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향 따라 추억이 솔솔
김미숙
주천으로 캠핑을 가는 길이다. 길가에 늘어선 아카시아 꽃이 뽀얗고 앙증맞은 자태로 손을 흔든다. 맑은 날씨가 무색하게 저녁엔 엄청난 양의 비가 온다는 예보다. 비가 올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다리 밑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갈돌이 펼쳐져 있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테이블과 의자를 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물을 올릴 때쯤 둘째딸과 남자친구도 도착했다. 우리는 라면을 먹으며 “정말 맛있다”를 연발했다. 맑고 깨끗한 자연이 입맛도 되돌려 놓는 것인지 자연 속에서 먹는 라면은 몇 곱절 더 맛있다. 특히 라면의 느끼함이 느껴질때쯤 먹는 김치는 언제나 감탄사를 자아낸다. 다 먹은 후 정리를 하고 물가로 갔다. 잔잔하게 흐르는 넓은 강물을 보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납작한 돌을 찾기가 무섭게 물수제비를 던졌다.
강가에 있는 돌을 징검다리 삼아 걷다 보니 둘레길이 보였다. 배도 부른데다 강가에 펼쳐진 그 길을 걷고 싶어 발길을 옮겼다. 입구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술샘공원’이라는 팻말이 있는 작은 공원이 나오고, 우리가 가려고 하는 길은 오른쪽에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딸과 남자친구는 황토로 된 섶다리가 보이자 그곳이 예쁘다며 그쪽으로 가고, 우리는 가던 길을 갔다. 길가에 심어놓은 삼나물이 진초록의 푸름을 선사하고 크게 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어 마음속까지 시원했다. 나무를 이용한 계단과 야자매트로 만든 길을 지루할틈 없이 걷다 보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전에 차가 있는 곳으로 가기위해 발길을 서둘렀다.
많이 걷고 뛰어서일까. 출출함이 몰려왔다. 숯을 피우고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숯과 어우러져 풍기는 삼겹살 냄새는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도 못한다. 삼겹살이 거의 익어 갈 무렵 불판 가장자리로 등갈비를 죽 늘여 놓았다. 부드러운 삼겹살을 다 먹어 갈 때쯤엔 쫄깃한 등갈비도 맛볼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김치. 길쭉한 묵은지를 화로에 올려놓는 순간 ‘치지 직’하는 소리와 함께 시큼하고 얼큰한 향이 콧속을 자극한다. 김치의 시큼한 향은 고기의 느끼함을 제거하고 또 한 번 식욕을 불러온다. 시간이 가도 김치의 향은 뇌에 각인된 모양이다. 어김없이 옛 추억을 이끌어 오니 말이다.
때는 바야흐로 35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사회시간이었다. 수업이 한창이던 그때 갑자기 ‘펑’하는 소리가 교실의 정적을 깼다. 칠판에 글을 쓰시던 선생님이 획 돌아보며 “누구야?”하고 소리치셨다. 범인을 잡으려는 형사의 눈빛으로 교실 안을 빙 둘러보시던 선생님과 내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저 아니에요. 벽에서 소리가 났어요.”하고 억울하면서도 주눅 든 소리로 말했다. “벽에서 무슨 소리가 나”하고 의심을 풀지 않은 선생님은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시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얼마나 무서운지 ‘뿅’하고 사라지는 마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옥 같은 그 순간, 시큼털털한 냄새가 온 교실에 스멀스멀 퍼졌다. “이거 무슨 냄새야? 누가 도시락 까먹었어?”하고 선생님은 더욱 화난 얼굴로 눈을 부라리며 교실 전체를 둘러보셨다. 아이들은 모두 죄인인 양 고개도 못 들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모두 가방 열어봐.” 하며 수업 중 갑자기 도시락 검사가 시작되었다. ‘잡히기만 해봐라’하는 식의 집요한 선생님의 검사가 시작되었지만, 다행히 아무도 밥을 먹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검사에서 빠진 가방이 하나 있긴 했다. 내 뒤에 앉은 B의 것이다.
그 친구는 지난밤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병원에 가고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그녀의 가방도 열어 보았다. 순간 “어머나”하는 비명을 지르며 가방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자리에 앉아!” 하는 선생님의 불호령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가방 속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다. 빨간 김칫물이 교과서며 노트며 가방 안쪽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고, 군데군데 김치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회과목을 가르치면서 우리 담임이기도 했던 선생님은 “가는 연탄가스로 입원하더니 여도 가스폭발을 시켰네." 하는 한마디로 그날의 사건은 막을 내렸다. 오늘처럼 시큼한 묵은지의 향을 맡을 때면 영락없이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모든 음식이 귀하던 그 시절, 김치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반찬이었다. 봄엔 겉절이 형태로 만들어 먹고, 여름엔 시원한 물김치로 만들어 먹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을 대비해 김치를 담아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먹었다. 지금은 한겨울에도 배추뿐만 아니라 각종 야채를 살 수도 있고 김치를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직접 담근 김치의 맛을 따라 올 수는 없는 듯하다. 힘이 들지만 김장김치를 직접 담그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치의 진정한 맛을 잘 모르던 아이들도 이제는 내가 담근 김치가 맛있다며 꼭 챙겨간다. 작년 김장때 도와주지 않은 것이 미안했던지 올 겨울 김장때는 도와주고 많이 가져간단다.
미국 헬스 지는 세계 5대 건강식품으로 스페인의 올리브유, 그리스의 요구르트, 일본의 낫또, 인도의 렌틸콩과 함께 우리나라 김치를 선정했다. 김치는 맛도 좋지만, 영양 면에서도 월등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결과이지 싶다. 일본 사람에게 “매일 낫또를 먹느냐?”는 물음에 “아니, 안 먹어. 그럼 한국 사람들은 매일 김치를 먹느냐?”고 묻자 “응, 우리는 매일 먹어”하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 탄생한 김치,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자랑스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