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대승론(攝大乘論)
섭대승론 상권
무착(無着) 지음
진제(眞諦) 한역
변상섭 번역
1. 의지승상(依止勝相)
4) 차별품(差別品)
이 아리야식의 차별은 무엇인가?
간략하게 설하여 혹은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차별이다.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으로 말미암아 다르기 때문에 언설과 아견과 유분의 훈습의 차별이라고 한다.
아견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으며, 유분의 훈습의 차별로 말미암는다.
네 가지란 이끌어 생함[引生]· 과보· 연하는 상[緣相]· 상모의 차별이다.
이끌어 생함의 차별이란 훈습이 새로 생함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행을 연하여 식이 생하고, 취(取)를 연하여 유(有)가 생한다는 이러한 정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과보의 차별이란, 6도(道) 가운데서 행(行)에 의해 이 법이 성숙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나중에 생을 받을 때 갖고 있는 모든 법이 생기한다는 이런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연하는 상의 차별이란 이 마음 가운데 상이 있어서 아집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그 밖의 다른 마음 가운데서 아상을 집착하는 경계라고 하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상모의 차별이란, 이 식은 공상(共相)이 있고 불공상(不共相)이 있으니,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의 상[無受生種子相]이고,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의 상[有受生種子相]이다.
공상이란 기세계(器世界)의 종자이다.
불공상이란 각기 다른 내입처(內入處)의 종자이다.
또한 공상이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고, 불공상은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대하여 다스림이 일어날 때 불공종자는 대하여 다스려져서 멸하고,
공종자식(共種子識)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분별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정견(正見)의 청정이다.
마치 관을 닦는 수행인이 한 종류의 사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의 원락과 여러 가지의 관찰을 마음에 따라 성립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멸하기 어렵고 풀기 어려워,
설하여 이름하니 공결(共結)이라 한다.
관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이 외(外)와 다르니,
상이 광대하므로 바깥을 이룬다.
청정한 사람은 멸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가운데서 청정을 보아
청정한 불국토를 성취하니,
부처님의 지견[佛見]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게송이 있다.
여러 가지의 원(願)과 견(見)을
관을 행하는 사람은 이룰 수 있다.
한 종류의 물(物) 가운데서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갖가지의 봄을 이루기 때문에
소취(所取)는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다.
함께하지 않는[不共] 본식차별은 깨우쳐 생을 받음이 있는 종자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중생세계를 생하는 연(緣)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함께하는[共] 아리야식은 생을 받음이 없는 종자이며, 이것이 없다면 기세계를 생하는 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거칠고 무거운 상식(相識)과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 있다.
거칠고 무거운 상식이란 크고 작은 두 가지 혹의 종자를 말하며,
미세하고 가벼운 상식이란 모든 유루(有漏)의 선법종자를 말한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앞의 업으로 말미암은 과는 수승한 공덕이 있는 의지와 수승한 공능이 없는 의지의 차별을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받음이 있는 상(相)과 받음이 없는 상, 두 가지의 본식이 있다.
받음이 있는 상이란 과보를 이미 숙성시킨 선악의 종자식이며, 받음이 없는 상이란 명언(名言)이 훈습한 종자이다.
헤아릴 수 없는 때의 희론이 종자를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식이 없다면 선과 악의 두 가지 업을 짓든지 짓지 않든지 간에
과보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수용(受用)하여 다한다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처음 생한 명언의 훈습이 생하여 일어난다는 것도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또한 비유의 상(相)인 식이 있다.
마술, 아지랑이, 꿈의 영상, 눈병 등과 같이 비유하는 첫 번째의 식은 이러한 일과 유사하다.
만약 이 허망한 분별의 종자가 없다고 하면 이 식은 전도된 인연을 성립하지 못한다.
또한 갖춘 상[具相]과 갖추지 않는 상[非具相]이 있으니,
만약 중생을 갖추어 얽맨다면 갖춘 상이 있고, 만약 세간의 탐욕을 떠남을 얻는다면 손해상(損害相)이 있다.
만약 배움이 있는 성문과 모든 보살이라면 한 부분을 멸하여 떠난 상이 있고,
만약 아라한과 연각과 여래라면 모든 부분에서 멸하여 떠난 상이 있다.
왜냐 하면 아라한과 독각은 혹장(惑障) 하나만을 멸하고, 여래께서는 혹장(惑障)과 지장(智障), 둘 다를 멸한다.
만약 이러한 번뇌가 없다면 순차적으로 멸하여 다한다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
어찌하여 인연은 선과 악의 두 가지 인식현상인데 과보는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인가?
이 무기성은 선과 악, 두 인식현상과 더불어 함께 일어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선과 악의 두 가지 법은 스스로 번갈아서 서로 어긋난다.
만약 과보가 선과 악의 성질을 이룬다면 번뇌를 해탈함을 얻는 방편이 없다.
또한 선과 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 방편이 없다. 따라서 해탈과 얽매임이 없다.
이러한 두 가지 정의가 없기 때문에 과보식은 결정코 무부무기성이다.
출처/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출처] 섭대승론(攝大乘論)/1. 의지승상(依止勝相)/4) 차별품(差別品)|작성자 목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