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 이야기
Ⅰ. 회고(回顧) 편
4. 역경
⑴ 아내와 사업
남대문 자유상가의 ‘동신지갑’에서의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나와 조금 모은 돈으로 청량리 언덕위에 작은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 핸드백 가내공업형식의 공장을 또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관수를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동생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아마 이것이 우리형제들의 끈끈한 물 보다 진한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좁은 단칸방의 청량리에서 시작한 공장이 성남시의 단대동 버스종점 근처의 신구전문대학 입구길 옆에 있는 살림집이 딸려 있는 곳으로 이사하여 가방(핸드백)공장을 운영했다.
가내공업 형식의 여성 핸드백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가방공장이기에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업의 핵심인 영업부장으로 지내며 어리석은 호구시절도 보냈고 영업의 많은 노-하워(know-how)를 얻었기에 새로운 사업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끔은 풍국산업의 가방도 만들어 주었으며, 관수는 풍국산업의 샘플사(Sample leader)로 일한적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 생산품은 대부분 남대문시장이나 혹은 명동의 백화점 등지로 납품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자재대금과 직원의 급여도 많아졌고 기동성이 필요하여 자동차도 구입하였으며 따라서 모든 비용이 증가했기에 이에 따른 거래처의 관리를 위해 주변에 하청공장도 여러 곳을 두어 운영했다.
나는 공장이 딸려있는 집이기에 차수와 관수는 공장 내의 방에서 어머니와 득수 미자는 중간에 큰방에서 그리고 나는 모퉁이 작은방을 아내 그리고 정현 이와 간난 애기인 시형이 그렇게 우리가족이 사용했다.
어머니 모시고 공장에서 많은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도 고맙지만 무엇보다 애들과 같이 놀아주지 못해서 늘 애들에게 미안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위해 아내가 저쪽 공장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좀 떨어진 이쪽 방으로 문을 열고 밥상을 방에 들여 놓는데 어린 정현이가 달려들어 국그릇을 쏟았다. 뜨거운 국물이 애기의 털옷 사이로 쏟아져 버린 것이다.
소스라치며 울어댔고. 깜짝 놀란 나는 얼른 털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는 바로 소독과 화상에 따른 응급 치료를 했다. 하지만 너무도 놀라 손이 덜덜 떨던 기억이 생생하다.
후에 여자인 정현이 다리에 흉터라도 남는다면 어쩌나 하고 무척 노심초사(勞心焦思)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피부가 살아나며 흉터가 지워지는 것을 보며 너무 감사했다.
아내는 시집식구들과의 생활에 늘 불만이었으며 따로 분가하기를 소원했다. 내가 밖의 사업에 바빠 애들과 아내에게 늘 무심한 것 같아 언젠가는 기회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분가가 될 것이라며 아내를 달랬었다.
그러던 터에 남대문시장의 핸드백상가에서 알게 된 친구 노서균의 추천으로 이대입구에 가방 핸드백 소매점의 매장을 인수받아 상호 ‘삐삐핸드백’,매장을 차렸으며 아내는 가계를 운영해야 했기에 아내와 애들을 성남시에서 서울 이대입구의 매장주변에 방을 얻어 이사시켰다.
승용차가 있기에 처음에는 공장에서 매장까지 출퇴근을 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많은 경비가 들며, 출퇴근에 어려움이 있었으며, 더욱이 아내의 부탁도 들어줄 겸 어린 애들이 공장에서 풍기는 가죽냄새와 본드냄새를 견디며 자라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우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작심하고 방 한 칸을 얻어 이대입구 매장주변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⑵ 집안 군 생활
할머니와 어머님의 구전에 의하면 아버님은 일정시대에 군 생활 중 8.15행방을 맞아 집으로 올수가 있었으며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오랫동안 끼니를 굶었기에 배가 무척 고팠으나 때마침 일본섬인 대마도에 도착하여 보니 섬 주변에 뜻밖의 누런 살구가 많이 떨어져있어서 실컨 먹고 끼니를 때웠다고 한다. 이때 살구를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하루속히 고향으로 귀국하려 했지만 한국에 올 뱃삯이 없어 오랫동안 대마도에 묶여있었으며 집으로 바로 올수가 없었다. 당시의 일본국의 패망으로 일본인들에 귀국행렬이 이어질 무렵이기에 나라는 온통 어수선한 상황 속에 이곳에선 도저히 귀국할 뱃삯을 마련할 길이 없기에 여러 통로를 통해 고향의 할머님께 서신을 보내게 되었으며 이 소식을 알게 된 할머니가 인편으로 여비를 여러 차례 보냈으나 이 또한 당시이 어려운상황이라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중간에 없어지는 일이 생기게 되어 학수고대하고 기다리던 아버님을 애태웠으며, 어렵게 전해 받은 여비를 받아 집으로 올수 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지에 있다 보니 주변 분들에 비해 늦게나마, 일본까지 다녀온 신랑이라고 하여 중신애비의 열띤 중신으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기에 한국 신식군대에 또 입대하여 현역으로 또 근무하였으며, 만기 제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군대생활이라고 하면 신물이 난다고 하셨다.
나는 현역으로 입대하여 육군본부 군악대에서, 그리고 차수는 군복무를 동네에서 방위로 근무하였으며 내가 남대문에서 월급쟁이로 근무할 때 청량리에 월세 방인 아주 좁은 신혼살림의 4식구가 겨우 누워 자는 단칸방에서 살고 있을 때, 차수가 방위기본 훈련을 받으려면 교통이 이곳이 좋아서 형 집에서 다니겠다고 찾아와 몇 주간의 훈련이 다 끝날 때까지 좁은 방에서, 나와 아내 그리고 정현이 그리고 갓난애 시형이와 같이 잠을 잘 수밖에 없기에 무척 불편했지만 그때 힘들고 어렵게 지낸 일들이 생각해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며 아름다운추억이 되었다.
관수는 다행히 육군방위로 근무하게 되었기에 출퇴근하기는 아주 불편했겠으나 그래도 성남시 집에서 출퇴근하며 성남공항에서 근무하였었다.
그리고 득수는 의무경찰로 지냈기에 인천시 인천제철(주)안에 있는 205전투경찰대로 배속 받았는데 때마침 소속된 그 경찰대장이 동한이 형의 사돈관계에 있기에 내가 인천 연안부도의 라이프주택에 사시는 형님을 몇 차례 찾아가 형수님께 득수의 안위를 부탁했었다.
사실 득수는 막내 남동생으로 나와는 9살의 차이가 나기에 어려서는 아주 귀엽고 사랑스런 동생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었으며, 늘 애기 같이 생각했기에 다른 동생의 학교졸업식에는 참석도 못했으나 득수의 구로남초등학교 졸업식 때와 여의도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리고 아주대학교를 졸업할 때는 내가 빠지지 않고 꼭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이는 내가 부모님을 대신하여 참석도 했었지만 막내에 대한 애뜻한 마음이 더욱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의무경찰로 복무하는 득수가 더욱 신통하고 대견스러웠다.
⑶ 시형 이마의 상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밥을 하기위해 부엌에서 부산을 떨고 있을 때 방에서는 시형이가 내 어깨를 밟고 장롱안의 이불을 잡고 올라가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정현이는 나이가 더 먹어서인지 여자 아이라서 그런지 소꿉놀이 장난감을 가지런히 갖고 놀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시형이는 물구나무 서기 라든가 또는 앉아있는 내 어깨를 밟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다.』그런데 갑자기 시형이가 이불을 잡고 올라가다 미끄러져 거꾸로 떨어지고 말았으며, 갑작스런 일에 나는 본능적으로 빨리 움직였으나 순간적인 일이어서 미처 잡지 못했다. 이마가 장롱의 모퉁이에 떨어져 피가 철철 흐르고 애는 까무러치게 울고 있었다. 나는 당황스럽고 너무도 겁이나 얼른 끌어안고 병원으로 달려갖다. 늦은 저녁이라 병원이 문을 닫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갖고 뛰었으나 이대입구 사거리 2층 ‘이상윤 정형외과’가 때마침 불이 켜져 있기에 올라가서 응급수술을 할 수 있었다. 깨끗하고 예쁜 얼굴이마에 바느질 흉터가 생겼으나 빨리 조치를 취해서 불행 중 다행이다.
너무도 놀랬다. 내가 다친 것보다 자식이 아프다는 것이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을 그 때 알았다. 정말 이제부터라도 더욱더 많은 관심이 필요 했으며 특히 자식들의 건강에는 더욱 신경을 써야했다.
⑷ 부부싸움의 중재자
이대입구로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의견충돌로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살다보면 서로 뜻이 달라 얼마든지 부부싸움을 할 수 있으며, 서로 알고 보면 내용은 별일 아닌, 이해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부부의 다툼은 해놓고도 후회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 칼로 물배기 라는 말이 있다. 뜻이 달라 말다툼을 하고나면 서로 불편하며 홧김에 함부로 말하지만 잠시 지나고 나면 후회스럽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화해를 할 수 있나 하며 벌려진 일들을 후회하지만 때를 기다리고 잠시의 냉전이 지나면 좋은 방법이 나와 슬그머니 언제 그랬는가? 하며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쪽이 잘못했다고 해준다면 더욱 빠르게 화해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부부 싸움 아닌가?
놀랍게도 처외삼촌이 찾아왔다. 뜻밖의 방문에 웬일인가 하고 놀라 알아보니 우리의 부부싸움에 화해를 해주려고 왔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내는 불편해진 우리사이를 외삼촌에게 털어놓아 이를 딱하게 여긴 건장한 외삼촌이 나를 -
“힘으로 라도 혼내어서 버릇을 고쳐주겠노라며 부부싸움을 해결 해주려고 찾아왔다”
며, 아내의 흑기사를 자처하는 체격이 건장한 외삼촌의 당당한 말에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내 귀를 의심하며 어이가 없어 갑자기 멍해졌다.
마치 나이어린 철부지를 다루듯 내 뱉는 건방진 말투에 속이 뒤집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주먹으로 때려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꾹 참아야 했다. 이유야 어떻든 부부싸움을 원만하게 해결해 주려 중재자로 멀리 동두천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나이들은 사둔어른이 아닌가.
그러나 결혼식 때도 참석하지 않아 얼굴한번 보지 못한 처외삼촌이라는 사람이 우리 사는 곳을 처음 찾아와 부부싸움을 한 나를 ‘혼내주려고 왔다’는 굴욕적이며 건방진 말투는 한참 피가 끓는 젊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웠다.
한편생각 한다면 오죽하면 집안에서 제일 씩씩한 지원병에게 내 남편을 혼내주라고 멀리 동두천에 있는 싸움 잘하는 외삼촌에게 요청했겠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남편인 나를 믿지 못해 지원병을 요청한 아내에 대한 섭섭함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아내가 그냥 잘못했다고만 말해 준다면 나는 무엇이든 용서해줄 것이며 또한 난들 무엇이 그리 잘났겠는가..,?
나도 또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것인데 굳이 우리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동두천에서도 버스 편으로 한참을 들어가 산골 외진 곳이 외삼촌집인데 철없는 신혼부부의 가정사를 참견하여 해결해 주고자 이곳까지 오도록 했다면 내 인격과 입장은 무엇이 되겠는가?
설령 이렇게 해서 일이 해결된다면 나는 이제 처갓집 근처에 무슨 낯을 들고 다니란 말인가?
이 방법은 나를 무척 당황스럽게 만든 잘못된 해결 방법이었다. 우선 사돈어른을 마음 풀게 하여 보내드렸으나 굴욕적인 마음과 수치심 그리고 엉망이 된 자존심으로 내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했다.
⑸ 장인어른의 방문
저녁10시가 넘어 매장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누가 찾아왔다. 어깨에는 큰 함 가방 같이 보이는 나무 궤짝을 둘러메었으며 농짝 위에는 이불과 옷가지 그리고 냄비와 주걱까지도 꽉꽉 묶어 주렁주렁 매달고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시커먼 옷을 입고 오래된 중절모자를 눌러쓴 마치 피난민 같은 차림의 사람이 손에는 라듸오를 들고 늦은 밤중인데 찾아온 것이다.
자세히 보니 장인어른이 아닌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비록 단칸방이며 불편한 방이지만 집으로 모셔 따뜻한 식사와 약주를 대접하였다. 이러한 장인의 사정을 아내는 진즉에 알고 있었을 터 이지만 친정아버님의 추한 모습을 남편과 애들에게 보이기 싫은 자존심 때문에 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은 눈치였다.
얼마 전부터 장모가 매장주변의 방을 얻어 혼자 기거하고 가끔은 처남과 처제가 들르곤 하기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가졌으나 상황이 이렇게 급한 일이 있어 그런 줄은 몰랐다.
그래서 여기에 장모와 가족들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고 찾아온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장모는 이곳에 없었으며 큰 처제 집에 있었을 때다. 그래서 장인에게 동두천의 큰 처제 집을 알려드렸더니 -
“아내를 찾아 가봐야겠다.”며, 일찍 눈을 떠 새벽길로 떠나셨다.
그런데 아내는 장모의 행적을 가르쳐주지 말라며 가르쳐주는 나를 못 마땅히 여기며 눈을 부라리며 꾸짖는다. 뜻밖의 아내의 행동에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러느냐 남편이 아내와 가족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이를 막는 것은 천륜(天倫)을 어기는 것이 아니냐!”
“설령 지금입장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이가 불편하게 되었다고 해도 이는 자식의 도리로 서로 화해를 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저 무거 운 이사 짐을 등에 지고 한밤중에 아내를 찾아온 아버지에게 자식이 안 가르쳐 주어 서로 헤어지게 된다면 이게 말이 되냐?”
고 한동안 이일 때문에 다투었다.
금호동의 처가집이 재개발로 인하여 모두 철거한 것이다. 금호동 집은 셋방 집이었으나 철거당하자 갑자기 오고갈 곳이 없었다.
이때 장모의 채권자들은 철거에 따른 보상금으로 이사비용이 나오는데 이것이 라도 받고자 그동안 그 집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며, 채무자들의 시달림에 장인과 처남 그리고 처제들은 뿔뿔이 헤어져있을 수밖에 없었고, 장모는 우리 집 주변으로 그리고 미자 처제는 미아리에 방을 얻어 생활하는 등의 어려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집을 지키던 장인은 정부정책에 의한 철거반의 철거개시에 결국 내몰리다시피 있는 가제도구를 하나라도 더 가져올 양으로 등에 메고 이고 들고 나왔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당신은 가장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며 온갖 어려움에도 끝까지 피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깨끗하게 마무리를 다한 당신을 존경하며 이에 박수를 보냅니다!』
⑹ 비상시국
국가정보부장인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대통령의 서거로 정치가 엄청 혼란으로 치달았다.
이후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을 조사하는 최고기관인 ‘수사대책 본부장’을 맡았으며, 이를 계기로 전두환은 정권을 잡고자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기구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았으며 정부의 모든 권력기관은 ‘국보위’의 통제를 받았으며 정국은 비상계엄국가로 급속도로 전환되었다.
나라는 불안했으며 세상은 어딜 가나 데모정국 이었다. 거리의 이곳저곳은 온통 학생들의 데모와 시위장소로 변했으며 이를 막겠다고 경찰과 특수부대의 군인들은 대학교 정문 앞을 막고 있었다. 내사업장은 이화여자대학교 앞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데모와 최루탄의 독한 냄새가 난무하는 국가비상정국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매장매출은 형편없이 떨어져 결정적인 손실과 피해로 이어졌다. 또한 근본적인 밑천이 부족한 우리는 회전자금에 따른 자금융통도 되지 않았기에 매장운영에 한계를 느껴 포기해야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공장이라도 유지 해보려 했지만 전국적인 불황의 여파로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왔지만 이도 수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장도 성남에서 자양동인 서울로 입성했으나 우리는 사업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기에 내수공장을 재정비하여 수출용 가방을 만들기로 하고, 화양동에 있는 ‘삼광교역주식회사’라는 가방수출회사를 찾아가 하청계약을 맺고 상대적으로 운영자금이 적은 가방수출 하청공장으로 전환하고. 이대입구의 모든 것을 정리하여 자양동 공장으로 다시 합하게 되었다.
⑺ 아내의 우울증
아내는 어린 시절 친정아버지가 일하던 ‘문산’의 미군부대 주변에서 살았으나 미군이 철수하면서 부대가 없어지자 친정아버지는 직장을 잃게 되었고 형편이 어려워져 결국 다니던 ‘문산여중’을 졸업하고 진학을 못했으며 그 후 서울 ‘금호동’에 자리 잡게 되면서 집안을 돕기 위해 어린나이에 생활전선의 이곳저곳에 여러 회사를 다니며 일을 했다한다. 그러던 중 방배동의 한일합작회사인 ‘아리랑모사’라는 직물 공장에서 일을 했을 때 군 생활하던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으로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아내를 맞아 우리는 새로운 고생이 시작 된 샘이다. 그녀는 좀 더 여유 있는 사람을 만났어야 했건만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또다시 새로운 고생을 하게 된 것에 미안한 마음이 한구석을 늘 차지했었다.
어느 날 업무 차 나갔다가 저녁 무렵 집에 들어오니 집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변해버렸다. 이유는 아내가 갑자기 자살하려고 독극물인 “쥐약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주변에 같이 있던 가족과 공장의 직원들이 너무 놀라 이를 어찌해야할지 몰라 우선 가까운 한라병원 응급실로 옮겨 응급치료를 받고 입안과 위장을 청소하는 응급조치를 취하고 병실로 입원 시켰다고 한다.
너무 어이없고 황당한 일에 당황한 나는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다. 다행이 병원에 누워있는 아내의 상태는 좋아진 것 같았다. 병원의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
“음용된 약은 치사량은 아니었기에 응급치료는 했으며, 우발적인 우 울증으로 일어난 순간적인 일이며, 건강에는 이상 없으니 퇴원하여 집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아내를 쳐다보니 무엇이 얼마나 힘이 들기에 그랬냐고 물어보니 시어머니 모시고 시동생들과 그리고 많은 공장의 직원들의 식사준비와 뒷바라지, 그리고 마음에 맞지 않는 주변의 숨 막힐 것 같은 현실이 계속될 것 같은 생각에 정신적 우울증으로 변하여 갑자기 삶을 포기하고 싶어 순간적으로 저질렀다고 털어 놓는다.
그렇다고 병아리 같은 귀여운 자식이 둘이나 있는 사람이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만큼의 고통이라는 점에는 뜻밖의 놀라움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일없던 그녀가 갑자기 남편과 자식을 모두 포기할 만큼의 행동에 놀라웠으며 그녀는 정신적인 우울증세가 항시 병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끔 엉뚱하리 만큼 피해의식의 말과 행동을 자주했기에 이해와 설득이 필요했으며, 우선은 어색하고 견디기 힘들겠지만 우리 조금만 참아보자고 안심을 시켜 집으로 돌아오니 이상하리만큼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일과에 바로 복귀했다.
이후에도 아내는 고집스런 집착성과 강한 아집과 피해의식에 젖은 말들을 가끔씩 하였기에 지난번 병원에서 들은 것 같이 아내의 우울증세가 또 시작하나하고 걱정하게 된다.
⑻ 광탄 으로
‘삼광교역’ 주식회사에서 하청으로 가방을 만들어서 임 가공비를 수입으로 하기에 자양동의 비싼 공장의 임차비용과 인건비를 제외하고 남는 것이 없었다.
공장일이 그렇듯 납기일에 시달려 밤새워 작업하는 일이 허다했으며, 그럼에도 집안 식구들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웠다. 판매에 따른 이익은 없고 생산 인건비에만 의존해야 하는 현실은 우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본사 ‘삼광무역’은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 에 공장을 갖고 있었으며 공장의 규모는 상당히 크고 여유가 있으나 공장이 인원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형제들과 의논하여 그곳으로 공장을 1981년 가을에 이전했다. 파주군 광탄면은 완전한 시골이었다.
우리식구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서 살았기에 시골생활에는 처음 접해보는 것이라 모두 힘들고 어려워했다. 이곳은 무엇이든지 다 새로운 생활이었으며 적응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직원들과 우리형제 모두는 수개월 동안을 열심히 일하며 제품을 납품하였다. 그렇게 자리를 잡을 무렵 우리에게 또 다시 시련이 왔다.
⑼ 크레임 과 가족
일이 바빠서 공장에서는 열심히 밤을 새워가며 일했다. 그동안 공장의 인원도 많은 변동이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우리식구만 해도 기본이 되었기에 공장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이는 큰 힘이며 우리의 노하우(know-how)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만든 물품이 모두 크레임(claim)에 걸렸는데 본사가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든 제품은 프랑스에 수출 하였는데 1981년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회당의 미태랑(Mrancois Mitterrand)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졌고 그러면서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자 한국에서 가방을 수입해 간 프랑스 바이어(buyer)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실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상품에 하자를 걸어 오랫동안 바다에 띄워놓고 있다가 결국에는 전량을 반품하였다.
이때 우리나라는 1980년5월18일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군사 비상계엄정국이었기에 우리같이 수출을 해놓고 부당한 크레임(claim)을 해결해 줄만한 우리 정부의 어느 기관도 없었다. 그로인한 본사의 도산으로 우리는 외상물품 대금과 그동안 밀렸던 인건비가 속수무책 이었다. 결국 갖고 있던 우리들의 재산인 재봉틀 등의 장비로 어느 정도 청산하고 빈털터리가 된 가족공장은 해체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관수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가족공장의 사업은 내가 대표로 주관하였으나 그동안 수많은 실험과 경험만을 남기고 나의 무능함을 인정하며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모든 것은 나의 부족함과 나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책임도 질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었으며 결국 우리가족 모두는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헤어지는 가슴 아픈 일로 이어졌으며, 가족이 붕괴되면서 득수와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남아 마무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후에 득수를 통해 들었다.
‘득수’의 말에 의하면
득수의 말에 의하면 당시 군에서 막 제대하여 입시 공부를 하던 중이었고 형들이 모두 떠난 후에 어머니와 둘이 남아서 남아있던 직원들에게 밀린 월급대신 공장을 넘겨주었으며 아주대학에 입학하여 수원에서 홀로 처절한 생활을 했었으며, 미자는 신촌 쪽에 자리 잡은 관수 오빠를 따라가 이대입구 근처 매장에서 점원생활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며, 또한 득수는 수원에 있었기에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 후 어머니는 마장동에서 혼자 생활 하셨고 득수가 졸업 후 영진약품에 입사하여 인천에서 근무하면서 미자와 돈을 합쳐 인천시 구월동에 주공아파트에 전세로 이사하면서 인천생활이 시작됐었고 그때 미자는 동대문 쪽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주안 지하상가로 왔다고 득수는 회고 했다.
이후 나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동안을 떠돌이처럼 방황하였으나 홍은동 문화촌에 ‘홍춘선’ 이라는 친구의 소개로 택시운전사로 근무할 수 있었으나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아내와 연락이 되어 아내는 애들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기에 이산가족 만나듯 연결고리를 통하여 만날 수 있었으며 서울 문화촌으로 자리하였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총책임자로 나를 믿고 따라준 공장의 직원들은 물론이지만 한 가족의 가장으로 가족과 동생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뼈가 시리도록 아픈 나의 실패의 과거였다.
무능한 패장(敗將)으로 입이 열인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운영과 능력부족으로 이때의 우리가족모두가 받은 어려움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밀려가도록 한 것일 것이다. 이때의 내 나이가 31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