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쓰시겠다 하라.
본 문 / 누가복음 19장 29∼36
주 제 / 교만과 고집을 버리면 예수께와 함께 일하고, 예수와 함께 영광을 얻는다.
작성일 / 2024년 3월 24일. 종려주일. (№ 24-12)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 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눅 19:28∼36)
Ⅰ 쓰임받기를 사모하자 (창 1:26)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있다. “사람은 공동체생활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다.” 이런 뜻일 것이다. 공동체를 떠나면 자유롭긴 하다. 그렇지만 행복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국가’, ‘가정’, ‘일터’, ‘교회’ 모두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고마운 공동체이다. 그러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 누구나 동일한 행복을 제공받는 것은 아니다. 능력과 실적에 따라, 혹은 됨됨이에 따라 차등적으로 행복을 제공받는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일수록, 즉 ‘쓰임 받는 사람’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일터’를 생각해보라. 일터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 성과를 내는 사람, 그리고 됨됨이가 잘 갖추어진 사람일수록 귀하게 쓰임 받는다. 귀하게 쓰임을 받으니, 귀한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안전하고 풍요롭게 가꾼다. 그래서 ‘쓰임 받는 사람’일수록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이다.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공동체로부터 쓰임을 받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통한 행복’을 얻게 된다. 또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우리는 곧 하늘로 간다. 그러면 하늘에서는 누가 행복할까? 당연히 하늘 일에 쓰임 받은 사람이 하늘에서 행복하다. 신앙공동체로부터 쓰임 받고, 하늘의 일로 부터 쓰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신앙생활의 보람을 얻는다. 그래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
간혹 “난 쓸모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자책하는 사람을 본다. 그런데 하나님은 쓸모없는 사람을 창조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 1:26)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은 쓰시려고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니 쓸모없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쓸모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를 왜 상속자로 삼아주셨다고 하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으라고’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보람을 얻으라고’ 상속자로 삼아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기독교신앙 안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이 없다. 다만 이 사실을 모르고, 쓸모없는 인간이라 한탄하는 사람이 있고, 이 사실을 알기에 쓰임 받으려고 자신을 가꾸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신앙 안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래야 보람과 행복이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Ⅱ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눅 19:28∼36)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실까?
첫째, ‘작은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이 찬양은 ‘왕을 향한 찬양’이고, ‘메시아를 향한 찬양’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진은 ‘왕의 행진’이고, ‘메시아의 행진’이다. 그런데 이 장엄한 행진에 등장한 짐승은 ‘백마’도 아니고,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이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스타일이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과 일하고 싶다. 그러니 예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자신을 ‘작은 사람’으로 가꾸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하나님께서 하늘백성으로 부르신 사람들 중에 잘난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러셨을까?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나님은 ‘잘난 사람’을 기피하신 것이 아니라, ‘잘난 척 하는 사람’을 기피하셨다는 뜻이다. 잘난 사람들은 자기가 잘난 것을 안다. 그래서 잘난 척이 몸에 베였다. 교만에 빠질 위험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그래서 쓰지 않으신다. 그러니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작아져야 한다. ‘겸손한 사람’으로 가꾸어야 한다.
‘바울’은 잘난 사람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로마시민권자’였다(행 22:28). 학문적으로는 ‘가말리엘의 제자’였다(행 22:3). 율법적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바리새파’였다(빌 3:5). 유대 청년으로써 올라갈 때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도무지 쓰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달라졌다. 예수님이 그렇게 완벽한 바울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셨기 때문이다. 눈을 멀게 했다가 다시 뜨게 했다. 남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기이한 방식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변했다. “…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b∼9a). 그리스도의 편에 서려고, 그리스도께 쓰임 받으려고 자신을 빛나게 했던 모든 것들을 버렸다고 고백한다. 배설물 버리듯 깨끗하게 버렸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이렇게 교만을 쏙 빼고서야 쓰임을 받았다. 누구든 작은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쓰임을 받는다.
둘째, ‘순수한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선택하신 이유는 ‘순수한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예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성장한 나귀’는 사람도 태워보았고, 짐도 실어봤다.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하다. 혹시 등에 탄 주인이 졸더라도 주인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척척 인도한다.
관련된 일화가 있다. 신라 장군 ‘김유신’이 ‘천관’이란 기생을 사랑하여서 날마다 기방을 찾았다. 그러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 정신 차려야겠다. 다시는 기방을 찾지 말아야겠다.” 다짐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말에 올라 사색하다가 깨어보니 말이 기생집 앞에 멈춰 서 있다. 깜짝 놀란 김유신은 전쟁터를 함께 누비던 애마를 목 베어 죽인다. 이것이 경험 많고 노련한 말의 단점이다.
장인에게는 ‘장인정신’이 있다. 항상 자기가 옳다 생각하고, 누구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기생각대로, 자기 습관대로 행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지 않으신다. 일마다 하나님의 생각을 묻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하는 사람을 쓰신다.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하여서 하나님의 생각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을 쓰신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을 쓸 수 없다.
‘사무엘’이 ‘새 임금’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이새의 아들들’을 만났다. 이때 장자 ‘엘리압’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용모 번듯하고, 키 크고, 똑똑해 보였다. 그래서 기름을 부으려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만약 사무엘에게 ‘장인정신’이 있었다면, 하나님과 충돌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참 눈도 없으시다.” 오히려 하나님을 책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에게는 그런 장인정신이 없었다.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했다. 그래서 즉시 자기 판단을 지우고, 하나님의 판단에 순종한다. 그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수 있었다.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한 사람으로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 쓰임 받는다.
Ⅲ 쓰임 받는 사람이 되자!
신앙의 길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첫째는 ‘작은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한다. ‘교만’ 쏙 빼고 ‘겸손한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한다. 둘째는 ‘순수한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한다. ‘경험’, ‘장인정신’ 쏙 빼고, 하얀 도화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는 사람으로 가꾸어져야 한다. 그러면 나를 쓰시려고 창조하시고, 나를 쓰시려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다. 그렇게 귀하게 쓰임을 받을 때에 ‘행복한 신앙생활’, ‘행복한 천국생활’이 열린다.
<기도>
영광교회 성도들을 작아지고, 순수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하소서. 쓰임을 받음으로써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