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과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 소설이다.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로버트 조던과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다. 제목은 17세기 영국 성공회 성직자인 존 던(John Donne)신부가 쓴 시의 구절을 인용하였다. 1939년 3월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 1940년에 발표하였다. 1943년에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줄거리
반파시스트 군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로버트 조던은 작전상 중요한 교량을 폭파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파블로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게릴라 부대에 숨어있던 부모를 살해당한 딸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곧, 그는 작전을 추진 중에 적의 작전이 바뀌어 자신의 임무이던 교량의 폭파가 무의미해질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연락이 되지 않아 작전을 중단되지 않았고, 쓸모없는 줄 알면서도 다리를 폭파하였다. 그러나 중상을 입고, 동료를 놓쳐 자신은 죽음에 임하게 된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 유명한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의 저자다. 영문학을 넘어 세계 문학 역사상 허무주의하면 빠질 수 없는 작가이기도 하다.
같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와 함께 미국이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하는 작가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등장 이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로, 유럽은 문학의 주도권을 사실상 미국에 넘겨준 거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다.
집필을 하고 있는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 중 대표 3인방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중 가장 중요한 대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극기주의, 허무주의,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강인한 남성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미국 문학사에서 19세기 미국 최고의 작가로 마크 트웨인과 허먼 멜빌이 꼽힌다면, 미국 문학을 넘어 20세기 세계 최고의 작가로 헤밍웨이가 꼽힌다.
헤밍웨이 일대기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의 강요로 자주 여장(!)을 당하고, 여장한 상태에서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경험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어머니와는 평생 사이가 나빴다. 헤밍웨이의 생일에 어머니가 그에게 선물을 소포로 보냈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권총(그것도 아버지가 자살할 때 썼던 것)이 들어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헤밍웨이는 아버지 쪽을 완전히 닮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냥꾼, 모험가 기질이었으나 쇠락한 아버지와 잔소리 많은 전직 음악가 어머니는 서로 종종 싸웠고, 헤밍웨이는 위의 언급처럼 강인한 남자의 표본인 아버지를 따랐다. 헤밍웨이는 쇠락했지만 남자다우며 똑똑한 아버지를 평생 존경하였고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가정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낚시, 사냥 등을 하며 집 밖을 배회하였다. 어머니는 여성이 참정권도 없던 시절에도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성격의 초라한 아버지와 대조되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헤밍웨이와 어머니의 악연은 어머니가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헤밍웨이는 곧바로 달려갔지만, 《노인과 바다》를 쓸 무렵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난 글을 마저 써야 한다. 돈을 부치면 가족들이 알아서 할 거다." 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무시.
영화 속의 여 주인공 마리아
처음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해 종군기자로도 활약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으며 무훈을 세웠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그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안녕》 등등에서 발현된다. 이후 신문사의 특파원 자격으로 1차대전 이후의 파리에 체류하며, 스콧 피츠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 등등의 미국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갔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무명이지만 능력 있는 예술가들을 지원해 준 사람이다. 이 후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파블로 피카소도 있었고, 이 인연 덕분에 피카소는 헤밍웨이와 지인이 된다. 참고로 남동생 리오 스타인은 시인 겸 평론가.
마리아 역을 맡았던 명배우 잉글리드 버그만
이들처럼 파리에 체류하며, 파리의 풍요한 예술적 토양과 자유를 즐기면서 산 문학가 집단들을 문학계에선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 칭하며, 이 표현을 최초로 쓴 사람은 앞서 얘기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이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충격으로 자신들이 구세대에게 버려진 잃어버린 중간 세대라고 느끼면서, 이전 세대와 단절된 새로운 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파리의 프랑스인 지성인들은, 전후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넘치는 달러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파리와 프랑스 문화에 열렬히 환호하는 척 하지만, 실제론 프랑스어도 배우지 않고 겉핥기로 껍데기 문화만 섭취하는 이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고급쓰레기. 헤밍웨이는 물론 그들의 퇴폐적인 위선을 증오했으며, 자신도 자신의 마초적인 성향 때문인지, 이 당시 '계집애 같이'(?) 예쁘장하고 퇴폐적인 문화에 탐닉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후회했다.
헤밍웨이가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함께 파리 생활을 돌이키며 썼던 회상록을, 4번째 부인인 메리 헤밍웨이(본명은 메리 웰시)가 헤밍웨이 사후 출판한 《이동 축제일(Movable Feast)》에서 '잃어버린 세대'의 유래가 나온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신의 차를 고치려고 정비소에 맡겼는데, 젊은 직원이 빨리 고치지 못하자 정비소 사장이 "너희들은 전부 '허탕 치는 세대'야." 라고 호통 쳤다. 거트루드는 이를 나중에 헤밍웨이에게 그대로 전하면서 덧붙였다. "자네도 그래. 자네는 물론… 전쟁을 겪은 모든 젊은이들이 그렇다고. 이 잃어버린 세대들아." lost에는 '길을 잃은' 뜻만이 아니라 '타락한'이란 뜻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이 타락한 인생 헛산 세대들아! 라는 일갈이 위에서 설명한 상황에 더 적절하다.
이후 앞에서 언급한 《무기여, 잘 있거라》로 큰 명성을 얻은 뒤, 당시 혁명 스페인의 공화제를 열렬히 지지하여 종군특파원으로 자진해 스페인으로 갔고, 혁명군과 함께 보수파 반군인 프랑코의 군대를 비판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쓰게 된다. 국내서는 헤밍웨이가 스페인에서 총 한 방 안 쏘고 도시에서 아무런 일 없이 노닥거리다 판타지로 가득한 글줄을 뽑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간혹 떠도는데, 애초에 헤밍웨이는 종군기자였다. 그리고 그는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였던 만큼 그런 비겁자도 아니었다.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총을 안 쐈다는 이야기는, 당대에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열렬하게 싸웠다"는 과장된 신화가 퍼지고 그게 헤밍웨이의 명성에 일조했다 정도에 불과하다.
《노인과 바다》, 《킬리만자로의 눈》 같은 걸작 소설들을 연이어 내며, 결국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1941년에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을 방문하여 충칭에서 장제스와 만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국민당 장군들에 대해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총명하고 말재주가 좋다' 라고 좋은 평가를 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이어진 파리해방전투에도 참여했다. 이렇게 열정적인 마초의 호칭은 우리말로 "아부지"에 해당하는 '파파'였다. 본인도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고.
그리고 노인이 되면서 늙어 약해지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었다. 1차 대전 당시 저승가기 직전 부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말년의 비행기 사고로 크게 다쳐서 그 후유증이 컸다. 그 때문에 더욱 사냥 같은 취미에 몰두하다 급기야 정신착란까지 일으키게 된다. 결국 7월 2일 이른 아침, 그는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아내가 자게 놔둔 채, 엽총을 입에 물고 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죽을 때까지 그는 마초였던 것이다. 하지만, 늘그막에 작품이 지지부진한 점으로도 고민해 온 점도 자살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글을 쓰다가 계속 찢고 쓰던 걸 던지고… 술을 마시며 괴로워했고, 6월 28일,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젠 써지지 않는다! 써지질 않아!"
그는 평생 인생을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진정한 마초로 살았다. 그는 6피트(183cm)가 넘는 거구였으며 항상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꽤 잘했다는 등 자신의 강인함을 세상에 자랑하고 다녔다. 하지만 막상 정식 복싱 대결을 붙여주자 슬그머니 도망갔다고 언급한 지인도 있다. 조정래의 《황홀한 글 감옥》에는 1943년에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샘 우드(1883~1949)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시사회에서 영화화 수준에 불만을 품고 감독을 주먹으로 패서 코뼈를 부러뜨렸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이렇게 자신을 자기를 세상에 과시하는 것도 매우 즐겼으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유명 연예인같이 자신의 화려한 사생활을 노출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고 한다. 자살한 이유들 중 하나가 자신이 늙어 세상의 관심이 멀어지는 걸 견디지 못했던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느 날 호텔에 머물면서 어느 영국인이 '에릭 블레어'라고 소개하며 인사하기에 퉁명스레 답했더니, 그 사람이 "아, 그리고 조지 오웰이라고도 합니다." 라고 해서 헤밍웨이가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위 스페인 내전에 반 프랑코 파에 섰던 경력, 그리고 쿠바의 아바나에 살았던 것과 관련해서, 그가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렇다 할 확증은 없는 상황이며, 거꾸로 미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까지 제기되어 실은 이중 스파이 아니었냐는 의혹도 있다.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을 때, 모스크바와 바티칸 시국에서도 그의 죽음에 유감을 표명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던 손녀 마고 헤밍웨이(1954-1996)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의 말년은 전술(前述)했듯 글쓰기에 대한 집착과 정신착란 등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때 헤밍웨이가 병원에서 전기 쇼크 요법을 받았다는 기록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사실 헤밍웨이는 누군가에 의해 폐인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라는 음모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증거는 없으므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도청과 계속되는 감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에서는 헤밍웨이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갔다. 그러나 훗날 존 에드거 후버가 어째서인지 1940년대의 FBI 감시대상목록에 헤밍웨이가 있었다고 시인하면서, 헤밍웨이의 주장은 사실로 밝혀졌다.
문체와 집필 스타일
“캐서린은 계속해서 출혈을 하는 모양이었다. 의사는 그것을 멎게 하지 못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캐서린이 죽을 때까지 같이 있었다. 캐서린은 줄곧 의식이 없었고, 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헤밍웨이의 문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Hard-Boiled Style) 이라고 부른다. 이 문체는 잡다한 수식이 없고 간결하다. 또한 제3자의 시각으로 사실만 무덤덤하게 나열한다. 위 예시처럼 주인공과 사랑을 나누던 사람의 죽음마저 차갑게 묘사한다. 인물들의 감정묘사를 거의 하지 않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복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헤밍웨이 같은 거물급 작가가 왜 이렇게 화려한 수식어구 없이 간단한 쉬운 문체로 작품을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문체가 쉽다 하더라도 그 문체가 담고 있는 작품의 분위기나 내용의 깊이, 작가의 의도 등이 상당히 깊다.
그의 신문기자 생활을 통해 간결하고 정확한 문체에 익숙했고, 당시 유행하던 하드보일드 대중소설들(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그 자신의 마초적인 성격과도 부합했다.
이런 이유로 영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 혹은 영문학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가로 꼽힌다. 문장이 간결하고 평이한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대단하지 않아도 쉽게 읽힌다. 포크너 같은 난해하고 복잡한 작품을 읽다가 헤밍웨이를 펴면 무슨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 '아주 잠깐' 든다. 실제로 포크너는 헤밍웨이의 책에서 어려운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고, 헤밍웨이는 어려운 단어를 써야만 감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며, 단순한 단어와 절제된 묘사만으로도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읽기 쉬운 글은 가장 쓰기 어렵다" 라는 너새니얼 호손의 말대로, 헤밍웨이는 스스로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첫 부분을 적어도 50번은 고쳐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무기여 잘 있거라》의 마지막 부분도 17번이나 고쳐 썼다.
특히 그런 헤밍웨이의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6단어 소설인데, 친구들이 단어 6개로 자신들을 울릴 만한 소설을 써 보라고 장난삼아 내기를 걸자 즉석에서 지어 낸 것이다. 비록 6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이 안에는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을 울려버릴 만한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본문 내용은 '사용한 적 없는 아기 신발 팝니다.'가 된다. 아기 신발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뜻은 아이가 유산 혹은 사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걸 팔아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6단어 소설을 정말 헤밍웨이가 썼는지는 이견이 있다. 헤밍웨이 스타일이지만,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이야기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굳이 따지긴 뭐하지만, 사실 애 키워보면 애가 너무 빨리 크거나 애가 안 좋아한다거나 하는 이유로 한 번도 못 신고 버리거나 팔게 되는 신발이 꽤 생긴다.
이러한 문체 때문인지 일부 평론가들은 헤밍웨이의 진가는 장편이 아닌 중·단편소설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장편은 비판하면서 단편에는 격찬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관심이 간다면 인디언 부락,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살인자들, 킬리만자로의 눈 등의 소설들을 한 번 읽어보자. 단편이라지만 손바닥소설 급으로 짧은 소설들도 아주 많다.
어록
정말 재미있는 책을 쓰려면 수많은 강타를 맞아봐야 한다.(punishment는 권투에서 "강펀치"를 뜻하기도 한다) - 1981년, 카를로스 베이커가 편집하고 헤밍웨이가 자비로 출판한 《1917~1961년에 엄선된 편지들》 중 1924년 12월 6일에 썼던 "편지"에서. 위에서 봤겠지만 헤밍웨이는 다른 작가들이 탁자 앞에 앉아서 토론이니 뭐니 하며 시간을 까먹자, 권투 글러브 끼고 체육관으로 갔다고 한다.
그 가을, 전쟁은 그 곳에 항상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곳으로 가지 못한다. - 1927년, 《여자 없는 남자》 중 《또 다른 나라》에서.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
The world breaks everyone and afterward many are strong at the broken places. But those that will not break it kills. It kills the very good and the very gentle and the very brave impartially. If you are none of these you can be sure it will kill you too but there will be no special hurry.
해석: 세상은 모두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 부러지지 않는 사람들을 죽인다. 아주 선하거나, 상냥하거나, 용감한 이들을 세상은 무자비하게 죽이고 만다. 만약 당신이 그렇지 않아도 죽이겠지만, 딱히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모든 미국의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으로부터 나온다. 미국식 글쓰기도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후로도 없었다. - 1935년,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들》에서.
여기서 이길 수 있다면 어디서나 이길 수 있다. 세상은 괜찮은 곳이자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며, 여길 떠나는 게 무척 싫다. 오늘은 수많은 날들 중 그저 하루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다른 날들에 벌어지는 일은 네가 오늘 뭘 하냐에 달려 있다. 올해 내내 그랬다. 너무 많이 그랬다. 모든 전쟁도 그런 식이다. -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 1926년,《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11] - 1952년, 《노인과 바다》에서.
우리 모두는 그 누구도 '거장'이 될 수 없는 길드에 속한 실습생들이다. - 1961년 7월 11일, 《뉴욕 저널-아메리칸》에서.
난 파리의 지붕 위에 서서 내다보며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라. 넌 예전에도 항상 썼었고, 지금에도 쓸 수 있다. 네가 해야 되는 것은 진실한 글을 쓰는 것뿐이다.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글을 써라." - 1964년, 《이동 축제일》(몇째 주 무슨 요일 하는 식으로 날짜가 정해지지 않은 축제일. 좋은 예로 부활절이 있다)에서.
네 운은 스스로 만들렴, 지그. 무엇이 훌륭한 패배자를 만드는지 아니? 연습이야. - 1976년, 헤밍웨이의 아들인 그레고리 헤밍웨이가 쓴 《파파의 개인적인 언행록》에서 그레고리가 어렸을 적에 들은 말.
그대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건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대가 그걸 위해 태어났음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라. - 1984년, 아놀드 새뮤얼슨이 쓴 《헤밍웨이와 함께》에서 헤밍웨이가 작가 생활 2년차일 때 그 동안 쓴 원고가 전부 담긴 가방을 잃어버린 일에 대해 언급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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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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