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꽃상여 타고 떠나신 어머니!
100수를 누리실줄 알았던 우리 어머니! 이민순 여사!
병석에서 3개월 후, 93세를 일기로 자식들과 이별
류 재 복
지난 3월 5일 오후 2시 30분-. 어머니를 간병중인 형님으로부터 “아무래도 어머니가 운명하실 것 같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빨리 내려오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바로 전날인 4일 아침에 어머니 곁을 떠나면서 “엄니 저 서울 갔다가 다시 또 올께요”라고 대답을 못하시는 어머니의 뺨에 볼을 대고 하직 인사를 드리고 온지 하루만이었다. 순간 필자 역시 웬지 예감이 불길하여 부랴부랴 청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 청주행 버스 안에서 형님으로부터 “어머니께서 방금 운명을 하셨다”는 비보를 결국은 들어야 했다. 오후 4시 30분, 청주 충북대학병원 장례식장 2층의 특1호실에 도착을 하니 형제들이 어머니의 영전을 차리는 준비가 한창이었다. 우선 가까운 지인들에게 어머니의 부고를 알리고 나니 온 몸이 늘어지는 느낌이었고 마음이 허전했다. 이제는 양부모님 두 분 모두가 내 곁을 떠난 것이다.
오후 5시, 어머니의 영전 앞에서 혼백을 모시는 의례식을 가진 후 어머니가 편안히 예쁘게 웃고 계시는 영정 사진이 흰 국화송이로 가득 덮힌채 조문객들을 맞기 시작했다. 필자의 지인으로는 서울에서 강연봉 원장 등 3인이 도착, 1호로 조문을 했다. 강 원장은 2002년 필자의 부친상에도 조문을 온 오래된 지인이다. 이날 저녁 늦게까지는 주로 동생의 지인들이 조문을 왔고 필자와 막내 동생이 밤새 빈소를 지켰다.
6일 오후 1시, 장례식장 1층 참관실 에서 고인이신 어머니 당신이 번식해 놓은 수많은 자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입관식이 진행되었다.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도 깨끗했고 주무시는 듯 평온하셨다. 어머니의 손을 마지막으로 만져보았다. 차디찬 어머니의 손이었다. 어머니의 시신을 입관하기 위해 수습하는 장의지도사의 손 놀림과 정성스런 모습에 감동을 받아 상주로서 금일봉을 내 놓았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끝내는 오열을 했다.
입관식은 1시간 반 동안 진행이 되었는데 이 순간이 어머니의 인자하신 모습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순간 이었다. 그나마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는 불과 5일전이었다. 바로 2월 28일 밤, 11시 어머니 곁에 도착 “어머니! 둘째아들 왔어요!”라고 엎드려 손을 잡자 어머니는 “이 무심한 놈아! 왜 전화도 없었어...”라며 쇳소리가 나는 듯 큰 소리를 내면서 눈을 부릅뜨고 필자를 쳐다 보셨다. 이때 주위에 있던 누님과 형, 동생들 모두가 신기해 하며 놀랬다.
왜냐하면 그날 오후 당신의 시동생이 되는 88세의 숙부님이 서울에서 오셨지만 어머니는 눈도 못 뜨시고 아무런 말도 못하셨는데 당신의 둘째아들인 필자를 보자마자 눈을 뜨시고 소리를 지름은 정말 이상한 일이면서 분명 기적이라고 했다. 그것은 평소에도 필자인 둘째자식 때문에 심고가 많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다. 5형제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가 원래의 큰 형님이 병사하여 둘째가 된 아들로서 4형제 중 필자가 가장 생활이 넉넉지 못하고 평범한 생활을 하지 못했기에 항상 걱정을 많이 하셨다. 때문에 운명의 그 순간까지도 필자인 자식을 잊지 못하신 것 같았다.
입관식 때의 어머니 모습, 너무도 깨끗하고 평온
리무진으로 모신 후 2Km 길, 꽃 상여 태워드려
입관식을 마치고 2층의 빈소로 돌아오자 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갔고 필자를 기다리는 지인들도 여러 팀이 대기 중이었다. 필자의 지인들은 주로 서울에 살고 있기에 서울에서 청주까지 빈소를 찾아옴은 일단은 대단한 성의 있는 조문이기에 그만큼 감사를 드려야 했다. 2011년 9월에 뵙게 돼 지난해 12월까지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함께 고생했던 윤석민 회장(박근혜 대통령의 이종사촌 형부)이 참모들과 함께 직접 빈소를 방문해 주셨고 조화도 보내주셔서 너무도 감사했다.
이외 상록포럼의 조남은 사무총장, YLC 김혜경 이사장, 김광수 회장, 남재학 교수, 심의섭 교수, 김두년 교수, 김학균 교수, 김정식 교수, 오재윤 교수, 황진규 대표, 윤용호 대표, 김종현, 이영란 목사님을 비롯 필자와 인연을 맺고 있는 각계에서 150여명이 넘는 인사들이 직접 조문객으로 빈소 현장을 다녀갔고 인편에 부조금을 보낸 분들도 많았다.
발인을 하루 앞둔 6일 자정 무렵, 한중경제신문 이진태 회장을 끝으로 조문객은 종료가 되면서 총 550여명의 조문객이 어머니의 가시는 길을 애도해 주셨다. 이날, 조문객들은 이구동성으로 어머니에 대한 덕담들을 나누었는데 주로 날짜와 날씨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약 3개월 정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와병중이셨지만 12월 대선과 설 명절을 비켜가셨고 특히 3월 1~3일의 연휴를 묘하게도 참으시고 주중인 화요일, 특히 날씨가 풀리는 경칩일인 5일에 운명을 하신 것을 보면 유달리 자식들을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가시는 순간 빛을 보이신 것 같다. 때문에 거듭 어머니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
특히 어머니 생전에 어머니를 뵙고 어머니와 대면을 하면서 어머니의 품성과 박식하심을 느낀 지인들도 풍성한 화제들을 현장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 그랬다. 학교라곤 초등학교 문턱도 안가셨지만 어머니는 선비집안에서 자란 탓으로 어깨너머 공부를 하셔서 한자를 통달, 신문을 읽으셨고 필자의 어린 시절 때는 필자 친구 어머니들에게는 그들 자식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주시고 답장을 써 주시고 글을 가르치신 어머니였다.
7일 아침 8시, 발인식을 마치고 어머니는 리무진에 오르신 후 장지인 고향 가중리 선영으로 향했다. 날씨는 흐렸고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었지만 내심 비만은 내리지 말 것을 기원했다. 필자의 선대조 조상님들을 합동으로 모셔놓은 선영 장지 2Km를 남겨둔 장소에서 어머니는 꽃상여로 옮겨 타셨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 그리고 또 꽃 속에 묻혀 수많은 조문객들을 미소로 맞으신 어머니였기에 마지막 가는 길까지 꽃상여에 태워 드리려고 자식들이 미리 준비를 한 것이다.
비 맞으며 가신 꽃상여 길, 하관때는 햇빛 보시며 영면
49祭까지 불자로서 다니신 대각사 靈駕殿에 影幀안치
그런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가시는 길을 슬퍼하는 하늘의 눈물이요 시샘의 바람인 모양이었다. 구성진 요령잡이의 장송곡에 맞춰 상여는 장지를 향해 한발 한발 움직였다. 상주인 필자도 그 꽃상여를 따르면서 어머니를 애도해야 했지만 어머니의 가시는 길을 기록해야 했기에 디카를 들고 앞 뒤로 오가며 순간 순간을 포착했다. 이동중인 상여를 찍으려니 핀트가 잘 맞지 않았지만 어쨌든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꽃상여가 장지에 도착하여 하관식을 하려는 순간 비는 멎고 해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고 훈풍이 불어왔다. 이는 분명한 신통의 조화였다. 2002년에 먼저 떠나신 아버지의 묘 바로 옆에 모셔지는 어머니를 반기는 아버지의 도술인 듯 싶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43년간 불도의 길을 걷다가 떠나신 분으로 분명 자식들이 복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날 현장에서 묘지 작업을 지휘하던 지관선생은 “아버지가 계신 곳 보다도 더 좋은 곳이고 또 흙이 너무도 좋아서 분명 자손들이 발복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곧이어 어머니는 절차에 따라 탈관을 하신 후 서서히 땅속으로 들어가셨고 자손들은 모두가 손으로 흙을 던져 드렸다. 필자 역시 “치토요!” 소리치며 흙을 어머니에게 뿌렸고 어머니의 모습이 완전히 흙속으로 사라진 순간, 필자는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통곡을 했다. “아! 엄니! 엄니! 우리 엄니! 부디 편안히 계십시오 편안히.....아! 엄니....”
잠시 후, 묘지 작업이 끝나 부모님 두 분에게 제를 올렸다. 미리 준비를 한 탓으로 상석까지 바쳐 드렸다. <文化柳公諱承烈 配韓山李氏敏順 之墓>라는 글자가 각인 되었고 옆으로는 당신이 번식해 놓은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 상석을 보니 분명 어머니는 고인이셨다. 갓 시집와서 젓을 먹였다는 시동생도 참석을 해서 눈물을 흘렸고 모든 자손들이 엎드려 절했다.
3월 9일 아침 10시_. 날씨는 완전 봄 날 이었다. 어머니에게 삼우제를 드리기 위해 가중리 선영으로 형제들이 다시 모였다. 혼백을 묘지 옆에 묻고 정성 드려 제를 드렸다.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해후를 하신 듯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사지낸 제물을 주변에 고시레 한후 어머니 영정을 모시고 어머니가 다니셨던 ‘大覺寺’ 절로 향했다. 49제를 치루는 4월 22일까지는 절에서 모시기로 했기에....
잠시 후, 대각사에 도착, 빈소까지 오셔서 독경을 해주신 스님을 뵙자 스님은 “고인께서는 이미 천상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고인께서는 평소 이곳 법당에서의 행사시에도 모범과 예의를 준수하신 노보살님 이셨다”면서 칭송을 해 주셨다. 8각으로 된 둥근 법당 영가전에 어머니의 영정은 모셔졌고 이곳에서 어머니는 매주월요일에 여섯차례의 제를 받으시고 일곱차례의 제를 받는 7주차인 4월 22일에 49제 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엄니! 이제는 매일아침 전화를 드려도 받지를 않으시겠지요? 엄니! 우리 엄니! 부디 왕생극락하시고 편안히 저승에서 아버지와 두 분 해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법당을 나와야 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