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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안식일 고창병자의 치유, 겸손과 자비의 교훈 및 큰 잔치의 비유와 주의 제자의 각오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절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특히 12:1-19:27까지는 예수의 행동(action)보다는 죄로부터 순결하신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시는 예수의 교훈(instruction)에 관한 기사가 더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서 나눠진다. 먼저 전반부 1-6절은 또 하나의 안식일 치유 사건인 안식일의 한 고창병자 치유 사건이다. 다음 중반부 7-24절은 주께서 어느 잔치에 참석케 된 것을 기회로 하여 잔치를 소재로 삼아 겸손과 자비에 대한 교훈(7-14절)을 그리고 천국 잔치의 참예자의 정체에 대한 구속사적 예언을 담은 비유(15-24절)를 주신 말씀을 보도하고 있다. 마지막 후반부 25-35절은 그 자신이 먼저 천국에 참예하며 나아가 주의 복음을 전하여 이웃을 천국에 참예시킬 주의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가 이 땅에서 가져야 할 삶의 각오를 교훈하고 있다.
1-6절의 고창병자 치유 사건은 안식일 치유 및 그로 인한 논쟁에 대한 여러 기사들 중 마지막 기사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에 대한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반론의 배경 및 그들의 오류(誰證)에 대한 기본적 이해는 먼저 전장인 눅 13:10-17절의 개관을 참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본 사건이 여러 안식일 논쟁 기사들과 비교해 갖는 다음의 특징들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예수는 이미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이 구약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이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곡해(曲解)시킨 소위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인본적 율법 조항을 근거로 당신의 안식일 치유 사건에 대하여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반발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바로 그런 유대 종교 지도자들 중의 한 분파였던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서 이처럼 다시금 공개적으로 안식일 치유 사건을 행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구속사역
성취의 때가 오기까지는 종교 지도자들과의 결정적 충돌은 되도록 피하고자 하였으나 그렇다고 진리(truth)에 입각한 당신의 사역 자체를 결코 위축시키지 않으셨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우리에게 방법과 시기상의 이유라는 문제로 진리자체까지 왜곡(歪曲)시키며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다른 안식일 논쟁들을 보면 일단 주께서 치유사역을 베푸신 후에 그것에 대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론에 응답하시는 식으로 논쟁이 진행되었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아예 주께서 미리 그들의 반론 의지를 꺾으시고 치유사역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제 주께서 당신의 공생애가 상당히 진행된 이즈음에는 이미 안식일(安息日)의 형식주의적 율법에 대한 주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거부와 정죄가 아예 기정사실화되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본 단락에서 보여지듯이 진리와 사랑에 입각한 주의 사역에 대하여 유대 지도자들이 기실 별다른 반론(反論)을 펼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우리에게 잠시의 갈등과 핍박이 있어도 진리와 정의에 입각한 주의 복음을 일관되게 주장하면 필히 승리와 축복이 있을 것(요 16:33)이라는 구속사적 원리를 반영해 준다.
7-24절은 주께서 한 잔치에 참석하시게 된 기회에 잔치의 여러 측면을 소재로 삼아 천국 잔치 곧 천국 구원에 동참할 자의 여러 측면을 교훈해 주신 말씀이다. 먼저 7-14절은 천국 구원을 얻을 자의 한 특징인 겸손(謙遜)과 자비(慈悲)를 보여 준다. 15-24절은 주께서 당신 자신의 공생애와 오고 오는 세대의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복음(Good News)이라는 잔치의 초청장을 온 땅에 널리 보내지만 많은 자들이 미래의 영원한 천국 잔치의 가치보다는 당장의 육신적 문제에 얽매여 이를 거부하므로 주께서 인간의 관점으로는 더욱 못난 자들을 강권하여 천국 잔치에 참예시키는 대신 처음 초대받았던 자들은 천국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을 비유(parable)를 통해 예언적으로 밝히신 말씀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구약선민이요 동시에 예수의 복음을 처음들은 자들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반면 이방인들이 구원 얻은 것을(행 13:46) 말하는 것인 동시에 전 시대 보편적으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거절하는 자가 많으나 주께서 은혜로 강권하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천국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구속사(redemptive history) 전개의 심오한 측면을 함께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면 천국 구원 얻을 자의 기본자세에 대한 특징을 겸손과 자비로 규정한 동시에 천국 구원 얻은 자의 정체 및 그들의 구원 획득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주의 경륜(經淪)을 깨닫는 동시에 지금 이 시간 이 말씀을 바로 나에게 적용하여 나는 천국 구원을 거부하고 있지나 않은지, 천국 시민의 자세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에 대하여 구속사적 반성을 하여야 할 것이다.
25-35절은 주의 제자된 자에게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할 때 요청되는 비장한 각오에 대한 교훈이다. 영원한 구원(救援)을 주는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실로 인생 최대의 절대 가치이다. 반면에 죄로 물든 세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거부하고 핍박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결국 우리가 영원한 천국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나 이때 세상의 핍박과 거부도 필연적이므로(요 15:18-21) 이를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천국 제일주의를 확고히 확립하며 또한 제자로서의 매일의 삶에서 이를 실천하는 자세가 요청됨을 교훈한다.
이런 본문의 내용은 다음처럼 세분될 수 있다. 먼저 25-27절은 제자직에 요청되는 절대 헌신을 직설적으로 강조한다. 다음 28-32절의 두 비유(parable)는 제자로서의 삶의 필연성과 본질을 미리 분명히 깨달아 그에 상응하는 각오와 대비를 할 것을, 34-35절의 소금 비유는 실제 이를 실천하는 자만이 짠 맛을 간직한 소금처럼 가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비유들이다. 이는 제자(disciple)로서의 길은 어려우니 사전(事前)에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는 객관적 충고가 결코 아니다.
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절대적으로 요청되는데 사탄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엄청난 압력과 갈등에 직면할 수 있으므로 사전에 각오를 굳게 하라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주의 교훈이다. 실로 사탄이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참된 제자의 삶을 사는 자에게는 적당한 타협이나 안일한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그것은 그가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 시간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자. 성도는 누구나 주의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바 나의 신앙생활의 실상은 어떠한가!
외울 말씀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 하면 능히 내 제지기 되지 못하리라(눅 14:33)
본문 & 자료노트
원어 연구-14:7, 보시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에페콘'으로서 동사 원형인 '에페코'의 현재 분사형이다 ' 한편 '에페코'는 '~위에'(마 3:16; 막 6:49) 또는 '~을 향하여'(행 15:12; 벧전 3:12)라는 뜻을 지니는 전치사 '에피'와 옷을 '입다'(마 3:4). 상(賞)이나 은혜를 '얻다'(마 6:1; 골 1:14), '가지다' (딤전 1:9; 계 2:18)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동사 '에코'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페코'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 곧 방향 면에서 위를 향한다는 것과 동작의 측면에서 특정한 사물 따위를 소유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가지 기본적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면, '위를 향하여 소유하는' 동작은 특별히 시각 기능과 관련될 경우 눈을 들어 특정한 대상을 향해 주의 깊게 '바라보다' (행 3:5),
'주의하다'(딤전 4:16) 라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에페코'의 의미가 본절에서처럼 단순히 '보나'라는 뜻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제상으로 현재 분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동작의 현재성을 살려서 번역하게 되면, 예수께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상좌 택하는 모습을 '눈을 들어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피시면서'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주위 환경을 빼놓지 않고 세밀히 살피시는 포착되어진 상황을 자료로 해서 자신의 가르침을 청중에게 베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풍습 -14:7-24 잔치 배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 접대를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손님 대접하기를 좋아했고, 일상 식단은 극히 단순하므로 간혹 손님을 모시고 푸짐한 식사를 하기를 즐겼다. 그래서 생일이나 결흔식 등의 특별한 경우에 큰 잔치를 배설하곤 했다. 이러한 잔치 배설의 풍습이 본문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잘 나타나는 바 이에 당시의 잔치 배설에 따른 손님 초대와 접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손님 초대 방법
주인은 잔치를 위해 손님에게 두 번 초청을 하게 된다. 곧 손님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잔치 일주일 전에 초청장을 보내고, 그러다 잔치 날이 되면 하인을 보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려 잔치에 참예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잔치 초청을 받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는 처음에 즉석에서 그 초청을 수락하는 것은 대단한 무례였다. 곧 처음에는 수락하지 않아야 했으므로 으례 사양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 잔치에 참석하도록 초청자의 하인이 그를 '종용'하였다. 만일 초대받은 손님의 입장에서 즉시 수락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해도 이 같은 초대자의 '강청'하여 초대하는 권리가 행사되도록 참아야 했고, 종용함이 있은 후에 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참석을 약속하고, 정솨 이제 잔치에 와도 좋다는 초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치에 불참하는 것은 대단한 무례와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2. 잔치 때의 예의
잔치를 베푼 주인은 손님들이 도착할 때 정중히 인사를 하고 하인들에게 명하여 손님들의 발을 씻게 하였다. 그리고는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개인적으로 피로연실로 안내하였다. 그런데 다락방에 마련된 차석이나 ㄷ자형으로 된 연회석에는 특별히 상하 구별이 있었다. 그래서 손님에 따라 가장 귀한 특별 손님일 경우에 상석에 앉도록 했다. 보통 최고 상석은 주인 오른쪽이고, 그 다음 자리가 주인 왼쪽이었다. 이에 특별 손님이 아닌 사람들은 상석을 제외한 아래쪽 식탁에 둘러앉았다. 다락방에 마련된 좌석의 경우에는 탁자가 곁들인 상좌의 아랫 쪽에 덜 중요한 아래 사람을 위해 좌석이 별도로 마련되었는데, 여기서 문 쪽에 가까운 자리가 가장 말석이었다.
한편 잔치에 참석한 손님은 잔치 예복을 입어야만 했다. 만일 손님이 잔치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왔다면 그는 연회석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 쫓김을 당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마 22장 자료 노트 '잔치 예복'을 참조하라.
3. 잔치 때의 음식과 오락
잔치를 배설한 주인은 우리에 있는 소나 양 중에서 가장 최고의 것을 잡아 음식을 만들었고, 질 좋은 포도주도 함께 내었다. 그리고 비파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여서 손님들이 오직 즐거이 먹고, 마시도록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마음껏 먹고 대화를 나누고 또한 당시의 사회적 오락이었던 춤도 추면서 시간을 보냈다.
4. 의의
이상과 같이 잔치가 열리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연회석상의 상석을 동경 하였다. 그래서 출세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높임 받기를 좋아한 사람들은 주인의 안내 없이도 제 스스로 상석에 앉기를 즐겨하였다. 본문도 바로 이와 같이 잔치에 초대받아 온 바리새인들이 연회석의 상석에 스스로 앉는 오만함을 보신 예수께서 이를 비유로 잔치에서의 습관을 잘 알던 손님들에게 많은 교훈을 들려주게 된 것이다. 한편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주어진 허구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어진 말씀이며 분명히 역사성을 갖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보감-14:15-24 믿음의 방해 요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천국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눅 4:43). 또한 이 복음은 후에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서도 수없이 전파되어 졌다. 그러나 혹자는 이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혹자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구원과 멸망이라는 정반대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여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1. 교만(마 5:3)
2. 세상 근심(마 13:22; 눅 14:19)
3. 세상 쾌락(마 13:22; 눅 14:20)
4. 물질의 탐욕(마 19:22; 눅 14:18)
5. 사단의 방해(막 4:15)
6. 완고함과 불순종(행 19:9)
7. 마음의 혼미(고후 4:3,4)
도표-14:15-24 '큰 잔치 비유'와 '혼인 잔치 비유' 의 대조
본문의 '큰 잔치 비유'는 마 22:114의 '혼인 잔치 비유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전자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이 상실케 될 천국의 축복에 대해 보여주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한 자들의 완악함과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에 대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별개의 비유이다. 한편 이 두 비유를 대조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도록 하자.
큰 잔치 비유 혼인 잔치 비유
1. 초청자: 어떤 사람(16절) 어떤 임금(2절)
2. 회수: 두 번(16,17절) 두 번(3,4절)
3. 거절의 양상: 밭, 소, 장가핑계(18,19,20절) 밭, 상업핑계, 종들을 능욕하고 살해함(5,6절)
4. 거절의 결과: 기록 없음 군대로 인해 진멸당함(7절)
5. 재초청 받은 자들: 가난한 자들, 병신, 소경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모두(10절)
저는 자, 산울가의 사람(21,23절)
6. 교훈: 초청을 거절하는 자는 천국의 초청을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상실함(24절) 심판을 면치 못함(13절)
보감-14:15-24 성경에 나타난 어리석은 자 8대 유형
1.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함부로 비난하는 자(민 12:1)
2. 시험을 당할 때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욥 2:10)
3. 많은 재물로 인해 주를 온전히 좇지 못하는 자(마 19:16-22)
4. 자신을 위해 재물 모으는 데만 힘쓰는 자(눅 12:19-21)
5. 세상 일 때문에 천국 복음으로의 초청을 거절하는 자(눅 14:15-24)
6. 아무것도 되지 못했으면서 된 줄로 생각하는 자(갈 6:3)
7. 스스로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하는 자(요일 1:8,9)
8. 기회 있을 때에 회개지 않고 그 기회마저 저버리는 자(계 2:21-23)
14:1-6 세 번째 안식일 논쟁
본문에는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의 안식일 식사에 초대되어 거기서 고창병든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 소개된다.
이는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눅 6:1-11)과 18년 동안 귀신들려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치신 것(눅 13:10-17)에 이어 세 번째 안식일 논쟁의 동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전의 논쟁과 달리 예수님께서 먼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시고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그렇지 아니하냐는 질문을 던지신다(3절). 그런데 누가가 이처럼 안식일 논쟁을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따라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그들 종교의 권위와 주체성의 근거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에 만족하였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정신에 대하여는 외면하였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왜곡된 율법의 의미를 바로 드러내고 실천하시기 위해서 그들과 충돌하실 수밖에 없었으며 굳이 다른 날에도 하실 수 있는 일을 안식일에 행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고통과 신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참 안식과 평안을 주시는 것임을, 그 사역의 본질을 밝히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12장 자료노트에 자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를 비롯해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4:1 안식일에‥‥잡수시러 들어가시니. -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평일보다 안식일 날 식탁을 더 풍성하게 차리고 남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풍습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경건하고 율법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절은 바로 그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초대하자 이에 응하여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으로 가시는 장면이다.
바리새인의 한 두령. - 여기서 '두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콘'은 '지도자'라는 뜻으로, 본절의 바리새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 여기서 '저희'는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모인 다른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3절). 그리고 '엿보고 있더라'(에산 파라테루메노이)는 말은 악의를 가지고 음흉하게 다른 사람의 행동을 살피는 행동을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음해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 예수의 행동을 예의(銳意) 주시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이로보아 바리새인 두령의 식사 초대는 우호적인 것이었다기보다는 예수를 음해하기 위한 치밀한 각본 속에 진행된 일일 것으로 여겨진다.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 여기서 '고창병'(휘드로피코스)이라는 말은 분명한 의학 용어로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Robertson). 이 병은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으로 당시에는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는데, 유대 사회에서는 이 병이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했다(Hendriksen). 한편 본절에서는 이 병자가 어떻게 '주의 앞에' 오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에 대해서 많은 주석가들은 크게 세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첫째, 당시 유대인의 안식일 잔치에는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으므로 이 병자는 그 잔치에 우연히 참석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이 병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자기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왔다는 것이다. 셋째, 이 병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고의적 계략, 즉 예수께서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범하는 것을 비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병자를 예수님의 눈에 띠는 곳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는 앞절의 묘사와 안식일 율법준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세 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Ryle, Spence).
14:3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리 없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의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계시다. 사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치료를 지체하여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경우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안식일의 개념을 무노동의 소극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한 바리새인들이나 랍비들이 만들어 놓은 유전에 근거한 것으로 이는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에 대해서는 막 7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이로 볼 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종교적 전통을 지적하는 날카로운 비판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눅 6: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의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앞에서도 이미 두 차례나 언급되었다(눅 6:1-11; 13:1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 이하에서 또 다시 안식일 논쟁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당시 안식일 문제가 예수와 바리새인들 간에
첨예하게 대립된 주요 문제였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안식일 논쟁의 의미에 대해서 마 12장 자료 노트,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을 참조하라.
14:4 저희가 잠잠하거늘. - 예수님에게 자신들의 계략이 탄로난 것을 안 바리새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잠잠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만일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불법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의 성경적 증거를 요구하는 예수님에게 아무 증거도 제시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그들이 주장해 온 유전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파놓았던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빠진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잠잠하거늘'(헤쉬카산)이란 말은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들이 전보다 휠씬 조용해졌다'는 뜻인데. 이는 곤경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처 보내시고. - 이제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바리새인들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고 그들이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 이견도 제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 고창병에 걸린 자를 고쳐 돌려 보내셨다. 한편 예수께서 고창병에 걸린 자를 고치신 때는 연회가 계속 진행중이던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후 돌려보내신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의 입장이 어려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였거나, 그 병자가 잔치에 정식으로 초대되지 않고 예수를 음해하기 위한 바리새인들의 계략에 의해 고의적으로 끌려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14:5 너희 중에 누가‥‥끌어내지 않겠느냐. - 이 구절의 보다 정확한 원어상의 의미는 '만일 네 아들이나 혹은 아주 다른 비교이지만 네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도 그것들을 즉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누구냐'라는 뜻으로서 엄격한 형식과 규제만 강조하여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활을 비판하고 있는 비유의 말씀이다. 특히 본절에서 '곧'(유데오스)이란 단어는 단순히 '즉시'라는 뜻만이 아니라 '안식일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라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14:6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 비유를 통해 안식일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제정된 날이라는 교훈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아무런 반론도 제기할 수 없었다. 특히 예수께서 지금까지 바리새인들의 사고 자체가 인간의 생명을 보살피고 그 존엄성을 일깨우는 역할보다는 율법의 잘못된 해석으로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율법의 강요된 형식과 규제 속에 가두어 놓는데 급급했다는 것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진리였으나 바리새인들의 말과 행동은 위선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은 신적 권위를 지니셨으나 그들은 왜곡된 이성을 가진 무기력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여기서 '대답지 못하니라'(우크 이스퀴산 안타포크리데나이)라는 말은 4절의 '잠잠하거늘'이란 표현보다 강한 의미로서, 이는 단순히 대답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감히 대답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리새인들을 완전히 압도한 예수님의 권능을 부각시켜 주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14:7-14 겸손과 자비에 관한 교훈
앞 단락(1-6절)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안식일 식사에 초대되어 거기서 고창 병든 자를 고치심으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교훈하셨다. 이제 본문에서는 그 식사에 초대된 자들이 서로 상좌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고 잔치에 초대받은 자와 초대한 자의 잘못된 행위와 동기를 비유를 통해 지적하심으로써 또 다른 교혼을 주시고 있다.
본래 잔치자리의 상좌는 주인의 오른편 바로 옆자리를 가리키는데 이 자리에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나 명예로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앉았다. 따라서 초대받은 자들이 그러한 상좌에 서로 앉으려고 했던 것은 스스로를 높이고자한 처사로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좇는 저들의 타락한 명예욕을 대변해 준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학문, 지위, 경건 등을 스스로 높이 평가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실족하게 하였다. 게다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러 오신 메시야를 영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하고 대적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교만을 여러 번에 걸쳐 깨우치시고 책망하셨고(눅 11:43) 지금도 비유를 통해 저들의 이런 타락한 신앙의 태도를 지적하시면서 겸손한 태도를 가지라고 권고하신 것이다(7-11절).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제 잔치를 베푼 자에게도 자비에 관한 가르침을 주신다(12-14절) 즉 잔치에 손님을 초청할 때에는 갚을 수 있는 사람을 초청 하지 말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청하는 자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 때에 어떤 보상이나 상급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산상 보훈의 구제 교훈(마 6:1-4)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에서 초청하지 말라고 권하는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12절)은 초청하라고 권하는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 소경(13절)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전자의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모두 사회에서 소외받고 천대받는 자들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인자로서 오신 메시야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구제의 자비한 마음은 앞에서 언급한 겸손의 마음과 일맥상통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겸손이 없이는 소외받고 멸시받는 자들을 대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먼저 하나님 나라는 세상 잔치와 달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역설적 진리가 적용되는 곳이다(11절),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이 땅의 소외되고 천대받는 자들, 즉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들이 초대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우리는 종의 형체로 오시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잠 18:12; 빌 2:3; 약 4:10). 둘째,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겸손한 자들과 자비한 자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데 그곳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고통 받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잠 14:31; 막 2:26). 셋째, 죽음 이후에는 부활이 있고 이 때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명심해 현재의 삶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4: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보시고. - 본절은 예수님께서 고창병 든 사람을 고치신 일이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아울러 본절은 바리새인이 준비한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다는 것도 알려 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상좌'(타스 프로토클리시아스)란 말은 '첫 번째 좌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잔치의 가장 좋은 좌석을 말한다. 당시 유대인의 연회석은 ㄷ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주인이 앉는 식탁의 우편 자리가 상석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보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콘'은 문자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다' 또는 '주목하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청함 받은 자들을 염두에 두시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Robertson), 하여튼 예수님께서 상좌 택함을 보셨다는 것은 잔치에 초대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좌에 앉기 위해 몰려드는 장면이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다는 말이다.
비유로 말씀하여. - 여기서 '비유'를 나타내는 헬라어 '파라볼렌'은 구체적으로 '교훈' 또는 '권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되었을 때 지녀야 하는 예법에 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파라볼렌'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복음서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데, 때에 따라서는 '속담'으로도 번역된다(눅 4:23). 이에 대해서는 마 13장 연구 자료, '예수의 비유의 이해'를 참조하라.
14:8,9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혼인 잔치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격식을 중요시하는 잔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의식적이고 그에 따른 좌석의 구분 또한 명확한 잔치였다. 따라서 혼인 잔치의 상석에 앉는다는 것은 그 잔치의 매우 귀중한 손님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처음에 무턱대고 상석에 앉았다가 나중에 주인에 의해 말석으로 쫓겨나는 이 사람은 매우 경거 망동한 사람의 대표적 표본으로서 그가 당하는 부끄러움과 수치는 바로 교만한 사람들이 받아야 할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항상 강한 명예욕과 백성들의 존경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잔치의 상석에 앉기 위해 서로 다투는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의 특징이었던 것(마 23:6)으로 보아 실제로 잔치의 상석에 앉았다가 말석으로 쫓겨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10 말석에 앉으라. - 여기서 '말석'(에스카톤 토폰)이란 식탁의 좋지 않은 자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흔히 말석은 그 잔치의 귀빈이나 주인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마련이다. 고로 예수께서 '말석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자신에게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명예를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겸손한 행동을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벗이여 올라앉으라. - 여기서 '벗'이라고 부른 잔치 주인의 말은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이 명칭에는 존경과 감사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올라앉으라'(프로사나베디)는 말의 보다 정확한 표현은 '더 위로 올라오라'는 뜻으로 말석에서 상석으로 올라와 앉으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 잠 25:6,7에 나타난 사상을 반영한 말씀으로, 이는 사람 앞에서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일보다 위험한 것은 없으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야 말로 최상의 미덕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경우, 그 사람은 자기가 높아질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말석에 앉는 자는 아닐 것이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는 외식하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진심으로 말석에 앉는 것을 합당히 여기는 겸손한 사람을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앞에서 높이실 것이라는 사상은 성경 전반에 흐르는 진리인 것이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영광'(독사)이라는 말은 '영예'와 '존귀'가 동시에 함축된 포괄적 표현이다(Ryle).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높아지리라. - 이는 비유에 대한 결론으로 주어진 말씀으로, 예수께서 겸손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마다 자주 반복하셨던 말씀이다(마 23:12; 눅 18:14). 그리고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생활 규범으로서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살펴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한량없는 축복을 주셔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열방 위에 높이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교만하고 패역한 길로 들어서면 하나님께서는 가차 없이 그들을 심판하셔서 무서운 형벌과 진노로 그들의 수치를 드러내셨던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잠언서 기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겸손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도의 올바른 삶을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마 18:4).
14:12 점심이나 저녁이나. - 이것은 '아침이나 저녁이나'(아리스톤 에 데이프)라는 헬라어 원어의 잘못된 번역이다(Moulton, Robertson). 한편 본절에서 누가는 본절 이하 14절까지의 말씀이 비유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으나 이 말씀 또한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에게 행한 비유처럼(7-11절)
예수님을 잔치에 초청한 주인을 가르치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잔치를 베푸는 데 있어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부한 이웃을 초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대접할 것을 요구하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왜곡하여 자기의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 또는 돈 많고 사회적 명성이 있는 상류층 사람들만을 초대한 잘못된 관행(慣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Cobbin, Hendriksen, Ryle). 그러므로 이 말씀의 바른 의미는 부자들이나 친구들만을 접대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베풀라는 뜻이다.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이 선을 행할 때는 사람의 갚음을 기대하지 않고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마 6:5). 그러나 본절에서 예수님께서 비난하시는 것처럼 가까운 친구와 친척 그리고 부한 이웃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배타적인 행위는 결국 그에 따른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적 진리를 무시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상급을 깎아내리는 어리석은 처사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14: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청하라. - 본절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앞의 네 부류의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런 보상도 해 줄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가진 사람들의 신앙생활 태도에 대한 바람직한 규범으로서 항상 자발적으로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 된 사람들을 돌보는 데 힘쓸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본절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사회적 복음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본서의 특징을 잘 부각시켜 주는 것으로. 본서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립되는 묘사를 통하여 가난한 자는 복음의 대상자이지만 부자는 경계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눅 7:22; 12:16-21; 16:19-31; 18:22-25).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 자신이 베푼 호의와 친절에 대한 답례로 자신에게 보답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골라 그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면 그것은 자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계략에 불과한 것이요 사랑의 행동이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보답할 힘이 없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일에 힘쓴다는 것은 적어도 사랑과 선한 마음을 갖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 열납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 6:20; 19:21).
의인들의 부활 시에. - 여기서 '의인들의 부활시'란 부활이 의인들만의 특별한 권리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의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의 부활에 앞선 의인들의 '첫째 부활의 때'로 보는 것이 보다 성경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고전 15:23; 살전 4:16; 계 20:5,6). 그리고 '의인'이란 표현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처해 있는 위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부여받은 새로운 칭호로서.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것을 성실히 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구체적 명칭이다.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 이는 사람이 행위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에 의한 행위에 따라서 마지막 심판 날에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것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교훈을 시사하고 있는데, 특히 마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매우 적절하게 설명되고 있다.
14:15-24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청함 받은 자 전 단락(7-14절)에서는 예수께서 잔치에 초대받은 자와 초대한 자들에 대한 교훈을 통해 겸손과 자비에 대해 교훈하신 것을 소개했다. 이어 본문은 예수께서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의 교훈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자가 누구인지를 교훈하신 내용이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독선적인 것으로 주님께서 오실 때에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사 25:6; 55:1-3 주석 참조). 그와 같이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절)라고 말한 유대인도 당연히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말한 것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큰 잔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자는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들임을 역설하신다. 이 비유에서 잔치는 천국 잔치를, 주인은 하나님을, 종 가운데 처음 보내진 종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그리고 나중 보내진 종은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한다. 하여튼 이 비유에서는 세 번의 초청이 나타나는데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여기서 잔치에 제일 먼저 초대되었던 사람들은 당시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비유를 보면 당시 풍습에 의해 주인은 미리 초청을 하고 준비가 다 되자 종들을 보내어 데리고 오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는데(16-17절)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바라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어 초대하고 때가 되매 그리스도를 보내어 천국 잔치에 초대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을 거절한 사실을 나타낸다. 첫 번째 초대된 자들이 거부하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자 두 번째 초청이 이루어지는데 그 대상은 시내의 거지와 골목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같이 소외된 자들이었다(21절). 이는 유대인 가운데 멸시받고 천대받던 창기와 세리 같은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비록 그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참예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이들은 자기 영혼의 궁핍과 비참함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초청에서 이 같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비었다(22절). 이에 세 번째 초청이 이루어지는데 그 대상은 길과 산울가의 사람들이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자들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복음을 영접함으로 새롭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청 대상이 결코 일부 민족에 국한될 수 없으며 초청에 응한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별히 이 비유에서 누가는 세 번에 걸친 하나님의 초청, 유대인의 완악함, 유대의 소외된 자와 이방인의 응답 등을 통하여 본서의 중심 주제인 소외된 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의 부름을 입은 자로서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거부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주님 앞에 겸손하게 응답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14: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복되도다 하니. -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한 이 사람의 의도는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주의 관념 속에 익숙해 있던 자로서의 의식적인 발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가 출현하여 유대인을 중심으로 건설할 지상 왕국으로서 이 왕국이 건설되면 죽었던 의인들이 부활하여 메시야가 다스리는 복된 나라에서 영광된 생활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이 의인의 부활과 그에 따른 복된 상태를 말씀하시자 선뜻 그것을 유대주의적 사고로 이해하여 맞장구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말 속에는 자신도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천국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 가르친다(Robertson, Morris).
14:16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본절에서부터 24절까지는 일명 '잔치에 초대된 자의 비유'로, 이는 마 22:1-14에 나오는 '흔인 잔치의 비유'와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차이점이 명확하고 비유가 행해진 상황도 상이한 것을 볼 때, 두 개의 비유는 독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큰 잔치'(데이프논)란 흔히 만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손님들이 많이 참석하는 의례적인 잔치를 의미한다. 이 비유에서 '큰 잔치'는 '천국 잔치'를, 잔치를 베푼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천국을 '큰 잔치' 또는 '혼인 잔치'로 비유한 것은 매우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마 9:15; 눅 5:34; 계 19:7-9).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 잔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예비적인 초청이 있었고, 거절했다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잔치에 초대된 모든 사람이 이 초청을 수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잔치에 관한 모든 준비가 끝나자 주인은 다시 종들을 보내어 미리 초대된 사람들에게 잔치에 참석할 것을 알렸다. 그런데 이러한 이중 초청은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 널리 행해지던 관습으로 일단 초대에 응락한 사람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두 번째 초청에 응하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 만일 두 번째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대감을 표현하는 행위로 인식되었다(Tristram). 한편 여기서 잔치를 배설한 사람은 하나님을, 종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초청받은 사람은 유대인을 상징 한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 여기서 '사양하여'(파라이테이스다이)란 말은 '사정하여 변명하다'는 뜻으로서, 이는 완곡한 거절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또한 '일치하게'(아포미아스)라는 말은 원어상 '마음이 같은 상태'를 묘사하는 것인데, 이는 잔치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들 간에 일종의 공모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즉 유대인들은 마치 공모라도 하듯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로의 초대를 거부했던 것이다.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용서하도록 하라. - 잔치 초대를 거부한 첫 번째 사람의 이유는 농사 문제로서 이것이 매우 합당한 이유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단순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농부가 자신이 농사지을 밭을 살 때, 그것을 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밭을 산 다음에 농부가 그것이 어떠한지 살펴보러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경우가 혹시 있더라도 잔치가 끝난 후에도 충분히 밭을 살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는 농부의 말은 자신의 거짓된 행동을 감추기 위한 술수에 불과한 것이다.
14: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용서하도록 하라. - 여기서 '시험하다'(도키마사이)라는 말의 원어상 정확한 의미는 '검사하다' 또는 '조사하다'는 뜻으로서, 이는 소들이 일을 하기에 적합한지 안한지를 구별하는 농부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 역시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자신의 거짓된 행동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소를 다섯 쌍이나 사는 사람이 그 소들의 여러 상태나 조건을 살펴보거나 검사하지 않고 무조건 소를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14: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가지 못하겠노라. - 이 사람의 변명은 앞의 두 사람의 경우보다도 더욱 구차하고 사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신 24:을 살펴보면 남자가 결혼 한 후 1년간은 군대나 어떤 공적인 직무에서 면제되는 것을 보장하고 있지만 잔치 같은 사회적 관례에 참석하는 것을 금하는 내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장가들었으니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이 사람의 변명은 잔치 초청을 거부하는 자신의 완악함을 율법을 오용하여 감추는 것으로서 이 사람이 진실로 율법의 요구에 충실했던 사람이라면 그는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는 말씀에 따라 아내와 함께 그 잔치에 마땅히 참석해야 했다. 한편 '가지 못하겠노라'(우 뒤나마이 엘데인)는 말은 앞의 사람들이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한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불손한 어투로서, 이는 자신이 잔치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거부의 표현이다.
14: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 잔치에 미리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잔치가 시작할 때가 되서야 비로소 그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소한 변명을 핑계로 주인의 초청을 거절한 것은 주인을 매우 모독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주인이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노하여'(오르기스데이스)라는 말은 원어상 동작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으로. 이는 주인의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데려오라. - 초대된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준비된 잔치가 취소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할 손님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인은 종에게 밖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 그리고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다가 잔치에 참석시킬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초대된 사람들은 앞에서 먼저 초대된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분명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이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것을 누구보다도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리'(플라테이아스)는 사회 전반의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넓은 길'을 가리키며. '골목'(뤼마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다니는 '좁은 길'을 가리킨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무시하였던 사회에서 버림받은 비천한 자들이 완고하고 패역한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자리가 있나이다. - 주인의 명령대로 종이 수행하였지만 아직도 잔치 자리는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종은 주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다시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여기서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라는 종의 보고는 주인이 준비한 잔치의 규모가 매우 큰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크기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비유로서 선택받은 자가 누릴 축복의 영역이 지극히 광대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 선민 이스라엘만이 그곳의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팽배해 있던 천국에 관한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있음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Spence).
14:23 길과 산을 가로 나가서. - '길'(호투스)은 도시 안에 있는 골목과 거리와는 달리 도시 외곽에 있는 주변 도로를 가리키며, '산을 가'(프라그무스)는 흔히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21절의 거리와 골목이 유대를 가리킨다면 본절의 길과 산을 가는 이방 땅을 가리킨다(Godet, Alford, Bruce). 그러므로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거절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것으로, 잔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종을 다시 길과 산을 가로 보내는 주인의 모습은 바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암시한다.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 여기서 '강권하여'(아낭카손)라는 말은 폭력을 사용한 강제적 방법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을 통한 방법을 사용하라는 뜻이다. 이는 촌에 사는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의 초청을 받았을 때 흔히 느끼게 되는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도록 노력하라는 권면의 말로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에 망설임 없이 응하도록 잘 설득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다(Robertson). 한편 종에게 명한 '내 집을 채우라'는 주인의 지시는 잔치 자리가 다 차기까지 사람들을 계속 데려오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정한 수가 다 찰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 본절이 23절에 이어지는 비유의 연속이라면 '너희'가 아닌 '너'가 사용되어야 옳다. 왜냐하면 비유는 주인과 종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두고 주인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이보다는 본절이 비유의 계속이 아니라 전환적 부분으로 예수께서 듣는 모든 무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Bruce. Plummer).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 복음에로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에게 임할 비참한 결과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잔치 주인의 정중한 초대를 모욕적인 방법으로 거절한 사람들이 다시는 그 주인이 베푼 잔치에 초대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비유에 대한 결론으로 주어진 이 말씀에서 '내 잔치'(무 투 데이프누)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천국 잔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제 예수께서 그 잔치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분의 초대가 없이는 그 잔치에 감히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먼저 거부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또한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다(Hendriksen, Ryle).
14:25-35 제자될 자의 조건
앞 단락(I5-24절)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청받는 자에 대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사역이 점차 임박해 오자 제자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고난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26,27절)과 철저한 준비와 헌신이 있어야 함을 교훈하신 내용이다(28-35절).
특별히 예수께서는 제자가 되려는 자의 자세를 세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첫 번째가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 이다(28-30절). 이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는 헤롯 일가의 유명한 건축 사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헤롯 일가는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 커다란 건축물을 세웠는데 대부분의 공사가 미완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결국 이 비유는 망대를 세우는 건축자가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갖춘 다음에 망대 건축을 하는 것처럼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제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인식하고 예수님을 좇음으로써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전쟁에 참가하는 왕의 비유'로(31,32절), 이 비유 역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빌어온 것으로, 헤롯(Herod Antipas)은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첫 번째 아내였던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하였다. 이로 인해 헤롯은 아라비아와의 전쟁을 하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대패하게 된다. 여기서도 '망대를 세우는 자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의 준비성과 계획성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31,32절). 전쟁을 눈 앞에 둔 왕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을 준비한 후에 적과의 싸움에 임하듯이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제자들도 그래야 한다는 이다. 만약 제자가 사전에 마음의 준비도 없이 사탄의 권세에 대항하게 된다면, 그는 조그마한 시련이나 어려움이 닥칠 때에 쉽게 좌절하고 말 것이다.
세 번째는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로(33-35절) 이 비유는 제자가 되려는 자의 헌신과 희생을 교훈해 준다(마 5:13). 짠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아무 가치 없이 버려지는 것처럼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제자 역시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이 비유들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제자의 길에 대한 계속적인 강조를 보여 주고 있다(눅 9:57-62; 10:38-42).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포기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②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전의 세상적 가치관과 태도, 돈. 명예, 이기적 사랑을 하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성품을 가지도록 인내하는 모습이 요구된다. ③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한 바 된 이후에 진정 소금으로서의 맛을 잃을 경우에는 내어 버려진다는 것이다(히 6:4-6). 이는 말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함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마 5:13).
14: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 새. - 예수께서 잔치에 초대된 자의 비유를 마치시고 바리새인의 집을 떠나실 때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성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복음서에서 자주 증거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에 관한 호기심과 예수님의 행동을 책잡기 위한 적의를 갖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항상 섞여 있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의 생각을 늘 알고 계셨다(마 12:14, 15; 요 6:26). 여기서 '돌이키사'(스트라페이스)라는 말도 예수께서 단순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둘러보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들의 경솔한 생각내지는 무모한 열정 그리고 그들의 완악한 심중(心中)을 살펴보셨다는 예수님의 사려 깊으신 행동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미워하지 아니하면. - 여기서 '미워하지 아니하면'(우미세이)이란 표현은 인간이 유지하고 있는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끊어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다분히 상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서 '덜 사랑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마 10:37의 말씀과 비교해 볼 때 명백해지는데, 본절을 통해 예수께서는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진실성과 믿음을 확고히 하여 다른 모든 애착,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애착까지도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워하지 아니하면'이란 표현은 '신앙인으로서 일의 우선 순위를 명확히 결정하라'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제공하는 교훈인 것이다.
14:27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 이 말씀은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언급하실 때, 자주 묘사하셨던 비유적 표현이다(마 16:24; 눅 9: 23), 그 당시 십자가의 형벌을 선고받은 사람은 처형 장소까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는데, 무거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몹시 힘들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에 따른 무거운 짐을 마땅히 져야 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수반될 모든 수치스러운 일도 참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고'(바스타제이 )란 말은 신약 성경에서 요 19:17과 본절에만 나오는데, 이는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던 고통스러 운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표현이다.
14:28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 망대는 흔히 적군이나 도적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나 과수원 등지에 세우는 것이었다(왕하 9:17; 마 21:33). 그리고 망대는 관측의 효용성을 고려하여 일반적으로 높이 세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당시 망대를 세운다는 것은 많은 공사비가 충당되는 큰 공사였다. 그러므로 망대를 세운다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이 즉흥적으로 계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 망대를 세우는 것과 같은 비교적 큰 공사를 계획하는 사람이 그 일의 성취를 위해서 먼저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그것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망대 세우는 일을 자기 형편에 맞게 계획해야만 그 일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확고한 각오와 그에 따르는 치밀한 준비가 요청된다. 한편 여기서 '앉아'(카디사스)라는 말의 원어상 정확한 의미는 침착하고 치밀하게 생각하여 계획하는 건축자의 신중한 태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14:29,30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 사람이 먼저 충분한 계획 없이 섣부르게 어떤 건축을 시작하였다가 그것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일을 멈춘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당시 흔히 발생하는 일이었는데, 특히 헤롯 왕가는 자기 가문의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 성전과 왕궁 그리고 많은 주요 건물들을 무리하게 건축하다가 예산의 부족으로 인해 건축을 중단하여 많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았다(Spence). 결국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는 망대를 세우는 사람이 사전에 충분한 계획 없이 그 일을 실행하다 실패하면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사치와 허영심을 버리고 제자로서의 올바른 결심을 준비하지 않고서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이 사람이'(후토스 호 안드로포스)란 말은 건축을 중단한 사람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야유적 표현으로 '이 자가'라는 뜻이다.
14: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 본절의 비유 역시 앞선 비유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을 가르친다.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이 적의 형편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적과 무모하게 전쟁을 벌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싸워야 할 적군의 병력이 자기편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들과 전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더욱 없을 것이다. 만일 자신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이고 상대방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인지도 모르면서 전쟁에 임한다면 백전백패할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수반하는 길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러한 비유는 역사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는 당시 매우 강력한 아랍 왕이었던 아레타스(Aretas)의 딸을 첫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곧 자기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아레타스의 딸과 이혼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헤롯 안디바는 아레타스와 무모한 전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헤아리지'(불류세타이)란 말은 '스스로 합의하다' 또는 '깊이 숙고하다'는 뜻으로서, 이는 전쟁에서 패망하지 않기 위해 고심하는 왕의 모습을 잘 부각시켜 주는 표현이다.
14: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화친을 청할지니라. - 결론적으로 이 비유가 의도하는 목적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일의 중요성을 충분히 깨닫고 결단력 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망대를 세울 때나 전쟁을 할 때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사전에 충분한 계획이나 준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전적인 헌신과 충성의 결단력 있는 선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단순한 호기심과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있어 당연히 마주칠 고난과 역경 앞에 쉽게 좌절하거나 무너지고 말아 오히려 복음의 역동성을 침해하는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3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 여기서 '버리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우크 아포타쎄타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작별하다' 또는 '절교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소유물에게 작별을 고한다'는 문자적인 해석이 가능한데, 이는 예수님의 제자는 기꺼이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도 무릅쓸 준비가 필요하다는 제자의 자기희생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유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내어 버리느니라. - 이 비유는 앞에서 행한 두 비유, 즉 건축자의 비유와 전쟁을 준비하는 임금의 비유를 통해 내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가된 부분으로서 제자의 자기 희생 정신을 소금에 비교한 말씀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소금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예수께서 자주 언급하신 것으로서, 이는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소금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금이 효과적인 비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마 5:13; 막 9:50). 사실 소금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는 데 매우 필요한 것으로서 음식물의 맛을 보존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금이 변질되어 그 본질적인 맛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함부로 땅에 버리면 도리어 땅을 황폐시켜서 땅의 생산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었다. 특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해 근처의 암석에서 채취한 소금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혼히 이 소금에는 석회 물질이 혼합되어 있어서 소금의 맛이 쉽게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Hendriksen).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쉽게 전달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그 본질적인 희생과 충성의 정신을 상실한다면 결국 무익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이 말씀 또한 예수께서 중요한 비유들을 가르치실 때마다 자주 반복하셨던 말씀으로. 이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은유적 표현이다(마 11:15; 13:43; 눅 8:8). 하지만 죄에 빠진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고로 항상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들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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