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21절~25절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로마서 1장 24절에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로마서 1장 18절에 나오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잘못 가고 있는 우리를 꾸짖으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잠언 3장 11절~12절
“11.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꾸지람을 들으면 마음이 괴롭고 힘들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징계와 꾸지람이 있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고 계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로마서 1장 24절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여기서 ‘정욕대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해가 되더라도 아무런 상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건져내 주지 않는다면 이는 문제가 심각해 진다.
또한 24절에 보면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몸을 더럽힌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간음을 말한다. 이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로마서에서뿐만 아니라 신구약을 불문하고 많은 부분에서 언급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대표적인 예로 남녀 간의 불륜관계를 상정할 수가 있다. 미혼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울 수가 있겠으나, 그 중 한쪽이나 또는 양쪽에게 이미 결혼한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하는 일은, 이는 대단히 부적절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간음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성경에서 언급되는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외에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받고 싶어하시는가.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시겠는가.
역대상 29장 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만이 아니라 온 천하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 소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고자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받고 싶어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물을 바치는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신명기 16장 16절~17절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17.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러 나올 때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태복음 6장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돈, 재산 아닌가. 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질 중 하나인 보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렇게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마음을 받고 싶어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 아니겠는가.
이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 이유도 우리와 같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또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마귀 사탄이다. 마귀 사탄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로채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귀도 하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을 탐하는 것인가.
아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우리의 죽음, 우리의 파멸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우리는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다. 물론 맞다. 요한1서 4장 16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시지만, 안 믿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따라서 만민에게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규정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곧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천하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이는 말씀만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첫 율법을 주신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인류의 첫 율법이었다. 이 율법에 대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에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지으시고, 이를 먹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사람에게 주셨을 때, 이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이 먹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모두 순종한 것으로 가늠하겠다는, 즉 하나님께 마음을 모두 드린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귀 사탄은 어떻게 했는가.
창세기 3장 1절~5절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마귀 사탄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를 완전히 부정하는 말로 속삭인다.
하나님은 말씀이다. 하지만 뱀 곧 마귀 사탄이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정했다는 것은, 이는 하나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 없지 않는가.
이제 하와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여기서 비극은 발생한다.
창세기 3장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여자는 왜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순종보다 자신에게 더 이로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마귀 사탄의 속삭임에 순종하는 쪽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에덴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그들은, 결국 에덴에서 쫓겨났고,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그들이 받았던 축복을 모두 빼앗겨 버렸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던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4절~6절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언급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를 위하여 다른 우상을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상을 만든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보다도 자신이 만든 그 우상이 자신을 더욱 이롭게 해줄 것이라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도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 아니겠는가.
로마서 1장 21절~23절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지혜도 있고 배울 만큼 배우고 알만큼 아는 사람들, 세상적으로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마저 어리석게도 우상을 섬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을 의지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자기가 더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25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바로 그렇게 믿기 때문에,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은 오로지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조물주 하나님보다 더욱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우상이 무엇인가. 비단 다른 종교에 있어서의 우상만이 우상인가.
예컨대 대표적인 우상은 바로 돈이나 재물이다. 그리고 세상적 권력이나 지위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외모나 학벌이나 경력도 우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이와 같은 것들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것이 바로 선악과,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때로는 가족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동안 살았던 하란 땅을 떠난 것이 75세였다. 그는 소망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하지만 정작 그 기도 응답을 받는 것은 그로부터 25년 뒤인 100세가 되었을 때였다.
아들 이름은 이삭이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기뻤을 것이다. 큰 민족을 얻든 못 얻든 그의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은 참으로 소중했을 것이다. 이제 이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신다.
창세기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는 대단히 무서운 말씀이다. 그 소중한 아들, 이 세상에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 이제 그의 나이로 보았을 때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포기 했었으나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이삭. 하지만 이제 그 아이들 번제로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번제가 무엇인가. 보통 양이나 염소를 죽이고는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일이 어디 있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도 남지 않았겠는가. 어쩌면 이토록 잔인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명령에 대해서 단 한 마디 불평도 불만도 입에 담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결국 이삭을 사흘 걸려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산에까지 데리고 가서는, 이제 아들을 결박한 다음에 죽이려고 하자,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말한다.
창세기 22장 12절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는 다급하게 만류를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그토록 아끼는 아들마저도 우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전적으로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시고서 넘치는 축복을 약속 받는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0장 37절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녀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반드시 가족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오로지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보다도 다른 대상, 그것이 돈이나 세상적인 권력이나 지위나 하물며 자신의 가족이나 친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보다 위에 두게 되면 그것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 그것이 자칫하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고 불순종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골로새서 2장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기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특정 학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지식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세상적인 학문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리 지적이고 고상한 것처럼 들린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주장들은 한낱 초등학문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시편 111편 10절과 고린도전서 1장 18절을 보도록 한다.
시편 111편 10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는 모든 우상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우리의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