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투어 여행기] 경복궁
출퇴근 시간 대의 번잡함을 피할 속셈으로 출발 시간을 1시간쯤 부러 늦춰잡아 집을 나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철 안은 승객들로 빼곡하다.오늘은 윤석열 정부 들어 처음으로 외부 공개가 이루어진,이젠 어엿하게 문화 관광 목록에 똬리를 튼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웃한 경복궁까지 두루두루 둘러볼 참이다.오늘 여행의 동반객은 아내와 두 아들(대근,대선)이다.필자가 70년대 초께 서울로 통학을 할 무렵에는 오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얼추 1시간 40분쯤이 소요가 됐었는데, 작금의 전철 운행속도와 비교해보면 급행 전철이 그때와 어상반한 운행속도이지 싶다.어쨌든 한 차례의 환승을 거쳐 도착한 지하철 3호선상의 경복궁역에 우리 일행이 도착한 시각은 집을 나선 뒤 얼추 두 시간쯤이 흐르고 난 뒤다.
광화문
동탄2신도시의 동탄역 주변에 살고 있는 큰아들은 그곳에서 막바로 경복궁역으로 출발을 한 뒤 경복궁역 5번 출구에서 우리 일행(우리 내외와 막내아들)과 만나기로 하였는데,그 애는 이미 도착하여 경복궁 입장권까지 구입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광화문 바로 안 쪽에서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20분여의 소요시간에 하루 두 차례(10시,14시) 실시되고 있는 수문장 오전 교대의식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다.따사로운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의 너른 마당에는 중국과 동남아,그리고 푸른 눈의 내외국인 관광객 등이 떼를 지어 수문장 교대의식을 관람하고 있다.
수문장 교대의식을 뒤로하고 흥례문(興禮門)을 통과한다.저만치 바닥을 고스란이 드러낸 인공개천이 가로지르고 있다. 풍수지리적인 이유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기 위한 인공개천을 넘나드는 영제교라는 이름의 돌다리가 아담하다.영제교를 건너면 바로 근정문(勤政門)이다.내처 근정문을 거치면 50여 미터쯤 저만치 근정전(勤政殿)이 한눈에 들어온다."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勤) 잘 다스려진다(政)"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화려한 석물로 도배를 한 석물난간을 두른 석축 기단 위에 정면 5칸,측면 5칸의 2층 전각이 위풍당당하고 ,팔작지붕을 겹처마로 받쳐 안정감을 보태고 오색단청으로 화려함를 더하고 있다.
근정전
품계석과 박석의 근정전 뜰
근정전 너른 앞 마당은 구들장 모양의 큼지막한 박석(薄石)으로 잔뜩 뒤덮혀 있으며 바닥은 매끄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못마땅한데,미끄럼 방지와 배수의 원활함을 위함이고, 햇볕 반사로부터 시각보호를 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어쨌든 근정전 앞 너른 마당은 만조백관과 임금이 함께 나랏일을 고민하는 조정(朝廷)이다.근정전과 근정문의 너른 뜰 사이에는 좌우측으로 각각 12개의 두어 자 높이의 네모난 돌기둥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바로 품계석(品階石)으로,문반(文班)이 서게 되는 좌측 12개,무반(武班)이 서게 되는 우측 12개 등,총 24개가 된다.그리고 그 문무반 품계석 사이의 넉넉한 사이에는 세 개의 길이 나 있다.가운데 조금 두툼하고 도드라지게 보이는 길은 궁궐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왕의 어도(御道)가 되고, 어도 양 옆은 신하들의 길로 신분을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함일 테다.
근정전 바로 뒤꼍으로 돌아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을 드나 들 수 있는 사정문(思政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사정문을 들어서면 이제부터는 왕과 왕비의 공간인 내전(內殿)의 그들만의 공간이다.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을 인 왕의 집무실 편전(便殿)은 근정전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다.그리고 전각의 섬돌 한켠에는 해시계 앙부일구가 눈에 띈다.세종 16년(1434년)에 만들어진 앙부일구는 시계판이 가마솥처럼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따사로운 햇살이 함초롬이 쏟아져 내리는 아담한 사정전 동서 방향으로는 천추전과 만춘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두 채의 전각이 시위(侍衛)를 선 것처럼 세워져 있다. 왕의 집무를 돕는 역할의 부속 전각인 것이다.
강녕전
교태전 & 양의문
왕의 집무실 편전 바로 뒷편 정북방 쪽으로는 강녕문(康寧門)이 나 있다.왕의 편전 바로 곁의 전각,왕의 침전인 내전의 으뜸 전각 강녕전(康寧殿)이다.정면 11칸에 측면 5칸의 단층 구조로 지붕은 역시 팔작지붕인데,강녕전 바로 뒷쪽의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과 함께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의 행색이다.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 두 곳 모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의 형태가 된 이유는, 왕 위에 또 다른 왕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용(龍)마루를 얹지 않았다고.용마루의 용(龍)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일 테다.문헌상의 근거는 없다고.
강녕전 북쪽인 바로 뒤꼍으로 돌아가면 양의문(兩儀門)이 기다린다. 하늘과 땅을, 왕과 왕비를,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뜻하는 양의(兩儀)를 편액으로 내건 양의문을 지나면 강녕전과 어상반한 전각이 한 채 다소곳하다.바로 왕비의 처소인 침전,즉 교태전(交泰殿)이다.강녕전에 비해 다소 품이 적은 정면 9칸에 측면 4칸의 단층 전각으로 왕의 침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얹혀 있지 않은 무량각 형태의 전각이다.
건청궁
나랏일을 논하는 근정전,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그리고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둘러보았으면 수박 겉핥기식에 불과하지만 경복궁의 핵심 전각들은 두루 거친 셈이다.내처 '궁 안의 궁' 건청궁으로 잰걸음을 한다.1873년(고종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여지껏의 대원군 수렴청정을 벗어나 친정체제를 굳힌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경복궁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왕의 사금고 내탕금을 털어 '궁 안의 궁'을 짓는다.이 전각이 바로 건청궁(乾淸宮)이다.
건청궁은 양반가 저택의 형식으로 세운 건물이어서 단청은 하지 않았으며,아시아 최초로 전깃불이 켜진 전각이기도 하다.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벌어져 역사적으로는 비극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고종의 거처인 장안당과 명성왕후의 거처인 곤녕합(坤寧閤),그리고 복수당,관문각 등의 부속건물들이 두루 세워져 있다.그러나 경복궁에 비하면 미니 궁전의 행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그나저나 건청궁에서 여행객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향원정(香遠亭)이다.
장안당
곤녕합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의 별장격인 건청궁의 장안당과 곤녕합을 뒤로하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건청궁의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향원정이다.향원정은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힐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경회루의 서북쪽 넓은 터에 있는 향원지(香遠池) 안의 작은 동산 위에 세워진 육각형의 아름다운 정자로,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에 2층의 기와지붕 행색이다.향원지 주변은 향원정을 배경삼아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여행객들로 제법 북적거린다.
우리 일행도 그 틈새에서 기념사진 서너 컷을 가까스로 남긴 뒤 향원지를 한 바퀴 돌아 경회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은 가이없고, 바람은 뒷짐을 지고 있는지 향원지 수면은 맑은 유리처럼 잔잔하다.그러나 향원지의 수면은 다소 푸르른 물색에 탁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하고 싶은 말은 억수로 많은데 속으로 마냥 삮이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 건청궁의 슬픈 이력과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터,아름다운 정원의 풍광에 마냥 즐거워 해야 할 여행객의 마음은 괜시리 불편하기만 하다.
경회루
어쨌든 향원정을 뒤로하고 경회루 방면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경회루(慶會樓)는 향원정에서 남서 쪽이고, 근정전에서는 바로 서쪽에 위치한 경회지(慶會池) 연못 안에 세워진,단일 건물로서는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큰 전통 목조 건축물로서,장대석재 기단부에 정면 7칸,측면 5칸의 목조 중루와 팔작지붕을 얹은 구조다.건축물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는 등, 국가 행사에 사용되던 건물이다.경회루는 향원정처럼 연못이 해자 역할을 한 탓에 외부와의 경계를 확실하게 연출하여 비원(秘苑)처럼 은밀하고 부정적인 구석을 남기고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그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말이다.
기실,조선 연산군 때 유래된 말이 있다.그 말은 돈이나 물건 따위를 함부로 써 버린다는 '흥청망청'이라는 단어로, 경회루와 연관이 있는데, 연산군이 '흥청'이라는 기생들을 경회루에 잔뜩 모아놓고 술잔치를 걸판지게 벌이던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고.어쨌든 높직하고 튼실한 장대석재 기둥 위를 타고 앉은 누각은 운동장처럼 널직하고, 마루에 연회석까지 펼쳐져 있다면 누각의 분위기는 대번에 음주가무의 기세가 무르익게 마련이다.게다가 3층 높이나 다를 게 없는 누각에서의 사방 경관이야 오죽하겠나 싶다.음주가무에는 더할 수 없는 최적지가 아니던가.
세종대왕이 다스리고 이순신 장군이 지키는 곳
경회루를 거쳤으면 경복궁 답사는 대충 마무리가 되는 셈이다.근정전 널찍한 뜰을 가로질러 근정문,흥례문을 들어설 때와 반대로 거푸 넘어서면 경복궁의 정문격인 광화문이 기다린다. 때는 정오 께, 오후 일정으로 청와대 방문이 예정되어 있는데, 입장 예약시간이 오후 1시 20분께다.그 시간 안에 점심을 해결하고 느긋하게 청와대로 발걸음을 해야지.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세종대왕이 다스리고 있는 광장 한복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그리고 그 위인들이 든든한 뒷배로 남아있는 광장을 이웃한 문화의 전당 세종문화회관,그 뒷골목 언저리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할 참이다.(2023,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