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 3권
제3절 서대문 형무소 수난 7.4사건
1955.7.4.~10.4.
1. 서울 중부경찰서(치안국 특수정보과) 연행
7·4 사건 1955.7.4. 17:00, 장충동교회
1954년에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붙이고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역시 남한에서 국가적인 반대를 했습니다. 전체가 반대했다구요. 제2차 신약 탕감시대도 마찬가지로 1954년, 55년, 56년, 57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선생님이 또 감옥살이를 한 거예요. 감옥에 들어가는 놀음이 벌어진 거라구요. 반대가 벌어진 것입니다. 3년간은 언제나 탕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955년도에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구요. 감옥에 들어갔어요, 감옥에. 하나되어 가지고‘레버런 문 잡아 죽여라, 이놈의 작자를’했다구요. 7월 4일이예요, 7월 4일. 그때의 죄목이 뭐냐? 공산당이니 뭐니 하면서 세상의 나쁜 것은 다 내가 걸머진 거예요. 과거에 잘못한 것도 전부 다 레버런 문에게 뒤집어 씌웠다구요. 다 뒤집어 씌웠다구요. 나쁜 이름이면 다 얘기했다구요.
선생님이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을 중심삼고 섭리의 기점이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에 있어서의 기독교는 한국내의 기독교로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섭리와 전체 세계를 대표한 기독교의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섰던 교회와 나라가 반대하면 전세계가 걸려 들어갑니다. 선생님 한 사람을 어떻게 꺾느냐 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문제, 복잡한 와중을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던 거와 마찬가지로 최후에 사탄편에 끌려가는 놀음까지 벌어졌습니다. 7·4사건 같은 것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때 내가 천대받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습니다. 그놈의 자식들이 ‘야, 자’하던 것이 내 뼛골에 사무쳐 아직까지 잊혀지질 않아요. 나 한 사람 고통받고 핍박받는 것은 좋지마는 나라와 민주세계가 전부다, 수천 년 동안 준비한 기틀이 다 무너져 나갔다 이겁니다.
사건 사주 최종 배후세력
대한민국에서 내가 이정권 시대에 감옥살이를 했어요, 안 했어요? 감옥살이했습니다. 이정권은 원수예요. 그놈의 자식들, 나에게 총칼을 들고 협박 공갈하고 별의별 짓 다 했어요. 그들은 나를 추방하기 위해 감옥에 넣었지만, 나는 이 대한민국을 위해서 갔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사건 때 이박사가 5대 장관과 합해 가지고 박마리아 위신과 이대 위신과 프란체스카 위신을 세우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했다구요. 문교부 뭐 문공부, 그때는 공보부인가? 그다음에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5대 장관이 합해 가지고, 권력을 가지고 문총재 때려잡으려고 한 거예요.
이승만 박사 시대 때 5대 장관이 문총재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보고하더라구요. ‘나라가 기독교를 위주로 해서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하더라구요.
통일교회 하면 쉬쉬했지요? 무서워서 쉬쉬하기 시작했는데, 못 돼서 쉬쉬한 걸로 알았어요. 자유당 때도 사실은 무서워서 쉬쉬하면서 가지말라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통일교회가 나빠서 그런 줄 알았다구요. 자유당 때 민주당의 여성 대표자 박봉애朴奉愛를 내가 끌어오지 않았어요? 그래 가지고 자유당에 입당시킴으로 말미암아 야단이 벌어졌지만 말이예요. 그래 미워서라기 보다는 무서워서 반대하는데 나빠서 반대하는 줄 알았다구요. 이놈의 자식들이 무서워 반대하면서 제일 나쁘다고 반대하고 떠들었다는 것입니다.
병역법 위반 혐의
1955년 이화여대 사건, 모든 사건으로 인해 가지고 전국가가 소동해 가지고 문총재 잡아넣으려고 그랬다구요. 언제는 동아일보가 지지하더니 반대하고 그러더라구요. 이래 가지고 5대 장관이 문총재, 문 아무개 잡아 죽이려고 계획했다구요. 이박사 정권을 중심삼고 그 놀음을 한 거예요. 들추고 해봐야 나에게 죄 없어요. 갖은 흉악한 보따리를 다 씌워 놓았지만, 죄로 걸릴 게 있어요?
별의별 요사스런 소문내고 뭐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해 가지고 날 조사했어요. 조사해 보니 뭐가 없으니까 잡아 죽일 수 있어요? 뒤져 보니 병역기피라는 거예요. 내가 이북에서 나와 가지고, 중간에 감옥살이 하다가 나오니까 연령도 지났다구요. 이래 가지고 병역기피라고 걸은 거예요. 그것도 사실을 보니 법대로 했다 이거예요.
걸래야 걸 게 있어야지요. 뱀장어 같아요, 뱀장어. 이거 주둥이에다 걸어도 쪽 빠져 나가고 말이예요, 꽁지에 걸어도 쪽 빠져 나가고, 요렇게 요렇게 하더라도 쪽 빠져 나간다 이거예요. 걸 게 없다구요, 얼마나 매끄러운지. 세상이 야단 났거든, 나라를 이렇게 요사스럽게 만들어 놓고…. 문총재는 나쁜 놈이고 민족반역자다 해서 때려잡아야 할 텐데, 그래야 기성교회의 천년만년 왕국이 벌어질 것으로 다 알고 있는데, 이거 쪽쪽 빠져 나가 걸 것이 있어야지요.
고문 취조
이 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민족 앞에 사무친 한이 많아도 참습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무골충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뼈 없는 사나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30여 년의 생애를 참으셨던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이후 2천년간이나 참으시며 뜻을 이루기 위한 터전과 때를 마련하기 위한 공고한 토대를 닦기에 노심초사하시는 것이 복귀의 노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태풍아 불어라, 설한풍아 불어라, 동삼삭아 와라’하며 참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한 때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생님의 책임이 무엇인가? 몰리고 쫓김 받을 때, 감옥에 들어갈 때, 이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이냐? 세계 인류를 위해 맞고 세계의 고난을 전부 끌어다가 섬멸해야 합니다. ‘아무려면 세계의 고난 길을 개척해 나가는데 이만한 어려움이 없을소냐?’하며 고난을 오히려 당연시했습니다. 고문도 많이 받고 별의별 일을 다 당했지만, ‘내가 가는 길은 철석같다. 소망의 나라를 이룰 때까지 싸워 남아져 내가 희생의 길을 가더라도 지금 죽어서는 안 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나오는 데에 있어서 나를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동정해야 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는 마당에서도, 영어의 신세, 철창에 갇히는 신세의 자리에서도 그랬습니다. 뜻길을 가기 위한 그 첫걸음에서부터 ‘이렇게 생명이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전통적 사상을 지녀 온 역사적 탕감기준을 남기기 위해서 그런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누가 침범하려고 해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 가지고 대한민국을 망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기성교회 망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들이 모르는 죄를 용서해 주소. 불쌍한 대한민국이 죄지은 것을 탕감하게 나한테 다 지워 주소. 나를 욕해서 복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나님이시여, 제가 사랑하는 민족을 저 이상으로 사랑해 주십시오. 하나님이시여, 세계를 저 이상으로 사랑하시고 저를 위해서는 동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죽더라도 졸장부로는 죽지 않겠습니다’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느리고 인도해야 할 세계 만민을 이 졸장부가 맡고 있지만, 그 허물을 허물로 보지 않고 덮으시사 나에게 채찍을 가하여 이 세계 인류를 탕감하고 보충할 수 있으면 그래 달라고 싸워 나온 거라구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 앞에 불길로서 하나님의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요건이 됐기 때문에‘너 통일교회 문아무개는 어디 가든지, 망할 자리에 가도 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았던 것입니다.
조서 작성
사람들이 나를 못 당해요. 옛날에 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때도 조서 꾸미던 사람이 나하고 얘기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한테 말려 버려요. ‘당신 지금 조서 쓰는데, 요 말은 왜 안 써? 지금 요것 써야 해’하고 내가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가르쳐 주는 말이 조서 내용이 거꾸로 되는 말이예요.(웃음) 그러면 그렇게 써 놓고는 말이예요, 쭉쭉 찢어요. 조서를 꾸미긴 뭘 꾸며? 데리고 놀지요 뭐. ‘당신 보니까 이렇게 생겼고, 여편네가 이렇겠구만. 버릇들이 없어 가지고 오줌 싸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겠구만’그러면 그거 어떻게 아느냐고 해요. 그러면 ‘이놈의 자식아, 그거 모르면 내가 여기 들어와 앉지 않았어’하는 거예요. ‘잘난 사람이 들어오지, 못난 사람이 들어오는 거야?’이러고 데리고 노는 것입니다.
그때에 치안국장 하던 사람, 이런 사람들 이름도 내가 잊어버리지 않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거예요. 한번 다 불러 가지고 만날 때도 있겠지요. 그때 꼬인 다리를 하고 훈시를 하던 그 사람들이 오늘도 그와같은 자세를 갖고 나타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