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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겸손, 인간존중과 성도 상호간의 권면의 의무 및 용서에 대한 말씀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공생애가 2년여 경과되어 십자가 수난은 1년 앞으로 다가왔고 또한 이미 당신의 메시야직 및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대하여 밝힌 A.D. 29년 초의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특히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제자(disciple) 상호간 곧 성도(Saint) 상호간에 마땅히 가져야할 자세인 겸손과 사랑에 관련된 여러 측면의 교훈을 한데 묶어 제시하고 있는 장이다.
1-4절은 성도가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원래 죄인이었으나 택함받고 구원된 자로서 가져야 할 기본자세인 겸손을, 5-14절은 인간 모두에 대한 편견과 차별없는 존중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 약속을, 15-20절은 성도가 자신보다 연약한 자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의 하나로서 형제가 실수하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권면할 것을, 그리고 21-35절은 성도 간에 갈등이 야기되었을 때 먼저 자신 같은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명령을 따라 이제 우리도 그 사랑을 실천하여 결국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동참하기 위하여 용서를 베풀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상 본장 각 단락의 말씀들은 그 자체가 정언명법(定言命法)으로 구속사의 은혜에 함께 동참할 성도 상호간의 바른 관계에 대한 교훈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본장을 구속사적으로 개관할 때에 각 문단의 내용 자체보다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이처럼 성도와 성도 곧 인간 상호간의 겸손과 사랑을 지시하신 전체적 뜻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필연적으로 수직적 관계를 맺는다. 한편 나 이외의 이웃이나 다른 피조물들도 필연적으로 한분 하나님에 의하여 함께 창조되었다. 그리고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서로 어울려 살도록 섭리하셨다는 점에서 인간은 나 이외의 이웃이나 다른 피조물들과도 수평적 관계를 갖는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피조물들을 대할 때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피조물에 대한 자세가 곧 이를 지은 창조자에 대한 자세이기도 하다는 것을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교훈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규정하시기도 하셨다(히 6:10). 그러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웃이나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으며 또 그들을 대할 때 그들을 우리와 함께 창조하신 여호와의 뜻을 기억하고 나아가 그들을 대하는 자세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는 물론 이웃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수평적 관계에서도 바른 관계를 가져야만 온전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구속사의 시초부터 구속사의 완성인 천국에까지 영원한 구속사(救贖史)의 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여러 기회와 여러 모양으로 주신 형제 사랑(살전 4 : 9) 및 형제에 대한 바른 자세의 교훈에 담긴 목적과 섭리를(롬 13:8) 깨달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는 동일한 심정으로 이웃 및 여타 피조물과도 바른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할 것이다.
외울 말씀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어린이와 같은 신앙의 요청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소자 하나에게까지 임하는 주의 절대적 사랑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형제 사이의 권면과 합심 기도
15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용서에 대한 교훈과 비유
21 ○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 - 18:1-4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눅 18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18:1-10 천국에서 큰 자
본장은 천국 시민된 자의 자세에 대한 예수의 강화(講話)이다. 그중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과 100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는 모두 천국 시민 된 자의 자세에 대한 교훈 중 어린아이와 관련된 가르침들이다. 이 가르침들은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 대답으로 나온 가르침들이다. 이에 그 교훈들을 정리해 봄으로써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에서 큰 자'란 어떠한 자인지 살펴보자. 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4절)
1.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4절)
여기서 어린아이처럼 겸손해야 된다는 말은 어린아이 자신이 무슨 대단한 겸양지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본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린아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거나 인정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천국 시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해야 함을 교훈하는 것이다.
2. 어린아이 귀히 영접하는 자(5절)
어린아이가 천국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여 그를 무시하고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마음은 곧 자신을 크게 생각하는 교만함과 연결되며,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방법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3. 어린아이에게 본이 되는 자(6절)
어른들의 교만함과 무절제한 행동, 그리고 어린아이를 업신여기는 태도 등이 곧 어린 소자들을 실족케 한다.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항상 순진무구하게 좋은 것만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어른들이 어린아이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어린아이가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들도 의미한다고 볼 때 이 말씀은 믿음이 연약한 자에 대한 먼저 믿은 자의 자세를 교훈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소자 하나라도 끝까지 보살피는 자(12-14절)
어린아이는 항상 엇길로 가거나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그리고 한 번 엇길로 가기 시작하면 돌이켜 올바른 길을 찾아올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에게는 항상 그를 세심히 보살피고 인도해 줄 보호자와 인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일을 외면하고 소홀히 하는 것 또한 천국 시민으로서 합당치 않은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하여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심정으로 항상 약한 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본을 보임으로 실족케 하지 않는 자인 것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 빌어 오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 2:3,4)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인 것이다.
주요주제-18:3,4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자료 참조
원어연구-18:4, 낮추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 이노오'( )의 본래의 의미는 '평평하게 하다', '평지로 만들다(눅 3:5)이다. 즉 이것은 울퉁불퉁한 땅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불쑥 올라온 언덕을 깎아 낮은 골짜기로 끌어내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은유적으로 '비천한 상태로 떨어뜨리다', '더 천한 환경으로 몰아넣다'라는 의미가 생겨났다.
일반적인 용례에 있어서 이 용어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그리고 권력이나 부(富)가 없는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노예같이 비굴하다'의 경멸적인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때로 이 단어는 윤리적 및 종교적 문맥에서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때 이것은 '비천한'을 의미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다', '겸비하다'와 같은 긍정적인 자세를 지칭한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 단어가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겸손한 자들을 지칭하기도 한다는 것은, 곧 당시 종교적으로 겸비한자들과 사회적으로 비천한 자들이 상당히 일치함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어원의 본래 용법들을 볼 때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낮춤'은 단순한 미덕으로서의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노예와 같은 비천한 자리로까지 낮아져서 자신의모든 이익과 권리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자세이다. 뿐만 아니라 종의 신분으로서 절대적인 섬김과 봉사를 이행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예수는 이와 같은 겸손의 본이 되셨다(빌 2:8; 약 4:10). 더욱이 그는 부활 승천하시어 높아지심으로써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리라는 그의 말씀의 진실성을 직접 보여주셨다(마 23:12).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겸손'(타페이노프로쉬네 )으로 허리를 동이고(벧전 5:5),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겠다(빌 2:3).
보감 - 18:21-35 용서에 대한 교훈
기독교는 실로 용서의 종교이다. 먼저 수직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의 모든 죄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까지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수평적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형제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용서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만약 이 용서의 정신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결코 구원의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이 용서를 나의 인간적 생각에서가 아니라 신앙 인격으로 행해야 할 것이다.
1. 먼저 형제와 화목한 뒤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라(마 5:24)
2. 원수까지라도 용서하라(마 5:44)
3. 주께 용서 받기 원하면 남을 먼저 용서하라(마 6:12-15)
4.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
5. 형제를 중심(中心)으로 용서하라(마 18:35)
6. 기도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막 11:25)
7. 네 형제가 회개할 때 용서하라(눅 17:3,4)
8. 용서 위에 위로를 더하라(고후 2:7)
9. 하나님이 용서하심 같이 용서하라(엡 4:32)
10. 용서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3,14)
보감 - 18:12-14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
1.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1:21)
2. 성령과 불로 세례 주시기 위하여(3:11,12)
3.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하여(5:17)
4.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9:10-13)
5. 하나님 아버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11:27)
6.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과 심판을 알리시기 위해(12:18)
7.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16:18)
8.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18:12-14)
9.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20:28)
10. 많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하여(26:28)
도표 - 18:23-34 예수님의 비유들
본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참조
보감 - 18:35 형제를 용서하는 자의 유익
1. 보복당하지 않음(잠 24:29)
2. 하나님의 상을 얻음(잠 25:21,22)
3. 성도로서의 온전함을 이룸(마 5:48)
4. 하나님께 자신도 용서받음(마 6:14)
5. 하나님께 기도가 상달됨(막 11:25)
6. 진정한 화평을 이루게 됨(롬 12:18)
7. 성도 간의 교제가 회복됨(고후 2:7)
8. 타인에게 자신도 용서 받음(엡 4:32)
9. 마음에 감사 찬양이 있음(골 3:16)
10. 주의 심판 때 긍휼을 얻음(약 2:13)
18:1-14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
본장은 마태복음 5대 강화 중에서 네 번째 강화에 해당된다.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마태복음의 주제별 구성 원칙'을 참조하라. 여기서는 예수께서 천국 시민의 성품에 관해 교훈하고 계시는데, 겸손과 용서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지녀야할 도덕적 품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한편 본문은 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 예고(마 16:21-28; 17:22,23)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세적 권세욕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는 성전세 납부를 통해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겸손(마 17:24-27)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우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만 한다고 교훈하셨다(1-4절). 아울러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해서는 안 된다는 것(5-9절)과 소자 한 영혼의 중요성(10-14절)을 교훈하고 계시다.
결국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메시야의 지상 왕국에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고 있던(눅 9:46) 제자들에게, 오히려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막 9:33-35).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목적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보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막 9:35).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을 사도로 세우신 목적을 잊어버린 채, 각자 헛된 욕심에 이끌려 서로 다투었다. 만약 스스로를 복음의 일꾼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거룩한 소명을 잊어버리는 자가 있다면, 장차 그는 하나님의 엄한 책망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성도들은 소외 당하고 천대 받는 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바쳐 그들에게 봉사해야 된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무시당하는 존재에 불과했던 어린아이를 천국 시민의 표본으로 제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실족케 만들지 말라고 교훈하셨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를 귀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성도들 역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쏟지 않을 수 없다.
③ 성도들은 죄악과 불의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예수께서 범죄의 도구로 사용되는 신체의 일부를 차라리 잘라 버리도록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과감하고 단호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이다(8,9절). 성도들은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여 기회만 있으면 죄악과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함으로써(롬 7:21-24), 자신을 범죄와 불의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일체의 요소들을 미리 제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시 26:4,5; 히 12:1).
18:1 그때에. - 이 말은 어떤 특정 시기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막연한 때를 가리키는 말로(마 11:25 주석참조), 마태가 문장 또는 문맥의 전환을 위하여 사용했던 시간적 부사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는 추정할 수 있는 바 마 17장과 관련하여 성전세에 관련한 논쟁이 있었던(마 17:24-27)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계실 때이다(막 9:33). 이 때는 예수께서 제3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 지경으로 들어가신지 얼마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마 19:1). 사복음서 개론, 4복음서 대조표 참조.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 본절에서 제기되는 제자 질문과 관련한 기사는 막 9:33-50과 눅 9:46-50에도 병행되고 있다. 마태는 여기서 '누가 크냐'라고 하는 질문을 제자들이 예수께 제기한 것으로 기록하지만, 마가는 해당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던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제자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논쟁은 필경 마 16:24-26의 제자도의 본질을 곡해했거나 망각한 데서 비롯된 부끄러운 다툼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 같은 부끄러운 이권 다툼을 벌렸던 제자들이 예수께 이 질문을 먼저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께서 제자들 사이에 있는 '누가 크냐'에 대한 논쟁을 아시고, 여기에 관해 질문을 하셨고, 제자들 중 한 명이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여간 '천국에서 큰 자'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은 아직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논쟁의 촉발은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로 보았던 까닭에서이다. 즉 예수를 단순히 정치적 메시야로만 오해한 제자들은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님의 격찬을 받고(마 16:16), 세 제자만이 뽑혀 변화산상에 동반했으며(마 17:1), 납세 문제에서 베드로가 대표격이 되자(마 17:23-27) 마음속으로 예수께서 다스릴 영광스런 나라에서 과연 누가 큰 자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고, 이제 임박한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을 목전에 두고 논공행상에 따른 자신들의 서열을 정해야 할 필요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전까지 말씀하셨던 두 차례에 걸친 수난 예고(마 16:21; 17:22)를 가볍게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 사업을 성취하신다는 말씀을 바로 이해했더라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는 다툼이나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8:2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 예수님을 정점으로 한 정치 세력화를 꿈꾸던 제자들의 자리 다툼은 또 한 번의 교훈을 필요로 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직접 한 어린아이를 본보기로 삼아 교훈을 시작하시는데, 이 같은 교수법은 마 6:25-28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즉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주위의 적절한 환경들을 예로 들어 시청각적 교육을 하신 것이다.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는 본 구절에서 등장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 전달을 주는 훌륭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세와 위엄을 이용한 폭압적인 지시와 같은 방법의 지식 전달을 지양하고 피교육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보고, 듣고자 하는 흥미를 유발시킬 수 있는 시청각적 소재를 사용하시는 등 매우 자상한 방법을 동원하셨다. 이 같은 예수님의 교육 방법은 오늘날의 교회가 진리 전달을 함에 있어 일방적인 선언과 더불어 적절한 교육 수단을 개발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14절까지는 일명 '어린아이 교훈'으로 불리는 부분이다. 물론 이는 어린아이를 위한 교훈이 아니라 어린아이를 통한 어른들을 위한 교훈이다.
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교만한 생각을 아시고 먼저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촉구하셨다. 여기서 '돌이켜'(스트라페테)라는 단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공적과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장차 수립될 새 정권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할 날만 대망했던 속물들이었는데,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정한 이치로 여기고, 그 이후의 지위에 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제자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은 천국이 자신들에게 이미 보장된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에게는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어린아이'는 천진무구함이나 순결함의 이상형으로서가 아니라 본질상 연약하여 혼자 힘으로서는 살 수가 없고 부모에게 절대 의지해야만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복하며 그 분만을 의지하려는 믿음과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지나치게 내세우려 않는 겸손함, 그리고 가르침에 대해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단순성의 이상형으로 제시되고 있다(Calvin, Clarke, Carson).
18:4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 이 구절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공적을 배경으로 천국에서의 서열을 주장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척도로 우선순위를 정하셨다. 이런 교훈은 이미 마 16:25절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즉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한 말씀과 동일한 맥락을 이루고 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의 행위는 예수님보다는 자기 목숨만 위하는 처사로서 결국 자기 목숨도 잃어버리는 공멸의 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세상은 능력과 처세술을 필요로 하지만, 천국은 오직 겸손만을 요구할 뿐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낮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노오'( )는 '내리누르다', '아래로 이끌다', '굴욕을 주다'라는 뜻으로, 철저한 자기 비하를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천국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철저히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 준다(눅 14:11; 빌 2:3-8; 벧전 5:6)
18:5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 여기서 어린아이는 문자 그대로의 나이가 어린아이일 수도 있고(Bengel, De Wette, Weiss),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미천한 신분의 성도일 수도 있다(Calvin, Clarke, Bruce). 어떤 경우이든지 형제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랑으로 영접하는 것은 천국 시민의 도리일 것이다.
18:6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 '실족케 한다'(스칸달리세)라는 단어는 '넘어지게 하다'(마 6:23) 혹은 '오해케 하다'(마 17:27)라는 의미로, 본절에서는 순수한 신자를 유혹하여 그 믿음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 - 연자 맷돌(뮐로스 오니코스)은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과는 달리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을 말한다. 이처럼 규모가 큰 맷돌을 목에 매어서 바다에 빠뜨리는 사형법은 부모를 살해하거나 사회를 문란케 했던 자에게 가했던 로마 형벌의 하나로 유대인의 법률에는 없었기 때문에 유다 사회에서의 그 실행 여부는 의심이 가지만, 아무튼 이 말씀은 연약한 성도들을 절대로 실족케 하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거듭 강조하는 말임에는 분명하다.
18:7 세상에 화가 있도다. - 본 구절에서는 실족을 당하는 사람과 실족케 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재앙을 동시에 설명하는데, 그 중 이 부분은 전자의 경우에 관한 것이다. 비록 실족의 원인 제공은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있지만,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일 것이다. 누룩이 반죽해 놓은 온 밀가루에 퍼지듯이 죄의 오염성은 삽시간에 믿음이 여린 성도들을 미혹케 할 것인데, 이에 대한 경계가 특별히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오직 주의 법을 사랑하는 데만 있을 뿐이다(시 119:165).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 이것은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을 합리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실족케 하는 경우와 원인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한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심판의 완화나 경감을 위한 변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본 구절은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실족케 되는 경우를 암시한다는 견해가 있으나(Stier)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 본절과 9절은 마 5:29,30의 산상 수훈과 중복되는 말씀이다. 산상 수훈에서는 7계명인 간음죄와 관련해서 쓰였고, 여기서는 실족케 하는 경우와 연관되어 쓰였다. 이는 여기서는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스스로 실족케 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이다.
찍어 내버리라. - 이 구절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된 속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실제로 문자적인 해석을 요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를 범한 것 때문에 신체 부위를 잘라 버린다면, 살아남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지체를 제거한다고 해도 죄의 뿌리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악한 생각과 죄의 유혹이 자리 잡고 있는 부패한 마음의 상태를 척결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18:9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 여기서 '지옥 불'은 8절의 '영원한 불'과 같은 의미다. '지옥불'에 대해서는 마 5:2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곳에 관한 설명은 막 9:48,49에서 매우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는 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고,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는 곳이다. 이곳은 사람이 만약 자신의 지체인 손과 발 그리고 눈을 가지고 실족케 하는 일에 동원될 때 그 심판의 장소가 되는데, 이는 성도들의 윤리가 매우 엄격해야 함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습관적인 죄를 묵인하거나, 후일의 성화의 과정에서 해결될 문제로 미루는 경향들은 천국과 지옥의 양 칼 날 위에서 한 편에로의 선택을 강요하는 엄격한 성경적 윤리관에 비추어 본다면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성도들로 하여금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태도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조금이라도 방해하는 인본주의적 사조들과 비도덕적 경향들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18:10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 '소자'(미크로이)가 어린아이들만을 지적한다는 견해는 너무 편협적이다. 지금까지 계속된 예수님의 교훈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고 하는 제자들의 논쟁에서 촉발되었던 점을 상기해 볼 때, '소자'는 '가장 큰 자'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물론 이 범주에 연령이 낮은 어린아이가 포함될 수 있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고, 더 나아가 항상 겸손하고 영적으로 순수한 심정을 지닌 사람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소자(겸손한 자)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태도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6절에 이어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시는데, 이는 항상 큰 자가되려는 자들이 흔히 범하는 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저희 천사들이…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소자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에 대한 이유를설명해 주고 있는 구절이다. 즉 그것은 세상의 기준에 의하면 아주 부족하고 연약한 소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이들을 보호해주는 수호천사들을 파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적 세계의 일면을 소개하셨는데, 이 수호천사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 또한 지지하고 있는 바, 성경은 개인(행 12:15)뿐 아니라 교회(계 1:20), 국가(단 10:13; 12:1)를 위한 수호천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천사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천사론' 부분을 참조하라. 아무튼 소자를 특별히 보호하는 수호천사는 하나님을 알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데, 이것은 소자 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잘 보여 준다 하겠다.
8:11 일부 사본에는 본절에 눅 18:10과 같은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함이니라'는 말이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에는 본절이 생략되어 있다. 추측컨대 본절이 눅 19:10의 내용과 동일하다고는 하지 않을지라도 소자의 존귀성을 설명하기위한 서언적 내용이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18:12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 이는 소자 하나에 대한 소중함을 설명하기위해서 동원된 비유이다. 이 비유는 눅 15:4-7에 더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이와 유사한 비유는 겔 34장에도 나타난다. 아무튼 이 비유는 일백 마리의 양들 중에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어버린 데서 발단이 되는데, 이 상황에서 목자로 추정되는 어떤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비유의 극단적인 측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고이 보호할 만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특히 산에(에피 타 오레)라는 단어에서 동작 전치사 '에피'( )는 남은 양떼들이 산위에서 방황하며 흩어지는 상태를 보여 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인해 몹시 안타까와하면서 미처 남은 양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목자의 행위는 합리적인 손익 계산에 따른 평가에서 볼 때 어리석은 행위로 취급받을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경영의 합리성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다만 목자의 잃은 양에 대한 애착을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택한 성도라면 어느 한 영혼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특히 본 비유에 소개되어 있는 목자의 마음가짐은 오늘날 양적 팽창에는 몰두하면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살피지 못하는 목회자들에게 목회의 진정한 의의가 무엇인지 보여 준다 할 것이다.
18:13 만일 찾으면. - 이 말은 역설적으로 양을 찾지 못할 수도 있음을 내포한 말이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한 자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는 다만 성도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길로 갔다가 하나님을 외면한 채 자기 뜻대로 행할 경우 하나님도 그를 외면하시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돌이키는 자는 어떠한 댓가를 치루고서라도 찾으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가 있는 까닭에 우리는 범죄 중에도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 이는 잃었다가 찾은 양을 다른 양보다 더 귀히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 큼을 말한 것이다.
18:14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 본절은 '잃은 양'을 비유에 대한 결론으로서, 아무리 미천한 소자라 할지라도 실족케 하여 신앙의 길을 떠나게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세상의 법칙은 '적자생존'이나 '만민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같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허용하거나 진작시켜 약한 자에 대한 도태를 합법화하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교만한 자가 아닌 겸손한 자를, 강한 자가 아니라 연약하여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세상의 생존 논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진리인 반면, 기독교의 생존 논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이라 하겠다(약 4:10)
18:15-20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훈
전 단락에서 어린 아이를 통해 겸손과 소자 한 사람의 중요성을 교훈하신 예수께서 (1-14절)는 이제 본문에서는 성도가 자신에게 범죄한 자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교훈하고 계시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8,9절)와는 달리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단계적이고도 신중한 조처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즉, 성도들은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는 과감한 조처를 취해야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까지 함부로 비판하고 경솔하게 대처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 언급되는 형제의 범죄에 대한 3단계 처리 방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 1단계는 범죄한 형제를 개인적으로 만나서 회개를 권면하는 것이다(15절). 이것은 가급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기 위한 조처이다. 제 2단계는 두 세 명의 증인과 함께 다시 한 번 회개를 권면하는 것이다(16절). 이것은 신 19:15의 규정을 적용한 것으로서, 이 권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공적인 입장인 교회가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두 세 사람의 법적인 증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 3단계는 교회로 하여금 권면하게 하여 범죄한 자가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도록 이끄는 것이다(17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지니는 권세로 죄악을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조처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3단계 처리 방안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개치 않는 자가 있다면 불신자와 똑같이 여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일깨우고 있다.
①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성급하게 비판하거나 함부로 정죄하자 말고, 설혹 그 사람의 잘못이 명백히 드러날지라도 오로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개를 권면해야 된다(마 7:1-5; 벧전 4:8). 만약 사랑의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에서 형제의 허물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키게 될 뿐이다.
② 비록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로 이루어지는 교회라 하더라도, 갖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아직 완전히 성화(聖化)된 것은 아니므로 얼마든지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롬 8:18,19).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 안에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신앙적인 회의에 빠지거나 아예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권면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③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침해당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지상 교회가 불완전함을 지닌다고 할지라도, 명백히 밝혀진 성도의 죄악에 대해서까지 묵인하거나 방관해서는 안 되며, 예수께서 위임하신 권세로 적절한 권징을 행사함으로써, 반드시 그리스도의 신부다운 거룩함과 순결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빌 2:15; 21:22:14: 5:21:2).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 본 구절부터 20절까지에서는 다른 형제가 자신에게 범죄했을 경우에 대한 처신 방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전 부분(1-14절)에서는 자신이 타인, 즉 소자 한 사람에 대해서 범죄했을 경우를 다루었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이런 전체적인 내용을 전제로 할 때 '네 형제가'와 '죄를 범하거든' 사이에 '네게'라는 단어가 들어간 벌게이트역(Vulgate)이 더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네게'라는 단어가 생략될 경우 본문은 타인이 범하는 일반적인 범죄까지도 다루는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이 개인에게 범죄하는 경우에 관해서는 구약의 율법에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자료는 레 6:2,3이다. 그런데 여기서 열거되는 개인적인 범죄는 재산권을 침해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고전 8:12에서는 약한 심령을 상하게 하여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들고 있다. 따라서 이런 범죄는 주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성격의 범죄라기보다는 개인 상호 간의 윤리적 성격의 범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 타인이 자신에게 범죄했을 경우 취해야할 규칙을 제기하는데, 그 중에 첫 번째 조치는 피해자인 자신과 가해자인 상대방과의 개인적인 면담을 통한 권면이다. 물론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성경은 가해자의 범죄가 피해자의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하여,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권면하는 것이다(레 19:17,18). 이 이웃 사랑의 첫 번째 조치가 가해자를 만나는 것이다. 이때 피해자인 당사자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는 자신이 당한 억울함과 분함을 해소하기 위한 일방적인 지적이나 자신의 정당성을 축적하기 위한 미온적인 노력의 제스처가 아니라, 화해를 목적으로 가해자의 잘못된 행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게 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 하겠다. 특별히 여기서 '권고하다'(엘렝코)라는 말은 '노출시키다', '빛으로 가져오다'라는 뜻으로, 단순히 '꾸짖다'(에피티몬)와는 구별되는 바, 죄에 대한 책망이나 심판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방이 죄를 깨닫도록 잘못을 시정해 주고 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 개인적인 면담을 통한 최종적인 목적은 범죄한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형제 관계를 복원하는데 있다 할 것이다. 이 첫 번째 조치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말을 듣는다면 피해자 자신에게는 신앙적 성숙의 기쁨이, 가해자인 상대방은 회개의 기쁨을 누리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 이 두 번째 조치는 신 19:15의 규례를 적용한 것이다. 범죄한 가해자가 피해자의 은밀한 권고를 수납하지 않고 계속적인 완고함을 드러낼 때, 예수께서는 두 번째 조처로 한 두 사람의 증인을 동반할 것으로 정하셨다. 이 경우에는 물론 피해자나 증인으로 동참한 사람들도 범죄한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도록 하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 같은 겸허한 권면을 범죄한 가해자가 체득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편 두 세 증인을 동반하는 이유는 이해관계가 없는 제 삼자의 입장이 문제 해결에 의외로 진척을 보일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과 더불어 만약 이 단계가 실패했을 경우 공적인 입장인 교회가 개입되는데, 이때 이들은 법적인 증인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 교회의 공식적인 개입은 앞서 말한 두 번의 조치가 실패했을 경우에 한해서이다. 한편 여기서의 '교회'를 유대교의 회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Pulmmer), 실제로 교회가 이 같은 범죄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과 당위성을 가졌던 전례를 미루어볼 때(딤전 1:20) 성도의 교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Calvin, Bengel).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 교회 권면의 최후 조치이다. 이때 교회는 범법자의 잘못의 시인과 회개의 여부에 따라서 합당한 권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만약 범법자가 교회의 권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를 이방인 또는 세리와 같이 취급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여기서 이방인이나 세리는 당시 유대인의 모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자들로, 본절에서는 신앙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는 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결국 예수의 말씀은 교회의 권징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완악하게 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추방하라는 말이다. 하여간 이 같은 교회의 조치는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가시적 교회를 정화하는데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반드시 행해져야만 할 것이다.
18:18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 이 구절은 교회의 권징에 대한 신적인 합법성을 보장해 주는 부분이다. 물론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마 16:19)과 동일하다. 그러나 여기서 이 권세가 교회에 속한 것임을 볼 때, 이것이 베드로 개인에게만 부여되었다고 주장하는 카톨릭측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가 진리에 근거한 권징을 행했을 때, 이 판결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신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행한 근친상간한 성도에 대한 권징의 예(고전 5:1-5)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적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성도들이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다. 첫째, 이 구절이 단지 범죄한 사람에 대한 권징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푸는 일', 즉 그가 회개할 때 교회의 일원으로 수납하는 일에까지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가 권징을 인내 가운데 행사했듯이, 용서 또한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사랑으로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권징이나 사면의 권한은 한 개인이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교회의 회중이 진리에 기초한 절차와 방법을 통해서 행사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권한을 독단적으로 개인이 행사하는 것은 성경에서 결코 용납된 것이 아니며, 이는 어린아이에게 면도칼을 쥐어 준 것과 같이 위험천만의 일이 될 것이다.
18:19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 흔히들 이 구절을 합심 기도의 능력에 대한 신적 인준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합심 기도에 대한 성경의 권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 구절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이 구절은 교회의 권징에 대한 사려 깊은 행사를 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회의 권징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은 것과 동일한 권한과 특권을 가진다. 따라서 이것은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기도를 필요로 한다고 하겠다. 즉 교회가 행사하는 권징이 믿음의 형제들의 합치된 의견이 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과 합치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두 사람'이 전제되는 것은 어떤 개인의 독단적이고 인위적인 결정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뜻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단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이 구절 또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일치성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주는 말씀이다. 따라서 전절(19절)이 교회가 권징을 행하기 전에 신적 뜻의 지상적인 표현인 할식기도를 반드시 선행해야 할 것에 관한 말씀이라면, 본 구절은 다수의 성도가 일치된 뜻을 가지고 합심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근거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사실 세상의 모임은 서로의 필요와 이익이 보장되는 기반위에서 유지되기 때문에 항상 자기 보호와 이익의 확대로 인해 이해가 상충될 때면 서로 분열하여 갈라서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워졌고, 그의 영이 항상 지속적으로 임재하여 성도들이 하나로 연합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교회는 항시 기쁨이 충만할 수밖에 없으며 일치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18:21-35 용서에 대한 교훈
천국 시민의 성품을 주제로 하고 있는 본서의 네 번째 강화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본문은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소개한다. 즉 바로 앞단락(15~20절)에서 형제의 범죄에 대해 신중하고도 단계적인 조처를 취하도록 말씀하신 바 있는 예수께서는 이제 그 모든 조처의 근본정신이 사랑과 용서에 있음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당시의 유대 랍비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적어도 3번까지는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일번씩 일곱 번, 즉 무한한 포용력을 가지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신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다른 사람의 잘못을 여러 번 용서한 바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실을 기억조차 하지 말고 끊임없이 용서해야 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와 같은 끊임없는 용서는 결코 인간 스스로의 본성과 의지로는 실천 불가능한 일이며, 다만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에 근거할 때에 비로소 실천 가능한 일이다. 본문에 언급된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용서에 대한 교훈으로 말씀하신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① 이웃에 대한 용서와 사랑은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왜냐하면 친히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죄악을 용서 하시고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요일 4:19-21).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주인에게 자비를 구하는 길 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의 빚을 그의 크신 긍휼과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하게 하시고 용서해 주셨다. 정녕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죄의 은총과 비교할 때, 도무지 성도가 용서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죄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자이거나 아니면 체험했다 할지라도 이를 망각한 자라고 할 수 있다.
② 사랑과 용서는 죄악과 불의에 대한 묵인이나 방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회개를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며, 또한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죄악에 대한 묵인이나 불의에 대한 방관을 정당화시키는 구실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본문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무자비한 종'이 결국 주인으로부터 엄한 징벌을 받았다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점을 암시하고 있다(시 7:12; 눅 13:3; 고전 5:13).
18:21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 본 구절부터 마지막 35절까지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 비유로 소개되어 있다. 물론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이라 이해하더라도, 베드로가 왜 갑자기 형제 용서에 관한 질문을 했겠는가 하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15-20절까지에서는 전반적으로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회의 권징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격상 상반된 내용과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의 형제 용서에 대한 질문은 다소 돌출적인 요소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베드로의 질문을 본장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면, 이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할 수 있다. 본장의 서두는 천국에서 서로 크고자 하는 제자들의 야심에서 시작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주인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라는 언명을 통해서 큰 자가 되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일침을 놓으셨다. 그리고 항상 큰 자가 되려는 자가 범하기 쉬운 잠재적인 범죄로서, 연약한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경우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내리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소자 하나를 사랑하심이 너무도 지극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범죄한 형제에 대한 교회의 권징을 말씀하시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권징의 최종적인 목적이 징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형제의 돌이킴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비록 15-20절까지에서 범죄한 형제에 대한 권징의 절차를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절차가 항상 형제의 돌이킴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앞서 해당 주석에서도 살펴본 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전 단락(15-20절)조차도 믿음이 연약한 소자 하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표명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두고 볼 때 본장은 믿음이 연약한 소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용서에 관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같은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파악했던 베드로가 형제 용서의 한계성에 대해서 질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범죄한 형제에게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의도를 간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말씀을 잘 파악했던 베드로는 당시 랍비들 교훈에 나타난 용서의 한계인 세 번을 뛰어넘는 일곱 번의 용서를 제시했다. 아마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랍비들의 교훈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완전수인 '일곱 번'의 용서를 제안함으로써 자신의 관용의 자세를 뽐내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베드로의 이러한 제안은 당시 사회적 풍토 속에서 볼 때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요 비교적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관용의 정신은 '일곱'이라는 숫자에 제한되지 않고 '무한' 바로 그것이었다(22절).
18:2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 베드로가 자신 만만하게 제시했던 일곱 번의 용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하라는 예수님의 답변에 의해서 무색해지고 있다.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에 대해서는 그것을 490번으로 보는 견해(Alford, Grotius, Bruce)와 창 4:24에 나오는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칩배이리로다'라는 말과 관련시켜 77번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Meyer) 대체로 전자가 지지를 받고 있다. 아무튼 예수께서 제시한 용서의 횟수가 490번이 되었건, 아니면 77번이 되었든지, 그 의미는 끝까지 용서해 주라고 하는 의미이다(Wycliffe). 결국 베드로의 제안은 비록 당시 유대 사회에서 통용된 용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용서의 한계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사실 베드로가 설정한 용서의 한계는 엄밀히 말하면 범죄한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보다는 용서하고 있는 자신의 인내를 과시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이라는 수와 예수께서 대답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현격한 양적 차이가 주는 용서의 질적 차이에서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한편 예수님의 이와 같은 교훈은 범죄한 인간을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18:23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이 비유는 끝없는 용서를 베푸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매우 당연한 의무임을 보여 주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 여기서 이 비유가 천국으로 묘사된 것은 한없는 용서가 통용되는 그곳의 속성 때문이다.
회계하려 하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나라이 로곤'( )은 '투입량과 산출량을 검토하여 결산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종들과 임금 사이에는 애초에 일정한 계약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주인과 종들 사이에 회계하는 비유가 여럿 있는데(마 20:1-16; 25:14-30), 그것은 성도들이 말세의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18:24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 이 비유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이다. 여기서는 이 사람이 어떤 이유로 해서 빚을 지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생략되었는데, 아무튼 일만 달란트는 개인이 빚지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 왕국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 800달란트였다는 사실은(Josephus) 일만 달란트의 규모를 짐작케 해 준다. 또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해 금 3천 달란트를 준비했고(대상 29:4-7), 시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바친 금액이 120달란트였고(왕상 10:10),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부과했던(왕하 18:14) 사례들로 미루어 볼 때 일만 달란트는 일 개인이 빚을 지기에 너무도 과장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들의 죄의 심각성을 보여 주기 위한 비유로서, 이는 결국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요 우리의 죄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화폐의 단위에 대해서는 성경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를 참조하라.
18:25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비롯해서 가족들을 파는 것은 율법에 명시된 내용이다(출 22:3; 레 25:39,47; 왕하 4:1; 사 50:1; 시 44:12).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희년의 법을 통해서 가난한 채무자에게 부과된 이 같은 무거운 조치들에서 완화시켰던 점을 감안할 때, 본 구절의 조치는 율법적 조치를 넘어선 전제 군주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우리들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청산할 수 없으며, 본 구절과 같은 조치를 강구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18:26 엎드리어 절하며. -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만 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규모의 돈이다. 따라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임금에게 자비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겠다. 특별히 헬라어 원문은 본절을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에게 계속해서 엎드려 빌며 자비를 호소했음을 암시한다.
다 갚으리이다. - 물론 이것은 종이 이 많은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근거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임금의 조치를 완화해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해 보는 말일 뿐이다. 임금 또한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은 자명한 일이다.
18:27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주인인 임금은 종이 생각지도 못한 혜택을 베푸는데, 그것은 그 종을 방면했을 뿐 아니라 그가 진 빚까지도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가 범죄한 형제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를 설명하기 위해서 도모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용서해 주심을 나타낸다 하겠다. 즉 하나님이 죄인에게 원하시는 것은 공적을 쌓는 것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고(시 51:17),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사 1:18).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애초 살펴보았듯이 일만 달란트의 빚이 평생 갚을 수 없는 규모의 돈이고 보면, 그 종이 그 빚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주인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비록 그 종의 간절한 간구가 주인의 마음을 움직여 탕감 받았다는 통설적인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한다면, 용서하시는 하나님보다 간절히 매달리는 종의 공로가 주체가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본절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공로 없는 죄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18:28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빚을 갚으라. -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채무를 갚을 것을 요구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서, 백 데나리온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의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 돈을 받기 위해 그는 지금 동관에게 난폭하게 굴며, 협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 용서할 줄 모르는 인간의 완악함을 잘 보여 준다 하겠다.
동관. - 문자적으로 '같은 주인을 섬기는 자', '함께 종된 자'라는 뜻으로, 이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빛 진 자가 동료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8:29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은 그 채권자에게 자신이 빚을 갚을 수 있는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청원을 하고 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해 전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돈이 아니다. 만약 그 채권자가 동관에게 일정한 기간만 유예해 준다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분량의 돈이었다. 따라서 빚진 것을 갚겠다는 동관의 말은 그 자리를 일시적으로 모면할 요량으로 하는 무책임한 발언은 아니라 할 것이다.
18:30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 관대하게 용서받았던 그 종은 오히려 용서하는데 인색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는 자비를 구하면서도 형제에 대해서는 자비 베풀기를 싫어하는 완악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Bengel).
18:31 그 동관들이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그 채권자에게 억울한 처사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동료 동관들은 그 일을 자신들의 주인에게 상세히 고했다. 특별히 여기서 '민망하여'(엘뤼페데산)는 '고통하다', '슬퍼하다'라는 의미의 '뤼페오'( )에서 유래한 말로, 결국 본절은 동료 동관들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이 채권자에게 당하는 것을 마치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매우 슬퍼하며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그 사실을 그들의 주인에게 탄원하듯 보고했음을 보여준다.
18:32 이에 주인이… 탕감하여 주었거늘. -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의 횡포를 자세히 알게 된 주인은 그 종을 소환해서 완악한 행위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재차 소환된 종은 '악한 종'이라는 엄중한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이제 그 종에게 남은 것은 공의의 심판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형제에 대해 자비와 용서를 베풀지 않는 이 세상의 모든 포악한 자들과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리워 가서 공의의 심판을 받을 날이 곧 이를 것이다.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 주인이 그 종을 책망하는 것은 그가 빚을 갚지 않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대신 그에게 빚진 자를 무자비함으로 치리한 사실에 있다. 사실 자신이 누구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을 경우 은혜를 베풀어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백번 천 번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비유에 나타나는 종은 자비를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동관을 옥에 가두는 비인간적 처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종은 주인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한편 이러한 본절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의 감격을 이웃에게 갚아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 준다 할 것이다.
18:34 주인이 노하여…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 여기서 '옥졸'(바사니스테스)은 고문이나 형벌을 가하는 사람으로 결국 본절은 무자비한 종에게 임할 고통의 중대함을 보여 준다. 무자비한 종은 자신이 빚진 일만 달란트를 갚기 전까지 형벌을 받아야했는데, 사실상 그 기간은 평생 동안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그 규모의 돈은 개인이 갚을 수 있는 분량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자비한 종이 받은 형벌은 이 세상의 완악하고 무자비한자들이 받을 영원한 심판, 곧 지옥의 형벌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Meyer). 이는 마치 소자를 실족케 하면 영원한 불(8절)이나 지옥 불(9절)에 가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매우 타당한 해석이다.
18:35 너희가…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이와 같이 하시리라. - 무자비한 종의 비유의 결론 부분으로, 예수께서는 여기서 형제의 잘못을 끓임 없이 용서할 것과 더불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용서를 하도록 다시 한 번 교훈하신 후에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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