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면 장림역전 토지경작에 관한 민원서류
1901년 음2월 24일에 일어난 집단민원 사항으로 현 대강면, 직티, 괴평, 두음, 당동 4개리에서 역전을 운영하기 위한 역둔토의 경작에 관한 사건으로 당시 먹고 살기가 제일이던 시대 큰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원문을 현대문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편자자주)
광무 5년(1901년) 2월 24일
보고 제 1호
단양군 장림역전 토지가 있는 직티, 괴평, 두음, 당동의 주민들이 올린 소장을 접수하고 내용을 열어본즉 이들이 소재하는 마을이 장림과 가까워서 약간의 소작농토가 있는바 거의가 역전토지여서 적게는 3∼4두락(마지기) 크게는 5∼6두락씩 경작하며 살아가고 있고 사음에게 위임한 바에 따라 도지를 (토지사용료)내고 세금을 내는데 전부터 경작해 오면서 이미 풍속이 만들어져 오던 중 금년 이 도지를 받음 다음 고루 분배하여 조그마치도 민원이 없이 지내오더니 뜻밖에 장림사는 황창동, 강명삼, 박윤실, 김태성 등의 무리가 금년치 도세가 작년에 비하여 더 늘었으므로 마땅히 상경하여 세금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매 두락에 1전씩 현금을 받아 들여갔는데
그 후 다시 내려와서 하는 말이 장림역토는 내장원에서 도지 바치는 두락수에 따라서 매두락에 1전씩 받아들이고 있는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동은 받아들이는데 따르지 않고 불응한즉 위4명이 우리들이 경작하는(소작) 전답을 몰수하고 매두락에 1년씩 바치는 주민에게 이작하게 하여 혹 100두락 혹 8∼90두락씩 나누어 새로이 정해주고 있어서 바야흐로 억울하여 눈물로 세월 보내고 있던 차에
"그 땅이 있는 마을에서 각각 골고루 나누어 경작하라는 령지가 내려와서 사동사람에게 가져가서 보여주니 하는 말이 내장원의 훈령이 있는데 봉세관의 령지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며 조금도 꺼리는 바 없이 그대로 이작하게 하니 어찌 이와 같이 원통한 무리를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엄중한 말씀으로 조칙하시와 여기 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뿔뿔이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하여 이를 급히 조사하니
본관이 비록 장계는 올리지 못한다 하오나 직원이 세금 바치는 일에 있는 만큼 그 소임이 가볍지 않고 지중한 탓으로 본원의 명령을 받아 몸소 국가 회계에 손실을 끼치지 않도록 힘쓰고 거리낌 없는 무리들이 경향각지에 출몰하여 본원에 완문을 보내고자 도모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거두어들이고 전토를 빼앗아 경작하려고 하니 본원의 사무체계가 허물어지고 손상 받고 주민의 원성과 불만 어찌 이같이 많을 수 있습니까? 비단 이들 백성들의 소장만이 아니 오라 가서 탐문탐사 해본즉 저들 백성의 경토에서 거두어들인 일을 질질 끌고 내버려두면 안되고 이들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돈을 빼앗아 먼저 내 주시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받아들인 것이 780여양에 이르도록 많은 돈이오니 본원 완문 한번 내는 것이 끝내 온갖 백폐가 모두 생기게 되는지라 마땅히 즉각 환수해야 하오나 오직 처분을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려있으며 위의 황창돈, 강명삼, 박윤실, 김태성 등 네 사람은 또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본통 재판소에 훈령을 발송하여 법에 준하여 엄중히 처벌하게 하고 백성에게 거두어들인 780여양은 즉각 환원하시어 민심을 선무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이에 보고하오니 조사하시고 조회하시어 특별하신 판단과 처분 있으시기를 복망합니다."
광무5년 2월 24일
충청북도 봉세관 홍재익
내장원경 귀하
과연 소장의 내용과 같다면 황창돈 등의 소위가 지극히 통탄스럽고 해괴하니 엄중조사하여 바로 돌려놓아서 국가의 과세를 완전하게 하고 소위 거두어들인 돈은 아울러 돌려주고 이유 없이 이작시킨 모든 경작지는 전예에 따라서 경작토록 하여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함이다. (3월 2일)
편자주 : 각사 등록은 조선왕조시대의 중앙과 지방의 공적기관의 기록으로 조선왕조의 정부기구는 중에는 의정부아래 도정을 관장하는 이, 호, 예, 병, 형, 공소의 6조를 근간으로 하여 여러 위문이 설치되고 지방은 8도 감영아래 부, 목, 군, 현등의 관위와 병영, 수영이 있었다. 각사란 이런 기관의 총칭이다. 객사 등록에는 개략, 간첩, 등록, 첩보, 관록, 준공안, 보취, 패첩, 등래, 래거안, 장록, 문첨, 진본, 밀개, 기록, 일기, 별단, 일조, 군시안, 항안등 다양한 문서가 있었다.
맷돌로 맺어진 인연
임진왜란 와중에 양반 집안과 천민 집안들이 죽령을 넘어서 북으로 또는 십승지를 찾아서 많은 사람이 단양 땅에 유입되었다. 또는 십승지를 찾아서 많은 사람이 단양 땅에 남아 있었는데 부모님들은 병환과 여독으로 다 돌아가시고 젊은 청춘남녀가 가족도 없이 따로 집을 마련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젊은 남녀이기에 결합은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구실이 없어서 서로가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노승이 나타나 집 앞을 지나 가다가 냉수 한 그릇을 청하여 먹고 난 후 "부처님 말씀이 지나 가다가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 했거늘 냉수 한 그릇의 보시를 받았으니 내 좋은 일 하나 하고 가겠소" 하고서는 "뒷산이 보통이 아니요(두악산) 두 사람이 결혼만 하면 틀림없이 아들을 낳을 것이매 아들은 반드시 두악산 남쪽 정기를 받아서 장군이 될 것이다" 하고는 사라졌다.
두 남녀는 이렇게 까지 혼인 이야기가 진전되고 둘 다 혼기를 놓쳤지만 우리가 묘안을 내서 결합할 명분을 찾아보자고 상의하여 얻은 결론이 남자는 맷돌의 아래짝을 여자는 맷돌의 윗맷돌로 가정하고 맷돌이 합치면 부부가 되어 같이 살고 흩어지면 서로가 한 사람은 죽령을 넘고 한사람은 한강을 건너가기로 약속을 하고서 다음날 여자는 맷돌을 이고 남자는 맷돌을 지고서 두악산에 올라가 다시 한번 서로가 한 이야기를 맷돌을 굴리기 전에 이것이 합치면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알고 결혼하기로 두악산 신께 약속 삼배한 후 등을 돌리고 맷돌을 동시에 굴리고서는 내려오면서 맷돌이 합치면 부부요, 안 합치면 남남으로 멀리 떨어져 살기로 재 결단을 하고서 내려와 개울가에서 젖은 땀을 씻고 맷돌은 사방으로 흩어져 찾아보니 맷돌이 합해져 있는 것을 두 사람이 확인하고 결혼을 하여 인연으로 되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맷돌로 맺어진 인연이라 하여 후손들이 단양 땅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상원사 동종도 울고넘는 죽령고개
죽령은 신라 아달왕 5년(158년) 죽죽에 의하여 개통된 이래 숱한 사연을 남기며 1840여년 간을 말없이 버티고 단양과 희로애락을 함께하여 오고 있다.
이 고개는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의 서쪽과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한강을 장악하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개통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건국이념인 유교사상의 시원지 영남지방의 양반과 생원, 진사대감의 행차 길이었고 영남에서 서울로 공물과 진상품을 수송하는 통로였다. 또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조령을 넘으면 관직의 명이 길지 않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여 이화령과 죽령을 많이 넘었다하며 죽령도 대나무같이 미끄러져 과거급제가 어렵다는 설이 있으나 대쪽같이 곧은 절개와 신의를 생각하며 많이 넘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세조 때에 안동도호부 남문루에 있던 동종(3천3백근)이 오대산의 상원사로 옮겨가기 위해 죽령을 넘을 당시 눈물겨운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동종은 경주의 에밀레종보다 100여년 앞서 주조된 것이라 하며 금.은.동.주석을 녹여만든 종으로 높이 1.4M, 직경 1.2M로 용신을 틀로 하여 사방을 구분할 수 있는 비천선녀무늬가 있고 사방에 각각 가로 세로 3개씩 불교에서 쓰는 3자 삼삼으로 배열된 젖꼭지 36개가 돌출하여 종의 청아한 울림을 떨리게 잡도록 함으로서 은은하고 끊어질 듯 하면서도 백리까지 울려 퍼졌다한다
원래 절의 범종이었는데 조선 초기 억불정책으로 절이 쇠퇴하자 안동도호부의 시간을 알리는 관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한다. 그러던중 세조가 등극한 뒤 12년후인 1466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위의 상원사를 확장하고 임금의 원당사찰로 만들면서 전국에서 가장 소리가 좋은 종을 찾기 위해 상원사 운종도감의 직책을 주어 전국을 수소문 하던 중 선택되었다 한다. 3천3백근의 종을 나무수레에 싣고 500여명의 호송원과 100여필의 말이 끌어 상원사로 옮기던 중 죽령고개를 10여 미터 남겨두고 종이 꼼짝하지 않게 되었다.
죽령고개를 넘느라 힘이 빠져서 그렇겠지 하였으나 5일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아 묘책이 없었다. 운종도감은 묘안을 생각하던 중 100살도 못사는 사람도 고향 떠나기를 아쉬워하는 데 하물며 800살이 넘어 숱한 애환을 지닌 범종이 죽령만 넘으면 다시는 못 볼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36개의 젖꼭지 중 한 개를 잘라서 고향으로 보내 안동 남문루 밑에 묻고 정성껏 제를 올린 다음 죽령에 돌아와서 "이제는 길을 떠나시죠."하며 종을 당기니 그제서야 움직여 단양을 거쳐 제천, 원주, 진부령을 넘어 상원사에 안치되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죽령의 고릴라 인간
예전에 죽령에 고릴라와 비슷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말은 하지 못하나 사람이 말을 하면은 들을 줄은 알았으며 사람을 괴롭히거나 놀래는 일은 없었다 한다. 가을에 감자를 삶아서 저녁에 먹고 있다니까 사람과 같은 고릴라가 와서(덩치가 사람보다 아주 컸음) 마당에 서 있기에 먹던 감자를 다 주니까 마당에서 다 먹고는 그냥 나갔다. 며칠 있다가 보니까 산 짐승을 몇 마리 가져 왔다.
그때마다 집에서는 이상하게 생긴 짐승에게 감자를 주면은 늘 산 짐승을 가져다 놓기를 4∼5년간 계속하였다 한다. 이 짐승은 꼭 가을에만 몇 번 찾아왔고 두해를 오지 아니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이 칠칠바위 꼭대기에 뼈가 있는데 두개골이 크고 뼈가 굵고 긴 것이 그때의 짐승 같다고 하였으며 이 이야기는 풍기에서 100세 이상 된 사람(1900년대 초)은 다 안다는 사실이라 하며...
그때에 통나무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를 깎지 아니하고 살았는데 지붕은 칡넝쿨로 엮었고 통나무를 베어서 투방집을 지었는데 틈 사이에 흙을 절대 바르지 아니하고 살았다한다. 이유인즉 귀양살이하는 주제에 절대로 흙을 써서도 안되고 불을 피워도 안 된다면서 살았는데 귀양온 사람이 아마도 정승이며 정승이 손수 지어서 살았는데 마을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 주어도 절대로 먹지 아니했고 풀과 나무열매 물만 먹고살았다 하며 자식은 글도 못 배우고 살았는데 왜 글을 안 가르쳐 주느냐 하니까 글 배우면 늙어서 나같이 될까봐 농사짓는 일만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하며 살았다.
죽령 귀양온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살았는데 고릴라 인간도 신체조건으로 보아 장군으로 있던 사람이 귀양와서 인간세상과 대화를 하지 아니하였는지 일부러 말을 안 했는지 몰라도 부르기를 고릴라라고 했다고 한다.
죽령 산신당
대강면 용부원리 사람들은 아직도 죽령산신당을 극진히 모시고 있고 생활화 되어있다. 그 이유는 일본징용 가거나 대동아 전쟁, 6. 25사변때 꼭 군에 입대할 때는 전 가족이 와서 참배하고 군에 입대하여 여태까지 한사람도 마을사람이 전사하거나 다친 사람이 없다고 황외용(57)씨가 이야기하고 김병환(67)씨는 여기서 나서 컸고 나도 군인을 갔다 왔지만 전혀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은 다자구 할머니가 마을을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병환씨가 27살 때(40년전), "큰 산불이 일어났지요. 그때에 산이 다 타버렸지요. 불길이 얼마나 센지 마을이 다 타는 줄 알았지요. 그때 이장님이 급한 나머지 인력으로 불을 끄는 것보다도 다자구 할머니의 영험을 빌려보자구 술 한 병을 들고서 산신당으로 달려가 미련한 인간이 제 할 구실을 못하고 불을 내어서 큰일 났으니 제발 불길을 잡아주시고 우리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산신당도 남게 해 달라고 빌었지요." 그랬더니 불길이 비켜가 도로에 닿아서 꺼졌다한다. 현대의 과학으로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른 곳은 다 탔어도 산신당 근처는 멀쩡하여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영험하다는 것을 입증하였다고 황외용(57)씨가 강변하고 김성락(73)씨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김성락(73)씨는 "옛날에는 제사를 지내자면 햇곡을 하는 것이 예법이거든요." 제삿날을 받으면 정성 드려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 지내는 집은 부정한 자 출입을 삼가고 동리 사람들도 부정한 사람은 가지 아니했다. "미처 여물지 아니한 벼나 조를 털어서 말리려고 집에서 말리면 닭도 쫓아야 하고 개가 못 밟게 하자면 사람이 있어야 되니까 죽령산신당 마당에 널어서 말리는데 참새들이 날아와서 제사지낼 때 쓰려고 널어 말리는 곡식을 먹고 참새가 수없이 죽었다우. 이 말은 우리 선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야." 이 말을 용부원3리 사람은 모두가 들은 바였다고 한다. 다른 산신각 산신당은 호랑이 남자가 신이지만 이곳은 여신인 다자구 할머니라서 남자보다 포용력이 많고 은혜를 주는 도가 크다고 한다.
죽령고개는 예로부터 서울과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였고 관방이었다. 이 고갯길은 험하고도 길었고 소백산을 넘는지라 수목이 꽉차있어 낮에도 힘든 길 아흔 아홉 구비 내리막길 30리 오르막길 30리였다. 처음에는 밤에만 나타나던 도둑이 낮에도 나타나 행인을 괴롭히고 관가의 행차도 어렵게 하여 관가의 군졸을 풀어 도둑을 잡으려했으나 도둑들이 잘 익힌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산 도둑 잡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단양군에서 골치를 앓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타나 도둑 잡기를 자청하여 연유를 알아본 즉 도둑에게 재산을 다 빼앗겨 못살게 되었다 하며 도둑 잡는데 묘안을 이야기한다.
할머니가 도둑 소굴에 들어가서 도둑들이 모두 자고 있으면 "다자구야" 도둑이 안자고 있으면 "들(덜)자구야"를 암호로 하여 관군과 약속하고 관군은 미리 매복하고 할머니가 도둑소굴에 들어가서 매일 "다자구야, 들자구야"를 노래 삼아 부른다. 보름째 되던 날 도둑두목의 생일날이라 모두가 밀주에 취하여 다자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와서 늘 부르던 "다자구야, 다자구야"를 외치자 관군들이 도둑 떼를 일망타진했다.
단양군의 보고에 의하여 정부에서 사당을 짓도록 명하여 서울에서 연을 날려 떨어진 곳이 현재 대강면 당동리였는데 소, 말을 먹이던 곳이라 불결하여 다음 연을 띄워서 떨어진 곳이 현 위치이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곳 사당에 위패를 모시고 정부에서 춘추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단양, 영춘, 풍기, 청풍, 제천 군수가 제사를 지내서 모두가 국사당이라고 마을사람들은 부르고 있고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 또는 죽령 산신당이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점점 작아져서 정부→군→면→마을→반으로 적어지다가 단양문화원에서 부활하여 면단위 행사로 커지고 있다.
죽령산신당 자리를 잡을 때에 서울에서 연을 띄워서 떨어진 자리가 당동리로서 산신자리였는데 연이 앉은자리가 당시는 개똥밭이라서 주민들과 부임관이 보고서 부적당하다고 상소하여 다시 띄워서 연이 앉은자리가 현 위치이다. 죽령산신당에 제기나, 제물을 가정집으로 가져간 사람은 망하거나 벌을 받아서 죽은 자가 있다.
(이화종 대강용부원거주, 심상학 충주거주)
원통암의 명명유래
이곳 원통암은 단양은 석회암지대이나 이곳은 화강암지역이다. 산봉우리가 기기묘묘하며 바위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기이한 형상이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기가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하여 원통암이라고 한다.
많은 승려들이 득도하여 사리봉안 된 곳이었던 신보도사의 전설과 사리 보관소가 현존한다. 원통암이 창건되었을 때 층암절벽 사이에서 샘이 흘러 나왔다. 조그맣게 버러진 바위틈을 나오는 샘물의 양이 적어서 한참을 받아야 먹을 만한 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샘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오는 것이었다. 암자 스님들이 술을 받아 두었다가 귀한 신도나 손님이 오면 차 대신 대접하기도 하고 불가의 법주로 쓰기도 했다.
고을 태수가 맛좋은 술이 샘솟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암자로 행차했다. 술이 나온다는 샘 앞에서 술맛을 본 태수는 욕심이 분출하여 큰 그릇에 술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조그만 틈사이로 솟아나는 샘 술을 받자니 답답하고 지루하여 태수는 콸콸 나올 수 있도록 입구를 크게 팠더니 역시 술이 콸콸 나왔다. 마셔보니 술이 아니고 물이 나오게 되자 이곳 주민들은 원통한 일이라 하여 이곳을 원통골이라 부른다.
또 원통암 중수기에는 대흥사 중에 으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대흥사 말사 중 원통암이 가장 좋은 곳이다. 절은 어느 때 지었는지 알 수 없으니 춘택공의 나이 80세가 되는 해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의명화상이 처음에 지었다. (강희32년 1693년)
1787년 불교 억압 때(정미년) 절이 폐허되었고 1824(순조 24년) 주지 대연 대사가 좋은 절이 퇴락됨을 안타깝게 여겨 중건했고 이 때 재정은 춘택공이 총지휘는 달선 스님이 맡아 4년 만에 완공했고 송암대사를 초빙 준공식을 가졌을 때 상기스님 주시 덕행을 칭송 받았으며 이 절에 수도하는 자는 극락으로 가는 길에 심신을 다할 것이며 깨끗한 연꽃을 꽃심이 있듯이 깨끗한 마음으로 공부하면 그 인록공덕으로 꽃이 피면 열매를 맺듯이 부처님의 무량한 법계가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이 솟아나는 환하게 나타나리다.
그래서 이곳이 "여러 암자 중에서 제일가는 곳으로 원통암자를 꼽는 것이다"라고 중수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500나한
대강면 황정리 대흥사는 202칸의 큰절이었다. 일본군과 의병이 교전하는 과정에서 애매하게 대흥사가 불타고 말았다. 승려가 100여명이 있었고, 부처님의 불제자가 500나한이 모셔진 대불당으로 현재의 부지도 6,000여평이 넘고 사지 근처에 많은 기와 조각과 주초석, 석축이 눈에 띄이는 곳이다.
이 절의 현존하는 암자로 원통암과 청련암이 있다. 또 여지도서, 호서읍지에 기록이 있는 사지로 많은 전설과 설화가 수 없이 전해오는 곳이다. 대흥사가 의병과 교전으로 인하여 전소되자 이 소식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유점사 점심식사 시간에 노승이 나타나 "충청도 단양 대흥사에서 왔는데 화로 절이 전부 불타고 오백라한 상만이 남았다. 나한상을 옮겨야 하겠으니 맞을 준비를 지체 없이 하라" 하여 주지스님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하니 스님은 사라지고 남쪽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나한 수백 명이 내려오고 있음을 주지스님이 보고 종을 쳐서 맞을 준비를 마치고서 금강산 8만 구암자에서 사람을 모았으니 497명밖에 아니 되었다.
주지스님 인솔로 8일만에 단양 대흥사에 도착하여 보니 202칸 기와집은 폐허되고 나한전도 파괴되고 500나한이 흙속에 있어 손질하여 세우고 497명에게 한 분씩 등에 지게 하니 3구가 남아 다시 올 수는 없어 주지스님이 힘이 센 3명에게 두 분의 나한상을 지게하고 주지스님의 구명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치니 천지가 진동했다.
10 일만에 유점사에 도착하여 라한전에 모시고 예불을 마쳤다. 이튿날 나한전에 가보니 3구가 보이지 않아 모두 모여 확인하였으나 497구 밖에 없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공중에서 큰소리로 "대중들이여 들으라. 500나한 중 어느 한 분도 득도를 못한 분이 있겠는가! 그러하다면 어떠한 분은 한사람씩 편안하게 등에 업혀 오는데 나는 두 분씩 한사람 등에 업혀오니 도중에서 불편함이 말이 아니었느니라. 이것은 대중들의 무성의로 이같은 꼴이 된 셈이요. 그래서 나는 이러한 불편스러운 일을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유점사를 떠났소. 그러니 더 이상 찾지 말고 그대로 두시오"한다. 모여 있던 주지스님이하 여러 스님이 "황공하옵니다."를 외치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사죄하였으나 세분의 나한은 영영 금강산 유정사로 돌아오지 아니했다 한다.
단 양군 단성면 상방리에서 출생하신 하동규(?∼1965)대선사는 법명이 동산이다. 서울의전 재학 중 세속을 버리고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도에 전념 10년 만에 깨달음이 있어 큰 사찰의 조실에만 모셔져서 계시다가 대한불교 조계종 3대 종정을 역임하시고 부산 범어사에서 대선사로 있었다. 아쉬운 점은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때 단양에서 모셔다 500나한이 497인지를 확인하지 못함이 단양인의 책임이 아니었던가 싶다.
묘적사 폐사와 성지골
여지도서와 호서읍지에 기록되는 오랜 사찰이다. 단양사람이 가마 타고 오고가던 경상도와 통하는 길목이었고 1960년대만 해도 이곳에 부도가 있었다. 부도는 산판 길에 어디론가 실려가고 빈터만 남아있으나 스님의 무사안일과 살생에 대한 참극을 그냥 방치했던 묘적사의 폐사 전설이 전한다.
묘적사는 큰 사찰이었고 옛날 이곳에 경상도와 충청도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한다.
언젠가부터 빈대가 생기기 시작하여 스님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최후로 2,3명의 스님이 남아 기거하였는데 어느 날 스님들이 인근 마을에 공양을 하러 갔다오니 빈대가 갑자기 성하여 법당 요사채에 우글거려 발을 들여놓을 틈이 없어지자 바랑과 장삼을 벗어 마루에 놓고 나뭇단에 불을 붙여 방에 던져서 불을 지르고 스님들도 도망갔다. 건물을 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성지골이란 지명은 사동 이씨 댁 외동아들 성지란 아이가 있었는데 9살 되던 해 겨울밤 호랑이가 성지를 물어가자 이튿날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찾아보았으나 성지골에서 범의 밥이 되었고 신발과 의복이 널려 있었으며 발목뼈만 남아있어 이곳 묘적사골 한 골짜기를 성지의 이름을 따서 성지골이라 부른다.
죽령과 죽지의 탄생설화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 삼한병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술종공이 기병 삼천을 거느리고 삭주도독사로 부임 차 가게 되어 죽령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한 젊은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거사의 용모와 인품에 탄복했으며 거사도 공의 빛나는 위세에 감복하게 된다. 임지에 도착하여 한 달이 지나서 공은 꿈에 죽령의 거사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공의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 공의 부부는 매우 놀라서 거사에게 무슨 변괴가 일어나지나 아니했나 생각하고 사환을 시켜서 거사의 안부를 물어오게 한다. 사환이 돌아와서 거사가 죽은 지가 며칠이 되었다 아뢰자 그 죽은 날이 공이 꿈꾸던 날과 같았다. 공이 말하기를 그가 장차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하면서 다시 사람을 보내어 죽령 북쪽 봉우리 묻고 돌로 미륵1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게 된다.
꿈에서 거사를 본 날부터 공의 부인이 태기가 있어 태어난 아이를 죽지라 부르게 된다. 죽지는 자라서 벼슬길에 나가게 되어 김유신장군의 부장으로서 삼한통일의 대업에 참여하게 되고 진덕·태종·문무·신문의 사대왕조에서 재상에 올라 나라안정에 크게 헌신하게 된다.
이 기술대로라면 거사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 앞에 미륵1구가 있어야 하지만 죽령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다. 물론 오랜 세월 속에서 인멸되어 실전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이 설화는 하나의 사실을 미화시키거나 분식효과를 나타내게 하는 발표의 한 형식이지 기록전체가 객관성 있는 사실적인 묘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류의 설화는 죽령 희방사와 부석사의 창건 설화도 있다.
희방사는 계림호장 유석의 딸과 두운스님, 부석사의 의상스님과 선묘와의 사랑 이야기를 신화적인 베일에 씌워 꾸며 놓았기에 스님들의 구도자적인 인품에 손상을 주는 일없이 승화된 인간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많은 부분에서도 불교의 윤회설과 교화를 위한 은유법이 원용되고 있지만 고대문화의 신화적인 속성을 이해한다면 별 무리 없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죽지랑의 경우, 한 달 전에 죽령에 있었던 거사 술종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양자는 실자만 같지 못하다는 사회적인 제약과 통념이 있었을 것이기에 술종부인의 배를 통해서 얻은 아들임을 강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화랑은 신라의 상류계층의 자제만이 입적할 수 있었으나 양자임을 말할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한편 죽지의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이 확보되었을 때는 그가 정승을 지낸 술종의 아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설화는 더욱 날개를 달고 번져나갔을 것이다.
선덕여왕 6년 서기 637년 우수주를 만들고 군주를 두었으며 경덕왕때(742)와서 이름을 고치어 삭주라 했다고 삼국사기 잡지 제4지리 2조에서 밝히고 있기에 솔종공이 죽령을 넘은 것은 637년 이후 삼한병란이 있은 해였음이 분명해진다.
637년 이후 삼국관계는 다소의 충돌은 있었지만 국가적인 대변란이라고 일컫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아니했다. 이러다가 641년 3월 백제 무왕이 몰하고 태자 의자왕이 즉위하여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하게 되자 이 싸움에서 신라는 김품석, 죽죽외 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전사하게 된다.
다음해 고구려에서는 연계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삼국관계는 지금까지 없었던 긴장 상태가 조성되어 신라는 국제정세의 위급을 깨닫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삼한병란의 시작을 614년으로 보고 있으며 이 해 백제와의 싸움에서 많은 장수를 잃게 된 신라는 군주의 새로운 임명과 이동이 이루어져 김유신은 압량주군주로 가게 되어 술종도 이때 삭주군주로 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술종에 의해 발탁된 죽지는 화랑교육을 받고 8년 뒤인 649년 대장군 김유신, 진춘, 천존등과 함께 도살성(지금의 천안)에서 백제군을 맞아 싸워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의 죽지의 나이를 27세로 보게 되면 술종공이 죽령을 지나가던 해의 죽지의 나이는 19세의 젊은 거사였음이 산출된다.
때문에 죽지는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다만 살아서 술종의 아들이 되어 떠났을 뿐이라 한다.
체보자주 : ① 죽령길의 개설과 죽지랑(대동지기)권5 단양령개로조 죽령 동남 30리 순흥 계통 경상좌도 대로 신라 아달라왕 5년 춘사죽죽 시개비로 교명지령서유 죽죽사 피험차 상유고성유지 신라시 소축.
② 우리고장 전통문화 영주시 영풍군편 죽령재와 죽지랑 아달왕 5년 3월 죽죽이 개설(삼국사기인용) 선덕여왕 11년 642년 대야성 함락 시 전사한 죽죽과 484년 이라는 긴 세월 차이가 있어 동명이인이 분명하다.
수운정 짓고 탄핵당한 영의정 류성용
선 구곡을 명명한 사람은 조선 영조 때 참판을 지낸 경상 오대익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경삼 오대익이 교리 시절에 퇴락된 수운정을 중창하면서 수운정을 중심으로 운선구곡을 명명했다고 1955년에 단양군수를 역임한 김상현의 저서 " 단양팔경" 에 기록되어 있다. 군지에 전하는 현동자 기행문에도 "운암(운선구곡)은 설령(죽령)의 동북방에 있으며 본래는 조가네 땅이다.
유서암정(수운정)이 오래되어 교리 오대익이 중창하고 그곳에 살았다 " 라는 기록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기도 하여 교리를 지낸 오대익의 운선구곡가를 소개 한 글은 다음과 같다.
운선동리유선영 : 운선동 계곡엔 신선이 있을 것만 같구나
단벽삼치옥윤정 : 노을에 젖은 높고 낮은 절벽 , 옥같이 맑은 물이여
욕식주의 행근원 : 신선인 주인을 알고자 하나 간곳을 모르니
어가시청구곡성 : 고기 낚는 촌부의 노래로 운선구곡가라 부르리
[일곡 대은담]
일곡유심불용선 : 일곡은 그윽히 깊으나 배를 탈일 없고
삼시회폭분경천 : 봄 여름 가을마다 폭포 주위엔 꽃으로 붉어지네
산령공누진소식 : 산신령도 참소식이 세상에 전해질까 두려워
장쇄창응거준병 : 높고 푸르던 하늘을 어둠으로 가린다.
[이곡 황정도]
이곡동안두솔봉 : 이곡의 동남쪽엔 도솔봉이 있는데
좌래매일불종용 : 바르게 앉아서 지금까지 모습 하나 흩뜨리지 않네
기년일자황정오 : 황정경을 잘못 외워 적선이 되었는지
관령운산천먼중 : 산과 구름에 묻혀 있구나
[삼곡 수운정]
삼곡파류암사선 : 수운정 굽이의 암벽은 배만 같구나.
애옹정각석하연 : 서애 유성룡의 수운정은 얼마나 오래인가
선인일소운중좌 : 신선은 구름속에 앉아서 미소 짓는데
회수홍진을가린 : 돌아보니 속세는 참으로 불쌍하여라
[사곡 연단굴]
사곡연단개양암 : 사곡은 양쪽의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고
산광운영치염산 : 산 빛과 구름 그림자가 부채살 같아라
선동위보단사열 : 선동이 약을 잘 뎁혔노라고 알리자
소권조사화벽담 : 웃으며 났시줄 겉어 푸른 못을 건넨다.
[오곡 도광벽]
오곡영회원복심 : 오곡은 엉기고 굽어서 근원은 더욱 깊은데
단병족족은운림 : 벼랑 벼랑마다 나무는 구름에 가리운 듯
흉중자유광명사 : 가슴속에 광명마다 나무는 구름에 가리운 듯
휴향공산증도심 : 쉬면서 산을 보니 밝게 깨닫겠네
[육곡 사선대]
육관선정기곡만 : 육곡의사선정은 냇가 바위 위에 지어 놓았네
현문침침주상폐 : 삽작문을 적적하게 낮에도 항상 닫는군
정녕옥자공산향 : 정령 신선이란 메아리 같은가
지시상옹진일한 : 하루하루가 한가로움을 아는 이가 신선이라네
[칠곡 사인암]
칠곡전임칠성탄 : 칠곡 앞에는 칠성여울이 있어
조중불염백회간 : 아침저녁으로 보아도 싫지를 않아
세간시화나능차 : 세상에 그림인들 이보다 나랴
유견담심월색한 : 오로지 물 속의 달빛만 빛나고
[팔곡 선화동]
팔곡도화양안개 : 팔 곡의 냇둑에는 복숭아꽃 흐드러져
무릉어자기시회 : 무릉도원에서 고기 잡은 이는 언제나 돌아올까
삼암지득신선자 : 상·중·하선암은 신선바위라 불리우건만
수견진선입동래 : 무위진인이 이 동네로 들어오는 걸 누가 봤느냐
[구곡 운선동]
구곡산개경광연 : 구곡의 산은 트여 경계가 완연하고
장림역역견청천 : 장림리가 역력하고 맑은 내가 보이는데
단구적시인간세 : 단양도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라
불신인간별유천 : 속세 속의 별천지를 누가 믿으랴
그래서 정감록파들이 단양영춘에 많은 화전을 일구어 먹고살았다는 것이 십승지의 도표에도 나타나지만 쇠말뚝을 많이 박은 것을 보아도 우리지역은 일본사람들이 살기 좋고 인물 많이 나는 길지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채보자주 : 운선구곡은 일면 유곡이라고도 하며 운암구곡이라한다. 이곳을 다녀간 명인은 수없이 많다. 고려, 조선을 통하여 문인이나 묵객이나 권력가치고는 지나가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곳이다. 대강면 현 4개리의 땅이 본래 조가네 땅이였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선생이 선조로부터 하사 받은 호피 한 장을 팔아서 일대를 매립하고 수운정을 지었고 이곳에 와서 심신을 달래고 정책구상을 했었다. 1591년 우의정으로 있을 때 명나라 토벌을 계획하는 내용의 일본의 국서를 받았을 때 이를 묵인하려는 이산해의 주장을 물리치고 명나라에 알려 의혹을 벗었고 1592년 임진왜란 시 도예찰사로 군대를 총괄했고 이순신, 권율을 명장으로 등용시키고 영의정에 올라 왕을 평양으로 모셨고 신집의 탄핵으로 사퇴했다가 평안도 체찰사가 되어 평양의 난을 진압하고 왜군을 파주까지 몰아낸 공로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군사를 총지휘하는 실권자였다.
당시에는 당파싸움으로 일본군 침입의 징조파악을 위해 같던 일본 사신마저도 당리당략에 의하여 진실을 왜곡하던 때이다.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1598년 왜란중 유성용이 이순신을 감싸고 돌았고 일본국서 사건을 공론으로 남인, 북인의 당쟁 중에 당시의 권모술수로 이름난 남이공과 스승 정인홍의 합작품을 문홍도가 서애 류성용의 죄상을 조목조목 들어서 탄해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 중에서 돈을 모두어서 단양의 경치 좋은 땅에 미도(중국 삼국지에서 악역으로 명성을 떨치는 후한의 재상 동탁이가 미땅에다가 궁전같은 별장을 지어 별장 창고에 중국 천하의 금은보화 보물, 술, 각종물건을 다 모았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유명하고 아주 화려한 이름 높은 별장임)같은 별장을 지었으며 향락을 즐기고 있으니 전쟁 중에 영의정이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느냐는 상소로 임진왜란이 끝나기전 사표를 내지 못하고 영의정에서 남인의 우두머리인 서애는 쫓겨나서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한다. 이때 서애는 편지속에서 붉고 푸른 절벽마다 탁핵의 글속에 끌려드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후 오대익 참판이 수운정을 중건하고 살면서 운선구곡의 글로 남기게 되었다. 운선구곡 중 사선대에는 1683년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홍만선(1642∼1715)선생은(조선 현종 7년 1666)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조선 숙종 때에는 단양에 제 82대 군수로 부임하고 상주목사 장악원장(현재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다. 홍만선 군수는 10년 뒤에 다시 사선대에서 내외종간 형제들이 함께 모여서 시를 짓고 즐겼다고 적었다. 사선대 홍만선, 김성조, 이희조, 이해조 등 높은 벼슬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때 지금 없어진 사선대 정자 주춧돌과 나무를 바위에 안치고자 팠던 부분의 윤곽이 지금도 확인됐다.
사곡이란 글자는 수해복구로 묻힌 것을 다시 파도록 했다. 완전한 수해복구가 끝나고 사인암지구 택지정리가 완료되면 다시 사선대가 사선정으로 바뀌어 건립될 날이 올 것이다. 여담이지만 선조대왕이 백사 이항복에게 현 시대의 청백리는 과연 누구일까 했더니 백사는 1번을 서애를 대었다한다. 단양이 경관으로 인하여 영의정이 탄핵당한 땅을 노산 이은상 선생은 시로서 서애의 누명을 벗겨 주었다. 역사는 물 같이 가는 것, 사람은 구름같이 가는 것, 옳은 인 어디계시고 그 이는 누구던고, 수운정 이름 그대로 물과 구름만 남았구나.
어느 때 수운정이 퇴락하여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수운정 터와 절벽에 남아있는 암각자만이 옛 영화를 알림뿐이다. 암각자는 아래와 같다.
수파심불경 : 물결은 먼저 흐르려 다투지 아니하고
의차의구진 : 구름 또한 유유히 흐르는 구나
십승지 중의 하나인 단양
먼저 이심의 십승지에는 첫째 풍기, 예천, 둘째 안동, 화곡 셋째 개령, 용궁, 넷째 가야, 다섯째 단춘(단양 영춘) 여섯째 공주, 마곡, 일곱째 진천, 목천, 여덟째 봉화, 아홉째 운봉, 열째 태백 이라 했다.
다음으로, 정감의 십승지에는
첫째, 풍기 수리바위, 금계 동쪽 골짜기(소백산)
둘째, 화산 소라국 옛터 청양현, 봉화 동쪽(소백산)
셋째, 보은 속리산 증황 일대(소백산)
넷째, 운봉 행춘(남원군 운봉면 양명면 일대)
다섯째, 예천 금당실(소백산)
여섯째, 공주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
일곱째, 영월 정동(연하리쪽)(태백산)
여덟째, 무주 무풍산 북쪽 동방상동
아홉째, 부안 호남밑
열째, 합천 가야산 만수동 등 소백산과 태백산 주변에 7개소가 있다.
"경왈(經曰) 구년지겸(九年之謙) 구곡종삼품(求穀種三豊) 십이년병화(十二年兵火) 구인종어양백(求人種於兩白)"이라고 한 토정가장결의 문구가 떠오른다. 한편, 정감록파들로 산 화전을 일구며 영춘에서 살아가던 사람의 필사본인「동로작기」(별첨자료)에는 첫째 풍기, 둘째 안동, 화곡, 셋째 개령, 용궁, 넷째 가야, 다섯째 단양, 영춘, 여섯째 공주, 정산, 일곱째 진천, 목천, 여덟째 봉화, 아홉째 풍천, 열째 태백으로 되어있어 단양·영춘은 숨은 십승지이기도 하고 나타난 십승지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6. 25때 평안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마을도 있다. 또 금서라고 하는 비결을 간직한 정감록파들이 소백산과 태백산맥의 기슭에 화전민으로 많이 살았다. 만약 1975년도 화전정리 할 때에 정감록파의 책만 태우지 아니하고 모두 두었더라면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금서(비결)나 정감록파의 책을 소지한 전국의 일인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 죄 없는 책과 집을 화전 정리하면서 다 태워버렸을까?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김일성의 하숙집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군사문화의 유행어인 추전전곡·집토전술이 빨리빨리 작용한 것 같다. 단양은 사람살기가 좋아서 인류문화의 발생지가 되었지만 삼국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이루고자 찾아들었고 고려 조선시대에 환상의 지역이였던 같다.
그래서 정감록파들이 단양 영춘에 많은 화전을 일구어 먹고살았다는 것이 십승지의 도표에도 나타나지만 쇠말뚝을 많이 박은 것을 보아도 우리지역은 일본사람들이 살기 좋고 인물 많이 나는 길지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발 견>
1. 단양군 영춘면 상1리 60번지(북벽입구)
갯 수 : 3개
형 태 : 쇠기형
길 이 : 45㎝ 반지름1.7㎝ 길이 45㎝ 반지름1.7㎝ 길이18㎝ 반지름1.7㎝
고 증 : 본 쇠말뚝 지점에서 북쪽으로 한강 남한에 깎아지른 듯한 석벽이 길게 병풍처럼 연림되어 북벽이라는 절경이 있고, 남쪽으로 이 지역의 유림의 본지인 향교 터의 두상 부분에 위치하여 향교 제향 시 본 지점 앞의 장수소의 강물을 제수로 사용하는 등 신성시하고 있는 위치로, 영춘면 상2리 조태원(70세, 전 영춘면장)이 주변산세와 지세로 보아 일제 때 설치된 것이 확실시된다고 설명하고 있음.
<제 보>
1. 단양군 단양읍 심곡리 산 25번지(실금산 팔부능선)
제 보 자 : 단양군 단양읍 심곡리 3반 지명학(남 62세)
제보내역 : 제보자 지명학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단양읍 심곡리 실금산 팔부능선 부근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제보('95. 3. 9)
2. 단양군 매포읍 도곡리 산 17-1번지(새조밭 양지)
제 보 자 : 단양군 매포읍 평동 1리 이상호(남 62세)
제보내역 : 제보자 이상호씨가 20년전 산약초 채취자 산행 중에 쇠말뚝을 보았다고 제보('95. 3. 9)
3. 단양군 매포읍 어의곡리 산 39번지(혈지른등)
제 보 자 : 단양군 매포읍 어의곡리 조철형(남 71세)
제보내역 : 제보자 조철형씨가 예전에 마을 주민들로부터 일제때 매포읍 어의곡리 혈지른등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3)
4. 단양군 매포읍 산 17-8(단풍산)
제 보 자 : 단양군 매포읍 평동리 김은석(남 55세)
제공내역 : 제보자 김은석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일제때 매포읍 평동1리 단풍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2)
5. 단양군 매포읍 우덕1리 산 71번지 구담봉(장군봉)
제 보 자 : 단양군 매포읍 우덕1리 안천수(남 59세)
제보내역 : 제보자 안천수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매포읍 우덕1리 장군봉 정산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0)
6. 단양군 매포읍 삼곡1리 산11번지(철마산)
제 보 자 : 단양군 매포읍 삼곡1리 장재학(남 63세)
제보내역 : 제보자 장재학씨가 25년 전 산약초 채취차 산행 중에 쇠말뚝을 보았다고 제보('95. 3. 15)
7. 단양군 단성면 외중방리 산50번지(사봉, 사인암 방향)
제 보 자 : 단양군 단성면 외중방리 275-1번지 용태선(남 70세)
제보내역 : 제보자 용태선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사봉 정상에서 사인암 방향으로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제보('95. 3. 15)
8. 단양군 대강면 성금리 산17-1(도솔봉)
제 보 자 : 단양군 대강면 성금리 박수동(남 68세)
제보내역 : 제보자 박수동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대강면 성금리 도솔봉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제보 ('95. 3. 10)
9.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 산74-36(마당골 정상)
제 보 자 :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 정관영(남 46세)
제보내역 : 제보자 정관영씨가 선친으로부터 일제때 대강면 올산리 마당골 정상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2. 28)
10 단양군 영춘면 상2리 산31번지(당나무재)
제 보 자 : 단양군 영춘면 상2리 김영구(남 45세)
제보내역 : 제보자 김영구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일제때 영춘면 상2리 당나무제에 수리방 사이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2)
11. 단양군 영춘면 남천2리 산60번지(성골)
제 보 자 : 단양군 영춘면 남천2리 허영식(남 53세)
제보내역 : 제보자 허영식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일제때 영춘면 남천리 절골계곡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2)
12.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산25-1(푸세골 수리방 사이)
제 보 자 :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최재식(남 62세)
제보내역 : 제보자 최재식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일제때 영춘면 용진리 수세골 수리방 사이에 쇠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2)
13.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산82번지(진커리 앞산 정상)
제 보 자 : 단양군 영춘면 용진리 한상봉(남 56세)
제보내역 : 제보자 한상봉씨가 마을 어른들로부터 영춘면 용진리 앞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3)
14. 단양군 영춘면 장발2리 산134-1번지(원장발 옥녀봉)
제 보 자 : 단양군 영춘면 장발2리 이화열(남 47세)
제보내역 : 제보자 이화열씨가 예전에 마을 어른들로부터 영춘면 원장발 옥녀봉 정상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제보('95. 3. 13)
15.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산29번지(말목산)
제 보 자 :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933 풍안순(남 83세)
제보내역 : 제보자 풍안순씨가 마을 어른들로부터 적성면 현곡 말목산 정상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어 제보('95. 3. 13)
16.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산 126번지(투구봉 밑)
제 보 자 :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933 풍안순(남 83세)
제보내역 : 제보자 풍안순씨가 적성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현곡리 말목산 투구봉 밑에 쇠말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제보('95. 3. 15)
17.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산48번지(수리봉 정상)
제 보 자 :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212 정용훈(남 63세)
제보내역 : 전해들은 땔감을 하러 다니면서 직접 확인하였고 일본 사람들이 쇠말뚝이 박았다함.
18.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산3번지(배골)
제 보 자 :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212 정용훈(남 63세)
제보내역 : 산에 나무하러 다니면서 직접 목격하였는데, 일본인이 금수산의 명기를 끊고자 설치하였다 함.
19. 단양군 적성면 파랑리(황세골)
제 보 자 :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212 정용훈(남 63세)
제보내역 : 선친으로부터 일본 사람들이 명기를 끊고자 박았다고 들었고 나무하러 다니면서 목격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