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도서관 수필쓰기 강좌 –10차시 (2022년 6월 22일 수)
표현하기-단어, 문장, 단락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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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품 첨삭 지도
1. 언제까지 /강현옥
1)가끔씩 학생들이 묻곤 한다
"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는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백 살이야, 샘은 백살 공주란다."
이 말에 학생들의 반응은 학년마다 다르다. 유치부는 눈이 동그래지며 진짜냐고 되묻는 모습이 토끼처럼 귀엽다. 초등생만 되어도 '에이이, 거짓말하지 마세요'라며 합창하듯 볼멘 소리로 퉁퉁거린다. 그럴 때면 한 술 더 떠 '늙은 백살 공주 맞거던요.'라며 쐐기를 박는다. 머리가 굵은 중학생들은 속으로만 짐작할 뿐 묻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나이에 대해 민감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요즘은 외모만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행여 실수라도 할까 먼저 나이를 밝히기도 한다. 하지만 직업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젊은 교사를 선호하는 학부형과 학생들에게, 굳이 적지않은 내 나이를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2)일 년 전, 후두염이 심해져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방과 후 독서 논술 강사를 하고 있었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중등학원으로 가서 수업을 했다. 학원은 집과 거리가 멀어서 집에 도착하면 열 시가 넘었다. 피곤했지만 일이 좋았던 나는, 다음날 아침이면 물 먹은 화초처럼 생생하게 일어나 부지런을 떨곤 했다.
3)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목감기가 심했지만 대수롭잖게 여겼다. 기관지가 약해서 겨울이면 감기약을 달고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해 목감기는 지독했다. 약과 주사도 효험이 없었다. 의사가 목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직업상 말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가래 낀 노인의 음성으로 변하더니 끝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의사는 당장 쉬지 않으면 목소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화를 냈다. 일 욕심에 무모했던 내가 병을 키운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후임자에게 인계를 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목소리를 되찾은 날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4)몸이 회복되자 또 다시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만류하는 남편에게 건강을 돌보면서 일을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취업 공고를 검색하다가 ‘〇〇독서 논술 교사 모집’이란 글이 눈에 띄었다. 지원 자격은 45세까지였다. 오십 대 초반이었던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세상에는 예외라는 것이 존재하고 내가 그 예외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리고 실력이 아니라, 나이 제한 때문에 불합격된다면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5)수화기 너머로 젊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면접 때 의례적인 질문인, 동종 업계 경력이나 지원 동기, 소지한 자격증 여부 등을 물었다.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는 담당자에게 나는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그런데 제가 나이가 좀 많습니다."
"아! 사십 대 중반이신가요?"
‘오십 대 초반’이라고 또렷하게 말하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잠시 후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혹시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가요? 지원 자격이 사십 오 세까지라는 건 알고 계시죠?"
나는 잘 알고 있으며, 건강은 염려 안하셔도 된다고 말했다. 담당자는 상급자와 상의해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쓴웃음이 나왔다. 오십 대 초반이지만 마음 속엔 의욕이 넘쳐나는데, 사회적 인식은 건강을 염려하는 나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6)사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희망 고문이 싫었던 나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바빠서 연락 못 드렸다고 사과를 한 뒤, 이틀 뒤에 면접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이가 들면 덤덤해질 줄 알았는데 막상 면접을 보려니 긴장되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큰 키에 세련된 모습의 면접관이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먼저 업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질문을 했다. 독서 논술의 중요성, 앞으로의 방향, 교수법 등이었다. 지필고사까지 치르고 나니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면접관은
“선생님과 함께 하고 싶기 때문에 본사로 특별히 요청하겠습니다. 하지만 본사에서 나이 제 한으로 불합격 처리하면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7)며칠 후 합격이라는 전화를 받고 출근을 했다. 많은 교사들 중에서 갓 입사한 내가 최고령자였다. 하지만 사회적, 생물학적 나이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좋아하는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8)새로 시작한 독서 논술 수업은 만만찮았다. 매월 학년마다 2권씩 나오는 필독서를 읽고, 역사 포럼과 과학 포럼 수업까지 소화하려면 온종일 책과 씨름하였다. 하지만 쉬면서 일에 대한갈증으로 목말랐기에, 토요일도 반납하면서 수업에 열중했다. 쉬어가면서 하라고 남편이 말렸지만, 이미 수업은 즐거운 취미 생활로 자리잡았다.
9)조금씩 늘어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가끔씩 궁금증이 들 때가 있다. 교사 지원시 나이 제한으로 바로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담당자가 내 건강을 염려했을 때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면, 전화가 오지 않았을 때 직접 연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누리는 기쁨과 성취감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나이가 만든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용기를 냈더니 기회가 찾아온 것 같다.
10)가끔 지인들이 언제까지 일을 할 거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학생이 있을 때까지.”
2. 물살을 가르며 / 권삼국
“감독님! 명진이 수영복에 물이 들어와요” 코치가 명진이와 다가오면서 걱정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니, 대회 준비용으로 새로 싼 수영복인데 왜 그래요?’ “아마도 그동안 강화훈련으로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명진이는 오전 고양 수영경기장에서 열린 제4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수영부 배영 예선전에서 전국 5위로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자신의 기록을 1.2초나 앞당긴 셈이다. 지금까지의 기록으론 메달권 진입은 어렵고, 사실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만이라도 명진이가 체면을 채워준 셈이다.
낯선 곳에서 수영복을 어떻게 구입해야 할지 난감했다. 평소 수영부 용품을 자주 이용했던 서울의 거래처에 전화했더니, 다행이도 45만원 하는 3쓰몰 사이즈가 1개 있다고 했다.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두 사람을 앞질러야 메달을 딸 수 있는데, 메달 획득이 어려운 상황에서 계획에 없던 돈을 사용하기가 망설여 졌지만, 모험을 걸어 보기로 했다. 비용은 나중에 학교에 가서 해결하기로 하고 오전 중으로 수영장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기록경기는 그동안의 기록으로 순위를 대략 알 수 있다. 다만, 숨은 선수가 있거나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조금의 변수로 작용 된다.
예상대로 명진이를 제외하곤 모두가 예선 탈락이었다. 오후 결승전에 아주 작은 희망을 걸어 볼 여지가 생긴 셈이다. 숙소로 돌아와 선수들은 휴식을 취하게 하고 코치와 오후 결승전에 대해 논의를 한 후, 선수들은 숙소 주변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이라고 코치에게 일러두고, 명진이는 전복죽을 1개 주문해 반만 먹이고 편하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오후 3시 30분 배영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전광판에는 1위부터 8위까지의 명단이 반짝이고 있었다. 명진이는 6번 레인에 있었다. 관중석에는 학부모, 학생. 일반인들이 진을 치고 휫바람과 호루라기를 불면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삐. 삐. 삑 신호와 함께 물을 자르듯이 입수를 시작했다. 평소처럼 출발은 아주 좋았지만 스피드가 따라 주지 않았다. 백 킥을 했을 때까지는 5위를 유지했다. 남은 거리는 25m. 이젠 마직막 스피드만 남았다. 뒷심과 승부욕이 강한 선수답게 치고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터치 순간 전광판에 3위 두명이 백분의 1초까지 기록이 같았다. 동메달이다. 결국 해 내고야 말았다.
연중무휴로 새벽 6시면 수영장에 모여 준비운동과 수영 연습을 하고 8시에 학교로 돌아가 집에서 가져온 아침밥을 먹이고 오후 3시면 다시 수영장에서 저녁 8시까지 강훈을 하는 선수들을 보면서 애처로운 생각이 참 많았다. 내 자식이라면 이런 운동을 시키겠는가? 설사 아이가 한다고 해도 그냥 두고 볼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학년 초 각반을 돌아다니며 신체 조건이 맞는 학생들을 15명쯤 선발을 해 두었다. 며칠 후 특활 시간을 이용해 수영부 신청자들을 면담하고 부모님과 상의한 후 안내장확인서에 도장을 받아 오라고 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겨우 3명만이 지원했을 뿐이었다. 이 인원으론 수영부 유지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차선책으로 신체 조건이 부족한 아이들을 수용하는 방법 뿐이고, 이 아이들도 일주일도 가기 전에 포기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제2의 박태환, 김연아를 꿈꾸며, 운동선수로서, 학생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친구들과 함께 뛰고 겨룰 수 있는 기회인 만큼 대회에 참가하는 데 자부심을 갖으라고 얘기 했지만 오로지 일등 만이 살아 남는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 말은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은 한없이 부드럽다. 어떠한 것도 감싸 안는 포용력과 아무 용기에도 담기는 적응력을 가지고 있다. 이 아이들도 물과 함께 했던 기억과 친밀감을 잊지 말고 더 정진하고 세상 어디에서든 물의 정신을 잊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3. 또 다른 집 /김을수
1. 아버지는 건장하신 체구에 힘도 좋으셨다. 성품은 사람들이 법 없어도 살 분이라고 하였다. 오십대에 당뇨가 왔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자연식과 치료로 섭생을 잘 하고 계셨다. 삼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는데 몸을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시니 요양병원에 계신다.
2. 며칠 전 함께 면회를 하러 간 남편이 누워계신 아버지의 소변을 받아냈다. 힘없는 목소리로 “이 서방, 미안하네. 나는 간이 아주 작다. 간이 작아서 남을 해친 적도, 나쁜 짓도 안 했다. 근데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 하시며 자탄 하셨다. 울컥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두툼한 손을 자꾸 쓰다듬었다.
2. 아버지의 손은 유난히 두툼하고 엄지손가락이 굵고 손톱이 넓적하다. 그 것을 내가 닮았다. 여자애 손톱이 넓적하니 산수를 못하게 생겼다고 언니들의 놀림을 받아도 허허 웃으셨다. 아버지의 손은 따뜻하다. 나도 그것을 닮았다. 사람들이 나와 손을 잡거나 악수를 할 경우 다들 손이 따뜻하다는 말을 한다. 아버지를 닮아선지 아버지랑 잘 통했다.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다니며 아버지와 주고 받은 편지도 많다
3. 아버지는 건장한 체구이시지만 마음은 여린 분이라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시는 분이다. 자라면서 아버지께 큰소리를 듣거나 꾸지람을 받은 기억도 없다. 장남인 큰 오빠가 문제를 더러 일으키는 게 뻔히 보여도 참고 넘어가셨다.
4. 아버지는 남편과 궁합이 맞는다. 객지로 나간 오빠들보다 더 자주 만나고 많은 대화를 나눈다. 남편과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다.
5. 남편은 딸부자인 우리 집에 들락거리던 중매쟁이의 소개로 만났다. 인근 마을에 살던 남편은 아버지의 평판을 알고 있었기에 꼭 사위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적극적인 구애로 우리는 만나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함을 지고 온 남편친구들이 도포를 입고 두건을 쓰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에
압도당했다. 군말 없이 함을 내려놓고 꿇어앉는 촌극을 보이기도 했다.
6. 지나온 세월 속, 아버지의 삶 속에 담긴 소중한 기억들을 꺼내 본다. 아버지는 칠 남매의 장남이고, 슬하에 칠 남매를 두셨다. 그 삶의 무게는 우리가 짐작할 수 가 없다. 힘든 농부로서의 삶은 걸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수동적이었다. 과수원과 농사에 또 층층시하에서 고달픈 어머니의 삶을 챙기는 일에는 무덤덤하고 소극적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었다. 두 분의 다른 성격으로 가끔 옥신각신 하셨다. 건너 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으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분위기를 대변했다.
7.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는 분이셨다. 약주를 한잔하시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아버지의 흥에 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날이면 우리 뺨은 아버지의 까칠한 뽀뽀 세례를 견뎌내야만 했다. 우리들을 모아놓고, 장기자랑을 시키기도 하셨다.
8.추운 겨울엔 이른 새벽에 일어나시어 큰 가마솥에 군불을 때어 세숫물을 데워주었다. 학교에서 늦게 파하고 돌아오면 신작로까지 마중을 나와 주시던 자상한 분이셨다.
9.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자취 할 때였다. 주말이면 집에 내려가 쌀자루를 싣고 와야 했다. 시외버스가 만원이라 쌀을 내리지 못해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놀람과 속상함에 울고 있는 내 머리를 말없이 두툼하고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주셨다.
10. 아버지는 막내 사위인 남편과 잘 통했다. 종친일이나 문중에 대한 관심이 높은 남편과 대화하기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시면 산소에 자주 찾아와줄 사람도 막내사위라 믿었다.
11.잘 살고 잘 늙는다는 것이 우리가 원하고 노력한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예상치 못한 병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 하필 나인가?” 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희망으로 살아갈 뿐이다.
12. 아버지도 누구나 바라는 것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셨을 거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넉넉한 노후를 꿈꾸었을 것이다. 지금의 불편한 모습도 아버지가 잘못 살아오신 탓이 아니라, 당할 자 없는 세월의 힘에 밀리고 있을 뿐이다.
13.헤어질 때 마다 힘없이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희미한 미소를 등 뒤로 하고 “천년을 살아도 한번은 이별 해야 한다.” 말을 떠올리며 무거운 발길을 옮긴다.
아버지를 지지대 삼고 살아온 우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훨훨 날아 각자의 자리에서 뿌리내렸다. 각지에 흩어져 산다는 이유로 가끔 들러 살아계신다는 것을 확인이나 하듯 왔다가 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자식들이다. 자식의 몸은 부모로부터 비롯되고, 부모의 마음은 자식에게서 비롯된다고 했다. 내가 지천명을 넘다보니 내 몸을 주신 부모님을 생각키보다는, 내 마음은 늘 내 자식에게로 향하고 있으니 이것도 세월에 순응하는 섭리일까?
14. 이제는 아버지의 또 다른 집이 되어버린 요양병원을 나와 거리에 섰다. 바람에 나뭇잎 하나가 툭 하고 발끝에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가 누워계신 회색 집을 올려다본다. 희미한 불빛이 가는 세월처럼 졸고 있다.
4. 송편과 만두 /김형윤
1. 추석이 다가왔다. 만드는 것이 번거롭다며 사서 먹자고 하다가도 막상 추석이 되면 송편을 만들게 된다. 내가 시집에 도착하기 전에 어머니는 이미 재료를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신다.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이 한자리에 둘러앉는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족들 간의 모나고 껄끄러웠던 마음도 어느새 살짝 녹는다.
2. 시집온 첫해 추석에는 어머니와 네 명의 시누이가 함께 송편을 만들었다. 다른 데를 보는 척하지만 실은 열 개의 눈 모두가 내 손으로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자 내 손은 더 둔해졌다. 공부한다는 유세로 결혼 전에 집안일을 도운 적이 거의 없던 나로서는 갑자기 송편을 잘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내 송편이 궁금했던 시집 식구들은 내가 주물럭거리며 시간만 끌자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옆에서 TV를 보고 있던 신랑도 대놓고 지청구를 주어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3. 누군가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하였다. 내 속도 모르고, 잘하려고 애를 쓸수록 송편은 더 잘 터졌다. 솜씨 없는 나에게는 아예 딸 가질 운이 없었는지 모른다. 송편 만드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시누이의 말에 갑자기 긴장되었다. 고스톱을 칠 때 성격이 드러난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난데없이 송편이랑 성격이 무슨 상관이람. 갑자기 앉은자리가 바늘방석이 되었다. 시댁 식구들에게 흉잡히지 않고 적당히 좋은 점만 보이고 싶은 새댁으로서 아주 난감하였다.
"욕심이 많다.", "일하기 싫어한다(게으르다)."라는 시집 식구들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빨리 만들어 치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내 송편이 컸다. 공연히 얼굴이 빨개졌다. 딸들의 등쌀에 외며느리가 칠까 봐 걱정되셨는지 어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솜씨 좋다고 잘 사는 것 아니다.”
4. 속을 많이 넣으려고 빵빵하게 밀어 넣다 보면 금방 구멍이 났다. 사실 나는 송편보다는 소가 듬뿍 들어간 만두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송편을 만두로 만들고 있었다. 만두는 만들기도 쉽다. 쌀가루보다 밀가루 반죽은 유연성이 있다. 송편은 쉽게 거죽이 뚫어지지만, 불에 찌고 나면 반대로 더 차지고 쫄깃해진다. 사람도 어려움을 겪은 다음에 성격이 너그러워지듯이.
5. ‘살 먹자는 송편이요, 속 먹자는 만두’라는 말이 있다. 따뜻한 물을 붓고 쌀가루를 치대 만든 송편은 곡물의 깊은 맛이 나지만 고기가 들어간 만두는 구미를 당기게 하는 즐거운 맛이 있다. 송편은 속정 깊은 오래된 친구 같고 만두는 잠시의 즐거움으로 들떠있는, 형편이 좋을 때 놀기 좋은 친구 같다.
6.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만든 송편은 예쁘고 앙증맞다. 반죽을 조금 떠서 작은 공처럼 동그랗게 만든다. 양쪽의 엄지손가락으로 깊은 구멍을 낸다. 녹두나 깨로 만든 고물을 작은 찻숟가락을 이용하여 넣고 오므리며 모양을 낸다. 반달 모양의 송편은 가득 차기를 바라는 옛사람의 소망이 오롯이 담겨있다. 역학에서 달은 음陰을 상징한다. 작은 송편 하나에도 우주의 신비와 맞닿아 있다. 반면에 만두는 반죽을 둥글게 밀어서 반으로 접은 것이기에 양陽의 기운이 넘친다.
7. 송편과 만두는 모양이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부터 다르다. 외씨버선의 섬세한 선을 떠오르게 하는 송편은 조선 미인의 기품마저 느껴진다. 멀리서 아른거리는 가녀린 선녀의 이미지이다. 기원 때문인지 몰라도 만두는 중국 미인처럼 느껴진다. 떡국 속에 든 만두는 통통한 글래머 미녀로 보인다.
8. 송편은 작은 것이 예쁘다. 소를 많이 넣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송편들이 만든 이의 솜씨를 자랑하며 누워있다. 누구의 송편이 예쁜지 서로들 품평한다. 잘 씻어 말렸던 솔잎 위에 송편을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솥에서는 솔향에 취한 송편들이 익고 있다. 다 쪄지면 솔잎을 걷어내고 어머니는 참기름을 바를 것이다. 만두는 뜨거운 김이 날 때 가장 맛있지만, 송편은 한 김 나갔을 때 더 맛나다.
9. 어머니가 소파에 누우셨다. 새벽부터 불린 쌀을 이고서 방앗간에 다녀오셨으니 허리도 아프실 것이다.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가 종일 고물 준비와 여러 가지 뒤치다꺼리를 하셨으니….
식구들에게 맛있는 송편을 먹이려는 어머니의 정성을 나는 반이라도 흉내 낼 수 있을까.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넘었어도 아직도 많은 부분을 어머니에게 의존하고 있다. 좋은 때만 좋은, 만두 같은 며느리의 부덕함을 너른 치마폭으로 감싸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해주시는 어머니야말로 송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전에는 잘 먹지 않던 송편에 자꾸 손이 간다. 그것은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송편처럼, 어머니처럼 내가 속이 깊은 온유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였으면 좋겠다.
5. 난감했던 참외 선물 / 남병웅
1. 블로그를 하다보면 네이버에서 지난해 포스팅 한 것을 ‘1년전 오늘’ 이라면서 보여준다. 1년전에 올린 글과 사진을 보니 당시 참외 선물을 받고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2. 사연인즉 1년전 5월의 일이다. 어느분이 보내주신 참외 1box를 택배로 받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은 아니고 공직에 계실때 제 강의를 들으신 분이다. 지난해 퇴직하시고 올해초에 아들 취업관계로 문의가 왔다. 이분야는 잘 모르고 알아볼데가 없어서 지난해 강의들은 박사님 생각이 나서 부탁드린다고 했다. 취업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얼마나 아쉬웠으면 연락을 했을까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상담과 함께 자기소개서 작성에 대하여 무료 코칭을 몇차례 해 드렸다. 당시 너무 고맙다며 코칭비를 보내겠다고 계좌번호를 달라고 하시는 걸 극구 사양했다. 강의 한번 들으시고 저를 신뢰하고 아들의 취업문제를 상담해 오셨으니 제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기꺼이 도움을 드린것뿐이었다.
3. 그로부터 몇 달뒤에 연락이 와서 코칭해주신 덕분에 아들이 원하는 회사에 취업 되었다며 고맙다고 하시면서 고향의 참외가 유명하니 한상자 보내주시겠다고 했다. 무료로 코칭해 주었는데 원하는데 취업이 되었다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서 주소를 보내드렸다. 블로그를 매일 하다보니 일상이 소재가 되기에 참외 선물도 포스팅을 위하여 택배상자부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언박싱하면서 참외사진을 찍다가 깜짝 놀랐다. 위에 놓여 있는 것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래에 놓인 것들은 전부 상처 투성이였기 때문다. 상표가 붙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전부 갈라진 열과들이었다. 택배과정에서 깨진듯한 것도 몇개나 있어서 상자 바닥에 물이 배어있기도 했다.
4. 마치 농사지어서 선과하고 남은 것을 집에서 그냥 가족이 먹으려고 남겨둔것처럼 맛은 있어도 상품가치가 없어 보이는 터지고 갈라진 것 들이었다. 이런걸 어떻게 선물이라고 보냈나 싶어서 잠시 마음이 언짢아지면서 도로 반송해야 되나 어쩌나 하고 고민이 되었다. 순간 혹시 이분이 퇴직후 고향에 가서 참외 농사를 지으시면서 직접 생산한 것을 나눠 먹으려고 보내주신 것일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연을 알아보고 반송을 하던지 말던지 해야겠다 싶어서 전화를 하여 잘 받았다며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는 퇴직하시고 고향가서 참외농사 지으시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참외 농사짓는것은 아니고 조그만 직장에 일하러 다니고 계신다면서 참외는 고향의 참외공판장에서 구매했고 가게에서 택배를 보낸거라고 하셨다.
5.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선물하신분이 얼마나 난처하고 민망스러울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고맙다는 인사만하고 전화를 그만 끊으려다가 혹시라도 구매과정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거나 물건이 바뀌어서 왔을 수도 있고. 터진 열과인데 속고 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던 선물하신분이 헛돈 쓰신것 같아서 안타깝고, 또한 이름있는 ㅇㅇ참외의 명성을 위해서도 이런 일이 앞으로 더 이상 발생되지 않도록 개선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대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6. 선물하신분은 면목이 없다면서 상자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은 본인의 불찰이라고 사과를 하시니 오히려 내가 괜히 이야기 한건가 싶어서 미안했다. 고의든 실수든 하자품을 판매한 판매자가 잘못이고, 고향 특산품을 유명하다면서 자랑까지 해가며 선물 보내주신 선생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이대로 잘 먹겠으니 더 이상 신경쓰시지 마시라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마무리 했다.
7. 참외는 상처투성이 열과이므로 며칠 있으면 상할 것 같아서 다음날 공부하러가서 참석한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미리 흠이 있는 열과인데 먹어보니 맛은 좋더라면서 나누어 주다가 생각해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요즘 세상에 수십년전에 하던 것처럼 보이는 데는 정상품을 얹어놓고 그 아래는 하자품을 넣어서 판매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에 말이다.
더이상 이런일이 없도록 개선해야 좋을것 같아서 ㅇㅇ군청 이나 농협 또는 참외공판장의 홈페이지를 찾아서 게시판에 사진과 함께 올릴까 싶었지만, 직접 구입한 것이 아니고 선물받은것이라서 보내주신분 입장도 생각하고, 그분이 판매자에게 충분히 이야기 했을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말았다.
8. 그 후로 ㅇㅇ참외를 먹을 때면 가끔 이일이 생각나곤 했다. 혹시라도 ㅇㅇ공판장의 판매자가 정직하지 않게 판매한 것이었일까? 착오로 상자가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선물하신 분은 어떻게 대처 하셨을까? 여러가지 궁금했지만 다시 물어볼 수 도 없었다. 이 사연을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이제는 더 이상 난감했던 ㅇㅇ참외 선물은 잊어 버려도 될 것 같다.
6. 비거스렁이* /박송애
비거스렁이를 톡톡히 맛본 날, 수목원 입구에서 시작한 산행은 바람과의 조우였다. 살면서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이 산바람에 맞서자 가뭇없이 사라진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바람을 잠재우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내 안의 바람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자연의 바람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진다. 봄부터 여름날의 바람은 이제 지나가고 인생의 가을이 왔다. 수북이 쌓인 낙엽길을 걸으며 처음 시작은 평탄하였다. 우리 삶처럼. 처음부터 하늘은 고스란히 나부를 보여 주었고, 길은 넓고, 발밑은 축축하였다.
온통 참나무 군락지인 산, 상수리,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 떡갈나무가 가득하다. 활엽수가 자라는 곳은 침엽수가 잘 자라지 못한다. 소나무가 자라는 곳엔 활엽수가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길은 여러 갈래다. 넓은 길은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몇 번을 우왕좌왕하다가 길이 아닌 길로 접어들어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왔다.
인생의 길도 그러하다. 살다 보면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엉뚱한 곳으로 접어들다 보면 아차! 잘 못 왔구나. 잘 못 온 길을 되돌아가다 보면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왔는지. 앞으로의 삶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한 길만 알고 그 길만 간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삶의 굴곡진 부분, 어두운 부분, 아픈 부분이? 있기에 우리가 더 인간적이지 않은지.
가파른 벼랑을 여린 나뭇가지나마 부여잡으며 내려올 때, 내 주위에 나를 잡아 줄 그런 여린 부분이나마 있을까? 도무지 의존할 수 없는 나는 얼마나 많이 외로웠던가? 남에게 어려운 부탁을 죽어도 못하는 나, 내 것은 있는 데로 다 퍼 주어도 남의 것은 달라고 못 하는 나.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천성이 그러했다. 남이 싫어하는 것은 죽어도 하지 않았고, 내가 싫어하는 것도 하지 않았다,
사십이 넘어가면서 푼수기가 돌아 함부로 말도 툭툭 던지고, 내가 갖고 있던 틀을 하나씩 허물면서 인생이 편안해지고 남과 더불어 섞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소심함이 언젠가는 날려 가겠지만 친구가 말하듯 많이도 변한 모습이다.
그렇게 내려와선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바람은 시위한다, 능선으로 오르는 동안 바람은 무당이 굿을 하듯 불어댄다. 나무가 신이 들린 듯하다. 나무에 손을 얹어 보자. 나무는 숨을 쉬듯 헐떡거린다. 바람에 나무가 저토록 흔들리는 것은 바람 탓인가? 부는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은 나무 탓인가? 가만히 물음을 던져본다. 내가 나무라면 불어대는 바람에 어떠할 것인가? 흔들리지 않고 뻗대다가는 꺾일 수밖에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는 말은 '바람에 흔들리되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 더러더러 뿌리째 넘어진 나무가 있다. 깊이 없는 뿌리 탓에 고만 뽑혀 버린 것이다. 흔들리되 아예 쓰러지지는 말자.
시원함을 머금은 건들마가 쏴 하고 불어 될 때는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무슨 큰일이 있기라도 하듯 숲은 혼비백산이 되어 떨고 있다. 키 작은 나무들은 저런 시련을 겪으며 따스했던 봄날의 금싸라기 햇살과 여름날 청량한 바람과 또다시 불어대는 추풍에 이력이 났을 법도 하다.
사람이라고 예외가 있겠는가? 매일매일 떨어지는 주가 폭락에 환율폭등. 많은 바람을 맞으며 내실이 더 튼실해졌으리라. 웬만해선 끄떡도 하지 않을 나이가 되어 버려도 잔잔한 바람은 때때로 일어 창밖을 기웃대게 만든다.
내려오는 길. 바람은 이제 잠이 들었다. 가파른 길이 험난하다. 오르는 길 보다 내려오는 길이 더 어렵다. 조심조심 발을 내디딘다. 잠시 한눈을 팔면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기 일쑤다. 인생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조심스럽다.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뒤를 보면서 가야 할 길을 미리 가늠도 해보고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않을 것을 되짚는다. 내려가 버리면 이젠 다시 돌아갈 수조차 없다. 지나오고 나면 그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삶을 돌릴 수는 없다. 이제 삶의 뜨락에 다시 자리 잡았다. 평지다.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내려올 것이다.
바람 속에서 바람을 잠재우고 내 안은 고요하다.
* 비거스렁이: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
7. 나비효과 /이문자
1 햇살과 바람이 유난히 명랑한 날이었다. 들쭉날쭉 되는 대로 던져놓은 우편물들을 정리하다가 수취인 이름이 낯선 봉투를 발견했다. 101동으로 가야 할 것이 111동인 우리 집으로 잘못 배달되어 온 것이었다. 어디든 나가는 길에 그 집 우편함에 넣어 주리라 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2 요즘 뭘 잊어버리는 경우가 꽤 잦다.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라고 해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요새는 언제 그런 때가 있었던가 싶다. 마흔을 앞두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만약 지금껏 일을 하고 있다면 도태된 기억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그 실수로 또 얼마나 많은 낭패를 겪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떤 사람의 사소한 실수가 한 가족의 삶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3 친구네 아파트 단지에서 입에 올리기에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아파트에 사는 한 여자가 자기네와 마주 보는 집에 아침커피를 마시러 갔다. 식구들이 직장으로 학교로 뿔뿔이 나가고 나면 여자들은 친한 이웃과 커피를 함께 마시며 이런저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나누곤 한다. 시댁이야기, 시장정보, 아이들 교육 이야기…….그녀들도 누구나 겪는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을 커피 향에 피워 올렸을 것이었다.
4 그때, 별생각 없이 열어놓은 현관문을 밀고 느닷없이 복면의 남자가 들이닥쳤다. 검은 서류 가방을 든 괴한. 순식간의 일이었다. 주인 여자는 밖으로 도망갔고, 앞집 여자는 우물쭈물하다가 복면에게 붙잡혔다. 비교적 몸피가 작은 그 여자를 나일론밧줄로 무지막지하게 손발을 묶고 수건으로 입도 동여맸다. 뭐라 한마디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여자를 창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십몇 층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내던져진 여자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뜨지 못하였다.
5 온갖 소문이 부풀려진 채 흉흉하게 나돌았다. 끝내 범인을 못 잡았다. 사고가 난 집의 남자가 형사인 것과, 죽은 여자가 맞은편 집의 여자인 것만은 부풀려지지도 추측도 아닌 진실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죽은 여자의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자꾸만 엄마를 찾으며 칭얼댔다. 여자를 실은 영구차가 아파트 구석구석을 돌아나갈 때, 어린 것을 보며 주민들이 함께 울었다.
6 너무나 엄청난 일을 두고 실수 운운하는 것이 농담보다도 가볍게 여겨지는 일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범행의 대상이 서로 뒤바뀌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어떤 연유로 복면의 괴한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나, 애당초 그 원한 자체가 잘못되거나 또는 실재보다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곰곰 따져보면 우리는 참으로 많은 실수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간다. 생각의 실수. 마음의 실수.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이, 착각이거나 잘못 알았던 것임을 알게 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말이다. 범인은, 죽은 여자가 앞집 여자이며,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은 여자의 어린 아들이 밤마다 엄마를 찾으며 칭얼대는 것을 알까?
7 여러 실수 중 가장 저지르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말실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아물 것 같지만, 실은 그 어떤 실수보다 상처가 크고 또 오래 간다. 별생각 없이 툭 내뱉은 한마디 말이 뿌리를 내리고 무성히 자라나, 탱자나무 울타리처럼 한 사람의 생애를 가로막는 경우도 있다.
8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기놀이를 하다가 친구와 다툰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가 싸움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말을 불쑥 내뱉었다.
“야, 병신아! 다리 병신 주제에 왜 자꾸 대드니?”
순간,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변소 뒤에 숨어서 많이 울었다.
9 원인은 모르지만 나는 안장걸음을 걷는다. 엄마는 너무 많이 업어줘서 그렇다고도 하고, 어릴 적 지나가는 소달구지에 치여서 뼈가 굽었다고도 했다. 어쨌든 내 걸음걸이가 남과 다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돗바늘 같았던 그 말은 마흔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 떠오르곤 했다. 얼마 전, 그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소식을 듣고도 문상을 가지 않았다.
10 돌이켜보면, 나 또한 적어도 살아온 날의 반은 실수로 채워진 것 같았다. 그 실수들의 양태는 제각각이었다. 나 혼자 피식 웃고 말았던 작은 것도 있었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될 말을 불쑥 해버린 뒤 밤새 뒤척였던 것도 있었다. 그 말은, 말을 내뱉은 내 몸과 뇌리에 박혀 지금도 때때로 아프게 찔렀다. 말을 한 내가 이런데 그 말을 들은 상대의 아픔이야 오죽했을까. 무엇보다 두려운 건 저지른 실수를 나 자신이 모르는 경우였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바다를 건너면서 거대한 폭풍이 되는 것처럼, 내 작은 실수가 누구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을 알지도 못한 채로 지냈다면, 그 얼마나 끔찍했을까.
11 청소기를 돌리려다 말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현관 신발장 위에 두었던 그 우편물을 갖다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의 발신인은 무슨 저축은행이었다. 봉투 속의 것은 하찮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아주 중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걸 전해주지 않고 자꾸 미루다가, 만약 수신인이 큰 손해를 보거나 낭패를 당했다면 그 일을 어쩔 건가? 잘못 배달한 우체부만 탓하고 말 건가? 101동을 향해 가는데 맘이 다급해졌다. 제발 별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평소에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던 곳이 너무 멀게 느껴져 종종걸음을 쳤다. 천방지축 명랑한 햇살과 바람 아래서 내 그림자가 허둥거렸다. (14매)
8. 빈 지게 – 이영혜 -
팽목항!
이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거나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은 진도 팽목항 부근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마을 뒤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으로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갯벌이 펼쳐져 있는 바다가 있다. 바다에는 김이나 미역을 채취하는 배가 있고 작은 어선들이 물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우리 집은 마을의 가장 안쪽이면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집 뒤로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크고 작은 소나무들이 둘러치고 있었다. 묘지의 봉분들은 엄마의 젓처럼 봉긋한 것이 예쁘게 솟아있다. 공동묘지는 봄에는 잔디 씨를 주었고 여름에는 소나 염소들의 쉼터였으며, 가을과 겨울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특히 겨울에 눈이 내렸을 때 봉분 위로 올라가 비료 포대를 깔고 미끄럼을 타면 정말 재미있고 신이 났다. 그곳은 우리에게 유일한 놀이터였고 놀이였다. 묘사를 지내는 철이면 떡을 얻어먹는 곳이기도 했다. 공동묘지가 사람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즐거움 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공동묘지를 무섭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느 날, 두 살 터울의 여자 동생 시단이와 공동묘지에서 놀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까? 땅에서 솟았을까? 8살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단이 손잡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마을 회관 앞마당에 작은 꽃집이 나타났다. 그 집은 빨강꽃, 파랑꽃, 노랑꽃들로 감싸고 있다. 꽃집의 벽은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처럼 만들어져 있고, 바닥에는 굵은 새끼를 꼬아 서로 연결해 놓았다. 네 기둥에는 장대를 세워 꽃과 깃발을 달고 하나로 연결해 놓았다. 집을 에워싼 형용색색 꽃들은 나비처럼 가볍게 나부끼고 있고, 깃발은 바닷바람에 살랑거리고 있다. 아름답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한 작은 꽃집은 마을 회관 앞마당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어른들이 당부하지 않아도 장난꾸러기 아이들 누구도 그 예쁜 집에 들어가 보려고 하지 않았고 손대면 안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두 모여 있고 아주머니들은 흰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고, 머리에는 얼굴까지 내려오는 두건으로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저씨들도 같은 색 윗옷과 바지를 입고 손에는 징이나 꽹과리, 장구 등을 들고 있다.
징, 꽹과리, 장구를 든 아저씨들이 음악대를 시작하는 것처럼 요란하게 시작한다. 그러자 예쁜 꽃집은 아저씨들의 어깨에 살포시 앉는다. 꽹과리든 아저씨가 큰 소리로 알 수 없는 노래를 시작하자 꽃집은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닌다. 동네 사람들 모두 그 뒤를 따르면서 같은 목소리와 언어로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은 왠지 신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눈과 귀만 따라다니다 공동묘지로 올랐다. 공동묘지는 가장 높은 곳이기 때문에 꽃집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서였다. 꽹과리, 장구 소리도 약해지고 꽃집은 어느덧 산을 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 그곳에 있었지만, 우리 엄마는 집에 계셨다. 동생이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곳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엄마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드렸다. 엄마는 말씀하셨다. “꽃상여 보았니? 영수네 할머지께서 돌아가셨으니 잘 만들었겠지!”라고 하셨다. “부자이고 오래 사셨으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부드러우면서도 가냘픈 종이로 만든 그 꽃집은 죽은 사람을 안에 모시고 산소까지 이동하는 꽃상여였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아름답고 멋진 꽃상여를 타고 산소로 가는구나! 생각했다. 악기를 든 어른들 소리는 동네 큰어른이 돌아가셨음을 알리는 소리였고 뒤따르는 사람들의 소리는 곡소리 였던 것이다.
나는 둘째 딸이었고 위로 두 살 많은 언니가 있다. 엄마가 몸이 좋지 않아 언니는 외가에서 살았다. 그래서 나는 셋째 딸 시단이와 놀았다. 시단이는 몸이 약한데다 몸을 긁어대는 피부병이 있어서 가렵다고 우는 날이 많았다. 나만 졸졸 따라다녔다.
어느 날 오후 우리 집 누렁이가 보이지 않았다. 누렁이는 색깔이 누런 큰 개였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찾아다녔고 우리는 늘 뛰어놀던 공동묘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누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짝짓기하러 갔나 보다! 며칠 있으면 오겠지.” 하셨다. 이튼날 아침 동네 아저씨가 오셔서 말했다. 큰놈이네 누렁이가 자기네 밭두렁 아래에 죽어 있다고 했다. 엄마가 내리 딸을 셋을 낳고 마지막에 막내로 아들을 낳아서 큰놈이네 였다.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식구들 모두 슬퍼했다. 동네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슬프지 않았는데 우리 누렁이가 죽었다고 하는데 너무 슬펐다. 아버지께서도 안타까워하시며 지게에 삽을 챙겨서 지고 누렁이를 데리고 와서 뒷산으로 갔다. 우리는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당시에는 집에서 기르던 동물들은 잡아먹었다. 돼지는 집안에 큰일이 있으면 잡았고 소는 집에 재산이기때문에 토끼나 개를 잡아먹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집에서 잡아먹는데 마음이 쓰이면 이웃집과 바꿔서 잡아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서울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집에서 기르던 동물을 먹지 않았다.
시단이는 오늘도 종일 긁고 있었다. 동네 할머니 꽃상여 나가것을 구경 할 때에도 손은 긁고 있었고 누렁이가 죽어서 가족들 모두 슬퍼 할때도 긁고 있었다. 피가나서 딱지가 앉아도 긁고 또 긁어서 아버지가 야단을 쳐도 멈추지 못했다. 가끔은 가렵다고 나에게 징징거리면 나는 아버지께 일러 주곤 했다. “아버지! 시단이 또 긁어서 피가나요!” 아버지는 회초리 드는 시늉을 하며 버럭 하셨지만 시단이는 그때뿐이고 아버지 모르게 이불속에서 긁고 또 긁어댔다. 자다가 자주 잠을 깨서 울기도 했다. 시단이가 왜 긁어었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의원 같은 일을 봐주곤 하셨지만, 시단이의 피부 가려움은 알아내지 못했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깨웠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으면서 아버지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 아버지는 시단이를 이불에 끌어 안았다. 시단이는 깨지도 않고 팔과 다리가 축 늘어지듯 떨어졌다. 엄마는 막내 남동생을 안고 젓을 먹이고 계셨다. 엄마는 나를 보고 아버지를 따라가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문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이불에 쌓은 시단이를 다시 멍석으로 쌓았다. 왜 시단이를 멍석으로 쌓는지 알 수 없었고 물어 보지도 못했다. 멍석에 쌓은 시단이는 아버지의 지게에 올렸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등불 들고 따르거라” 하시며 시단이를 지게에 지고 뒷산을 지나 한참을 갔다. 뒷산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였다. 한밤중에 얼마쯤 갔을까! 우리 집 뒷산이 아니였다. 너무 멀리와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어디가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얼마쯤 어디쯤 왔을까? 아버지가 멈춘 곳은 주변에 돌들이 많이 보였고 듬성듬성 작은 나무들이 있었다. 바닷가도 아닌데 바닷가처럼 돌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지게를 내렸다. 지게에서 시단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시단이는 울지도 깨어나지도 않았다. 시단이가 멍석에 있는데 일어나서 피부를 긁어대며 울어야 하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시단이의 모습은 멍석 속에 있다. “일어나! 시단아 일어나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변을 살피시더니 움푹해 보이는 곳에 있는 돌들을 치우시더니 그곳을 삽으로 파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한번 보았다. 달 주변에 안개가 빙글빙글 감싸고 있었고 별은 보이지 않았다. 깜깜한 밤이라는 것을 알고 갑자기 추워졌다.
어둡고 차가운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시단이가 있는 멍석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헛 짓거리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시단이가 있는 멍석을 옮기며 다른 곳을 보고 있으라고 타이르셨다. 그쪽은 절대 보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시단이를 어떻게 하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하였지만 물어보지도 돌아보지 않았다. 깊은 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먼 바다의 미풍이 우리가 있는 산까지 와서 등불을 살짝 건드리고 있었다. 평소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후딱 끝내시는데 오늘은 한밤중에 나를 깨워 시단이를 지게에 지고 오셔서 땅을 파고 하시는 일이 밤샐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래 걸렸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버지는 “가자.” 하셨다. 아버지가 다시 짊어진 지게는 빈 지게였다. 나는 아버지가 땅을 팠던 그곳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작은 돌들이 둥그스름하게 쌓여있었다. 어렸지만 누가 봐도 무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어! 아까는 없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단이가 저기 저 돌무덤 속에 있는 건가? 무거울 텐데!”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다. “아버지! 시단이는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나는 계속 그곳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그만 가자.”라고 하시며 재촉하였다. 아버지가 앞장서고 나는 뒤를 따르며 뒤를 보고 또 보고 했다. 아버지는 또 말씀하셨다. “자꾸 뒤를 보면 안 된단다. 그러면 안돼! 시단이 가야 하는데 못 간다.”라고 조금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시단이가 어디로 간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다시 뒤를 봤을 때는 비가 내릴 듯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다음날 비가 내렸고, 막내 남동생의 귀여움을 보며 아무 일 없는 듯 다시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았다.
동네 할머니는 꽃상여를 타고 동네 사람들 모두 배웅받으며 가셨고, 우리 집 누렁이는 아버지 혼자 어딘가로 보냈다. 내 동생 시단이는 야밤에 아버지와 함께 겨우 8살 먹은 내가 함께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누렁이를 지게에 짊어지고 가서 빈 지게로 오셨다. 그리고 누렁이가 타고 갔던 지게는 시단이를 보내는 일까지 했다. 당시에 나는 누렁이는 죽었는데 시단이가 죽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슬퍼서 울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시단이는 꽃상여를 타고 가지도 않았다. 피가 나도록 긁어대며 징징거리는 동생이 없어졌을 뿐이다. 누구도 시단이가 죽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의 8살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슬픈 일인지 무서운 일인지 잘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알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크게 느끼지 못했다. 처음 본 꽃상여는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었고, 그것은 죽은 사람을 태워 주는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든 꽃집으로 된 그것을 타고 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공동묘지에도 시단이의 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지게는 밭에서 거름을 퍼 나른다. 또는 집에서 나갈 때 빈 지게로 나가고 들어 올때는 나무나 소여물, 고구마나 무, 배추 등 각종 농산물로 가득 채워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 집 지게는 무생물이 아닌 사람이나 동물을 짊어져 나가서 빈 지게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우리 집 빈 지게는 사라졌다.
9. 좋은 인연/ 이장희
1)이십 년 고교 근무를 끝내고 중학교로 간 첫해였다. 입학식 준비로 바쁜 첫날, 축하 꽃다발과 기념품 장사치들이 교문을 에워쌌다. 인파 속의 누군가 말을 건넸다.
2)“혹시 미술 과목 가르치시던 선생님 아니셔요?”
3)인사를 받는 순간 그녀와의 사이에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하고많은 제자 중 어제 본 듯 낯익은 아줌마라니 예사가 아니었다. 아이가 입학한다는 말만 듣고 퍼즐 맞추듯 경우의 수를 더듬었다. 담임한 적도 없고 재학 시절 간부나 미술부도 아니었으니 우리 사이 어떤 곡절이 숨었을까
4)세월을 스쳐간 제자 주먹구구로 얼추 삼만이 넘겠다. 학교마다 학급 수도 다르고 두 해 거듭 가르치기도 했지만 스물이 넘는 학급에, 같은 해 여러 학교, 학년을 맡았던 기억까지 겹쳐왔다. 한 해라도 배운 제자가 적게 잡아도 이만 명은 웃돌 듯하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도록 정분의 끄나풀을 놓지 않은 제자라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지금 얘기하려는 주인공은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닌가 싶다.
5)다음날 ‘아하’ 무릎을 칠 정도로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미술실 당번이었다. 스쳐간 청소당번을 학교마다 친다면 수백 명일 텐데 그녀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뭘까? 깍듯한 공손함과 눈웃음 때문이었다. 청소를 마무리한 뒤 미소로 총총 사라지곤 했지만 말 없는 가운데 뇌리에 새겨졌으리라. 이름과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다시 만났을 때 옛일을 상기시키니 내 기억은 영판 맞아떨어졌다.
6)그녀의 신입생 아들은 수업 시간마다 내 눈에 성큼 다가왔다. 별난 부탁도 우대할 의무도 없었건만 피붙이처럼 신경 쓰였다. 편애나 과보호를 싫어하는 내가 ‘통찰은 성심껏, 지도는 냉철하게’를 원칙 삼아 대했다. 예술 취미도 손재주도 그저 그랬던 그녀의 아들에게 평균에 근사한 실기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여러 영역을 평가하니 분야마다 마음이 쓰였는데 천만다행으로 이론에는 밝았다. 보통 실기에 만점 가까운 이론을 보태니 ‘우’는 됐고 어쩌다 ‘수‘가 되면 나부터 마음 편했다.
7)임기 4년을 채워 인근 중학교로 옮겼다. 끊어질 법했던 제자와의 인연이 이어진 것은 그녀 딸애의 입학이었다. 엄마와 아들 그리고 딸을 제자로 삼다니 우연을 넘어 하늘의 배려인가 조물주의 마술인가 싶었다. 딸애는 미술특기가 뛰어나다고 귀띔하더니 과연 재질이 풍부했다. 교육청 예술영재학교에 선발되기를 갈망했고 본인의 노력과 애써준 보람이 있어 합격했다. 그러구러 귀한 사제 인연은 알토란처럼 여물어갔다.
8)가난했던 학창 시절 부교재를 빌려 쓰느라 설움을 당했던 나였다. 선생 노릇하면서도 자식 뒷바라지는 신통치 못했다. 아들이 초·중학생일 때는 고교 교사였는데 중학교로 옮겨오니 대학생, 고교생으로 커버린 것이다. 책값 하라며 돈한 푼 준 적이 없는데 이들 남매에게는 제때에 참고서를 챙겨줄 수 있었다. 필요한 책을 신학기에 구해놨다가 봄가을 전해주는 일이 제자사랑의 방편이었다. 이십 년 전 제자의 깍듯한 품행이 그 자녀를 보살피는 갚음으로 이어졌다.
9)2년 남긴 퇴직 전 종점은 생판 낯선 변두리 학교였다. 황량한 남의 동네에 꽃바구니를 든 첫 손님도 그녀였다. 재학생한테서도 못 받았던 꽃 선물을 학부모가 된 제자로부터 받으니 흐뭇함을 가눌 길 없었다. 화환 들고 오는 신사 숙녀는 내 제자란 소문이 교무실에 확 퍼진 것도, 멋진 제자 둔 스승이란 과분한 시선의 출발은 바로 그녀 덕이었다.
10)학교도 다르고 만날 기회도 뜸했지만 남매에게 책 선물은 품앗이처럼 이어갔다. 그녀의 딸은 만화, 영상디자인 영역의 카툰, 애니메이션에 남다른 실력을 쌓아간다 싶더니 공모전과 사이버공간에서 연이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11)손 전화 때문에 퇴직 후에도 인연을 이어갔다. 한동안 소통이 끊어지는 우환은 고향에서 벌초하다가 핸드폰을 분실한 일 때문이다. 여러 산소 몇 군데를 거친 뒤라 어느 숲에 빠뜨렸는지 막막했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도록 연락처를 몰라 갑갑했던 속내는 표현할 수가 없다.
12)우연한 기회에 ‘페이스북’에서 제자의 딸을 찾았을 때 그 기쁨이란 그 무엇에 비하랴. 인터넷으로 도움받을 일도 있구나 싶었다. 엄마 연락처를 물었더니 얼마 후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몇 해 만에 가족 상봉한 듯 반가워 좋은 인연 지속되기를 기원하니 그때는 퇴직 후였다. 제2인생 설계로 이곳저곳 배움의 길을 찾으며 가르침의 재능봉사까지 시작한 때였다.
13)그녀의 딸은 특기를 살려 애니메이션 고교에 입학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고 들었다. 그녀도 동네 인근에서 방과 후 수학 강의를 한다고 전해왔다. 그녀가 카카오스토리를 통해 근황을 알려오면 봉사활동사진이나 귀한 고전의 말씀으로 화답하였다. 인생을 보람차게 엮어갈 정보를 올리거나 전시회 작품이나 문학서적 소개를 안부 대신 선물하기도 했다.
14)그녀의 딸이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예술 분야이니 언젠가 도움 되려니 싶어 해묵은 대학원 졸업 논문을 우송했다. 그녀도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을 소개해온 건 그 뒤였다. 그림이 좋아 그쪽으로 진학하려는 학생인데 개인 지도를 청한다는 엄마의 견해 와 엄마와 헤어지기 싫은 딸의 견해 차이로 무산되었다. 선의로 소개한 제자가 얼마나 애태울까 싶어 받아둔 선금을 바로 돌려주었다. 제자가 대신 부랴부랴 사과를 해오니 취미 삼아 가르치려 했던 자랑이 그녀를 무겁게 한 것 같아 적이 계면쩍었다.
15)변함없이 성실한 그녀는 인연의 끈을 놓지 않는 워킹맘이다. 스승의 근황을 따스한 시선으로 살피며 지내는 제자가 내겐 반면교사가 된다. 언젠가 그녀 가정에 좋은 일이 생기면 꼭 가서 축하해 주리라 유념하며 고대하고 있다. 심신이 늘 푸른 그녀와 시공간을 초월해 소통하노라면 세상 둘도 없는 정신적 벗이요 피붙이 같은 제자란 느낌이다.
16)마당의 매화가 화사하게 분단장했다. 먼 산 눈바람에 꽃망울 터뜨리기를 망설이더니 경칩을 앞두고 활짝 피었다. 꽃과 함께 핀 지천명을 넘긴 제자와의 인연이 반갑고 믿음직했던 봄날, 꽃처럼 싱그러운 정에 감사할 따름이다. 꽃향기 품은 제자가 삼십여 성상 곁에 있다 생각하니 이 몸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
10. 하얀 거짓말 차갑희
1. ‘전화를 한 번 더 해야만 하나’. 사흘이 멀다하고 통화를 주고받던 큰언니에게서 몇 주째 연락이 없다.
2. 아흔을 바라보는 엄마, 서울댁 큰언니, 엄마를 모시고 사는 둘째 언니와 함께 천년의 고도 경주를 찾았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해 질 녘의 첨성대 주변과 월정교의 멋스러운 야경을 구경한 뒤 숙소에 도착한 시각은 세상이 잠든 깜깜한 밤이었다.
3. 우리가 머물게 될 400년 된 고택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지인이 바래다 준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휴대폰의 밝은 빛에 의지하면서 두 언니는 엄마를 밀고 당기면서 부축했다. 땀으로 후줄근해진 몸은 이내 시원한 여름밤 바람에 위로받았다. 에어컨이 비치되지 않은 곳이었지만 안방에서 주무시던 엄마는 한기를 느껴 이불을 끌어당기셨다. 우리는 대청마루에 펼쳐져 있는 모기장 안에서 도란도란 옛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초록 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고택에서 하루를 묵은 엄마는 찌뿌둥한 몸이 개운해졌다 하셨다. 마을 주민의 손맛으로 어우러진 아침밥은 임금님 수라상 못지않았다.
4. 걸음이 불편한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결정했을 때 한편으론 걱정도 앞섰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지만 산으로 들로 나물 캐러 다녀본 적 조차 없다 하신 우리 엄마. 곁눈 돌아볼 시간이 없었던 고생한 시절이라 오히려 기억 속에 묻어 버리고자 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코로나 펜데믹으로 일상은 아주 어두워져 있었다. 짧은 여행이지만 앉은 자리가 꽃자리 마냥 오랜만에 만난 네 모녀의 대화는 그칠 줄 몰랐다. 즐거워하는 엄마 모습에 작은 언니는 “엄마가 좋아하니 참 좋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은 한 지붕 아래 티격태격하며 살아가는 애증의 관계가 된 지 오래다.
5. 여행의 마무리는 우리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헤어지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배달음식으로 상을 차려놓고 내 집이 주는 편안함 때문인지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갑자기 식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작은 언니가 낮에 있었던 큰 언니의 말 실수를 조근조근 따지고 있었다. 맏인 언니는 동생들을 늘 자기 틀에 맞추려는 습성이 배여 있었다. 팽팽하게 맞서는 큰 언니를 달래려다 나 또한 묵혀 두었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야들이 잘 놀고 와서 와 이라노.”
놀란 엄마를 뒤로하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현관을 박차고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6.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을 지내야 한다는 신혼 시절이 떠오른다. 일찍이 홀로 되신 시어머님은 자식 사랑이 남다르게 유별 나셨다. 햇살 따스한 어느 봄날, 대청소를 한 뒤 어머님께 호된 질책을 당했다. 몸이 불편한 당신 사위가 힘겹게 마련해 온 화병의 꽃을 버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묵묵히 걸레질을 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어머님 너무 하시는 것 같아요.”라며 참고 있던 한마디를 던졌다.
출가외인인 형님은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오고 천사표였던 새 식구는 어른께 대드는 못된 며느리로 낙인찍혔다. 동서네와 함께하는 대가족 생활이 이어지면서 의도치 않은 여러일이 겹쳐져 친정 발걸음을 끊겠다는 시누이의 폭탄선언까지 나왔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 문제 없는 부부의 연을 다시 고민해야 할 만큼 심각한 나날이었다. 동전 크기만 한 원형탈모까지 하나둘 늘어났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형님 집을 찾아가 무조건 잘못했다며 하얀 거짓말을 했다. 집안의 평화 때문이었다.
7. 집으로 돌아오니 들썩이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큰 언니의 사과와 함께 나 역시 어설픈 용서를 빌며 자매의 난은 마무리되었다. 뚜벅이지만 즐겁고 맛있는 여행의 여운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8. 겉과 속이 다른 화해속에서 안타까움과 복잡한 생각들로 뒤섞여졌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적당한 거리감과 함께 언행의 조심성을 일깨워주었다. 어릴 적 함께 지내온 시간보다 배우자를 만나고 살아온 세월이 더 긴 만큼 이젠 각자의 삶을 존중해주고 이해해주는 폭이 넓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위치를 대변할 수 있는 자리에 있건만 그날 동생들에게서 받은 충격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언니의 상흔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하얀 거짓말이 아닌 진심으로 큰 언니에게 잘못을 빌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겠다.
11. 한외근 / 반려 선풍기
1. 마흔 해 넘게 함께 살았더니 목이 굽었다.
2. 대명동 한옥 문 칸 사글셋방에서 소꿉장난하듯 삶을 익히던 신혼 시절에 너를 입양했었지. 첫애 임신한 아내 입덧 요란하던 그해 여름에 무더위 견디기 힘들어했지. 당시 선풍적인 인기로 동났던 너를 여러 가게를 뒤지고 수소문하여 데려왔었지.
3. 우리 집에 오던 날부터 너는 사랑을 받았지. 이름값처럼 역풍을 쏟아 몸 뒤로 바람을 날렸고 초고속 버튼에서는 온몸을 흔들며 세찬 바람을 내뿜어 흐르는 땀을 멈추게 하는 신기를 보였지. 식구들 잠잘 때는 안면 풍 소올 솔 잠 지킴이로 변신했었지.
4. 아이들 공부하는 곁에서와 아내가 요리할 때는 등 뒤에서 춤을 추었고, 내가 성경책을 읽을 때면 옆에서 달려오는 졸음도 쫓았지. 손님이 왔을 때도 바싹 다가가서 부채를 버리게 하는 친절도 베풀었어. 해마다 여름 사막을 너의 아낌없는 사랑으로 건너곤 했지.
5. 대명동에서 범어동까지 셋방살이할 때도 따라다녔지, 지산동에서 아파트에 입주하고 시지동까지 여나므번 넘는 이사에도 다치지 않았지. 너를 담는 상자가 찌그러져서 버릴 때도 너의 의젓한 모습은 여전했어.
6.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을 때도 너는 손때를 묻혔지. 가족 식사 시간에도 식탁 옆에 앉아서 얼굴 반찬이었어. 대화 때는 얌전한 경청자였고 한더위가 오면 아침부터 정신없이 달리다가도 장마 때는 피곤한 몸을 눕혔지.
7. 아이들 방마다 친구들이 왔으나 어떤 친구는 오래가지 못했어. 모습은 세련되고 가벼워졌어도 체력이 약했어. 아들 방의 친구는 1년도 못 살고 발목이 부러져 딱지 붙인 채 재활용센터에 폐기되었어도 너는 체격이 튼튼하고 발이 무거워 버팀의 힘이 강하여 날개 한 번 부서지지 않았네.
8. 아직도 병원 한 번 안 가본 이력이지만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하던 아이에게 걸려 넘어져서 목을 다치는 사고를 당했지. 층간 소음 때문에 제발 조용히 놀라고 주의해도 이 방 저 방 찾고 숨느라 법석이던 순간 덜렁이 외손녀의 발에 걸렸던 거지. 아내의 긴급 처방으로 밴드 깁스를 하고서도 목을 똑바로 가누지 못하고 조금 숙이지만 바람은 여전했다.
9. 국가의 전압 220볼트 상향 때 110볼트 전기용품이 무용지물 될 무렵에 변압기로 접촉하여 퇴출 위기를 넘긴 질긴 생명이었지. 더 큰 위기는 덩치 큰 스탠드 에어컨이 자리 잡았을 때 용케도 내 방으로 이사 와서 폐기될 고비를 무사히 넘겼지. 아이들 얼굴 보기가 어려워져서 외로웠을 테지. 새 집 같았으면 새로 나온 천장형 에어컨으로 변화하여 선풍기는 모두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을 거야.
10. 어느 해는 9월에도 기온이 높아서 늦게까지 봉사하던 너는 가을이 되면 동면에 들어갔어. 방마다 흩어져 있던 친구들과 베란다 창고에서 만나 지난여름 일어났던 식구들의 비밀스러운 모습을 이야기했을 테지. 혹시 누군가 들을까 봐 소곤댔겠지. 미리 잠자고 있었던 먼지나 다른 박스들은 궁금해했을 거야.
11. 이젠 뽀얗던 피부도 누렇게 퇴색하고 네 몸 곳곳에 긁힌 상처 자국이 선명하네. 주름살 입에선 단내 나는 신음소리가 그르렁거리네. 이명으로 위잉 귀속 매미 우는데도 치매 걸려 집 잃을까 걱정인가 명찰은 용케도 달고 있구나! ‘역풍 GOLD STAR’. 친정 회사 이름이 금성사에서 LG로 바뀐 줄이나 아는
12. 반백 년 가까이 정을 쌓으면서 평균수명 잊은 채 여전히 다리가 튼튼한 노익장을 뽐내지만 어쩔 거나, 아이들이 성장하여 출가하고 방마다 있던 친구들도 사라지는데 저속에서도 몸을 부르르 떠는 속도가 슬프다.
13. 지금도 목이 굽은 너의 시동스위치 버튼을 누르는 것은 우리 식구와 함께 살아온 가족인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