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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위치: 북아메리카
인구: 334,233,854명 (2023년 추계)
수도: 워싱턴 D.C.
면적: 9,833,634㎢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미합중국 (The United State of America)
기후: 온대성기후, 냉대기후
민족 구성: 백인(80%), 흑인(12.8%), 아시아계
언어: 영어
정부/의회형태: 연방공화제 / 양원제
종교: 개신교(52%), 로마가톨릭(24%), 모르몬교
화폐: US달러 ($) 환율계산기
국화: 장미
대륙: 북아메리카
국가번호: 1
GDP: USD 20,412,870,000,000
인구밀도: 35명/km²
전압: 110V/ 60Hz
도메인: .us
미국과 한국의 관계
▶ 개항 이전
▶ 병인양요
▶ 신미양요
▶ 강화도조약 이후
▶ 한미수교협상
▶ 가쓰라-태프트 밀약
▶ 개항 이후
▶ 근대식 병원 설립
▶ 미션스쿨 설립
▶ 한성전기주식회사 설립
▶ 일제강점기
▶ 해방
▶ 카이로 선언
▶ 얄타 회담
▶ 포츠담 회담
▶ 38선의 확정과 남한정부 수립
▶ 6·25 전쟁 이후
▶ 경제원조와 무역
▶ 한국인의 미국이민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북아메리카의 국가. 수도는 워싱턴이며 캐나다, 멕시코와 국경이 닿아 있다. 국민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며 대개 영어를 사용한다. 화폐단위는 미국달러다. 양원제를 채택한 연방공화국으로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겸한다. 미국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단일한 세계 최강국으로 자리했다. 산업발달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이루었으나 주요한 천연자원 생산국이기도 하며 세계의 주요 식량 수출국이기도 하다.
아메리카(America)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 가운데 가장 큰 알래스카 주는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서쪽 끝에 있으며 하와이 주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다. 수도는 워싱턴으로 1790년 제정된 연방수도권 지역인 컬럼비아 특별구와 동일한 지역이다. 본토에 속한 영토는 북쪽으로 캐나다, 서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멕시코·멕시코 만·플로리다 해협, 동쪽으로 대서양과 접해 있다. 알래스카 주는 남쪽으로 태평양, 동쪽으로 캐나다, 북쪽으로 북극해, 서쪽으로 베링 해와 경계를 이룬다.
국민들은 유럽계와 중동계의 후손들, 아프리카계 미국인, 히스패닉계, 아시아계, 태평양 섬의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알래스카 원주민으로 구성된다. 국민의 대부분이 영어를 사용하지만, 히스패닉계는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여기에는 개신교·로마 가톨릭·동방정교회 및 다양한 그리스도교 종파가 포함된다. 또한 유대교·이슬람교·불교·힌두교를 믿는 국민들도 있다. 화폐단위는 미국달러(U.S.$)이다.
국토는 산악지대, 평원, 저지대 및 사막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요 산맥은 애팔래치아, 오자크, 로키, 캐스캐이드, 시에라네바다이다. 미국 내에서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은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데스밸리로, 이 지역에는 해수면보다 82m나 낮은 곳도 있다. 미국 전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알래스카 산맥의 매킨리 산(6,194m)이지만, 48개주가 있는 본토에서 가장 높은 곳은 휘트니 산(4,418m)이다.
주요 강은 미시시피, 콜로라도, 컬럼비아, 리오그란데 등이다. 큰 호수로는 오대호, 그레이트솔트, 일리암나, 오커초비가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주요한 천연자원 생산국 가운데 하나이다. 생산되는 자원들로는 구리, 은, 아연, 금, 석탄, 원유, 천연 가스가 있다. 또한 세계의 주요 식량 수출국이기도 하다. 철강산업, 화학산업, 전기장비, 섬유산업 등의 제조업이 발달했다. 그 외 주요 산업은 관광업, 낙농업, 축산업, 어업, 임업 등이다.
미국은 상·하양원제를 채택한 연방공화국이고, 대통령이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겸한다.
현재 미국 영토에는 아시아에서 이주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수천 년 동안 살았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16세기부터 유럽인들의 탐험과 정착이 이어지면서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1656년 스페인 사람들은 플로리다 주의 세인트오거스틴에 최초의 유럽인 영구 정착지를 건설했다.
영국인들은 1607년에 버지니아 주의 제임스타운, 1620년에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1634년에 메릴랜드, 1681년에 펜실베니아에 정착했다. 영국의 귀족들이 캐롤라이나를 식민지화하고 1년 후인 1964년에,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지역을 빼앗았다. 1763년 영국은 프랑스를 물리침으로써 13개 식민지에 대한 대영제국의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했다. 대영제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정치적 불안은 독립전쟁(1775~83)의 발발과 독립선언(1776)의 발표로 절정에 달했다.
1781년 미연방이 연합헌장에 따라 처음 조직되었고, 그후 1787년 연방공화국의 새 헌법이 제정되었다. 국경은 스페인령의 플로리다를 제외하고는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까지 확장되었고, 1803년 그때까지 미국 영토의 거의 2배에 버금가는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사들였다. 미국은 영국에 맞서 1812년전쟁을 치렀고, 1819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획득했다. 1830년 아메리카 인디언을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추방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19세기 중반, 특히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된 이후 백인들의 정착지는 서부지역 멀리까지 확대되었다. 1846~48년 멕시코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를 비롯한 향후 7개 이상의 주로 구성될 지역을 미국에 귀속시켰다. 1846년 영국과의 조약으로 북서쪽 국경이 수립되었다. 미국은 1853년 개즈던 매입을 통해 남부 애리조나를 얻었다.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남부의 플랜테이션 경제와 산업과 자작농을 중심으로 한 북부 경제 구조 사이에 갈등이 있던 동안에 미국은 분열을 겪었다. 그 갈등은 남북전쟁과 노예제도의 폐지를 결정한 헌법 수정조항 제13조의 제정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1865~77년의 재건시대 이후에 급속한 성장과 도시화, 산업 발달 그리고 유럽인들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1887년에 개별 부족들에게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을 할당했다. 이 조치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광범위한 땅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페인-미국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미국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에 이르는 해외 영토들을 얻었다.
19세기말까지 미국은 외국과의 무역을 더욱 확장시켰고, 알래스카, 미드웨이 섬, 하와이 섬, 웨이크 섬, 미국령 사모아, 파나마 운하 지역을 포함하는 해외 영토들을 획득했다.
미국은 1917~18년에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 전쟁으로 인해 1920년에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1924년에 아메리카 인디언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1929년 주식시장의 붕괴는 대공황으로 이어졌고, 뉴딜 입법을 통해 경제 영역에서의 연방정부의 역할을 높임으로써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에 폭탄을 투하하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1945. 8. 6)와 나가사키(1945. 8. 9)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이로 인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그 이후 미국은 군사적·경제적으로 서방세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은 전쟁 후 10년 동안 유럽과 일본의 재건을 도왔고, 냉전으로 알려진 소비에트 연방과의 경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미국은 1950~53년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2년에는 푸에르토리코에 자치권을 갖는 연방국 지위를 부여했다.
1954년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가 위헌임을 공표했다. 1959년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주에 포함시켰다. 1964년 의회는 민권법을 통과시켰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승인했다. 196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광범위한 시민불복종운동이 전개되었다. 흑인민권운동과 반전시위가 그 예이다. 미국은 1969년에 최초로 인간의 달 착륙을 성공시켰다. 1973년에는 베트남에 주둔한 모든 미국 군대가 철수했다. 1991년 소련연방의 붕괴와 함께, 미국은 단일한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미국은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이라크에 대항하여 동맹군을 이끌었다. 1999년에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이 파나마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2001년 9월 11일에 감행된 테러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 건물과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의 일부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후 미국은 테러리즘의 주범인 우사마 이븐 라딘에게 은닉처를 제공하고 그의 송환을 거부한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정부를 공격했다. 2003년 미국은 영국의 지원을 얻어 이라크를 공격했고 사담 후세인 정부를 무너뜨렸다.
자연환경
대륙을 가로질러 넓은 지역에 걸쳐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자연환경을 보여주며, 자연지리학적으로 볼 때 5개의 주요지역군으로 나눌 수 있다. 대서양 연안평야 지역, 동부와 남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 미국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광대한 '내륙평원', 북아메리카 코르디예라 산계, 그리고 이 산계의 지맥에 속하는 서부의 '산간고원' 등으로 구분된다.
미국의 서부 연안지역은 지질학적으로 세계에서 화산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에 속한다. 1980년 봄에 있었던 세인트헬렌스 산의 화산폭발과 1989년 가을 샌프란시스코 만 부근을 진원(震源)으로 한 지진 등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보인 생생한 사건이었다. 하와이 섬과 마우이 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하와이 제도는 거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되었다. 지질학적으로 또다른 화산활동지역인 알래스카는 남쪽의 섬과 산맥 지역, 내륙 중앙부의 분지·평원·고원, 북쪽의 브룩스 산지, 그리고 북단의 툰드라 북극평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상 삼림·초원
메인 주에서 미네소타 주에 이르는 캐나다 국경 근처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스토로브잣나무·적송·솔송나무·가문비나무·방크스소나무·발삼젓나무 등이 어우러진 침엽수림이 남쪽으로 대상을 이루며 단속적으로 전개된다. 또한 잎갈나무·가문비나무·종이백자작나무·버드나무·오리나무·사시나무·포플러 등 비교적 키가 작은 수목들도 발견된다.
남쪽으로 갈수록 침엽수와 낙엽수가 혼합된 점이지대는 사라지고 단풍나무·참나무·서양물푸레나무·아카시아·보리수나무·풍나무·호두나무·히코리·쥐방울나무·너도밤나무 등과 같은 활엽수성 경재림(硬材林)이 전개되며 보다 더 남쪽에는 튤립·목련 등이 자란다. 특히 리기다소나무·대왕송·슬래시·쇼트리프·버지니아·테다소나무 같은 소나무 종이 대서양과 멕시코 만 연안평야와 그 주변 곡융지대를 뒤덮고 있다. 종종 파인 배런(pine barren)으로 불리는 거의 소나무로만 이루어진 수목지대도 전개된다. 도처에 산재한 늪지에는 낙우송(落羽松)·미국니사나무·화이트시더 등이 많다. 플로리다 주 남단에서는 소나무류·팔메토야자나무·라이브참나무 등이 사라지면서 대신 열대성 수종인 대왕야자·켄차야자·무화과·새틴우드·맹그로브 등이 주종을 이룬다.
그레이트플레인스와 산간분지에는 그라마풀·버펄로·사이드오트(side oat)·번치·니들·개밀과 같은 풀 종류가 여러 종류의 목초와 더불어 번식하고 있다. 폰더로사소나무·미송·삼나무·서양잎갈나무·스트로브잣나무·로지폴파인·가문비나무류·솔송나무·젓나무·붉은젓나무 등의 침엽수림과 태평양 연안을 따라 자라는 키가 큰 삼나무와 세쿼이아 등이 낮은 산계와 서부산맥의 고원을 덮고 있다. 캐스케이드 산맥과 코스트 산맥의 서쪽에 있는 워싱턴, 오리건, 북부 캘리포니아 등지에는 수목이 빽빽한 총림이 전개되며 키가 30m 이상 되는 나무들이 있는 곳도 많다.
고산툰드라
미국 경계지역 중 교목한계선 이상의 산악지대에서만 나타나는 고산툰드라 지역은 주로 짧은 계절 동안 현란하게 꽃을 피우는 단초식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막
로키 산맥 서쪽의 건조한 분지와 반사막지대에서는 산쑥이 가장 일반적인 식물이지만, 구릉이나 낮은 산맥에서는 서양향나무·넛파인·마운틴마호가니 등도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 남동부에서 텍사스까지 전개된 사막은 키가 나무만큼 자라는 수많은 종류의 선인장으로 유명하며 그밖에 조슈아나무·유카·크레오소트·메스키트·아카시아 등도 흔하다.
미국은 대륙 규모에 걸맞는 수많은 미국 원산 야생동물과 영국 참새와 같은 수입종, 그리고 수많은 변종의 가축을 보유하고 있다. 개척민들이 주거지를 건설했다 포기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가축과 야생동물 사이에는 수적으로 확실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팀버 울프라고 불리는 회색늑대, 큰뿔양, 쿠거와 같은 토산종들은 사냥꾼들의 남획으로 인해 예전의 산악지역에 있는 조그만 서식처에 제한되거나 완전히 멸종(나그네비둘기)되었다. 그밖의 다른 동물은 토산종이든 수입종이든 상관없이 인간 중심의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요한 종(種)의 동물들은 거의 모두 생물기후학 지역의 한계선 밖에까지 또는 아메리카 대륙 전반에 걸쳐 분포한다. 이와 같이 분포도가 넓은 동물들로는 흰꼬리사슴(버지니아사슴)·미국흑곰·퓨마·보브캣·강수달·밍크·해리·사향쥐 등이 있다. 이중 퓨마는 예전의 산악서식지역 중에서도 가장 외딴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강수달은 현재는 오대호 남쪽 내륙지역에서는 보기 힘들다. 미국산 코요테는 북아메리카에 널리 분포한다. 스내핑터틀(미국 중부산 식용거북)은 대서양 해안에서 로키 산맥까지 서식한다.
북부 침엽수림지역이나 타이가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 중에서 말코손바닥사슴·해리·산토끼·붉은여우·수달·굴로(carcajou)·늑대 등은 유라시아 동물과 혈족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화이트피시·옐로퍼치·강꼬치고기 등과 같은 일부 물고기 종들도 동반구와 서반구의 연관관계를 보여준다. 타이가 서식처에 사는 가장 독특한 북아메리카산 동물은 캐나다 호저(Canadian porcupine)이다. 동부와 동남부 삼림지역에 사는 수많은 종의 어류·파충류·양서류 등은 동아시아의 종들과 형태학상 관련을 갖고 있다. 이 지역에는 메기·잉어·서커 등이 많다. 미시시피 강 하류에 흔한 철갑상어의 일종인 스푼빌캣(spoonbill cat)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양쯔 강[揚子江]에서만 발견된다.
애팔래치아 지역은 세계적인 도롱뇽 본산지이며 몸집이 큰 양서류군의 8개 과(科) 중 7개과 이상이 서식하고 있다. 남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주요서식처인 청개구리류를 포함해 여러 종류의 개구리군(群)도 서식한다. 동남부의 늪거북(emydid freshwater turtle)은 동아시아의 늪거북류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물뱀·살모사류·구렁이류·초록뱀류 등도 동아시아산과 유사하지만 그밖의 것은 미국 특유의 종이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앨리게이터악어는 미국산을 제외하고는 중국 중부에 서식하고 있는 것이 유일하다.
포유동물과 조류에 있어 미국 남동부의 동물계는 북부·서부의 동물계와의 한계가 분명치 않고 동아시아의 동물계와의 혈족관계도 희박하다. 이 지역의 삼림은 흰꼬리사슴·흑곰·회색여우·아메리카너구리·주머니쥐 등의 본산지이다. 야생칠면조·나그네비둘기의 무리도 많이 발견된다. 조류는 일반적으로 풍금새류·미국꾀꼬리·벌새류와 같이 남아메리카 계통에 속하는 조류가 많기 때문에 유라시아의 조류와 구별되는 경향이 있다. 몸집이 작은 포유동물로는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설치류, 발산성 두더지, 뒤쥐 등이 많다.
가장 특이한 초원 포유동물은 아메리카들소이다. 지금은 거의 멸종한 유럽들소와 친척인 아메리카들소는 숲속에 산다. 가장 독특한 아메리카산 유제류(有蹄類)는 스프링복(spring-bok)이라 불리는 영양붙이로 사슴과 순수한 영양 사이의 교배로 생긴 과를 대표한다. 흙파는 쥐류, 여러 종의 땅다람쥐, 프레리독다람쥐와 같은 이채롭고 특이하게 생긴 설치류는 서부의 광활한 곳 어디에나 산다. 아메리카오소리는 초원에 보금자리를 갖는다. 프레리닭은 동부와 서부지역의 조류가 몰려드는 평원지대에서 발견된다.
남서부 사막지역은 파충류의 천국이다. 독성을 가진 미국독도마뱀과 같은 독특한 도마뱀이 풍부하며, 미국의 다른 곳에서는 단지 일부 종만이 발견되는 방울뱀도 흔하다. 사막 파충류종은 종종 태평양 연안과 북쪽의 그레이트베이슨까지 퍼져 있다. 주목할 만한 포유동물에는 성격이 온순한 두발달린캥거루쥐(거의 야행성임), 너구리과의 일종인 카코미슬, 돼지같이 생긴 페커리돼지류 등이 속한다. 로키 산맥과 다른 서부 산계는 바위와 암벽에 서식하는 유제류와 설치류의 풍부한 서식처가 되고 있다.
예전에는 모든 서부 산계에 순종의 큰뿔양이 살았다. 북부의 고지대에는 로키산산양이 살고 있는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중국의 서부 산맥에 서식하는 타킨소와 유사한 염소영양에 가깝다. 집토끼와 비슷하고 몸집이 작은 생토끼는 동아시아종과 마찬가지로 고지의 언덕지역에 서식한다. 유럽의 알프스 산맥에서도 볼 수 있는 마못쥐는 로키 산맥에 서식한다. 태평양 지역에 있는 캐스케이드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은 애팔래치아 산맥에 버금가는 도롱뇽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독특하게 생긴 영원류(押類)와 개구리도 이 지역에 많다.
땅속에 구멍을 파고 사는 도마뱀종은 캘리포니아 해안지역의 일부에서만 발견된다.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조류과 중 유일한 토종에 속하는 굴뚝새사촌은 캘리포니아의 차파랄 숲에서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는 새' 중의 하나이며, 아주 희귀종인 캘리포니아콘도르는 20세기말 대대적인 자연보호사업의 초점이 되었다. 서웰럴이라고 불리며 전혀 해리처럼 생기지 않은 산해리(山海狸)는 북아메리카 특유의 종으로 캐스케이드 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에만 서식한다.
물범류(물범과 하프물범)는 동부 및 서부해안 양쪽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두 해안에 서식하고 있는 포유동물의 종류는 현저하게 다르다. 긴 목과 툭 튀어나온 귀를 갖고 있는 바다사자류는 태평양에서만 발견된다. 이러한 종류로는 캘리포니아바다사자, 보다 북쪽에 사는 바다사자, 물개류 등이 있다. 동부해안의 경우 플로리다의 긴 강에는 카리브해매너티라고 불리는 스텔러바다소가 서식한다. 이들은 널리 퍼져 있고 독특한 서인도제도의 해양종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개척형태 미국의 독립선언
배경
미대륙 개척 초기부터 영국·미국 정부는 농업지역과 정착촌을 우선적으로 촉진하는 정책을 펼쳤다. 물질적·경제적 조건이 허락하는 한, 서쪽으로 프런티어를 밀고 나가고자 했다. 이런 특징은 단기간의 발전과 부를 위해 건너온 이주민들에 의해 급속한 점령과 개발을 경험했던,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프리카·아르헨티나·제정 러시아의 시베리아 등과 같은 국가들과 매우 비슷한 점이다. 영국 왕실은 종종 개인 기업가나 회사에 구획선이 애매한 대규모의 경작지를 불하했는데 피불하인들은 싼값으로 토지를 판매하거나 임대, 또는 거의 무상으로 땅을 공급해 개척민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식민을 위한 수많은 시도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노력은 개척 초기 1세기 동안, 특히 매사추세츠·코네티컷·뉴햄프셔 주 등지에서 번창한 종교집단마을인 뉴잉글랜드의 건설이었다. 비교적 한 지역에 집중된 이러한 공동체는 오늘날에도 완전한 시골도 아니고 그렇다고 응집된 형태도 아닌 채 방사선형 도로를 따라 산재해 있는 아메바 같은 형태로 존속한다.
후기의 실험정착촌 중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큰 의미를 지니게 된 유일한 형태는, 유타 주와 인근 주를 포함하는 그레이트베이슨 지역에 개척된 일련의 모르몬교 정착촌으로서 이들의 집중된 농업마을은 뉴잉글랜드의 형태와 비슷하다. 인종적·종교적·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는 집단에 의해 또다른 시도들이 있었지만 일시적·단편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독립실현 후 이어진 복잡한 협상을 통해 최초의 13개주는 자신들의 경계선 밖에 있던 서쪽의 미개척영토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를 새 연방정부에 양도했다. 이로써 연방정부가 관할하는 국유지가 설정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1803년에는 루이지애나 매입을 통해 획득한 영토와 미시시피 강 너머에 있는 막대한 영토가, 1819년에는 플로리다가 추가되었다. 식민영토의 조사와 처분에 사용된 마구잡이 방식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연방토지 관리자들은 정착에 앞서 탐험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측량·계산하고, 지도를 제작한 다음 토지관리국을 설치해 좋은 조건으로 정착민에게 매매·양도했다.
농장생활
1900년경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농촌생활의 시기 동안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농장에서 살며 일하거나 경제적으로 농부들에게 의존했다.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있는 시골생활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농가는 마을과 이웃 농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농가가 소유한 토지는 평균 0.65㎢ 이하였다. 농장의 형태는 다양했고 지역적인 전통과 경제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나 보편적인 거주가옥, 헛간, 작은 가축과 장비를 두기 위한 창고, 소규모 과수원, 뒷마당, 채소밭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농장들은 조밀하고 일반적으로 직사각형 격자무늬 방식으로 된 도로(당시에는 거의 포장되지 않았음)에 의해 다른 농장과 읍들로 연결되었다. 분산된 형태의 시골 정착촌이 생겨나면서 뜨내기 행상인을 통해 소매업이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품목의 제조·유통·수리를 위한 소규모 상점이 우체국과 마찬가지로 고립된 농가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사회활동은 시골교회·학교·농민공제조합을 중심으로 넓게 분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연중 가장 큰 행사는 군내의 농산물·가축 품평회, 정치집회, 신앙야영회였다.
지역의 소규모 마을
촌락, 자치체, 소규모 도시 등은 비교적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정돈되었으나 그 규모와 풍요 정도는 주로 철도의 설치 여부와 운영상태 혹은 군청소재지로서의 위상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
지역간의 독특한 차이점은 소규모 마을의 설계와 형태에 반영되었다. 바둑판 형태는 뉴잉글랜드와 중서부에 많은 반면에 전형적인 중부마을은 주도로를 따라 정돈된 일직선형 배열을 보여준다. 건축자재도 지역특성을 나타내는데 뉴잉글랜드는 목재, 중부 대서양 주에서는 돌, 남서부에서는 아도비 벽돌 등이 사용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마을광장은 상업 및 사회활동을 위한 중심지로 이용되었다.
도시 정착촌
농촌 중심의 사회에서 도시사회로 넘어가는 변혁기인 20세기에 미국은 다른 선진국이 이미 경험했고 개발도상국은 앞당기기 시작한 일반적인 과정을 답습했다.
인구의 약 3/4이 공식적으로 설계된 도시지역과 그 근교지역 안에 무리를 지어 모여 사는데, 면적은 전국토의 2%를 넘지 않는다. 나머지 인구 가운데 적어도 15%는 경제적·사회적 면에서 사실상 도시지역에 속하는 분산된 거주지에 산다. 적어도 1900년까지 미국 도시들의 역사적 위치는 연속적인 교통체계의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식민지시대에는 육상교통의 비효율성과 고비용으로 인해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워싱턴 D. C.,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등의 경우처럼 만이나 강어귀를 따라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그후 내륙지역의 인구증가와 운하·도로 개발의 확산과 더불어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 오하이오의 신시내티, 뉴욕의 버펄로,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와 같은 신도시들이 도로 간 교차지점이나 다양한 교통수단이 만나는 지점에 발달했다. 약 1850~1920년 많은 지역에서 신도시의 팽창과 구도시의 신속한 성장 여부는 주로 새로운 증기기관차 노선상에 자리잡고 있는지, 그리고 많은 주변지역을 관장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버펄로, 오하이오의 털리도, 시카고, 샌프란시스코와 같이 수로 옆에 있는 철도 중심지는 급속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그리고 조지아의 애틀랜타, 인디애나의 인디애나폴리스, 미네소타의 미니애폴리스, 텍사스의 포트워스, 워싱턴의 터코마 등과 같은 철로시대의 신흥도시들도 현저하게 성장했다. 19세기와 20세기초에 일어난 급속한 산업화의 대부분은, 이미 수로나 철로 교통체계의 혜택을 받고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무연탄지대 북동부의 일부 도시, 뉴잉글랜드의 일부 제분업 마을,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에 걸쳐 있는 피드몬트 고원의 일부 섬유산업 중심지 등의 경우는 급속한 도시화를 경험하고 나서 교통시설이 유치되었다. 한편 금·은·구리·석탄·철 등의 채굴과 20세기에 와서 가스·석유의 발굴이 이루어진 도시 가운데 광물이 아닌 다른 요소들을 지역특성에 맞게 자본화하지 못한 곳은 일회성 중심지로 끝났다.
20세기말에는 예전에 도시의 위치와 성장을 결정하던 물리적 요소들을 대신해 사회적 요소들, 특히 기업체와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 위락산업, 고등교육기관 등의 요소들이 도시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대도시들은 점점 더 기업의 본부, 통신, 나아가 도시의 유지를 위한 정보관리 등에 의존하게 되었다.
워싱턴 D. C.는 정부 및 그 산하기관의 활동이 급속한 성장의 촉매가 된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전형적인 실례이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주도(州都)는 비슷한 인구와 경제력을 나타낸다. 그밖에도 주요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을 보유한 도시들은 대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도 자동차가 보편화되고 이와 병행해 서비스 시설과 고속도로가 확충되자 농촌지역을 둘러싸고 산재해 있던 미국의 도시들은 상당히 간격을 두고 흩어지게 되었다.
메갈로폴리스
미국인의 기동력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전원풍경도 극적으로 바뀌었다. 간선도로가 중심교통로가 되었고, 한때는 지역 마을이나 도시에 국한되어 있던 대부분의 교통체제가 이제는 주요도로를 따라 멀리까지 펼쳐지게 되었다. 도시 정착촌의 전례없는 외부로의 확장은 양적·질적 변화를 가져오면서, 새로운 정착촌 형태를 창출했다.
주변지역까지 동시에 성장해 2개 이상의 큰 도시가 연합하는 형태인 대도시권은 19세기에 북서 유럽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규모와 복잡성에 있어 세계의 그 어느 곳도 미국의 대서양 해안을 따라 발달한 초대형 도시에 비교될 만한 곳은 없다(광역 도시권). 이 대도시권은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시작해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를 지나 보스턴까지 이어지며 그 사이에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워싱턴 D. C. 등의 도시들을 포함하고 있어 메갈로폴리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또다른 대도시권은 오대호 주변에 있는데, 하나는 시카고를 중심으로 일리노이·위스콘신·인디애나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는 곳이며, 다른 하나는 디트로이트를 기점으로 미시간과 오하이오의 대부분을 포함해 캐나다까지 펼쳐진 곳이다. 또 하나의 대도시권은 버펄로에서 출발해 클리블랜드를 거쳐 피츠버그로 거슬러올라가는 곳이다. 3곳 모두 서로를 향해 확장되고 있으므로 또다른 메갈로폴리스를 형성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곧 뉴욕 주의 중앙부를 회랑지대로 해서 해안 메갈로폴리스 지역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창 발달중인 메갈로폴리스의 또 하나의 예는 샌타바버라에서 대도시권의 중심부인 로스앤젤레스를 지나 멕시코 국경에 이어지는 거대한 남캘리포니아 대도시권이다(도시계획). 퓨젓사운드의 동부해안을 따라 펼쳐진 대상형태의 도시지역도 소규모의 메갈로폴리스이다.
형태에 있어서 상당히 예외적인 곳은 잭슨빌에서 마이애미까지 플로리다의 대서양 해안을 따라 전개되며 많은 도시를 포함하는 가느다란 일직선 형태의 지역이다. 또한 댈러스포트워스·휴스턴·샌안토니오 등 텍사스 주의 도시들도 연속되지는 않지만 급성장하고 있는 삼각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과 같이 역동적·혁신적인 나라에서 확실하게 맞출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측 중의 하나는 국토이용에 있어 신중하고 꼼꼼한 통제가 없다면 도시환경의 모습이 계속해서 메갈로폴리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결과 다중심의 대규모 도시지역을 구성하고 있는 소규모 단위가 각각 다른 소규모 단위와 사회적·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지역
미국의 전통지역 또는 문화지역 간의 차이점은 보다 오래되고 안정된 나라들과 비교해볼 때 별 차이가 없다. 지역간 차이점이 약화되고 종종 애매한 성격을 갖는 이유는 비교적 근래에 정착촌이 건설된 점, 지속적이고 수준 높은 기동성, 최고의 통신체계, 경제와 행정의 신속한 중앙집중화 등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전통지역의 일부는 사라져가는 과거의 유물에 불과하며 골동품 수집가에게만 흥미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지방 분권제도). 그러나 미국인의 사고와 행태의 많은 영역에서 전국적인 표준화가 진행되었는데도 구문화지역의 잔존효과는 잠재적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전통문화지역은 이민 온 유럽인 식민개척자들의 생활양식과 새로운 거주지에 대한 사회전체의 계속적인 적응 등의 결과로 그 성격상 일반적으로 유럽적인 기원을 갖는다. 원주민의 토착문화는 미국의 현대문화에 그다지 많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 동부의 문화지역도(圖)는 뉴잉글랜드·미들랜드(중부)·사우스(남부) 등 대서양 연안에 있는 3곳의 주요식민지 문화 중심지의 생성·개발·팽창이란 용어로써 설명될 수 있다.
3곳 모두 본질적으로 영국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각자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이런 차이점은 첫째, 최초의 효과적인 정착이 이루어진 중요한 기간 동안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이 다르다는 것과 둘째, 물질적·경제적 환경이 다르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상호간의 문화 차이는 더욱 골이 깊어지는 경향이 있고 경계도 미국의 나머지 지역보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서부는 상이한 구조의 지리적·사회적·경제적 요인들이 만연되어 있지만 국가적 개념으로는 똑같은 뿌리를 가진 지역적인 복잡성을 갖는다. 화려하고 가장 도시화가 잘된 남부 캘리포니아 같은 일련의 20세기 지역들이 등장한 것도 관심을 끈다(지방주의).
뉴잉글랜드
처음 2세기 동안 뉴잉글랜드는 대단히 동질적인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영국계 이민들은 비국교도라는 동일한 종교·언어·사회조직·일반적인 견해 등을 가지고 있었다. 방언·마을형태·민속건축 등의 조건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독특한 지역문화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뉴잉글랜드의 읍은 공유지나 초원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첨탑교회를 포함한 흰색 목조 건축물들이 넓은 간격을 두고 모여 있는데 이것은 미국 촌락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주민들의 기질은 민간전승과 실생활 모두에 있어 지역적 색채를 띠고 있다. 전통적인 뉴잉글랜드의 양키는 자립심이 강하고 검소하며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다.
1830년대에 시작된 이주민의 대량유입은 뉴잉글랜드의 독자적인 성격을 희석·변화시켰지만 아직까지도 초기 특성이 상당부분 남아 있다. 그밖에 19세기 동안 진행된 해상무역과 프런티어로의 재이주는 하와이, 카리브 해, 어퍼미드웨스트, 유타, 태평양 북서부같이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뉴잉글랜의 문화를 전파했다. 보스턴 대도시권은 유리한 위치, 경제력, 오랜 전통 덕분에 뉴잉글랜드 지역의 문화·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사우스(남부)
초기에 세워진 3개의 영국계 문화지역 중에서 가장 큰 남부지역 역시 일반적인 국가 기준에 관련지어볼 때 아주 독특한 곳으로 수용속도가 가장 느린 곳이기도 하다. 최초에 이 지역에 이주한 정착민은 거의 영국계였다. 외부적으로는 뉴잉글랜드나 미들랜드에 정착한 주민들과 차이가 없었지만 동기와 사회적 가치관의 측면에서 확실히 구별되었으며 전원적인 것과 현대 이전의 유럽이 가지고 있던 가정 및 사회구조를 완고하게 유지했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대량수입과 북쪽보다 훨씬 덜 호전적인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보수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
그밖에도 북서 유럽과 상당히 다른 특이한 경제형태·정착유형·사회구조 등은 매우 상이한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서 남부가 다른 문화지역으로부터 일탈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세기에 와서 이러한 차이점은 미국의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정치적 위기와 군사적 유혈충돌을 조장하는 요인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1세기 이상 남부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볼 때 강력한 단일체로 남아 있었으며 이러한 남부의 특이한 위상은 종교·교육·체육·문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소규모 읍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도시화도 남부의 경우는 늦게 시작되었다. 20세기에 와서야 경제활동과 물질문화의 측면에서 미국의 다른 지역과 중요한 연결점을 갖게 되었다고 볼수 있다.
남부의 서쪽 1/3을 점유하고 있는 텍사스 주는 매우 크고 독특하며 역동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독자적인 문화지역을 구성한다. 게다가 프런티어 지역에서 서로 접해 있는 여러 독특한 공동체의 혼합으로 다채로운 텍사스 기질이 생겨났으며 이는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텍사스와 마찬가지로 정착이 늦게 이루어졌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플로리다 반도는 남부의 일부나 이웃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남부에 속하지는 않는다.
미들랜드(중부)
미들랜드(미드웨스트와 구별됨)는 미들애틀랜틱스테이츠의 일부와 어퍼서던스테이츠(펜실베이니아·뉴저지·델라웨어·메릴랜드)를 포함한다. 미들랜드의 주요 유럽인 정착촌은 다른 주요문화 중심지보다 약 1세대 이상 늦게 시작되었고 네덜란드인·스웨덴인·핀란드인·영국인 등이 초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어려운 노력을 기울인 끝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17세기말경 윌리엄 펜과 그의 동료들이 정착을 시작하면서 이 지역의 식민지화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지역의 문화는 남동부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로 독자적인 특성을 띠기 시작했다. 금욕적이며 부지런하고 유복한 농업사회는 신속하게 상업과 농업이 함께 발달한 혼합경제사회가 되었으며 나중에 산업사회의 기능이 더 추가되었다.
18세기 중엽 대부분의 지역이 현저하게 도시적 특성을 갖게 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북해 주변의 선진국가들과 비슷해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들랜드는 북부와 남부의 이웃 지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민족구성면에서 볼 때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초기부터 영국에서 온 여러 민족 및 종교집단들이 유럽 대륙 출신의 이주민과 섞이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다양성은 계속 진행되어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미들랜드에서는 비록 불규칙하게 퍼져 있다고 해도 독일계 주민이 항상 막강했고 많은 도시에서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미드웨스트(중서부)
미드웨스트라고 불리는 거대한 3각형 모양의 중서부는 모든 면에서 미국의 평균치를 가장 잘 대변하는 곳으로 간주된다. 미드웨스트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미국인이라면 모두 그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미드웨스트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3각형의 동쪽 꼭지점은 피츠버그의 주변지역으로 보이며, 나머지 서쪽의 두 점은 그레이트플레인스의 어디에선가, 즉 북쪽으로는 캐나다의 매니토바 주 남단과 남쪽으로는 캔자스 주 남단 근처에서 사라진다. 동쪽 끝과 남부 및 서부의 경계는 넓고 분명하지 않은 점이지대이다.
중요한 2부분인 어퍼미드웨스트와 로어미드웨스트를 구분하는 선은 서쪽으로 멀리 콜로라도까지 전개된 위도 41°선 근처이다. 어퍼미드웨스트에는 독일계·스칸디나비아계·슬라브계와 기타 비(非)와습계(WASP : 앵글로색슨계의 백인 신교도 계급)가 혼합되어 있어서 영국계가 일반적인 주류를 이루는 사회구조의 색채를 많이 바꾸어 놓았다. 구분된 지역 내에서 교회종파의 범위는 다양하다. 로어미드웨스트는 비교적 흑인이 희박한 점을 제외하면 개신교가 우세하고 영국계 색채가 짙은 사우스(남부)와 비슷한 경향이 있다.
웨스트(서부)
앞서 설명한 문화지역은 대략 미국 본토의 동쪽 반을 차지한다. 이에 비해 나머지 반은 분류에 어려움이 있다. 미국인의 상상 속에 강력히 자리잡은 아메리칸 웨스트(미국의 서부)에 대한 개념은, 카우보이의 낭만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와 텔레비전에 의해 계속해서 강화되었다. 이 지역에 광활하게 펼쳐진 가축의 방목단지를 서부생활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한때는 목축업이 토지면적으로 측정해서 실제 웨스트 지역 토지의 1/2 이상을 차지한 적이 있었다고 해도 거기에 종사한 인구는 전체인구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하부문화이므로, 전체지역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없다. 순수하고 단순하며 광대한 웨스트 문화지역이 실재하는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상 모든 땅이 개발되고, 문화지역과 아구(亞區)들이 서로 인접하면서 매우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는 이스트와 달리 웨스트의 주요인구 중심지 8곳과 그보다 비중이 작은 다른 많은 중심지는 마치 오아시스를 방불한다. 즉 거의 주민이 없는 산맥이나 광활하게 펼쳐진 건조한 사막지대로 인해서 서로 고립되어 있다.
이들 고립된 개개의 밀집지역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유일하고 분명한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로 아메리칸 이스트에서 기인되었지만 유럽·멕시코·동아시아 등지에서 유래한 문화성향이 추가되어 복합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 일반적으로 현대화된 사우스웨스트(남서부)를 제외하면 1840년대 이전에는 거의 완전한 정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부지역은 불완전하거나 또는 일부만 형성된 문화지역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나머지 지역은 명확한 특성을 획득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제1차 문화지역 또는 소문화지역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순수한 문화동일성을 보이는 웨스트의 몇몇 주요지역은 인디언과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어퍼리오그란데·모르몬·서던캘리포니아 지역으로 샌프란시스코 만과 퓨젓사운드 주변의 도시 밀집지역을 가리킨다.
국민
미국 사회의 특성은 종종 거대한 '인종의 도가니'(melting pot)로 묘사되어 왔다. 많은 나라와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이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한데 섞여있기 때문이다.
민족
오늘날의 미합중국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은 본래 2만~3만 5,000년 전 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아시아인들이었다. 이들의 후손이 나중에 유럽식민통치자들에게 아메리카 인디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이 16세기에 북아메리카에 최초의 유럽 식민지를 세웠으나 인구가 대량으로 유입된 것은 17세기초 영국인들이 정착하면서부터였고, 이와 함께 아프리카 흑인들이 신세계에 수송되어 오면서 비중있는 소수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1820~60년 사이에 유럽에서 건너온 500만 명의 이주민 중에 90%는 영국·아일랜드·독일 출신이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보다 많은 수의 이주민들이 이탈리아, 폴란드, 러시아, 스웨덴, 발칸 제국, 오스트리아, 기타 국가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민유입으로 인해 전체인구에서 로마 가톨릭교도의 비중이 확대되었으며, 상당수의 유대인 소수집단도 가세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 법적인 제한이 가해지면서 이주민이 눈에 띄게 줄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십 년간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20세기말에 와서 이민유입의 성격이 다시 한번 바뀌었는데 최근의 이주민들 중에서는 멕시코·중앙아메리카·남아메리카·카리브 해 국가 출신의 히스패닉(Hispanic : 라틴아메리카계 미국인)이 단일 민족 집단으로서는 최대의 숫자를 기록했다(히스패닉계 미국인). 그 뒤를 이어 중국인·한국인·필리핀인 등의 동아시아인들과 인도·파키스탄 등 남아시아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미국 국민들의 구성을 보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 아닌 백인이 전체인구의 약 70.6%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흑인이 13.2%, 아시아인 5.4%, 아메리카인디언·알래스카 원주민·태평양 도서국민 등이 소수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히스패닉 인구는 백인, 흑인 위의 인종에 모두 포함되어 집계되는데, 히스패닉만 별도로 수치화하면 전체 인구 중 그 비중은 17.4%이다.
언어
백인과 흑인 모두 영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지만 법률로 정하지는 않고 있다. 히스패닉계는 대다수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그들의 모국어가 혼용되고 있다.
인구
미국의 전체 출생률은 유럽보다 약간 높고 세계의 나머지 지역보다 훨씬 낮다. 일반적으로 가정소득과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자녀수는 감소한다. 전체 인구는 2023년 기준 3억 3,423만 3,854명에 이르고 있으며, 인구밀도는 36명/㎢이다. 15세 이하의 인구가 약 20%를 차지한다. 도시거주자의 비율은 인구의 82%에 달하고 있다.
미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76세이며 여성의 평균수명은 81세이다. 미국 흑인의 평균수명은 백인보다 거의 5~8년 정도 짧았던 2000년대 이전에 비해, 2000년대 이후로는 그 차이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반면, 미국 백인 남성의 사망률은 1990년대 이후 2015년까지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미국의 농촌 인구는 201~202만 명으로 추산되며 미국 전체 인구의 1% 미만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다.
역사와 교육
역사적으로 교육은 주와 지역정부의 소관사업으로 간주되었다. 3,000개 이상의 대학과 종합대학교 중에서 군사학 분야의 일부 학교만이 연방기관에 속한다. 그러나 1862년 연방정부가 농과대학과 공과대학을 설립할 목적으로 주정부에 연방공유지를 불하(이런 대학은 '토지불하대학'으로 불림)하기 시작하면서 차츰 모든 차원에서 교육에 관여해왔다. 그밖에도 학교급식계획을 지원하고, 아메리카 인디언 교육을 관할하며, 대학에 연구비를 지급하고, 대학생에게 학자금을 융자해주며, 퇴역군인 교육의 재정을 지원한다.
초등교육은 여전히 일차적으로 지역정부의 소관이지만,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64년의 민권법은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학군에 대해 연방정부가 재정지원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민권법). 학교가 많은데도 인종차별지역에 사는 흑인들의 자녀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먼 거리를 통학해야 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미국 학생들의 절대다수가 중등교육을 마치는 17, 18세까지 학교에 다닌다.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명문 대학교로는 하버드대학교(매사추세츠)·예일대학교(코네티컷)·프린스턴대학교(뉴저지)·시카고대학교(일리노이)·스탠퍼드대학교(캘리포니아)·캘리포니아대학교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등이 있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연방 차원과 주 차원에서 모두 포함됨)는 미국의 언론기관에 정부 행동을 감시할 수 있는 무한정의 자유를 제공한다. 공무상 기밀 법안도 언론이 정부에 대한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데 제약을 가할 수 없다. 베트남 전쟁에서 보도매체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다양한 민중선동가와 기타 정치인들의 부침(浮沈)을 자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워터게이트 사건이 보도되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곧 탄핵에 직면하게 되어 사임(1974)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건축분야의 경우, 스칸디나비아에서 전해진 통나무집은 신속하게 보급되어 숲이 우거진 프런티어 지역의 상징적인 주택이 되었다. 연방양식, 그리스 부흥양식, 고딕 복고양식 등 보다 정교한 건축양식이 19세기에 도시와 시골의 건축물에 이용되었다. 도시들이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로 접어들면서 마천루가 등장해 미국 사회의 기술적 업적과 자신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윌리엄 러 배런 제니와 루이스 설리번은 시카고 출신의 건축가로, 그러한 건축양식의 선구자들이다. 설리번의 제자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9~1959)는 프레리 학파(Prairie School)로 알려진 새로운 건축설계운동을 시작해 20세기초에 미국 전역에 걸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후대의 주요 미국건축가로는 독일 태생의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르 로어, 그의 제자들인 필립 존슨, 로버트 벤투리 등이 있다.
문학
역사를 통틀어 미국은 일단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했다. 코튼 매더와 조내선 에드워즈의 설교집에서부터 벤저민 프랭클린과 토머스 제퍼슨의 불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시대와 건국 초기시대가 미국 문학 속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9세기 문학은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에밀리 디킨슨, 에드거 앨런 포, 월트 휘트먼, 마크 트웨인, 헨리 제임스 등과 같은 작가들로 대변되었다.
종교
종교에 관한 한 미국 정부는 완전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인구구성의 다양성은 종교의 통일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다. 현재 1,200개 이상의 종교단체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성립된 단체도 있는데, 그중 사도교회(19세기초 설립),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 교회(모르몬교, 1830년 설립), 제7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공식적으로 1863년에 설립)가 유명하다. 또 여호와의 증인(1872년 설립), 크리스천 사이언스(1879년 설립), 네이티브 아메리칸 처치(1885년경 설립) 등도 널리 알려져 있다. 기타 다른 종교는 동반구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이들 종교조차도 독특한 미국적 형태로 발전해왔다.
로마 가톨릭교도(미국 인구의 약 1/3을 차지함)는 로마 교황청의 지시를 따른다. 그러나 미국의 교구 가운데 일부는 지역특색을 인정하며 또 주교구별로 의식절차가 다양하다.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은 소규모 분파 외에도 전국적인 3개 조직(정통파·보수파·개혁파)에 소속되어 있다.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교도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장 큰 단체는 침례교회·감리교회·루터파교회 등이다. 그밖에 오순절교회, 장로교회, 감독교회, 여러 형태의 동방교회(그리스 정교 포함), 조합교회, 개혁교회, 메노파, 암만파, 다수 종파를 가진 형제회, 유니테리언파, 프렌드파(퀘이커교) 등이 있다. 최근에는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이슬람교와 불교에 귀의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
개항 이전 병인양요
미국이 한국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때는 1845년이었다. 당시 미국 하원의 해사분과위원회 위원장인 프랫은 '일본과 조선에 파견할 통상 사절 연장'이라는 제목의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미국의 내정문제로 인해 사장되었다. 그후 1866년 7월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안에 들어와서 상품교역을 시도한 일이 있었는데 평양사람들의 분노를 사 선체가 불타고 선원 24명이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보다 앞서 1866년 초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조선정부에 의해 처형된 사건이 일어나 프랑스는 이에 대한 응징으로 9월과 10월 2차례에 걸쳐 함대를 파견해 무력시위를 했는데 이것이 병인양요였다. 미국은 이에 편승해 제너럴 셔먼호 피습 사건에 관해 프랑스와 공동으로 대처하고자 했으나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의 전후 복구문제와 멕시코 병합 문제로 프랑스와 줄다리기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여의치 못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서양의 세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신미양요
신미양요(辛未洋擾) 미국은 남북전쟁의 충격이 가시고 중국과의 교역량이 증대되자 조선과의 수교 필요성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좀처럼 문을 열지 않으려 하자 미국은 일본에 했던 것처럼 '함포외교'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아시아 함대 총사령관인 로저스 제독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해 함대를 파견했다. 1871년 5월 30일에 이 전함들이 한강 하류에 당도하면서 신미양요가 시작되었다. 6월 로저스 함대는 강화도의 광성진·초지진·덕진진을 점령했다. 2일간의 한·미 격전은 처절했으며 광성진의 수비사령관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아우 어재순(魚在淳)을 비롯한 수비대는 최후까지 저항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로저스 함대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 진격이 어렵다고 판단되자 중국의 북부 항구로 회군했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한 지 2년 만인 1878년 4월에 미국 의회에서는 다시 한번 조선과의 통상수교안이 제안되었으나 이 제안 역시 상원이 휴회에 들어감에 따라 자동 폐기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880년 미국은 슈펠트 제독으로 하여금 일본의 도움을 얻어 조선과 개항교섭을 추진하도록 했다. 일본이 도움을 거절하자 미국은 단독으로 접근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조선이 앞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 황준헌(黃遵憲)의 〈사의조선책략 私擬朝鮮策略〉이 입수되어 미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 있었다.
한미수교협상
한편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슈펠트가 일본을 통해 조선에 접근하려 했던 것을 불쾌하게 여겨 자신이 조선개항협상을 주선하겠다고 나섰다. 한미수교협상은 톈진[天津]에서 1882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홍장은 조선이 청제국의 부속국임을 한미조약에 삽입시키려 했고 슈펠트는 이를 반대했다. 결국 타협안으로서 슈펠트는 별도 공한에서 조선이 청국과는 부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했으며 조선 측도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국에 부속한다는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마침내 한미수호조약은 1882년 5월 22일에 미국을 대표한 슈펠트 제독과 조선조를 대표한 전권대신 신헌(申櫶) 및 전권부관 경리통리기무아문사 김홍집(金弘集) 사이에 서명되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청일전쟁과 영일동맹을 거치면서 조선에서 일본의 지위가 강화되자 일부 미국인들은 일본세력의 비대가 극동에서 미국과의 충돌로 치달을 것을 우려했으나 조선의 국내 상황이 매우 혼란하자 조선에 대한 경멸감이 더해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은 일본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쟁이 종반에 이르러 일본으로부터 중재를 부탁받자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해준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후 몇 달 후 루스벨트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켰다.
개항 이후 근대식 병원 설립
중국의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등에서 활동하던 선교의사 H. N. 앨런이 1884년에 서울에 왔고 1885년 선교병원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 여의사 엘리스를 보내 앨런과 합류시켰다. 광혜원은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꾼 뒤 1886년 의학교를 설립, 16명의 학생을 뽑았다. 1899년에는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고 9년 뒤에는 졸업생을 냈는데 이것이 세브란스의학교의 모태이다.
미션스쿨 설립
제중원이 1886년 처음으로 의학교를 설립하기 바로 전인 1885년 8월 아펜젤러가 2명의 학생만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신교육에 관심을 쏟고 있던 고종은 1886년 6월 아펜젤러의 개설학교에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간판을 하사했다. 이어 H. G. 언더우드가 1886년 고아원 형태의 학교인 경신학교를 창설했다. 이어 언더우드는 1915년 3월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웠는데 이것이 연희대학교의 전신이다. 한편 여선교사 M. 스크랜턴은 1886년 5월 여학생 1명만으로 학교를 열었는데 이것이 이화여자대학교의 출발이었다. 이어 선교사들에 의해 미션 계통의 학교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한성전기주식회사 설립
1887년 미국의 전기기사 매케이는 경복궁 안에 증기발전기 2대를 설치하고 에디슨 전등 2개를 가설했다. 1898년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서울시내 전차·전등·전화 가설경영권을 얻어 조선왕실과 공동출자로 한성전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국 강점을 방관한 미국은 을사늑약의 체결과 함께 1905년 주한미국공사관을 철수시켰고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정당화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에 소극적이었다. 1919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조항에 자극받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언론들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일본을 규탄했고 미국의회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작 미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다가 겨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부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러했으므로 한국인이 볼 때 미국은 간접적인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장소일 뿐이었다. 이곳은 선전·외교·자금조달의 거점이자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해방
카이로 선언
1943년 카이로에서 루스벨트·처칠·장제스[蔣介石]가 모여 극동문제처리를 위한 3차 회담을 열어 카이로 선언을 채택했는데 한국독립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 시킨다고 단서를 달아놓았다. 이 선언의 초안은 미국 측이 작성한 것으로서 루스벨트는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반대하고 '적당한 시기'로 늦추었던 것이다.
얄타 회담
얄타 회담은 1945년 2월 루스벨트·처칠·스탈린에 의해 열렸고 루스벨트는 20~30년에 걸친 한국의 신탁통치 실시를 제안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안에는 찬성했으나 기간을 단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외국군의 한국주둔도 반대했다. 이 회담은 참가국 수뇌들의 의견 교환 정도로 그쳤다.
포츠담 회담
그후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이 다시 3국 대표들 간에 열렸다. 미국은 포츠담 회담중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될 경우 소련이 한반도를 모두 점령해버릴 것을 우려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은 준수되어야 한다고 포츠담 선언에 명기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한반도 상륙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하여금 한반도로 진격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의외로 쉽게 항복하자 일본 상륙작전이 필요없게 되었고 병력에 여유가 생겼다. 미국은 새삼 한반도점령을 고려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일반명령 1호'를 작성·발표했는데 북위 38도선 이북에 있는 일본군은 소련군사령관에게 항복절차를 밟고 그 이남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사령관에게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북위 38도선은 남북을 가르는 분단선이 되었다.
38선의 확정과 남한정부 수립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한국의 38도선 분단점령을 발표했고 이어 9월 8일 하지 중장 휘하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3년에 걸친 미군의 남한통치가 시작되었다. 미군정청은 통치 초기부터 임시정부 부인, 신탁통치안의 고수, 미온적인 대공정책 등으로 우익정치인사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특히 이승만(李承晩)과 하지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반목이 심했다. 이러한 이유로 하지는 김규식(金奎植) 중심의 중간우파와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중간좌파에 의한 좌우합작으로 정치적 난국을 타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미국은 1947년경부터 시작된 미·소 냉전에 따라 모스크바 협정 노선을 버리고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UN)에 넘기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의 복안대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 0시를 기하여 미군정이 폐지되었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미국은 제일 먼저 한국을 승인하고 초대 주한미국대표로 무초를 임명하고 한국에서도 초대주미대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함으로써 약 반세기 만에 양국의 공식외교가 재개되었다.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북한의 군사적 위협, 신생국가로서의 경제사정 등으로 대미일변도의 외교를 펴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 원조를 획득하는 데 집중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후 군사비를 삭감해야 할 국내사정 때문에 병력을 감축해야 했으므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단정하고 약간의 병력과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전면 철수했다. 이 상황에서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6·25 전쟁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韓美相互防衛條約)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대한민국의 외무부장관 변영태와 미국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과 미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관계는 매우 긴밀해졌다. 또한 전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하여 안보를 다지고 경제원조를 강화했으며 전후복구사업 및 경제부흥사업을 적극 도왔다. 그러나 1960년 케네디 대통령 때 한국의 5·16군사정변을 못마땅히 여긴 미국이 민정복귀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양국의 불편한 관계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그후 존슨·닉슨·포드 대통령 시대에는 비교적 평온한 상태를 유지했으나 1970년대 후반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미군철수문제·인권문제·박동선사건 등으로 긴장된 관계가 또 한번 연출되었다. 레이건 대통령 때는 비교적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 이후로는 경제적인 문제로 서로 마찰을 빚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은 안보상 긴밀한 협조국으로,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래 꾸준히 군사원조를 제공해 한국군의 현대화를 도왔고, 최신예전투기를 한국에 배치해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힘써왔으며 매년 한미합동의 팀 스피리트 훈련 등을 통해 양국군의 실전능력을 높이고 있다. 또 국교개설 이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고 아이젠하워·존슨·포드·카터·레이건·부시·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양국 간의 당면문제를 협의했다.
2000년대에는 2010년 4월에 이명박 대통령의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2016년 3월에 박근혜 대통령의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방미했으며, 2017년 6월과 2018년 5월에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했고 2017년 11월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했다. 2018년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방미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한편 미국은 북한과 수교하지 않았는데, 한반도 비핵화를 논의하기 위해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1차, 2019년 2월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 북미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경제 원조와 무역
6·25전쟁 이후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원조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1961년초까지 한국경제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그뒤 현재까지도 무역·자본도입·합작투자 등 경제전반에 걸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1946~79년에 한국에 146억 81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에는 1960년대까지 제공한 무상원조 47억 원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1980년 한미국제무역은 한국의 무역규모의 27%를 기록했으며 액수로는 46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은 미국의 국제무역 상대국으로서 5번째 주요수출국이자 8번째 주요수입국이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과 더불어 미국의 원조를 많이 받은 나라 중의 하나로 1962년까지 상당한 액수의 무상원조를 받았으나 그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타성 때문에 오히려 경제적 자립의욕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2년 무상원조가 끊어지고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경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쌍무적 무역시대로 전환되었다. 한국의 대미수출은 1973년 10억 달러를 돌파한 이래 1984년 100억 달러, 2000년 300억 달러, 2004년 400억 달러를 넘어서는 꾸준한 증가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수출감소세가 나타나기도 했으나 2010년 이후 경기회복이 진행됨에 따라 한국 수출은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5년 기준 수출액은 698.3억 달러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1998년 이래 한국 측의 흑자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2021년 기준 미국은 한국의 2대 교역국이며, 한국은 미국의 6대 교역국이다. 한국의 대미국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기기, 석유제품이며, 수입품은 반도체, 반도체 제조용 장비, 항공기 및 부품 등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의 대미국 수출액은 959억 196만 달러이며, 대미국 수입액은 732억 1,341만 달러이다. 한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뉴욕, 댈러스, 디트로이트, 시카고, 워싱턴, 실리콘밸리, 애틀랜타에 상설무역관을 설치했다.
1968년부터 2018년 9월까지 한국의 대미국 투자 누적금액은 1,028.9억 달러로 한국의 전체 해외투자에서 23.1%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1962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의 대한국 투자 누적금액은 345억 달러로 같은 기간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6.4%에 이른다. 2006년 6월에 협상 개시된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은 총 8차례의 협상을 거쳐 2007년 4월에 협상이 타결되었다.
한국인의 미국이민
한편 한국인의 미국 이민 역사는 그 뿌리가 깊은데 1885년 서재필(徐載弼)을 비롯한 한국인의 이민이 처음 실시된 이래, 유학생 및 노동자의 이민이 행해졌다. 1902년에는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121명이 도미하는 등 1905년에는 한국인 이민자가 7,000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주춤했던 이민은 6·25전쟁 이후 날로 증가했다. 1965년, 미국이 개정된 이민귀화법에 따라 아시아인에게도 이민의 문호를 열었고, 그 후로 매년 꾸준히 이민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1996년 184만 9,108명이었던 한국의 재미교민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7년 249만 2,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캘리포니아·로스앤젤레스·뉴욕·시카고·호놀룰루 등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정치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미국의 연방이민서비스국(USICS)에 따르면, 2013년 회계연도 동안 2만 3,166명의 한국인들이 미국영주권을 취득했다고 한다. 대다수의 이민자는 직장·투자를 위한 이민이고, 한편으로는 자녀의 영어 조기교육을 위한 교육이민도 증가하고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양국 간 민간 차원의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정부 차원으로는 1979년에 뉴욕,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2010년에 워싱턴에 한국문화원이 개원해 미국 현지에서 한국문화를 알리고 양국 예술인의 인적교류를 활성화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는 서울, 대구, 부산에 미국문화원이 개원되어 있어 미국의 문화·예술 홍보 및 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미국에는 한글학교 953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과 미국인의 한글교육에 이바지하고 있다. 인적 교류 또한 활발하여 2021년 방한 미국인 161,256명, 방미 한국인 약 669,464명에 이른다. 1977년에 미주한인회총연합회가 창설되어 한인사회의 발전과 권익보호를 도모하며 한국의 우수한 문화, 예술 소개를 통해 국위를 선양하는데 기여하고 있고 아울러 양국의 이해와 친선을 증진하고 있다. 2021년 기준 미국에는 2,633,777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한국에는 2021년 12월 기준 28,761명의 미국의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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