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올려봅니다.
150628 고후 8:6-9 제목 : 나를 부요케 하신 은혜
P.W.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SⅠ. 서론
SⅡ.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심
SⅢ. 가난하게 되심으로 나는 부요케 됨
G.N. :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하라
목표 : 나를 부요케 하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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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Ⅰ. 서론
초대 교회 당시에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다. 그래서 바울이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고 하였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은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당하고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풍성하게 구제 헌금을 하였다. 그것도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자원하여 감당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은 기대 이상으로 협력해 주었고 자신들을 기꺼이 주께 바칠 뿐만 아니라 바울 일행에게도 헌신 하였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내서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그들이 기쁨으로 구제 헌금에 동참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사랑함이 풍성한 것처럼 구제 헌금에도 풍성하게 참여하라고 한다. 그러나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지역의 성도들은 어려움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어떻게 풍성하게 구제 연보를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적인 부요를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기에 기꺼이 흉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그들의 손을 넉넉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C.Q. :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혜를 부어 주셨는가?
SⅡ.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심
본문 :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해석 :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부요한 분이셨지만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가난하게 되셨다. 얼마만큼 가난하게 되셨는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되셨다.
자신이 지은 피조물들에게 침뱉음을 당하고 멸시를 당할 정도로 낮아지셨다. 왜 그처럼 낮아지시고 가난하게 되셨는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고아와 같은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고 진정한 부요를 주시기 위함이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악취가 난다. 죽음의 악취, 죄악의 악취, 미움과 시기의 악취로 가득하다. 생명이 살아나야 아름답고 생기가 있고 향기가 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객지에서 아버지의 유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가? 자기 아버지 집은 부자인데 아버지의 품을 떠나 온갖 고생을 하면서 깨달은 결론이 무엇인가? 내 아버지는 부자인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자기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결단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으로 만물을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신데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고아처럼 죄와 고통과 가난 속에 헤메이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주고 가난에서 벗어나 참된 부요함을 주시려고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이다.
PS)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다. 그 분은 일본 유학까지 하셨고 김포 일대의 땅이 다 그 분의 소유일 정도로 큰 부자이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과 고아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자신은 통일이 될 때까지 신발을 신지 않겠다고 하면서 맨발로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셨던 분이다. 그 분이 부와 명예를 충분히 누릴 수 있었던 분이셨는데도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스스로 낮아지셨던 이유는 무엇인가?
영적인 소경이 되어 고아처럼 살아가는 자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어 진정한 부요를 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가난하게 되셔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요함을 나누어 주려고 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가난해 지셨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의사이자 신학자이며 음악가였는데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프리카의 오지로 가서 병원을 세우고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흑인들을 치료하여 원시림의 성자로 불렸다. 그는 부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요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졌다.
C.Q : 또한 예수님은 왜 스스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 달리셨다.
관주 :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것이지만 문제는 사람이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할 수가 없다는데 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함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정죄와 저주가 뒤 따른다. 그래서 누구나 십자가 위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나 대신 저주를 담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게 되었다.
또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가장 무서운 형틀이었다. 사형수나 반역자들을 십자가 위에 매달아 죽이는 형벌의 도구였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은 죄와 허물을 마땅히 그 십자가에 위에서 감당해야 될 터인데 예수님이 내 대신 감당하신 것이다.
관주 :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다 지불하셨기에 이제는 더 이상 치루어야 할 죄 값이 남아 있지않다.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면서 고통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사는 복된 존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은혜는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고 값없이 주는 것이 은혜이다.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시고 가난하게 되심으로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관주 :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가 없다. 다윗도 말하기를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바로 내가 아무런 공로도 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C.Q. :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SⅢ. 가난하게 되심으로 나는 부요케 됨
본문 : (고후 8:9)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해석 :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나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예수님의 부요가 나의 것이 되었다.
우리는 아담의 씨로 태어나서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면서 죄와 저주와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 살아 왔었다.
카드를 잘못 사용하여 신용불량자가 되면 빚에 쪼들리고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고 가난과 고통속에서 신음하게 된다. 그 때 누군가가 그 모든 것을 청산해 주면 더 이상 빚쟁이들에게 시달리지 않게 되고 밤에 평안히 잠도 잘자고 자유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처럼 마귀의 종노릇하며 시달리고 있는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빚을 다 청산해 주셨다.
주님께서 낮아지심으로 나를 마귀의 종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나에게 주셨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 대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것이다.
관주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생명을 갖지 못한 자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대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스스로 죽어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여 주셨다. 속량이라는 것은 풀어 주셨다는 의미이다. 옛날 노예들을 사고 팔 때 어떤 사람이 노예를 사서 그 노예를 풀어주어 자유케 해주었다고 한다. 우리도 마귀에 사로잡혀 마귀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 값을 모두 갚아 주심으로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죄의 노예에서 풀어 주셨다. 다시 말하면 속량하여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으심으로 우리는 몸이 성하게 되었고 질고를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 스스로 낮아 지셨고 저주를 받으셨다. 죄를 담당하셨고 채찍을 맞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부요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사야 선지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관주 :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창에 찔리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면서 돌아가시기 까지 침묵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죽이시는 고통까지도 감내하시는 참사랑의 마음이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죄에서 놓임 받고 참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6.25 전쟁때 어떤 엄마가 피난가다가 엄동설한 추위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 눈 속에서 자기의 옷을 벗어 아기를 감싸안고 자기는 대신 얼어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은 죽고 아기는 그 엄마의 사랑 때문에 살아나게 된 것이다. 아기를 살리고자 하는 엄마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아기가 살아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고아와 같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부요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창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요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넘어뜨리고 죽이고 끝내는 멸망시키려고 한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 묶어서 죄 짓게하고 그 죄를 근거로 질병을 가져다 주고 가난과 저주를 주고 관계를 파괴시키고 분열하게 만든다. 이 세상을 사단의 성안에 가두어 놓고 죄의 종노릇을 하게 만들어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러한 권세를 무너뜨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어서 우리를 풍성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 예수 밖의 그 어디에서도 참다운 만족과 부요함을 누릴 수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영적인 부요를 누리지 못하고 영적인 가난에 허덕이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종교 생활에 그치고 말면 참다운 부요를 누리지 못하고 영적인 곤고함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영적인 부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거하여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실 때 영적인 풍성함과 부요를 누릴 수가 있다. 주님은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언제든지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들이면 주님의 부요와 풍성함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C.Q. : 그러면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G.N. :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하라
본문 : (고후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해석 : 고린도 교회는 여러면에서 뛰어난 교회였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구제헌금에 있어서도 풍성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풍성하게 하라고 하는 것은 성취하라, 완성하라, 이행하라고 하는 뜻이다.
관주 : (고후 8:7, 공동)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믿음이나 말이나 지식이나 간절함이나 사랑에서 뛰어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서도 뛰어남을 보여 그들의 사랑함이 말뿐이 아닌 진실한 것임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좋고 사랑이 많다고 하면서 자신의 것을 나누고 베푸는데 인색하다고 하면 그것은 참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베풀고 나누는 은혜에도 풍성하라고 하는 것이다. 헌금의 원칙은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해야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자라고 하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고 베풀어야 할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롬 15: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롬 15: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롬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전달하려고 가면서 쓴 편지이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쁘게 구제헌금을 하였는데 그들이 영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빚을 진 자들이므로 육적인 것을 나누어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우리도 은혜를 받은 자라면 나의 육적인 것을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 물질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내가 받은 은사를 나누어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
BS) 사도 바울은 한 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다. 그 날도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다. 그리고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자기가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인생을 온전히 헌신했다.
관주 :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그처럼 자신의 인생을 주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이다.
PS) 세계 모자 판매량의 35%를 차지하고 있는 백성학 장로의 이야기가 있다. 전쟁 중에 가족과 생이별하고 미 해병 제1사단에서 잔 심부름을 하던 소년 백성학은 북한군이 쏜 포탄으로 유류창고가 폭발했을 때 그곳에 있었다. 이를 본 데이비드 비티라는 병사가 그를 구출했고, 미군 야전병원을 돌며 완쾌될 때까지 헌신적으로 돌봤다.
전쟁이 끝나고 백 회장은 군에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학생모자 제조 공장에 취직한다. 그는 열심히 일해 공장장의 눈에 들어 판매원으로 발탁됐고, 18세 때는 공장 하나와 판매 점포를 관리하는 자리에 오른다. 19세 때는 모자공장을 차렸으며 현재 전 세계에 1억개 이상의 모자를 판매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백 회장은 비티에게 받은 은혜를 보답하고자 1989년 어느 날 그를 찾았다. 비티는 백 회장을 만난 것만으로 큰 선물이라면서 도움을 사양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비티의 장례식을 찾은 백 회장은 ‘받은 사랑을 사회로 되돌려주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처럼 받은 은혜를 갚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결론) 하나님은 고아와 같은 나를 부요케 하셨다. 하나님 없이 세상의 죄악 가운데 헤메일 때 사랑으로 불러주시고 자녀삼아 주셨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려 주시고 사시사철 알맞은 과일들과 곡식들을 주셔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러므로 당연히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큰 은혜는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사랑이다.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매일매일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받은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내게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주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다. 생명도 주셨고 먹을 양식도 주셨고 일할 수 있는 직장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다. 가정도 주시고 자녀도 주셨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먼저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낳아 주셨고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천국의 시민권을 주셨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내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청지기의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이다. 베풀고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했음에도 없는 것을 바라보며 불평하고 비교하고 원망하며 살아간다.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신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날마다 감사로 제사 드리고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자가 되자.
나누는 삶은 꼭 물질만이 아니다. 나의 시간을 드려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마음을 나누며 연약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며 격려해 줄 수 있다. 나의 재능을 드려서 도와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재능기부라는 말도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풍성케 하시기 위해 오신 것처럼 우리도 내게 있는 것을 나누고 베풀어 줌으로 나의 인생도 풍성해지고 다른 사람의 인생도 풍성케 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