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제23회 해외문학심포지엄 주제발표
재외동포와 문인들의 역할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재외동포 문인들의 활동 개요
우리 재외 동포 문인들의 현지 활동상황이나 그 역할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한국문인협회에서 매년 사업으로 실시하고 있는 ‘해외문학 심포지엄’의 역사와 ‘해외문학상’ 시상 내역을 살펴보는 것이 첩경(捷徑)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지 교민들이나 동포 문인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자료는 외교부나 문화관광부에도 정확하게 정리된 데이터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문인협회 지부가 설치된 국가에 한해서 그나마 현황을 일부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동의 범주를 알 수 있는 곳은 몇 개국에 한정되어 있다.
한국문인협회에서는 대체로 미국, 러시아, 카나다, 중국, 호주, 일본, 베트남, 독일 등지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곳의 동포문인들과의 교류방안, 또는 문학적 교감방안 등을 논의하고 그곳에서 왕성한 활동이 인정된 동포문인에게 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는데 올해로 벌써 23년의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해외문학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자료와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면 세계 각국 에서 활동하는 동포문인들의 개략적인 활동을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가. 미국
미국에서 우리 동포문인들의 활동은 숫적으로나 활동 범위가 대단히 넓다. 미국 전역에 걸쳐서 행해지는 많은 활동들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특히 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와 펜 미주지역위원회가 L.A.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활발한 활동양상을 알 수 있게 한다.
미주 한인문단은 1970년에 가까스로 그 개념이 정립된 시기로 볼 수 있는데 고 원시인이 『Contemporary Korean Poerty』를 발행하면서 한국의 현대시를 미주문단에 소개하고 미주 최초의 시 동인지 『지평선』이 간행되어 광복이후 해외에서 발행된 첫 동인지로 평가를 받고 있다.
다시 고 원 시인은 1974년에 영시집『The Turn of Zero』를 발간하고 1976년에는 고 원 최선영 박이문 박영숙 황갑주 김숙자 마종기 김송희 이창윤 최연홍 등 이민 1세 시인들의 작품이 수록된 『재미한국시인선』을 발간하였다.
미국 각 지역에서 발행하는 『뉴욕문학』『워싱턴문학』 『시카고문학』『샌프란시스코문학』등에서 한글로 작품이 발표되어 미주문단의 주류를 형성하는 ‘코리안-아메리칸’문학의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미주문학』과『해외문학』『미주시세계』『미주시인』『펜문학』등이 발간되고 『한인문학대사전』이 한국문인협회의 출판비 일부 지원으로 간행되어 미국문단의 르네상스를 이루기도 했다.
현재 미주문단에는 300여명의 문인이 있고 20여종의 대소문학지가 발행되고 있어서 미주 한인문학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재미기독교문인협회, 재미수필가협회 등 각 장르별로 단체가 결성되고 제각기 문학지도 발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실시되고 있는 ‘해변문학제’에는 재미수필문학가협회, 미주크리스찬문인협회, 재미시인협회가 공동으로 매년 개최고 있다. 필자도 2003년 8월 2일, 제16회 해변문학제에 초청강사로 참여해서 미주 시인들과 함께 교감을 가진 적이 있으며 우리 한국문인협회에서도 해외심포지엄을 몇 차례 가진 바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영감의 땅에서 생성하는 한국문학이 고국의 문학과 문단보다 가속화하는 세계의 문학으로 정립하여 더욱 우뚝 앞장서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나. 캐나다
캐나다에서의 동포문인들의 활동상황은 2012년 해외심포지엄에서 본인이 발표한 자료에서 살펴보면 1977년 1월 15일, 이석헌 시인이 중심이 되어 권순창, 김영매, 김창길, 문인귀, 설종성, 장석환 씨 등 8명의 문인들이 발기하여 캐나다 한인문인협회를 창립하고 고 이석현 시인을 초대회장에 선출하여 지금까지 활동해오고 있으니 벌써 그 역사도 34년으로 현재 북미주에서는 가장 오래된 문인단체로 성장하였다.
작년 3월에 개최한 2012년도 정기 총회에서 제22대 회장에 이상묵, 이사장에 원옥재 씨가 선출되어 새 집행부를 구성했는데 현재 회원수는 총 120여명으로 토론토 중심으로 몬트리올, 윈저, 밴쿠버, 알버타, 에드몬톤, 캘거리, 매니토바등 캐나다 전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소설, 시, 수필, 평론, 동화, 동시, 번역, 드라마등으로 각 장르별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시분과, 시조분과, 수필분과에서는 매월 정기적으로 합평회를 열고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동포신문에 회원작품을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회원작품집인 『캐나다문학』과『영문작품집』을 격년제로 출간하여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민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작년 10월에 출간된『캐나다문학』 제16집은 1977년 제1집 『새울』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어『이민 문학』『이민도시』『옮겨 심은 나무들』로 이름을 달리하다가 1997년 제8집부터『캐나다문학』으로 명명하여 제12집에 이르면서 격년제로 발행하고 있다. 아울러 캐나다 복합문화 속에 한국문학으로 자리잡고 이방문학과 교류의 장을 넓히자는 목적아래 회원 작품 첫 영역집 『KCWA Literary Collection』을 2007년에 발행하여 작년 5월에 제3호를 발행하였다.
한편 ‘문학공개강좌’와 회원들의 ‘출판기념회’를 주관하고 ‘호반문학제’와 ‘겨울 문학캠프’, ‘문학의 밤’ 등을 개최하고 있으며 특히 2011년부터 동포를 대상으로 ‘문예교실’을 개설하여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의 작품은 거의 신문지상 즉, 문협의 고정란인 한국일보의 ‘문협광장’과 동포신문의 고정컬럼을 통해 많이 발표되고 있으며 한국의 문단에도 개인의 작품집과 회원 작품 합작집 등이 소개되고 있어서 회원들의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다. 중국 조선족
조선족 문학의 형성과정은 대체로 약 100년 전, 우리 민족이 항일투사, 피난민 등으로 중국에 이주하면서 조선족 역사와 조선족 문화가 성립된다. 조선족 문학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지금까지 민족문학의 특색을 살려서 김학철, 리근전, 박효근, 리혜선, 우광훈 등의 소설가와 윤동주, 심련수, 김 철, 리삼월, 김성휘, 조룡남, 리상각, 박 화, 한 춘, 남영전, 김학천, 리성비, 최룡국, 리임원, 석 화, 박설매 김영건 등의 시인들이 한글로 창작하고 있다.
이들은 1956년에 중국작가협회 직속으로 연변작가협회를 창립하여 51년 여의 문단 역사를 통해서 중국내에서 조선족 문학의 중심체를 이루고 있는데 약 7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소설, 시, 수필, 평론, 아동문학, 번역, 한자창작 등의 분과에서 문필활동을 하고 있다.
1977년부터는 “정품창작을 주체로 하고 문학평론과 문학번역을 두 날개로 하는 수리개전략”을 실시하여 지금까지 조선족 문학이 거족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어서 전례없는 조선족문학의 번영기를 맞이하여 해마다 100여권의 작품집 발행과 600여명의 작가군을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문학은 민족정신을 가장 완벽하고 가장 생동하며 가장 진실하게 고양하는 문화형태로써 민족이 있는 한 문학은 시종 존재할 것이며 문학이 존재하는 한 민족은 우리의 언어와 함께 완강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족 문학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곳에서도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소설가협회 등 국내 문학단체들이 문학교류의 심포지엄과 문학기행을 실시하거나 이곳 동포문인들을 초청하여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행사들이 연례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2. 러시아 원동(遠東)지역의 한인문학
구소련 원동지역의 우리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인 조명희의 생애와 그의 문학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조명희의 호는 포석(抱石), 목성(木星), 필명은 적로(笛蘆)(강제 이주 전까지 발행된 한글신문『선봉』에 발표된 작품에는 조생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이며 1894년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가난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출생하여 중앙고보를 마치고 방황하다가 3. 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일본 동경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를 고학으로 수학하면서 새로운 사상과 접하게 되었고 시창작과 연극 공연을 전개했다.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후 희극 「김영일의 사」(동우회, 1921. 7)·「파사 婆娑」(개벽, 1923. 11~12)를 발표하고, 1924년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김영일의 사」에서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나타냈고, 「파사」에서는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다루었으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고 관념적이다.
이어 소설 「땅속으로」(개벽, 1925. 2~3)·「R군에」(개벽, 1926. 2)·「농촌사람」(현대평론, 1927. 1)·「낙동강」(조선지광, 1927. 7)·「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 소설들에서는 초기의 시나 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에 입각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대표작 「낙동」은 이전까지 자연발생적인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 문학을 목적의식적인 프로 문학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의 전개를 잘 보여준다.
소련에서는 식민지 민족의 한을 노래한 시「짓밟힌 고려」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운동에 앞장서 농업집단화 정책을 선전·선동하는 시「10월의 노래」·「볼쉐비크의 봄」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그 전날 밤」(1925)·「낙동강」(1928) 등이 있다. 그밖에 평론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개벽, 1925. 6)·「직업·노동·문예작품」(중외일보, 1926. 12. 1~2) 등을 발표하였다.
1928년, 조선 프폴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에 가담하여 이기영, 한설야 등과 마르크스주의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일제의 문인 탄압을 피해서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해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거주하였으며 1938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 이주에 따른 소수민족 지도자 숙청작업으로 총살당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 우리스크, 하바로포스크 등 구소련의 원동(遠東)지역을 전전하면서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과 교사, 조선사범대학 교수와 잡지 『선봉』의 문학편집자,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사 등의 직함으로 프로레탈리아 혁명문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한편, 재소 한인문학의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다룬 「민주 빨치산」을 집필하던 중 1937년, 간첩 형의로 KGB에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일본 간첩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있는 ‘알리쉐르 나보이 박물관’에 아주 작은 ‘조명희 문학기념실’에 KGB 당국의 사망확인서와 당시의 연행상황을 서술한 러시아어로 된 증명서와 각종 자료 그리고 ‘조명희 육필자료’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볼세비끼의) 봄
륙성 조생
봄! 새 나라에 떨쳐오는 봄
오년 계획 셋째 해의 봄,
하늘에도, 땅에도, 새봄이 나래를 친다
일어 서라! 천먼의 노력 대중아
봄과 한가지 떨쳐 일어서라
굴뚝의 연기도 구름이 되어 날으거던
쇠 깎는 소리도 하늘 우에 용솟음쳐 구르거던
하물며 로력의 용사들이야
힘오른 팔뚝을 뽐내지 않으랴
둘러라, 바퀴를 ! 쳐라, 망치로!
오년 계획을 여기서 넘쳐 하자
이리하여 우리는
봄과 한가지 떨치리라
가없는 벌판에 햇빛이 뛰놀고
바람도 거기서 손벽을 치거던
하물며 로력의 용사들이야,
힘오른 팔뚝을 뽐내지 않으랴?
잡아라! 뜨락또르채를, 뿌리라! 새 씨앗을
오년의 열매를 여기서 얻다!
이리하여 우리는 봄과 한가지 떨치리라
--『선봉』신문에 실린 전문
그는 위의 작품과 같이 리듬과 운율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로력자의 조국』(1937. 2호)에 게재된「로력자의 고향에 실린 시들에 대하여」에서 ‘초기 프로레타리아의 반항적 감정들이 문예적으로 아직 정서화되지 못하고 말이 아직 리듬화되지 못한데서, 작가나 시인들이 아직 기교를 소유하지 못한데서, 정치적 내용이 첫째로 중하기야 더 말이 없지마는, 그렇다 하여서 그것만 중히 여기고 표현하는 기교는 중대하지 않은데서, 건전한 내용은 좋은 기교에 담아 놓아야 선전의 효과가 더 많음을 깨닫지 못한데서 일종의 정치표어나 나열식의 작품들이 많이 나왔었다. 개념의 소산인 시, 번역냄새가 나는 시, 다른 민족이 유창하지 못한 고려말을 억지로 하는 것 같은 시들이 나타났었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모두 짧은 서정시로서 운율과 리듬이 역동적이라서 ‘...하자’거나 ‘....서라’는 들의 청유형 어미를 사용해서 미래지향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특징을 읽을 수 있다.
포석의 고향 충청북도 진천에는 2003년 10월에 ‘포석문학공원’을 조성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신 포석 조명희 선생의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민족 민중, 문학정신을 선양하고 진천문학의 발전의 반석으로 삼고자 정성으로 이 공원을 조성하다.’는 공원 조성 취지를 새겨서 포석 조명희문학제 10주년을 기념한 ‘진천군, 진천문화원, 포석회, 동양일보의 뜻에 따라 진천 후학 정상훈의 조각과 임정모의 글씨로 세워’졌으며 그의 시비도 건립되었다.
3. 유라시아 고려인의 문학 양상과 전망
유라시아 대륙,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우리 고려인들이 정착하여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글을 통해서 그들의 문화와 문학을 정립시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연해주에 정착하였다가 강제 이주를 당한 배경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860년 연해주 포세트 지역에 한인 13가구 최초의 기록에 의하면 시베리아는 흑룡강과 우쑤리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가 마주 이웃해 있고 우쑤리강 하구는 조선의 두만강과 합쳐진다. 시베리아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식민정책이 시작된 때는 러시아인들의 흑룡강 왼쪽 지역을 점유한 1643년부터 1646년 사이였다.
우리 한인들이 연해주에 최초로 살게 된 시점은 1860년 북경조약이 있기 훨씬 전부터였다고 한다. 1863년에는 본격적으로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하여 다음 해에는 185가구 999명이었으나 1869년에는 한반도의 북녘에 대기근이 일어나 1만 명으로 급증하였고 1902년에는 총 3만 2천여 명이 이민하였다.
그후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6만여 명에 달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新韓村)이 건설되기도 했다. 1932년에는 한인학교 380개와 잡지 등 6종, 신문 7종이 발행되어 한인들의 문화의 광장이 마련되었으나 1937년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서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약 6천 km)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는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비에트라는 거대한 지배질서 아래 놓이게 되었으나 그들은 한국어 교육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글로 문화(특히 문학)활동을 감행했다. 한글이라는 모국어를 매개로 창작활동을 했다는 것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을 거대한 소비에트 지배질서의 이데올로기에 환원시키기를 거부하는 저항의 한 양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주해온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첫째,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로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으로 이주된 약 20만 명의 한인과 그 후손들이며 둘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었던 일본 식민통치하의 한인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할린에 잔류되었다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사람들로 분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약 20만명, 카자흐스탄에 약10만명 이 거주하는 한인사회에는 우리말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던 『레닌기치』(강제 이주 전까지 연해주(원동)에서 발간된 『선봉』의 후신으로 1990년 12월 31일자로 폐간됨.)는 고려인들의 언론매체였고 고려인들이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던 지면이었다. 그후 창간된 『고려일보』가 고려인 문학의 매체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고려인들의 문학 개관을 위해서는 먼저 장사선과 우정권이 펴낸『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연구』와 강회진의『아무다리야의 아리랑』을 통해서 그들의 문학사적 이해와 교감을 살필 수가 있었으며 인터넷 까페 ‘카자흐스탄 문화마당’에 수록된 고려인에 대한 정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둔다.
고려인들의 시문학의 양상에 대해서는 당시 중앙대 이명재 교수가 국제화와 다문화, 다민족 사회 추세인 오늘날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지역의 고려인 문학이 우리에게 중요한 실체의 대상임을 절감하고 일찍이 이 방면에 심취하여 연구를 거듭하여 많은 담론과 교감 방안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의 논문「고려인 문단의 현황과 자료의 체계화-중요성과 접근방향을 중심으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고려인 소비에트 문학 건설기(1925~1937)로서 구한말 이래 돈벌이나 독립운동 등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쑤리스크 등지에 모여 살던 조선 동포들 사회에 점차로 조선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문화예술적인 면에서 극장을 가진데 이어 초보적인 신문학을 시작한 단계이다. 이 기간에 당시 한반도의 유력한 작가 조명희가 망명하여 그곳에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글문학을 가르치고 손수 모범을 보이며 창작활동을 이끌어온 주축을 이루게 된다.
2) 중안아시아 강제 이주 및 수난기(1937~1953)로 고려인에 대한 중앙아시아로 무자비한 이주가 행해진 이후의 척박한 문화여건과 스탈린의 공포정치의 탄압시기이다. 소련지역의 고려인은 암흑기라고 할 만큼 소련공민권의 지위도 확보하지 못한 채 겨우 한글신문 『레닌기치』에 소박한 한글 작품을 발표했다. 소련에 경직된 이데올로기와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직설적인 송가적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3) 재소 고려인 문학의 부흥기(1953~1991)로 스탈린 사후에 개선된 재소 고려인에 대한 지위 향상과 더불어 당이나 정부에서 고려인 문단활동을 지원받아 활성화하는 시기이다. 후루시초프 집권에 의한 다소 인권보장 추세 속에서 북한에서 선발된 모스크바 유학생 중 탈북한 여러 사람들이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에서 생활하던 중에 북한의 정치와 제도에 회의를 느끼면서 새로이 고려문단에 합류하여 그들의 진실을 밝히고 바르게 살자는 의미로 본명 대신 필명을 사용한 삼진 문인(三眞文人) -리진, 한진, 허진)의 가세 역시 부흥기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4) 알마타 한글문단의 위기와 재정립기(1991~현재)에는 구소련의 붕괴로 변모되고 고려인 작품의 모국(母國) 왕래가 열렸지만, 소련 한글문단은 위축되고 있다. 당에서 출판비를 지원 받아 내던 작품집들이 끊기고 한글신문 독자가 격감하면서『레닌기치』가 축소되어 『고려일보』로 바뀐 채 새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한글문단의 쇠퇴현상은 한글 해독 능력을 지닌 세대들이 노화하거나 별세하는 현상으로 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후 지난 2006년11월에는 중앙아시아문인협회에서『고려문화』를 창간하게 되었다. 편집위원 최 석은 ‘『고려문화』를 펴내며’에서 ‘『고려문화』는 이미 작고하신 고 양원식 선생과 최 석의 만남에서 발간의 뜻이 모아지게 되었다. 침체속에 서서히 퇴보해가고 있는 고려인문학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작가적 사명감과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이번 창간호에는 몇 분의 작가들, 그러니까 고려인이면서도 한글이 아닌 러시어로 작품을 쓰시는 분들의 작품도 게재되었다. 이는 확대된 의미로서 고려인문학의 한 부분으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고려문화』의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중앙아시아문인협회는 한글을 매개로한 순수 한글작가들의 모임이고 『고려문화』는 그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발간의 취지를 상세하게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고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자였던 조명희 선생의 특집으로 꾸몄으며 이의 발간을 위해서 격려와 옥고를 준 현지의 정상진 선생과 한국의 유안진 최동호 김종회 이명재 교수 김준태 시인과 후원을 해준 기업들 그리고 재 카자흐스탄 한인회 박희숙 회장에게 감사를 보내고 있으며 ‘어이 그리 바삐 가셨는지『고려문화』의 주인이기도 하신 고 양원식 선생님께 이 책을 바친다’고 쓰고 있다.
인터넷 까페 ‘카자흐스탄 문화마당’에 실린 작품 두 편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먼저 현재, 카자흐스탄 KIMEP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시집『우리의 다정한 긴 입맞춤이 끝날 때까지』를 상재한 김홍준의 작품이다.
노스탤지어
― 중앙아시아에 내리는 눈
중앙아시아 고원도시
알마티에는
철도 때도 없이 눈이 내린다
봄을 기다리는 이들의 꿈
흰 눈 덮고 명상하는
산맥을 넘어
이스크쿨 호수 남쪽 기슭에
풀꽃 단장이야기로
술렁이는데
중앙아시아 고원도시 알마티에는
눈이 몇날 며칠을 두고 쌓여
북극의 자작나무 가지들
모두 내려앉고
눈발은 오늘도
고국을 향한 그리운 깃발처럼
타국 꿈 낯설은 가슴 언저리에 마다
눈(雪)물젖은 노스탤지어를
쓸어주며 내린다
중앙아시아 고원도시 알마티에서 ‘눈발은 오늘도 / 고국을 향한 그리운 깃발’을 항상 떠올리면서 ‘타국의 꿈 낯설은 가슴 언저리에 마다 / 눈(雪)물 젖은 노스탤지어를 / 쓸어주면 내’리는 정황에서 그들의 간절한 그리움이 공감을 흡인하고 있다.
다음은 1959년 12월 27일 카자흐스탄 우스토베에서 출생하여 1985년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출간한 시집『이랑』과 1997년 서울에서 출간한 시집『별들은 재 속에서 간혹 노란색을 띤』」, 그리고 1999년부터 카자흐스탄공화국 11학년용 러시시아 교과서에 저자의 시가 수록된 이 스타니슬라브의 작품을 소개한다. 여기에서도 그들이 여망하는 ‘다시 전쟁이 없기를’을 ‘그렇게 소박한 / 지상의 바램’을 적시하면서 메시지를 띄우고 있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그들은 운명에 굴복하며 살았네.
밝은 미래를 믿으며, 왜냐하면
다른 믿음을 알지 못했느니
그들은 매년 산에 모여
소를 제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네.
피붙이의 건강과
알토란같은
가을걷이, 다시 전쟁이 없기를
그렇게 소박한
지상의 바램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4. 재외동포 문인들의 역할
이상과 같이 지엽적으로 살펴본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조선족과 유라시아의 동포문인들의 활동상의 개요를 살펴보면 먼저 미국의 경우는 2000년 L.A. 어느 문학심포지엄에서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눈 송순태 재미시인협회 이사장은 「북미주 한인 시인들의 시적 관심」이란 발표에서 ‘왜 북미주 시인들은 20년, 혹은 30년을 살면서 현지의 삶에 관한 시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떠나온 땅에 두고 있는가. 그토록 조국을 사랑하는 것인가. 그토록 모국이 그리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삶에 대한 숙고나 고민 없이 그저 <시란 그리움이다>는 식으로 관념적인 시를 써내기 때문인가. 우리가 겪고 있는 이민살이의 삶을 시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문화적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서 온 가족이 사투를 벌려야하는가 하면 또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한다. 북미주 시인들이 망향조의 시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도 이민살이의 그 고통을 직접 고백하는 것보다 관심을 고국으로 돌려 그리움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이민살이의 고충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요지로 현장의 고충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또한 중국 조선족들은 현지사회의 문화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모국으로부터 전래된 기본적인 문화의 특성을 대부분 보존하면서 살아가는 중용의 길이라고 연변대학 조문학부 김관용 교수는 말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조선족은 한 세기 남짓 중국 이민생활에서 숙명적으로 중국 요소와 모국 요소가 혼재한 이중적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고 피력한다. 왜냐하면 하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배달민족이 영위하는 세계, 이 한국문학이라는 대 계통 속의 자 계통으로 존재하고 또 하나는 중국의 주체민족-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56개 소수민족이 영위하는 중국문학이 자 계통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조선족 문학의 특성에 대해서 전임 연변작가협회 주석이었던 조성일 평론가는 ‘조선족 문학은 기본적으로 조선족이 중국 각 시대의 역사적 생활공간에서 이루어 온 문학으로서 모국의 국민과 모국 문학과의 내재적인 정신적, 문화적 연계를 확보하여 왔지만, 조선족 문학에는 중국 사회와 중국 역사적 내용이 수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조선족 문학이 비록 조선어 문학권에 속하는 다른 문학과는 달리 많은 경우 중국의 역사 변천, 중국의 독특한 사회생활, 중국의 자연 풍경, 중국 국민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조선족의 가치관념, 도덕규범, 사유 방식, 심리 갈등, 심리 추구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족 문학의 중국적 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라시아와 러시아는 어떠한가. 지난 2012년, 명지전문대에서 개최한 “서울 실크로드 문학인대회”에서 본인도 주제발표를 통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지정토론에 나선 유라시아문화포럼 홍태식 명지전문대 교수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 문학적인 교류의 현실과 절박한 상황들을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의 현황과 교류 가능성」에 대해서 ‘이제는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또 다른 불행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글 해독 세대가 줄어들고 이주 3, 4세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어 그들이 한글로 작품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표기 수단으로만 본다면 이제 멀지 않아 고려인 문학은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현재의 위기의식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현재의 상황들에서 우리는 이들 재외동포와 문인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심층적으로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3, 4세들이 비록 한글로 시나 소설을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가능한 데까지 그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고 한국문학을 이해시켜 민족 정체성을 유지케 하고 나아가 한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필요가 있다.
어쩌면 역사에 희생되고 억울하게 소외되어 떠나왔거나 또 다른 생존을 위해서 이민한 동포들을 위로하는 일인 동시에 우리의 동족에 대한 책무를 다하는 길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들은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고 우리가 세계로 나아가는 교두보가 내실 있게 마련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세계 각국에 이주해서 살아가는 우리 동포는 그곳 각 지역에서 한글과 현지어로 창작하는 작품활동을 해왔다. 일종의 디아스포라적인 이민자로서 낯선 땅에 떠돌아다니며 살아온 한인들은 짓눌러오는 고독을 이겨내고 소수민족으로서 그 정체성을 찾는 일과 문화적 지위 향상 등을 문학적 글쓰기로 충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문학사에서 외면해 왔지만 앞으로 이들 나라밖의 한인문학도 우리 문학의 일부로 편입시켜야 마땅하고 이 경우 무조건 우리 모국어뿐만 아니라, 몸담고 사는 그 사회의 현지어로 쓰여진 우리 동포의 작품까지 한국문학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이명재 교수의 논지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재외동포가 구사한 언어가 모국어가 아닐지라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에 골몰하고 이민자로서의 애환을 다루었다면 한국문학의 변방에 위치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화를 말로만 부르짖지 말고 우리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의미에서 그들의 문학을 포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말한 이승하 교수의 ‘재외 동포문학 포용하기’라는 부제로 출간된 『집 떠난 아이들』의 한 대목도 유념해야겠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문인협회에서는 재외동포와의 교류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학을 지향하는 국가 정책 반영을 위한 다각적인 방법이 연구되어 이의 실현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문학의 세계화이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한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