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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바울의 사도직의 증거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사도직의 영광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12-7:16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즉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 곧 사도권의 정통성과 그 기본적 본질 나아가 이러한 사도직에 임하는 자신의 성실한 자세 등에 대하여 일단 소극적으로 변호하고 그에 근거하여 준 권면의 말씀을 보도하는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인 것이다. 또한 본장은 좁게는 1:12-7:16 사이의 일련 기사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사도로서의 바울 자신의 직분의 정통성과 이의 성실한 수행 자세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내용을 보도하는 2:14-5:10까지의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에서 본장은, 바울은 여타 12사도처럼 예수 생전의 제자가 아니며 또한 그들로부터 직 ․ 간접의 추천서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의 사도 직분과 사도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고린도 교회 내의 일부 신자들의 부당한 주장에 대한 바울의 해명을 보도하고 있다.
한편 이런 본장에서 바울은 자신도 직접 예수로부터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서의 소명을 받았던 사실(행 9:1-21; 22:21)과 기존 12사도들도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한 사실(행 9:26-28; 갈 2:8), 그리고 그 이후 내내 바울 자신이 순결한 자세로 사도로서의 사역에 임한 사실은 물론 자신의 사역에 동반하여 나타난 각종 이적(행 19:11,12)과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사역 결과 숱한 자들이 성령 세례를 통하여 구원을 얻은 사실(행 14:27; 16:5) 등을 제시하며 직설적으로 변론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먼저 자신의 사역으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성도가 된 사실 자체가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영적 증거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제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와 달리 의문(儀文) 곧 형식적이요 외적인 율법의 문자적 조항에 의한 중거가 아니라 성령의 확증에 의한 영적 증거가 필요함을 밝힌다. 그리하여 결국 자신은 이러한 영적 사실들이 증명하는 대로 분명 사도이지 않는가 하고 매우 간접적이고도 비유적으로 변론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 시대와 구약 시대가 서로 각각 대조적으로 갖는 구속사적 특징의 하나인 의문의 시대와 영의 시대로서의 특징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본주석 제 14권 신약 총론 특별자료 중 구약과 신약의 구원 섭리의 경륜 비교 도표를 참조하라.
이제 이러한 본장의 내용 전개 자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 1-5절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야기된 바을 자신의 사도직(the Apostleship)에 대한 불신을 해명함에 있어서 다른 구구한 중거 이전에 바로 자신의 사역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사실 자체가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영적 중거임을 지적한다. 즉 바울 자신의 선교로 성도가 된 고린도 성도 각자가 바을 자신에 대한 영적 추천서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사역으로 성도가 된 고린도 교회 성도 각자가 자신의 사도직의 영적 증거임을 먼저 제시한다. 다음 후반부 6-18절은 먼저 이제 신약 시대에는 의문의 법 곧 형식화된 문자적법이요 또한 구원을 실제 가져오는 계시가 아니라 다만 인간의 죄를 지적하여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나는 율법에 의하여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직분을 얻었던 구약 시대와 달리 구원의 실효를 가져오는 복음과 이를 주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으로 각자가 직분을 얻는 바 이처럼 영적으로 얻는 신약 시대의 직분의 영광은 의문의 법으로 얻는 구약 시대 직분의 영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6-11절). 그리고 이 제 이 처 럼 구속사의 시대가 영의 시대를 예표하는 기능을 가진 것에 불과하였던 의문의 시대에서 참 실체가 드러난 영의 시대로 전환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영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였던 의문의 시대에 속하는 외적 증거나 영광을 추구하는 사실은 어리석으며 오직 참 구원과 자유를 가능케 하는 예수의 영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함을 말한다(12-18절). 그럼으로써 결국 신약 시대에 사도직을 가진 바울에게 그의 선교로 고린도 교우들이 성도가 되었다는 확실한 영적 중거 이외에 또 새로이 의문에 속한 추천서 등을 요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논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본장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두 가지 측면의 의의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본문의 내용 자체가 보여 주는 바 이제 구속사의 시대(時代)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바뀌었고 각자는 의문의 시대와 영의 시대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도 밝힌 대로 각각 의문(儀文)과 영(靈)의 시대로서 대조적으로 갖는 특징은 물론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상호 관계 및 각각 대조되는 측면 전체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필요한 바 본주석 제 14권 신약 총론 특별자료 중 구약과 신약의 구원 섭리의 경륜 비교 도표를 참조하라.
둘째는 본문 내용이 반영하는 바 사도 바울은 구속사의 두 시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물론 그러한 구속사의 노정에서 자신이 맡은 바 사도로서의 소명의 본질과 그 영광에 대해서도 명료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의 전생애를 걸쳐서 그처럼 처절한 한계 상황에 거듐 직면하면서도 이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되었던 비상한 시기에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소명을 마침내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도 태초부터 종말까지, 아니 하나님의 경륜으로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실체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을 때만이 이 잠시의 나그네 인생길에 연연하지 않고 영원한 천국을 지향하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나 자신에게 부여된 구속사적 소명에 꿋꿋이 헌신하는 방향과 목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무릇 인간이 란 창조주 하나님처 럼 스스로 무한한 초월자가 아니라 피조된 유한자인 바 각각 그가 갖고 있는 삶에 대한 인식과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 그의 인생의 모든 차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로 이런 사실에서 우리는 더욱더 절대 무오하게 하나님과 인간, 우주와 역사 곧 구속사의 총체적 진리를 보여 주는 유일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聖經, The Bible)의 소리를 경청해야 할 당위성도 다시금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외울 말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바울이 사도로서 새언약의 일꾼된 영적 증거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새 언약의 일꾼의 우월한 영광
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 ○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영의 시대인 신약 시대
12 ○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3:3, 성령의 명칭
요 14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3:3 성도의 신분에 대한 묘사들
1. 그리스도의 제자(마 5:1)
2.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4)
3. 주의 자녀(요 1:12,13)
4. 그리스도의 증인(요 15:27)
5. 그리스도의 형제(요 20:17)
6. 하나님의 후사(롬 8:17)
7. 그리스도의 종(고전 7:22)
8.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9.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10.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11.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
12. 하나님의 일꾼(고후 6:4)
13. 그리스도의 몸(엡 1:23)
14. 하나님의 백성(엡 2:19)
15. 그리스도의 신부(엡 5:23)
16. 그리스도의 군사(딤후 2:3)
17. 하나님의 제사장(벧전 2:9)
18. 택하신 족속(벧전 2:9)
19. 거룩한 나라(벧전 2:9)
20. 나그네(벧전 2:11)
도표-3:6 율법과 복음의 본질 비교
갈 3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 연구-3:6 의문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그람마'( )로서 동사 '그라포'( )에서 나온 말이다. '그라포'는 본래 '파다'(gave), '긁다'(scratch)라는 뜻에서 파생되어 '쓰다', '기록하다'(write)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시 글을 쓸 때 들판이나 양피지에 글을 파서 새겨 넣거나 긁어서 썼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명사형 '그람마'의 문자적인 의미는 '새겨진 것', '기록된 것'으로서의 '글자'(a lefter), '문서'(document), '책'이라는 뜻을 가진다. 한편 여러 개의 책으로 된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는 대개 '신성한', '거룩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히에로스'( )를 함께 사용하여 다른 문서와 따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낱개의 문서나 개인의 글들을 가리킬 때는 단순히 '그람마'로만 표현한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한 '의문'이라는 말은 좁게는 구약 율법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넓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 곧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인 복음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인간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한낱 문자에 지나지 않는 인간적인 지혜나 생각에서 비롯된 그런 종류의 글들을 총칭하고 있다. 본문은 후자의 경우로서 바을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은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에서 비롯된 '의문'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한편 바울이 구약 율법을 자주 '의문'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구약 율법 자체가 무의미하고 헛되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구약 율법의 본질적인 의미는 왜곡한 채 단지 그것을 문자적으로만 지켜서 구원 얻고자 한 율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도표-3:6-18 본장에 나타난 율법과 복음의 비교
율법 복음 성구
1. 옛 언약 새 언약 6절
2. 의문 영 6절
3. 죽이는 것 살리는 것 6절
4. 죽음의 직분 생명의 직분 7,8절
5. 돌비에 새겨짐 마음에 새겨짐 7절
6. 영광스러운 것 더 영광스런 것 7-11절
7. 정죄하는 것 의롭게 하는 것 9절
8. 없어질 것 길이 있을 것 11절
9. 가려져 있는 것 명백한 것 12-16절
10. 속박하는 것 자유케 하는 것 17절
11.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 변화시키는 것 18절
삽화-3:18, 헬라 시대의 거을
당시의 거울은 은이나 동을 잘 연마하고 광택을 내어 만든 것으로 오늘날의
거울과는 달리 사물의 보이는 바가 그렇게 선명치는 않았다(고전 13:12).
도표-3:12 성도의 소망의 특징
딛 2장 자료노트 참조
3:1-5 새 언약의 일꾼된 영적 증거
전장 마지막 단락(고후 2:14-17)에서 사도직에 대한 자신의 바른 인식과 자신이 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하는 기본적인 해명을 한 바울은 이제 본장 이후 5:10까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사도의 직분의 정통성과 이를 수행하는 사역 자세에 대해 해명한다. 바을은 여러 차례에 걸친 그의 고린도 방문 계획 변경으로 인한 고린도 교인들의 불신임 이외에도 팔레스틴에서 고린도 교회에 잠입한 거짓 사도들의 충동을 받은 자들에 의해 그의 사도직을 증명할 수 있는 천거서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사도직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사도직에의 도전은 단순히 바울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멸시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사도직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이요, 따라서 그의 사도직을 부인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본격적으로 그의 사도직을 변호하기에 이론 것이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본문은 추천서와 관련하여 자신의 사역으로 성도가 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영적 중거임을 밝히는 부분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어떤 사랑의 신분이나 자격을 확인하는 공적인 추천서가 통용되고 있었으며 유대교나 기 독교도 이러 한 추천서를 통해 거짓 교사를 가려내곤 하였다. 하지만 마을의 경우에는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위임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피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에 추천서 같은 것은 얼었다. 그런데 팔레스틴에서 추천서를 갖고 고린도에 온 자들은 바울이 추천서가 없다는 이유로 그가 거짓 사도요, 그의 복음은 사술이라고 비난함(1절)은 물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 대신에 율법을 지리야 구원얻는다고 가르쳤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곧 자신의 추천서임을 밝혀 거짓 교사들과 그에 동조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한 것이다. 즉 바울은 그의 복음 사역으로 인해 성도가 된 고린도 교인들 자체가 그의 사도직을 보중하는 가장 확실한 추천서가 된다는 사실과 이와 같은 자신의 추친서는 한시적인 종이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육의 심비에 쓴 영원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2-5절). 사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전도 사역의 열매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이들이 바울을 부인한다 해도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해야 마땅하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들의 존재 지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3:1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 '다시'라는 말은 그 당시 바울이 항상 자기를 자랑한다는 비난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Hodge).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스스로 자기의 업적을 자랑하기를 좋아하며 천거서도 받지 못한 거짓 사도이면서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한다고 비난한 듯하다. 한편 바울이 여기서 이 말을 다시 한 것은 고후 2:17의 내용이 자기 변명을 넘어서 자기 추천과 자랑 같은 인상을 준다고 느껴져 이를 변명하기 위함이다(Barrets).
어떤 사람처럼‥‥할 필요가 있느냐. - 바울이 자신은 자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천도 필요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말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고후 2:17의 '수다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Plummer, Bernard). 그리고 '천거서'는 소개장의 일종으로 이를 소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직분과 권한을 대행한다는 신임장과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바울도 디모데와 디도를 고린도에 파송할 때 이 천거서를 써준 적이 있다(고전 16:10; 고후 8:18).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적인 교인들로부터 천거서를 받아 고린도에 와 교인들을 선동하며 바울이 천거서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거짓 사도로 매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바울은 누구의 추천서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추천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그가 거짓 사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직접 위임받았기 때문이다(행 26:12-18). 따라서 그는 사도로서 자천도 타천도 필요치 않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천거서의 필요성을 결코 부인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그의 사도권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주장하려 하는 것이다. 즉 바울은 사람들의 추천보다 자신의 깨끗한 양심과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통해 거둔 전도의 열매인 고린도 교인들 자체야말로 사도로서의 그의 진정성을 보여 주는 확실한 천거서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바울 자신에게는 추천서가 필요없었는데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의 추천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고전 9:2의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는 표현은 본절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즉 고린도 교회의 존재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가시적 표징'이라는 것이다(고후 13:5, Barrett). 사실 고린도 교회가 바을이 사도로서 행한 전도 사역의 열매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
므로 다른 이들이 바울을 부인한다 해도 고린도 교인들 만큼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해야 한다. 만일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권과 그가 전하는 복음을 부인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그들이 서있는 지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썼고. -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전도 사역의 열매였다. 따라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는 마치 그의 사도직에 대한 가시적 표징으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면에서 바울은 '우리 마음에 썼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그가 소유한 추천서와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소유한 추천서의 차이점을 다음절에서 비교 대조하고 있다.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 즉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대필자로 하여 쓴 편지라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고린도 교인들의 회심은 바울을 도구로 하여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사람들에 의해 위임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했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는 먹으로‥‥오직 육의 설비에 한 것이라. - 바울이 가진 추천서의 중요성과 탁월성을 보여 주는 구절로 바울은 이를 두 가지 측면에서 밝히고 있다. 첫째, 자신의 추천서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먹은 식물이나 광물에서 채취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롬 8:9). 결국 이 말은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소유한 것과 같은 먹으로 쓰는 추천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반면, 바울이 가진 추천서는 그리스도만이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금 그가 가진 추천서는 어떤 추천서 보다 탁월한 신적 권위를 가진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며 그의 사도직 또한 정당함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자신의 추천서가 돌비가 아닌 육의 심비에 쓰여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종이에'가 아니라 '돌비에'라고 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바울은 일반 편지와의 대조에서 구약의 십계명과의 대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먹으로 쓴 추천서를 가진 고린도의 거짓 교사들이 유대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린도 교인들에 게 복음이 아닌 율법을 가르치며 지키도록 강요했음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모세의 사역과 관련시켜 볼 때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들판에 직접 기록된 십계명은 하나님에서 주신 모세의 사명에 대한 확고한 증거가 되었다.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 육의 심비에 써 넣은 복음이야말로 바울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확고한 증거라 아니할 수 없다(Hodge). 즉 고린도 교인들의 회심은 어떤 외적인 이적이나 증거보다도 월등한 이적이요 바울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렘 31:31,33; 겔 11:19). 한편 본절부터 5절까지는 구약 직분에 대한 신약 직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6-11절의 도입부적 역할을 한다.
3:4 우리가‥‥확신이 있으니. - 여기서 '이 같은 확신'은 ①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는 추천서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과, ② 고후 2:14-17에 나타난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바울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의 경로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바울 자신의 확신은 자신의 성결이나 재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리스도가 자신을 통하여 한 활동에서 나온 것임을 나타낸 말이다(고전 15:10).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는 직역하면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으로 자신의 굳은 확신을 표명하는 말이다(롬 4:2).
3:5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 본절은 전절과 같은 확신의 피력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은 자기 고집이 강하고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바울 자신의 행한 일은 결코 자신의 능력이나 스스로의 계획에 의해 되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일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즉 바울은 자기를 통해 나타난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항상 자기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빌 4:13,14).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 여기서 '만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카노테스'( )는 고후 2:16의 '감당하리요'와 같은 단어로 마음의 쾌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로서의 충분한 능력과 재능을 뜻한다(Aford). 즉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대한 충분한 능력과 재능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사 사도로서의 직무를 감당케 하여 주심을 긍정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3:6-11 새 언약 일꾼의 우월한 영광
앞단락(1-5절)에서 자신이 소유한 추천서는 바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성도가 된 고린도 교인들이라는 사실을 피력한 바울은 이제 본문에서는 영적으로 얻는 신약 시대의 직분이 의문의 법으로 얻는 구약 시대의 직분과 비교할 때에 우월한 영광을 가짐을 지적한다.
주지하다시피 구약의 의문, 곧 율법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으며 도리어 인간을 정죄하여 끝내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롬 7:9,11). 한 가지 긍정적인 기능이 있다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갈 3 :15-29).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선 갈 서른 특별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유대인들은 바로 이 과도기적 율법 아래 살면서 실패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 그와 같이 옛 언약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명얻게 하는 새 언약으로 주신 것이 복음이다(롬 8:2).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복음을 주시고 그것을 중거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얻게 하기 위해 세운 직분이 바로 사도직이었다(6절). 그러한 의미에서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은 생명 없는 옛 언약의 직분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요. 바울은 생명얻게 하는 새언약의 직분을 받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문의 직분을 맡은 자에게도 영광이 있었다. 즉 의문의 직분을 맡은 자의 대표격인 모세의 얼굴에 있는 영광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그의 얼굴을 주목하여 블 수 얼었던 것이다(7절). 하물며 생명의 복음(롬 8:2)을 맡은 영의 직분을 맡은 자의 영광은 더욱 크다는 것이 바을의 논지의 요지이다(8,9절).
사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한시적인 것으로 곧 없어질 것이었다(7절). 이는 율법이 한시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즉 율법은 복음이 올 때까지만 활동하도록 주어진 임시적인 법이었다. 물론 옛 언약의 직분을 맡은 모세의 얼굴에 영광이 나타났듯이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면 달은 그 광채를 상실하고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취됨은 물론 더 나은 법인 신약의 복음으로 대체됨으로 더 이상 아무런 효력도 발생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의문의 직분 역시 영의 직분 앞에서 더 이상 아무런 영광도 없다. 물론 영의 직분은 복음이 영원한 것처럼 그 영광 또한 영원하다(10,11절). 결국 이러한 본문은 자신들의 의문의 직분을 자랑하며 바울의 사도직을 비난하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3:6 새 언약의 일꾼. - 이곳에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격을 '새 언약'과 관련하여 표현하고 있다. 즉 바울은 여기서 고후 2:16의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인 복음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새 언약의 일꾼'임을 밝히고 있다. 한편 여기서 '새 언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체결된 언약을 '옛 언약'(Old Testament)이라 부른다. 그리고 복음의 제도를 모세의 제도와 구별하여 '새 언약'(New Testament)이라 부른다(마 26:28; 고전 11:25; 히 8:8).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 특히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속의 위대한 약속은 옛 언약의 근저에도 깔려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 혹은 은혜 언약에 대해서는 모세 언약 이전의 것이라 해도 새 언약이라 부르며 이것은 아담과 세우신 행위 언약과 구별된다. 따라서 그냥 새 언약이라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복음의 제도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타락한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언약을 가리키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물론 옛 언약도 모세의 언약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행위 언약을 가리키는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문제를 결정할 때는 항시 전체 문맥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하는데, 본절에서의 새 언약은 모세의 언약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새 언약이 분명하다.
의문으로‥‥영으로. - '의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람마'( )는 '문자' 혹은 '기록된 것'을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옛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가리킨다. 또 '영'(프뉴마)은 '생
명', '영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생명의 법이요 성령의 법으로서의 복음을 가리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구약의 직분은 '의문의 직분'이라 부르며, 신약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라 부른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의
문의 일꾼이 아닌 영의 일꾼으로 만드신 이유이다. 즉 하나님께서 바울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신 것은 옛 언약은 죽이는 것이요 새 언약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깨닫지 못하였으나(롬 5:13) 율법이 와서 죄를 깨닫게 하고(롬 3:20) 죄를 더하게 하여(롬 5:20) 결국 자기를 죽였다고 고백했다(롬 7:9,11). 실로 율법은 죽이는 법이요, 복음은 생명의 법이다(롬 8:2). 때문에 율법은 결코 구원을 이를 수 없으며 그 기능도 죄를 깨닫게 하며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갈 3:15-29). 유대인들은 이 과도기적 율법 아래 살면서 실패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고, 하나님은 구약에 실패한 그들을 위해 신약을 세우신 것이다(렘 31: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율법을 고집하며 복음을 배척한다면 그처럼 어 리석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과 복음을 배척하고 이 율법을 강요함으로써 스스로 어리석음을 범하는 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한편 옛 언약에 대한 새 언약의 탁월성을 설명하기 위해 두 언약의 차이점을 비교하면 다음의 도표와 같다.
구분 옛 언약 새언약
1. 언약의적용 대상: 육적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
2. 언약의성립 과정: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맹세와 하나님의 아들
동물 희생 제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3. 언약수행 방법 행함 믿음
4. 언약이 가져다주는 결과 죽음 생명
이상에서 보듯 옛 언약은 그 가치나 효력면에서 새언약과 비교가 되지 않으며, 새 언약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갈 서론 특별자료, '구속사적 관점에서 연결되는 복음과 율법의 이해'를 보다 참조 하라.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본절에서 바울은 구약 직분의 영광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신약의 영의 일꾼이 구약의 의문의 일꾼보다 더욱 영광스러움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임에 틀림없다. 즉 인간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갈 3:24)에 불과할 뿐인 구약 의문의 직분의 영광을 설명함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의 직분의 영광의 탁월함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돌에 써서‥‥의문의 직분'은 구약의 직분을 지칭하는 것으로써 그 직분의 출처와 결과와 성격을 제시한다. 이 직분은 계명과 문자에 의해 역사하기 때문에 '의문의 직분'이라 하고, 그 결과는 죽이는 것이기에 '죽이는 직분'이라 한다. 이러한 의문의 직분을 맡은 모세도 영광이 있었고(출 34:29,30), 사람들은 이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감히 모세를 바라볼 수 없었다. 하물며 생명의 직분인 영의 직분이야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 '없어질'에 해당되는 헬라어 '카타르구메넨'( )은 '폐지하다', '소멸하다'라는 의미의 '카타르게오'( )의 현재 수동태 분사로서 '사라져가는', '샐어지는'의 뜻이다. 즉 모세의 얼굴의 영광이 늘 빛난 것이 아니라 곧 사라지고 만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한시적으로 주어진 의문의 직분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의 법으로 주어진 영의 직분의 영광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영광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이 부분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는 의문에 기초한 언
약은 사라져가고 영에 기초한 새로운 언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이다(Barrett).
3:8 하물며‥‥아니하겠느냐. - 율법의 직분을 맡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았다면 복음의 직분을 맡은 사도들이야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즉 죽이는 직분인 율법의 직분도 영광스러웠는데 생명을 주는 영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느냐는 반문이다. 사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의 직분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영원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분여된 영광이라는 면에서 크고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영광이 있지'는 '영광스럽게 되다'라는 미래형으로서 단순히 시간적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이미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논리적 미래를 지칭한다(Hodge, Barrett).
3:9 정죄의 직분‥‥의의 직분은. - 본절에서 바울은 의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을 기능과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의문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요, 영의 직분은 의의 직분이라는 것이다. 사실 율법은 본래 선한 것이지만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율법은 하나님의 엄격한 요구 앞에 인간을 세워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를 정죄한다(롬 3:19,20). 따라서 의문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사해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를 의롭다 칭한다(롬 3:26). 따라서 영의 직분은 의의 직분임에 분명하다. 바울은 본절에서 이처럼 영의 직분이 의문의 직분보다 더 우월하고 탁월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차원을 제시함으로써 의문의 직분보다 영의 직분이 더 큰 영광을 지닌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3:10 영광되었던 것이‥‥영광될 것이 없으나. - 바울은 앞에서 의문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이었으나 영의 직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하찮은 것이었음을 강조하여 왔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문의 직분의 영광은 영의 직분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전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율법은 그 자체로서는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달이 태양이 떠오르면 그 광채를 상실하고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성취됩은 물론 더 나은 법인 신약의 복음으로 대체됨으로 더 이상 아무런 효력도 발생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의문의 직분 역시 복음의 직분 앞에서 더 이상 아무런 영광도 없는 것이다.
3:11 없어질 것도‥‥길이 있을 것은. - 의문의 직분은 비록 없어질 것이었으나 그 역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았다. 하물며 영원히 있을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스러운 것임은 자명하다. 한편 본절에서 더욱 극심해 보이는 의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의 대조는 고린도 교회 내부에 있는 유대주의자들과 바울의 사역상의 자격을 비난하는 부류들을 겨냥하기 위함인 듯하다. 즉 바울은 의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의 근본적인 차이를 제시함으로써 자신과 복음을 비난하는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다.
3:12-18 영의 시대인 신약 시대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일꾼이며 그에 따르는 영광이 옛 언약의 직분이 가진 영광과는 비할 수 없이 큰 것이었음을 언급하였다(6-11절).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출 34:29-35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고린도 성도들이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확실한 영적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의문에 속한 천거서를 요구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출 34:29-35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을 때 그 얼굴의 광채를 수건으로 가린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즉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계명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영향으로 나타난 일시적인 광채를 수건으로 가려 백성들이 그 영광을 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모세가 영광을 수건으로 가린 것은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가 율법의 상징인 광채를 가림으로써 율법을 영원한 것으로 여겨 절대시 하는 것을 막고 율법이 일시 적이고 필연코 없어질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율법을 절대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음은 물론, 율법이 예표하는 실체로서의 복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가리워 광채를 볼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마음이 완고하고 율법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차 율법이 예시하는 구원의 복음을 영접지 아니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편견에 사로잡힌 거짓 사도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일부 고린도 성도들도 지금 바울의 사도직과 관련하여 바울에게 의문에 속한 천거서를 요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 것이다(12-15절).
한편 새 언약의 복음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요 영원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살리는 생명의 법이다(롬 8:2). 따라서 바울은 옛 언약을 맡았던 모세가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같이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복음을 더욱더 담대하게 전파함은 물론 복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증거했다. 나아가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의 생명도 아깝지 않게 여겼다. 그것은 복음의 영광이 영원하고 생명을 주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새 언약과 옛 언약, 복음과 율법, 영의 직분과 의문의 직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실로 복음은 정죄가 아닌 자유를 주며, 수건에 가리운 듯한 희미한 영광이 아니라 누구나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영광을 가져다 준다(16-18절). 그러므로 새 언약의 중보(仲保)이신 예수 그리스도(히 8:6; 9:15)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온전히 도달할 수 있으며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의 입으신 영광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누리는 영광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렸던 영광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세가 누렸던 영광보다 훨씬 크고 지속적이다. 그들이 누렸던 영광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우리가 누리는 영광은 지극히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기에, 감히 서로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다.
② 새 언약의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은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다가, 마침내 변화 산 위의 그리스도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 처럼 변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성도들은 점진적으로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 후에 영화의 단계에 이르기를 소망해야 하는 것이다(고전 15:43,44; 빌 3:21).
3:12 이같은 소망. - 이는 바울이 지금까지 밝힌(6-11절) 복음과 복음의 직분이 율법과 율법의 직분보다 월등히 영광스럽고 불변하다는 사실에 대한 소망이다. 한편 바울은 4절의 '확신'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소망'으로 표현하고 있다(Hodge).
담대히 말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이 자주 애용하는 표현으로 특히 옥중서신에서
많이 나타난다(엡 3:12; 빌 1:20; 골 2:15). 여기서 '담대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팔레시아'( )는 원래 '말을 함에 있어서의 솔직함 또는 자유 ''두려움 없는 정직함'이란 뜻으로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공명 정대하게 말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본절에서는 바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월하고 길이 있을 영광을 소망으로 삼고 아주 솔직하게 고린도 교회 앞에 13절 이하의 내용을 설교하고 말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13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 출 34:29-35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해석이다. 즉 바울은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사실을 자기 얼굴의 영광의 광채를 백성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자기 얼굴과 광채를 보지 못하게 수건으로 가렸을까? 혹자는 이에 대해 모세가 그의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면 백성들의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그의 권위를 무시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arris). 그러나 이 주장은 바울이 모세를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유를 다른 각도에서 찾아야 한다. 즉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이유는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가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이요 없어질 것임을 알고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두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지금 율법이 그리스도가 오기까지요 그리스도가 오면 그 목적을 다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율법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을 숭배하려는 의도를 방지하기 위해 율법의 상징인 광채를 모세가 수건으로 가리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울 자신은 복음의 영광이 영원하므로 담대히 말한다는 것이 그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이다.
3:14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 유대인들이 그 마음의 완고함으로 복음을 영접지 못한 사실을 지적한 구절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모세는 그 얼굴의 광채 곧 율법의 영광이 한시적인 것을 알았던 까닭에 백성들이 율법을 절대적 갸치를 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광채를 수건으로 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마치 구원의 방편인 양 그것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며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이 예표하는 실체로서의 복음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세의 얼굴에 수건이 가리워 광채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그 마음이 완고하여 율법이 예시하는 구원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영접지 않은 것이다. 한편 여기서 '수건'은 구약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는 율법주의적 편견을 가리킨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신앙에서 율법의 참뜻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Hodge).
3:15 오늘까지‥‥그 마음을 덮었도다. - 전절의 반복이다. 다만 바울은 14절의 '구약'이라는 표현을 본절에서는 '모세의 글'이라고 하여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율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마음'(카르디아)은 지적 활동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로, 수건이 마음을 덮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편견으로 옛 언약만 봄으로 새 언약인 복음을 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3:16 그러나 언제든지‥‥벗어지리라. - 출 34:34, 곧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의 반영이다. 즉 바울은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수건을 벗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언제든지 나아가기만 하면 그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 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돌아가면'(에피스트렙세)은 '회심하면'이란 뜻이다. 즉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으면 결단코 구약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
이다. 왜냐하면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 기록된 까닭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 지금까지 논하였던 주제의 결론에 해당된다. 즉 바울 자신의 사역과 율법과 비교된 복음의 우월성의 결른적 표현이다. 여기서 '자유'는 본서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특별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käsemann). 이는 율법, 정죄, 죽음의 반대 의미로써 언급되었고 바을의 '담대함'(고후 3:12)의 근거가 된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속에 영으로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율법으로부터 구속당하지 않게 된다'라는 것이다(롬 8:2). 이는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영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 15:45). 이에 대해서는 갈 서론 특별자료를 보다 참조
하라.
3:18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 여기서 '거울을 보는 것 같이‥‥보매'에 해당하는 '카토프트리조메노이'( )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타나는 단어로, 이는 고전 13:12의 '거울로 보는 것'(블레포멘 디 에소프트루)이 '희미함'을 표현한 것과 달리 명백하게 보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절은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듯 마음의 완고함을 버리고 구약에 나타난 주의 모습을 밝히 보는 것을 나타낸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 '주의 영광을 본' 결과로 주의 영광을 보고서 주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면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됨을 의미한다(Barrett). 여기서 '형상'은 신자들이 성경을 통하여 알게된 그리스도의 형상을 뜻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형상 자체를 가리킨다(빌 2:6). 하여간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뜻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변화와 아울러 미래의 완전한 변화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 직역하면 '영광에서 영광으로'이다. 즉 현재의 영광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현재의 영광'은 영의 직분의 영광을 가리킬 뿐 아니라 이전에 믿음으로 변화를 받은 영광까지도 포함한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우리가 수건을 벗게 되는 것도,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는 것도,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는 것도,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도 모두가 다 성령의 역사에 속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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