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1
동양 천문사상 하늘의 역사 2
<사람들> 고구려 별자리전문가 김일권 교수
2008. 12. 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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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로 대중과의 벽 허물기' 시도(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왔네요"역사천문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44.민속학) 교수는 28일 이처럼 말하면서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역사학과 별자리학의 '가로지르기'를 의미하는 역사천문학이라는 말 자체도 특이하지만 김 교수의 약력도 그에 못지 않게 유별나다.
서울대 생물학과 83학번인 그는 졸업 후 3년간 출판사일을 하다가 1993년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시절부터 키워온 동양 사상에 대한 갈망이 그를 공부쪽으로 인도한 것이다.
입학 후 불교 사상에 탐닉하던 그는 1995년 경북 포항시 신흥리로 떠난 답사여행을 통해 '작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답사여행 중 본 암각화에 새겨진 고대의 별자리가 그의 눈길을 끈 것.
"고대인들이 암각화를 통해 별자리를 그렸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몇 년 있다가 시작됐죠"
김 교수는 1997년 고구려별자리를 주제로 한 논문 공모에서 덜커덩 뽑히는 행운을 누렸다. 도쿄에서 열린 고구려연구회 국제학술대회에서였다.
이 일을 계기로 종교학에서 역사천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결과물이 1999년 빛을 본 '고대 중국과 한국의 천문사상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이다.
난관은 많았다. 종교학 속에 역사천문학이라는 주제가 없을 뿐더러 모든 공부를 혼자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떨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도교수였던 윤이흠 서울대 교수 등의 격려 속에 그는 한발 한발 내디뎠다. 고대 중국의 25개 왕조의 역사를 담은 '25史'에 등장하는 방대한 내용의 천문서를 통독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별다른 참고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김 교수는 이처럼 외롭게 공부해야만 했을까. 별자리는 고구려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주목받는 학문이었는데 말이다.
김 교수는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일단 별자리는 기본적으로 신화와 연결돼 있는데 성리학과 신화는 양립하기 어려워 조선시대 이후 별자리 연구가 발달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그 하나.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통섭의 불량 때문이다. 그동안 학제간의 '벽'이 심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한데 아우르는 연구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김 교수는 "전통 천문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는 접점지대에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 천문학자들은 인문학에 약했고, 역사학자는 천문학을 잘 몰랐다. 이 두 학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일종의 '통섭장애'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역사천문학이라는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야심'이 있다.바로 일반인들에게 고대 별자리의 세계를 널리 알리는 것.그는 각종 방송 강연을 나서고 있으며 일반인을 위해 될 수 있는대로 쉬운 글을 쓰자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최근 출간된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사계절)도 이에 대한 작은 실천이다.
"동양별자리는 아직 일반인에게 친숙하지 않습니다. 대중과의 벽을 허무는 작업은 인문학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반드시 해야할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들려줄 별자리 이야기가 많습니다"(웃음)
고구려 고분과 아라가야 왕릉의 남두육성..그 깊은 뜻은?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2019. 1. 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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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라 부부조각상에 새겨진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고대인들은 북두칠성을 죽음을, 남두육성을 삶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여겼다.|국립경주박물관 소장
5~6세기 아라가야인들은 왜 남두육성을 무덤방 덮개돌에 새겨 넣었을까. 지난해 12월 18일 아라가야 왕릉급 고분인 함안 말이산 13호분(사적 제515호)에서는 전갈자리와 궁수(사수)자리 등의 별자리 125개가 새겨진 덮개돌이 확인됐다. 더욱 특이한 것은 별자리가 새겨진 구덩식 돌덧널 무덤방의 벽면이 붉게 채색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전갈자리와 궁수자리의 내력
덮개돌에서 확인된 별자리 중 전갈자리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리온과 관계가 깊다. 사냥꾼인 오리온은 “나보다 더 강한 자가 없다”고 떠버리고 다녔는데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오리온을 죽이려고 전갈을 풀어놓았다. 그러나 오리온은 전갈이 아니라 자기 애인인 아르테미스가 쏜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럼에도 전갈은 오리온을 죽인 공로로 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독침을 휘두르며 오리온에게 다가가는 신화 속 전갈은 별자리가 되었지만 영원히 오리온을 죽일 수 없었다. 밤하늘에 전갈자리가 떠오를 때면 오리온 자리가 서쪽 하늘로 달아나 져버리고 전갈이 하늘로 가로질러 지하로 쫓아가면 오리온이 동쪽에서 올라오기 때문이란다. 동양에서 전갈자리는 청룡별자리라 한다.
궁수자리는 사수자리라고도 한다. 상반신인 사람이고 하반신은 말인 켄타우로스 종족 중에서 케이론이라는 반인반마가 있었다. 현명했던 케이론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로부터 음악과 의술, 수렵, 예언술을 전수받고는 그리스의 신들과 영웅들에게 가르쳤다. 그런데 어느 날 헤라클라스가 쏜 화살이 잘못해서 케이론의 발에 맞았다. 고통에 시달리던 케이론은 원래 불사신이었기 때문에 죽지 못했다. 케이론은 결국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사의 몸을 양보하고 죽고 말았다. 그러자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는 케이론을 불쌍히 여겨 하늘 별자리로 삼았다. 케이론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의 별자리인 궁수자리의 내력이다.
함안 말이산 13호고분의 무덤 덮개돌에 새겨진 별자리. 1500년전 아라가야인들이 봄철 남쪽 밤하늘에서 관측한 별자리라 한다. |동아시아문화재연구원 제공
■북두칠성에 비해 초라한 남두육성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서양 별자리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궁수자리에 속한 6개의 별을 일컬어 남두육성이라고 한다. 북천에 거린 큰 국자(북두칠성)를 축소한 것처럼 은하수에 반쯤 잠긴 국자모양이라 해서 남두육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남두육성은 북두칠성과 견줄 수 없다. 별 밝기가 북두칠성(1~2등급)에 비해 어두운 2~3등급이고 왜소한 편이다. 게다가 남두육성은 북두칠성처럼 1년 내내 보이는 별자리도 아니다. 또 가장 남쪽에 있어서 관측되는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
즉 우리나라에서는 5월 남쪽 하늘에 보이기 시작해서 6월에는 남쪽 하늘 한가운데 위치하고 8월에 남서쪽으로 사라진다. 그런 탓인지 중국에서는 남두육성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그냥 다른 별자리와 같은 수준으로 취급했다. 북두칠성과 쌍을 이루는 동급으로는 치지 않은 것이다.
■북두칠성과 쌍벽으로 대접받은 남두육성
무덤에 별자리를 표현한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이 대표적이다. 안악1호분, 덕흥리고분, 각저총, 무용총, 삼실총, 장천 1호분 등 모두 22기의 고구려 고분에서 별자리그림이 확인된다.
그런데 고구려 별자리 고분의 특징은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이 특히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22기의 별자리 중 86% 정도에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고, 46% 이상에서 남두육성이 관찰된다. 그런데 남두육성이 그려진 곳에서는 예외없이 북두칠성이 함께 등장한다.
북두칠성은 죽음과 북쪽, 하늘을 상징한다. 주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묘주인공의 뒷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묘주인공의 사후 세계를 보호하고 내세를 주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는 남두육성을 북두칠성과 쌍벽을 이룬 별자리로 여겼다.
덕화리 1·2호분의 성수도.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일상과 월상이 새겨져 있다. |김일권 교수의 논문에서
아마도 고구려인들은 방위를 표현하는 의미로 북방의 북두칠성과 남방의 남두육성을 배치한 것 같다. 북두칠성을 죽음, 남두육성을 삶의 상징별자리로 삼았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동진 말기 양희(331~386)의 저작으로 알려진 <상청경(上淸經)>을 보면 “남두육사(南斗六司)는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주관부서인데 남두육궁을 지칭한다”고 했다. 동진(東晋·4세기경)의 역사가 간보가 편찬한 <수신기>는 “남두육성은 탄생을 관장하며(南斗注生), 북두칠성은 죽음을 주관한다(北斗注死)”라고 했다.
■가야인들이 바라본 남두육성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나 그런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대 별자리 전문가인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학원 교수(민속학)는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친다. 신라시대 부부 시신이 안치된 석관의 뚜껑에 해당되는 ‘부부 조각상’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주인공 부부는 베개를 나란히 베고 고요히 잠든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들의 머리 위로 해와 달 원반이 새겨져 있고, 그 옆에 각기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을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천문관을 이어받았는지는 몰라도 신라시대에도 삶(남두육성)과 죽음(북두칠성)을 관장하는 북두와 남두의 점성 관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가야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았을까. 김일권 교수는 “아니”라고 한다. 물론 가야고분에서는 이번에 처음 남두육성 별자리가 나왔다. 하지만 대구 진천동 선돌유적과 고령가야 지역의 별자리 암각화에서 남두육성이 여럿 보인다는 것이다.
북두칠성과 남두육성의 실측대비도. 남두육성은 북두칠성에 비해 밝기와 크기가 보잘것 없지만 북두칠성과 쌍벽을 이루는 별자리로 대우했다.|김일권 교수의 논문에서
물론 이번 말이산 13호분에서는 125개의 별 중에서 궁수자리(남두육성)와 전갈자리(청룡별자리)만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일단 무덤 안의 벽면이 붉게 채색된 것을 주목했다. 4개 벽면을 전부 점토로 바르고 붉게 칠했다.
말이산 13호분을 조사한 최경규 동아시아문화재연구원 조사단장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무덤 벽면의 붉은 채색은 태양과 생명을 뜻하는 남두육성과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지는 않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김일권 교수는 “전갈자리, 즉 청룡별자리도 남두육성, 즉 궁수자리와 마찬가지로 봄철~여름철까지 보이는 별자리”라면서 “결국 5~6세기 아라가야인들이 따뜻한 봄날 남쪽하늘에 나타난 별자리를 관측해서 그려넣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번 발굴은 1500년전 아라가야인들의 천문사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말이산 고분에서 2㎞ 쯤 떨어진 아라가야 왕성터에서는 추정 연병장터와 내무반터, 무기창고터, 망루터 등 왕성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군부대시설 14개동이 확인됐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219회는 바로 ‘아라가야인들이 바라본 봄철 밤하늘’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이 기사는 김일권 교수의 ‘고구려고분벽화의 천문사상 특징-삼중 천문 방위 표지 체계를 중심으로’, <고구려연구> 제3집, 고구려발해학회, 1997을 참고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http://leekihw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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