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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1
느부갓네살이 위에 있은지 이년에 - "이년에"란 말은 해석상 난제이다. 1:5이하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왕의 명령대로 다니엘과 기타 유대 소년들이 3 년 동안 훈련을 받고 왕께 수종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2 장에 기록된 느부갓네살의 꿈은 그가 왕된지 3년 후에야 된 일이 아니었겟는가? 그런데 왜 "이년"이라고 하였을까? 그러나 이것은 난제(難題)가 아니다. 느부갓네살의 즉위(卽位)한 첫 해는, 섭정왕(攝政王)이었던 것인만큼 그것이 2:1의 "이년"엔 포함되지 않았을 듯하다.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 옛날 사람들은 인상 깊은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그에게 불안을 줄 정도로 이상하였고, 또 그것이 좋은 꿈으로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번민"하였다.
단 2:2
박수와 술객과 점장이와 갈대아 술사 - 이들에 대하여 자세한 구분은 하기 어렵다. 이들은 미신배(迷信輩)인데, 이런 미신배에 대하여는 구약이 엄금하였으며, 또한 처벌 받을 자들로 말한다(신 13:5, 18:11).
부르매 그들이 들어와서 왕의 앞에 선지라 - 느부갓네살이 사람들을 부른 목적은 그들로 합하여 해봉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왕은 그 꿈을 잊어버리고 우선 이것을 그들더러 알아내라고 한다. 이런 강요(强要)는 옛날 폭군(暴君)의 하는 짓이었다.
단 2:4
아람 방언으로(아라미드) - 옵펄트(Oppert)는 이 말이 본래의 원본이 아니었고 후대에 삽입(揷入)된 것이라고 한다. 이 학설을 추종하는 자들이 많다 (Kanabenbauer, Bevan, Haupt, Marti, Prince, Montgomery) 그러나 이런 견해는 억측이다. 유력한 학자들이 이 말을 본래의 원본이라고 주장한다.(d'Envieu, Behrmann, Kamphausen ). 아람 말은 순수한 셈 방언 이외의 다른 방언의 요소들도 내포하고 있다. 갈대아의 관리들은 아람 말을 사용하였다(Otto Zockler).
단 2:5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 자들은 이 문구를 서로 다르게 번역한다. 곧, "이 명령이 내 편에는 확정되어 있다"하고, 혹은 "이 명령이 내 편에서 공고(公告)되었다"라고 하고, 또 혹은 "이 명령이 내게 알려져 있다"라고 하였다.
어느 것을 취하든지 그 뜻은 그의 명령이 변경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단 2:8
시간을 천연하려 함이로다(이따나 안툰 자베닌)- 70인역(LXX)과 데오도숀역(Theodotion)은, "너희가 기회를 사려고 한다"라고 번역했고, 수리아역(Syriac)은, "너희가 시간을 요구하는 구나"(You ack for time.)라고 하였다. 어느 번역을 채택하든지 그 뜻은, (1) 벌 받을 시간을 지연시킨다는 것, (2) 왕의 노(怒)가 멎기가지 시간을 연장시킨다는 것, (3) 새로운 환경이 전개 되기까지 문제를 끈다는 것 등이다.
단 2:9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카다 히 다데콘) -우리 한역은 고대 역문(古代譯文)과 일치한다. 월겟역(Vulgate)도 이와 같은 뜻으로 표현되어 있고(una est de vobis sententia), 수리아역(Syriac)도 그렇다. 여기 아랍어로 "법"이란 말(따드)은 바사 어풍(語風)의 말이다(Marti, ist Persisches Lehnwort). 그러면, "오직 하나"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위의 5절에 관계된 사형(死刑)을 가리킨다.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니라 - 곧, 그들이 그 당연한 사태가 변하기를 기다리는 의미로 보낸다는 뜻이다.
단 2:10
크고 권력 있는 왕이 이런 것으로 물은 자가 절대로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 이 문구의 의미는 아무리 큰 권세 있는 왕이라도 이런 것을 알려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70 인역(LXX)에는, 여기에 "물은"이란 과거사(過去事) 대신 "묻는"이란 현재사(現在詞)로 번역되었다.
단 2:11-13
술사들이 자기들로서는 왕의 꿈을 알아낼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 자연스러웠다(11절). 그러나 왕은 그 말을 인하여 크게 노하였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포학한 일은 옛날의 모든 폭군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폭군 앞에서도 다니엘은 자기 신앙도 지켰고, 그 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사실이다. 신앙이 진실한 자는 언제나 폭군 앞에서도 성공을 거두는 법이다.
단 2:14-16
다니엘이 그 때 당면한 난제(難題)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위대 장관 아리옥을 찾아가서 말한 것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는 신앙의 담력을 나타내었다. 그는, 간접적으로 폭군 느부갓네살을 책망하는 말을 하였다. 곧,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라고 한 것이, 그의 담대한 말이다. 여기 "급하뇨"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메학체파니, "혹독하다" 혹은 "잔인하다."를 의미한다. 70인역(LXX)은 이것을 "단호하뇨"라고 번역했고, 데오도숀역(Thodotion)과 수리아역(Syriac)은 "파렴치한가"라고 번역했고, 영국 왕역(King James Version)은 우리 한역과 같이 "급하뇨"라고 번역하였다.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 하니라 - 이것도 문제 해결을 확신한 신앙의 담력으로 한 말이다. 91) 성도가 역경을 당하여 그 해결을 확신하고 담대하여지는 비결은, 의리(義理)를 붙잡고 하나님 편에 서는 데 있음(자 바28:1). 그 때에 다니엘이 애매하게 폭군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그는 하나님의 편인 반면에 폭군 느부갓네살은 불의(不義)의 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제 억울하게 죽게 된 다니엘을 돌보실 것은 명백하다. (2) 신자가 역경을 당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니, 그런 때에 그 믿음으로 담력을 얻음(막 5:36). 그런 때에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자살 행위(自殺行爲)와 같다.
모든 위대한 성도들은 믿음으로 용단한 자들이었다. 영국 사람으로서 중국(中國)에 갔던 골든(Gordon) 장군은, 클락(Clark)이 저술한 "귀한 약속들"(Precious Promises) 이란 책을 늘 품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많은 모험을 하기도 하였다.
단 2:17,18
다니엘이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신앙 동지들에게 그 난제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한 것은, 역시 그의 신앙을 보여준다. 그는 기도만능(祈禱萬能)을 믿었다. 그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기도하면 해결 되는 줄 알았다. 그의 이와 같은 신앙은, 기도의 사람 다윗의 사상과 같다. 다윗은 말하기를,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94:4)라고 하였다. 욥기에 말하기를,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라고 하였다(욥 5:8). 다니엘은 무엇보다도 합심 기도를 더욱 중요히 여기는 의미에서, 그의 세 친구들더러 기도하라고 부탁하였다.
단 2: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 이 계시(啓示)는 다니엘에게 꿈으로 임한 것이 아니고, 그의 깨어 있던 중에 임한 것이다(Young). 욥4:13, 7:14, 20:8, 33:15 참조. 설혹 그것이 꿈으로 임하였다고 해도 그 계시 방법이 저급(低級)이라고 할 것은 없다. 계시시대엔, 선지자들에게도 꿈으로 계시가 임한 일이 있었다(민 12:1-8). 다니엘이 받은 계시와 같은 것은, 오늘날 우리 손에 있는 성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받아 쥔 일에 대하여 극히 감사해야 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신앙은, 간구하는 생활에 진실한 동시에 찬송 생활도 쉬지 않는다. 약 5:13에 말하기를,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라고 하였다.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줄 아는 자는 은혜받은 자이다. 그런 신자는, 자기가 영광을 받음이 죄악인 줄도 안다. 시 115:1에 말하기를,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라고 하였다.
단 2:20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 하나님에게는 "지혜"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지혜대로 실행하실 "권능"도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의 모르시는 가운데 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이와 같으신 하나님의 관하(管下)에서 살게 된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단 2:21,22
이 두 귀절은, 위에 관설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말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 이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어떠하심을 보여준다. 곧, 임금들을 폐하기도 하시고 세우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 이상 높은 자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주장하신다.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 하나님은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소유자이실 뿐 아니라. 그것을 인생들에게 주시기까지 하신다. 모든 참된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인데도 불구하고, 그 소유자들이 흔히 교만하게 됨은(고전 8:1), 그들의 우매이다. 돼지가 도토리 나무 아래 떨어진 도토리를 주어 먹으면서도 그 나무를 알아 볼 줄은 모른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 칼빈(Calvin)은, 이 말씀이 구속 사업(救贖事業)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啓示)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계의 이법(理法)이 아니고 예언 관계의 깊은 지혜를 드러냄이다. 바벧론을 위시하여 모든 고대(古代)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장차 메시야 왕국이 임할 프로그램과 관련되어 있다(31-45).
단 2:23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 하나님께 대한 이와 같은 칭호는, 실상 계약 사상(契約思想)과 관련된 것이다. 다니엘의 하나님은,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신(神)이 아니고, 벌써 그의 조상 때부터 계약의 말씀으로 임하시고 또 그대로 성취하시는 진실하신 신이시다. 신앙은, 이렇게 고래(古來)의 참 성도들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우리가 주께 구한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 그는, "나"란 말을 많이 쓰게 되는 이 부분에서도 "우리가 주께 구한바"(베에나 민낙)라고 한다. 곧, 그 때의 난제(難題) 때문에 기도하되 자기 혼자 한 것이 아니고, 그 친구들과 함께 하였다는 것이다(17-18). 그는 이렇게 남들을 존중히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기도 응답이 특별히 자기에게 임한 사실을 황송하게 생각하며 감사한다.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이 말에 대하여는, 19 절에 있는"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란 문구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왕의 일"이란 것은, 느부갓네살왕의 꿈에 보여 주셨던대로 왕에게 되어질 일을 가리킨다.
단 2:24
바벧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 이것은, 다니엘의 박애(博愛) 정신이다. "바벧론 박사들"은 왕의 꿈을 알아내는데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함께 살려 주기를 원한다. 그는 자기의 승리로 인하여 그들을 차별 대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만 높이고 자기 자신은 바벧론 박사들과 같은 수준의 인생으로 낮춘다.
단 2:25
아리옥이 다니엘을 데리고 급히 왕의 앞에 들어가서 고하되 내가 한 사람을 얻었나이다 - "아리옥"은, 왕의 인정을 더 한층 얻으려고 다니엘을 자기가 얻은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이 세상 관리들은 이렇게 임금에게 잘 보이려고만 애쓴다. 그들은 세상 영광만 안다.
단 2:26
벧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 - 1:7 해석 참조.
단 2:27
다니엘이 왕 앞에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물으신바 은밀한 것은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 다니엘이, "박사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장이"들의 생명은 보호하면서도(24 절), 느부갓네살더러 그들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해야 될 것을 말해 준다. 그는, 자기 자신도 높이지 않고 하나님만 높였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는 자가 이방 박사들 중에서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방 권세들은 메시야 왕국을 이겨낼 수도 없지만, 메시야 왕국에 대한 이상(묵시)을 해석할 능력도 없다. 느브갓네살이 이방 박사들에게 자기의 잊어버린 꿈을 알아내라고 한 것은, 그들의 실력을 알아보는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잊어버린 꿈을 알아낼 능력이 없는 자가 어떻게 그것을 해석할 수 있으랴? 그들은 할 수 없고, 오직 살아 계신 대 주재 하나님의 종 다니엘이 그 꿈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바로 하나님 나라(메시야 왕국)가 세상 나라들에 대한 숭리자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것은, 자기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 나라들을 이기신 것이다. 다니엘이 기도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한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서만 그런 은밀한 일을 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니엘 자신도 여러 말로써 이 사실을 설명하였다. 곧, 그 해몽은 자기의 지혜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지혜로 되었다는 것이다(Harvie Conn).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 이 귀절에 대하여 하비 칸(Harvie conn)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여기 이른바"후일"이란 말은, 아람 원어로 아카리드 요마야라고 하는데 그것은 "날들의 마지막 부분"이란 뜻이니 곧, 준비 시대가 다 지나간 후에 임할 성취 시대(成就時代)를 말함이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바라보던 시대들이 다 지나간 후에 임할 메시야 시대(신약 시대)를 말함이다.
전통적 학파에서는, 이 문구를 위해 말한 것과 같이 메시야와 관련시켰다. 그들에 의하면, 이 문구의 의미하는 시대는 하나님께서 땅에 나타나시므로 시작된다(Young, Leupold, Calvin).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저들은, 이 문구가 메시야 시대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 중에서 특별히 드라이버(Driver)는, 이 문구가 일반적 의미의 미래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주의 학자들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위에 벌써 소개된 통적 학파의 해석은 신약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문구를 "만일"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신약은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것이 메시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의미한다고 한다(히 1:1-2; 행 2:17; 딤후 3:1; 요일 2:18). 이렇게 신약 성경에 이 어귀의 용법은 전통적 학파의 해석을 지지한다.
위의 하비 칸(Harvie Conn)의 논조는 지당하다. 죄클렐(Otto Zockler)도 이 어귀가 메시야 시대를 가리킨다고 하였고, 마르티(Karl Marti)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후일이란 말은 히브리어에서 종말(終末)의 시기(時期)를 가리키는 전용 술어(專用述語)이다"라고 하였다( ist der aus dem Hebr. bekannte terminus fur die Endzeit vgl. zu Jes 2:2.-Das Buch Daniel, p. 14).
단 2:29
여기서도 다니엘은, 그가 왕의 꿈을 알게 된 것이 그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음을 밝혀준다. 다니엘은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믿게 한다.
단 2:30
내게 이 음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다른 인생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으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 다니엘이 여기서 말한 것은 두 가지이다. 곧, 자기가 왕의 꿈을 알게 된 것은, (1)자기에게 남보다 우수한 지혜가 있었던 까닭이 아니라는 것이며, (2)오직 왕에게 그 꿈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계시(啓示)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 뿐이다.
이 말씀에서도, 다니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운동이 인생의 어떤 가능성에 의존(依存)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높이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역설(力說)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운동은, 온전히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뿐이라고 한다.
단 2: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 여기 "신상"(神像)이란 말은, 아람 원어로 첼렘( )이니 인상(人像)을 의미하고 신상을 의미하고 신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한역(韓譯)에 "신상"이라고 된 것은 오역이다. 힛지키(Hitzing)이것이, 신상(혹은우상)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의 동상(銅賞)과 같은 사람 형상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하비 칸(Harvie Conn)에 의하면, 이 신상은 인간의 모양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그 근원이 인간적인 것을 주요하게 보여준다. 과연 그 신상은 인간의 산물로서 이 세상나라들의 성격을 보여준다. 곧, 그것은 이 세상 나라들의 인간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 이후에 나와서 예상 나라들을 멸망시킬 하늘 나라의 신적(神的) 근원과 대조된다. 매클라렌(Alexander Maclaren)은 말하기를, "그 신상은 인간적 활동과 정복자의 욕망과 군대와 같은 인간 방편의 강조(强調)를 보여준다"라고 하였다.
이 신상에 있어서 몇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곧, 크다는 것, 광채가 특심하다는 것 등이다. 과연 이 세상 나라들은 저렇게 화려하게 보이나니 느부갓네살과 같은 정복자의 마음에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자신에게는, 그 나라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고 잔인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그가 본 세상 나라들의 성격을 짐승들로 비유하기도 하였다(7 장).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란 문구에 대하여 크리에포드(Kliefoth)는 생각하기를, 그것이 두렵기는, 그것을 구성한 금속 광채와 및 그것의 큰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대표된 세상 권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두렵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을 두렵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클리에포드(Kliefoth)의 이론은 합당치 않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 신상이 하나로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본문의 "한 큰 신상"이란 말에 있어서 "한"(카드)자는 중요하다. 느부갓네살은 네 개의 신상들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를 보았다. 이것은, 그 하나에 모든 세상 국가들이 대표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상 나라들은 모두 다 하나의 공동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 근원과 성질이 인간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공통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라들을 보실 때에 그것들이 공통되는 역사 철학을 가졌다고 보신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주재림 때까지 있을 세상 나라들의 흥망(興亡)하는 공통적 성격을 표현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이 네 나라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상에 그것들을 접합(接合)시키신 이유가 여기 있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여기 단 하나의 신상으로 보여주신 것은, 모든 정복자(征服者)들과 국가들이 일어났다가는 반드시 패망하는 그것이 공통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단 2:32,33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넙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 바우트플라워(Charles Boutflower)에 의하면, 그 신상의 각 부분의 각종 금속들은, 전통적으로 생각되던 각기 해당 국가(바벧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금"(金)은 특별히 바벧론에 부합한다. 어느 나라보다 바벧론이 금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우상들과 신당들이 금으로 단장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은"(銀)은 또한 메대 바사에 부합한다. 메대 바사에 있어서 사람들이 은을 돈과 같이 여겼다. 그리고 "놋"(놋)은, 헬라에 있어서 무기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되었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특별히 이것을 많이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철"(鐵)은 로마에서 흔히 사용되었는데, 갑옷이나 무기(武器)는 모두 그것으로 제조되었다.
하비 칸(Harvie Conn)은, 이 귀절들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이 귀절들에 있어서, 우리는 나라들이 점차 약체화되는 사실들을 볼수 있다. 다시 말하면, 후에 일어나는 나라가 전에 있던 나라보다 약하여지곤 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몇 가지로 표시되었으니, (1) 나라로 비유된 신상 부분들의 재료가 점차 저열(低劣)하여짐. 곧, 금은 은으로 후종(後從)되고, 은은 놋으로, 놋은 철로, 철은 철과 진흙이 섞인 것으로 후종된다. 이것은, 뒤에 나오는 나라가 전에 있던 나라보다 저열한 사실을 보여준다(39 절 상반 참조). 이 사실은, (2) 신상 부분들의 경중(輕重)에 의해서도 나타남. 인체에 있어서 머리는 가장 중요하므로, 그것으로 비유된 나라는 가장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부분들은 점차 낮은 위치에 있으니, 그것들로 비유된 나라들의 세력이 점차 저하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사실은, (3) 클리에포드(Kliefoth)와 카일(Keil)이 또 다른 방법으로 지적하였으니, 곧 통일의 정도 차이에 의한 것이다. 단일체(單一體)로 된 금 "머리"는 이상적 통일(理想的統一)을 보여주는 동시에 강한 나라를 비유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나라는 "가슴과 팔들"로 나뉘었으니 만큼 분파 성(分派性)이 있고, 또 다시 다음에 나오는 나라는 "배와 넙적다리"로 비유되었으나 더욱 분파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종아리(다리)와 발"로 비유되었으니 더욱 분파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후에 나오는 나라일수록 점점 약체화 된다. 이 네째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그 신상의 발이 "얼마는 진흙"이라는 점이다. 진흙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 카사프는, 여기서 진흙을 만들어진 생산품을 의미하고, 진흙이란 원료를 의미하지 않는다. 몬트코메리Montgomery)에 의하면, 옛날 바벧론에서 진흙으로 구워 만든 생산픔들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바사나 헬라에서도 그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본문에 신상의 발에 이 재료가 사용된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이 재료는 여기서 어떤 미술품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파상되기 쉬운 약한 재료가 그 초상의 기초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네째 나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더 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 진술된 해설은 많이 참고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보충적으로 말할 것이 있다. 곧, 느부갓네살이 본 신상의 각 부분으로 대표된 나라들에 있어서, 후에 일어날 나라가 전에 있던 나라보다 약하여지는 경향이 있으나, 성령께서 이 신상 계시(神像啓示)에 있어서 일률적으로 그렇게 보여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네째 나라 로마는 약한 나라로 나타나지 않는다. 특별히 40절은 말하기를, "네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같으리니"라고 한다.
단 2:34,35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 이 귀절들이 보여주는 계시는, 위에 관설된 아무 동작 없는 신상과 달라서 동적(動的)인 계시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돌"의 움직임이다. 여기 이른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이란 문구는, 그들의 움직이게 된 근원을 지적한다. 그것은 신상의 기원(起源)과 대조된다. 신상은 인간의 발명이지만, 그 돌의 움직임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아니다. 단 8:25; 욥 34:20; 애 4:6 참조.
그 돌의 파괴력은 우리 본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1) 그것이 철과 진흙의 혼합으로 된 발을 쳐서 부숴뜨림. 그것은 세상 권세의 마지막 형태를 파괴신킨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마지막 형태가 파괴됨에 따라서 전에 있었던 모든 세상 세력들도 함께 파괴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 세사의 모든 권세를 형성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필경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괴될 것을 보여준다. (2) 하나님께서 인간의 교만을 여지없이 파쇄시키신다는 의미도 여기 있다.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것이 없다"는 말은, 그와 같은 뜻을 보여준다(Harvie Conn).
단 2:36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 - 위의 31-35절에는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하였다. 그리고 36절부터는 그의 해석이다. 여기 "내가 "로 번여고딘 말은, 실상 아람 원문에서 "우리"란 복수 대명사(複數代名詞)로 되었다. 카일(Keil)과 루폴드(Leupold)는, 이 복수가 다니엘과 및 그의 세 친구를 가리킨다구 한다. 그러나 영(Young)은, 몬트고메리(Montgomery)와 일치하게 이 복수를 겸손의 표현으로 본다. 곧, 다니엘이 자기를 두드러지게 나타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속에 포함시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꿈을 해몽하는 것은, 다니엘 개인의 지혜로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란 복수 속에 묻어버린다.
단 2:37,38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 하비 칸(Harvie Conn)은 말하길를, 여기 "열왕(列王)의 왕"이란 말은, 몬트고메리(Montgomery)와 프린스(Prince)의 주장과 같이, 왕에게 대하여 부르는 퍼시아(Persia) 어투이고 바벧론 어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바벧론의 포로인 다닝레이, 바벧론식으로 왕에게 부른는 존호를 왜 몰랐을까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영Young)과 푸폴드(Leupold)는, 다니엘로서 이 술어를 사용한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1) 선지자 에스켈도 바벧론 왕에 대하여 이 술어를 사용하였다는 것(겔 26:7). (2) 바벧론의 조각문에 느부갓네살을 "열왕의 왕"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 높은 왕, 말뚝(Marduk)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한 것도 사실이다(Prince). 그러나 이 조각문 내용은, 그 왕이 자신에게 대하여 자칭한 것이고 그에게 대한 남들의 존칭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느부갓네살왕을 "열왕의 왕"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3)피시아(Persia)에, 왕을 가리켜 "열왕의 왕"이라고 한 조각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Young). 그렇다면, 다니엘도 바벧론에서 그런 명칭으로 느부갓네살에게 대햐여 불렀을 수 있다. (4) 그 때에 바벧론은 한 민족만 아니고 여러 민족들을 관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느부갓네살은 많은 민족들의 통치자란 의미에서 "열왕의 왕"이란 칭호를 받은 것이 자연스럽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칭호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느부갓네살의 자랑하는 국가도 이 참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칭호는 특별히 구약에 있어서 후기(後期)의 서책들에 많이 나온다(스 1:2, 6:9, 7:12; 느 1:5, 2:4; 시136:26 참조). 이 칭호는, 바벧론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였으며, 그것들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바벧론에서 점성술(占星術) 미신이 나왔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기의 믿는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여, 그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까지도 주장하시며, 인간의 생활과 생명을 주장하시며, 모든 피조물들 보다 탁월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은 바벧론신(神)들보다 위대하시며, 느부갓네살의 나라도 그가 주신 것이라고, 다니엘은 지적한다(바벧론 종교와 점성술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서는 Charles Pfeiffer의 Exile and Return을 읽어라). "주셨고"(키스나)란 말도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고대의 파피루스 문헌에서 이 말 뜻을 발견하였으니, 곧 땅을 빌려준다는 법률상 용어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곧, 그 왕국을 느부갓네살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빌려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소작인과 같아서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해야만 될 것이었다. 군왕들은 그 국권이 자기 힘으로 마련된 듯이 교만해진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준 이 말씀은 진리의 직언(直言)이다. 그는 왕 앞에서 전연 외측되지 않고 할 말을 하였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이것은, 얼핏 보면 과장되고 실상이 없는 말인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사실상 느부갓네살왕의 나라는 온 세상에 확대되지는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벧론에 관해서 고장된 것처럼 보이는 다니엘의 이 말은 문제될 것 없다. 실제적으로 느부갓네살왕은 당시에 알려졌던 세상을 다 통치했던 것이다. 이러한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은, 그 시대에 있었던 어떤 왕이든지 자기에게 관해서 그런 말을 사용한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말의 욧점은, 그가 모든 세상 권력의 우두머리이며 대표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고고학이 흥미있게 밑밭침하는 증거를 제시한다. 고고학의 발견에 의하면, 앗수로 왕세나케리브(Senacherib)가 역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사방을 다스리는 왕"이라고 말했다E.J.Young,Montgomery). 앗수로 초기에 왕들 중의 한 사람도 말하기를, "앗수로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 군대를 파견한다"라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다니엘은 여기서 그 당시 왕들이 전형적(典型的)으로 사용했던 말을 하고 있다. 바벧론 왕 느부갓네살의 통치를 가리켜 세계적인 것으로 말한 것은, 역시(램 27:6-7,28:14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구래스왕도 느부갓네살의 나라(바벧론)와 그 왕위를 빼앗았을 때에 말하기를,"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스 : 1:2)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도 역시 느부가세네살왕의 통치의 통치지 세계전 성격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세계적인 통치권은, 그 후계사람들과 통치의 세계적성격을 수축할 수 있다. 그의 세계적인 통치권은, 그 후계자인 고레스왕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왕의 통치권은, 사람들과 나라들 이상으로까지 확장 되었다고 한다. 우리 본문을 보면, 그가 "들 짐승과 공중의 새들"까지도 다스린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욧점은, 그의 통치 권력이 금수(禽獸)들에게까지 미치는 듯이 절대성(絶對性)있게 보였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 문구의 의미는, 시 8:6-8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귀절들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들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피조물을 다스리도록 세움이 되었다. 그러면 우리 본문의 말하는 바는, 느부갓네살왕은 창조자가 주신 사명(使命)으로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위를 받은 인간의 본보기란 뜻이기도 하다. 카일(Keil)은 말하기를, "여기 짐승에 대한 언급은, 그의 권세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는 것과 또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느부갓네살)에게 복종시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하여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증거해 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곧, 옛날에는 왕들이 때때로 동물원자르 소유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이 세상 토치권을 상징한 것으로 보여진다. 6 장에 기록된 다리오왕의 사자굴은 아마 그러한 일의 일례(一例)가 될 것이다. 몬트고메리(Montgomery)는 이와 같은 임금들의 동물원에 관하여 말한 바 있다.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마이스넬(Meissner)의 저서 "Assyrische Jagden in D.alte Orient"를 권장한다.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 여기 "왕"이란 말이 아람 원문에서는 당신이란 뜻이다. 이 문구에서 우리가 생각할 만한 점은, 여기서 느부갓네살 개인이 "금 머리"로 비유되었다는 뜻인지, 혹은 그에게 대표된 바벧론이 "금 머리" 와 같다는 것인지 구분해야 된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생가가하기는, 여기서 느부갓네살 개인을 말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 대표된 바벧론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Young, Kliefoth, Leupold, Keil, Calvin). 특별히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여기서 '당신'이라고 한 것은, 느부갓네살의 나라와 그의 모든 후계자들을 가리켰다"라고 하였다. 윌가 이렇게 해석해야 될 이유는, 특별히 본장 39 절에 그 신상의 둘째 부분도 왕국을 비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여기서는 당신이라고 하여 느부갓네살 개인을 지적하였을까? 크리에포드(Kliefoth)는 말하기를, 그 때에 바벧론 왕국을 대표한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목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금머리"는 바벧론 왕국을 비유한다고 모든 해석가들이 일치하게 생각한다. 바벧론 전에도 땅 위에 나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다 지나갔으니 느부갓네살의 꿈에 관계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바벧론으로부터 시작됨이 자연스럽다. 바벧론을 금으로 비유한 것은 다른 예언서에도 있다(렘 51:7; 계 18:16). 이 세상 주의(此世主義)를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함에 있어서는, 바벧론 왕국이 그 대표적인 자리에 있었다.(창 10:8-12; 계 17:3-6).
바벧론은 "금 머리"와 같이 나누임이 없이 통일된 나라로 유명하였다. 그 나라가 그렇게 강했으니 만큰, 그 당시 알려졌던 세계는 모두 바벧론의 치하에 들었던 것이다. 발튼(Barton)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자신이 말한대로 바벧론 나라의 영토는 세계적이었다. 느부갓네살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바벧론 신(神) 말뚝(Marduk)은 신뢰하고, 멀리 있는 나라들과 산들과 험한 길들과 막힌 길들과 가기 어려운 길들과 사막길들자르 통행하였다. 그리하면서 나는 순종치 않는 자들을 멸망시켰고, 원수들을 사로잡았고, 나라들 가운데 공의를 세웠으며, 그 백성을 높여주었고, 악을 진압하였다."라고 하였다(Archaeology and the Bibble, 1927. p.349).
단 2:39
왕의 후에 오아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다 - 이 귀절에는,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장중(掌中)에 있다는 뜻도 있다. 이 중요한 사상을 고조함이 이 예언의 중심이다. 나라들의 흥망은 우연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세상 나라들의 되어 나가는 역사 앞에서도 하나님만 경외해야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하비 칸(Harvie Conn)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이 귀절에는, 그 신상의 둘째 부분과 세째 부분이 해석된다. 이 부분들이 비유한 왕국들은, 7 장과 8 장과 10장에서 더 자세히 진술된다.
여기 둘째 날에 대하여 말한대로, 바벧론이 지나간 후에 다른 나라가 일어나리라고 한다. 그 나라는 바벧론만 못하다고 한다. 여기 "못한"이란 말은 아람 말로 아르아이니, "땅으로 향하여"란 뜻으로서 보다 낮음, 혹은 저열함을 가리킨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이 나라가 먼저 있던 나라보다 저열한가?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둘째 나라는 메대 바사인데 도독적으로 저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클리에포드(Klidfoth)는 말하기를, 이 나라의 영토가 바벧론보다 작았기 때문에 저열하다고 하였다. 또 한 가지 해석이 있으니, 그것은, 이 둘째 나라는 내부적 통일이 부족하기 때문에 저열하다는 것이다(Keil, Young). 이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의 이유는, 이 해석이 그 신상 전체가 보여주는 상징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곧, 바벧론은 단 하나의 머리로 대표되어 완전한 통일을 보여주는 반면에, 그 뒤에 나오는 나라들은 신상의 나뉘어진 부분들로 비유되어 분파서(分派性)을 띈다. 둘째 나라는 "가슴과 팔"로, 세째 나라는 "배와 넓적다리"로, 네째 나라는 "종아리"와 "발"로 각각 상징되고 있다. 이 상징은, 뒤에 오는 나라일수록 점차 내부적 통일이 부족하여 저열해 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다만 로마는 네째 나라이지만 가장 강하다(40 절).
이 둘째 나라가 과연 메대 바사일까? 이 문제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것이 메대 바사가 아니고, 메대 나라 뿐이라는 것은 비평가들의 학설이다 (Prince, Driver, Montgomery, Charles, Rowley). 그러나 전통적 해석가들은 이것이 메대 바사라고 하였다(Luther, Hengstenberg, Calvin, Pusey, Keil, Leupold, Young).
이 둘째 나라를 메대 뿐이라고 하는 비평가들의 학설에는 커다란 위험이 있다. 곧, 다니엘서에 과오(過誤)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비평가들은, 역사상으로 보아 바벧론 멸망 전에 메대 나라가 따로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그것이 있은 듯이 말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릇됨이 없다. 다니엘은 메대라는 나라가 독립적으로 있었다고 생각하였을 리가 만무하다.
이 둘째 나라를 메대 바사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영 박사(Dr. Edward. J.Young)가 길게 논중한바 있다(The Prophecies of Daniel, pp. 275-294). 우리 본문에는 더 자세한 말이 없으나, 7 장과 8장에서 이 문제를 밝혀준다. 특별히 8:20은, 이 둘째 나라에 해당되는 두 뿔 가진 수양을 가리켜 메대와 바사라고 하였다. 두 뿔에는 역사상으로 바사와 메대가 해당되는데, 바사가 주동적 역할을 한고로 10:13,20에서는 이 둘째 나라를 "바사"라고까지 말한바 있다. 그 말은, 이 나라에 메대가 합방(合邦)되어 있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뿐 아니라, 7 장에는 이 둘째 나라가 곰으로 비유되었는데, 몸 한 쪽으로 일어섰다고 하니(7:5), 역시 그 나라가 두 짝으로 성립된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나라를 다만 메대 나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뿐아니라, 위에 벌써 관설된 바와 같이 메대라는 나라가 독립적으로 바벧론 멸망 전에 있어 온 적이 없는데, 비평가들은 이 둘째 나라를 완전히 독립국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바벧론이나 헬라와 동등 지위에 있었던 것 같이 말하고 있으니 잘못이다.
우리는, 이 둘째 나라를 역사상에 있었던 메대 바사로 생각한다. 다니엘서는 합방된 메대 바사를 말하고 있다(6:8, 12, 15, 28). 대하 36:19-20 참조. 역사적으로 말하면, 그레스왕이 바벧론을 함락하기 20 년 전에 벌써 바사를 주장하고 또한 메대를 점령하였다. 주전 559 년에 바사와 메대는 합방되고, 그 뒤에 그레스가 바벧론을 쳐 이겼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내다보고, 그 일이 되기 50 년 전(B.C.604)에 벌써 예언하였다.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보수파 학자들은 모두 이 나라가 헬라를 비유한다고 하였다(Luther, Calvin, Hengstenberg, Leupold, Young, Keil, Pusey). 세대주의 학파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사라고 하나 옳지 않은 해석이다. 특별히 이 나라가 "온 세계를 다스릴것"이란 말씀은, 헬라에 잘 부합한다. 헬라의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였다.
단 2:40
네째 나라는 강하기가 철 가트으리니 철은 모든 물건을 부숴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철이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숴뜨리고 빻을 것이며 - 이것은, 일찌기 역사상에 나타났던 로마 제국을 예언하는 비유이다. 이 "네째 나라"에 대한 묘사가 특별히 자세한 이유는, (1) 어떤 의미에서 그 나라의 권세와 힘이 유달리 강대(强大)한 까닭이며, (2) 그 나라의 미래가 장차 임할 천국 운동(그리스도의 복음운동)과 밀접히 관계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The Messianic Prophecies, Sylabus, p.28). 특별히 이 기사(40 절)에 있어서 부숴뜨린다는 말이 거듭거듭 나오는데, 이와 같은 문체(文體)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Montgomery). 그러나 이런 중복체(重複體)는 여기 필요한 것이다. 그 나라의 정복력(征服力)이 철저하다는 사실이 중복 체로 표시되고, 그와 같은 강한 나라도 천국의 능력 앞에서는 파멸되리라는 사실도 암시된다(44-45). "빻을 것"이란 말은 망치로 파괴시킴을 의미한다.
단 2:41-43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하밍 철과 진흙이 합하지 않음과 같으리이다 - 이 점에 있어서 하비 칸(Harvie Conn)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곧, 이 부분 말씀은, 네째 나라 구조의 혼합적(混合的)인 성격을 진술하여, 그 내부적 단합이 부족함에 따른 약점을 가리킨다. 그 어투가 역시 중복체로서 그 나라 구조의 혼합성을 강조한다. 히브리어 문법에 의하면, 중복체는 역설체이다. 구약에는 어떤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두 번, 혹은 그 이상 여러번이라도 거듭 말하는 어투가 많다. 그러나 몬크고메리(Montgomery)는, 이 중복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본문을 고쳐보려는 쓸데 없는 노력을 하였다.
그 나라가 비록 "철" 같이 강하지만 저렇게 발과 발가락들이 나누인 것 같이 혼성(混成)되어 있을 뿐더러, 얼마는 "철"이며 얼마는 "진흙"인 것처럼 서로 연합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약점은, 앞서 지나간 나라들의 경우에 있어서보다 우심하다. 바벧론은, 단 하나의 "금 머리"로 비유되어 최대 한도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고, 메대 바사는 "가슴과 팔들"로 대표되었고, 헬라는 "배와 넙적다리"로 비유된 정도였다. 그 만큼 그 나라들은, 그 통일성의 결핍에 있어서 네째 나라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네째 나라는 "종아리"들로 나뉘었고, 더 나아가서는 "발과 발가락"들로까지 세분(細分)되었으며, 그 체질(體質)도 하나는 철인 반면에 다른 하나는 진흙이다. 이렇게 되어 서로 결합되지 않는 처지이다. 41 절의 "나누일 것이며"(* =펠락)란 말은, 양분(兩分)된다는 뜻으로 해석한 학자가 있으나(Driver),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다양성(多樣性)으로 나뉘어 있음을 가리킨다(Young, Montgomery). 특별히 이것은, 주로 내부적 불통일(不統一)을 의미한다(창 10:25; 시 55:9).
"그들이 다른 인종과 서로 섞일 것이나 피차에 합하지 아니함".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이다. (1) 여기 이른바 "그들"이란 말이 "왕들"을 의미한다 하고, "섞인"다는 말은 왕족들의 국제 결혼을 가리킨다는 학자들이 있다. (2) 그러나 루폴드(Leupol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이 문구는 일반적인 혼종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로마 제국의 말기(末期)에 될 일을 예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철은 본래의 로마족이고, 진흙은 게르만족 또는 다른 종족들인데 이들이 서로 혼종 결혼할 것이, 여기에 예언되었다는 것이다. (3) 위에 말한 루폴드(Leupold)의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는, 여기 서로 섞인다는 말을 혼종 결혼의 뜻으로 전용(專用)했으나 그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서로 "섞인"다는 말은 서로 다른 민족들의 정치적 합병(合倂)을 의미한 것인데, 정치적 합병은 하필 결혼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43 절의 "그들"이란 것은, 44 절 초두의 군왕들을 미리 당기어 말한 것으로 생각될 수 없고, 그 위에 벌써 나온 철과 진흙을 가리킨다. 그리고 철고 진흙은 민족이나 문화를 가리킨 것이다. 이들이 서로 섞여 있어도 합해지지 않는다고, 우리 본문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드려다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간의 노력은 실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아래 말씀(44-45 절)에서 강조한 바는 이렇다. 곧, 이 세상 나라는 아무리 강하여도 실패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네째 나라는 역사상 어느 나라인가?
(1)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것이 헬라를 가리킨다고 하였고(Prince, Driver, Montgomery, Charies, Rowley),
(2) 전통주의 학자들은, 이것이 로마를 가리킨다고 하였다(Augustine, Luther, Calvin, Hengstenberg, Keil, Pusey, Kliefoth, Boutflower, Leupold, Young). 영(E.J. Young)은, 이것이 로마라는 해석을 지지하는 논거(論據) 몇 가지를 들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제 7장의 제째 짐승이 제 8 장의 수염소(이는 자유주의 학자들도 헬라를 가리킨다고 함)와는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제 2 장의 네째 나라와는 동일하다. 제 7 장의 네째 짐승과 제 8 장의 수염소를 비교해 보면 그것들은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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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7 장의 네째 짐승 | 제 8 장의 수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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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나옴 | 땅의 서편에서 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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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없음 | 수염소란 이름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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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뿔이 없음 | 눈 사이에 뿔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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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한 뿔이 열 뿔 중 세 뿔을 뽑음 | 큰 뿔이 꺾이고 다른 뿔 넷이 나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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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승이 죽음 | 수염소가 전쟁 후에 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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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표(圖表)를 보아도 그 두 짐승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제 8 장의 수 염소가 헬라이니만큼, 제 7 장의 네째 짐승은 로마이다(세째 짐승은 헤라인고로). 그러므로 제 2 장의 네째 나라도 로마이다.
둘째 나라가 메대 바사(메대만이 아님)인 만큰, 네 나라의 순서는 바벧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일 수 밖에 없다.
다니엘의 말에 의하면, 메시야의 나라가 네째 나라의 시대에 접촉하여 건립된다고 한다. 역사적 사건으로 보아서도 메시야는 세째 나라 곧, 헬라 시대에 오시지 않았고, 헬라 다음 나라인 로마 시대에 오셨다. 로마는 네째 나라이다.
(3) 근년에 이르러서 세대주의 학자들이 역시 네째 나라를 로마로 본다. 게이블라인(A.C. Gabelein)은 다니엘서 2장을 가리켜 성경의 중추라 하였고, 아이온사이드(Harry Ironside)는 예언의 입문(入門)이라 하고, 띠한Dehaan)은, 다니엘서 2 장과 계시록을 연결시킨 연구가 성경의 모든 예언들에 대하여 가장 명석한 깨달음을 준다고 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 네째 나라를 로마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주의 학자들과 다르게 이 네째 나라의 발가락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재생(再生)될 로마를 상징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그열 발가락은 열 나라인데 그 나라들이 재생할 로마 속에 있다고 한다. 아이온사이드(Ironside)는 말하기를, 이 열 나라는 옛날의 로마 제국을 근거로 하여 서로 동맹(同盟)한다고 하였고, 띠한(Dehaan)은 말하기를, 이 열 나라가 연맹(聯盟)을 결성하고 있으나, 한쪽은 진흙으로 비유되는 5 대 민주주의 국가이고, 다른 한쪽은 철로 비유된 5대 전체주의(五大全體主義) 국가들이라고 하였다.
세대주의(世代主義)에 의하면, 재생된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망하고 천년 왕국이 성립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방인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초림시보다 재림시에 망한다고 하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열 발가락을 부숴뜨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초림 사건에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숴뜨리는 것이 평화롭게 임하는 복음 운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심판을 가리킨다고 해야 된다는 것이다.
위에 말한 세대주의(dispensationlism)의 해석을 총괄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이 해석은, 제 2 장에 있는 열 발가락을 특별히 강조하여 생각한 것, 그 열 발가락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재생될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는 것, 재생될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갑자기 멸망한다는 것,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은, 그리스도의 초림이 아니고 재림을 뜻 한다는 것, 2:44-45에 묘사된 천국은 천년 왕국을 의미한다는 것 등이다.
어떤 칼빈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위의 세대주의 주장들이 건전한 해석에서는 성립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세대주의 해석에서 "열 발가락"을 중심적으로 설명한 것은 잘못이다. 여기 41절에는 그 신상의 발가락들이 "열"이라고 한 말은 없다. 십수(十數)는 세대주의 학자들이 7:24-27의 "열 뿔"이란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물론 사람의 발이라면 열 발가락이 있다. 그러나 우리 본문(41 절)에서 십수를 염두에 두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강조한 바는, 그 발가락들이 철과 진흙과의 혼합으로 된 것인만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돌로 말미암아 발가락보다도 발이 부숴졌다는 것이다(34 절). 그러므로 여기에는 발이 중점적으로 관설되어 있다. 우리는, 본장에서 그 강조점이 수효에 있지 않다는 것도 주목해야 된다. 수효에 대한 관설은 7 장과 9 장에 나온다.
둘째 세대주의에서는, 제 2 장의 발가락들이 재생될 로마 제국의 열 왕(十王)을 의미한다고 하는데(Gabelein), 그 해석은 41 절의 "이 열왕(列王)의 때에"란 문구가 지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 "열왕"이란 말은 "열 왕"(十王)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 벌써 나온 신상(神像)의 각 부분으로 상징된 사대 왕국(四大王國)을 대표하는 것 뿐이다.
세째. 세대주의에서는 돌로 말미암아 임하는 멸망이 돌연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독단적(獨斷的) 해석이다. 특별히 스코필드(Schofield) 주해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말하기를, "부숴뜨린 돌이 이방 세계를 최후적으로 또는 갑자기 멸망시키는데, 이런것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방 세계의 권세는 아직도 존재한다. 부숴뜨리는 일은 아직도 보류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돌로 말미암아 부숴뜨리는 일을 돌연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우리 본문에 근거를 가지지 못한다. 우리 본문(41-43)이 강조하는 점은, 그 멸망의 완필을 역설(力說)하는 것 뿐이고 그 돌연성을 관설함이 아니다.
네째, 세대주의에서는 돌로 말미암은 멸망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본다. 알리스(O.T.Alis)는 말하기를, 세대주의가 일어나기 전까지 이 해석(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는다는 해석)이 언제나 채잡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해석은 유스티노, 터틀리안, 이레네오, 칼빈, 카일, 루플드, 알리스, 영(Justine Martyr, Tertullian, Irenaus, Calvin, Keil, Leupold, Alis, Young)등이 찬동한다. 이 아래 44-45 절에 대한 해석이 우리의 결론을 더욱 정당화시킨다.
위의 비판에 의하면, 돌이 신상을 부숴뜨리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은 복음 운동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견해는, 그 사건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전연 관계 없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돌이 신상을 신상을 부숴뜨린 후에 커져서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2:35). 그것이 온 세계에 가득함은 천국의 학자 완성을 말함인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야 이루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주의 학자 알델스(G.Ch. Aalders)의 해석도 참고할 만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우리는 이 부분에 종말관적(終末貫籍)인 요소가 있다고 본다. 우리 본문에 있는 영원한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왕국도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의 나라이다. 그것이 천년 왕국이 아닌 것은, 그것이 '영원'하다는 말로 증명된다. 그것은 세상 끝날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립될 나라이다" 라고 하였다(Commentaar op het Oude Testament, Daniel, 1962, p. 73).
단 2:44,45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 여기서는 영원히 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44 절 상반에는 이 나라의 세워질 시기(時期)가 예언되었으니 곧, "열왕(列王)의 때에"이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것이다. 이 문구에 대한 해석은 갈린다.
(1) 벌써 앞(pp.370-372)의 세대주의적 해석에서 다소 고찰한바 있다. 세대주의 학자 게이블라인(Gabelein)과 기타 몇 사람들은, 이 문구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열 왕(十王)의 연맹 시기에 대한 관설이라고 하였다.
(2) 최근에 다니엘서의 이 문구에 대하여, 자유주의 학파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곧, 다니엘서에 의하면, 천국(메시야 왕국)이 그 전 네 나라에 뒤이어 나올 것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곧, 네 나라의 통치가 종결되기 전에는 메시야의 나라(천국)는 임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네째 나라는 반드시 로마가 아니고 헬라라고 주장한다.
왜냐 하면, 메시야의 나라(예수의 初臨으로 말미암은 복음 운동)는, 로마에 계승된 것이 아니고, 헬라에 계승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올레이(H.H. Rowley)는, 그의 저서 "메대 사람 다리오와 4대 제국"이란 책자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장은, 44 절의 확실한 의미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44-45)서 분명히 메시야의 나라는 4 대 제국의 열왕(列王)의 시대 중에 건설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는 기간(期間) 곧, 그 나라들이 멸망하기 전에 메시야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나라가 4대 제국이 멸망한 뒤에 계승된다고 하는 로울레이(H.H. Rowley)의 주장은 그릇된 해석이 아닐 수없다.
(3)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이 네 나라의 때에(그 시대 중에) 메시야의 나라가 건설되리라는 말씀일까? 그것은, 네째 나라 로마("재생 로마"가 아니고 역사적 로마) 시대에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룰 천국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귀절(44 절)에서 예언된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의 나라이며, 이 나라는, 지금으로부터 1900 여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가이사(Gaesar) 통치의 시대에 우선 영적(靈的)으로 건설 되었다고 믿는다. 이 메시야 왕국은 참된 교회로 성장해 오고 있으며, 세계에 널리 퍼지고 있다(천국의 최후적 완성은, 물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야 된다). 이와 같은 견해를 강력히 지지해 주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곧,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가르치신 점이다. 복음서 중에 기록된대로 우리 주님의 교훈은 천국에 중점을 두셨다. 예수님은, 눅4:43에서 그의 사명의 주요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시는데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강조(强調)는 주님의 설교 가운데도 많이 나타나 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10)라고 하셨다. 주님이 가르치신 많은 비유도 "천국은 마치 같으니"란 문구로 시작하셨다(마 13:44,45,47, 20:1,22:2, 25:1). 그러면 하늘 나라의 임함은, 예수님의 초림과 그의 사역과 관련된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여기 44-45 절에 예언된 주님의 나라는, 그 예언 당시에는 없었고 미래에 건설될 나라로 지적되었는데,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임하였다고 한다.
이 점에 관해서 해답을 요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니엘서 2 장 가운데 있는 "네째 나라"인 로마 제국의 기간 중에 천국을 세우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어찌하여 메시야의 나라가 "열왕(列王)의 때"에 세워진다고 말했느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문구("열왕의 때"란 문구)를 4 대 제국(바벧론, 메대 바사, 헬라, 로마)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4 대 제국의 모든 시대에 걸쳐 건립될 것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인가? 실로 천국은 바로 4 대 제국 중 마지막 나라인 로마 시대에 걸쳐서 건립된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난제가 아니다.
벌써 위에 관설된 4 대 제국은, 다니엘의 예언에 있어서 별다른 네 개의 나라들을 의미하기보다는, 차라리 그 넷을 하나님의 세상 나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알리스(O.T.Allis)의 말을 빌리면, 메대 바사는 바벧론을 정복하여 자기 영토로 합방하였고, 그 뒤에 헬라가 메대 바사에 대하여 그리하였고, 로마는 헬라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결과적으로 로마는 결국 위에 세 나라도 통합한 단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돌이 신상(神像)을 부숴뜨리는 일이 로마 시대에 되었지만, 네 나라의 시대에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Harvie Conn).
(4) 알렉스(G. Ch. Aalders)는, 44 절의 "열왕의 때"란 말을 다음과 같이 본다. 곧, "우리는 그 신상의 발에서, 로마의 멸망과 세상 끝날과의 사이에 개재(介在)한 세계 역사(歷史)의 전시대(全時代)를 본다"라고 하였다(Commentaar op het Oude Testament, Daniel, 1962, p. 73). 알델스(G. Ch. Aalders)의 해석은, "열왕"(列王)이 세계 역사(로마 멸망 후 세상 끝날까지 있을 역사)를 대표한 것으로 보고, 돌의 부숴뜨리는 사건은 세계 역사의 끝에 있을 일로도 본 셈이다. 우리는 위의 세째, 혹은 네째의 해석을 채택할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니". 이것은, 천국의 기우너(起源)에 대하여 말한다. 이 나라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다. 다니엘은, 여기서 다시 바벧론의 신(神)들보다 높으신 대주재(大主宰) 하나님의 성호를 사용한다.
이 나라에 관한 신적 기원(神的起源)에 대한 강조(强調)는, 대조적(對照的)인 표현들로 나타났다. 4 대 제국은 신상(神像)으로 상징되었는데, 그것은 인공적(人工的)인 인체의 모양이었다. 곧, 그 형상은 수공을 통해서 금속 물질로 정밀하게 주조(鑄造)되었다. 이것은, 이 세상 나라가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산물임을 비유한다. 그 뿐 아니라, 그 신상은 동함이 없고 생명이 없어서 천국과 반대되는 것이다. 천국은, 참 생명이 있어서 동적(動的)이고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운동인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란 말이(45 절)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준다.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이 말씀은, 천국의 기간을 보여주나니, 그것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나라들은 없어질 때가 있으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토록 계속한다. 세대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이 부분 말씀이 천년 왕국 시대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본문 말씀에는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없다. 우리 본문의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또는 "영원히 설 것이라"란 말씀은, 그 왕국의 기간이 천년이란 제한된 기간과 반대된다. 특별히 이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란 말씀이, 역시 그 나라의 영원성을 보여준다.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 이것은 천국의 권능을 보여준다. 그 나라에는 이렇게 파괴적 능력이 있음을, 이 문구가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승리하고 인간들의 나라는 장차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이 여기 묘사되어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말하기를, 하늘 나라의 이와같은 파괴 운동을, 어떻게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사역에 대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초림 사역은 인류를 회개시키는 운동으로서 점차적으로 되어가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돌연히 파괴시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의 능력에 대하여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보스(Greerhardus Vos)는, "왕국과 교회"(The Kingdom and the Church)란 그의 저서(작지만 훌륭한 책)에서 예수님의 전하신 왕국의 능력을 잘 지적하였다. 고전 15:25에 말하기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라고 하였는데, 여기 왕노릇을 하신다는 것은,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에 의하여 모든 원수를 정복하시는 과정(過程)을 말함이다. 예수님의 사역(使役)은, 가장 확실하고 능력 있는 정복 사역이었다. 그는 마귀를 정복하셨다(마 12:28). 그의 모든 이적(異蹟)들이 역시 능력의 표현이다. 복음서에 기록된대로, 그의 이적들은 천국이 임한 증표였다. 그것들은, 바로 장차 천지를 변혁(變革)시킬 권능이 현세에 벌써 움직이는 증표들이다. 그는, 그의 이적들이 바로 메시야 왕국의 증표라고 역설(力說)하셨다(마 11:5; 눅 4:18-19).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초림(初臨)은, 천국 능력의 완전한 표현이다. 우리 본문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역시 그 "뜨인 돌"이 자라서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는 말씀과도 부합한다. 그리스도께서 전파 하신 복음은 과연 온 세계에 충만할수 있다. 빈약한 12 제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지만 결국 온 세계가 진동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본문(45 절)이 천국 운동의 한 방면(그리스도의 복음 운동)만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다니엘은, 여기서 느부갓네살에게 확신을 재촉하는 의미에서 그 해석의 진실성을 지적한다. 그는 느부갓네살의 잊어버린 꿈을 알려주는 정도로 멎어지지 않고, 그 꿈이 가르친 진리를 인상 깊이 고조한다. 다니엘의 전한 이 말씀을 듣는 자는, 그것을 명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Harvie Conn).
결론적으로 말하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의 예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히 지적한다. 곧, 이 세상 나라들은 일어났다가 멸망하곤한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이같은 것으로 영구히 순환할 것이 아니고, 새로운 능력이 이 세상에 찾아오는 한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능력은, 사람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찾아와서 땅 위의 구질서(舊秩序)를 파괴시키고 영원히 승리하나니,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천국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능력은, 점점 자라나서 온 세계에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 충만시키리라는 것이다(Harvie Conn). 우리 본문이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을 예언하지만, 그의 재림 사건도 포함하여 말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멀리 산을 바라볼 때에 한 개의 산으로 보이지만, 그 산에 올라가 보면 그 뒤에 또 다른 봉우리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단 2:46
이에 느부갓네살왕이 엎드려 다닝레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해몽하는 사실을 알고 놀래어 그를 신(神)과 같이 알고 경배하였다.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한 것이 그와 같은 행봉이다. 특별히 "향품"은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임금은 이렇게도 쉽게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이는 과오(過誤)에 빠졌다.
단 2: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 여기 이른바 "대답하여"란 말은 돌연한 것 같다. 이 말이 나올 만한 문맥을 앞절에서 찾아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곧, 느부갓네살왕이 다니엘을 신(神)과 같이 알고 경배하였으므로, 즉시 다니엘은, 해몽한 자가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밝혀 준 듯하다. 이 말을 받아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칭송한 듯하다.
단 2:48,49
이 귀절들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고위층 관리(高位層官吏)로 등용된 사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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