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람과 싸우며 강을 오르내리던 황포돛배다. 지금은 비록 퇴역했지만,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이 나라의 구석구석을 누비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지금부터 나는 나의 작고 날렵한 몸통 위에 시간의 여행자들을 싣고 공간과 세월을 거슬러 짧은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내가 천여 년 이상 누벼온 내륙 수로, 그중에서도 아름답기가 으뜸이라는 한강의 지류 남한강, 여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은 백여 리 물길로.
뱃사람들이 배를 점검하며 출항 준비를 하는 게 보인다. 아침 안개가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배를 감싸고 있다. 뱃사람들의 굵은 팔뚝과 주름진 이마엔 벌써부터 땀방울이 가득하다. 조상 대대로 강물에 뼈를 묻으며 산 그들이다. 세곡을 실어 나르거나 양식과 소금, 각 지역의 특산품을 맞바꾸고 지친 나그네를 강 건너로 건네주던 그들. 비바람이 몰아치는 험한 날씨에도, 안개가 가득한 날에도, 두려움 없이 노를 잡았던 그들이 다시금 황포를 펼친다.
한강의 2대 지류인 남한강은 강원도 오대산을 떠나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거쳐 서울의 중심부로 연결된다. 이중 여강(驪江)은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부터 이포대교 부근 금사면 전북리까지 여주지역을 흐르는 남한강 물길을 말하며 총 439킬로미터, 약 백 여리다. 또한 조선시대 4대 나루로 불리던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를 비롯해 수많은 나루와 정자, 크고 작은 사찰들,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나루가 많았다.
여주는 가히 나루의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리 길 구석구석, 사람이 사는 곳마다 크고 작은 포구가 산재하여 거미줄처럼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한양을 출발,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들은 소금이나 새우젓, 생필품 등 각종 물자를 여강에 산재한 포구마다 부려 놓았다. 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지역 특산품을 이고 진 사람들이 모여들어 즉석 장시가 성황을 이뤘다. 규모가 작은 평저선들은 청미천과 섬강 등 지천을 통해 장호원, 문막 등 상류로 짐을 옮겼고 이렇게 나뉜 짐들은 다시 봇짐과 나귀에 실려 인근 촌락으로 퍼져나갔다.
여강은 여주의 옛 이름인 황려(黃驪)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려의 문신이자 재상이었던 이규보는 ‘웅(雄)하고 기특한 쌍마(黃馬, 驪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이 황려(黃驪)가 되었네’라는 시를 통해 여주 지명의 유래를 밝힌 바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은 ‘긴 강이 동남방에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마을 앞에서 띠를 둘렀는데 이곳이 강가 중에 제일가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배로 장사하는 데 힘을 써서 농사에 대신하는데, 그 이익이 농사하는 집보다 낫다’고 여주 지방을 묘사하기도 하였다.
자 이제 출발할 시각이다.
돛배는 뚱뚱하게 배를 불린 채 여주가 시작되는 점동면 삼합리로 들어선다. 삼합리(三合里)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남한강과 섬강, 청미천이 만나 세물머리를 이루는 곳이다. 아울러 경기도와 충청도, 강원도가 한데 어우러지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는 여주의 시작을 알리는 첫 나루가 있었으니 창내미 마을 앞, 창남나루가 바로 그곳이다. 창남이라는 이름은 흥원창 남쪽이라는 뜻으로, 세곡창고이던 흥원창이 강 건너 원주시 부론면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창남나루는 90년대 말에 폐쇄되었다. 창남나루 주변에는 고려 공양왕이 삼척으로 유배 갈 때 쉬었다는 ‘공양소(恭讓沼)’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삼합리 창남나루를 지나, 돛배는 ‘아홉사리 고갯길’을 왼쪽에 끼고 순풍을 맞는다. 아홉사리 고갯길은, 경상도나 충청도 동북지역 사람들이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이다. 마치 국수 면발처럼 아홉 고개가 얽혀 있다고 해서 아홉사리란 이름이 붙었다.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이곳에서 도적을 만나기도 하고 넘어져 다치기도 하며 숱한 사연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한번 넘어지면 아홉 번을 더 넘어져야 살아서 고개를 넘는다는 전설과, 매년 9월 9일 아홉 번째 고개에 피는 구절초를 달여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홉사리 고갯길을 끼고 돌아 속력을 내자 저 멀리 흔암나루터와 우만리나루터의 흔적이 연이어 나타난다. 흔암나루는 점동면 흔암리 일대에 위치해 있다. 흔암마을과 강 건너 강천면 굴암리를 잇던 나루였다.
강 건너 주민들은 여주장을 보기 위해 이곳 나루터를 이용했으며 1972년 대홍수로 마을이 이주하면서 나루의 기능을 상실했다. 1972년 당시 나룻배는 한 척이 있었는데 승객은 주로 굴암리와 흔암리 주민들이었다. 사공은 자주 나룻배를 타는 주민들에게 해마다 보리 한 말, 벼 한 말을 받았다. 우만리나루 자리는 현재의 여주읍 우만리 마을과 강천면 가야리로 배를 운행했다. 스무 명이 탈 수 있는 나룻배와 최대 열 명까지 승선할 수 있는 거룻배가 각각 한 척씩 있었는데 흔암나루와 마찬가지로 1972년 대홍수 이후 기능을 상실했다.
우만리나루를 지나 바위늪구비에 이르는 십여 리의 길은 최근 걷기 마니아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여강길 답사 코스 중 한 곳이다. 이곳에서 인위적인 시멘트 보도는 찾아볼 수 없다. 강변엔 비단 같은 모래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만들어낸 흙길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갈대숲엔 이름 모를 철새들이 날아오르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동양화 속 풍경처럼 사람과 강이 하나가 된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은 이곳을 거닐다 이렇게 노래했던가.
‘여강의 형승은 천하에 드문데, 사시(四時)의 풍경이 천지의 비밀을 헤쳐 보이네. 내가 갔을 때는 여름철이어서,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배에 불어 옷에 가득 서늘하였네. 백 척 높은 군루(郡樓)에 두 눈으로 멀리 바라보니,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어 부슬부슬한데 연기가 걷히네…….’
“수많은 나루를 누비며 이 땅 저땅의 사람과 문물을 담아낸 여강의 황포돛배.
돌아갈 나루를 잃고 수십 년 동안 정박되어 있던 황포돛배가
이제 다시 여강 여행을 시작한다.”
돛배는 이제 남한강대교를 지나 강천면 단현리로
접어든다. 이곳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옛 나루 흔적
을 만난다. 주변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띠어 이름 붙
여진 부라우나루다.
고려시대에 생긴 부라우나루는 강천면 주민들의 여
주장 출입이나 인근 주민의 땔나무 채취에 이용됐
다. 부라우나루를 지나 이호대교로 접어들면 이호
나루와 목아박물관 등을 만날 수 있다. 강천면 이호
리에 있던 이호나루는 일제시대 물자의 집산지로
크게 번창한 곳으로, 중앙선 터널 굴착 당시에도 이
호나루를 이용하여 모든 물자를 운반하였다. 이포
대교를 지난 오른쪽, 야트막한 산등성이 밑에 위치
한 목아불교박물관은 목아 박찬수 선생이 평생에
걸쳐 손수 수집한 약 6천여 점의 불교 용품이 전시
된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의 아담한 건물이다.
돛배는 이효대교와 목아불교박물관을 뒤로 하고 조선시대 최고의 나루 가운데 하나였던 조포나루로 접어든다. 창남나루를 떠난 지 30리를 조금 지난 지점이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흐렸던 날씨가 개면서 들판 저편이 황금빛으로 밝아온다. 크고 작은 배들이 철새처럼 오르내리고, 해를 품은 강물은 갈대숲 저편에 무지개를 걸어 놓는다. 조포나루 인근은 신륵사와 영월루 등과 더불어 여강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여주대교를 지나면 여주읍과 만나고 여주읍을 지나 여주나루와 왕터나루 근처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이 모셔져 있다. 하늘의 구름도 흘러가는 강물도, 여행에 지친 나그네도 한번쯤 걸음을 멈추고 쉬어가는 곳이다.
“소란스럽던 옛날의 모습대신 차분함과 수려함을 보여주는 여강 백리길.
낭만도 쉬어간다는 여주 여강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유롭고 한적한 시간을 선사한다.”
조포나루지에서 고개를 들면 바로 신륵사(神勒寺)가 보인다.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자락에 자리한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아담한 사찰이다. 1382년에는 대장각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대장경을 봉안하였다. 1469년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된 것을 계기로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로 삼으면서 사찰이 부흥하였다. 1472년 대규모로 중창되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에 다시 중건되었고 금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조사당, 명부전, 종각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신륵사에는 특히 많은 신화 전설이 전해 오는데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의 꿈에 흰색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신성한 사람이 설 곳이라 하여 세워졌다는 이야기와, 사나운 용을 인당대사가 신력으로 잡았다는 설화 등이 그것이다. 신륵사하면 뭐니뭐니해도 강월헌을 빼놓을 수 없는데, 강월헌은 여강과 기름진 여주벌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정자로 나옹선사의 당호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강월헌에서 바라본 경치는 가히 여강 제일경으로 쳐도 손색이 없다. 이것이 바로 강월헌에 앉으면 가난뱅이건 못 배운 무지렁이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강월헌 하류 쪽으로는 보제존자 나옹의 이름을 딴 보제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륵사 머리맡에서 잠시 쉰 뒤 나는 다시 뱃머리를 여주읍 방향으로 돌린다. 여주읍으로 가기 전, 왼쪽 언덕에 고풍스런 누각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월루다. 15평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인 영월루는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다. 일제시대, 파손될 위기에 처한 영월루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이는 신현태 당시 군수다.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위쪽에는 보물 재91호인 창리 삼층석탑과 보물 제92호인 하리 삼층석탑이 있다. 누각 아래쪽은 큰 암벽이 펼쳐지는데 한자로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승천했는데 마을 이름을 황려(黃驪)라 칭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다.
여주읍을 지나며 돛배는 여주나루, 왕터나루, 천남나루 곁을 스친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여주나루는 여주읍 군청사 뒤편에서 여주읍 학동을 연결하는 나루였다. 현재 표석이 세워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관진(官津)’으로 분류돼 관현이 상주했다. 왕터나루는 능서면 왕대리와 대신면을 잇던 나루였으며 주로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강을 오갈 때 이용됐다. 천남나루는 대신면 천남리 사람들이 여주읍으로 나갈 때 이용하던 나루였다. 마을 명칭에 따라 사비나루라고도 불렸으며 1971년까지 약 스무 명이 탈 수 있는 목선이 운행했다. 뱃삯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 년에 보리와 벼가 각각 한 대였으며 이 역시 1972년 대홍수 이후 폐쇄됐다.
이곳을 지날 때는 천하명당 영릉에 대한 전설을 빼놓을 수 없다. 영릉(英陵)은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를 모신 능으로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영릉의 주인은 원래 세종대왕이 아니었다. 세종은 죽은 뒤 아버지 태종이 누운 내곡동 대모산 자락에 묻혔다. 그런데 예종 즉위년인 1468년 상지관 안효례가 돌연 세종의 능을 옮기자고 주장한다. 임금은 그 주장을 받아들여 지관들로 하여금 새로운 자리를 찾게 했다. 이때 지관들이 새로 찾아낸 땅이 바로 현재의 영릉이다. 그러나 영릉에는 본래 다른 사람의 묘가 있었는데 영의정 이인손과 대제학 이계전이 바로 그들이다. 이인손은 죽으면서 유언하길, 훗날 파묘될 운명이니 묘 주변에 묘실이나 다리를 만들지 말라고 간곡히 유언했다. 그러나 후손들은 유언을 지키지 않고 묘로 건너가는 다리와 재실을 만들었다. 예종의 명을 받아 명당을 찾아 다니던 지관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 마침 소나기를 만났고, 다리를 건너가 재실에서 비를 피하다가 천하명당인 영릉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인손의 예언대로 묘는 파묘되고 그 자리에 세종의 능이 들어섰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제 세종대교를 지난 뒤 종착역을 향해 나아간다. 대신면 가산리 사창골에는 반대편 능서면 백석리를 오갈 때 이용하던 재가나루가 있었다. 사창골은 양평과 여주, 대신의 세 갈래 길이 만나는 중요한 지점으로 일찍부터 번성했는데, 재가나루는 지형이 오래 전에 변형돼 50여 년 전에 폐쇄됐다. 양화나루는 능서면 양화동 내양리에서 대신면 초현리를 오갔던 나루다. 규모가 커 사람을 태우는 나룻배 두 척, 소 열 마리씩 싣는 배 한 척이 운행됐다. 이외에도 내양리에는 이웃한 백석리와 더불어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찬우물 나루는 흥천면 상백리 찬우물에 위치했으며 주민들이 남한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거나 이웃한 대신장과 곡수장을 갈 때 이용했다. 장사배는 쌀과 베 등을 실어가고 새우젓과 소금을 실어왔다.
이제 한동안 바람을 가르며 강을 내려간다. 이포나루와 상자포나루, 하자포나루에 닿으면 여강 백리 여행은 끝이 난다. 조선 4대 나루 가운데 하나였던 이포나루는 금사면 이포리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개성과 한양을 연결하는 수상 요충지로 교역이 활발할 때는 일본의 상인들도 건너왔다고 전한다. 1991년 이포대교의 건설로 나루의 기능을 잃었다. 금사나루로도 불리는 상자포나루는 금사면 외평리에 위치했으며 금사면에서는 곡수장을 이용하기 위해, 개군면에서는 나무를 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했다. 하자포나루는 금사면 전북리에 위치했으며 기능은 상자포나루와 같았다. 가장 최근에 나루가 폐쇄된 지역이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백리를 숨 가쁘게 달려온 여강뱃길 여행은 사적 제251호 파사성(婆娑城)에 이르러 끝난다. 파사성은 대신면 천서리에 자리한 삼국시대 산성이다. 둘레는 약 1,800미터에 이르며 230미터의 파사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원형으로 뻗어 있다. 신라 파사왕 때 만들어졌다고 전하나 성은 백제 양식에 가깝다. 임진왜란 때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해 증축하였으며 현재는 동문터와 남문터가 남아 있다. 파사성에 올라 서쪽을 보면 이포대교 뒤편으로 앵자봉과 천덕봉이 우뚝 솟아 있고 북쪽으로는 추읍산과 용문산이 안개 속에 조용히 엎드려 있다.
파사성을 바라보며 숨을 돌린 뒤 나는 뱃머리를 돌린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내려왔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강물을 거스르며 여강을 올라가볼 참이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기댄 채 바람과 새를 벗삼아 달려온 백리 길은 단순히 풍경을 눈에 담는 자리가 아니라 과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푸른 강물 위에 생을 걸고 살아왔던 사람들, 그들의 숨결을 느끼며 다시 뻗어나갈 백리 길을 가늠한다. 뱃머리를 돌릴 무렵, 파사성에 올랐다가 썼다는 서애 유성룡의 글귀가 후미를 붙잡는다.
‘파사성엔 풀이 무성한데 성 아래엔 물이 둥글게 굽어 흐르네, 봄바람은 매일 끝없이 불어오고 지는 꽃잎은 모퉁이마다 무수히 날리네’
* 신륵사 031-885-2505
* 영월루 031-887-3566
* 명성황후 생가 031-884-3575
* 황포돛배 031-887-2868
* 영릉(세종대왕릉).녕릉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031-887-2868
* 파사성지 031-887-3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