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신라, 백제 중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제일 열세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된 이유와 현재까지 미치는 그 영향, 댓가는 무엇일까요? 일단 저는 당을 끌어들인 외교의 승리와 내부문제 해결을 위해 시선을 외부로 즉, 통일전쟁으로 돌렸던것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백제 가 아닌 신라가 통일을 이룬데 대한 댓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물론 역사는 실험이나 예행연습이 없고 그 역사는 승리자들의 것이긴 하지만 가정이나 추정, 공상은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신라와 당이 처음 나당 동맹을 맺었을 때, 두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땅을 나눠 갖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당의 진짜 속내는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후 신라까지도 차지하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마침내 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야욕을 가지고 있었던 당 고종(당 태종의 아들로 당의 3대 황제) 은 백제 땅에는 ‘웅진 도독부’, 고구려 땅에는 ‘안동 도호부’라는 기관을 세워 백제와 고구려 땅을 직접 통치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라 땅에도 ‘계림 도독부’를 세운 겁니다. 게다가 문무왕을 계림 도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신라를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당의 한 지방처럼 여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나당 동맹을 맺을 때부터 신라는 당이 순순히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습니다. 그러니 신라의 문무왕은 그냥 지켜볼 수 없었지요. 신라만 당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옛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도 당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그들은 신라군에게 힘을 보탰습니다. 특히 고구려 유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유민은 망해 없어진 나라의 백성을 뜻하지요.
670년, 신라 문무왕은 백제 땅에 있던 당군을 먼저 공격했어요. 전혀 예상 못했던 당군은 꼼짝없이 당했습니다.
이덕화씨가 역할을 맡아 드라마에서 열연했던 설인귀는 당을 공격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며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문무왕 역시 약속된 영토를 주지 않은 당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지요. 이때 신라의 문장가 강수가 멋지게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라는 명문을 적어 보내는 활약을 합니다.
당과 신라의 싸움 중 가장 유명한 전투는 675년에 있었던 매소성 전투(지금의 경기도 양주)입니다.
신라는 적은 수였지만 큰 승리를 거두었지요. 무려 당의 20만 대군을 물리쳤거든요.
매소성 전투 후 신라는 676년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지금의 충남 서천)에서 당의 수군을 물리치며 마지막 전투를 끝내지요. 이제 당군은 완전히 떠나게 되지요. 전쟁을 시작한 지 7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문무왕은 도읍을 재정비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성의 울타리를 튼튼히 쌓기로 하지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승려 의상은 문무왕에게 충언의 글을 보냈습니다. 의상은 불교의 한 종파인 화엄종을 처음 만든 사람입니다.
'초가에 있을지라도 바른 도를 행하면 오랫동안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서 높은 성을 쌓아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멋진 성곽보다는 백성들을 편안히 다스리는 게 옳은 일이라는 뜻이었지요.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은 너무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지요. 의상대사는 이런 백성들이 성곽을 쌓는 일에 동원되어 또다시 고통 받게 될까 봐 걱정한 것이었습니다. 문무왕은 의상의 말대로 공사를 중지시켰어요. 그리고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도록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문무왕은 신라의 백성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까지 보살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영토에 관리들을 파견했지요. 백성의 삶은 점차 안정을 찾았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 있던 것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지요.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많은 옛고구려의 영토를 빼앗겼다는 점이 후손으로서 아쉬운 부분이지요. 하지만 이 점도 무조건 신라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고구려, 신라, 백제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서로 다른나라 즉, 적국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신라는 삼국 중에서 왕권이 가장 약한 나라였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지리적으로도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중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불리했습니다.
게다가 주변국인 백제도 만만찮은 상대였고 고구려는 너무나 강력했지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신라에게는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에 당과 손을 잡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까요.
◆'답당설총관인귀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당나라의 은의를 입고 여제정벌에 진충갈력(盡忠竭力)하였으며 국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제부흥운동 세력에게 곤욕을 당한 당군을 구원하였던 사실을 친절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과정에서 부득이하여 당나라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게 된 사정을 간곡하게 변명하고 있다. 당나라가 오히려 ‘신라가 배반하였다.’고 한 백제의 말만을 믿고 신라를 치려함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니 행군총관 설인귀가 전후사정을 헤아려 당나라 황제에게 알려서 신라정벌을 중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진충갈력(盡忠竭力) : 충성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 바침.
첫댓글 외교의 중요함을 생각해봅니다. 여러나라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애쓰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주국방이라는것...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드는 제 생각입니다.중국과 미국 사이에 무역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 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전쟁을 보며 그런생각이 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외교가 그래서 중요하지요. 그런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전쟁은 외교로는 어쩔 수 없는 같은 민족적 뿌리가 있기에 좀 더 복잡한 상황이구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세계대전후의 강대국들의 외교기만과 종교적문제가 개입되어있기에 더 많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관계의 등거리외교는 적용되기가 힘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