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제공 받은 곳: 작성하신 분:김병관 09.01.26 23:30 http://cafe.daum.net/1950.6.25/KgzY/2
여수ㆍ순천 반란 사건 - 먼저 이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호남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자. 호남(특히 여수ㆍ순천)지역의 문화와 정치ㆍ문화적 유산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특이한 것이었다.
cf. 가령, “여수에서 돈자랑 하지 마라.(여수가 밀수의 거점이었던 시절이 있다.), 벌교에서 주먹자랑 하지 말고, 진도에서 소리자랑 말고, 순천에서 인물자랑하지 마라.” 등이다. 1. 사회적 모순 - 토지모순이 가장 심한 곳이었다. 호남 지역은 풍년일수록 수탈이 더 심했던 곳으로 충청도나 강원도 산골의 사람들의 경우, 푸대접을 받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호남인들의 풍요로움 속의 배 곪음이란 상대적 가치박탈감을 더욱 크게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인민위원회, 인공, 남로당의 좌익세력 형성이 서울에 비해 결코 늦거나 떨어지지 않았다. cf. 박헌영이 그의 고향이 충남 예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투쟁기반으로 호남을 택했던 것도 호남의 토지모순이 자기의 이념적 도구로 활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은상도 마찬가지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후삼국의 견훤도 그 자신이 경북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남에서 새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 역시 비슷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대에서도 부마사태나 인천사건, 광주사태가 모두 똑같은 사건이었는데, 왜 유독 광주만 저렇게 끝나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역사적 바탕이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러한 것들은 모두 체제불만에 대한 응어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2. 정치적 불만 1948년의 상황 하에서 여수ㆍ순천반란사건은 대구폭동, 2ㆍ7구국투쟁의 연결고리에서 개별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꾸러미(Package)처럼 일련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1948년 10월 19일이라는 시기가 중요한 것이다. 다만, 제주도 4ㆍ3사건보다 왜 먼저 일어나지 않았나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3. 경제적 상황 1948년의 경제적 상황으로 볼 때, 남과 북의 상호지원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다. 이에 남한은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1945년 8월의 물가에 비해서 1948년의 물가지수는 2500%(25배)가 상승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경부선을 중심으로 개발하였던 것이 일본인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호남은 그 영향으로 기술낙후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1948년 당시에 공장동업률이 일제시대의 40%가 넘지 않았다. 결국 민생고는 말할 수 없었고, 삶의 질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귀향자들이 문제였다. 호남의 귀향자들은 고학력의 룸펜 지식인들이 많았다. 이는 일본 동경유학생의 수로 볼 때, 서울 다음으로 많았던 지역이 바로 이 호남이었다. 그리고 이들 고등 룸펜 프롤레타리아들은 귀향 후에 고민하였던 것은 Marxist적 사고에 기반 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호남 지역은 맑스시트적 정향을 지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4. 남로당의 입장 1948년 상황 하에서 여ㆍ순반란 사건은 ‘남로당’의 입장과 결코 무관치 않다. 1945~1948년 동안 좌익은 몇번의 시행착오만 있었지 흡족할만한 교훈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인민민주주의 노선식이냐 아니면 게릴라식이냐라는 명백한 노선의 정립이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구폭동이나 제주도 4ㆍ3사태를 통하여 인민민주주의 노선식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인적손실이 상당히 컸다. 그리고 3당 통합 후에 박헌영은 조직을 장악할 만큼 일사분란하지 않았다. 이는 미군정의 지나친 좌익견제에 따라 밀실단합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전당대회 없이 이루어졌다며 반박헌영파가 형성되면서 박헌영이 취약한 입장을 갖게 되는 내부적 모순 때문이었다. 이에 박헌영은 이러한 국면전환과 내부적 모순을 커버하기 위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이는 그로 하여금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 불리한 입지를 돌파하기 위해서 특정의 사건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이에 기회를 잡고자 했음직하다. 5. 한국군대의 고질적 병폐 1948년 상황 하에서 군대인 ‘국방경비대’는 해방정국 하에서 치안요소적인 역할이 강하였던 미묘한 입장이었다. 사실 치안이라면 경찰이 있었는데, 군인이 그 역할을 같이 하였다면 군인은 어쩔 수 없이 경찰의 하급자밖에 안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국방경비대’내의 군인들 중에는 상당수가 사상적 은신처로 군을 선택하였던 자,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서 입대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나 군인의식이 없었던 이들로 인해 그 기강이 해이해지고,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cf. 월면사건 - 목화사건이라고도 한다. 미국이 군대 피복을 만들어 입어라고 보냈는데, 이 목화가 상층부에서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장교의 부패는 장교의 상명이 사병에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하사관과 사병이 융합하는 현상을 낳게 되는 큰 문제점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장교들을 학력을 중심으로 뽑았기 때문에 남로당 좌익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사병에 대해서는 연고지별 복무원칙 때문에 타지 출신의 남로당 장교와 본 지역 출신의 남로당 사병들 간의 지역적 골로 인한 대립들이 있었다. 이에 호남 일대의 군 지휘체제는 하사관들이 사병을 장악한 상태였다. 물론 군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열악했고, 반면에 일제 시대에 일본의 하사인 격이었던 경찰들이 그대로 유입되어진 경찰들은 생활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이 때문에 군대와 경찰간의 충돌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다. 6. 14연대의 독특한 성격 14연대는 당시 호남지역에 있던 4연대가 비대해지자, 1948년 5월에 분단한 신설부대였다. 신설부대 초기의 분위기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14연대도 아주 허술한 군 기강을 보였고, 명령계통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신원조예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수의 수배자나 전과자들이 신분은닉을 위해서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였고, 이에 14연대는 50%가 남로당원들 이었다. 이 때문에 14연대는 ‘붉은연대(Red Regiment)’라고까지 불리어졌다. cf. 후에 남로당원의 신원을 확인하여 수권과정에서 장교들의 옷을 벗기게 되는데, 이때 군속중의 한명이 박정희였다. 그러나 후에 박정희는 이용운 장군의 도움으로 현역에 복귀한다. 이처럼 14연대는 당시 국방부모순의 모델처럼 헝컬어진 곳이었고, 경찰과의 암투도 상당히 많았던 곳이었다. 그 예로 1948년 6월 2일에 14연대 사병이 영암으로 외출을 하게 되는데, 이때 계급장이 삐뚤어졌다고 영암지서장이 그 사병에게 기합을 주게 되고, 사병이 지서장에게 덤벼드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일로 14연대와 영암경찰서간에 약 2시간 정도의 교전이 벌어지게 되고 그 결과 군인 6명, 경찰 1명이 사살되고 약 20여명이 부상을 입게 된다. 또 다른 예로 14연대의 사병들이 구례로 외출을 나가서 이발소에 들르게 되는데, 이때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던 젊은 경찰관 한명이 이발을 하다가 이발관이 실수를 하자 경찰이 이발소 주인을 때리게 되는데, 이를 지켜보던 군인이 제지하다가 군인과 경찰간에 싸움이 벌어지게 되고, 이 일로 구례경찰서와 14연대 간에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여수ㆍ순천 사건은 어쩌면 예상되었던 것이었다. (Prof.) 제주도 4ㆍ3사태 때, 김익렬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부임하였던 박진경 대령 진급 축하연에서 그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군대내 좌익들을 청산하라는 지령이 내려지게 되고 좌익장교 소탕작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좌익이라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까닭에 그저 평소에 기분이 나빴던 놈들을 대상으로 처벌을 하게 되는데, 이때 14연대 연대장이었던 현역 소령 오동기가 이 작전의 첫 번째 작업이 되었다. 오동기는 김구를 추앙하였던 극우파로 “서울진격”을 번번히 떠들고 다니던 거칠고 과격한 인물로 그가 Marxist라는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오동기는 구속되게 되고, 연대장이 구속된 상황 하에서의 14연대의 분위기란 알만한 것이었다. 9월 하순의 이러한 어수선한 분위기하에서 제주도에서의 우파들의 보복작전이 전개되면서 이 제주도 4ㆍ3사태의 진압출동명령이 14연대에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9월 19일로 예정된 날짜가 다가오고 출동을 하기 위해서 여수 부대에서 물자를 실어 나르게 된다. 이때, Marxist였고 남로당 당원이었던 지창수 상사가 단에 올라가서 “…… 제주도 4ㆍ3사태를 진압하라고 우리를 보내는 것은 동족상잔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라면서 일장연설을 한 후에 “…… 이제 우리는 결심을 하여야한다. …… 길을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다. …… 제주도로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반란할 것이가…… ” 이를 지켜보던 그의 동료들이 그를 제지하려고하자 그는 그 자리에서 하사관 3명을 사살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14연대의 좌익성향의 하사관들은 무기고를 습격하고 2개대대가 합세를 하고 민간인들까지 연합하면서 지창수를 중심으로 여수ㆍ순천사건은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실질적 지휘자는 김지회라는 중위였다. 이들은 여수읍내(관공서, 우익집단, 서북청년회, 경찰 등의 가족 등)를 습격하고 순천으로 진격하게 된다. 이때에 그들은 “미군철수, 단정반대, 제주도4ㆍ3진압 반대”등을 외치면서 정치적으로 비약한 상태에서 시민들을 격동시키게 된다. 이 시점에서 “남로당” 전남도당이 개입하지 않았을까하고 여겨진다. 따라서 처음부터 남로당이 획책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남로당이 개입하면서 이들은 인민전선식 노선을 통한 공산화를 여수ㆍ순천지방을 시작으로 확장시켜갈수 있지 않을까하는 다소 과장된 욕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하고 여겨진다. 이 여수ㆍ순천반란사건은 군대가 개입하였다는 점에서 제주도4ㆍ3사태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즉 반란죄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의 군사고문단장이었던 W. Roberts - 국방부의 전형적 매파였던 그의 지휘하에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의 진압을 위한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때 국방장관이었던 철기 이범석을 중심으로 회의를 하게 되고, 실제로 진압은 하우스만이라는 육군대위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cf. 하우스만은 당시에 CIA한국 지부장으로 정치, 군사,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인물로 그에게 있어 계급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하우스만은 제작년에 그때의 회고록을 남기고 죽게 되는데, 사실 회고록이라는 것이 자기의 죄상이나 실수한 점 등을 다루면서 진정한 참회의 심정으로 쓴 것이 별로 없는 만큼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록 증언은 있지만 사실을 많이 은닉한 듯한 느낌이 든다. 이로 인해 국방경비대에서 미군으로 진압의 책임이 넘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또한 제주도 4ㆍ3사태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되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이 직접 투입하게 된 변명으로 미국은 당시 국방경비대가 투입되었을 때, 진압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초기에 인근부대였던 24연대가 투입되었으나, 이들 간에는 서로 실제적인 교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이념을 떠난 일종의 연민이나 전우애 같은 것이 작용하였던 것이 아닌가하고 여겨진다. 결국 여수ㆍ순천반란사건은 미군에 의해서 진압과정이 진행된다. 여수ㆍ순천반란사건의 영향이 구례, 곡성, 남원, 하동까지 확대되자, 미군정은 10월 22일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고, 순천을 탈환하기 위해서 박격포부대를 동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 당시에 박격포의 발사방법을 잘 몰라서 엄청난 자해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미군에 의한 진압이 시작되자 10월 27일에 많은 좌익들은 백운산에 들어가서 백운산 빨치산이 된다. 미군들은 육지에서는 장갑차부대를 동원하고 해상에서는 LST를 동원해서 여수와 순천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반란인의 수는 피크 시에 12,000명 정도였다. 10월 27일에 여수ㆍ순천반란사건이 진압되면서 반란군들은 백운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 백운산 빨치산은 후에 지리산 빨치산의 모체가 된다.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이 진행되던 중에 좌익들은 인민위원회식 인민재판을 통해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좌익이 분쇄된 10월 27일 이후가 더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진압과정에서 12000명 중에 상당수가 사살되고, 도피하였지만, 후에 극우들은 좌익색출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 색출과정이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또한 머리가 짧은 머리를 가진 �은이들, 군용 팬티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것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4ㆍ3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반공 시국강연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모집해놓고서 그 곳에 나온 사람들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 죽이는 방법이 아주 악랄한 것으로 가령, 엄지속가락 두 개를 철사줄로 묶어서 돌을 매달거나 여러 명을 동시에 묶어서 바다에 빠뜨려서 죽이게 된다. 즉, 앞서 살펴보았던 대구폭동이나 제주도4ㆍ3사건, 그리고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에 이르기까지 이념과는 무관한 양민들이 죽게 된 것이다. cf. 당시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의 진압과정의 총책임자로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만주 관동군 장교 출신으로 48년 당시에도 Nippon도를 차고 각반한 일본장교옷을 입고 다니던 인물로 해방정국하 남한에서 대표적인 극우주의자였다. 그는 1948년 여수ㆍ순천 반란사건뿐만 아니라, 거창양민사건때고 깊이 관련을 맺게되고, 6ㆍ25 당시에는 한국군 소유 금괴운반책임자로 있으면서 이 금괴를 이승만에게 주면서 전후에 승승장구하여 치안국장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1948년 10월말부터 좌익 색출 작업을 하게되고, 그 결과 1300여명 정도가 재판에 회부된다. 그리고 이 재판의 결과에서 미묘한 통계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재판의 결과는 사형 : 467명, 무기징역 : 9명, 20년형 : 246명, 5년형 : 233명 이었다. 이는 결국 “다 죽여라.”는 의미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중에서 사형되지 않은 사람들은 탈옥하여 빨치산에 가입하게 된다. 이쯤에서 다시 불필요한 질문을 하게 되는데, 과연 얼마나 죽었을까? 당시에 시체로 확인된 것만으로도 2,600명이었다. 그리고 행방불명이 4,300명 - 이들은 대부분이 암매장된 것이었다. 즉, 최소치 7,000명, 사형자까지 포함하더라도 8,000명 정도였다. cf. 최근 노근리 사건과 관련해서 한국의 역사는 형평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Prof.) 끝으로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3가지가 있다. 1. 우익의 입장 이들의 입장은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은 남로당이 중심이 된 계획된 반란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응징, 사살은 정당한 것이었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들은 제주도에서 용기를 얻어 육지에서도 제2전선을 구축하려 하였던 공산화 획책이었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남한은 벌써 오래전에 공산화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이 논리에는 비약이 많다. (Prof.) 2. 미국 정부의 입장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은 우발적 상황 폭발이었다는 입장이다. 즉 만약에 “제주도 출동 명령”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다. 비록 이들의 말대로 여수ㆍ순천은 아니었겠지만, 군부내 모순으로 인해서 군부에 의한 폭발사고는 일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Happen to be"라는 우익적 설명은 부적절한 것이다. (Prof.) 3. 좌익의 입장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은 단정음모, 제주도 학살사건에 분노한 민중의 봉기였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가담자가 단순히 “단정반대, 미군철수” 등을 위해서 처참히 죽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또한 남로당의 교사라고 설명하는 것과 관련해서 이 당시의 남로당 지도부들이 그렇게 무모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결국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은 이념과는 관계없이 호남이라는 특수한 setting 위에 14연대라는 조직에 의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역사의 모순이었다. 또 이는 군부모순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에 이념 사건으로 적용하는 것은 이 사건을 호도하는 것이다. 즉, 호남모순과 군부모순의 상승작용에 의한 역사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Prof.) 이상에서 살펴보았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평가해보자. 현대사의 많은 아픔들에 대해서 우익들은 “빨갱이들은 유혈식 공사화를 추구한다.”는 논의로 좌익을 비난하고자 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의 영향으로 좌익 - 남로당은 인적 손실이 상당히 컸으며, 이상과 같은 우익의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 해서 이념노선에 상처를 입게 된다. 또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대략 1000여명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기존의 지리산 빨치산과 합해지면서 전체적으로 지리산 빨치산의 수는 약 3000여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말 쯤에는 최대의 피크를 이루면서 6000여명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여수ㆍ순천 반란사건은 호남의 사회변동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향을 하게 되는데, 그 대부분들이 사회적 모순으로부터의 도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전남 임실의 인구가 일제시대에도 미치지 못하고, 목포의 인구가 얼마 전까지도 일제시대와 같음을 보면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목포는 우리나라 국도 1번이 서울-목포간인 만큼 그 의미부여가 강한 곳이었는데…… . 또 국지적으로는 “피혼”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풍습은 아직까지도 있다. 이는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역사의 비극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일련의 해방정국 하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볼 때, 얼마나 많은 영령들이 구천을 해매고 있고, 또 얼마나 많은 역사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가슴에 한을 묻고 있을까? 그리고 단지에 한을 묻고서 좋은 날에 진실을 공개하고자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에서 하여야 할 일이 아닐까하고 여겨진다. (Professor & My Thought) 이상의 1948년까지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나서 넘어갈 단계는 “한국전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