 향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형사들 틈에서 지현은 밀려오는 잠에 취해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노부부는 손녀가 사람들 틈에 치이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두꺼운 담요로 지현의 몸을 감쌌다. 지현은 반쯤 뜬 눈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지현이 눈을 비볐다. 그녀는 경찰서 벽면에 걸린 시계를 보며 두어 번 하품도 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의 할머니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형사에게 소리 높여 화를 내고 있었다. 이윽고 며느리가 도망을 친 것 같다는 외침에 서너 명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구석에 앉아있던 형사가 손짓하자 어린 순경이 지현의 할머니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경찰을 따라가다 보면 조용한 회의실이 나왔다. 겉은 취조실이라 하고 있지만, 정확히 무슨 조사가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허름하고 쓰레기가 난무한 곳이었다. 지현은 어둡고, 습한 취조실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엄마 여깄어? 앳된 목소리에 복도를 걷던 경찰이 그들 사이로 다가와 아이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지현은 복도 의자에 앉아 할머니를 기다렸다. 할머니가 나오면 할아버지가 들어가고, 할아버지가 나오면 다시 할머니가 들어갔다. 몇 번을 돌아도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는 것이 억울해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지현의 아버지는 새벽이 되어서야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는 곳곳에 주머니가 달린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많은 주머니 중 어디에도 무언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구를 만드는 여느 목수들과는 달리 주로 수목원이나 사찰, 또는 동네 뒷산의 나무를 벌목하는 일을 했다. 조사를 받는 동안 그녀의 아버지는 몇 차례 언성을 높였으며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소음을 내기도 했다. 중간중간 학대와 폭력 같은 단어가 들려올 때면 그녀의 조부모는 헛기침을 뱉으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지현은 복도 의자에 앉아 그들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돌아가며 실종자의 인상착의와 특징, 자주 가는 장소 등에 대해 말해야 했는데 문제는 세 사람의 말이 엇갈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간이 지체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조사는 실종 신고가 완료됐으니 이만 가 보라는 형사의 말로 중단됐다. 수사는 최소 이 주 이상 실종상태여야지만 진행된다는 말에 그녀의 할머니는 처음과는 달리 지친 낯빛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가는 사람 안 붙잡습니다.
잠들기 전, 지현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자신이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동네 뒷산의 늙은 나무를 베고 오느라 늦은 것이라는 말에 지현은 입술을 삐죽였다. 뒷산의 늙고, 오래된 나무라면 지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장소에는 저마다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그들이 살았던 동네 뒷산에 있는 나무 역시 그러했다.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지현의 가족들은 지현을 데리고 마을회관에 가서 잔치를 벌였다. 그때마다 지현은 동네 아이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아이 넷을 합친 것보다도 굵은 너비의 나무 아래에서 술래잡기나 얼음 땡과 같은 놀이를 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뛰놀고 있으면 어느샌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오래전 일이지만 지현은 어머니의 치마가 바람에 나풀대는 장면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꼬리와 곧게 뻗은 손을 볼 때면 ‘엄마’라는 단어 대신에 이름 석 자를 불러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옥륜리의 오래된 나무에는 이름도 있었는데, 어쩐지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았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잊어버린 것인지 기억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곤 했다. 마을 사람 중 유일하게 나무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의 어머니가 사라지자 그곳에서 그 이름을 부르는 어른은 찾아볼 수 없었고, 주변을 뛰노는 아이들만이 어눌한 발음으로 웅얼댈 뿐이었다. 지현은 그저 바람이 불 때마다 늙고 오래된 나무가 그곳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다시 시원하게 내뱉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해 늦가을, 시간이 몇 달 흘렀음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자취를 감춘 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지현의 아버지는 밤낮이고 할 것 없이 술을 마셨으며 지현의 할아버지는 지독한 감기를 앓았다. 지현의 할머니는 집안 남자들을 먹여 살리느라 용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지현에게 일찌감치 집안일을 가르쳤다. 지현은 할머니를 따라 마룻바닥을 걸레질하며 손가락으로 할머니의 발바닥을 눌렀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지현을 간지럽히는 것으로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하루는 가족들 모두 마을회관으로 향한 적이 있었다. 특별한 날이 아닌데도 자신까지 마을회관에 들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그녀는 잔뜩 들떠 있었다. 그녀의 조부모는 아이가 돌부리를 밟고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멀찍이서 지현의 아버지는 정장을 입은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현은 남자가 아버지의 어깻죽지를 두드리는 것을 잠자코 지켜봤다. 그녀는 가족들을 따라 마을회관 뒤편의 산길을 올랐다. 지현은 사람들의 발에 의해 낙엽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곧이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가 한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은 한복을 입은 노인 주위로 둥글게 섰다. 그곳에는 동네 어르신들과 처음 보는 보살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지현 또래의 아이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들 부모는 언짢은 표정으로 지현에게 손 인사를 건네려는 아이들을 막아섰다. 지현은 푸른 천 위에 차례로 줄지어진 제사상을 바라보며 할머니에게 안겼다. 고개를 돌린 채 뒷산의 오래된 나무들을 매만지던 할아버지와 어린 지현을 안아 든 할머니의 표정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지현의 아버지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지현은 할머니 품에 안겨있었기에 남들과 달리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상태였고, 그래서 조금 더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누구에게 올리는지 모를 제사상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무를 만지고 있던 할아버지도, 지현을 품에 안고 있던 할머니도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등한시한 채 절을 올리기 위해 몸을 숙였다. 지현은 그들의 고개가 일제히 향한 곳을 바라봤다. 모두의 고개를 조아리게 만든 것은 이미 벌목되어 나이테만 보이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였다. 그것을 본 순간 지현은 할머니의 목을 거세게 끌어안으며 고집을 피웠다. 계속되는 지현의 고집에 한복을 입은 노인이 지현에게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노인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린 뒤 잘린 나이테를 향해 다시 절을 올렸다. 그날 그곳에 있던 사람 중 절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지현이 유일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지현은 그들이 지낸 것이 산의 산신과 나무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모두 옥륜리의 오래된 나무를 벌목하길 망설여서 자신의 아버지가 백만 원을 더 받고 그 나무를 베어버렸단 것도. 그 후 아버지가 무당으로부터 마을 전체에 액운이 꼈다는 말을 들었단 것도. 그래서 늦게나마 사람들과 함께 위령제를 진행했다는 것도. 나무를 벌목한 이유가 뒷산을 정리하고 그 자리에 콘도를 짓기 위해서라는 것도. 그 모든 과정이 기사에 실렸던 것까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무를 벌목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니. 그건 바로 망설이지 않는 거다. 망설이지 않고 기를 꺾는 거다. 먼저 도끼로 밑동을 세 번 내리찍으면 큰 틈이 생기는데, 그 틈을 톱으로 파고들면 나무는 금세 잘리고 만다. 네가 나무를 베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을…….”
차례로 부모의 장례를 치른 후, 그녀의 아버지는 쉴 틈 없이 술을 마셨고 술에 절어 있을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들의 집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으며 노부부의 방은 영원히 비워둘 것처럼 자리했다. 지현이 거실 소파에서 쪽잠을 잘 때면 그녀의 아버지는 집에서 가장 작고 허름한 방에 들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서 잠을 청했다. 지현은 열린 문 틈새로 축 늘어진 아버지의 어깻죽지를 바라봤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휘어있는 허리를,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목을 바라보며 그녀는 밑동만 덩그러니 남은 옥륜리의 오래된 나무를 떠올렸다. 베고, 베고, 베어지는 것. 그런 게 비단 나무만은 아닐 것이라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지현은 곧장 살던 동네를 떠나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때도 그녀의 어머니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낡은 집에는 그녀의 아버지만이 남아 오래도록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명절에 집에 들러 아버지를 뵐 때면 지현은 허리는 괜찮냐는 질문을 버릇처럼 건넸다. 돌아오는 대답은 괜찮다는 말뿐이었다. 지현은 아버지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요즘도 뒷산의 나무를 벌목하곤 하는지. 옥륜리의 오래된 나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날 내가 절을 올리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지. 당신이 정말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
「일 안 끝났다.」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지현은 아버지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 언젠가 지현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도 그가 목수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고. 목수가 된 건 순전히 자신의 의지였다는 말에 지현은 아버지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뒷산의 오래된 나무를 베었을 때 뒷돈을 더 받긴 했었지만 그런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고, 보수가 좋은 직업도 아니기에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현장에 남아 일하기를 고집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는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드러난 굳은살과 햇빛에 검게 탄 피부를 볼 때면 지현은 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속이 타들어 감과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도 느꼈다. 집안 곳곳에 자리한 누군가 버린 골동품과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낡아 버린 가구들을 마주할 때면 아버지의 천성을 목격한 듯해서 참을 수 없이 울화가 치밀었다.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모습도, 급하게 씹느라 식탁에 뱉어진 음식물을 손으로 집어 다시 넣는 습관도,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며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도-그러면서도 절대 술잔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 고집까지- 모두 지현을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고향에서 도망치듯 서울로 상경하던 날, 지현의 아버지는 터미널에서 그녀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훔쳤다. 지현은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아버지의 씁쓸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 순간 그녀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음을 그녀의 아버지는 고개 숙여 우느라 알지 못했다.
지현은 터미널 역 근처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작은 생크림 케이크를 샀다. 케이크를 들고 버스로 향하는 동안 우진에게선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고향에 잘 다녀오라는 내용의 문자였지만 지현에겐 마냥 곱게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고향으로 가는 동안 우진과의 결혼에 대해 생각했다. 삼십 대가 넘어가면서부터 결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생각이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급해 보이는 우진의 태도를 목격할 때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미묘한 반감이 샘솟았다.
지현은 버스에서 어떤 노래도 듣지 않았고,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창밖만 응시했다. 버스가 달릴 때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과 정차할 때 순간을 포착하듯 느리게 다가오는 풍경. 그 모든 것들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지현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녀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것은 양날의 검처럼 다가왔다. 사는 동안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그래서 더욱 어머니를 잊을 수 없었다. 지현이 어릴 적, 그녀의 어머니는 지병을 앓았다. 지현은 늘 바닥에 누워 옅은 신음을 뱉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방 모서리에서 책을 탑처럼 쌓고 놀았다. 아주 어릴 때는 그것이 사람이 아파서 내는 소리인 줄 모르고 옹알이하듯 어머니를 따라 신음한 적도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따라 하는 아이를 보며 부모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비참함과 다행스러움 중 어느 쪽이 더 컸을지는 지금처럼 속절없이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순간 불쑥 드는 생각이었다. 지현은 우진과의 결혼을 고민하던 순간에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 의아했다. 바닥에 내려놓은 케이크는 자꾸만 앞 좌석을 향해 미끄러졌다. 케이크는 그녀의 발치에 부딪혔다가 모서리로 향했고, 끝내 포장지 끝부분이 주먹에 맞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구겨진 케이크 포장지를 보며 지현은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은 한 장면을 떠올렸다. 늦은 밤, 자신을 집 마당으로 이끌어 별을 보여주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개를 돌리려 할 때마다 거세게 자신의 머리통을 잡아 누르던 그들의 악력. 아버지의 욕설 섞인 고함. 간헐적으로 들리던 어머니의 신음과 물건이 무차별적으로 깨부숴지던 소리 같은 것들을.
*
지현은 오후 여섯 시가 넘어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세 시간이 넘도록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어서인지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했다. 마지막에는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혀 눕다시피 했지만,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질 뿐 줄어들진 않았다. 지현은 가까스로 터미널 의자에 앉아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삼십 분간 총 다섯 통의 전화를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지현은 집으로 가는 것과 아버지가 일하고 있을 수목원으로 가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집으로 간다고 한들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문제는 열쇠만이 아니었다. 옥륜리로 가기 위해서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사십 분은 더 들어가야 했다. 지현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에 보이는 택시를 잡았다. 또다시 거리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일그러진 케이크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통증은 목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허리를 타고 내려가다가 꼬리뼈를 날카롭게 찔렀다. 택시 기사는 신음하는 지현을 보며 수목원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가도 신경성이래요.”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가씨, 잘 안 들려”
“신경성이라고요.”
“그럼 병명이 없는 건가?”
“신경성이라고요. 제가 지금 그게 병명이라고 말하잖아요.”
답지 않게 날 선 대답을 뱉은 후로 더 이상의 큰 고통은 이어지지 않았다. 도착지에 가까워져 올수록 지현의 얼굴은 당혹감에 물들었다. 택시 기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 지현은 카드를 내밀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택시 기사는 사람이 아프면 예민해질 수도 있다며 되려 지현을 위로했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수목원으로 가려던 찰나, 경적이 울렸다. 지현은 내려가는 조수석 창문을 바라봤다. 허리를 굽힐 수 없던 지현에겐 기사의 부르튼 입술만 보였다. 근데 말이야 아가씨, 틀렸어. 그건 병명이 될 수 없지. 택시는 멀어져가고, 지현은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런 건 변명에 가깝지. 그러니 아가씨가 틀린 거야. 그녀는 순식간에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형용할 수 없는 억울함과 분노, 수치심을 삼키며 멀어져 가는 차를 바라봤다.
지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수목원 앞이에요.”
-뭐라고?
“수목원 앞이라고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 끝나려면 한참 멀었다.
“알아요.”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안에서 봬요.”
*
주말 오후의 수목원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이후로 수목원은 지현의 고향에서 손에 꼽히는 명소가 됐다. 지현은 인위적으로 깔아둔 자갈길을 걸으며 곳곳에 심어진 나무들을 바라봤다. 장승처럼 솟아있는 거대한 나무들을 보는 순간, 그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생명력을 느꼈다. 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높이로 솟아있었다. 높다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미세하게 길이가 달랐다. 수목원은 실내와 실외가 분리돼 있었다. 지금처럼 나무들이 심어진 길목은 산책로같이 사방이 뚫려있었고, 꽃을 비롯한 작은 식물들이 있는 공간은 실내로 구성돼 영화 속 온실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지현은 막힌 것이 없는 실외가 좋았다. 몇십 년이고, 몇백 년이고 살아 숨 쉬는 나무들을 보며 그녀는 마침내 땅의 주인을 만난 듯한 감정을 느꼈다. 한편으론 이곳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것에서 오는 이질감도 있었다. 본래 나무들이 있긴 했지만, 수목원이란 공간이 설립되면서부터 자연 그 자체로서의 공간은 상실된 것과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나무들의 거대한 존재감.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녀는 아버지에게로 가고 있었다.
벌목은 수목원의 가장 안쪽에서 이루어졌다. 젊은 남자 직원 셋이 지현의 아버지를 도우며 힘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현은 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이렇게 버젓이 나무를 베는데도 관광객들은 온실 속 화초를 구경하는 데만 집중할 뿐이었다. 지현은 시선을 돌려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창된 근육들. 옷깃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숨을 내쉴 때마다 커졌다 줄어드는 흉곽의 움직임. 그건 견고한 나무의 생명력과는 또 다른 느낌의 생명력이었다. 고무줄처럼 팽팽하고 질긴 무언가가 자신과 아버지의 발목을 휘감고 하나로 묶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릴 적, 장날에 아버지를 따라 장을 보러 가면 아빠를 빼닮았다고 말하던 동네 상인들. 가로로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귀 뒤에 박힌 점까지. 그녀는 아버지를 너무도 닮았다. 날카로운 도끼가 나무의 틈새를 내리찍듯이 후벼팠다. 곧이어 빠르게 톱질이 이어졌다. 지금 베어지는 나무는 그중 작은 축에 속하는 젊은 나무 같았다. 그녀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이 무엇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쉽게 정의할 수 없었다. 나무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은 쓰러진 나무를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나무를 벌목할 때는 말이다, 기 싸움이 중요하다. 나무의 기를 꺾을 줄 알아야 한다. 지현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쓰러져 버린 나무를 뒤로한 채 그들은 장비를 챙겼다. 지현의 아버지와 직원 두 명이 나무를 지나쳐 걸어가고, 그곳에는 젊은 직원 한 명이 서서 나무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지현은 어린 직원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앞서 걷던 직원들이 호통을 치자 그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지현은 아버지를 뒤따라가려다가 그만 걸음을 멈추고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수목원은 넓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길을 잃은 사람들끼리 마주치기도 했으며, 반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어긋나기도 했다. 때로는 누군가를 버리고 나올 수도 있었다. 지현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걸음을 빨리할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뛰었다. 오래전, 옥륜리 뒷산의 나무가 그곳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다시 시원하게 내뱉던 것처럼 크게 숨을 쉬었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지현은 잘린 나무를 뒤로한 채 쉬지 않고 뛰었다. 한참을 뛰던 그녀는 수목원 입구에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그 말은 자신에게 어머니가 할 법한 말이었다.
다시 지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디니.
“입구요.”
-그런데 왜 들어오질 않고.
“들어왔어요.”
-대체 어디쯤이냐?
“아까부터 들어와 있었어요.”
지현은 반대편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아요. 여기가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대답하며 지현은 허전한 손아귀를 바라봤다. 케이크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놓친 건지 알 수 없었다. 고속버스터미널, 버스 안, 택시, 수목원, 수목원, 택시, 버스 안, 고속버스터미널. 지현은 자신이 택시에 케이크를 두고 내렸단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빠, 미안해요. 케이크를 두고 왔다는 것에 그녀는 순식간에 죄인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돌아가 아버지와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아이의 가라앉은 음성과 사과를 듣고 별일 아니라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지현은 수목원 입구에서 아이처럼 쭈그리고 앉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돌아갈 수도, 무시하고 건널 수도 없는 길고도 아득한 강 한가운데 놓인 것처럼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현이 반복해서 사과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 보는 딸아이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너 왜 자꾸 사과하는 거니.
“아빠, 정말 미안해요.”
-괜찮대도 그래.
“……그런데요, 아빠. 아빠가 틀렸어요.”
지현은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뱉은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그녀는 말했다. 기는 그렇게 쉽게 꺾이는 게 아니거든요. 핸드폰 너머로 침묵이 이어졌다. 그제야 지현은 자신의 말이 실수가 아닌 진심이었음을 자각했다.
“다음에 제대로 찾아뵐게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지현을 지나쳐 입구를 벗어났다. 지현은 수목원의 안내 팻말을 바라봤다. 폐장 시간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아버지는 남고, 그녀는 떠나야 했다.
-이만 끊자.
“잠시만요.”
-응.
“저 오늘 청혼받았어요.”
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듣고 있어요?”
-그래, 들었어.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기쁜 일이죠. 통화를 끝낸 이후에도 지현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덜 자란 나무처럼 수목원 입구에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람이 빠져나간 뒤에야 지현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직원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목원을 벗어나며 그녀는 아버지가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
지현은 한적한 고속버스터미널을 둘러봤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낮 시간대의 서울의 터미널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람이 적었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차표를 예매한 뒤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우진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그래서 더욱 그녀를 지치게 했다. 지현은 일이 생겨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게 됐고, 아버지는 다음에 만나기로 했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지현의 말에 우진은 자신이 그곳까지 데리러 갈 수 있다며 몇 차례 지현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지현은 우진의 원치 않는 친절을 거절하는 동안 계속해서 사과했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사과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미칠 지경이었다. 지현은 우진의 말을 끊고 홧김에 소리쳤다. 오빠, 나 결혼 안 해. 그녀가 오늘처럼 단호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핸드폰 너머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지현은 정적이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녀는 우진이 원색적인 비난과 조롱을 뱉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당장 이곳으로 달려와 자신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우진은 차분했다. 그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차분하고 고요하게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더 나아가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면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는 말에 오히려 할 말을 잃은 건 지현이었다. 지현은 통화가 끊긴 뒤에도 핸드폰을 든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차림을 정리했다. 가방 깊숙이 핸드폰을 밀어 넣고, 손바닥에 물을 담아 두어 번 얼굴을 문지르기도 했다. 화장실 칸에서 나온 누군가가 지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직 긴장이 덜 풀린 지현은 낯선 이의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중년의 여성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 뭐가 묻었어요.”
여성은 지현의 옷 뒤를 가리키고는 화장실을 벗어났다. 지현은 거울을 등진 채 고개만 돌려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 상아색 블라우스의 허리선을 타고 옅은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오늘 아침, 한의원에서의 흔적이었다. 지현은 재빨리 손에 물을 묻혀 핏자국을 문질렀다. 등 뒤에 묻은 핏자국은 지우려 하면 할수록 지저분하게 번졌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핏물은 지워지질 않았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블라우스는 물에 잔뜩 젖어 지현의 속옷까지 젖게 만들었다. 버스를 탈 시간이 되었지만, 지현은 세면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온몸을 적신 물기에 더는 물과 땀이 구별되지 않았다. 한참을 블라우스만 문지르던 지현이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그녀는 하필 이 순간에 한의사의 구멍 난 주머니가 떠오른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현이 실소를 뱉었다. 그건 정말 웃긴 일이었다.
■가작
레벨 업!
이재윤 학생(상명대학교 경제금융학부)
주문자의 닉네임은 타락전사였다.
타락전사는 넥슨에서 ‘메이플스토리’의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200레벨 달성에 성공했다. 한 시간 동안 몬스터를 사냥해도 경험치가 0.01% 오를까 하는 시절이었다. 그는 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200레벨을 달성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매일 열 시간의 고행을 반복하는 초인이었다. RPG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폐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나에겐 게임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우리를 더욱 놀랍게 했던 건 그의 정체가 드러난 후였다. 그는 피자집을 운영하는 오십삼 세의 평범한 아저씨였다. 미디어 앞에 나선 후 진행한 첫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은 노동입니다.
그 말은 달에 첫발을 딛은 암스트롱의 말보다 거대한 울림이 있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 뒤로 게임을 할 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노동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더는 게임을 즐기지 못했지만, 하는 시간은 오히려 늘었다. 게임이라는 노동을 통해 그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십오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힘들기는 했어도 낭만이 있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상하차에도 낭만이 있다. 내 몸만 한 카트를 끌고 다니며 물류 창고를 돌아다녔다. 창고는 박스와 세제 냄새가 가득했다. 진짜 오늘이 마지막… 진짜 오늘이 마지막… 매일 되새겨도 인력에 끌려가는 달처럼 새벽 버스를 타게 됐다.
그만둘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해고됐다.
-이젠 너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는 부드럽게 권유했지만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도 레벨 업할 시간이야. 덕분에 나는 쫓기듯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입금이 빠르고, 고용이 안정적인 직장. 고졸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일자리는 역시 물류센터뿐이었다. 메이플스토리로 치면 경험치를 쉽게 올릴 수 있는 사냥터였다. 돈을 익일 지급하고, 항상 직원 부족에 시달리기에 그만두기 전까지 잘릴 일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기에 나에게 고용 안정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박스 냄새를 맡으며 물건을 집어오고, 바코드를 찍고, 통풍도 되지 않는 곳에서 몇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땀이 흘렀다 마르기를 반복해 옷에 소금기가 생기기 일쑤였다. 따지고 보면 힘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왠지 포기해버릴 만큼의 피로는 느끼지 못했다. 땀에 전 채로 내일은 정말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쯤,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끌어쓰는 물류센터의 기술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신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컸다. 센터에 들어서면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곤한 이곳에서 말을 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은 처음에는 장점이었지만, 나중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우주를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달에 혼자 남겨지면 이런 기분일까.
담당하는 일에 적응하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내 담당은 피킹이었다. 말 그대로 주문받은 물품을 골라 바코드를 찍고 포장 담당자들에게 넘겨주면 끝이었다. 일은 단순 반복이지만 물품이 다양했다. 주방 세제, 웰치스, 고양이 사료, 개 사료, 햄스터 톱밥.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거북이 사료였다. 처음 거북이 사료를 날랐을 때는, 어쩐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에 익숙해진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10kg짜리 거북이 사료를 시킨 주인의 마음과 맛있게 먹을 거북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훈훈해졌다. 점심에 나오는 아이스티 한잔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명경지수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아이스티를 홀짝일 때면 나는 타락전사가 떠올랐다.
메이플스토리는 변화를 꾀했다. 기점은 ‘빅뱅’ 패치였다. 지나치게 높은 레벨 업 난이도와 관련해 불만을 표하는 게이머가 늘어나자, 넥슨은 정책을 바꿨다. 모토는 이랬다.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단순하게.
변화한 기조에 따라 레벨 업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졌다.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전과 달리 퀘스트를 제시해, NPC의 퀘스트를 따라가기만 해도 레벨을 높이 올릴 수 있었다. 아이템도 다양해져 돈을 투자하면 그만큼 좋은 무기를 얻어, 사냥을 쉽게 할 수도 있었다.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이 혼재했지만 패치의 방향성에는 이견이 없었다. 언젠가 해야 할 패치였다는 게 중론이었다.
내가 메이플스토리에 재미를 붙인 건 그맘때였다. 항상 13레벨과 14레벨 사이를 헤매던 내게 빅뱅 패치 이후의 메이플은, 프로토버스 상태에서 대폭발을 맞은 우주와 같았다. 선택할 수 있는 직업도 다양해졌다. 전사, 도적, 궁수, 마법사 등의 단순한 직업에서 벗어나 다변화를 시도했다. 물론 다른 직업을 할 마음은 없었다. 언제나 전사를 택했다.
-전사가 되고 싶은 자 나에게로...
전사가 될 수 있는지 심사를 보는 NPC는 ‘주먹펴고일어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사는 좋은 직업이 아니다. 무거운 무기를 들고 다니기에 속도가 느리고 공격 범위가 작다. 레벨 업이 쉬워졌다고는 해도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전사를 택한 이유는 오직 타락전사 때문이었다. 절망적인 사냥 속도를 보며 그 선택을 종종 후회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타락전사 김순욱 씨의 인터뷰를 찾아보곤 했다.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구요? 그 시간에 몬스터를 한 마리 더 사냥했으면 어땠을까요?
-노력 없이 쟁취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살핏한 마음으로 덤비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1955년생으로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견디며 살아온 그의 말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게이머라기보단 한 명의 구도자에 가까웠다. 피자집을 운영하며 두 명의 건장한 아들을 키워낸 애국자였고, 아들의 말에 귀 기울여 게임을 시작한 편견 없는 아버지였다. 또한 사스, 밀가루 파동, 웰빙 열풍 등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자신의 철학을 입증한 사업가기도 했다.2차 밀가루 파동을 견뎌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이건 제가 가장 잘하는 거지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 말입니다.
그는 진정한 전사였다. 나로서는 이런 거인과 같은 길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매일 아홉 시간씩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언젠가 그와 같이 설 날을 꿈꿨다.
지금은 아홉 시간씩 바코드기를 휘두른다. 물류센터의 가장 큰 단점은 급여였다. 사람이 없는 사냥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최저시급이었고 주말 근무에도 주휴수당이 지급되지 않았다. 돈을 매일 지급해주는 탓에 모으기도 힘들었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물류센터에도 빅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류센터와 대폭발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덜컹대는 버스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실장이 직원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2차 전직 같은 거였다. 월급도 오르고 잘 만하면 정규직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빨리 선택해. 자리 얼마 안 남았어.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귀 막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장의 말을 따라, 전직을 택했다. 박스와 세제로 가득한 물류창고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소위 ‘쿠팡맨’이라 불리는 이 일은, 막상 센터에서의 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창고에서 하던 일을 트럭 타고 돌아다니며 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2인 1조로 팀을 꾸려 다녔다. 내 파트너는 십 년 차 쿠팡맨이었다. 이번엔 너구나, 애송이. 아저씨는 뉴비를 쩔해주는 올드비의 눈빛이었다.
아저씨는 카리스마 있었다. 운전하거나 물건 나를 때는 한없이 진지했고, 빠진 물건이 있는지 두세 번 철저히 검수했다. 그러다가도 농땡이 피울 시간을 주기도 했다. 트럭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해줬고, 그러면서 내 담배를 한 개비씩 빌리기도 했다. 운전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농담이 그렇게 재밌진 않았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근무의 질이 상승했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물건을 시켰다. 선풍기만 네 대 시킨 사람도 있었고, 겨우 우유 한 팩만 시킨 사람도 있었다. 우유 한 팩을 현관문 앞에 놔두기 위해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를 오층까지 올라가는 건 정말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대면의 시대가 된 덕에 벨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신분을 확인받고, 처음 보는 고객에게 감사 인사하는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 가지 견디기 어려운 것은 닉네임 시스템이었다. 개인정보보호라는 미명 하에 고객의 실명 대신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고객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도, 우리가 고객을 부를 때도 그래야 했다. 직원교육 시간에 듣기로는 스타벅스의 닉네임 시스템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 보는 고객을 닉네임으로 부르고 물건을 건네주는 건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얼굴 볼 일이 없다는 게 다시 한번 다행으로 느껴지는 이유였다.
아저씨는 트럭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철저한 분담체계를 갖추고 있다. 아저씨는 목적지까지 운전하고, 나는 집 앞까지 배달했다. 불만은 없다. 다만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를 오르내리다 보면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너도 한 개비 줘?
나의 최종 전직이 과연 저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일단 담배를 받았다.
나는 아저씨가 마음에 들지만, 그게 꼭 닮고 싶은 사람을 의미하진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사수로서 장점이 많다. 우선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운전 실력이 대단했다. 옆에서 눈을 감으면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트럭이 거대한 우주 왕복선처럼 느껴졌다. 홀로 남겨진 줄 알았던 달에서 또 다른 표류자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조수, 다음 행선지는 어디지?
-상봉 스테이션입니다.
-그래, 삼십 분 정도 걸릴 테니 미리 잠 좀 자 놓으라고.
그런 상상을 하며 잠들곤 했다.
아저씨의 또 다른 장점은 목소리였다. 백색소음을 듣는 것처럼 나긋했다. 했던 이야기를 매일 하긴 했지만. 라디오를 틀어놨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주제는 다양했다.
도박, 파산, 불륜, 자살 기도.
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이었다.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좀 냉정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코 고는 버릇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코를 고는 척이었다. 아저씨가 관심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소리 내어 코를 골았다. 처음에는 통했다. 코를 골면 아저씨도 이야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나를 억지로 깨워서라도 이야기를 이어갔다. 짜증을 삭이면서 한편으로 그가 이곳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표류하고 있었을지 생각했다.
졸리다는 핑계로 나한테 이야기를 시키기도 했다. 나는 되는대로 주제를 꺼냈다. 돈, 학교, 알바. 내 주제는 건전했다. 아저씨는 대부분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말이 통했던 주제는 게임이었다.
-나도 게임을 했었어.
메이플이 정식 서비스를 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저씨가 했던 게임은 한국에서 서비스 종료했다. ‘바다 이야기’라는 게임이라고 한다. 지금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아저씨 말로는 틀린 그림 찾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는다. 아저씨는 그 게임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돌린다. 그래도 종종 그때 생각이 나는지 회한에 젖어 혼잣말할 때도 있다.
-그때 본 바다가 얼마나 까맣던지.
아저씨는 ‘바다 이야기’ 때문에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어서 웃음을 흘렸지만, 아저씨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바다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게임 이길래 사람을 바다에 뛰어들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아저씨가 바다에 뛰어든 건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이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밤 중에 술을 마시고 파도를 보았다. 그리고 어쩐지 자신이 그곳에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가 발을 적시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한발씩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해초가 살랑거리는 게 발밑으로 느껴졌고, 그 느낌이 너무 부드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을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저씨는 바다로 조금씩 걸어 나갔다. 마침내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를 바다에 집어넣고 처음 한 생각은, 너무 차갑다는 것이었다. 이거 안 되겠는걸? 다음에 다시 와야겠군. 발을 다시 해변으로 옮기려는데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어어, 하는 사이에 점점 더 깊은 바다로 휩쓸려갔다. 몸을 감싸던 해초가 문득 자신이 못 빠져나가게 붙잡고 있는 듯했다. 아저씨는 그렇게 세 시간 가까이 조류에 휩쓸려 표류했다.
그때 아저씨가 잡고 있던 건 동그란 부표였다.
-그 부표는 얼마나 차갑던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코를 고는 척했다. 아저씨는 날 깨우지 않았다.
*
우리 구역은 노원과 도봉구였다. 멀면 강북구까지 갈 때도 있었다. 재수 없는 날은 그랬다. ‘보노보노맨’에게 고양이 사료를 전달했고, ‘쾌걸근육맨 3세’에게 푸쉬업 바를 전달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 빌라에 사는 ‘원숭이띠 미혼남’에게 햇반 두 박스와 삼다수 한 팩을 전달했을 때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어쩐지 척박하고 외딴 행성에 생존 물품을 전달해주는 느낌이었다.
메이플스토리의 세계관도 메이플 월드라는 하나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다. 메이플 월드에는 여러 대륙이 있고, 다양한 시대와 문화가 섞여 있다. 레고로 이루어진 나라도 있고, 아쿠아리움을 모티브로 한 해저도시도 있다.
빅뱅 패치는 많은 올드 게이머들을 떠나게 했지만, 동시에 더 많은 신규 게이머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난이도가 쉬워진 만큼 문제도 있었다. 레벨 업이 쉬워져 초보자도 충분한 시간과 자금만 있다면 큰 노력 없이 200레벨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의 최종 콘텐츠였던 200레벨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개발자들은 장고 끝에 최종 레벨을 250까지 올렸다. 2013년 1월 말일의 일이었다.
최종 레벨이 올라가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타락전사였다. 게임의 정점에 최초로 섰던 그는 하루아침에 도전자 신세가 됐다. 많은 게이머가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했다. 김순욱 씨는 더 이상 미디어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화를 지켜봤던 게이머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서버 곳곳에서 그의 목격담이 들렸고, 퀘스트는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사냥에만 몰두 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비록 아이템은 최신 유행에 맞춰 바꿨지만,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모습에 게이머들은 존경을 표했다.
옆을 따라다니기만 하면서 돕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 상위 랭커들은 그를 앞서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레벨을 천천히 올리기도 했다. 거의 모든 게이머가 그의 일등 달성을 희망했다. 개발자들도 내심 그가 가장 먼저 250레벨에 도달하기를 원한 듯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도달한 게이머는 다른 이였다. 개발자들이 레벨 확장을 선언한 지 정확히 한 달 만의 일이었고, 당시 타락전사의 레벨은 고작 214였다. 그는 메이플스토리를 전문으로 하는 방송인이자 대형 유튜버였다. 월에 천만 원은 우습게 투자하는 자였다. 그는 경험치 두 배 쿠폰을 통해 누구보다 빠르게 250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타락전사는 개인 사정상 게임이 불가능하여 도전을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게이머들은 그의 의견을 존중했지만, 마음 한편에 이유 모를 실망감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최초로 레벨 200을 달성한 타락전사입니다.
개발자 측에서는 상징성을 고려해 그의 모습을 박제해 페리온 전사의 전당에 전시했다. 그는 이제 ‘주먹펴고일어서’ 옆에서 지정된 대사만 읊는 NPC일 뿐이었지만, 올드 게이머들은 그렇게라도 추억을 되살리곤 했다.
그런 그의 닉네임을 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뜻밖이었다.
-주문자: 타락전사, 주문 내역: 진라면 매운맛, 20 개입 1박스.
타락전사라는 닉네임은 흔한 편이다. 그가 내가 아는 타락전사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또, 내가 아는 타락전사는 라면을 한 박스씩 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라면을 좋아하긴 하지만, 구도자와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타락전사의 집 앞에 서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물류센터에서나 맡아본 퀴퀴한 냄새와 출처 모를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반지하였다. 꼭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김순욱 씨가 이런 데 살고 있을 리 없잖아. 그럼 그렇지. 냄새를 맡으며 어쩐지 안심되었다.
-타락전사 님. 안에 계십니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없는 척하는 건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다. 사실 우리도 대답이 없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고객이 대답할 시의 규정이 있긴 하지만, 마음에 없는 대화를 하는 게 피차 귀찮기 때문이다. 물품을 문 앞에 놓은 뒤 사진을 찍어 고객의 번호로 전송했다.
-고객님의 소중한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가 <집 앞>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렇게 보냈다. 솔직히 행복하든 말든 관심 없지만.
트럭에 타기 전에 레쓰비 두 캔을 샀다. 아저씨는 고맙다고 말한 뒤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조금씩 홀짝거렸다. 아저씨는 벌써 트럭에 타 있었다.
-가자.
아직 절반 넘게 남은 레쓰비에 담배를 담그고 트럭에 올라탔다.
두툼한 쿠팡 조끼 안으로는 덥다는 느낌뿐이었다. 트럭 에어컨이 고장나, 외부 온도를 그대로 느껴야 했다. 얼굴이 절로 화끈해지고, 물품을 쥔 전완근에는 타는 듯한 열기가 전해졌다. 센터에 있을 때보다 강렬하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렇지만 일을 하는 모든 순간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품을 전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사를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일을 하면서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특히 고객들에게 물품을 전달할 때면 알 수 없는 전류 같은 게 느껴졌다. 그 감정은 어떨 땐 동정심이었고, 어떨 땐 호승심, 또 어떨 땐 측은지심이었다.
‘구곡동 로니콜먼’에게 닭가슴살을, ‘민머리사냥꾼’에게 미녹시딜을, ‘최순자님’에게 박카스 두 박스를.
-열심히들 산다.
쭈쭈바를 빨며 지나가던 행인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면 어쩐지 허망해진다. 이곳은 메이플 월드와 같다. 나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잘 팔리는 세상이다. 꼭 내가 닭가슴살과 웰치스와 박카스를 날라야 하는 이유는 없다. 물건을 옮길 때마다 퀘스트를 하나씩 처리하는 기분이다. 이 생각에 몰입할수록 누군가 게임 캐릭터를 키우듯 나의 인생 방향을 맘대로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틈입했다.
-힘드니까 별 잡생각을 다 하는구나.
아저씨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
비 오는 날씨는 배달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다. 장점이 있다면 창문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잠들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이런 날은 에어컨을 조금만 틀어도 차 안이 쾌적해져서 나쁘지 않다. 문제는 내가 배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우산도 없었다.
우리는 우산을 챙기기 위해 물류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센터에는 아무도 없고, 문은 잠겨있었다. 실장에게 계속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인데.
아저씨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리를 한참 긁적였다. 센터에는 사람이 없고, 실장은 전화도 안 받고, 비는 오고. 그냥 주차해놓고 배달을 내일로 미뤄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던 걸 해야지.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아저씨는 그렇게 답했다. 우리는 습관처럼 배달을 하기로 했다.
‘지존 멋쟁이’에게 남성용 컬크림, ‘구곡동 피디에스 PC방’에게 24인치 모니터, ‘takealittletime’에게 러브젤.
모든 것은 나 혼자 날랐다. 한 손으로 물건을 드는 것은 규정 위반이기에 나는 비를 맞으며 고객님의 집 앞까지 걸어가야 했다. 혹시 도와줄까 싶어 아저씨 쪽을 쳐다봤지만, 아저씨는 코 고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숭이띠 미혼남’의 웰치스 포도 맛 다섯 박스와 가정용 정수기에는 아저씨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띠 미혼남’도 드디어 정수기를 사는구나, 하는 후련한 정취와 동시에 웰치스 다섯 박스 정도면 물 대신 마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그도 자신만의 퀘스트를 깨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정수기를 아저씨와 동시에 나른 후에 다시 내려와 웰치스를 날랐다. 정수기는 무거웠고, 웰치스는 더 무거웠다. 땀이 비와 섞여 옷은 물론, 얼굴과 목, 팔, 등까지 전부 젖어 있었다. 모습이 얼마나 추레했는지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간신히 배달을 마친 후,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려 트럭 안까지 뛰어들어갔다.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지?
아저씨가 비에 젖어 무거워진 유니폼을 허리춤까지 내리고 말했다. 옷 안까지 들어가 있던 물이 미끄럼틀 타듯 내려왔다. 나도 옷을 벗어 던지며 대답했다.
-결국 “주먹펴고일어서”의 정신 아닐까요?
-그거 맞는 말이구나.
아저씨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트럭 안에 담배 연기와 냄새가 퍼졌다.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충분히 니코틴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저씨는 연기를 창문 밖으로 날린 후, 감상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차창에 떨어지는 비를 지켜봤다. 트럭 안이 잠시 평화롭게 느껴졌다. 드디어 우주 정거장 어딘가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배달 같은 건 잠시 뒤로 미루고 이대로 한숨 자고 싶었다.
-내가 게임을 했을 때는 말이야…
나는 코 고는 척을 했고 아저씨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도 가본 곳이었다.
-주문자: 타락전사, 주문 내역: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
하루에 라면을 얼마나 먹기에 벌써 재주문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다시 그 음산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이랬나? 구름이 햇빛을 가려 지금이 몇 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비는 점점 몸집을 불려 굵은 알맹이처럼 떨어졌다. 어느새 도로가 물에 잠겨 트럭이 속도를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타락전사의 집은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집 근처로 갈수록 비 때문에 퀴퀴한 냄새가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그저 느낌이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소방차가 트럭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반지하에 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집 안에 호스가 연결되어 물을 역류시켜 뿜어내었다. 하수도가 터진 건지 비릿하고 찝찝한 냄새가 가득했다. 창문을 꽉 닫고 있어도 트럭 안으로 새어들었다. 반지하에 물이 어지간히 찼는지 집에 들어갔다 나온 소방관은 허리춤까지 젖어 있을 정도였다. 막내 조로 보이는 소방관들이 양동이로 열심히 물을 퍼 날랐고, 선임은 그 옆에서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가만히 그 사투의 현장을 지켜만 보았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린 쿠팡맨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업마다 주어진 퀘스트는 다르다. 메이플과 현실 세계의 공통점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에게도 퀘스트가 있었다.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
어떻게 전달할지가 문제였다. 타락전사가 집에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빌라 앞에 두고 가면 박스가 비에 젖어 민원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본사의 허락 없이 배달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경비실에 물건을 맡기고, 문자를 남겨놓기로 했다. 고객의 요청 없이 물건을 경비실에 맡기는 건 규정 위반이지만,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이었다. 퀘스트를 주는 사람은 퀘스트 깨는 게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모른다.
-고객님의 소ㅈᅟᅮᆼ한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가 안ㅈ하게 <경비실>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행ㅂ한 하루 되세요.
물기 때문에 터치가 제대로 먹지 않았다. 덕분에 타자를 제대로 칠 수 없었다. 오타를 고치려다 그냥 ‘전송’ 버튼을 눌렀다. 행복하든 말든.
문자를 보내놓고 물건을 트럭에서 꺼냈다. 떨어지는 빗방울로부터 진라면을 지키기 위해 나는 박스 위로 쿠팡 옷을 덮은 채로 경비실까지 달렸다. 경비실을 향해 달리는 와중에 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우비를 쓰고 있었고, 물을 퍼다가 나왔는지 한 손에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진라면?
모자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어릴 적 기사에서 봤던 사진 속 김순욱 씨와 동년배처럼 보였다. 다만 어딘지 낡고, 지치고, 심지어는 조잡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했다.
-타락전사님 맞나요?
긴장됐다. 솔직히 조금 절박하기까지 했다.
-맞는데요.
그는 진라면을 내 손에서 낚아채 가려 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도무지 진라면을 건넬 수가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불가항력이 내 몸쪽으로 박스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남자도 진라면을 자신의 몸쪽으로 당겼다. 나는 뺏기지 않으려 힘을 줬다. 남자는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날씨도 나쁘고, 비도 오고,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고, 그래서 그가 김순욱 씨가 맞는지 아닌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표정을 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피자집 사장은, 구도자는, 전사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그는 박스를 쟁취하려 몸을 나에게 바싹 붙였다. 그의 몸에서 하수도 냄새가 올라왔다.
-그만하고 가자.
트럭에서 언제 나왔는지 아저씨가 박스를 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남자는 박스를 내게서 뺏은 후, 나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그러고는 다시 양동이와 박스를 들고 반지하로 유유히 사라졌다.
아저씨와 나는 비를 잔뜩 맞은 채 트럭 안으로 들어와 손을 녹였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알맹이처럼 떨어지는 비를 뚫고 도로만 달렸다. 나는 눈썹까지 비에 젖어, 눈을 반쯤 강제로 감고 있어야 했다. 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도 젖었지만, 나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우리는 비에 젖은 탓인지, 다른 무언가에 젖은 탓인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조용히 달리기만 했다.
먼저 적막을 깬 건 아저씨였다.
-전화해봤는데 오늘 폭우 때문에 다들 조기 퇴근했대.
비를 맞아 불은 몸이 배로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일을 마친 퇴근길이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원래라면 트럭을 센터에 주차해야 했지만, 센터는 이미 닫혀있을 것이었다. 오늘이 조기퇴근의 날이라는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나는 여전히 표류 중인 게 분명했다.
한참을 달리던 트럭 안에서 몸이 말라갈 때 즈음 비린내가 느껴졌다. 하수도 냄새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 비릿한 느낌이었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이리저리 킁킁거렸다. 코를 돌릴 때마다 냄새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코가 멈춘 곳은 아저씨의 어깨였다. 바닷가에서나 맡아볼 법한 해초 비린내였다.
-바다 이야기할 때 몸에 뱄나 봐.
아저씨는 머쓱하게 목 뒤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도 덩달아 머쓱해져 코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저씨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나도 따라 웃어야 하나 했지만,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저씨는 다시금 운전에 집중했다. 궁금하긴 하다. 그날 밤, 바다에선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조금 자.
나는 축축하게 젖은 몸과 머리를 조수석 의자에 빠짝 당기고 눈을 감았다. 아저씨는 웬일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글쎄.
아저씨의 해초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고, 내 몸까지 엉겨 붙어 없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참을 뒤척거리다 겨우 잠들었다.
바다, 부표, 행성.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메이플 월드의 해저도시 이름은 아쿠아 로드다. 그곳은 어인과 각종 괴물, 그리고 인간들이 사는 도시다. 100~130 레벨의 몬스터 들이 서식하고 있는 장소로, 초보자는 쉽게 발을 들이기도 어려운 곳이다. 물속에서 숨을 쉬게 해주는 장비를 구매하지 않으면 체력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모든 캐릭터는 체력이 0이 되면 죽는다. 그리고 경험치와 아이템을 잃어버린다. 부활 주문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경험치와 아이템을 유지한 채 죽은 자리에서 바로 살아난다.
나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아저씨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아저씨가 표류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아저씨가 어떻게 구조됐는지 잘은 모르지만, 조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메이플 월드가 아니고, 부활 주문서 같은 건 없으니까.
우리는 쌍문역 근처에서 헤어졌다. 아저씨는 집까지 태워준다 했지만 나는 좀 걷고 싶었다. 비는 어느새 그쳐, 맑고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핸드폰을 보니 오만 원 입금 알림과 실장의 뒤늦은 문자가 와있었다.
-미안~ 핸드폰을 이제 봤네. 우리가 다 전달했는데 그쪽 팀에는 전달이 안 됐나 봐~ 그걸로 어머니랑 맛있는 거 사 먹고 내일은 쉬어~
뭐라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보내지 않았다. 실장은 내가 행복하든 말든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레벨 업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낡고 조잡해지는 게 레벨 업이라면 뭔가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불을 귀까지 덮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부유하고 있는 거라면 이곳은 우주일까, 바다일까. 헷갈렸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생각하는 대신, 부표를 떠올렸다. 우주에도 부표가 있을까? 아저씨가 표류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것 같았다. 눈을 꾹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침대 밑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느낌에 집중했다.
2023년 제69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당선작 심사평
여느 해보다 완성도와 개성을 겸비한 수작이 많아서 심사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모이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느 작가 못지 않게 깊고 믿음직스러웠다. 더불어 가장 젊은 세대의 문학답게 재치 있는 어조와 발상으로 현재적 문제를 다루었다.
올해의 당선작은 「어혈」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작품 가운데서 이 작품은 단연 눈에 띄었다. 맺혀있던 것은 언제고 밖으로 터져나오게 마련이다. 어렸을 적 지현이 목격한 폭력적인 일과 끝내 사과받지 못한 일이 서른이 다 된 지금에서야 불쑥 터져나온 것처럼. 인물이 지닌 내적 외상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면 익숙하게 보아왔지만, 이처럼 믿음직하고 진지하게, 그러나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이 소설이 단지 어렸을 적의 상처를 헤집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연쇄와 세습이라는 서늘한 통찰을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내는 신음을 어린 주인공이 옹알이로 따라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분은 독서가 끝난 후에도 내내 이어졌다.
「어혈」과는 다른 지점에서 젊은 개성과 스타일을 보여준 작품이 「레벨 업!」이었다. 이 작품은 메이플스토리에서 개발한 게임의 최종 레벨 달성자를 소재로, 세대 변화나 고달픈 노동 현장을 추적한다. 더 나아가 폭우로 인한 반지하방의 침수라는 현재적 비극까지 다룬다. 그러는 동안 시종 재치를 잃지 않아 읽는 내내 유쾌하고 한편으로 애잔했다. 무관한 소재를 엮어 이야기의 깊은 의미를 시추할 줄 아는 힘을 지닌 작가였다.
두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무척 기쁜 심사였다. 인생과 세계에 대한 각기 다른 질문의 방식으로 개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 이 젊은 두 작가의 미래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신수정 편혜영
첫댓글 신경성은 병명이 아니라고 결국 한마디하고마는 택시 기사와 달리, 주인공은 화가 터져 나올 때까지 참고 참다가 엉뚱한 순간에 진실을 내뱉고 말죠. 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우진의 말과 행동이 반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