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피정 순례길 답사-10일째
오늘 제주에 부는 바람은 하늘과 바다, 산과 들을 하나로 만들어 놓으려는듯 설쳐댔습니다. 그 만큼 제주의 바람은 우리의 기억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제주에 부는 바람은 구원과 화해, 용서와 평화를 이야기하기에 너무나 절실하고 엄청난 어둠과 고통, 고독과 절망을 품고 흐느꼈습니다. 오늘 부는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제주에 부는 바람은 응축된 이미지로 다가서는 역사의 메시지였습니다. 제주에 불어오는 바람은 천 년 전 제주에 주둔하던 몽고의 목호들과 맞서 싸운 투혼과 일제에 항거하며 싸웠던 민족혼을 일러줍니다. 그 바람은 또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에 맞섰던 항쟁과 빨갱이로 몰려 총살과 수장으로 몰죽임을 당해야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비문을 읽어내립니다.
비문을 읽는 바람소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언젠가 기필코 극복되어야 하는 것! 이제 제주는 절망에서 희망을, 죽음에서 삶을, 아픔에서 치유를 이식할 생명의 세포를 배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제주여,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며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시는 것같습니다. 저희들도 상처를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루빨리 치유되어 더불어 살 수 있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람아, 불어라. 바람아! 이제 제주에 생명의 새바람을 일으키자" 제주에 부는 봄바람은 부활의 바람이어야 합니다.
제10일(2013. 3. 31)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생각으로 줄곧 걸었습니다. 오늘 순례코스는 한림 성당으로부터 애월 성당을 거쳐 하귀 성당에 이르는 24km의 순례길입니다. 오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녁을 먹은 뒤 야간 답사도 강행해야 했습니다.
제주도 서부지역에서 제주시서부로 들어서는 날입니다. 동명리 문수동을 지나 협재 해변을 거치는 동안 한림해안로를 따라 애월로 접어들었습니다. 한림항 서북쪽 5km 떨어진 곳에 손을 뻗으면 잡힐듯 비양도가 자리 잡았습니다. 어느날 커다란 봉우리가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 비양도는 화산폭발로 바다에 불쑥 솟아오른 섬으로 천연기념물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고려 말 애월은 몽고의 침략을 땅과 바다에서 물리친 항몽의 땅으로 잘 알려진 고장이기도 합니다.
한림 성당의 부활성야미사 애월 해변의 항몽 기념비(오른쪽은 삼별초를 이끈 김통정 장군, 왼쪽은 최영 장군) 애월 해변도로에서 바라다본 아름다운 제주 바다
애월 성당으로부터 하귀 성당에 이르는 해안도로 바깥으로는 망망대해였습니다. 애월항 앞바다에는 오늘도 지난 역사를 말해주듯 짙푸른 바다가 일렁거렸습니다. 제주 애월은 삼별초가 대몽 항전의 최후를 맞은 곳으로 기념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1271년 고려를 침공한 몽골에 대항하던 삼별초는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잔존세력이 진도를 거쳐 탐라로 거점을 옮긴 뒤 성을 쌓고 항전을 계속했던 곳입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원종 14년(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마지막 최후를 맞았던 격전지이기도 합니다. 애월항을 거쳐 항몽유적지인 항파두리로 가는 동안 요트가 떠있는 바다는 옛 일을 잊은 채 지중해의 어느 해안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 푸르렀습니다. 다음에 올 순례단의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애월 성당에 들렀습니다.
때마침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마치고 나오신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이 저희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던 중 흔쾌히 애월 성당의 유아실을 숙소로 사용하도록 배려해주셨고 저희들의 제주 시내 성당순례를 위한 진로를 소상하게 안내해 주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순간 고마움과 함께 크나큰 도움의 은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귀 성당 전경 하귀 성당 성전 입구의 꽃밭에서 자라는 한라봉 왕벚꽃이 만발한 신제주 성당 제주는 눈길 가는 곳마다 만발한 유채꽃
온몸에 햇살을 받으며 오후 2시가 넘어 하귀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가 끝난 터라 성당은 텅 비어 휑한 모습이 저희들에게는 쓸쓸하고 을신년스럽게까지 느껴졌습니다. 성전 앞 화단에는 한라봉이 주렁주렁 달린 감귤나무가 홀로 섰고 막 피기 시작한 탐스런 튤립이 방문객을 맞았습니다.
벚꽃과 유채꽃이 조화로운 제주에는 왕벗꽃 축제가 열리고 거리에는 '제65주년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를 알리는 깃발이 거리의 전신주에서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제주를 답사하는 동안 어디를 가나 4.3사건과 만났습니다. 이윽고 저는 4.3사건을 모르고서는 제주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봉개동 언덕 위의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역사는 들을 귀로 들어야 하는가 봅니다.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과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어 2000년 1월 12일에 공포되었습니다. 특별법'에서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깃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한편 제주특별자치도 4. 3 사업소에서 발행한 ‘평화의 바람’ 안내서에는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 15일 정부가 공식 보고서로 확정한 '제주 4.3사건의 진상'에 따르면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3.1절기념 제주도대회 때 경찰의 발포와 이듬해 4월 3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노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로부터 6.25 를 거치는 동안 350여 명의 무장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무고한 양민 25,000 명~30,000명을 무참히 학살한 것으로 중대한 인권유리놔 과오를 지적했습니다. 특히 4.3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된 희ㅐㅇ자 15,095명 가운데 어린이와 노인, 여성 등 노약자가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밝혔습니다.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차이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지켜본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항의하며 경찰서까지 뒤쫒아가게 된다. 경찰을 이를 보고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6명 피살, 6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학교와 행정기관이 파업에 참여하여 검거선풍이 거세게 몰아치기시작합니다.
그 이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김달삼 등 350명이 무장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경찰지서를 일제히 급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극우단체 회원들이 희생되고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이 유혈사태로 발전하였습니다. 공격한 무장봉기 이후 한라산의 금조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어진 해방정국의 불신과 혼란 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해서 일어났던 제주 4.3 사건을 두고 아직껏 한 쪽에서는 미군정 당시의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 극우반공단체들이 구국일념으로 빨갱이를 토벌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민중항쟁이라는 주장으로 맞서왔습니다. 그것도 4.19혁명의 공간에서 4.3에 대한 인식이 폭동과 반란에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된 사건'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남로당 무장대 토벌에 나선 군에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오가는 자는 폭도로 간주 총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4.3 사건은 350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해서 국가적 폭력이 무고한 제주도민 열명 중 한 명을 사살하가나 수장하고 마을 전체를 통채로 불태워버린 역사 이래 최악의 인간사냥이었습니다.
4.3사태은 제주의 과거가 아니고 현주소입니다. 4.3은 치유되지 않은 역사의 상처이자 끝나지 않은 세월입니다. 못 다한 이야기로 남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제주 4.3사건은 과거의 역사로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진행 중인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올해도 4월을 앞두고 제주에 불어오는 바람은 슬픈 봄을 노래합니다.
제주4.3 평화공원에는 위령탑과 위령제단, 봉안관과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행방불명인 표석이 세워졌습니다. 봉안관에는 14,032명의 희생자 중 13,903위의 위패가 모셔졌고 3,692명에 이르는 행방불명자의 표지석이 보는 이에게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특히 공원에 설치된 조각작품 '비설'은 오늘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 위에서 도망가는 어머니와 두 살짜리 아이가 총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지난날 베드로 대성전에서 보았던 '피에타'상의 비통함과 나가사끼에 원폭이 투하된 거리에서 어린 자식을 감싸안은 모정의 절규가 옴몸을 휩싸고 돕니다.
자유당 독재정권이 이곳 제주에서 좌익세력의 토벌을 빌미로 예비검속과 집단학살로 반대파와 양민을 대량 학살한 지 6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뒤 특별법이 제정되고도 오늘에 이르도록 '사건', '사태', '항쟁', '민란' 심지어'학살' '죽음'이라는 이름 하나 제대로 붙이지 못한 채 알몸의 '4.3'을 용어로 쓰고 있는 현실에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저는 제주 순례답사를 계기로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 선명히 살아 있는 제주 4.3항쟁을 뒤늦게서야 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4.3항쟁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제주도와 제주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냉전체제의 확산과 독재정권의 발흥 이후 오늘날까지도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적 슬로건에 화해와 통합, 그리고 평화를 들먹이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 제물로 삼아야 했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주의 순례길은 항쟁과 민란, 올레길과 유배길, 죽음과 생명에 이르는 길이 겹쳐 우리의 슬픈 과거와 고달픈 현재, 그리고 바람 부는 언덕 위에 한 그루의 폭낭을 심게 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제주 순례길은 새로운 변화를 위한 회개와 묵상의 길이어야 했습니다.
봉개동 언덕애 세워진 제주 4.3 평화 기념관 수많은 행방불명자가 잠든 봉개동 언덕 위의 4.3 추모공원
제주에는 바람이 거셌습니다. 어디선가 떼까마귀가 휘젖고 날아오르려나 봅니다. 그 바람은 한라산 계곡에서 불어오는 4월의 칼바람입니다. 한라산에는 비설을 기억하는 잔설이 있어 제주의 4월은 춥습니다. 만발한 유채꽃과 벚꽃으로 뒤덮인 제주에는 꽃길과 올레길, 유배길과 순례길이 오버랩되면서 비장한 아름다움을 펼칩니다.
길을 걷다보면 제주는 천연기념물과 박물관의 천국이었습니다.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과 모슬포 앞바다의 마라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인 섬이 많고 제주에는 40가지가 넘는 천연기념물이 있습니다. 또한 제주국립박물관을 비롯해서 해녀박물관, 돌문화박물관, 민속박물관, 영화박물관, 닥종이인형박물관, 자동차박물관, 초클릿박물관, 야생화박물관, 인체과학박물관 '몸' 등 40여 곳에 공원과 미술관, 겔러리 등 20여 곳이 넘었습니다.
피정 순례와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자연, 역사, 민속, 언어,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의 폭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제주에 미쳐 제주를 죽도록 사랑한 나머지 제주의 자연을 기록하다 끝내 제주에 묻힌 사진작가 김용갑이 이승을 떠난 자리에 한라산의 별칭, '두모악'을 딴 갤러리가 방문객을 조용히 맞고 있습니다. 그의 혼은 오늘 제주에 부는 바람이 바다와 오름의 계곡을 날아다니며 거친 풍파가 새긴 고난의 삶과 슬픈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천주교 제주교구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는 ‘부활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탈출입니다.'라는 2013년 부활절 교구장 사목 서한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삶의 가장 큰 기쁨이며 희망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에 계속되는 순례 답사는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길임을 묵상하게 했으며 가장 어렵고 힘든 곳에서 거침없이 '주님의 눈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답사 중반에 쉬는 동안 초등학교 때 꼬치친구 박 베드로에게 어제밤 부활성야미사 때 한림 성당 성가대가 노래한 '알렐루야'를 동영상을 부활축하문자와 함께 보냈더니 그 친구 "미사 중에 눈물이 흘러 애를 먹었다."는 응답을 해왔습니다. 저는 그 친구에게 부활은총을 받았다며 축하해주며 몇 차레 카톡을 더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내일이면 저희들은 열흘 전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감사할 다름입니다. 주님,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애월 성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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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스러운 성지순례기 잘 읽고 갑니다.
참나리님! 거룩한 시간 보내십시오.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손잡으시고 함께 걷는 은총 가득한 순례 답사길 되시길 기도드릴께요..
오드리님! 사랑 넘치는 손길 감사합니다.
막버지 힘이 기진 한가운데 새로운 힘을 얻으셔서 마무리에 기쁨을 뜸북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처음부터~~ 10일 째까지 넘넘 글을 잘 올려 주심에 감사함이 절로절로 입니다. 같이 하고있는 느낌까지 듭니다.
네 분 끝까지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꾸~~우~벅
차사랑! 기도와 사랑, 그리고 함께 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믿고 알찬 마무리 하겠습니다.
선생님! 야간 답사까지 하고 이렇게 글까지 올려주시느라 잠은 언제 주무시는지요?
네 분의 노고에 마음깊이 감사드려요.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엠마오로 가는 순례길 되시길...
그런데요. 답사가 끝나면 저희는 무슨 재미로 살지요?
요즈음 까페에 들어오면 '제주 피정 순례길'이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대가 되었었는데...
청초이님! 제가 젊은 날 가지생활을 했거든요. 그것도 마감시간이 없는 방송기자는 올빼미가 되어야 한답니다.
저희들의 고생이 뒷날 안전한 순례의 기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넉넉히 설레십시오.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순례길 답사부터 열어보게봅니다~
이제 마지막 순례길이시네요.
건강하게 돌아오시길 기도드립니다~
철부지님! 닉네임이 맘에 들어요. 저에게 넘겨주실 수 없을까요? 님의 정성과 마음이 있어서 저희들이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고맙습니다.
피정 순례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부활 축하 드립니다.
명금당님!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부활도 꿈꿔 봅니다.순례가 변화고 부활이 아닐까요?
아픔이 많았던 제주의 지난 일도 소상히 소개해주시니 마음으로 함께했습니다... 힘든 일정동안에 여러가지로 애쓰셨습니다... 건강히 잘 돌아오시길 기도하며 부활의 기쁨으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율리님! 세계 어딘들 아픈 역사가 없는 곳이 있껚습니까만 제주는 민란과 평정이 거듭된 반란의 섬이기도 합니다.
돌로 쌓은 석성이 해안을 따라 120km나 되고 군데군데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올린 연대가 그것을 잘
말해 줍니다. 그런 곳에 피는 목련과 개나리, 벚꽃과 유채꽃이 아름다울수록 아프게 느껴진답니다.
제주는 줄곧 섬이 아니라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주 향토사 쓰고 싶은 충동을 불쑥 느낍니다.
이제 끝나셨네요! 올려주신 사진과 글,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아~ 언제 한번 가보나요!!! 부러워라!!!
영원히 한 페이지로 남을 제주도 순례길을 답사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한한 사랑과 감동을 주신 답사대원님들께 감사 감사드립니다.
정말 수고하셨고 고생하셨습니다.
강엘리님! 감사합니다. 이번 답사기를 토대로 본격적인 순례길을 쓰고 싶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그리움 선생님..
그렇게도 상세하고 정감넘치는 순례여정기 너무 잘 읽었답니다..언젠가 제주서 저도 여정의 일부분이라도 하게되는 은총이 있다면...그리움님을 비롯한 순례단 가족들의 흔적을 느낄것 같습니다..오늘 저도 낮동안 아이들과 함께 신나는 발걸음으로 바람과 꽃향기,.그리고 너무도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또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부활의 기쁨을 네분 순례단님들과 함께나누는 명상에 잠기기도 했지요..한없이 아름다운 우리주님을 찬미합니다..감사드립니다^.^
마리안님!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돈을 써가며 멀리 가는 순례보다는 가족과 더불어 가까운 곳의 성당과 성지를
순례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는 간접순례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경치가 너무 시원합니다.
많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깊이 해야겠읍니다.
글 올려주셔셔 감사합니다.
돌연변이님! 모든 게 아마츄어들의 일입니다. 제주의 자연을, 제주의 신앙을, 제주의 역사를 담아내기가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하려고 애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