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손 편지.
백련사 동백꽃을 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속에 맑고 투명한 붉은 빛은 화사하기도 하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윤기 흐르는 잎의 푸른빛에 제 색깔을 수줍게 가린 동백나무 숲은 고요한 정적뿐. 숲으로 들어가면 뎅거덩 떨어진 꽃송이는 무성한 숲의 어둠속을 밝힌다.
누군가 바위나 나무사이 가지런히 올려놓은 꽃송이는 아직 제 빛을 잃지 않는 꽃과의 아쉬운 이별의 미련일까.
미풍은 숲을 넘어 능선의 잔가지만 흔들고 봄빛은 산사의 뜰을 지나 바다로 간다.
만덕산 인근은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가 숲을 이루고 1500그루의 동백 숲에 둘러싸인 사찰은 사계절이 푸르다. 백련사의 봄빛은 흰 눈 속에서 피어났던 동백꽃의 선홍빛 그늘과 만경루 뜰 앞의 매끄러운 배롱나무 가지사이 강진만의 바다는 눈이 부시다. 다산초당 가는 산사의 오솔길에 차향이 그윽할 것 같은 설레는 마음이 그제야 봄이 한창 인 것을 안다. 산세가 좋은 강진만 건너 마량고금완도의 섬들을 보며 사구미해변을 돌아 언덕위로 오르니 다도해의 푸른 바다와 섬들의 풍경이 펼쳐지고 남쪽 끝에 이른다. 해남의 땅끝이다.
바위끝자락 하늘의 닫집에서
강진도암의 석문산-덕룡산-주작산은 기세 좋게 해안선과 나란히 암석 단애를 이루고 해남의 두륜산에서 8개의 봉우리로 큰 산세를 형성한다. 그리고 달마산에서 마지막으로 풍화와 침식을 거듭하며 급경사의 암봉은 공룡의 등줄기 같은 단애를 이루며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마치 부처가 누워있는 와불의 형세로 보이는 달마산의 품에 안겨 있는 미황사는 남쪽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 중턱에 있다. 대흥사의 말사인 사찰은 거의 폐허위기에서 20년 간 중창불사에 힘을 쏟았던 한 스님에 의해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년고찰로 탈바꿈 했고, 주변 마을도 더불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기에 스님이 중창불사를 끝내고 이제 절을 떠난다는 소식에 “금강스님, 당신이 있어 미황사는 아름답습니다”는 신문의 광고와 수 천 명 주민들의 간곡한 만류에도 승려교육을 위해 올해 2월 절을 떠난 스님과의 미담은 겨우내 따뜻한 이야기의 군불을 지폈다.
스님이 주민들과 함께 중장비도 없이 만들었다는 달마고도를 걸으면 남도의 바다가 발밑이다. 그 길에 도솔암이 있다. 기암절벽 바위 끝자락 허공에 떠 있는 닫집 같은 하늘의 한 칸 암자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주변의 돌로 담장을 쌓아올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간신히 막을 뿐.
그날도 도솔암 가는 비탈길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스님들이 하루 한차례 산을 오르며 이곳에서 마주하는 수행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여 문 칸에 귀를 기울여 보지만, 신발 한 켤레 가지런한 암자에는 인기척 없이 조용하다.
1800장 흙 기와를 손수 들어 올려 복원한 도솔암의 풍경을 한 치 건너서 보면 푸른 하늘과 맞다은 벼랑 끝 암자가 신비하기만 하다. 미황사의 동백꽃이 거의 지는 날이면 달마고도는 기암단애 바위사이로 진달래꽃 붉게 물들고 평암리 들판의 푸른 봄은 절정을 이룬다. ‘달마고도 워킹데이’라는 8개 인증지점이 있어 비대면 걷기에도 좋단다.
잠깐! 조금만 더 느리게~ 땅끝의 섬에서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선착장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다도해의 많은 섬들 중에 면적이 제법 큰 노화도와 보길도가 장사도를 사이로 연결 되었다.
보길초등학교 운동장은 낮은 담장으로 세연정을 정원으로 두었다.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가슴 높이 돌담 사이로 동백꽃은 떨어지고 원림園林의 소나무와 암석이 연못 속에 봄빛으로 흐드러졌다.
윤선도는 선경의 세계를 부용동에서 찾고자 했을까. 그 옛날 어부사시사의 노랫소리가 세연정의 들창으로 들리는 듯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는 봄날의 정적을 깬다.
보길도 세연정
그러다 예송리 해변의 갯돌위로 넘어오는 자그락거리는 파도소리에 봄은 요동을 친다. 까만돌하얀돌, 조개처럼 생긴돌, 앙증맞은 공깃돌, 납작한 돌, 동그란 돌, 파도에 씻겨 부드럽게 마모 된 각양각색의 돌 들이 편편한 언덕처럼 쌓여있는 해변.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납작한 하얀 돌 위에 동그란 까만 돌 하나를 세워 본다. 손 바닥위에 올려 바다를 배경으로 쳐다보자니 바다의 푸른빛에 하나의 섬이 만들어진다. 윤기 흐르는 작은 공깃돌들을 모아 손안에서 흔들어 본다. 잘그락거리는 유리구슬의 소리.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몽돌 위를 맨발로 걷는다. 부드러우며 따뜻한 촉감이 중추를 타고 어린 시절의 아득한 시간에 머문다. 자잘한 깻돌 위에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팔과 다리를 한껏 펼쳐 대자로 누워보니 바람은 발가락을 간질이고 파도소리는 끝없이 귓가에 소곤대어 잠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천연기념물 40호인 예송리 해변의 상록수림은 오래된 숲으로 후박나무, 생달나무, 광나무 등이 해변을 따라 멀리 포물선을 그으며 마을과 바다의 경계를 이룬다. 바다와 마을의 완충지역으로 바람도 쉬었다 가는 곳이다.
그 곳에서 깜빡 잠이 들었을까. 게슴츠레 눈을 떠 바다를 보니 수평으로 보이는 예작도, 당사도 사이로 고깃배가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지나간다.
모래의 입자가 고운 동리선착장 해변에서는 바지 단을 올리고 맨발로 걷자니, 찰랑이는 바닷물과 모래알이 발바닥으로 부드럽게 전해진다.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기분 좋은 오후가 느리게 지나간다.
그 안에서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자니 시간은 잠깐 숨을 멈춘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정작 꽃이 피고 지는 속도는 왜 그리 빨랐던지, 봄날은 짧기만 하다.
예송리 해변의 방풍림 천연기념물 보옥리 해변
첫댓글 동백꽃피는 섬여행 너무좋죠
동백꽃 깔린 길 밟고 가기 미안해 피해 다닌 기억이 있어요
겨울을 상징하는 꽃~푸른 잎사귀와 하얀눈과 잘 어울리는 색깔이죠~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낙화되는 아쉬움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