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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성도 간의 송사에 대한 교훈 및 음행에 대한 경고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사도 바울이 스스로 파악한 고린도 교회의 현안 문제들에 대하여 설립자요 사도로서 권고한 말씀을 보도하는 1:10-6:20 기사의 종결부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전반부 1-11절의 성도 사이에 발생하는 송사(訟事)에 대한 교훈과 후반부 12-20절의 음행죄(淫行罪)의 심각성에 대하여 각별히 거듭 경고하는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 1-11절에서 바울은 성도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여 이것을 세상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 송사하는 일부 교우의 행태에 대하여 먼저는 부득이 교우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필히 이것을 교회 내에서 해결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성도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는 것 자체를 책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 각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과 거룩함을 입은 자들로서 장차는 성경의 진리에 의하여 세상을 판단해야만 할 자들이며 현재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일해야 할 자들인 바, 이런 자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이를 가지고 오히려 세상에 속한 재판관에게 송사를 제기하여 판결을 의뢰하는 행태는 자신의 본분과 사역을 망각한 부끄러운 일임과 동시에 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우리는 성도의 신분에 대한 원대한 구속사적 비전(vision)하에서 성도 각자가 교우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된다는 근본적 원칙과 함께 부득이한 분쟁에 대하여서는 교회 자체 내에서 이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전통을 확고히 구축해야 한다는 지혜를 얻게 된다.
실로 교회(敎會)는 이미 각자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나 세상 끝날까지 잠시 동안 이 세상에서 더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 필연적으로 속하게 되는 절대 유일의 지상 공동체이다. 오직 이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보존되고 또 전파되며,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성도가 신앙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는 먼저는 성도 각자의 신앙 생활을 위하여,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본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는 본문에서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성도 각자가 말씀 안에서 자제하며 나아가 상호 양보와 겸손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구속사적 교훈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한편 후반부 12-20절은 음행죄의 실체를 제시하며 이를 즉각 중지할 것을 명하는 바울의 권면을 보도하고 있다. 본서 기록 당시 고린도는 번성하는 항구 도시요 상업 도시로서 물욕(物慾)과 육욕(肉慾)을 본질로 하는 로마 세속 문화가 그 어느곳보다 극성스러운 곳이 었는바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거듭하여 성적 순결과 관련된 문제를 논하고 있다. 앞서 제 5장이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발생한 근친 상간죄에 대한 단호한 교회의 대처를 논하여 음행죄와 그 해결책에 대한 구체적 실례를 보여 주었다면 본문은 음행죄의 본질을 제시하면서 근본적으로 이 죄를 범하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다. 또한 다음 제 7장은 성도의 결혼 생활의 제측면에 대한 교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순결하고 바른 성생활의 정립을 위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하겠다.
바울 사도는 여타 범죄와도 또 달리 음행죄는 그리스도의 지체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지체이며 또한 성령이 거하는 터전이기도 한 인간의 몸 자체를 더럽히는 중대한 범죄임을 지적하며 이의 근절을 명령하고 있다. 실로 몸(the Body)이란 영 육이 유기적으로 합하여 전인격을 이루는 존재 양식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의 터전으로서 인격 그 자체의 일부이다. 한편 음행이란 바로 이런 몸이 직접적으로 가담하여 행해지는 범죄로서 결국 인간의 영흔 그리고 전인격 자체와 직결되어 있는 중대한 범죄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를 지적하며 음행의 근절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볼 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육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유일한 통로이며 나아가 가정 제도의 근간으로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법으로서 인간의 인격과 가장 직접 관련된 성도덕이 인간의 범죄 이후 거기에 개재된 쾌락으로 인하여 가장 손쉽고도 광범위한 사탄의 유혹의 도구가 되어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많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심지어 현대에 이르러서 성도덕(性道德)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創造原理)에 의한 절대적 도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과거의 인습적인 규범으로 전락되어 각자가 편의에 따라 무시해 버려도 무방한 것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에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성범죄의 실상을 다시금 깨달아 세상의 풍조에 쉽쓸리지 말고 바른 성도덕을 확립하여 결국 이와 관련된 모든 하나님의 구속사의 섭리에 순복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외울 말씀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성도 간의 송사에 대한 교훈
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음행 죄의 본질
12 ○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6:1-9 본서에 나타난 고린도 교회의 8대 부패상
고전 1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 주제-6:9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도표-5:9,10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을 일일이 언급하는 이유는 첫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과거에 바로 그러한 자들이었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성경의 씻음과 거룩케 하심으로 구원받았음을 상기시키고, 둘째 다시는 그런 구습을 좇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바울의 교훈은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바 이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을 열거해 보도록 하겠다.
1. 성령을 훼방하는 자(마 12:31,32)
2.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자(눅 11:20)
3. 물질을 탐하는 자(눅 12:15)
4. 불의한 자(고전 6:9)
5. 남색하는 자(고전 6:9)
6. 탐색하는 자(고전 6:9)
7. 음란한 자(고전 6:7)
8. 도적(고전 6:10)
9. 남의 물질을 탐람하는 자(고전 6:10)
10. 술 취하는 자(고전 6:10)
11. 이웃을 욕하는 자(고전 6:10)
12. 토색하는 자(고전 6:10)
13. 혈과 육에 속한 자(고전 15:50)
14. 투기하는 자(갈 5:21)
15. 우상 숭배자(엡 5:5)
16. 간음하는 자(히 13:4)
17. 유혹에 넘어가는 자(계 12:9-12)
18. 모든 거짓말하는 자(계 21:8)
19. 믿지 아니하는 자(계 21:8)
20. 두려워하는 자(계 21:8)
21. 흉악한 자(계 21:8)
22. 술객들(계 21:8)
23. 살인자(계 21:8)
보감-8:12-20 성도가 몸을 더럽혀서는 안될 이유
1.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므로(창 1:27)
2.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산 제물이므로(롬 12:1)
3.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고전 6:9,10)
4. 오직 주를 위하여 영광돌려야 하므로(고전 6:13,20)
5.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고전 6:15,19)
6.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에(고전 6:19)
7. 우리의 몸은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할것이므로(고전 15:42-44)
원어 연구-6:5, 부끄럽게 하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엔트로페'( )인데, 이것은 동사 '엔트레포'(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동사 '엔트레포'는 '돌다'라는 뜻의 '트레포'( )와 전치사 '엔'( )이 합성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어떤 사람에게서 등을 돌려 대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수줍어 하다', '부끄럽게 하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 경우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얼굴을 감추고 등을 돌려대는 것을 뜻하나 이와 반대로 이 단어는 본래 등을 돌려댄 상태에서 다시 돌아서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한다는 의미에서 '공경하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본문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을 주는 것은 그들이 과거 자신들의 행위들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궁극적으로는 단순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과거의 잘못을 무심코 지나쳐 버리거나 덮어두는 것으로 끝날 때 신앙의 성숙은 참으로 기대할 수 없다. 도리어 그것을 돌아보고 또 부끄러움도 느끼고 그것을 교훌 삼아 오늘의 자신의 삶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고자 할 때 우리의 신앙이 을바로 성장하는 것이다.
도표-6:15,19 성도의 몸에 대한 12대 묘사
고후 5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6:15 부활의 확신이 주는 7대 유익
고전 15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6:18 음행에 대한 10대 묘사
1. 땅을 더럽게 하는 것(렘 3:2)
2. 비루하고 가증한 것(렘 13:27)
3. 마음을 빼앗는 것(호 4:11)
4.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호 5:4)
5.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마 15:19)
6. 어둠의 일(롬 13:12,13)
7.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고전 6:18)
8. 육체의 일(갈 5:19)
9. 땅에 속한 것(골 3:5)
10. 더러운 것(계 17:4)
보감-6:12-20 성결된 삶의 8대 지침
딤전 4장 자료노트 참조
6:1-11 교회 내의 송사 문제에 대한 교훈
전장에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윤리적인 문제 가운데 고린도 교회 내에 만연되어 있는 부도덕한 성문제에 대해 교회의 단호한 권징을 명한 바울은 이제 본장에서는 고린도 교인들 간에 발생한 소송 문제(1-11절)와 음행죄의 본질(12-20절)을 다루고 있다. 그중 본문은 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까지 끌고간 소송 문제에 대해 바울이 준엄하게 책망하며 소송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태도를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실 교회 공동체도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서 이루어진 조직체이기 때문에 분쟁을 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성도들 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교회 내에서 말씀으로 판단하는 등 신앙적으로 해결을 해야지 그것을 세상 법정에까지 들고 가서 세상의 기준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시 119:105; 잠 6 :23). 왜냐하면 성도들은 세상의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판단할 자들이기 때문이다(2,3절).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며 이세상과 타락한 천사들을 심판하게 될 자들인 것이다(마 19:28; 계 2:26,27). 따라서 이러한 성도들이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얼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마저 가리우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 간의 문제를 세상법정에 가지고 갔다(1절).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부끄럽게 하고자 바울은 정녕 교회 안에 성도들의 사적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가 한 명도 없느냐고 반문함으로써 그들을 호되게 책망하고 있다(4,5절).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은 성도들간에 발생한 분쟁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간의 분쟁에서는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성도에게 사랑과 미 덕으로 양보하라는 것이다(7,8절). 나아가 바울은 만약 타인에 대해 사랑으로 하지 못하고 끝까지 욜의를 저지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유업을 얻지 못할 것임을 경고함으로 송사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짓고 있다(9-11절). 사실 성도 간의 소송은 얘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요 13:34,35)에 위배되는 처사요,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를 멸시하게 하는 처사이다. 따라서 세상 법정에까지 가서라도 끝까지 송사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비록 자신이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양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하다.
한편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오늘날에도 교인들간의 송사 문제 때문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성도라면 은혜의 말씀을 분쟁 해결의 기준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좇아 생활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시 119:99,100; 마 22:37-40; 약 1:5).
②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되었다(롬 5:17; 엡 2:5).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또한 죄된 것들에서 벗어나 거룩해야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유업을 충분히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롬 8:17).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 여기서 '다른 이'는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같은 신자'를 말한다. 만일 이 '다른 이'가 불신자라면 그가 교회의 판결에 수긍할리도 없을 것이며, 또한 로마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은 '송사가 될 만한 문제'를 지칭한다.
구태여‥‥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본문에서 '불의한 자들'이란 '세상의 재판관들'을 지칭하는데, 이처럼 바울이 세상의 재판관들을 불의한 자라고 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의롭지 못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롬 3:23). 예를 들면 스토아 학파의 어떤 사람들은 아주 도덕적이고 금욕적이어서(행 17:18 주석 참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던 고린도의 어떤 신자보다는 윤리적으로 더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의 기준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던 바울에게 있어서(고전 2'2) 아무리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은 자는 불의한 자인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의의 기준'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두고 있는 바울은 신자 간의 송사가 세상의 의보다 더 뛰어난 하나님의 의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상의 법정이 불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신자 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세상의 법정에까지 가지 말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원만하게 교회 내에서 해결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 - 바울은 앞장인 고전 5:12,13에서 성도는 세상을 판단할 권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판단'은 고전 5:12에서 말하는 그런 '일상적인 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다. 즉 본문의 판단은 '현세의 삶에서의 일상사(日常事)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와 함께 왕노릇하며 세상을 심판하는 종말적 판단'을 의미한다(Meyer, Bengel, Godet, Hodge). 성경은 이 사상에 대해 도처에서 중거를 주고 있다(단 7:22; 마 19:28; 눅 22:30; 계 2:26; 3:21; 20:4). 더욱이 이 '세상에 대한 판단'은 뒷부분의 '지극히 작은 일에 대한 판단'과 대조되고 있어, 이 판단이 사소한 일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종말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심판'임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다.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 이 말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종말에 세상을 심판할 자들이어늘 삶 속에서 발생하는 아주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겠느냐? 그렇지 않다.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큰 것을 할 수 있는 자는 작은 것도 능히 할 수 있다는 말이다.
6:3 천사를 판단할 것. - 바울은 2절에서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더 나아가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사까지도 판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즉 바울은 '천사> 세상> 지극히 작은 일'이라는 도식으로 성도들이 '지극히 작은 일'(2절)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천사'가 어떤 천사를 지칭하는가를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천사'에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본다면 선한 천사가 심판을 받게 되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 중 심판을 받게 되는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하게 된 악한 천사들이다(벧후 2:4; 유 1:6). 따라서 본문의 '천사'를 성도들이 심판한다면 이 '천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악한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다(Chrysostom, Theodoret, Erasmus, Bengel, Hodge).
6:4 세상 사건. -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며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들이지만(고전 14:1; 딤후 4:8; 히 1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고전 5:10). 바울은 그처럼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세상 사건'이라 일컫고 있다. 이 '세상 사건'은 어떤 특별한 사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일상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칭한다.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 이 문장에 대한 해석에 있어 두 개의 대립되는 견해가 있다. 본문의 주동사 '세우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디제테'( )인데 이 동사는 원문에 사용된 그대로의 용법으로는 명령형으로 볼 수도 있고(Chrysostom, Calvin, Beza, Bengel, Alford, Lightfoot, Godet, Hofmann), 의문형 또는 감탄형으로 볼 수도 있어(Meyer, Luther, 01shausen, De Wette, Weiss)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 전자의 주장대로 명령형으로 보면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라'가 되어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가 신자가 되며, 따라서 그 의미는 '불신자들에게 재판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교회 내에서 가장 낮은 자에게 재판을 받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 되어 풍자적인 말이 된다. 한편 후자의 주장대로 의문형 또는 감탄형으로 보면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되어, 그 의미가 '왜 성
도간의 문제를 교회가 경히 여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맡겨 그들에게 재판을 받느냐'라는 뜻이 된다. 이처럼 명령형으로 보는 것과 의문형 또는 감탄형으로 보는 두 개의 견해가 대립되고 있는데, 어느 쪽을 취하든지 세상 사람들에게 성도간의 문제를 맡기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다만 전자의 견해를 취할 경우 교회 내의 지혜자에게 자문을 구할 수 없냐고 책망하는 5절 후반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하며, 또한 성도간의 문제의 송사를 판단력이 낮은 자에게 맡기라고 명령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5절 전반에서 바울이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했다'고 하였는데 그 '이 말'이 본절을 지칭한다면 본문은 분명히 풍자적 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므로 전자의 견해도 무시될 수 없다.
6:5 내가‥‥이 말을 하노니. - 전절인 4절의 '세우느냐'를 명령형으로 볼 것인지 감탄형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열쇠는 본문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의 형제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다고 하고 있는데 바로 '이 말'이 4절의 내용을 지칭한다면 풍자적으로 사용된 것이므로 명령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고, 그게 아니고 '이 말'이 본절 후반의 내용을 가리킨다면 4절의 내용과 '이 말'이 상관 없으므로 감탄형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지혜 있는 자가‥‥하나도 없느냐. - 고린도교인들은 헬라 문명 권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구변과 지식에 능하였다(고전 1:5). 그리고 그러한 자부심 때문에 자신들의 지혜를 자락하였다. 고전 1:12,17; 2:1 주석 참조. 그런데 그렇게 지혜 있다고 자랑하던 고린도 교인들이 정작 교인들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침묵하면서 사건을 해결해 주지 아니하고 도리어 멸망할 세상 사람들에게 송사를 의뢰하였다(1절). 바울은 이처럼 육에 속한 일에는 지혜 있다고 자랑하고 교만하던 고린도 교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데에서는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비꼬는 말로 '지혜 있다고 교만하던 너회들 중에 지극히 작은 일(2절)조차 판단할 지혜자가 하나도 없단 말이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이같이'라는 직설적인 강조 용어를 사용해 고린도 교인들의 어리석음을 더욱 드러내어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6:6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이 다른 형제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도 나쁜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바울은 이제까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송사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였는데 이제 더 나아가서 형제끼리 송사하는 것 자체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넌즈시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전에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되 다투지 않고, 서로 물건을 나누어 쓰고,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소유를 나누어 주고, 화목하게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들었다(행 2:43-47).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게 하여 칭찬을 듣지는 못할 망정 서로 송사하여 세상사람들로부터 도 부끄러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의 형제들을 향해 단단한 것을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라고 책망했던 것이다(고전 3:1-3). 한편 본문은 1절의 '다른 이'가 같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신자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1절 주석 참조.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지 못하고 서로를 소송하는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했을 뿐더러 그러한 아름답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잘못까지 범하였다. 신자가 살다보면 서로 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 밖으로까지 들고 나가는 행위는 잘못을 더 크게 만드는 행위이다. 바울은 그것을 지금 책망하고 있다.
6:7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 여기서 '이미'(에데)는 '참으로', '실로'라는 의미이며, '허물'(헬테마)은 '결점', '패배', '상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너희 안에 참으로 완전한 패배가 있나니'라는 말이 되며, 이를 설명하면 '같은 형제 간에 송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송사한 양자가 모두 완전히 그 송사에서 패배한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형제간에 피차 송사하고, 송사하되 불신자들 앞에서 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승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의 인격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을 상실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송사에 대한 바울의 명확한 태도를 볼 수 있다. 바울은 형제들(성도)이 서로 송사하는 것보다 차라리 부당한 처사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성도가 물질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 그 인격과 그리스도인 다움을 상실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준다. 사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생명과 같이 여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제일 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성도라면 형제 간에 송사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불신자 앞에서 송사하는 것은 더욱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한편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주님의 사랑의 가르침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마 5:38-48).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 원문에는 이 문장 앞에 '그러나 도리어'라는 의미의 '알라'( )가 삽입되어 있어 문맥이 보다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형제 간에 피차 송사하느니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것이 더 낫거늘 도리어 너회들은 그러기는 커녕 같은 형제에게 불의를 행하고 속이고 있구나'라는 뜻이 된다. 즉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를 높여야 할 그리스도인들로서 오히려 서로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고 사기치는 행각을 저질렀음을 의미한다. 육신에 속하여(고전 3:1-3) 영적인 것을 분별치 못한(고전 2:13) 고린도 교인들의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물질만능주의, 경제 제일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주는 내용이다.
6:9,10 불의한 자가‥‥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음행하는 등의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라고 명하였고 본장에서는 소송에 관한 것을 언급하면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 속에 있는 '불의성'(不義性)을 드러내고 그것을 제거하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그렇듯 모든 불의를 깨끗이 제거해 버려야 할 이유를 밝힌다. 즉 바울이 그토록 불의를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은 불의가 하나님의 나라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과 거짓과 불의와 행악자를 미워하신다(시 5:5; 31:6; 45:7). 따라서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되어(약 4:4)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은 불의한 상태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거니와(롬 3:28) 그리스도를 믿노라 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을 때에도(엡 4:1-3) 그리스도의 의를 헛되게 하는 것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약 2:14-26).
미혹을 받지 말라. - 예수께서도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 하라'(막 13:5). 악한 자들, 거짓 선지자들은 가만히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신자들을 미혹한다(벧후 2:1).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자들에게 미혹되어 악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악한 자들과 함께 교만에 빠진 것이다(고전 5:2). 그래서 바울은 영적인 것을 분별치 못하는(고전 2:13; 3:1) 고린도 교인들에게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 미혹의 문제는 외부로부터만 오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의 내부에서도 자기 기만이라는 유혹이 있었던 것이다. 고전 3: 18 주석 참조. 유혹은 외부의 것도 무성지만 내부의 유혹이 더 무섭고 강력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부로부터 오는 유혹은 자기를 속이고 들어오기 때문에 스스로 감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지혜 있고, 스스로 확고한 신앙 위에 서 있다고 교만하였으나 신령한 바울 앞에서 그 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음란‥‥우상 숭배‥‥간음‥‥탐색‥‥남색‥‥토색. - 불의한 자들의 죄목이다. 이러한 죄목은 크게 나누어 성적인 죄, 즉 음란. 간음, 탐색, 남색과 종교적인 죄, 즉 우상 숭배, 그리고 물질적인 죄, 즉 도적, 탐람, 술취함, 토색으로 나뉜다. 그 중 성적인 죄는 자기 상대의 죄, 종교적인 죄는 하나님 상대의 죄이며 물질적인 죄는 사람 상대의 죄이다. 한편 이 가운데 성적인 죄와 종교적인 죄는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 ․ 로마 사회에서 우상을 숭배했던 신전 예배에서는 대개 성적인 문란함이 동반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언급된 죄악의 내용에 대해서는 고전 5:10,11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 바울은 앞에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종류를 열거하고 이제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강하게 선포한다. 이는 불의한 자는 결단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 '이와 같은 자들' 중 '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티네스'( )는 '어떤 자' 또는 '어떤 것'의 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자를 취하면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이와 같은 어떤 자들'이 되어, 본절의 의미는 '고린도 교인들 가
운데 어떤 자들이 불의한 행위를 했더니'가 된다. 그리고 후자를 취하면 '이와 같은 어떤 것들'이 되어,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불의한 가운데 있되 어떤 자는 이런 악을 또 어떤 자는 저런 악을 행하였더니'라는 의미가 된다. 대체로 전자의 해석을 취하고 있다(Calvin, Meyer, Hodge). 한편 '있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테'( )인데 이 동사 또한 단순 미완료 과거로 보느냐 계속적 미완료 과거로 보느냐에 따라 고린도교인들이 '과거에는 불의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또는 '과거에도 그러하더니 지금도 그렇다'가 되어 의미가 달라진다. 그런게 본절의 말미에 있는 동사, '얻었느니라'가 확실한 과거형이므로 본문의 '있더니'도 전자의 견해처럼 과거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본문은 '너회 중에 불의를 행하는 어떤 자들이 몇 있더니 지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었다'는 의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악을 내어 쫓는 능력의 상징이다(막 16:17,18). 또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동력자(動力者)이시다. 즉 성령은 성도를 그리스도를 통해 의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요 16:13).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고린도의 불의했던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깨끗함과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씻음'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아펠루사스데'( )는 중간태를 취하고 있어 '씻김을 받았다'는 의미보다는 '스스로 씻었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이 '씻는다'는 것이 인간의 자의로 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씻는다'는 것은 '거듭남'을 의미하므로(요 3:5)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씻음'은 '자의로 씻는다'라는 의미라기보다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힘입어 죄를 씻어버렸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거룩함'(헤기아스데테)과 '의롭다 하심'(에디카이오데테)은 모두 부정 과거형 수동태로 과거의 어느 순간에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칭의'의 사건을 과거의 일시적 사건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나, '성화'와 관련이 있는 '거룩함'을 일회적 과거의 사건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칭의'는 법정적 선언으로 단번에 신분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지만, '성화'는 신앙 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구원론 '성화' 부분을 참조하라. 따라서 우리는 본절의 '거룩함'을 바울이 성화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의 불의함에서 현재의 정결함으로 옮겨졌다는 것, 곧 그들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죄 씻음)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6:12-20 음행죄의 본질
앞단락(1-11절)에서 성도들 간의 소송 문제에 관해 논의했던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이미 제 5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음행 문제를 재차 언급하며 고린도 교인들이 이를 철저히 경계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제 5장의 내용이 주로 교회 내의 음행 가운데서도 근친 상간(近親相蒸)의 죄에 관한 것이었는데 비해서, 본문의 내용은 일반적인 음행죄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다.
당시의 헬라 문화권이 대부분 그러했지만 특히 고린도에는 우상의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가 남자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것이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고린도인 처럼 행하다'라는 말이 '매춘 행위를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 중의 일부가 여전히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창기와 음행하는 죄악을 범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영적으로 하나가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들이 창기와 한 몸이 되는 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것(14-17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성도가 자신의 몸을 음행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마침내 그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더럽힘으로써 심각한 신성 모독에 빠지게 됨을 경고한 것이다(18-27절). 참으로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노예로 있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이유는 더 이상 사탄의 올무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다(고전 3:16,17). 따라서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유지하여 선하게 사용해야 마땅한 것이다(롬 6:13).
한편 고린도 교인들이 이처럼 음행에 빠진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한 데 그 원인이 있다(12,13절). 즉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여 성도란 무슨 일이든 해도 쇈찮다는 식의 도덕 폐기론에 빠져 있었다. 나아가 헬라의 이원론적 사고에 젖어 있던 그들은 육을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여 어떻게 사용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죄와 율법에서의 자유이다(롬 8:31-35 갈 5:1). 또한 성도의 몸은 주의 권능으로 부활할 것일 뿐만 아니라(14절) 그리스도의 지체요(15절) 성령의 전이다(19절), 따라서 그리스도민은 자유를 누리되 그리스도 안에서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며, 자신의 거룩한 지체를 쾌락이라는 죄악의 도구에 내어맡겨서는 안된다(잠 7:5-27; 벧후 2:13,14).
6: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 내용이 갑자기 급전되고 있다. 그러나 본절 이하는 이미 주어진 교훈(고전 5:9-13)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은 고전 10:23에도 재반복되는 일종의 격언으로 이 격언이 어디서 유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하나는 고린도 지역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격언이라는 주장이다(Pindlay). 헬라 문명의 혜택 속에 살던 고린도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자유 사상에 대한 금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의 사상이라는 주장이다(Alford).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달리 자율적 신앙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본문은 그러한 바을 사상의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고전 8:8,9; 9:1,19). 대체로 후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렇다면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직접 목회할 때에나(행 18:-11) 아니면 몇 차례의 비공식적 편지(고전 5:9 주석 참조)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러한 자유 사상을 가르쳤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자유 사상을 고린도 교인들이 오해하여 분쟁과 음행과 같은 죄를 짓고도 교만하자 이에 바울은 자신이 가르쳤던 그 자유 신앙사상의 참 뜻을 바로 알리고자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자유하다. 그러나 그 자유는 아직도 죄된 세상 안에 갇혀 있는 삶 속에서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 자유는 보다 더 나은 무엇을 위해 제한될 수 있다(Calvin). 즉 세상은 절대적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자에겐 절대적 자유가 유보되는 것이다. 또한 남에게 해를 주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다. 자유는 현명한 절제를 통해서만 획득된다.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 자유를 남용하여 방종하게 되면 종국에는 방종의 노예가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음행하는 것이 자신의 자유라고 하며 음행을 범하면 종국에는 그 음행이 음행하는 자를 지배하게 되어 그는 음행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본문은 그처럼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할 자유가 허용되어 있으나 해서 유익하지 않은 것은 절제함으로 방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야 하는 역설적 자유를 가르쳐 주고 있다.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 음식물은 위를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위는 음식물을 끝없이 요구한다. 이는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인 본능, 즉 식욕의 본능을 말한다. 고린도 교인 중의 일부는 성적 욕구를 이러한 식욕의 본능과 접목시켜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도 육체적 본능이라고 주장하며 음란을 자행했던 것 같다.
하나님이‥‥다 페하시리라. - 인간이 주님의 날에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하면(고전 15:52) 식물과 같은 썩어질 것들은(골 2:22) 다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다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 도 아니하게 되기 때문'(계 7:16)이다. 즉 육신에 속한 것들은 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 앞서 언급한대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자유롭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도 되는 것처럼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음행을 해도 좋다는 궤변을 늘어 놓으며 음행을 자행했던 것 같다. 더욱이 헬라 지역의 사람들은 육은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어떻게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도 일부는 이러한 영향을 받아 자신의 몸을 음란한 데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거듭난 자의 몸은 거룩한 것으로 음란을 위한 것이 아니 라 주를 위한 것임을 역설하며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속하셨다. 그리고 그 인간 구속에는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포함된다(롬 8:11,23). 나아가 주님은 인간이 죽는 날까지 인간의 영과 육을 성화시키신다(롬 8 : 30). 따라서 인간의 몸은 버려질 것이 아니며, 성도들은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롬 12:1). 즉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와 짝해야 하며 음란과 짝할 수 없는 것이다.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다(마 27:38,50; 28:5,6). 그와 같이 하나님은 주의 날에 모든 성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이다(고전 15:51,52; 계 20:5).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몸의 부활을 언급하는 이유는 영광스럽게 부활한 성도의 몸을 결코 음란에 바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6:15 그리스도의 지체. -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여러 번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엡 1:23; 4:16; 5:30; 골 1:18). 그런데 교회는 바로 성도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몸 각자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리고 지체란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며, 그 뜻을 이룬다. 그런즉 성도는 그 몸을 음란한 데 내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음란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 참감람나무에서 돌감람나무 열매가 맺힐 수 없으며 돌감람나무에서 참감람나무 열매가 맺힐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가 불의를 행할 수 없다. 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성도는 창기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불의한 행위를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 6:24; 눅 16: 13). 선이면 선, 악이면 악 둘 중에 하나를 섬길 수밖에 없다. 다음에 나오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이 여기에 예외가 없음을 분명히 확증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선과 악의 경계선은 절대적이다.
6: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 남자와 여자를 짝지워 주시면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다(창 2:24). 여기서 '연합'이란 '정신적인 결합' 뿐만 아니라 '육체적 결합'도 포함한다. 따라서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서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남녀 관계의 원리인 것이다. 이 사상은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해 두셨다(마 19:5; 막 10:8).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은 창기와 관계를 갖는 것은 창기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결합'이 결여된 '육체적인 결합'은 인간의 전인격적인 '결합'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의 원리에 어긋나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될 수 없다. 즉 불의한 행위인 음행이 되는 것이다. 9절 주석 참조. 그러므로 음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고 음행하는 대상의 지체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 전절에서 바울은 '육체적 관계'를 통한 '육적 결합'을 언급하고 나서 이제 그 결합 관계를 그리스도와 성도로 유추시켜 '영적 결합'이라는 명제를 도출시켜 내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이처럼 남녀의 결혼 관계로 유추시켜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고 있는데(계 21:2,9) 실로 성도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 믿음 안에서 살기로 작정할 때(갈 2:20)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며(롬 6:5). 그 연합은 영적인 영적 결합이 된다. 롬 5장 연구자료 '대표와 연합의 원리' 참조.
6:18 음행을 피하라. - 성경은 대부분 죄와 싸우라고 권면한다(롬 7:23; 딤전 6:12; 히 12:4; 유 1:3). 그런데 본문은 정욕이라는 죄에 대해서는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정욕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 내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본능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언제나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롬 7:24). 그러므로 성도들은 음행의 유혹에 대해서는 아예 상대하지도 말고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몸밖에 있거니와‥‥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다른 죄들은 몸 밖에 있으나 음행은 자기 몸 안에 있다는 것이 해석상의 난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이 음행의 죄가 다른 죄보다 크다는 표현이라고도 하고(Calvin), 또는 다른 죄는 외적 조건으로 행해지나 음행은 내면에서 진행된다는 의미에서 묘사된 표현이라고도 하나(Meyer) 적절하지 않다. 아마도 본절은 16절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즉 '육체적 결합'은 인간의 전인격적 결합의 대원리인데, 이러한 전인격적 결합을 파괴시키는 음행은(16절 주석 참조) '자기의 전인격에 범죄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이는 바울이 몸을 지칭할 때 '썩어 없어질 육체'를 뜻하는 '사륵스'( )를 사용하지 않고 '인격적 지체'를 뜻하는 '소마'( )를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지지를 얻는다.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음행의 죄는 분명히 다른 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인격, 즉 하나님의 형상성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바울은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6:19 너희 몸은‥‥성령의 전. - 성도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은 이미 고전 3:16에서 밝힌바 있다. 다만 그곳에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를 성령의 전으로 묘사한 반면, 여기서는 성도 각 개개인을 성령의 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조금 다르다. 하여튼 성도 각 개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이 음행을 피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할 이유를 분명히 밝혀준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 임재의 처소인 전(殿) 곧 성도의 몸은 당연히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본장 자료노트 참조.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 전절에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이다. 여기에서 '산 것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라스데테'( )는 '시장에서 사다'라는 의미의 '아고라조'( )의 제 1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으로, 이는 당시 노예 시장이었던 '아고라'( )에서 값을 주고 노예를 산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말을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노예가 되었던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결국 여기서의 요점은 매매 행위를 통해 성도들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를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음행과 관련된 교훈의 결론으로 제시된 말이다. 즉 성도는 자신의 몸을 소극적인 측면에서 음란을 위한 처소로 사용해서 는 안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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