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일 화요일 아침입니다
글 옮긴 이 <건강 바이블 연구소> 원장 박 한 서
제목 : 과거나 현제나 아픈 역사를 가진 <이태원>동
이 자료는 역사 연구가 <강복원>교장님이
보내온 자료를 바탕으로 <이태원>의
과거와 현제를 조명 해봅니다.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씁니다.
<이태원>의 이름은 한자(漢字)만 3번 변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성씨인 오얏 나무 리를 사용하였거나
부근에 오얏 나무가 많아서 오얏 나무 리를 사용하였던지?
아무튼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이라 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이라 불렀고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했습니다.
원래 <이태원>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습니다.
서쪽의 <홍제원>. 동쪽의 <보제원>.
남쪽의 <이태원>과 <인덕원>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첫 번째 원(院)이었습니다.
<이태원>은 지금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태원>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아프고 슬픈 이 땅의 역사가 떠오릅니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때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와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부대는 <남대문>으로 ,
<고니시 유키나카> (소서행장)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합니다.
그 결과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 고적 1.2호로 지정했습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습니다.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을 합니다.
주둔 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여자들을 겁탈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종사>(雲鐘寺)의
비구니들이 주 대상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일본에서부터 라이벌 이었는데, 오히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종사>(雲鐘寺)까지
불살라 버립니다.<가등청정> 이놈은 <불국사>도
불을 질러 버린 놈입니다.
문제는 이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됩니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임진왜란>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선조>는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곳이 이태원입니다. (출처 : 임하필기(林下筆記). 동국여지비고).
여기에 <인조>까지 가세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옵니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그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됩니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습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겨났습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합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 주택단지도 조성 됐습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합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남대문>과 <용산> 일대에
<일본>군의 전초기지가 세워지면서 <이태원> 지역에도
<일본>군이 주둔하게 된다.
또 광복 후에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기존
<일본>제국 병영의 일부를 이용하면서 <이태원> 부근에 자리를 잡았고,
이는 <한국>전쟁 을 거치며 현재의 <미군>부대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된 1957년부터 <이태원>에는
기지촌과 그를 둘러싼 문화가 급속하게 생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태원>은 ‘텍사스촌’이라 불리며 자연스레
<미국> 문화 소비의 공간으로 변화해 갔다. <이태원>의 메인 거리인
<이태원로>를 중심으로 <미군> 군인들을 고객으로 한 큰 옷, 큰 신발
시장이 형성됐고,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즐겨 듣던 재즈를
감상할 수 있는 재즈 바도 역시 <한국>에 첫선을 보였다.
또한 1957년 <유엔>클럽’을 시작으로
<이태원>에 클럽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미군을 고객으로 한 유흥업소가 <이태원>에서
하나 둘씩 영업을 시작하면서 <이태원>은 <미국>
현지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로 알려지게 됐다.
미군을 대상으로 한 매춘 여성들 또한 <이태원>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을 대상으로 했던 매춘업소는 현재 <녹사평>역 일대
<해방촌>에서부터 <이태원>로에 이르는 넓은 권역에서 성행했다.
허름한 주점들이 늘어선 <후커힐>에 아직도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태원> 지구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근래에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밀턴> 호텔과 <이태원> 시장을 따라
<이태원>에 <미국>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자원이 부족하고 값싼 인력이 풍부했던
<한국>에서 당시 가공무역에 주력했던 데서 기인한다.
정부에서 보세제품수출정책을 추진하면서 <이태원> 일대에
미군을 고객으로 하는 양복점, 유기점, 신발가게, 구둣방,
보세점이 생겨났고, 뒷골목에는 수출용 가내 공장들이
들어서게 됐다.
이렇게 형성된 <이태원>상가 일대는 86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등의 국제행사를 통해 외국인들에게
알려지면서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태원>에 자리 잡았던 보세 상권은 1990년대 후반 불황으로
규모가 축소됐지만 대신 소수자 집단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가장 큰 변화로는 <퀴어> 문화가
<이태원>에 자리를 잡은 것을 꼽을 수 있다.
1996년 <이태원> 최초로 <게이바> ‘터널’이 문을 연 이후
서구식의 <게이바>들이 <이태원>에 점차 들어서게 됐다.
예로부터 미군을 중심으로 서구식 문화가 자리를 잡아
다른 지역에 비해 문화 장벽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1976년 <이슬람> 성원의 건립과 상대적으로 싼 지가를 기반으로
<무슬림>들도 정착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이태원>은 경직된
<한국>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벗어날 수 있는 해방 구 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됐다.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 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 단 길과 더불어
<한국>속의 외국으로 변화하는 <이태원>은 웬지 가까워 지지 않는
이방인의 느낌이 드는 도심지 <이태원> 그 바탕에는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1988년 <88>올림픽이 열리면서 외국에 알려지기 시작을 했고
1997년 <서울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이 된 곳입니다.
만성절(고대 <켈트> 민족의 풍습에서 유래) 전날인 10월 31일
<할로윈> (Halloween) 축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떠밀려 죽는 바람에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이태원>참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태원>의 슬픈 과거의 역사와 현제를 소게 하면서
<이태원>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지 먼 훗날 역사는
기록 되겠지요.
<이태원> 참사 자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빕니다.
<오늘의 묵상>
<히브리서>9장 27절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요한복음> 11장 25절~26절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