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선조 25년 : 서기
1592년(48세))
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전(신묘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한 충무공은 미구에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좌수영관할 아래 모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장비도 보강 하는등 온갖 방비를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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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 시범 항해를 하자 하루뒤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공은 전선
24척을 모아 5월 4일 출동하여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이어, 5 월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월 2일 당포에서
승첩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당포해전 이었다. 그리고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4차 부산 대승첩을 거두어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계사년 (선조 26년 : 서기
1593년(49세))
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계사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자기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던 공은 7월 15일 여수 좌수영 본영을 그대로
둔채 전투 본부를 거제 한산도 진으로 옮겨 왜적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8월 15일 공을
임명하여 삼도 수군을 통괄하는 한편 전라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은 장기전에 대비하여군무에 정진, 수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전선을 만들었 으며 각종 무기를 준비 하였다.
갑오년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
명나라 장수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고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였다. 3월에 명나라 지 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고, 공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 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까지 하였다. 전염병으로 10여일을 앓는등 자주 아팠으나 군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고 또 글(제문)을 지어 위로해 주었다. 10월에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 연합으로 협공하여
승리하였다.
을미년 (선조 28년 : 서기
1595년(51세)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나라는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공은 한산도 진에서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 군량을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전선을
정비하였다.
병신년 (선조 29년 : 서기
1596년(52세))
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
전쟁 중에도 공은 항상
어머님을 잊지 못하였다. 일기 도처에 어머님 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으며, 휴전중의 말미를 이용하여 잠깐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행복을 느끼 기도 하였다. 병신년은 어머님이 82세 되시던 해로 10월 7일에 본영(여수)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모자가 만난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정유년 (선조 30년 : 서기
1597년(53세))
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왜와의 화의가 깨어지자
왜적은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정월, 선조대왕은 공에게 출병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본측의 간계를 꿰뚫어 본 이순신은 본 영을 벗어나 함부로
출동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옥에 갖히고, 노모는 이 소식을 듣고 고음천(여천)으로부터 고향 아산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별세하였다. 28일의 옥고를 치르고
백의 종군이 되어나온 공은 아산에 가서 어머님의 영구만을 보고 치 상도 끝내지 못한채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삼도 수군은
전멸하였고, 다시 삼도 수군 통 제사가 된 공은 9월 16일 패잔 전함 12척으로 왜적 대함대 133척을 무찔렀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명량대해전이다. 그러나 10월 10일 셋째 아들 면의 부음을 듣고 공은 비통함에 잠긴다.
무술년 (선조 31년 : 서기
1598년(54세))
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
임진란이래 7년의 긴
전쟁은 수 많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갔으며, 충무공에게는 최후의 전자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7월 명나라 수군과 연합 함대를 결성한 우리
수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순천 소서행장의 군대를 공격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 전투가 저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때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나 공의 나이 겨우 54세로, 마침내 충무공은 자기의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 |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청소년기의 삶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중년기의
삶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함.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 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
이순신의
업적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명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훈련원에서 무과 시험을 치르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리고
32세가 되어야 무과에 급제를 하였습니다.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첫 벼슬길에 나갔습니다.
35세때
충청도 병마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습니다.
36세 때는
전라도 발포의 수군 만호가 되어 수군 경험을 쌓았고요.,.
42세때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가 되고 43때 녹둔도 둔전관의 겸하였으나 이일의 모함으로 파직이 됨어 백의
종군하였습니다...
47세때
우리가 잘 아는 전라 좌수사 자리에 오른 것이죠 그때 왜구 침략을 예견하여 군사를 훈련
시키죠.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여 그 군사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죠...)
1592년
6월 16일 옥포 해전이 일어납니다. 거제시 옥포에서 일어났다고 하여 옥포 해전이라고 하죠..이때 일본 군의 장군은 도도 다카도라
였습니다.
1592년에는 6월 17일 적진포해전, 사천해전(이 전투에서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사용하죠...) 6월 2일 당포해전, 6월 5일 당항포 해전 6월 6일 율포해전 8월 14일 한산도
대첩...
(학익진
전법으로 크게 승리하죠..) 8월 16일 안골포해전 장리모 해전 10월 5일날 화준구미 해전 다대포 해전 서평포 해전 절영도 해전 초량목 해전
부산포 해전이 일어나죠...
1593년
3월 6일날 웅포 해전 제 2차 당항포해전 이 일어났고(1593년엔 이순신장군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됩니다) 1594년 장문포 해전 (1597년 칠천량 해전 원균의 전투인데 이때 원균이 전사하였죠)(빠트린거.. 1597년 때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힙니다... 백의 종군하는데 다시 오르죠.,.) 1597년에는 어란포해전 벽파진해전 명량 해전이 일어
났습니다
1598년
절이도 해전 장도 해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1598년 12월 16일날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숨을 졌습니다.. 그리고 1643년에 선조
임금이 충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이래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순신장군에
대하여
출생1545 4월 28일~사망1598 11월
19일
1545년4월28일
한성건천동에서태어났어요
1564년(명종22년) 방씨와 결혼하여
아들(회)가태어납니다
1572년(선조5년)28세때 무과시험에
떨어집니다
1576년(선조9년)32세때무과시험에합격해서
함경도동구비보의 군사책임자가됩니다
1579년(선조12년)에훈련원봉사가됩니다
1580년(선조13년)발포수군만호가됩니다
1583년(선조16년)건원보 권관과 훈련원
참군이됩니다
1583년(선조19년)사복시
주부를거쳐함경도조산보의군사책임자가됩니다
1587년(선조20년)녹둔도둔전관직을겸하던중파면됩니다
1589년(선조22년)에정읍현감이됩니다
1591년(선조24년)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됩니다
1592년(선조25년3월에거북선을완성하고
4월에임진왜란이일어납니다그해한산도대첩에서승리합니다(첫전투는옥포해전)
1593년(선조26년)삼도수군통제사가됩니다
1597년(선조30년)원균의모함으로옥에갇혔다가백의종군의벌을받지만다시삼도수군통제사에임명됩니다
그해명량해전에서12척의배로왜군133척의배중에36척을격파시키고
적장을(마다시)전사시킵니다
1598년(선조31년)노량해전에서왜군의총탄을맞아장렬히전사합니다
1643년(인조21년)충무라는시호를얻습니다
이순신장군의
업적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은 최초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하여 임진
왜란의 3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장군이 최후에 전사한
노량해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해전
에서 공을 세웠습니다. 한 때 원균의 모함으로 세 번의 파직과
옥중생활을 겪고 두 번의 백의종군이란 시련
도 있었지만 정유년 일본이 재 침략하자
복위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이 탁월하였으며 특히 해전에서의 전략이 뛰어나
학익진법을 비롯, 많은 전투진법을 개
발하여, 실전에 적용하여 패전없이 승전을
거둡했습니다. 또 기존 전함 판옥선을 변형하여 거북선 을 개발
제조하여 실전에 투입시킴으로써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장군이 한산대첩 등 여러 해전에
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 그리고
거북선과 화포 등의 뛰어난 무기를 잘
사용했기 때문으로서, 장군은 임진왜란 중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나라와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고 격퇴함으로서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역사에 남겨졌습니다.
거북선에
대햐여
거북선의 성능
거북선은 해상 전투력을 고려하여 당시의 전선 판옥선을
별도로 변형 고안한 것으로서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그 입속에서 대포를 쏘게 하였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또 비록 적선 수백척
속이라도 뚫고 들어가서 대포를 쏘게 되어 있다는 기
록이 있습니다.
거북선의 구조 및 형태
거북선의 크기는 기존의 판옥선과 같았으며 위에는 판자로 덮었습니다 판상에는 좁은
십자로(十字路)를 만
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외에는 모두
도추(刀錐)를 꽂아서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
였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입이 대포의
구멍이 되게 하였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붙이
고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습니다. 좌우에 각각
여섯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요. 그 전체의 모습이 대략
거북이와 같았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해전
거북선을 처음 등장시킨 해전은 옥포해전 그
다음에 벌어진 사천포 해전이었습니다. 사천포해전은 1993년
5월 29일에 벌어졌던 해전인데요. 이 때 처음으로
거북선을 등장시켰습니다. 판옥선을 변형 개발하여 건조
한 시기는 물론 그 이전이었으나 사천포해전 이전까지는
잘 다루지 못해서 출전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순신장군의
전투
이순신장군 전투는 너무 많아서 답변드리려면 그 내용이 엄청 많습니다. 그래서 이 항목은 제가
블로그에
포스팅하여 놓은 주소를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순신장군이 남긴
것
한편 이순신장군은 충성심과 효심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탁월하여 임진왜란 때의 실전
전황을
기록한 난중일기 를 집필했으며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조 한 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
(1) |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선을 정비해 두어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2) |
옥포 해전,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대첩의 승리는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은 물론 거북선과 화포 등 뛰어난 무기를 잘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
(3) |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은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고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적의 작전을 부수고 남해 바다를 장악하였음은
물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군대는 큰 용기를 얻었으며 일본군은 크게 사기가
꺾였다. |
(4) |
노량 해전은 일본과 치른 마지막 전쟁으로,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
이순신 장군의 전략은 철저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유인과 매복, 원거리 포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북상하고자 했으며 특히나 수군은
군량과 보급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중요한 전력이었습니다. 신무기인 조총과 수십년간 내전을 통해 단련된 왜군과 직접 창칼을 맞대고 싸우는 당시의
해전 전술인 당파전술로는 질로도 양으로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왜군보다 우세한 무기인 총통의 개발에 많은 투자를 했고 그 무기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원거리 포격전을 구상합니다. 실제 이순신 장군의 전투는 적의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포격을 퍼부어 적의 기세를 꺽고 남은 잔적은
화공으로 섬멸하는데 조선수군은 왜군 얼굴도 못보고 있다가 이기는 수가 많았습니다. 즉 적의 머릿수를 줄이는 것보다 적선을 섬멸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말이며 이것은 후에 선조가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이순신 장군을 폄하하는 근거가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원거리 포격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수시로 탐망선을
띄워 적의 동태를 파악했으며 적을 발견하면 소수의 적은 다수의 아군으로 포격을 적이 많으면 유인하여 넓은 전장으로 유인하고 제자리 선회가 가능한
판옥선의 장점을 이용한 일자진의 포격으로 거리를 확보하고 싸웁니다. 이런 전투의 백미가 바로 한산도 해전으로 여기서 이순신 장군은 유인 매복을 통한 학익진의 포위를 완성하여 적을 섬멸합니다. 학익진에 의한 포위 포격전은
현대 포병개념의 십자포화 전술로 발전된 것으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군사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 1545년(인종 원년)
3월 8일~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한성출신이다.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한 생활을 행하고 효심을 가진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장수로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잘 통솔하는 지도력, 뛰어난 지략,
그리고 탁월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전술로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 이며,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사용된 대한민국의 지폐 5백원권의
도완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장군'의 존칭을 붙이거나, '충무공', '이충무공' 등으로 높여서
부른다.
생애
임진왜란 이전
어린 시절
이순신은 1545년 조선 한성부 건천동 (지금의 인현동)에서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 邊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자랐고,
청소년기는
외가인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할아버지인 이백록(楓巖公)은 1522년(중종 17년)에 생원 2등에
합격을 하고 참봉, 봉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뒤 평시서[2] 봉사를
역임하였다.
한편, 정암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인물들도 참형을 받자
한양에 살던
이백록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심곡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은거를 하다 사망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쯤 외가이자 처가 근처인
충남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고,
이후에 이순신이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지금의 현충사 자리에 정착했다고
덕수이씨 집안의 구전은 전한다.
한편,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역적 및
가난한 시절을 보낸 줄거리는 허구이며,
어머니 변씨(卞氏)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이순신이 형 요신(堯臣)과 함께 어머니으로부터 외거노비 6 ~ 8명씩을 증여 받았으며,
충남 은진(恩津) 지방의
가옥과 토지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88년, (선조
22년)에 아내인 상주 방씨가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한편, 할아버지 이백록은 사놓은 현충사 경내 고택을 이순신에게 주기도 하였다.
무과에 응시, 급제
대대로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32살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10개월간 해미에서 동안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년(선조 19년)에
사복시 주부가 되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1587년(선조 20년)
당시 조산만호이던 이순신은 북방 여진족의 약탈, 침략을
막고자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그해 가을 여진족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니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이를 맞아 싸워 포로 60여 명을 탈환하였으나,
녹둔도(鹿屯島) 병영이
와해되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흥부사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사실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직속상관으로서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친 이일의 모함으로 이렇게 된
것이었다.
이일은 자신의 죄를
이순신에게 뒤집어씌우고 벌을 회피한 것이다.
이후 이순신은 순변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죄를 사면받았다.
무관 생활
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고 1589년(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李山海)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7월에 선조가 다시 비변사에 "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1589년 12월에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여
정읍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선정을 배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종6품에서 종3품까지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을 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1591년 2월 정읍현감에서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하고,
이어 가리포에 실제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수사에 초수하였다.
또한 선조는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도 전라도의 요지인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선조가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히고,
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부쳤다.
1591년 47세로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金誠一)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군대와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전란 초기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元均)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 전라, 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 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黃玉玄)을 참수했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음력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었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옥포 해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옥포 해전입니다.
이순신의 첫 승전을 알리는 해전이다. 음력 5월 7일 정오 옥포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한 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쫓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선조는 이양원, 변언수, 이전 등을 한성 수성대장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어가를 타고
평양을 지나
의주로 몽양을 떠나게 된다.
이순신은 남해안 다도해상에서 조정의 파천소식을 접한다.
사천 해전
-
이 부분의
본문은 사천 해전입니다.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음력 5월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
사천 해전이다.
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이 해전은 2차 출동시 첫 번째 전투였고, 거북선이 출전한 첫 번째
승리이다.
음력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6월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 배 한 척과 중간배 12척 작은 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
-
이 부분의
본문은 한산도 대첩입니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 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 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 배 한 척, 중간 배 일곱 척, 작은 배 여섯 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 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洪季男)이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부산 해전
음력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음력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 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 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 배 9척, 절영도에서 큰 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 척의 배 중 적선 100여 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 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 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이 아끼던 휘하장수 정운이
전사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음력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므로 객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
수군 내에서도 이순신파와 원균파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원균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
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에 대해서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의 내용에 대한 입장차가 심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원균과의 불화 과정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웅포 해전
1593년 음력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에 비추어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정면전 대신
조선
수군을 왜성 깊숙히 유인하여 격파하려는 유인책을 썼고 조선수군도 이에 유의하며 화포등을
이용한
공격을 하였으나 지리한 공방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 수군의 부산성
방면으로의
진출을 막아서 보급선을 유지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음력 3월까지 계속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음력 6월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음력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鎭海), 가덕도(加德島)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 3도 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음력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 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 지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 능력이 보장되었다.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일본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선조 30)
1~2월 명나라와 일본간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조선을 침략했다.
이때 이순신은 음력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때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 1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음력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수 없었다.
옥중에서 조카 완 등으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서찰로 전달받았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와
복직
-
정유재란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칠천량
해전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597년 음력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憶祺)는 전사하며,
원균은 상륙후 행방불명된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李恒福)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허술히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음력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명량 대첩
-
이 부분의
본문은 명량 해전입니다.
음력 9월 16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량 해협은 ‘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 등을 구사하여 333척의 일본 함대를 맞아
31척의 전선을 격파하였으며, 92척을 파손시켰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일본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갑자기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된다.
노량 해전과 전사
- 이 부분의 본문은 노량 해전입니다.
다시 제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 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왼쪽 가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전열이 흐트러질 것을 우려하여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날, 유성룡은 조정에서
실각하였다.
한편, 일부에서 이순신의 자살설과 은둔설이 주장되기도 했으나,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일뿐 근거는 없다.
사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오늘날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복식이나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 중 갑옷이나 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의
이순신 초상화는 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이순신이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각 여론조사에서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함께 1,2위에
선정된다.
기타
자살설 및 은둔설
자살설과 은둔설 의혹의
모티브들
자살설의 근거는, 무엇보다 그를 지원했던 인물인 유성룡이 적과의 화해를
주장했다고 공격을 받아서
관직을 잃을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
전투 중 지휘관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관례인데 이순신은 왜 갑판 맨
앞에서 손수 일본군을 쏘다가 적탄에 맞았을까? 과연 이순신은 4각 철판이 부착된 방탄용 환삼을 입고 있었는가? |
” |
이순신이 죽었다고 가정했을 때 이순신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자신의 부장
이순신(李純信)으로 하여금
자신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추정된다.
이외에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비밀리에 은둔 후 자연사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왜란이 끝난 이후 국가에서 재물을 내려 국장으로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었는데,
별다른 이유도 없이 16년이 지나고 공의 묘를 이장한데서,
이때에 이르러 진짜로 사망한 충무공을 이장의 형식을 빌어 장사를 지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설과 은둔설에 모티브를 제공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당시 사회를 떠돌던 다른 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풍문이 있었고
선조도 이런 풍문에 민감하게
반응을 했다는 것이다.
전란이 끝나고 풍문으로 나마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어 역적으로 몰릴 경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집안,
그리고 크게는 덕수이씨 가문 전체와 그를 천거하여 공적을 쌓을 수 있게 해주었던
유성룡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들과 자신과 같이 근무했던 재장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피화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활동한 김덕령의 의문이 가득한
역모사건으로 인한 사망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고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던 인물들이 이러한 풍문에 연루되면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중 일본과 휴전을 한 시기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고,
다른 일 때문에 잠시 벼슬에 물러나 있던
김덕령(金德齡)은 이 난을
토벌하기 위해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도로 향하다 난이 진압되어 회군하였는데,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를 위해서 벼슬에 물러나서도 난의 토벌을 위해
의병을 모집한 충정이 오히려 공격당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김덕령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하여 자신을 묶고 있던 포승줄을 힘으로 끊고 형옥의 담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는 것으로 힘으로 언제든지 탈출할 수 있지만 반역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않고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였고
그의 부장이었던 최담령 또한 처형
당하였다.
같이 풍문에 연루되었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홍계남(洪季男)은
다행히 풀려났지만, 이때의 풍문이 연결된 많은 의병장들이 옥사하였고,
곽재우를 비롯한 많은
의병장들이 이러한 풍문에 또 다시 연루될 것을 저어하여
의병들을 해산하고 운든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재발하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유재란이 끝나고는 조정에서 주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에 다시 은둔하였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른바 “이순신 자살설”과 "은신설" 그의 죽음 이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안방준의
《노량기사(露梁記事)》에 따르면
송희립(宋希立)이 적탄을 이마에 맞아서 갑판 위에 쓰러져 기절(氣絶)하게 되었다.
이순신(李舜臣)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다가 그도 또한 적탄(敵彈)에 쓰러지게 되었는데, 기절하였다가
정신을 차린 송희립은 옷을 째어 이마 상처를 동여매고 앉으려 하니,
이순신의 아들인 회(?)가 곡(哭)을 하는지라, 송희립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이순신의 갑옷을 풀어 그 시체(屍體) 위에 얹어 놓게 하고,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치(旗幟)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독전(督戰)하니,
적군(敵軍)은 대패(大敗)하고 익사(溺死)하는 자 무수(無數)하고, 드디어 둔주(遁走)하거늘, 이에
비로소 이순신의 곡(哭)을 발(潑)하였다.
뒤에 공(功)으로써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任命)되었다.
– 《노량기사(露梁記事)》
송희립이 이순신의 전사를
목격한 뒤, 독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행록》이외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이순신은 분명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으며, 그 후에
지휘권을 손문욱, 또는 송희립이 넘겨받았다는 좀 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 된다.
이처럼 《행록》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료에서 이순신의 전사를 인정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논리적 모순이 지적되는 《행록》에 의존하여 은둔설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순신의 인품과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전쟁 중에 도피하여 전사를 가장한다는
것은,
폄훼적인 해석과 연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살설에 대해서도 유효한 비판적 견해이다.
다시 말해 사약을 받아도 궁궐 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 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순신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 주장도 한갓 가설과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적탄을 빌어 죽음을 택한 것이든,
마지막 전투임을 알고 전사(戰死)를 위장하여 은둔 생활을 한 것이든, 확실한 단정은 할 수가
없다.
동시에 두 가설을 뒷받침 할만한 결정적인 물증이나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존의 전사설을 전복시키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전무패의 경이적인 전공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과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이순신의 극적인 일생에 주관적 정서가 개입한 ‘동정론’적 가설. 그리고 무능한 조정과 왕실에
대한
상대적 비판을 부각시키는 의도가 깔린 ‘음모이론’ 모두가 공증성과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치밀한 연구와 이론적 근거제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원균 모함 논란
일설에는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고 하는데, 실록 어디에도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한 내용은
없다.
도리어 이순신이 원균을 비난하였다.
그는 옥포 해전 후 원균과의
합의를 깨고 몰래 장계를 올려 자신의 전공을 과장했을 뿐 아니라,
한산대첩 후에도 원균을
헐뜯는 내용을 보고했다.
이순신의 보고 중 "원균이 10여 세에 불과한 아들을 외람되게 공로자 명단에 올렸다고
고 보고했는데,
조사해 보니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어엿한 청년으로 충분히 전공을 세울 만 했다.
이순신이 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된 것은 원균의 모함 때문이 아니라,
이 '원균에 대한 모함'과, 부산의 왜군
진영을 이원익의 휘하에서 태워버린
작전을 자신의 작전인 양
거짓 보고를 올린 사건 등이 겹쳐 이루어진
일이다
친족관계
- 이효조(李孝組) (고조부)
- 이거(李琚) (증조부)
- 이백록(李百祿) (조부)
- 변수림(卞守琳) (외조부)
- 증 덕연 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부)
- 증 정경부인 초계 변씨(草溪
卞氏) (모)
- 이희신(李羲臣) (형)
- 이요신(李堯臣) (형)
- 이순신(李舜臣) (본인)
- 이우신(李禹臣) (동생)
충무공 가계
- 방진(方震) (장인)
- 이순신(李舜臣) (본인)
- 상주 방씨(尙州 方氏) (본처)
- 이회(李薈)
(장남)
- 이울 또는 이예(李䓲)
(차남)
- 이면(李葂) (삼남)
- 덕수 이씨 (딸)
- 홍비(洪棐) (사위)
-
- 해주 오씨(海州 吳氏) (첩)
- 이훈(李薰) (서자)
- 이신(李藎) (서자)
- 덕수 이씨 (서녀)
- 임진(任振) (사위)
- 덕수 이씨 (서녀)
- 윤효전(尹孝全) (사위)
- 부안 여인 (첩)
- 여진(女眞)
- 최귀지(崔貴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