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업은 제주의 방어유적이라는 주제로 명월진-만조봉수-배령연대 순서로 이동하며 수업이 진행되었다. 진성과 봉수, 연대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모여있는 것이 쉽지 않다는데 한림에는 이 세 개의 방어유적이 모여있어 하루 만에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제주의 방어유적은 왜 중요할까? 평화의 섬이라 불리는 제주가 늘 평화 속에 있었을까? 의외로 방어시설이 발달해 있었는데 그 종류와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오늘의 수업을 시작한다.
1. 명월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성의 안일까요? 밖일까요?
오늘 수업의 집합장소는 명월진성의 남문이다. 네비게이션에 '명월진성'을 찍고 도착한 곳이다. 어딘가에 가면 보통은 밖에 차를 세우고 내부를 관람하러 간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곳은 성의 안일까요? 밖일까요?"
교수님의 물음에 눈치빠른 우리는 일단 성의 안이라고 대답하고본다. 역시 연륜은 어디 안가나 보다. 정답이다. 수업의 시작부터 웃음꽃을 피우며 교수님 질문의 해답을 찾으러 성문을 지나 성의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성 밖에서 명월진성을 본 모습이다. 입구를 동그랗게 둘러친 담 때문에 성문이 보이지 않는다. 옹성이라 하며 둥근 모양이 항아리를 닮아 '항아리 옹(甕)'자를 썼다. 그렇다면 왜 성문이 보이지 않게 성벽을 둘러쳤을까? 그 이유는 왜구가 말이나 큰 통나무로 충돌하여 나무로 된 성문을 부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본격적으로 제주의 방어유적에 대하여 공부해보기위해 명월진성 위로 이동하였다.
제주의 방어유적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이루어져 있다.
3성은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과 군사 목적을 동시에 갖춘 읍성이다. 제주목성, 정의현성, 대정현성이 있으며 옹성, 해자, 치성, 여장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9진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왜구들이 들어오는 길목에 세워진 방어유적이다. 제주읍성을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이 있다.
가장 먼저 차귀진과 수산진이 세워졌는데 왜구들이 쳐들어올 때 섬을 거점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동쪽에 우도와 서쪽에 차귀도를 경계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명월진 또한 비양도를 경계하기 위해 세워진 진성이다.
명월진의 둘레는 1.36km 가량 된다. 이는 둘레 1.2km인 대정현성과 정의현성보다 크다. 명월포 일대를 통해 삼별초, 여몽연합군, 최영 장군이 이끈 고려의 목호토벌군이 상륙했을 정도로 제주방어에 있어 중요한 곳이다. 영조 40년(1764년)에는 명월진의 책임자가 만호로 승격되어 다른곳의 책임자가 종9품 '조방장'인데비해 이 곳 명월진에는 종4품인 '만호'가 파견되었다.
명월진은 2002년에 기단이 발견된 후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제주목성 다음으로 큰 크기를 자랑하며 원래는 남문, 동문, 서문이 있었으나 대부분 도로가 되거나 개인소유지가 되어 현재는 남문을 포함한 250m가량만 복원된 상태이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성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매뉴얼이 참 잘 되어있다. 그런데 명월진성을 둘러보면 아쉬운 점이 몇 가지 보인다.
첫 번째는 여장이 없다는 것이다. 여장은 성곽에서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시네를 은폐 엄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벽구조물을 말한다. 그런데 복원된 명월진에는 성벽에는 아예 없고 옹성네는 아주 낮은 단이 하나 있을 뿐이다. 지금의 모습이 실제라면 벽 뒤에 바짝 기대어 눕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째는 턱이 생긴 초루이다. 초루란 장군이 작전을 짜고 지시했던 성문 위 공간이다. 원래는 말과 군사들이 초루 좌우를 뛰어다니며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성벽과 초루는 단이 없이 평평하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복원된 모습을 보면 성벽에서 초루로 올라가는 계단 두 단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세 번째는 공간만 갖춘 치성이다. 치성이란 '꿩 치(雉)'자를 써서 성벽의 일부를 망루처럼 돌출하게 만들어 적을 공격하기 쉽게 설계한 부분인데 치성은 흙이나 다른 무언가를 깔아서 바닥을 평평하게 해야 하는데 이 곳 또한 공간만 만들어놓았다.
명월진성을 복원할 때 수원화성같이 자세한 설계도면이 없어서 이렇게 만든 것인지, 예산의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 방어유적으로의 기능 수행은 할 필요가 없으니 간결하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명월진에 대해 배우고 보니 뭔가 하다 만 듯한 외형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종 1년(1419년)에 태종대왕의 명령을 받은 이종무의 군사가 대마도 정벌을 통해 왜구를 소탕한다. 제주 약탈이 어렵게 된 왜구는 시선을 돌려 동남아로 진출을 하며 약탈에서 교역으로 생존방식을 바꾸게 된다. 그러면서 일부 중국인과 포르투갈상인들 까지 합류하며 몸집을 키운 왜구는 제주를 거점으로 이용하며 물과 식량, 땔깜등을 구하기 위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역사기록을 보면 고려 말부터 1556년 조선 명종 11년까지 240여년 동안 30여회의 왜구가 제주도를 침범해왔고 1552년 명종 7년 천미포왜란과 1555년 명종 10년에는 배 60여척에 1천명의 왜구가 화북항으로 쳐들어오는 사건이 있어다. 이러한 여러 큰 사건을 겪으며 1500년대에 제주의 방어유적이 발달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에 나누어 침범했던 천미포왜란과 달리 한 번에 1천여명이 제주의 중심이었던 화북항으로 왔던 을묘왜란은 단순 약탈을 위한것이 아닌 제주를 점령 하려했던 모습으로 보여져 임진왜란의 전조증상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명월진성은 원래 목성으로 축조되었는데 천미포, 을묘왜란 등을 겪으며 임진왜란 때 돌성을 쌓게된다. 문화재를 복원 할 때에는 허가받은 업체에서만 작업이 가능한데 제주에는 아직 문화재 복원 허가를 받은 업체가 없어 육지에서 들어와 작업했다. 그래서 복원된 명월진성의 성벽은 제주의 돌 쌓는 방법과 달라 육지식으로 되어있다.
명월진에서 만조봉수로 이동하는 중간에 교수님께서 팽나무 군락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셔서 명월국민학교(폐교되어 현재는 카페로 운영 중)앞에서 멈춰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에 명월진으로 가는 길에 지나치며 나무들과 내천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설명을 듣게되니 더 반갑다.
지금은 한림으로 불리는 이 동네의 원래 이름은 "밝은 달"을 뜻하는 명월이라고 한다. 고려 충렬왕 (1300년)에 제주에 동서현을 설치하며 이 마을의 산세가 좋으므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리라 하여 마을 이름을 청풍명월에서 명월현이라고 하였다(출처 명월리 홈페이지). 우연인지 명월에서는 선비가 많이 나왔는데 선비가 급제를 하거나 고위 관직에 오르면 그것을 기념하여 팽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렇게 팽나무 군락이 조성되면서 마을에서는 팽나무를 지키이 위한 마을향약을 만들고, 팽나무를 손상시킨 자는 목면반필( 木棉半疋)을 징수하며, 이행하지 않으면 식수를 길어오지 못하게 하고, 불씨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서 공동체에서 고립시켜버렸다고 한다. 또한 4.3사건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마을 주민들이 팽나무를 지키기 위한 일화가 있다.
1949년 정월 무렵 한림지서에서 '4·3'으로 하동에 소개된 마을 유지 등을 부르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화목용으로 쓰기 위해 명월천에 있는 팽나무를 베어 공출하라는 것이었다. 수백년 간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 고목들을 베어내라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4·3의 광풍' 속에 주민들은 파리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그 때 참석자를 대표하여 마을의 종수감(種樹監)을 지낸 오희규가 죽음을 각오하고 말했다. "우리 소개민들은 사태가 수습되면 하루속히 마을을 재건하여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명월천 팽나무를 베어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 살아갑니까"라며 지서장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이는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마을 전체 주민들의 의견"이라고 한 뒤 다른 곳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바치겠다고 약속, 지서장이 허락함으로써 팽나무군락은 위기에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 하천의 범람을 막고 풍치를 지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명월리의 공동체의식은 재해가 빈발하는 오늘날 모든 마을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일이다.
출처 : 한라일보 기사 ['경술국치 100년' 제주 원풍경을 되살린다] (15)한립읍 명월리 '팽림월대'
2. 만조봉수
만조봉수는 느지리오름 정상에 있다. 봉수는 높은데 세워져 망원경의 역할을 한다. 사라봉수, 원당봉수, 지미봉수 등 25개 봉수 모두 바닷가 근처 오름에 있다.
종합안내도에는 봉수가 있던 자리에 전망대가 그려져 있다. 첫 수업 때 봉수대가 있던 자리에 전망대가 떡하니 세워져 있다고 교수님께서 한탄하셨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문화탐방수업이지만 오름을 올라가는 동안에는 잠시 오름해설사수업이 된다.
천선과나무이다. 천선과는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있던 토종 무화과 나무이다. 이름은 중국에서 왔는데 하늘의 신선이 먹는 과일이라는 뜻이란다. 그런데 무화과보다는 덜달다고,,,
느지리오름 정상부에 있는 만조봉수 터에 도착했다. 다행히? 전망대는 없어졌다. 알고 보니 교수님 제자 중에 명월리 부녀회장님이 있었는데 문화탐방수업을 듣고 바로 읍장에게 달려가 강력하게 전망대 철거 민원을 했다고 ^^;;
봉수대는 횃불 봉에 연기 수를 써서 봉수대이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피워서 다른 봉수와 통신을 했다. 망원경 역할을 하는 봉수는 사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다에 수상한 배를 감시할수 있어야 하며 다른 봉수에서 올라오는 불이나 연기를 확인할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나무가 자라서 시야를 다 가리고 있다.
봉수는 5거법을 사용하였다. 평소에는 1거, 바다에 신원미상의 물체가 보이면 2거, 해안가에 접근하면 3거, 해안을 범하면 4거, 싸움이 발생하면 5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겼다. 육지에서는 1거밖에 못할만한 넓이인 터에 5거를 다 세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비바람이 강한 제주 날씨에 그 숫자를 구분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여우의 대변을 태우면 연기가 퍼지지 않는다는 설이 있지만 결국은 사람이 뛰어가 직접 상황을 전달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한사람에게 역을 많게까지는 10개 까지도 부여했고 한다. 그런데 봉수역자에게는 한개의 역만 부여하였다. 봉수역은 24시간 3교대로 근무하게 하였고 매일 산을 오르내리며 상황이 발생하면 빠르게 상황전달을 해야하는 등 봉수역만으로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병역중 봉수대 근무자에게는 다른 역은 부여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에 따르면 당시 제주도의 인구가 22,990명(남 9,530명, 여 13,460명)인데 비해 군인의 수는 7,444명으로 나타난다. 양반과 어린이를 제외하고 모든 남성이 군적에 올라가 있으며 여성들도 '여정'이라는 기록이 있듯 예비군의 형태로 사변이 나면 징발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성과 연대는 돌을 쌓아 지금까지도 형태가 남아있는데 반해 봉수는 일반적으로 석축시설 없이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부을 피울 수 있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래도 흙은 빨리 유실되기 때문에 지금은 그 형태를 확인할 수가 없어 봉수대 터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봉수는 기념물로 지정되어있지 않고 또 지정되기도 힘들다고 한다. 진성과 연대는 직접 왜구와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방어기능을 할 수 있도록 견고한 성벽이 필요하지만 봉수는 직접적인 방어의 기능보다는 상황을 알리는 통신의 역할만을 하기 때문에 힘들게 돌을 오름 정상까지 들고 갈 필요없이 흙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조천읍 북촌 서산봉수와 애월읍 수산봉수·한경면 당산봉수는 봉수가 있던 자리에 레이더 기지나 경비대 시설, 전망대가 들어서는 등 역사유물이 파괴됐다고 한다. 레이더 기지나 경비대 혹은 전망대 모두 과거 봉수와 같은 통신 및 시야확보를 통한 정보수집이라는 목적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모습만이 변화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과거 역사유물을 송두리째 없앴다는 점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3. 배령연대
오늘 수업의 마지막인 배령연대를 가고있다. 길가에 주차를 하고나면 가깝게 비양도가 보인다. 작은 골목길 입구에 표지판이 돌담에 걸려있는데 표지판을 따라 올레같은 길을 조금만 걸으면 곧 배령연대에 도착한다. 표지판이 귀엽기도 하면서 제주기념물 표지판 치고는 초라한 느낌이 든다.
현재 금능리에 있는 배령연대에서 배령은 옛 이름 '베렝'에서 왔다고 한다. 봉수가 망원경 역할을 한다면 연대는 바닷가에 침입해 오는 왜구를 정확히 식별하는 현미경의 역할을 한다. 왜구와 직접 싸우기도 하는데 그래서 어떤 연대에는 적군이 올라오지 못하게 계단이 없는 연대도 있다고 한다. 연대의 모습은 원형의 모습도 있고 개성 있고 특이하게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옛모습이 다 허물어져 어찌 보면 엉터리로 복원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동쪽 섭지코지에 있는 협자연대와 천미포연대 는 옛 모습이 남아있다고 하니 한번 가봐도 좋을듯하다.
수업 시작할 때 했던 물음이 있다. "평화의 섬이라 하는 제주가 늘 평화 속에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는 여러 수업을 통해 제주는 항상 외세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평화와는 거리가 먼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역사적 사실은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와서도 강정에는 해군기지가 들어섰고 요즘 매우 뜨겁게 논쟁 중인 제2공항도 결국은 미군이 사용할 군용비행장이 필요하여 미국의 요구에 의해 지으려 한다는 설이 파다하다. 지금도 제주는 외세의 침략을 대비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인 셈이다. 후세에 우리 자손들은 강정 해군기지를 견학하며 전쟁을 한번도 겪지않은 제주의 방어유적으로 수업받게 되길 바라면서 후기를 마무리한다.
첫댓글 와우 선 리플 후 정독
생생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제주를 수식하는 "평화"라는 단어의 가치와 무게를 생각해 보는 의미있는 수업을 잘 정리해 주시고 자세히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저리주저리.. 내용 요약에 실패했습니다 😭
읽으면서 계속 감탄하게 되는...우리 세대의 표준전과나 참고서 같은 후기네요~~👍👍👍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셔서 제대로 복습과 함께 모르던것까지 잘 짚어 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역시 총무님~~~~👏👏👏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넘 잘 읽었습니다 ㅎ 반장의 노트를 본 느낌이랄까 😁
안개 자욱하고 비바람 치는 날
힘겹게 봉수 연대를 뛰어다니던
봉수씨가 생각나는 하루였습니다.
글 내용의 질로 보나 양으로 보나
후기라기 보다 훌륭한 리포트가 되었군요 ㅎ
길게 쓰지 말라니까 ㅋㅋㅋㅋ
수고하셨어요~^^
모든 자료와 기록을 찾아서 같이 소개 해 주신 수고가 고맙군요.
이 모든 걸 메모하고 기억해서 작성하느라 수고 했어요.
참 잘했어요!!! 칭찬 스틱카 10장 지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