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찬란한 고독
차 은 량
길을 찾지 못해 여러 번 차를 돌려 부안의 매창공원을 찾았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매창의 시 한 편은 이화우(梨花雨)였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하락 하노라
배꽃비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이 가을 찬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에도 내 생각을 하실까 하는 매창의 절절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을 때 다시 눈에 들어온 시는 ‘증취객(贈醉客)’이었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요.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羅衫隨手裂(나삼수수렬)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하, 그거 참 절창이다” 하는 감탄사가 슬몃 아니꼬웠다. 스스로 벗지 않는 저고리에 손을 댄 무례한 취객에게 주기엔 백번 아까운 글이다. 무단히 배알이 뒤틀렸다. 매창의 시가 새겨진 시비들을 한참을 돌아보고 차를 돌려 내소사로 향하는데 매창의 생각이 떨쳐지질 않았다.
장맛비가 잠시 숨을 죽인 전나무 길을 걸어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문을 보러갔다. 주말의 한낮, 관광상품이 되어버린 절집의 소란이 마뜩찮아 후일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오랜만에 만나 밤 바닷가를 거닐며 흐뭇한 시간을 보냈던 벗들과 헤어져 쏟아지는 빗속의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쓸쓸한 심정과는 달리 음악도 듣지를 못했다. 머릿속에 꽉 들어찬 매창의 생각에 흘깃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바라보았으나 조수석은 비어있었다. 집에 돌아와 이틀간 비워둔 골방에 들어서자 열어놓은 창밖으로 뒤란의 밤나무 무성한 가지들이 비바람에 아우성을 쳐댔다. 매창… 매창… 읊조리며 책장의 책들을 아래위로 흩어가며 매창을 찾았다.
조선의 3대 시기(詩妓)로 꼽히는 매창((梅窓 1573~1610)과 황진이(黃眞伊 1500년 초기~?), 운초(雲楚1820~1869. 이는 정확하지 않다)는 평생 한 남자의 온전한 사랑을 차지하지 못한 채 기나긴 고독과 기다림 속에 시작(詩作)에 매달려 살았다.
황진이는 소세양(蘇世讓 1486~1562)과 김경원(金慶元), 서경덕(徐敬德 1489~1546)과 이언방(李彦邦)의 시와 예술을 사랑했다. 유학자 서경덕을 흠모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벽계수를 조롱하고, 재상의 아들인 이생(李生)을 꼬드겨 금강산 유람을 떠날 적에 하인을 대동한 이생을 설득해 서로 베옷과 삿갓차림으로 길을 나선 호방함만 보아도 천하의 황진이가 사내들의 사랑만을 해바라기하진 않았다는 것쯤이야 짐작하고도 남는다.
운초 또한 서른다섯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연천공 김이양(金履陽, 1755~1845)과 사랑을 시작한 발단도 김이양과의 첫 만남에서 그가 먼저 운초의 시를 암송한데서 출발한다. 세도가 출신의 판서영감과 명기로 소문난 운초는 서로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던 차, 시인은 시인을 알아보는 법. 시작을 통한 대화로 운초와 김이양은 상대의 뛰어난 감수성에 호감을 갖는다. 그러던 중 김이양은 예조판서로 발령을 받아 상경하는 길에 운초와의 후일을 기약하나 18년 세월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다. 18년 긴 세월을 김이양을 기다린 운초의 속셈이 판서영감의 첩이 되어 팔자를 고치겠다는 속셈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설령 그렇다 해도 조선시대 일개 기생의 몸인 운초의 그것을 흉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치다. 이윽고 퇴직하여 주변정리를 마친 김이양은 남산 중턱에 새로이 집을 짓고 운초를 부른다. 운초는 드디어 고대하던 김이양의 소실이 되었다. 운초는 그 집에서 당대의 시인묵객들과 시회를 즐기며 초당마마로 편안한 세월을 살았다.
매창의 길고도 고독한 사랑을 생각하면 7월도 춥다. 스물여덟 살 나이 차가 무색한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 1545~1636)과의 관계는 시의 길을 걷는 도반이거나 학문적 선후배이거나 사제지간으로 보고 싶다. 유희경은 천민출신의 상두꾼이었으나 인목대비 폐위사건 때 의리를 지켜 벼슬을 보장받고 조선 최고의 상례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는데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번득이는 시작과 풍류를 즐기며 운우지정을 나눈 8개월 꿈같은 세월을 함께 보낸 유희경은 서울로 간 뒤 소식이 없고 매창은 고독한 16년의 세월을 그를 그리워하며 보낸다. 그 사이로 허균(許筠 1569~1618)이 등장한다. 조선 최고의 여성시인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은 바람둥이였으며 반골기질이 강했다. 이 바람둥이는 1400여 편의 시를 쓴 실력가이기도 했다. 매창과 7년간 편지를 나눈 것을 비롯하여 십여 년 교류를 하는 동안 이 둘은 서로 몸을 섞지 않았다. 시와 편지를 나누는 지적우정의 관계였다. 그러나 허균의 일생은 불운했다. 죽어서 만나자던 허균과의 약속을 남겨두고 매창이 먼저 세상을 뜬 후, 불운한 천재 허균은 대역 죄인으로 형장의 이슬이 되어버려 매창의 무덤에 함께 묻히지 못했다.
매창이나 황진이, 운초의 생은 고독했다. 이들이 여염집 아낙이었으면 평생 고독을 몰랐을까. 기다릴 일이 없었을까. 고독이라는 숫돌에 영혼을 갈아댄 그들이었기에 작품세계도 그토록 빛나는 것인가. 동시대를 살았던 명문 사대부 출신의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또한 부부애가 원만하지 못했다. 남편은 기방을 드나들었으며 친정은 당쟁에 휘말려 풍비박산 났다. 시어머니는 모질었으며 일찍이 어린자식 둘을 잃었다. 조선시대 여성문학의 거두인 이들이 그토록 외롭고 고독했던 것은 일상의 삶이 평탄하지 않은데다 영혼의 키 높이가 같은 상대가 옆에 없거나 혹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에 있었다. 지금 후대에 찬연히 빛나는 이들의 문학은 그러한 쓸쓸한 시간에서 생겨났다.
기나긴 고독과 그리움, 기다림, 슬픔의 감상을 뛰어넘어 영혼과 사물의 본질과 만나 한 판 승부를 걸었던 조선의 여성시인들. 그런 일들은 그 시대 여염집 아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난설헌처럼 독자적인 사고와 실천이 가능했던 입장에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만 지엄한 시부모 밑에서 지아비를 섬기고 자식을 키우며 가사에 몸 바칠 수밖에 없었던 여염집 여성들에게 문학은 결코 손닿지 않는 저 먼 세상이었을 것이다. 설령 손닿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모르게 부엌 아궁이에서 불쏘시개로 태워졌거나 벽장에서 사장(死藏)되고 만 빛나는 작품 또한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예술은 생의 예찬이다. 사물과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행위와 그런 예술가를 사랑하고 그의 예술세계를 찬미하는 일, 그것은 암컷이 수컷을, 수컷이 암컷을 탐닉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빌린 본능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보다 고차원적인 사랑, 인간애라고 할 수 있다.
2009. 07. 15
첫댓글 아름다운 글을 남긴 매창의 마음에 다가가 봅니다.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시로 남겨 주셨는데, 예술입니다.^^
매창과 허난설헌 황진이 그시대 여성들의 찬란한 고독에 선생님의 절창의 글이 서사의 색실로 수를 놓아 바늘같은 아린 슬픔과
감탄을 자아내는군요 고독이라는 숫돌에 영혼을갈아댄 ㅎ 저찬란하고 아름다운 고독! 셈의 수필 한편에서 깊은 감동과 영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