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동인천역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입니다.
센터 아카이빙 파트에서 진행하고 있는 <동인천의 추억을 찾습니다> 공모전으로 모집 된 추억의 사진과
인터뷰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동인천역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에서는 2021년도 아카이빙 사업의 일환으로 ‘동인천 중앙시장’과 관련된 사진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동인천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진과 기록물, 이야기도 모집하고 있사오니, 관심 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장록 속에 잠들어있는 동인천의 추억을 공유해 주시길 바랍니다.
동인천 출신 시인 백서은 인터뷰 : "허술해 보이는 건물과 낡은 흔적의 거리를 지나다 보면 세월이 저만치 갔다는 걸 느껴요. 그래도 저는 중앙시장에 들어서면 언제나 즐거웠던 시절과 새 옷 사주시는 부모님과 손잡고 다녔던 즐거운 곳임을 잊지
않았죠."
집 앞에서 백서은님 모습(송림2동 163번지 부근. 1972.02)
□ 선생님은 「동인천의 추억을 찾습니다」는 어떻게 알고 응모하시게 됐나요?
지인이 「동인천의 추억을 찾습니다」라는 공모전이 있으니까 한번 응모해 보라고 인천시청에 올라온 공고문을 보내줬어요. 저도 인천시청 게시판에서 봤고요. 처음에는 내 고향 얘기인데 내가 손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지인의 적극 추천도 있어서 응모하게 됐어요.
살다 보니까 사람들이 다들 자기 지역에 대해 자긍심 갖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동인천이 낙후된 이미지를 갖고 있잖아요. 저 어렸을 때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살던 고향 알려주는 일을 한다는 소식 듣고는 이런 건 내가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란 생각을 했어요.
□ 선생님은 동인천 어디에서 나고 자라셨나요?
태어난 거는 1964년도에 인천 동구 화수동인가 송월동인가 그쪽 어디라던데. 자란 곳은 인천 동구 송림동이에요. 내가 서너 살 때 송림동으로 이사 와서 대학교 1학년까지 20여 년간 살았어요. 송림2동 163번지. 어디냐면요. 송림동 동사무소 쪽 근처에요. 어른들 말로는 '안 송림'이라고 하던데요. 예전 소나무가 울창했었다고 해요. 서까래가 높은 한옥이었어요. 언덕이라서 노동회관이 보였고, 선인재단이 한눈에 들어왔어요.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다 이곳에서 보냈어요. 대학 1년까지 살다가 이사 갔죠. 지금도 인천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어요.
□ 선생님이 갖고 계신 동인천과 관련된 추억 한 꼭지 들려주세요.
처음 동인천에 지하도로가 만들어졌을 때 어린 기억으로는 계단이 높아서 한 번에 못 올라가고 내려갈 때도 몸을 옆으로 돌려서 내려가고 올랐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아장아장 걸어 다녔을 때라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했던 게 기억에 남고요. 지하 차도는 어두운 듯하고 시원했던 기억과, 밖으로 나왔을 때 동굴을 빠져 나 온 듯 즐거웠던 기억이 있어요. 또 주말에는 아버지가 오빠와 저를 데리고 자유공원에 올라갔었어요. 주말뿐 아니라 시간 여유만 생기면 갔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중앙시장은 어렸을 때 명절 때면 설빔이나 추석빔으로 옷 사러 왔었죠. 요즘 말로 말하는 신상 옷이 중앙시장에 많았었어요. 또 시집갈 때 시어머니께서 패물을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중앙시장의 예물·예단으로 했었고요. 당시에 예물·예단은 모두 중앙시장에서 했거든요. 시어머니께서 중앙시장 오셔서 함께 예단했던 일 생각나요. 그리고 예물을 했던 금은방도 중앙시장 통로에서 동인천역 북 광장 쪽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없어졌을 거예요.
또 ‘인현지하상가’라고 인천 시내에서 제일 먼저 생긴 지하상가 있어요. 초창기는 지하도로만 있었어요. 그 지하도로를 거쳐 동인천 구광장으로 나오면 ‘망태 할아버지’라고 해서 역 근처에서 기다란 집게로 돈벌이 되는 휴지 등 줍는 사람이 있었어요. 또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짐을 손수레로 옮겨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경인선 기차 타고 오는 사람들은 다들 짐이 많아서 그런지 짐꾼 불러서 짐 싣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항상 동인천 광장에 있었어요. 동인천역 시계탑이 약속장소 1번지였죠.
□ 어릴 적 동인천에서의 추억과 청년 시절 동인천이 추억이 조금 다를 것 같아요. 기억 나는 동인천 관련 추억이 있으실까요?
내가 20대 때 동인천에 ‘로젠 캘라’라는 맥줏집이 있었어요. 불이 나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인천역 시계탑에서 앞으로 뚫린 도로를 바라보면 오른쪽은 신포시장 길로 왼쪽은 답동성당 가는 길이 다 보였거든요. 그 일대가 다 추억이었어요. 또 지금은 전철이 다니지만, 그전에는 동인천역에 기차가 다녔었어요. 기차는 타본 적이 없지만, 어릴 때 기차 오는 모습이나 개찰구로 사람들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했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대부분 약속을 동인천에서 잡았거든요. 대한서림에서 만나서 그 옆 신포시장으로 먹으러 가고. 신포동 ‘할머니칼국수’라고 해서 자주 가던 칼국수 집, 쫄면집이 있었어요. 근처에는 맥줏집, 막걸릿집이 많았고요. 음악다방과 찻집 그리고 극장도 많았고요.
또 지금은 없어졌지만, 저녁에는 클럽처럼 운영하고 낮에는 대학생들이 미팅할 수 있게 음료수만 제공하던 곳이 있었어요. 과 단체미팅만 할 수 있게 낮에 대학생들한테 열어줘요. 신포시장 건너편 인천신문사 못 가서 있었는데 내 또래들은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삼치구이 거리’도 많이 갔죠. 축현초등학교 근처, 자유공원 올라가는 옆길 쪽에 삼치구이 거리가 있어요. 삼치가 맛있고 싸요. 그때는 배가 고프잖아요. 혈기는 왕성한데, 많이 갔었죠.
□ 선생님은 시(詩)를 언제부터 쓰게 되셨나요?
문학이라는 눈은 뜬 사춘기 시절 소녀부터인데, ‘제물포수필문학회’ 당시 조용란 교수님 회장역임일 때 모임에 있었어요. 86년도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하다가 시를 쓰고 싶어서 서울에서도 동인 활동하다가 인천에 ‘시 작업 동인’에서도 활동을 했었어요. 당시 ‘시 작업 동인’은 회원들은 등단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문학모임이에요. 지금은 중견 작가들이 되었지만, 그 당시 청춘은 언제나 뜨거웠죠. 그러다 서울에서 ‘순수문학’에서 등단을 한 거죠.
□ 선생님은 동인천 시(詩)를 언제부터 쓰게 되셨나요?
등단이라는 문을 거치기 전에 꾸준히 습작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강한 그리움은 어디를 가도 화두처럼 나를 붙잡았어요. 그래서 추억과 삶의 원동력이 된 '동인천'이라는 지명이 문학의 화두로 이끌어 주고 작품을 쓰게 한 거죠. 동인천 시는 직장생활과 나를 찾아 나서려는 끝없는 갈등으로부터 본래의 나를 찾게 해준 거나 마찬가지예요. '고향'과 '그리움'이라는 공통 화제가 '동인천'이라는 어릴 적 영혼 같은 이름으로 나타나게 된거죠. 처음 시를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몇 편이 될지 몰랐어요. 처음에는 몇 편 안 되겠지 하고 쓰기 시작한 거예요. 동인천 시(詩)는 1년에 두 편 이상을 못 썼어요. 그게 나에게 다가와야지 쓰는 거잖아요. 37편이면 그걸 20년 가까이 쓴 거죠.
초기에 동인천 시(詩)를 쓰기 시작했을 때 지금은 작고하신 이석인(시인) 선생님께서 제 작품을 보더니 ‘좋다’, ‘나쁘다’ 얘기는 하지 않으시고, “꾸준히 써봐라.” 이런 식으로만 말씀해 주셨어요. 그때는 잘 몰랐었는데 말씀대로 ‘그래 이거 하나 가지고 한 번 해보자.’ 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 동인천 시(詩)는 부제 없이 번호로만 되어있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번호를 붙인 이유가 있으신가요?
동인천 시(詩)에 부제를 넣는 것이 싫었어요. ‘동인천·22’이면 그게 제목이고, ‘동인천·12’면 그게 제목이에요. 다른 사람들 보면 보통 연작시 쓰고 부제 달아요. 저는 이게 좋았어요. 그리고 동인천 시(詩)는 순서대로 완성했어요. 등단하기 전 80년대부터 습작하다가 등단을 했으니까. 제일 먼저 완성한 시가 ‘동인천·1’인 거죠. ‘동인천·1’은 80년대에 완성을 했어요. ‘동인천·12’까지를 98년도에 시집으로 냈거든요. 6년 정도 걸렸네요. 98년도에 첫 시집을 낸 이후로 1년에 두 편씩 완성해서 ‘동인천·28’까지 2000년대에 완성했어요. 2010년까지 동인천 시(詩)를 쓴 거죠. 그 이후부터는 동인천이라는 이름으로 쓰기보다는 주변의 그림이 그려지는 산문 글로 대신했어요. 결혼하고, 연년생을 낳고 키우다 보니 정신이 없기도 하고…. 지금은 학부모라서 아이들처럼 늘 바쁨이에요.
□ '동인천역 2030 역전프로젝트'에 응원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허술해 보이는 건물과 낡은 흔적의 거리를 지나다 보면 세월이 저만치 갔다는 걸 느껴요. 그래도 저는 중앙시장에 들어서면 언제나 즐거웠던 시절과 새 옷 사주시는 부모님과 손잡고 다녔던 즐거운 곳임을 잊지 않았죠.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면 바로 살아 있는 공간 속 역사로 오래도록 남게 되리라 믿어요. ‘도시재생’이라는 것이 도시 속에서 옛 것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세우려는 것이잖아요. 저도 이런 자리에 한몫하게 되어 뿌듯해요.
백서은님 인터뷰 모습.동인천역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
출처 : 동인천역 2030역전 프로젝트(202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