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김서치
■자유형 외 4편
자유형
방금 막 청소한 아지트의 문을 열어둔 것 같다
여자는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없어
물 안으로 들어간다
준비운동 없이
세상 밖으로 미끄러졌던 때와 같이 그렇게
빨려들어갔다
물의 온도는
문풍지를 바르지 않고 견뎠던
한파주의보의 1월
횡경막 사이 사이에 성애가 낀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겠지
물 안이라고
죽음 아닌 것들이 있진 않았다
여자는 물속에 눈을 집어넣고 일렁이는 격자무늬를 보았다
격자무늬의 한 부분이 야트막하게 솟아오를 때
그건 볼록함도 오목함도 아니었고
오래 쓰지 않던 말을 까먹듯
헤엄치는 방법도 까먹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할 수 있는 데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린 것들 속에서
매일 조금씩 균형을 잃고 부서지다가
여자의 숨구멍은 희미해졌다
여자가 수면 아래로 숨어들었다
물이 붉고 따뜻했다
갈비뼈 아래로 피었던 고드름이 녹기 시작했다
발을 차고 팔을 젓고 물을 밀고 고개를 돌리고
죽을 것 같다가도 금방 살 것 같아지는 호흡에
폐에서 씩씩 소리가 났다
틈을 벌리자
사춘기에 두고 온 맥박이 불거졌다
병든 마음과 허기가
거품처럼 씻겨 내려갔다
수모를 쓴 머리통이 따끈해질 때쯤
여자는 몸을 웅크렸고
목선엔 싱그러운 아가미가 돋아났다
여자는
평생을 기다려온 잠에 들며
첫 목소리를 들었다
아가야
소녀를 위로해줘
네가 엄지로 부싯돌을 치다가 말했다
입안에 텁텁한 고춧가루가 잔뜩이야 그건 우리가 돼지두루치기를 먹어서 그렇지
같은 학교 영숙이네 엄마가 하는 언덕 위의 포차 영숙이네 엄마는 손맛이 끝내주고 말맛도 끝내주고 그래서 남자친구가 둘씩이나 있고, 그 둘 중 하나가 네 아빠였고
언덕 아래, 붉게 빛나는 게 있어
이 동네에 교회 하나쯤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증막 마크였다는 사실에 웃지
그렇지만 언덕배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빼곡한 빛들이 보이고 나는 우리가 은하수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너는 내게 더는 감사하며 살지 말라고 하고
나는 그래도 기도를 할 거야 이 거꾸로 희미한 세상에
여관방 앞에서 붕어빵 봉투를 품에 구겨넣는 아저씨를 보면서도 못 본 체
웃자, 웃는 것밖에 할 게 없는 사람처럼
너는 빨간 양념이 묻은 입을 달싹거리며
날이 추워지면 한탄강에 빙어낚시를 하러 가자고 말한다
나는 그래, 그거 정말 좋겠다고 빙어튀김을 해 먹으면 정말 뜨겁고 맛있겠다고
근데 있지 우리는 사실 서해안에 살고 가진 것은 한겹의 몸뿐
인천 앞바다의 낙조는 숨이 막히도록 지겨워서
차라리 코를 틀어막는다
여러 날의 해가 뜨고 지겠지
갯벌 사이로 뻐끔거리는 숨구멍 같은 날들
밀도를 견디며 사지四肢는 자라겠지
성년이 된다는 건 기름진 여러겹의 옷을 입고 웃는 것
그땐 갯벌의 모든 흙이 마르겠지
그런 미래를 기억해본 적도 있어
우리는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하고 더 많이 더 많이 잠깐을 믿고
잠깐은 시체가 되어 바닥에 귀를 대고 얼어 있다가
어느 멸망의 전조를 느끼며 움찔거리다
그렇게 부디 휴거携擧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토록 환한 빛에 퇴적당해도 좋겠다
불행의 운석이 우릴 향해 달려오는
그래도 눈을 감지 않는,
우리는 깨끗한 심장을 가졌으니까
셀로판지처럼 얇고 투명한 얼음장 밑에서 차가운 손을 맞대고
어느 아침, 파도가 뺨을 두드릴 때 서로의 손을 쥐고 깨어나는 거야
스데롯 시네마
아버지는 요즘 뉴스를 본다
좁고 뚱뚱한 브라운관 속 형광 점의 교합은 조금 난폭했다 빨강이 파랑으로 보였다가 파랑이 초록으로 보이는 착각의 순환 속에서
한갓진 시간을 다른 세계의 믿음으로 녹여내면 아버지는 조금 떳떳해졌다 시장 바닥이 다 그렇지 뭐, 내가 진주처럼 작고 고와 진주상회로 지었다는 이 한칸의 이름도 나는 믿지 않는다
반질대는 머리통 위로 파란 별이 스치면 아버지는 깔깔 웃으신다
우리 수조엔 팔리지 않는 아나고가 한가득인데 어째서 죽상이 된 소마항의 어부를 비웃는지 의아해지고
가자지구에선 소금 알갱이 같은 백란과 샴페인이 함께 터진다 뚜껑을 뻥, 따는 순간 팝콘처럼 머리가 날아가고 한 사람이 태어나면 누군가는 벗겨졌다
가을이 오면 이라크에 파병 나간 작은아버지가 돌아오는 꿈을 꾼다
가을 전어가 별미라며 대가리와 꼬리를 잡고 뜯어 먹던 작은아버지
작은아버지는 몸체를 어디까지나 먹을 수 있어요
수조 속 형제는 서로의 몸을 이불처럼 덮고 있다
굵은 촉수를 오므린 침묵 가운데 아나고 킬로에 얼마입니까, 하는 손님의 물음이 박히고 대답보다 먼저 미끄덩한 몸통을 쥔 손이 나간다
아버지가 저울에 영혼을 쌓아 올린다 소쿠리가 태동하듯 파닥거리면 바늘은 좌우로 떨리고
피에 독이 있다는 말은 삼간다
손님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고 아버지와 나는 공양을 준비한다
쇠꼬챙이에 아나고의 대가리가 겹겹이 꽂힌다
놀란 척추가 신경을 따라 팔랑거릴 때 아버지는 칼을 쥔 손으로 익숙한 박자를 연주했다 피를 빼고 쓸개를 긁어내고 가죽을 벗기면 한줌 고기가 된다 그것이 퍼포먼스
손님은 징그럽다 하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는 걸
반투명한 살덩이가 알고
오늘 그의 밥상에 열하나의 몸통이 올라간다는 걸
우리가 안다
검은 비닐봉지를 묶어 손님을 배웅하면 아버지는 호스로 도마를 씻는다
현장을 훼손하듯 급한 손길이었다
아버지는 역시 아나고 손질에는 젬병이지, 그렇지
아버지가 말한다
진주야
니
아나고는 잡식이니까
묵지 마라
알고 있어도 몰라야 하는 맛이 있고
말소리보다 물소리가 요란한 이곳에선 모두가 악의 없이 칼을 휘두른다
목격자
차 뒤에 숨어야만 나는 무결한 보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신발 끈을 묶으며 멀리서 손짓하는 불안을 떠올려요
바퀴 밑으로 영혼이 달라붙고
아스팔트가 깔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유리의 앞면
안과 밖은 너무나 명확해서
차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전조등은 전조를 알리는 눈빛으로
그 시야 속에 나는 몸을 움츠립니다
차 안에도 눈송이가 내려앉는 상상을 해요
시트보다 먼저
눈과 코와 귀가 하얗게 될 것입니다
추위를 한꺼풀 벗겨내면
조금 덜 외로워질까요
얼지 않은 눈동자가 겹칠 때
우듬지는 목을 내밉니다
눈꽃이 피어납니다
나는 어느덧 노약자석이나 임산부석에 앉는 일에
무뎌졌습니다
그래서
흐느끼는 소리에도 무뎌집니다
그 소리는 너무 차가워서
나를 먼 곳으로 더 먼 곳으로 데려갑니다
떠오른 몸이
해 질 녘 길모퉁이에서 고양이를 만졌던 날로
돌아갑니다
클랙슨 소리가 들리면
열이 내리고
눈 코 입이 가까워지면
나는 다시 사람의 얼굴이 됩니다
기지개를 켜는데도
내 삶은 여전히 구부정하고
문을 닫으면
안식일의 의미를 까먹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도
종전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리는 이가 없는 날은
참으로
텅 빈 하루입니다
매듭을 짓는 마음으로
우리가 우리일 수 있을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김서치_단국대 문예창작과 3학년, 2001년생.
* 심사평
스물두번째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심사에서는 늘어난 응모작의 수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세련된 작품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긴 한문장이 하나의 연을 이루면서 긴 호흡으로 자기감정을 들여다보는 작품들이 어떤 경향을 이루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전체를 강하게 응축하는 구심점 없이 분행과 분연이 자유로운 이런 작품들은 무엇보다 '나'와 '너' 사이의 발화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이 보이는 표현의 분방함과 자재로운 리듬, 자기성찰의 밀도는 좋지만 그것들이 얼마간 '나'와 '너'의 언저리를 넘지 않는 과몰입의 감정에 묶여 있었다는 점도 지적할 부분이다. 장형화를 보이는 시들과 동떨어진 짧은 호흡의 시들도 다수 있었는데, 최근의 시적 경향에 빚지지 않은 자생적인 시들이 오히려 올드한 감성과 틀에 박힌 상상의 언어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우리의 시가 놓여 있는 지금을 잘 대변해주는 듯 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시는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이 응모작들을 읽어나가는 것도 충분히 유의미할 것이다. 안팎의 우려대로 시를 읽는 사람은 점점 더 적어지고 사는 일은 더욱더 곤핍해져가는 이중고 속에서, 시는 자기 고통을 직시하고 고통의 끈으로 연결된 세계를 투시하는 안목을 가질 때 비로소 세계를 횡단하는 상상력을 개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투철한 인식과 활달한 언어를 가진 응모작은 많은 원고들 사이에서 뚜렷하고 스스로를 돌올하였다.
1차로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은 총 아홉 묶음의 원고였고 그중에 최종적으로 당선을 다투었던 응모작은 「자유형」 외 4편, 「신의 건망증」 외 4편, 「전차와 소음」 외 4편, 그리고 「얼굴이 내릴 때」외 4편이었다. 네 묶음의 응모작은 모두 각자의 미덕과 장점을 충분히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중 어느 한편만을 당선작으로 내세운다면 손색이 없어 보였다. 다만 작품 한편의 뛰어남이나 표현의 방법이 얼마나 개성적인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응모작들의 고른 수준이 세계를 보는 안목의 깊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심사위원들은 생각을 모았다.
「얼굴이 내릴 때」 외 4편은 앞의 두 시편이 독창적이었다. 「얼굴이 내릴 때」는 비가 내리면서 만들어지는 순차적인 지각과 정서적 반향을 간결하지만 리드미컬한 언어로 중첩시키는 섬세함과 유연함이 돋보였다. 「다락」은 마침내 도달해도 영원이 유예되고 지연되는 기묘한 '다락'이라는 공간의 설정이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앞의 두편에 비해 뒤의 비교적 단형의 시들은 그 성취가 밋밋했다.
「전차와 소음」 외 4편은 응모자가 오랜 시간 서사를 연마한 흔적이 문장에 드러난다. 고양이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을 간결하게 처리하는 「전차와 소음」의 앞부분은 시적 서사의 응축미가 압도적이다. 죽음을 수용하는 노파의 내적 발화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고양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무심한 공포가/ 세계를 지나고 있다"와 같이 고양이를 시간성이나 역사성 자체로 알레고리화하는 구절이 인상 깊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예측을 거부하는 서사 위에 구축된 시적 사건들이 운에 띈다. 다만 시가 길어질수록 구심점이 흩어지면서 주제가 방기되는 약점을 보완하면 좋겠다.
「시의 건망증」은 오늘날 전지구적 재앙과 그로 인한 인간적 비참을 신의 불찰, 혹은 신의 건망증으로 희화한 시이다. 신이 자기 전에 수도꼭지를 자그는 것을 잊는 것만으로 세계는 홍수가 나고, 보일러를 켜둔 채 외출하여 지구온난화가 발생한다. 재앙과 함꼐 넘쳐나는 혐오와 폭력은 급기야 자신(신)의 이름을 빌미로 자행된다. 이 작품에 의하면 신의 건망증은 피로와 염증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의 모습을 그리는 태도에서 유머와 비관이 기묘하게 섞이는 매력이 있다. 다만 이 양가성이 블랙 유머의 비판적인 부분을 무디게 만들고 있다. 함께 응모한 「침묵의 세계」도 침묵을 식물의 대화법으로 은유하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역시 앞의 작품들과 달리 밋밋하거나 장황한 작품이 있어 그 편차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자유형」 외 4편이 보이는 독보적인 장점은 넉넉한 미적 거리이다. 사물과 세계가 결코 한가지 진실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이 시편들은 시종일관 아이러니컬한 거리를 두고 있다. 또한 포착된 이미지를 변주하면서 밀고가 새로운 인식에 가닿으려고 하고 시고의 '개진'이 힘있다. 이 개진의 힘은 자기와 타자를 향한 인식의 깊이와 개방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자유형」에서 "물 밖에서 숨을 쉴 수 없어/ 물 안으로 들어간" 여자는 운동 속에서 "죽을 것 같다가도 살 것 같아지는 호흡"을 되찾고, 자신의 기원을 향해 자맥질해 간다. 「소녀를 위로해줘」의 소녀는 숨 막히는 '거꾸로 희미한 세상'이지만 기도를 할 수 있고 「스데롯 시네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극장으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스데롯 언덕을 가져와 아나고를 손질하는 '진주상회'의 생선 도마 위로 변주한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섭식과 생업 안에 깃든 부성애로 조심스럽게 감쌀 줄 안다. 이미지의 변주는 능란하고 상상은 삶에 투철하여 재현된 경험은 핍진하다. 신인으로서의 가능성과 충실성이 두루 충분했다. 스물두번째 당선작으로 「자유형」 외 4편의 응모작을 선정한다. 당선자의 활달한 응전력을 기대하면서 심사위원들 모두 축하와 함께 우정 어린 격려를 보낸다.
문태준 이기성 이현승
첫댓글 위에 소개된 작품 중에서 <스데롯 시네마>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명칭의 유래에 대해 알 필요가 있겠기에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사실 작품에서 '가자지구'라는 언급만 없다면 굳이 제목이 <스데롯 시네마>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세계의 폭력성은 가자지구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묻지마 살인처럼 도처에 널렸으니까요.
2023년 10월 7일은 유대교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날 새벽 하마스는 이스라엘 군의 통신탑 4개를 드론으로 파괴해 통신 인프라를 무력화하면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하마스가 기습공격해 무차별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인 곳 중 하나가 이스라엘 남부 도시 스데롯입니다. 왜 하마스는 스데롯을 공격했을까요? 그건 바로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당시 이스라엘 군이 발사한 미사일이 가자지구에서 터질 때마다 의자에 앉아 구경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언덕이 바로 스데롯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자지구가 훤히 보이는 스데롯의 한 언덕에서 그들은 가자지구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구경한 셈이지요. 당시 덴마크의 기자가 이를 트위터에 올리면서 '스데롯 시네마'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극장 가운데 하나라면서.
가끔 현대시에 대해 거부감을 지닌 분들을 볼 때가 있는데 그분들이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독자와의 소통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전에 올린 글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시는 독자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게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현대시를 공부하고 싶은 분들께 참고하시라고 그때 올렸던 글을 링크 걸겠습니다.
https://cafe.daum.net/chinaunbag/GExk/13790
현대시를 공부하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일입니다. 그런 과정도 없이 현대시를 '소통'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현대시를 쉽게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다는 전통 서정시는 한 가지 감정만을 담고 있습니다. 슬픔이면 슬픔, 기쁨이면 기쁨인 것처럼요. 그런데 우리네 삶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기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은 게 우리네 삶입니다. 즉, 우리의 감정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담아내는 게 현대시입니다. 제목만 봐서는 시의 내용(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건 그래서입니다.
결국 너희는 시를 몰라도 되
시는 시인과 비평가만 알면되
더 알고 싶으면 공부 좀 더 하고 와,
하고 독자들을 꾸짖는 것 같습니다. ㅎ -
@maximus ㅎㅎ 맞습니다. 무릇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 하물며 독서를 할 때조차 전문적인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느 분야든 공부 없이 저절로 되는 건 없으니까요. 미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미술에 대한 조예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음악을 더 알고 싶으면 음악 공부를 해야 하는 것처럼요. 현대시는 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고 전문적인 영역에 속합니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아는 만큼 더 많이 보이고 아는 만큼 더 깊은 들을 수 있거든요.
@울랄라 소중한 글과 대답 감사합니다.
울랄라님 댓글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데롯 시네마라는 시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심사평 중에서 이미지의 변주가 능란하다는 점에 공감하며 김서치 시인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 봅니다.
시들이 다 좋군요^^
아주 재능 있는 멋진 친구네요^^ 앞으로 대성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