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제11회 등대문학상 수필부문 당선작] 박미림 외
최우수상
펄 / 박미림
‘뒷개’는 외갓집 마을의 펄이다. 마을 뒤쪽을 꿰찬 이 뒷개는 올망졸망 이마를 맞댄 산과 산을 나무울타리 삼아 빙 둘러쳤다. 산골짝처럼 깊숙한 이 뒷개에 썰물이 지면, 밀물 속에 잠겼던 펄이 건너편 갯바위까지 쭉 기지개를 켠다. 그 가장자리를 에돌아 싹튼 파래며 이름 모르는 해초에도 파르라니 생기가 돈다. 펄 사이로 난 갯골은 앞바다로 빠져나간 썰물의 뒤꽁무닌 양 나직한 곳을 따라 굽이돈다. 젠 걸음 같은 잔물결이 수르르 갯골에 인다.
펄은 육지의 퇴적물질과 바다의 부유물질이 뒤섞인 곳이다. 하루에 두 번 밀물이 들락날락 하는 바다의 영역이라 썰물 때도 옴폭한 웅덩이마다 짠물이 고인다.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햇볕을 쬐고, 한밤중 교교한 달빛에 얼비쳐도 막 밀물이 빠진 것과 진배없이 질퍽하다. 그렇듯 옴폭한 웅덩이의 짠물, 햇볕과 달빛으로 육지의 퇴적물질과 바다의 부유물질을 염장하고 발효시킨다. 부글부글 괸 진회색은 펄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빛깔이다. 한 발 디디면 무릎까지 쑤욱 빨려 들어가 바닥에 착 달라붙고, 그 발을 빼내려면 뒤뚱뒤뚱 다리를 치대야 할 만큼 차진 힘을 함유하고 있다. 펄은 바다의 장독이다.
가리맛, 낙지, 피조개, 쏙, 참꼬막, 비단짱뚱어, 흰발농게 등 펄은 다양한 생명을 품고 키운다. 이 생명들은 밀물과 썰물의 부침에 맞장 뜨면서 먹이활동이 가능한 때를 숨죽여 기다린다. 조개류는 관자를 이용해 한 쌍의 껍데기를 열고 닫으며 밀물 속 유기물을 걸러 먹는다. 야행성인 낙지는 밤에 활동하며 밀물 속 게와 조개를 잡아먹는다. 반면에 비단짱뚱어와 흰발농게는 썰물이 돼야 꼬물꼬물 펄 구멍에서 기어 나와 부산을 떤다. 펄을 통째로 삼켜 유기물을 걸러먹고 나머지 펄은 경단처럼 둥글게 말아 다시 게워낸다. 밀물과 썰물이 번갈아 교차하는 절반의 삶터, 펄의 생존법은 곧 물때를 맞추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간 나는 언니와 동생, 또래 외사촌들과 어울려 뒷개에 나가 놀았다. 펄 가운데 솟은 모래 등에 올라 썰물이 남긴 물결무늬를 밟으며 맨발로 마구 달음박질 쳤다. 발뒤꿈치에서 모래알들이 퉁퉁 튕겨 올라 장딴지를 때렸다. 그 뜀박질이 지치면 털썩 모래 등에 퍼질고 앉아 백합조개를 캤다. 손바닥을 모래 위에 대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은 다음, 손등에 모래를 퍼 올려 다독다독 두꺼비집도 지었다. 그 집 속에 손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펄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칠게 흉내를 냈다. 야, 하고 칠게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칠게가 순식간에 펄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조금 후 꼬물꼬물 기어 나오는 칠게를 향해 연거푸 야, 하며 친한 척 성가시게 굴었다. 노는 내내 갯바람을 마시고 갯냄새를 홀짝거리며 짭조름해졌다.
나는 바다하면 항상 펄이 떠오른다. 설 추석 휴가 때나 연말이면 한나절 짬을 내 들리는 곳도 순천만 갈대숲이다. 자연생태공원이 생기기 이전엔 논과 펄의 경계인 흙둑에 올라서면 바로 무성한 갈대숲이 펼쳐졌고, 지금은 나무 덱 탐방로를 따라 갈대숲을 산책 할 수도 있다. 찾는 시기 때문인지 몰라도 갈대는 늘 선물처럼 반갑고 설렌다. 갯바람과 동고동락 하는 갈대도 잎과 줄기를 사르륵사르륵 흔들고, 자갈색 갈꽃을 피우고, 시나브로 솜털 단 씨앗을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갯가를 따라 무리를 지어 서로 모나지 않고 수수한 생김새가 조화로운 멋을 더한다. 밀물 속에 서 있을 때도 뿌리 쪽 줄기만 잠겨 꿋꿋하게 잎들을 서걱댄다. 밀물과 썰물을 모두 품은 바다의 숲, 갈대는 전혀 딴판인 망망대해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올랐을 때다. 야간산행을 한 덕분에 희붐한 새벽녘 평야처럼 드넓은 펄과 조우하는 뜻밖의 행운을 누렸다. 펄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건 처음이었다. 그 펄은 낮은 곳에서 바라보던 편편한 모습과는 달리 요동치듯 움푹움푹 꺼지고 또 솟구치며 첩첩 뻗어가는 퇴적암지대처럼 옹골찼다. 펄의 굴곡 사이사이에는 가는 물길이 촘촘히 연결되어 조금 넓은 곡선의 물길을 만들고, 또 그 물길들이 만나 절벽처럼 가파르게 깎인 갯골을 이루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역동성은 펄 끝자락까지 거침없이 뻗어가 아스라이 가물거렸다.
사람도 펄의 생명이다. 펄이 삶터인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밀물과 썰물의 물때에 맞춰서 일상을 꾸린다. 썰물 때면 뻘배를 끌고 펄에 나가 참꼬막과 가리맛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는다. 펄 범벅이 된 분주한 일손도 밀물이 찰 시간이 되면 서둘러 펄을 빠져 나와야 한다. 나 또한 펄의 생명일 게다. 살아가면서 겪는 이직과 병고 등 삶의 밀물에 부대끼다 보면,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는 난감한 상황이 한두 번 뿐이겠는가. 통장잔고에 찍힌‘0원’을 쳐다보면서 입술을 꾹 깨문 적이 있다. 매사에 차지지 못한 난 마음마저 쪼들리는 삶의 물때를 맞추느라 늘 동분서주했다. 나를 쥐락펴락하는 삶의 밀물에 등 떠밀리고 허둥대며 눈칫밥이나 얻어먹기 일쑤였다.
조도(鳥島)다. 외갓집 마을은 그 이름이 말하듯 겨울철새들이 월동하는 보금자리였다. 초겨울 무렵 청둥오리와 쇠기러기 떼 등 겨울철새들은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뒷개로 날아왔다. 겨울방학 때 봤던 그 철새들은 종일 뒷개를 들쑤시며 해초를 뜯고 펄을 쪼며 먹이사냥을 했다. 혹시, 둑길 밑에 웅크려 매의 눈으로 훔쳐보는 내 호기심을 눈치 챘을까. 느닷없이, 서너 마리가 뒷개를 박차고 날아오르면 그 많은 철새들이 덩달아 떼 지어 날아올랐다. 나를 감시하듯 허공에 점점이 흩어졌다 모이고 또 흩어졌다가 모여들었다. 그 군무는 뒷개 하늘을 단숨에 펄 색깔로 물들였다. 이윽고, 내 호기심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을까. 철새들은 나지막이 허공을 두어 바퀴 더 돌면서 날개를 접고 사뿐히 뒷개에 내려앉았다.
비단 월동뿐이랴. 펄은 번식지에서 월동지로 이동하는 나그네새인 개꿩, 안락꼬리마도요가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는 중간 기착지 역할도 한다. 또한 텃새인 검은머리물떼새의 변함없는 서식지다. 정화능력이 뛰어난 펄의 생명들은 건강한 먹이사슬을 형성한다. 사철 텃새들을 먹이고, 나그네새와 철새들이 머물다 떠난 후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올 만큼 풍요롭다. 물론 철따라 날아오는 새들도 펄을 풍요롭게 퍼덕인다. 그 무리 속엔 천연기념물이며 세계적 희귀조인 흑두루미도 있지 않은가. 펄에 깃든 새들의 날갯짓은 아름다운 풍경이 되고, 그들이 날아오고 날아가는 먼 미지의 세상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물들인다.
오며가며 들리는 남해의 바닷가였다. 한번은 썰물 때라 막 펄이 드러나는 참인데 그 물 빠짐이 매우 빨랐다. 펄로 내려서기도 전에, 맞은편 섬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초승달처럼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모래 등 마냥 도드라졌다. 그 길에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를 한 움큼 쥐고 만져보니 몽땅 패각이었다. 형체 없이 잘게 부서진 것, 아직 형태가 남아있는 소라 껍데기가 뒤섞인 채 햇빛과 물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패각은 들고나는 물살에 점점 더 잘게 부서질 터, 또 다른 생명을 품고 키우는 펄로 거듭나고 있었다.
뒷개는 툭 튀어나온 산봉우리에 가로막혀 앞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감쪽같이 산봉우리 뒤로 돌아앉아 앞바다를 잊은 듯 외톨이지만, 어릴 적 추억이 오롯한 내 가슴속 같은 곳이다. 나는 성장한 후 드넓은 세상을 품으려 뒷개를 떠났다가, 나이 들수록 소중해지는 어린 날을 찾아 말없이 돌아왔다. 여태 모래 등을 뛰어다니는 어린 나에게 내밀 성취의 꾸러미는 없다. 그것도 모르고 집게발에 묻은 펄을 조몰락조몰락 비벼대는 칠게가 반갑다. 빈손이나마 두 팔을 활짝 벌려 뒷개를 품어 본다. 모래 등이 최고였던 어린 날의 뒷개가 사실은 앞바다로 이어지는 드넓은 세상이었음을 비로소 안다. 이 뒷개에 아쉬움이 알알이 박힌 내 지난날을 부려놓고 포용과 순리의 물때를 맞춰 볼 참이다.
우수상
기도 등대의 지문 / 김삼복
타오르는 불기둥이다. 두 손끝에 등을 올리고 얼마나 빌었는지 열 손가락이 모두 벌겋다. 강고한 방파제 위에 암염처럼 붙어 간절히 기도하는 등대라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쯤은 두고 있을 거룩한 신전 같다. 엄숙한 등대로 인해 주눅 든 우리는 우선멈춤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섬의 앞바다는 오룡묘의 무녀가 아닌 합장한 기도 등대가 지키고 있다. 바닷바람도 등대 꼭대기에서 서서 묵념 중인지 잔잔한 파고가 얕게 너울거린다.
명사십리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긴장이 풀린 바닷바람이 등대 끝에서 성급히 내려와 골목으로 뛰어든다. 우리도 덩달아 바람을 따라나섰다. 구불구불 들어간 섬 집마다 배를 가른 생선들이 대꼬챙이에 벌어진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속을 비운 고기 배 속으로 가을볕과 짠바람이 파고든다. 짭짤한 바람에 속을 비운 생선들이 처마 밑에서 알뜰하게 풍장을 하고 있다.
시멘트벽이 부서져 내린 골목 끝에서 바람이 다시 한번 주춤거린다. 목선을 따라 바다로 나간 남편의 빈자리를 메우는 아낙의 그물 손질을 훔쳐본 까닭이다. 한쪽으로 목이 기운 여자의 어깨에 삶의 무게가 올라앉았다. 살아내느라 잃어버린 순한 마음을 그물과 함께 꿰매고 있을까, 옆에서 해찰하는 어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볼이 빨갛게 익은 아이가 엄마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물코를 닦는다. 고기를 가득 실은 아이 아버지의 목선은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까. 임을 그리다 바위로 굳었다는 망주봉 전설이 오늘은 이 집 마당 안에 고였다.
어스레한 박모가 섬마을을 점령해 동네 어귀를 떠도는 개 한 마리가 늑대로 보이는 시간, 배가 정박하는 선착장이 오늘은 한산하다. 벌써 마을 남정네들이 집으로 돌아갔을까?, 푸른 힘줄에 어구를 채워 내일 첫새벽에 바다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리라. 언제나 바다는 캄캄한 비밀로 출렁였다. 바닷속 비밀을 잡으러 아버지의 아버지가 다닌 바닷길을 아들의 아들이 이어 가는 서해 앞바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는 바다가 주는 만큼 받아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캄캄한 바다 위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는 하얀 보름달이 뜨는 밤에도 등대의 빛을 따라 항구로 길을 튼다. 비밀을 뚫어 주는 긴 광선이 휘휘 수면 위를 더듬으면 목선은 뱃머리를 쳐들고 집으로 향한다. 스스로 빛나는 등대는 배를 끌어당기는 붉은 밧줄을 가졌다. 되돌아올 길을 보여 주고 어선을 끌어당기는 빛줄기를 밤마다 뱃머리로 던진다.
풍진 바다를 헤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등대를 찾는다. 삶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인생의 선장들도 마찬가지다. 굴곡진 삶의 해안 어느 바위 위에서 불빛은 반짝일까. 저마다 밤을 밝히는 횃불이 타고는 있을까. 밤이 되자 등대가 켜지고 등주 모서리에 기대앉았다. 수평선이 사라진 밤바다를 보며 생각한다. 평생을 무릎으로 당신의 자리를 다지신 분, 두려움으로 표류할 때마다 찾았던 내 영혼의 등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려본다.
만주 땅에서 얻은 고뿔이 쇠하여 결핵으로 번졌다고 하였다. 기침 소리가 새벽까지 울렸던 윗목, 할머니는 아들의 병환을 속울음으로 지켜보셨다. 몇 개월의 시한을 남겨두고 힘없이 누워있는 가장을 보는 할머니의 심정은 어떤 말로도 그릴 수가 없다. 그렇게 생을 마칠 수는 없었던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새벽마다 뒷산을 오르셨다.
홀로 산의 정적을 향해 외친 기도는 왜소해질 대로 왜소해진 한 사람의 뼈저린 몸부림이었다. 신 앞에 최대한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새벽공기를 가르는 통곡이었다. 자신을 전부 내려놓고 드리는 기도만이 하늘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으리라. 결국 아버지는 지문이 찍힌 하늘의 송장을 받아내셨다. 병이 낫자 가족을 떠나 전쟁고아들을 위한 사명의 길로 들어가셨다. 나음을 기적이라 여겼고 기적에 대한 빚을 갚는 아버지 나름의 의식이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마땅히 배워야 할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다. 자식들의 구멍 난 신발은 지나쳤어도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의 빈손은 지나치지 못했다. 손수 지게를 지고 흙과 돌을 나르며 땅을 일구고 밤에는 동네 아이들과 청년들을 모아 가르쳤다. 모든 호흡이 무거운 짐이었을 아버지의 가슴, 무너진 폐를 안고 달린 생에 대한 투지가 우리에게는 눈물겨운 가르침이었다. 거친 삶의 무게를 건사하느라 야윈 등이 활처럼 휘었던 아버지의 뒷모습. 갈비뼈가 다 드러난 마른 모습이 자식들에게 붉은 인장처럼 찍혔다. 청빈한 선비처럼 이름 없이 살아도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배웠다.
밤새 등대는 불을 밝히느라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면서 아침을 맞는다. 먼바다에서 만선의 배가 들어온다. 모항으로 들어오는 배들은 뱃머리 품새부터 흥겹게 들썩거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과 갯비린내가 먼저 달려가 남정네들의 젖은 몸을 닦아준다. 어부 옆에 서 있는 아낙들은 한숨을 놓으며 바다가 내준 펄떡거리는 것들을 바구니에 쓸어 담는다. 포구에서 비린내를 흥정하는 아낙들은 밤새 붉은 기도 등대를 가슴에 들여놓고 두 손을 모아 빌고 빌었으리라. 이제 그녀들은 파도와 비를 잠시 잊어도 좋을 것이다. 기도 등대 또한 걱정으로 굳은 합장을 스르르 풀어도 좋으리라.
새벽바람을 앞세워 섬 둘레길을 걸었던 우리는 또 한 번 발길을 세웠다. 동쪽에서 뜨거운 태양이 수평선을 튕기고 있었다. 공처럼 통통 오른 아침 해가 창공을 기어오른다. 어부와 그의 아내와 물고기가 집으로 돌아간 선착장은 참으로 평안하다. 섬에서 하룻밤을 빌리고 합장한 붉은 등대를 보며 무너져 내린 마음을 추슬렀다. 몇 달 전 형부의 몸에서 검은 점이 발견되었고 수술하여 이제는 항암치료를 이겨내는 일만 남았다. 두려움에 떠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언니는 수술실에 누워있는 형부를 두고 아버지의 기도가 생각났단다. 어쩌면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주신 유일한 빛의 지문을 다시 보았으리라.
사생결단이 내려진 날의 시커먼 뒷덜미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하기야 비밀의 바다가 출렁이는 것은 저 바다나 삶의 바다나 별반 다르지 않다. 분명 도시에서 포효하는 욕망이 우리를 멀미 나게 했을 터, 부려놓지 못한 욕심이 따개비처럼 붙어 멀쩡한 속살을 파먹고 있었던 것이리라.
섬에서 우리를 몰고 다닌 바람이 힘을 서서히 풀었다. 풀려난 바람에 의지하여 이제 섬을 나가야 한다. 우리의 바다, 출렁거리는 우리의 도시로 힘차게 출항해야 한다. 한 치 바닷속이 저승이었을 어부들처럼 병마와 싸웠던 하루들이 아수라장이었을 아버지. 당신이 생을 다하는 날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듯이 언니도 함부로 소망을 내려놓지 않으리라. 유일한 지문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터, 뒤를 돌아보니 두 손 모은 등대가 우리를 힘껏 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물 / 김은숙
오랜만에 아버지의 억센 팔이 촘촘한 그물을 밤바다에 던져요. 그물이 펴지며 흐르는 소리가 상쾌한 바람을 일으키죠. 밤이 잠깐 환하게 밝아오는 순간이에요. 그러면 은빛 뱃가죽을 뒤집으며 팔딱팔딱 살아있는 바다의 별들이 이드거니 몰려와요.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후리!’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치곤 해요. 아버지 얼굴에 피어난 환한 파도는 찌든 걱정과 불안을 몰고 수평선으로 달아납니다. 한동안 바닷속에 별이 뜨지 않아 아버지는 한철 바다를 추슬러 변통해야 했거든요. 바닥은 가난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죠.
오늘은 남해에 사는 아버지로부터 묵직한 상자가 왔어요. 상자에서는 구수하고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와요. 서둘러 열어보니 동그랗게 눈을 뜬 검은 눈들이 올려다보고 있네요. 아버지가 미처 지우지 못한 바닥의 색깔이 파르스름하게 고여 눈물샘을 자극해요. 꼬들꼬들하고 매끈한 은빛의 언어는 시도 때도 없이 바다를 노래해요. 가슴이 흥건하게 푸른 빛으로 젖을 즈음 마른 멸치 떼는 다시 아버지를 데려갑니다.
남해(南海)에는 비릿한 바닷속에도 은하수가 흘러 다닌다는 것을 아시나요. 은밀한 반짝임은 하늘과 바다에도 존재해요. 누군가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통한다고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캄캄한 밤이면 하늘과 바다 사이에 별들이 오가는 걸 보았어요. 그건 어쩌면 오래전에 아버지가 잃어버린 꿈일 수도 있어요. 이루지 못한 꿈은 바다로 흘러들어 바람이 되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바람이 불면 아버지 어깨가 들썩거리곤 했나 봐요.
누가 저토록 많은 은하수를 바다에 풀어놓았을까요.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흰 가슴을 열고 바다로 걸어들어오면 죽방렴 삼각 그물 안쪽은 자디잔 별들이 팔딱팔딱 뛰어다녔지요. 봄가을이면 뭍으로 떠난 그리움 때문에 유속이 빨라져요. 가난의 밑바닥에도 반짝임이 있다고 아버지는 믿었어요.
망에 가득 찬 바다의 속살을 끌어 올려 뜰채로 가짜 별들을 분리해요. 조치, 갈치, 도다리, 잔챙이를 뺀 멸치만 산 채로 바구니에 넣어야 하거든요. 바구니가 무거울수록 아버지의 이마에는 비린내가 더 선명해지곤 했어요. 아버지는 싱싱한 별을 좋아해서 별에 취하면 콧노래가 흘러나오죠. 이젠 별들에서 진한 비린내가 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도 아버지는 바람의 길목 멀리까지 나왔어요. 제대하고 돌아온 이마가 파릇한 아들과 낡은 뱃머리 끝에 마주 앉아 물밑 은하수의 이동로를 갸웃 살피던 아버지는 “아비가 가난해서 미안하구나” 하며 눈가가 촉촉해져요. 때론 눈이 침침한지 자꾸 눈을 깜빡거려요. 까무룩 졸며 뱃전에서 부표처럼 흔들리다가 다섯 평 물속으로 뛰어든 적도 있어요.
저 멀리 수평선을 쥐고 있는 아들의 미간에 고단함이 묻어나요. 해변에 북두칠성처럼 늘어진 채반에서는 꾸덕꾸덕 어촌의 하루가 짭조름하게 말라가고요. 갯바람에 미역처럼 검게 탄 아버지는 채반 깊숙이 손을 넣어 쉽사리 마르지 않는, 부자간의 뜨거운 거리를 가늠해 보곤 해요. 아들의 넓은 어깨 뒤로 펼쳐진 바다의 속살을 헤아리던 눈빛에는 지나온 세월이 수평선처럼 아득하네요. 아마도 당신의 젊음을 아들의 꼿꼿한 등에서 읽히기도 하나 봐요.
가끔은 선실 창가에 구겨진 채 걸터앉은 채납고지서가 먼바다를 먼저 살피기도 하죠. 충전된 바람이 모두 바닥난 선실의 선풍기는 혼자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요. 하지만 다행이랄까요. 남해에서는 태풍이 섬을 적셔도 어부들은 오랜 슬픔에 젖지 않는대요. 바닥은 때로 그 힘으로 바닥을 살리기도 하니까요.
별들은 떼살이어서 산 채로 담아야 싱싱해요. 아버지는 반짝이는 게 춤이라고 말씀하시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을 보는 듯 눈빛에 생기가 살아나요. “얘야, 저 몸짓을 보렴, 저 시린 등뼈의 흔들림이 파도를 닮았구나.” 어찌 아름답지 않겠어요. 온몸의 기를 쏟아 파도를 타는 절박한 몸짓이야말로 숭고한 삶인 걸 아버지는 진즉 알아본 거죠.
육지 멸치 막으로 온 별들은 이내 펄펄 끓는 가마솥으로 휩쓸려가 뜨거운 수증기 속에 잠겨요. 팔딱이는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 아버지는 가난이든 별이든 바짝바짝 잘 마르길 원했죠. 반짝이는 것이 가난의 마지막 춤이라는 건 저물녘 그물에 걸려든 멸치들의 몸짓이 말해줘요. 그때 멸치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온몸으로 춤을 추어요. 멸치들도 제 등뼈가 별빛에 시리다는 걸 아나 봐요. 바다를 누비며 떼 지어 다니다 육지 멸치 막으로 온 멸치는 마지막 삶의 궤적을 은빛으로 갈무리해요.
눅진한 해풍도 멸치처럼 채반에 잘 널어 말리면 갈매기로 환생하고 섬에서는 허공 저쪽으로 날아오른 몇 모금 담배 연기도 흰 돛단배가 된다고 해요. 먼 곳에서 유성비처럼 몰려올 수천수만 개의 별들은 오리온,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보다 투명하고 환하대요. 그래요, 남해의 멸치 떼는 은빛 파도가 비늘에 알알이 박혀 은박지보다 더 눈부셔요. 파도를 갈무리하는 그것들의 미세한 춤을 위해 바다는 가끔 여러 갈래 물길을 만들어요.
썰물이 되면 지족해협 삼각 그물 속으로 은하수가 떼 지어 몰려와요. 그 소리는 대나무숲에 이는 바람처럼 청량해요. 죽방렴 물속 길목이 순간 활시위처럼 팽팽해지고 물속에 종아리를 담근 대나무 발이 벙긋벙긋 웃음을 쏟는대요. 말뚝 밑 촘촘한 발가락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멸치 떼가 당도한 걸까요? 죽방렴 높이 솟은 대나무 꼭대기에서 망을 보던 햇살들이 휘파람을 부네요. 아버지보다 먼저 공중에 붙박인 갈매기들의 환호성이 싱싱하게 튀어 오르는 은별들을 잽싸게 받아 물고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요.
오늘 밤 당신이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한가요. 아마도 바람결에 비린내가 실려 온다면 그것은 순전히 남해의 푸른 심장이 키운 은빛 지느러미 탓일 거예요. 해풍의 모서리가 동그랗게 오그라드는 섬 끝에서부터 남해의 별들은 눈을 뜬대요. 죽방렴 캄캄한 수심 아래 푸른 숲의 메아리를 숨겨둔 참나무 말뚝들은 입이 무거워요. 저마다 비린 가족사를 안고 다시 천년을 꿈꾼다네요. 이것은 어쩌면 당신 몸에 지느러미가 처음 돋아났던 그때부터 생긴 비밀일지도 몰라요.
오늘은 아버지가 보낸 편지처럼 내 가슴에도 별들이 팔딱거려요. 그동안 내 삶이 아버지를 포획하는 시간이었다는 걸 각진 나무 상자 안의 은하수가 말해주네요. 아버지가 밤하늘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듯 나는 자망(刺網)에 가득 찬 희망일까요. 어쩌지 못해 뒤돌아 훔쳤던 눈물이었을까요. 아버지의 거친 등에 새겨진 청람 빛 바닷바람이 오래도록 가슴에서 떠나지 않아요.
등대바라기 / 변재영
등대는 기다림이다. “철썩철썩 쏴아아~” 발밑에 초록빛 바다가 출렁인다. 내 유년의 아픔이 섬처럼 동동 떠있는 고향 바다, 그리움이 입맛을 당기듯 짭조름한 갯내가 후각을 파고든다. 쪽빛 바다에 갈맷빛 하늘, 기다림의 상징인 빨간 등대, 맴돌이치는 갈매기들의 군무, 갯바위를 훑는 파도의 몸짓까지 아버지의 짧은 생이 웅크린 낯익은 바다가 아니던가.
보물섬 남해 끝자락, 일명 몰갯넘이 내 고향이다. 모래톱에 일군 동네라 붙여진 이름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면청을 비롯하여 현대식 건물이 숲을 이루고 있다. 물매진 언덕을 오른다. 밤새 혼신의 힘으로 타올랐던 등대가 쉬고 있다. 철망 같은 섬에 갇혀 뭍을 향해 훨훨 날고 싶었던 까까머리 소년을 기억할까. 문득 코흘리개 적 향수가 내 아픈 기억을 불러낸다.
내가 어릴 때 근육질 단단한 아버지는 거룻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맨손으로도 힘 좋은 숭어를 턱턱 잡아 올렸다. 만선을 기다리는 가족의 마음을 읽었을까. 아버지는 늘 만선의 깃발을 높이 내걸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신이 난 우리 가족들은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와 함께 웃었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 고기잡이가 좋았던 나는 출항 때마다 아버지보다 먼저 배에 올랐다. 하지만 번번이 쫓겨났다. 언젠가는 가라앉아야할 배의 운명을 아버지는 일찍 예감하고 계셨으리라.
축 처진 어깨를 곧추 세우는데 자식만한 게 또 있을까. 조업을 나나지 못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나를 목마에 태우고 등대로 향했다. 그곳에서 등대지기가 되어 고기잡이 동요를 흥얼거리며 시간의 빈틈을 메웠다. 내게 아버지는 든든하고 자애로운 등대였다. 나는 늘 행복의 세레나데를 불렀고, 그 사랑의 멜로디가 끝나지 않는 파도 소리처럼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랐다.
몇 년에 한 번씩은 허기진 바다였다. 온화한 모성은 평온으로 가장한 바다의 위선일 뿐, 짐승처럼 포효하는 아가리에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매지구름에 포위된 바다가 갑자기 그르렁거렸다. 바람의 억센 손아귀에 휘감긴 파도가 바다를 덮치는 건 순간이다. 불빛을 잃은 등대가 “뿌우~ 뿌우~” 무적을 울렸지만 배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집채 같은 너울이 수평선에 떠있는 배를 산위에 올려놓던 그날, 아버지와 배는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바다는 두발로 서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대는 것이라고 했던가. 육지보다 바다가 더 편하다고 하시던 아버지는 그렇게 한줌의 흙이 되어 바다로 돌아갔다. 이팔청춘 호시절도 누려보지 못한 아버지, 순대 속처럼 구불구불한 바닷길은 굴곡진 당신 인생길의 아픈 시간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바다가 보기 싫다며 문을 닫아걸었다. 그러기를 반년, 겨우 몸을 추스른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등대에 올랐다. 손에는 뭍에 입원할 친구에게 전할 의복이라며 작은 옷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도 한 봉지 사고, 내가 좋아하는 단팥방도 샀다. 등대 그늘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날은 어린 양처럼 순했다. 나는 달콤한 빵을 맛나게 먹었지만 어머니는 구경만 할분 눈깔사탕 하나 입에 대지 않았다.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슬픈 눈망울은 어딘가 불안했다.
어머니가 나를 꼭 껴않았다.
“영아, 사탕 먹고 잠깐만 기다릴래? 엄마가 선착장에 가서 친구에게 옷 보따리 전하고 올게”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연락선이 둔중한 뱃고동을 울리고는 항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어머니의 친구분이 타고 있을 그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나 남은 사탕을 다 먹어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소식이 없었다.
가진 것 없이 어둠 속에 내쳐진 스물 중반의 미망인, 중심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던 어머니는 그렇게 희미한 불빛을 찾아 불나방이 되어 날아갔다.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는 할머니의 비수 같은 폭언도 한몫했으리라. 기왕 떠날 바엔 야반도주라도 할 일이지 왜 나를 등대까지 데리고 갔을까. 나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겉으로는 분노했다. 원망하고 미워도 했지만 속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웠다. 아니, 사랑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불 꺼진 등대였다. 나를 향해 반짝이는 불빛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부재, 홀연히 떠나버린 어머니의 충격까지 대여섯 살 꼬마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나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흔들거렸다.
그리움은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는 눈만 뜨면 등대바라기가 되어 엄마를 기다렸다. 인생은 기다림이라고 했던가.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곳에서 다시 집나간 엄마를 기다려야하는 내 운명이 한심하여 자꾸 눈물이 났다. 귀를 등탑에 걸어놓고 낯익은 목소리를 쫓다보면 섣달그믐의 눈썹달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바다를 훑어온 칼바람이 등짝을 할퀴어도 쉽게 기다림의 끈을 놓을 수 가 없었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 배는 다시 왔지만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이놈아 거긴 왜 가는 겨, 기다린다고 떠난 어미가 돌아 오냐.”
할머니가 망부석이 된 나를 걱정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뒷산에 두어 번 꽃물이 든 후에 나는 할머니에게 다시 물었다.
“할머니, 엄마 어디 있어요?“
“네 어미는 죽은 겨, 다시는 찾지 말거라”
그때까지도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절절한 노기가 묻어났다.
세상이 싫고 사람이 싫었다. 엄마 없이 자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내가 기댈 곳은 등대뿐이었다. 언제나 아버지처럼 우뚝 서서 나를 기다리는 등대, 설움이 복받칠 때마다 그곳을 찾았다. 등대에 기대어 실컷 울고 나면 조금은 가슴이 후련해졌다.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는 내게 등대가 속삭였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야, 눈앞의 높은 산도 혼자 넘어야할 몫이란다.” 그것은 곧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비록 아버지는 떠났지만 내 가슴에 지펴놓은 등댓불까지 꺼진 건 아니었다. 등대에는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가 녹아있었다.
빛을 잃어가는 할머니의 등대가 불안했다. 언젠가는 내가 할머니의 등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한 조각 슬픔까지 툭툭 털고 일어선 나는 등대가 일러준 대로 푸른 해원을 향해 원대한 꿈을 키웠다.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등대의 천성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고립이 주는 성찰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법. 굴곡을 거부하는 등대로부터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몸의 언어를 먼저 배운 나는 일찍 철이 들어 어른 아이가 되어 갔다.
해상의 길잡이로 선박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광탑, 아가페적인 사랑의 메신저가 등대의 속살이다. 도시인들에게는 낭만의 음표로, 비손 앞에서는 탑이 되기도 한다. 나래를 접는 물새들에게는 간이역이요, 인생의 지표를 잃고 방황하는 이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구원의 천사가 되기도 한다. 어린 몸으로 절해고도에서 허우적대던 내게 등대는 어떤 존재였을까. 절대고독의 상징으로 영혼의 불빛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통도 시간에 풍화되는 것일까. 지금은 내 삶의 고해에 고운 꽃무늬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궤적을 긋는다. 한 모숨 햇살 같았던 아버지의 등댓불이 그립다.
2010년으로 기억된다.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한창이던 중추절이었다. 뜬금없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오빠, 엄마를 모시고 있는 동생입니다. 염치없지만 생전에 한번쯤은 꼭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
혈혈단신인 내게 오빠라니, 사실 어머니가 살아계셨다.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어머니는 재혼해서 남매를 뒀는데, 지금은 홀로되어 이혼한 딸과 함께 멀리 강원도 속초에 살고 계셨다.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걸 보면 넉넉한 형편은 아닌 듯했다. 기왕에 고친 팔자라면 잘 살았으면 좋으련만……. 당신이 버리고 간 아들을 어떻게 만나느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딸이 몰래 전화를 했단다. 엄마 가슴에 뭉쳐있는 응어리를 풀어줄 사람은 오빠밖에 없다고 말이다.
분꽃같이 곱던 어머니를 호호백발이 되어 마주했다. 기다림에 지쳐 한줌 눈물마저 말라버린 것일까. 서먹서먹하기만 할뿐, 부둥켜안고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 어머니라는 소리는 더더욱 나오지 않았다. 모진 진통으로 나를 분만하고 어린 입술에 젖을 물려 배불리 먹였겠지만 기억이 없었다. 반백을 훌쩍 넘긴 해후지만 떠나간 이웃 안부 묻듯 모자 상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두어해 뒤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연락이 왔다. 환자복속에 얼비친 어머니의 몸은 검불처럼 말라 있었다. 수술을 했지만 노환이 겹쳐 결과는 좋지 않았다. 임종을 예견 했을까.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너에겐 뭐라고 할 말이 없구나.”
어린 아들을 떼어놓고 가야 했던 당신의 입장을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순간 가슴속에 있던 뜨거운 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빠르게 올라왔다.
“어머니!”
내 입에서 머뭇거리던 단어가 익숙하게 튀어나왔다. 나도 몰래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살 냄새인지 소독약 냄새인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아니 어머니의 젖 냄새가 났다. 마른 가슴이지만 고향처럼 아늑했다. “어머니!” 이 한마디로 충분했을까.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감은 눈을 다시는 뜨지 않았다. 내 오랜 기다림의 등대가 불빛을 접는 순간이었다.
어느 듯 내게도 인생의 겨울이 발목을 적신다. 그래서일까. 오늘처럼 고향 등대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어둠이 숙성되는 시간, 밤바다를 향해 등대가 불빛을 뻗는다. 묵혀두었던 깊은 그리움이 전신을 휘감는다. 아버지의 화신인양 내 가슴에도 등댓불 하나 환하게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