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지난 10월 24일에 기독신문을 교회에 넣지 말라는 문자를 지사장에게 보냈지만 지금까지 계속 신문을 우체함에 꽂고 있었습니다.
지방기독신문이어서 모든 것이 기사거리이고 다 중요해서 그런지 교회의 온갖 잡다한 기사, 광고들로 채워지는 것을 보면서 고통했습니다.
사회를 선도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 폭력과 미움, 갈등, 음란과 죄악을 더 충동질하는 일반 방송매체나 언론, 잡지들처럼, 기독신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세상적인 소식을 싣지는 않으나 세속화된 교회와 성도들이 기획하는 행사들, 조직자체에 대한 열정과 물량주의에 빠진 사람들의 주도와 홍보에 의해 치루는 행사들을 여과없이 실으므로 현재 교회들의 상태가 최상인양 부각시키는 것은 고통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는 목회자나 교회들도 있음입니다(계 3:1). 이러한 것을 분별치 못하기에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기사는 아주 조금이고 예수님과 상관없이 인간적으로 행해지고 교회의 방향을 그릇 인도하는 대부분의 기사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와 인간적인 것들이 섞여 있습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여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섞여있습니다.
비록 죄가 작은 것이나 사람은 본질적으로 악하여 선보다 죄에 더 이끌리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눈이나 생각에 죄의 출구를 허용해 두면 쉬도 때도 없이 마귀는 들락거리게 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마귀는 사람의 죄성을 타고 더 강하고 끈질기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죄일지라도 분별하고 끊는 지혜와 결단이 늘 필요한 것입니다.
신문은 교회의 믿음을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님에게로 이끌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를 가졌습니다. 교단과 교파와 신학이 각각 다른 교회들의 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결국 믿음의 타협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신문사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죽든지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운영하게 될 것이지만 독자들이 있어야 회사가 운영되는 특성상 교회들의 편에 신문이 서야, 즉 교회의 필요와 요구를 반영해야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고 목회자나 교회성도는 이런 신문이나 방송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이름을 내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떠나 돈 있는 사람, 돈 있는 교회의 요구는 다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과 섬김, 교회간 연합을 진작하는 일들을 표방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일들을 만들고 퍼뜨리는 신문들 때문에 그나마 지방의 숨어있는 경건한 성도들마저 겉치레 신앙생활(남에게 보여주고 보이고자 하는)에 물들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신문이나 방송의 속성상 드러내고 알리는 성격으로 인해 성도들의 은밀한 경건생활은 가치없고 볼품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자기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드러내는 외식주의를 홍보함으로 교회에 외식이 가득해 지고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신앙원리인 자기포기와 자기부인은 더욱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그리고 사업수완이 뛰어난 운영자들은 목회에만 전념하는 목회자나 일부 재력있는 성도들에게 사회적인 직함을 내어줌으로 영리사업에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목회자나 성도가 상업적인 이익과 명예심에 현혹되어 교인을 돌보는 힘든 목회보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 명예와 돈이 생기는 신문사업에 저마다 뛰어들어 신문을 홍보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마치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업 자체에 열심입니다.
주님의 사업을 포장하고 하는 일이므로 활동도 합법적일 것입니다. 시간과 물질도 공인된 신문이나 방송을 위해서는 마음껏 쓸 수 있고 교회나 성도들로부터도 아낌없는 지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온전할 수 없고 기독신문사나 방송사도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과 교회를 위한다고 기독교인들이 벌이는 일들 속에 죄가 있으면 일반 사람들이나 일반 신문, 방송보다 더 악하고 더 심각한 영적인 침해를 가져다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상관없이 하는 일에는 교활하고 더 강한 마귀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우선적으로 세상보다 타락한 교회에, 일반성도보다 목회자나 지도자에게 향하고 더 큰 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 4:17,18)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을 것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교회가 홍보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잘못 알고 있고 잘 못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살고자 하는 생각과 방법부터 버려야 합니다. 목회자나 교회는 사람들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의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의해 존재하고 예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을 성취합니다. 목회자나 교회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때 진정 살아남습니다.
목회자나 교회 자체를 홍보하는 전도도 버려야 합니다. 순전한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켜(회개시켜) 예수님을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교인 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 목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