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원초적인 자유, 그 조르바 식 질문을 읽어내는 순간들
노 창 수(시인 문학평론가)
그는 아침 눈을 뜨면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 놀란다. 조르바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며 이 신비가 무엇입니까” 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죠. 이 세상에 그걸 오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죽임과 끔찍한 짓들이 필요하다니 말이오. 내가 저지른 못된 짓거리와 수많은 살인을 이야기한다면 소름이 끼칠 거요. 그 결과가 뭔지 알아요? ‘자유’였단 말이오. 하느님이 벼락을 쳐 죽이기는커녕 우리에게 ‘자유’를 줬단 말이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1
시인이라면 사물 앞에 무단한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왜 그게 존재하고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적 동력을 얻고 있으니 말이다. 요약하면 그게 바로 시가 되는 이유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크레타 출신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만난 야생마 같은 ‘조르바’는 일자 무식자이고,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원시적인 사내이지만 순간의 예지를 보는 놀라운 눈, 그리고 궁금증이 많은 자로 묘사된다. 작가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온갖 생명체들을 일깨워주는 기적이란 곧 ‘자유’의 몸짓임을 적시한다. 작가와 닮은 조르바의 요동치는 일대기를 번뜩이는 역설로 쓴 책, 그걸 열면 원초적 자유의 몸부림이 페이지마다 떨며 운다. 조르바는 화자가 여행 중에 우연히 조우한 친구로 예술인이자 철학인 아니, 못 말리는 자유인이다. 책은 〈존재=생명=자유〉라는 등식을 부여할만한 전개로 호기를 맞듯 경이로운 그의 행위를 실증적으로 추구해 간다. 그래, 읽는 내내 카잔차키스가 그리는 조르바 식 표상은 독자의 명상 기류조차 압류할 듯 작정한다. 실재한 인물이니 더욱 그런 압박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초인적인 완력으로 쓴 이 소설은 바로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우는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이연(所以然)으로 완결된다. 그는 여행 중 방랑적 자유와 통찰적 직관이 뛰어난 조르바를 만난다. ‘두목’이란 지위를 누린다. 그리고 둘은 운명적으로 의기투합하여 친구가 되고 동행자로 나선다.
어린이가 쏟아내는 질문을 옮기면 시가 되는 것처럼, 농경시대 우리 옛 어머니들이 쓰던 토속어나 토박이말을 거리낌 없는 그대로 모사(模寫)하면 좋은 시가 빚어지는 게 많다. 이를 경험해 본 시인이라면 어렵지 않게 그런 시를 떠올릴 수 있다. 예컨대 정윤천의 「어디숨었냐 사십마넌」, 이지엽의 「해남에서 온 편지」, 「널배」, 상희구의 「이말무지로」, 이대흠의 「어머니의 꽃밭」, 「아름다운 위반」, 그리고 이정록의 「의자」, 「어머니 학교」 등과 같은 연작 시리즈에서 그런 생생하고 질펀한 자유의 말을 맛본다. 사물을 보는 시발점에서 미학의 눈이란 바로 원초적인 자유 가운데서 찾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토박이의 정서를 핍진하게 드러낸 시도 그런 예이다.
카잔차키스가 말한 ‘영원의 자유’는 조르바를 통하여 크레타의 토속색으로 구체화되고 불멸의 가치로 재 진술된다. 작가나 시인은 ‘자유’라는 피를 머금고 드디어 꽃을 피우는 사람이다. 역으로 자유란 지식인과 문학인,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임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예컨대 신군부가 자행한 바 5.18 때 시민에 발포한 명령, 경찰력에 희생된 마산의 4.19, 그리고 제주의 4·3항쟁 등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다가 무차별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카잔차키스 식으로, 그리고 역설적 언어로 말하자면 어쩌면 ‘자유’가 시민을 죽인 거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겨울 공화국’ 치하에 유신헌법에 갇혀 고문 받고 지냈던 지식인들, 정권 앞 저항주의자에 부역된 강제 근로, 성폭행을 자행한 정치가와 예술인, 그리고 장애인을 인신매매 현장으로 모는 복지기관 등 자유를 겁탈한 갑질 계층이 지금 법망에서도 걸러내지 못하고 채를 맴돈다. 21세기에 들어서 악덕 노예 구매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극성인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조르바가 외치는 ‘자유’란 현대에 올수록 절박해지는 이유가 거기 있다. 오늘날의 시는 이러한 죽은 ‘자유’가 살아나 영혼으로 부활하여 몰라보게 커진 건 사실이다. 잃어버린 자유 정신으로 빚어내는 서정을 우린 아무 눈물 없이 읽어 밤을 샌다. 원초적 자유, 이제 그건 책장 안에 갇혀 있다. 다만 눈 뜨고 읽는 자의 숨소리에만 가냘프게 실릴 뿐.
2
평문 앞에 놓은 도입부 치고는 좀 길었다. 하지만 인류사, 특히 문학사에서 ‘자유’는 소재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만큼 화두이고 종언이다. 종종 잃어버릴 뻔한 ‘자유’를 찾는 숨은 독법과 시선으로 오늘의 시조를 몇 보기로 한다. 어쩜! 처음부터 이 글에다 카잔차키스를 모셔 오는 일 말고는 더할 게 없었음도 미리 고백해야 겠다.
(1)
허리를 펴고 서서 걸레질을 하다가
마루든 방바닥이든 무릎 꿇고 닦던 시절
그 공손, 그 겸손의 행방 걸레에게 묻는다.
걸레는 걸레라서 뒤집어도 걸레이고
사람은 사람이라서 뒤집으면 괴물이라
족해도 족하겠냐고 걸레 그가 되묻는다.
바닥이 바닥을 딛어야 비로소 직립인데
제 분수를 금세 잊고 바닥부터 등진다는 말
손바닥, 발바닥을 놓고 그 내면을 읽는다.
-김진길 「바닥에 대하여」 전문
소중한 자유란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된다.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가 그걸 알게 해주어 거듭해 읽은 적도 있다. 이 시조는 무릎을 꿇고 닦는 바닥에 대한 화자의 겸손함에서 오는 내면의 자유를 노래한다. 대저들 바닥을 닦는 걸레란 지저분하다며 시선을 피하곤 한다. 해서 그 대상을 찬가형(讚歌型)으로 부르는 건 쉽지 않다. 찬가형이란 지난 호에도 언급했지만 꽃, 나무, 바다, 하늘, 날씨 등 좋은 자연 환경에만 기생하는 노래이다. 그러나 걸레, 똥, 구더기, 흙 등에 엉긴 찬가는 찾기 어렵지 않은가. 걸레의 찬가와 더불어 바닥에 대한 자유의 궁극을, [묻는다-되묻는다-내면을 읽는다]로 드러낸 바와 같이 종장을 점층 구조화나 비계화(飛階化)해 보이기도 한다. 결국 독자에게 걸레의 자유를 지지해 주는 이 시조는 출발을 밑바닥의 내면에 둔다는 데에 순수 겸양을 내비친다. 밑바닥 인생이란 더이상은 나빠지지 못할 상황일 때 인용하는 말이다. 일견 “걸레는 걸레라서 뒤집어도 걸레이고 사람은 사람이라서 뒤집으면 괴물”이라는 풍자가 시적 묘미를 살리기도 한다. 이 전위법은 역지개연(易地皆然)의 자유를 내재한 풍자적 논리라 할 수 있겠다. 걸레질은 바닥부터 닦기에 공손과 겸손의 빙의(憑依)일 것이다. 겸손이란 “바닥이 바닥을 딛”는 일, 그 딛는 건 “비로소 직립”을 시도하는 것이니, 참 자유의 가치를 깨닫는 일이다. 너무 위로 향한 자유만이 득세하고 있는 요즘, 어찌된 일인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닦는 일이란 거의 없다. 반쯤 허리 굽혀 청소기를 사용하거나 아예 로봇청소기에 맡기기도 한다. 바닥에 대한 겸손의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는 말인가. 바닥을 등지고 문명화로만 치닫기에 사람들이 바닥의 원초적 자유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현대인은 바닥을 가리거나 포장하는 일에 몰두한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우레탄, 그리고 실내엔 장판, 모노륨, 비닐, 타일, 데코, 깔판 등은 물론이고, 등산로까지 시멘트로 포장하거나 모시삼석으로 깔아 흙바닥을 능멸한다. 더불어 포장 자재(資材)에 대한 종(種)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게 개발됐다. 밑바닥 인생의 자유가 갈급함을 시멘트나 타일바닥에서 읊조리니 뭘 알 것인가, 발바닥이 닳아지도록 일한다는 말은 현대사회에서 가진 자들 앞에서 원초적 자유를 구기는 비굴한 몸짓인지 모른다 아마도.
3
주객 위치를 바꾸는 예를 하나 든다. 이에는 두 화가가 보이는 세계에 대해, 누가 더 충실하게 그렸는지 겨루는 장면이 나온다. 역시 이야기꾼 카잔차키스는 그럴듯하고도 아이러니하게 소개한다. A 화가가 휘장 앞에서 말한다. ‘내가 최고라는 걸 증명하지.’ 그러자 B 화가가 말한다. ‘그래 휘장을 열어보게, 자네 솜씨 보고 싶군.’ 그러자 A 화가가 대답한다. ‘휘장이 곧 그림이라네.’ 이 놀라운 반전, 휘장을 주인으로의 인식함은 객의 위치를 순간 나에게 가져오는 일이다. 역설이 그림으로 정의되는 이 화법의 휘장론은 다음 시조에서도 비슷하게 기능한다고 본다. 갑질(주인: 행세)과 을 노릇(객: 아부)를 바꾸어 횟감 앞에 의기양양해 하는 가역적인 풍자가 그렇다. 그래, “어차피 비릿한 생” 그 냄새를 지우기 위한 “한잔 술 같은 세상”이라는 여유 작작 부리는 일도 잊질 않는다. 요즘 우리 사회처럼 갑이 을의 입장을 배려하는 건 참다운 평등이 아니다. 그런다고 갑과 을의, 곧 주종이 바뀌게 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며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하면, 갑과 을이 소통하는 그 자유로움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듯싶은데 그게 수월치가 않다.
(2)
헐벗은 살 내음 비릿하게 남아있는
꽃무늬 접시 위로 드러누운 누드 한 폭
살생의
흔적들일랑
애초에 먹잇감이다
고개 숙이면 나도 누드로 누울 수 있는 세상
수없이 느끼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사는 일
그것이 먼저다
흔들리지 말자
갑을이 있는 세상 한번쯤은 갑이 되어야지
어차피 비릿한 생 뭐. 한잔 술 같은 세상이니
오늘은
호화로운 상차림
그 앞에 내가 갑이다
-오영민 「횟집에서」 전문
숙련된 세이프가 잘든 칼로 저며 낸 회가 산뜻하게 오른다. 주 메뉴를 비롯한 다양한 곁들이음식(스키다시)이 올라오는데, 오늘은 나, 즉 갑을 위해 올라온다. 그러니 신이 날 수밖에. 동안 화자는 갑의 입장이 아닌 을의 경우로만 지냈다. 한데 오늘 상에는 온갖 “호화로운” 차림으로 그득하다. 비로소 갑의 자리이니까. 우선 생선회가 “내가” 먹기 좋도록 놓여진다. 그래 전처럼 “고개”를 “숙인”다면 “나도” 회처럼 “누드로 누울 수도 있는” 을의 경우가 된다. 현재 ‘갑’인 내가 회 앞에서 ‘을’인 회가 된다면 하고 잠깐 스치듯 생각을 해본다. 나는 수모를 견디듯 세상을 비굴하게 “살아온” 바를 회고해 보기도 한다. 화자는 사실 회처럼 남의 칼질에 순종해 왔다. 사람들이 나를 잘 먹기만을 감내하듯 살아온 것이다. 내게서 비판적인 가시나 강한 주장 같은 뼈를 발라내고 부드러운 살로 과장되게 공중부양하듯 남의 눈치와 입맛을 살피던 그 ‘을’ 말이다, 자유로운 것을 비껴가는 회칼에 의해 저며지는 아픔과 고문을 견디는 ‘을’은 도처에 많다. 좀더 나아질까 하고 조마조마만 한 노예된 입장이었으니까. 그게 이른바 세상을 빌려 “사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회 접시 앞에선 절대 “흔들리지 말자” 다짐한다. 그래 이 잘 차려진 횟상 앞에서 ‘갑’의 입장으로 탈바꿈해보기로 한다. 언젠가부터 마음먹은 일 “한번쯤은 ‘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바라보니, “꽃무늬 접시 위로 드러누운” 회는 한 폭의 누드화와 같다. 화려하기도 하려니와 먹음직스럽기까지 한. 그렇다. 주변 “살생의 흔적들”은 “애초”부터 “먹잇감”이었다. 회를 먹으며, 자신감인지 갑질인지도 모르게 웬걸 주방에다 소리까지 다 친다. ‘한 접시 더, 소주 한 병도 추가!’ 이 당당한 기분 지속되었으면 싶다. 소멸되거나 억압 받은 ‘자유’가 다 부유한다. 그러나 이 시조는 탈취당한 생선, 팔딱팔딱 뛰어오르다 사라진 ‘자유’를 잊지 말라는 데 복선을 깔았다. 그걸 “살생의 흔적들일랑 애초에 먹잇감”이란 첫째 수를 그냥 공식 풀 듯 지나온 나나 독자에게 경고하기도 한다.
(3)
섬진강에 봄이 올 땐 왈츠 선율로 온다
악보를 빠져나와 나비가 된 음표들
평사리 들판 가르며
악양으로 가고 있다
초록빛 새소리를 한 두릅 꿰어 메고
꽃눈 흠뻑 맞으며 강둑길 거닐다가
여울이 뽑아 올리는
노래에 홀려 있다
경계를 다 지우고 바다로 가는 섬진강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을 벌려 왔던
가슴팍 투명한 시가
물길 차고 오른다
-김강호 「섬진강의 봄」 전문
섬진강은 남도 시인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이다. 이 시조는 섬진강에 약동하는 봄을 눈에 보이듯 시각화한다. “경계를 다 지우고 바다로” 가는 강물에서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을 벌려 왔던 가슴팍 투명한 시”를 읽어내는 기미(機微)란 탐미기법에 고단수가 아니고선 축약해내긴 어려울 거다. 감각적 봄은 이처럼 도원경(桃源境), 아니 시원경(詩源境)이나 진배없다. 섬진강 봄을 맞는 화자의 나들이 기분은 “왈츠 선율”처럼 날아갈 듯 가볍다. 춤곡은 “악보를 빠져나와 나비가 된 음표들”로 재시각화 된다. 둘째 수에서 “초록빛 새소리를 한 두릅 꿰어 메고 꽃눈을 맞으며 강둑을 거니”는데, 보아하니 강은 이미 “여울”을 “뽑아 올리는 노래”에 마냥 취해 있다. 자식이 첫 월급을 타 사온 라디오를 오지게 들여다보며 듣고 또 듣던 옛 아버지의 벙그러진 얼굴처럼 시각과 청각의 효과를 동시상영 같은 표정에 얹었다. 셋째 수에서는 “경계를 다 지우고” 가는 물의 혼융을 싣는다. 그 동안 가졌던 획책을 풀고 비로소 자신을 찾아가는 투명함으로 새봄을 맞는다. 그러니 화자로선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하기를 “벌려” 온 건 당연한 일이겠다. 그게 극서정에 실리는바, 메타시조 한 기법으로도 보인다. 강변에서 맞는 바람과 물길, 우리 앞에 한 폭 수채화나 시화(詩畵)로 펼쳐지는 이 축가를 아무 대가 없이 이 시조로 받는다.
시조의 구성이 [섬진강](1)[왈츠의 선율](나비가된 음표들이 가르는 평사리 들판)(2)[여울의 노래](초록빛 새소리를 꿰어 멘 한 두릅)(3)[투명한 시](시심을 번뜩이며 벌려온 비상)으로 연결되어 이미지의 연쇄 고리가 짝지어 보인다. 하니, [ ] 안의 상징 장면 상과 ( ) 안의 구체 장면 상, 그러니까 장면의 복합구성이 여타의 ‘강’과 ‘봄’에 관한 표현과는 차별화될 수 있겠다.
흔히 알기로 ‘섬진강’하면 김용택을 꼽는다. 송수권은 남도 가락을 섬진강변 창작실 ‘어초장(魚礁莊)’에 꾸리고 강물의 시를 오래 써왔는데, 그걸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김강호의 「섬진강의 봄」은 시조로 노래하는 최초의 극서정이 될 듯도 싶은 데 건너짚다 틀려 야단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을 벌려 왔던 가슴팍 투명한 시”를 섬진강에서 건져 올린 건 분명 서정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극적 시학일 게다.
(4)
당신이 잠들 때쯤
조용히 책이 운다
페이지 훑어보듯
이불 스치는 뒤척임
어둠을
여백으로 하는
당신이라는
얇은 책
허공에 성호 긋듯
당신을 밑줄 치며
모퉁이만 접는다
다시 보지 않으리라
책보다
먼저 끝을 볼 것이다
한참이나
울 것이다
-김남규 「한 권의 책」 전문
만물 백화점식 사물 인터넷과 AI, 요즘 통합적인 SNS 시대에도 불구하고 글 쓰는 사람들의 화두는 여전히 책이다. 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인은 늘 자기 책을 구안하고 있다는 진행형 때문이다. 화자가 말한 바, “당신이 잠들 때쯤 조용히 책이 운다”는 것을 도입한 첫구가 어쩌면 책의 울음이 곧 나의 울음을 발발하는 걸 동기화하는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잠들 때 스르르 놓는 순간부터 책은 혼자 자신을 읽게 된다. 그때부터 고독한 읽기는 홀로 어둠과 더불어 책이 감당하는 것이다. 그걸 “책이 운다”는 표현으로 명료화한 게 실감 있다. “어둠이라는 여백”에 갇혀 책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얇아지는 페이드 인(F·I)의 씬으로 천천 숨는다. 한데, 둘째 수에는 화자의 이 같은 미련과 여백이 더 짙게 채색된다. 중요한 책의 내용에 대해 “허공에 성호”를 “긋듯 밑줄”을 치지만 사실 그러고는 잊어버리는 수는 더 많다. 참고가 될 해당 페이지를 후일 찾아보기 위한 수단이지만, 우리는 책의 “모퉁이만 접”어 두는 것으로 끝낸다. 그러기까지 하고도 어쩌면 “다시 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게 세월의 두께로 덮어지는 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내 경우,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언젠가 참고하려 메모한 종이가 퇴색되고 좀에 쏠린 채로 발견된 적도 있다. 잠시 필요해 그곳을 찾으려 할 땐 “책보다 먼저” 접어놓았던 “끝을 볼 것”은 당연하다. 그러는 동안 책은 “한참이나” 또 “울 것”이다. 책은 오롯이 자기를 열어볼 주인을 기다려 왔지만 오늘 그게 속절없는 짓임을 깨닫고 만다. 하니, 책과 더불어 우울하다. 홀로된 책은 더 우울할 것이다. 그 추측은 화자를 떠나 글 쓰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바인데, 시인은 이를 적시타(適時打)의 기지적(機智的) 퍼팅으로 채를 날린다.
그 동안 김남규는 이처럼 때로 단호하게, 때로 미세하게 심리적 작품을 써 왔다. 가령 「집의 역사」에서 “아침은 언제나 역사적 사건이다/ 저녁은 이따금 사소한 일상이다/ 그 사이/ 누울 곳을 생각한다/ 월세처럼 /오는 밤// 같이 울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혼자 울 수 있는 시간을 찾는다/ 그 사이/ 웃을 곳을 생각한다/ 이자처럼/ 오는 비” 이렇듯 ‘월세’와 ‘이자’라는 체험 후의 징험(徵驗)을 명징하게 길어 올린 것도 있다. 전자의 시조와 함께 심리적 대비를 통과하는 대구의 묘를 보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5)
장신구는 번뇌라서
다 버리고
왔는데
슬쩍 앉은 물잠자리 떨잠이 되어주네
천둥이
치지 않는 한
모르는 척 해야지
-김술곤 「백련 -사미니」 전문
핸리 베르그송(Henri Bergson,1859~1941)에 의하면 ‘직관과 비약이야말로 예술창작을 하는 힘’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여, 그는 창작을 ‘예술적 직관’이라는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창조적 직관이란 단순한 지식 창조와는 다른 창조를 의미한다. 직관과 비약은 상상적 직관과 상징적 비약인데 미적 체험을 기반으로 한 문학작품에서 주된 기동 역할을 한다. 논자에 따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겠으나 이 상상적 직관과 상징적 비약을 새로이 가다듬게 만드는 게 위의 「백련」이라고 본다. “천둥이 치지 않는 한 모른 척해야” 한다는 데에 백련의 방점이 있다. “슬쩍 앉은 물잠자리”가 “떨잠이 되어주”도록 배려하는 백련 잎이 특별히 널찍하게도 보인다. 연잎에 앉은 물잠자리가 잠깐 누리는 “떨잠”, 이게 이 시조에서 읽어야 할 미학적 도근점(圖根點)이라면 어떨까 싶다. 이 시조는 삼단법에 의한 [서두-전개-결말]의 구성으로 짧은 단수이지만 탄탄한 스토리가 장점이다. 번뇌의 표상인 장신구도 버리고 천둥이 치더라도 의연해 하는 백련의 좌정에 실려온 우주의 고요가 다 보일 듯 안겨온다.
4
직관과 자유에 대해 다시 조르바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조르바에게 두목(‘나’)이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냐고 물었다. 그는 곧 “질그릇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 버렸어요.”라고 말한다. 끔찍한 이야기이지만 시를 빚는 데에도 같은 이치를 적용할 수 있다. 시엔 불필요한 수식의 검불을 걷어내고 모름지기 알곡만을 추려내야 한다. 특히 주제성과 율격성을 따지는 시조에선 더욱 그럴 일이다. 심지어 그릇을 빚기 위해 거침돌이 되는 신체의 일부까지도 없애는 조르바의 집중력은 예술을 위한 직관의 황포(?)이거나, 아니면 방임과 같은 자유의 난장일 게 분명하다. 헤르만 햇세의 『지와 사랑』(Narziss und Goldmund, 1930)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킨 이야기가 소개된다. 골드문트는 예술적 직감력을 기르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오지 여행과 자유의 방랑을 마다하지 않는다. 또 있다. 섬머셋트 모음의 『달과 육펜스』(The Moon and Sixpence, 1919)의 주인공 스트리클랜드(고갱 모델)도 그런 인물이다. 증권회사 직원인 그는 그림 그리기 위해 어느 날 사라진다. 예술이 지상에 영혼이란 생명성에 터한 자유를 심는 작업임을 깨닫게 되자, 그는 주저 않고 타히티로 간다. 직관과 통찰에 몰두하기 위해 토인 아타와 동거하면서 대작을 남긴다. 그러나 끝에 그는 심한 문둥병에 걸린 채 집에 불을 지르고 만다. 화염에 싸여 필생의 대작 그림과 함께 죽는다. 이처럼 ‘골드문트’와 ‘스트리클랜드’, 두 예술적 인물의 특별한 생애를 직관, 자유, 방랑과 연결해 볼 수 있다. 결국 원초적 자유가 아니면 직관적 창작력과 상생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두 주인공의 의식편력에서 읽을 수 있겠다..
(6)
첫 만남 낯선 자리
모텔 침대 박살냈다는
금사빠로 목수 박 씨 과속 주행 비결 묻자
아 글쎄
쌍방과실의
음주운전 사고였다나
든 봇짐 싸매다가 말만 찌른 안산 땅에
30만 평 소문만큼
잡풀들만 무성한데
어버버, 혀짤배기 소리
띄어쓰기 오독한,
사는 게 핑계라서
구차스런 핑계라서
절룩 걸음 찾은 고향 어처구니 깎고 있는
저 날랜 다듬질 손끝
녹두전은 익어가고,
-백윤석 「어처구니」 전문
“어처구니”란 맷돌의 손잡이다. 이 ‘어처구니’가 없으면 멧돌을 돌리지 못하니 황당한 일일 게다. 사람들은 미쳐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했을 때 참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다. 이 시조엔 세 가지의 ‘어처구니’의 장면이 나온다. (ㄱ)음주운전, (ㄴ)띄어쓰기 오독, (ㄷ)어처구니 깎기 등이다. 이 같은 어처구니가 파생시키는 진짜 사건이란 (ㄱ′)모텔 침대 박살낸 금사빠 박씨 (ㄴ′)안산 땅 30만 평은 잡풀처럼 소문만 무성 (ㄷ′)절룩 걸음으로 찾은 고향엔 어처구니를 깎고 있는 모습 등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에 대한 어휘를 소재로 나타낸, 이를 테면 ‘언어적 펀’(linguistic fun)의 일종이다. 이러한 표현 효과로는 행위적 펀(actual fun), 몸짓 펀(gesture fun) 등이 있으나 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게 언어적 펀이다. 요즘은 이 기법이 보편화되었지만,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게 은어, 속어 등으로 취급되어 비교양인 취급을 했던 적도 있다. 헌데 지금은 법조문에서까지도 그런 용어가 나오는 시대이다. 아주 저급한 속어, 축약어가 아닌 거라면 시조에서도 이를 활용해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봄도 다양화의 한 방안일 수 있다. 이 시조에서, 첫째 수에 유머, 모텔 침대를 박살 낼 만큼 정력이 센 사나이의 교합, 더구나 그 음주운전에 쌍방과실을 풍자한다. 둘째 수는 장면이 바뀐다. “든 봇짐”을 “싸매다가 말만 찔”러본 “안산 땅”은 소문으로만 매기(買氣)가 높았지 실제 잡풀만 무성한 땅이다. “혀짤배기 소리”로 “띄어쓰기”를 잘못 읽은 바람에 그리 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구차스런 핑계”지만 “절룩 걸음”으로 “고향”을 찾는 게 셋째 수, 멧돌 손잡이인 “어처구니”를 깎으며 “다듬질 손끝”을 기다리는데 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도 “녹두전”은 익어간다니 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생긴다. 결국 녹두전을 부칠 녹두를 갈아야 할 맷돌의 어처구니는 어느 세월에 나올지. ‘어처구니’ 자체가 역설이지만 이 시조는 이중의 역설과 풍자를 내재하여 구성의 액자화를 시도한다.
(7)
오래 떠돈 그리움을 부표로 띄어놓고 정박한 뱃머리를 핥고 있는 바다처럼
내 몸에 박힌 슬픔이 끼익, 소리를 낸다
이승의 눈시울만 적시며 흘러온 듯, 아내가 여닫는 창에 초승달이 얼비친다
한평생 썰물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이교상 「음력 초사흘」 전문
아버지의 ‘자유’ 그 떠도는 생이란 나의 생과 같을 수는 없으나 최소한은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시조는 아버지의 삶과 화자의 삶 사이의 극명한 차이성 또는 유사성을 함께 전언한다. 아버지의 삶이란, “초사흘”과 “초승달”, “아버지”와 “이승”, “눈시울”과 “썰물”로 치환된다. 또 화자의 생이란 “오래 떠돈 그리움”과 “부표”, “정박한 뱃머리”와 “바다”, “몸”과 “박힌 슬픔” 등으로 자유로운 유랑의 삶과 역환(逆換)된다. 아버지와 화자의 간극은 “아내가 여닫는 창”으로 매개적 구실을 하도록 장치해 두고 있다. 음력 초사흘이란 아버지의 기일(忌日)일 수도 있고 특별히 아버지가 화자를 향해 무언의 메시지를 준 날일 수도 있다. 중요한 일은 아버지의 삶과 초사흘은 인연으로 연몌되었음이다. 즉 아버지의 떠도는 삶에 대한 비의(秘意), 또는 가족과 아버지 간의 미혹적(迷惑的) 관계가 스며들어 있는 날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상징적인 날을 시의 모티프로 하는 경우는 더러 있으나 “오래 떠돈 그리움”에 “부표”를 “띄어놓고” 바다엔 “정박한 뱃머리를 핥고 있”는 물결로 곡진한 비유를 시발로 한 시조는 드물 것이다. 나와 아내가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같은 아버지임에도 “바다”와 “창”이라는 대립적 시각차로 구분한다. 즉 바다의 현장과 이를 내다보는 창의 위치는 서로 다른 상징으로 나타난다. 마침내 화자는 “한 평생 썰물”(바다)이던 “아버지를 생각”(창)할 때로 돌아온다. 시조 귀결미가 여기에 있다. 썰물이었던 아버지(바다)에 대해, 방랑으로 회억하는 일(창)은 이제 ‘나’도 ‘아내’의 몫도 아니다. 가족이 함께 살았던 바닷가의 아버지, 이제 그 유랑의 기억은 내부로 떠돈다. 그걸 캐낸 독자가 다시 이 시조를 깊이 들여다보게끔 하는 내독(內讀)의 층을 가지고도 있다.
(8)
칼날도 모르고
여기로 걸어오네
넘어질 듯 아슬아슬
곧장 안겨 오네
삐뚤이 날아서 오는
서산의 범나비와
-이처기 「맨발」 전문
누구든 마지막 생이란 “맨발”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온갖 것을 짊어지거나 신고 이승을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아온 것 이상으로 차례차례 비우는 일이 남았다. 헌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리라. 젊었을 적 이 일 저 일을 맡으며 책임질 일보다 늘그막에 그 짐을 비우고 벗는 게 더 어렵다는 건 나이가 지시해 주는 요점정리이다. 가령 문태준의 「맨발」에서도,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이제 천천히 “맨발이었을 것”을 추측하는 늙어간 시간과도 같다. 세상살이에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나왔음을 “개조개”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는 장면과 호환적인 눈으로 보던 시를 생각해 본다.
위 시조에서는 우리가 죽음의 위험한 “칼날”이 있는 것도 “모르고” 무작정 앞만 보고 걸어오는 “맨발”, 그게 섬뜩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위태롭게 “걸어오”는 사람들 그들의 걸음걸이란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다. 금방 무언가를 잡으려고 “안겨 오”듯 걸어온다. 그러나 그 뒤틀린 보폭 앞에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온다. 사물들조차 “삐뚤이 날”듯 인생은 저승의 세상인 “서산”을 향하여 다가간다. 더구나 외려 “범나비와” 함께 하직을 생각하는 세상에 화자는 놓인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 다 비워낸 “맨발”은 춥고도 두렵다. “서산의 범나비와”라는 종장의 마지막 구가 “~와”로 끝맺는 게 인상 깊게 자리한다. 죽음 가까이로 날아오는 “범나비와” 함께하는 우울한 여운이 시조의 여백미를 두터이 한다. 이 또한 아무나 시도할 수 없는 오랜 창작력이 파급해준 말 부리는 어휘 능력이겠다. 이 시조는 쉽게 쓰였지만 뜻은 깊다. 마지막으로 가는 인생의 출구인 “서산”을 향한 “맨발”과 “칼날”을 대비함으로서 시적 긴장과 삶의 첨예함을 풍자한다. 그러니 단타(單打)로 홈런을 날린 격의 작품이다. 단타 효과는 더 있다. 참고로 그가 최근에 발표한 「임자탕」(《시조정신》 2018. 3호·추동호)을 보면, “기척도 없는데 왜 생각나게 합니까/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다린 당신의 혼입니다” 이런 풍자와 아이디어 묘출로 빚은 작품을 내놓으니 말 다했다.
5
다시, 카잔차키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조르바가 품은 질문과 신비의 요체. 그건 그가 생전에 준비한 대로 묘비 글에서 증명된다. 즉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결국 그는 “자유”라는 말을 그토록 쓰고 싶어서, 모든 걸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죽음의 탈환을 택한다. 하여 잠들기 전 장짓문을 닫듯 생을 닫는다. 그걸 위해 그는 거칠게 싸우고 떠돌며 살아왔다. 이 글 맨 앞에 이정표 삼아 인용한 조르바의 호기심이란 원초적 자유에서 비롯되는 한 심리적 계기판이다. “어린 아이처럼” 사물들에 갖는 놀라움에 터한 원초란 아침 눈을 뜨면 나무와 바다, 길과 새가 맞이하는 약동의 생명성이다. 아니 그가 ‘두목’(조르바는 소설 속의 ‘나’를 그렇게 호칭한다)에게 늘상 자랑하는 팔팔한 삶이다. 그게 우리에게 전달해와 오늘의 시간으로 화한 살아있음에의 자긍심일 수 있다. 그가 묻는 이 생명의 기적과 신비는 바로 “자유”라는 것에 귀착된다. 그는 ‘두목’에게 말한다.
“두목, 난 당신이 바라는 대로 당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소. 노예처럼요. 하지만 자유가 필요해요. 내가 기분이 내키면 칠거요. 하지만 이건 꼭 분명히 해둡시다. 내가 기분 날 때 만이오. 만약 내게 강요하면, 난 떠납니다. 분명히 아쇼! 내가 자유인이라는 걸.”
“분명히 아쇼!”라는 것을 이제 깨닫자. 조르바의 경고는 자유를 훔쳐간 자들에게 던지는 폭탄이다. 그의 삶이 온통 생명 분투로서의 자유의지였으니까. 자유를 지키려 하는 시는 ‘구호’이지만, 억압과 굴레 속에서도 자유를 구가하면 ‘시’가 된다는 걸, 이미 옥중에 살던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김수영, 김지하 등 여러 저항 시인이 드러낸 바 있다. 그래, 시조를 쓴다는 건 한량 짓이 아니다. 아픈 상처를 덧내거나, 잃은 돈을 되찾으려고 빚을 얻고 재도전을 벌이는 노름꾼과 같은 일이다. ‘치유’라고 말하지 말라. 긁어 더 덧나게 하는 작품들이 미지(未知)를 개안(開眼)하게도 한다. 검은 탄좌 속에서 비어져 나온 금속광처럼 시가 타올랐을 때도 우린 자유를 빼앗기고 캄캄한 동굴 추위 속에 자진모리 걸음으로 버티며 연명해 왔다. 지금은 역사가 캄캄히 지나온 동굴 기행을 읽으며 외우는 시인의 밤이다. 시방 그걸 앓고 있는 중이다. 일제 식민지의, 유신독재체재의, 민중 학살의, 국정농단 비굴의, 세월호의…, 그 지난한 우리들에게 이제야 빛을 준다니. 그 동안 앗아가 버린 자유, 그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니. 그건 아니다. 자유는 쟁취의 표적이며 값비싼 피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 아직도 시인은 상처를 덧나게 하여 피를 흘린다. 독자가, 대중이 그것을 읽고 먹어야 자유의 새 살갗을 피울 수 있다. 지금이 치유의 시를 쓸 때라고 말하는 자를 경멸한다. 치유는 시인이 하는 게 아니다. 상처를 긁어 덧나게 하는 그 깨어있는 자의 시조를 누군가가 읽은 후, 그리고 그보다 오랜 연후에, 독자와 민중이 하는 몫이다. 독자의 몫을 먼저 가로 채지 말라. 시조 속에 사람들을 위무한다는 그 교조주의에서 벗어나라~^^.
첫댓글 시조 속에 사람들을 위무한다는 그 교조주의에서 벗어나라~~~!
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