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97 년
성지순례 및 문화답사
5 월 19 일 [ 토 ]~20 일 [ 일 ]
원 / 불 / 교 / 대 / 치 / 교 / 당
차 례
∎ 일 정 표
∎ 인 사 말
∎ 참 고 자 료
1. 대산종사와 좌포교당
2. 만덕산 성지
3. 만덕산 훈련원
4. 만덕산 푸른 건강촌
5. 풍혈 냉천
6. 마이산
7. 마이산 탑사
∎ 지 도
∎ 참 가 자 명 단
∎ 일 정 표
5 월 19 일 ( 일요일 )
5 월 20 일 ( 일요일 )
오전 8 시 서울 출발
8 시 30 분 분당 출발
12 시 마이산 도착
오후 12 시 ~1 시 점심식사
< 인삼밭 가든 >
1 시 ~5 시 마이산
5 시 좌포교당
5 시 30 분 저녁식사
7 시 30 분 염불 / 좌선 / 특강
- 취침
오전 5 시 ~6 시 새벽기도 / 좌선
6 시 ~7 시 산책
7 시 30 분 아침식사
- 초선터
오후 12 시 ~1 시 점심식사
- 산상음악회
3 시 30 분 출발
6 시 00 분 저녁식사 / 분당
- 서울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
∎ 인 사 말
녹음이 짙어가는 5 월 ,
만덕산 초선지와 대산종사 탄생가를 순례하고자 합니다 .
선진님의 정신과 땀이 어려 있는 곳 .
그 마음을 우리도 체험 할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
영생을 살아오면서 전생보다는 이생이 나아지고 언제가 낙원세상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
서로 만나 법을 논하고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가는 이 길이 평화롭고 즐거우며 진급하는 길이기를 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
∎ 참 고 자 료
1. 대산종사와 좌포교당
1914 년 3 월 16 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표리에서 부친 김인오와 모친 안경신의 5 남중 장남으로 탄생 33 년간의 종법사 재위기간 동안 화동사상에 입각하여 이단치교의 법치교단 실현 , 종교간 울을 트고 넘나들며 인류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종교연합운동 , 5 대양 6 대주에 교역자를 파견한 해외교화 , 국내외 각 교구에 심전계발 훈련원 확장 , 신앙 , 수행 , 훈련을 통한 출가 , 재가의 법위향상 운동 등을 펼치시어 원불교를 국내 4 대 종교로 발전시키셨습니다 . 특히 교화 , 교육 , 자선 , 복지 , 의료 , 문화 , 산업 등을 균형 있게 추진하시어 원불교를 사회 , 국가 , 세계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기여는 세계종교로서의 정초를 닦으셨습니다 .
생가와 대산종사의 출생
생가는 1915 년에 지었다 . 집을 짓는데 3 년이 걸렸는데 매우 튼실하게 지었다 . 집을 짓는 과정에서 대산종사는 봉좌마을에서 출생을 하였다 . 생가 앞으로 5 칸 접집이 있고 동쪽 ( 생가 우측 ) 으로 7 칸 접집이 있었는데 집이 쇄락해지자 6.25 전쟁 후에 철거를 하였던 것이다 . < 앞쪽 5 칸접집은 광 2 개 , 사랑채 2 개 , 할아버지 방이 있었고 , 옆 7 칸 접집은 변소 2 칸 허청 4 칸 , 방 한칸이 있었으며 모두 초가집이었다 .> 어머니 봉타원 안경신은 17 세에 결혼을 하여 왔는데 10 여년이 되도록 아기가 없자 하루는 시아버지 ( 김봉배 ) 가 절구대를 들고와 마루를 쿵쿵 치면서 “ 어째서 아기를 안 났느냐 ” 하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
점을 치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 높은 나무에 아기가 올라앉아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니 공을 많이 들여야 하겠습니다 .” 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노덕송옥과 안경신은 집 뒤 바위에 정성껏 치성을 들여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
좌포교당
2. 만덕산 성지
원기 9 년 (1924 년 ) 5 월 익산총부를 건설하기 전 소태산 대종사님과 12 제자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한 달 동안 선을 행하였다 . 선을 행하였던 만덕산 초선지 만덕암은 3 칸 기와집으로 김씨 문중의 산제당이었는데 6.25 동란 때 소실되었고 지금 그 자리에는 빈터만 남아 있다 . 암벽에는 일원상이 그려져 있다 . 이곳에서 원불교 3 대성현인 소태산 대종사 , 정산종사 , 대산종사께서 만났으며 교단창립의 주요 인연들이 결집되기도 하였다 . 이 때의 훈련을 바탕으로 이듬해 3 월 원불교 훈련법을 제정 , 발표하였으며 이는 원불교 훈련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 .
만덕산 (761.8m) 은 산 이름이 그렇듯 만인에게 덕을 베푼다는 뜻이다 . 임진왜란과 6.25 때 크게 전화를 입지 않았는데 , 그 덕을 주민들은 만덕산에 돌리고 있다 . 성수면은 성수산의 이름을 따서 성수면이라 했으며 만덕산 , 국사봉 , 방미산 , 성수산 , 대둔산 등이 있어 약초 재배와 버섯 채취 , 축산업이 활발하다 . 만덕산은 진안 , 임실 , 완주 등 3 개 군의 경계에 있는 높이 762m 의 산으로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변산 봉래정사에서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의 어디든지 가보라는 말을 받들고 길을 나면서부터다 . 정산종사 미륵사에서 화주인 최도화를 만난 것으로 시작된다 . 이 곳은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 골짜기 만덕산 7 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 만덕산 성수면 좌포리의 김승지가 1910 년 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위해 지어 준 집이었다 . 비단장수 최도화는 미륵사 화주노릇을 하면서 미륵사 넘어 만덕암에 내왕하였다 . 그리하여 좌포 김씨들과 알게되어 만덕암 근방에 갈대 초즙으로 산신각을 지어 놓고 공을 드리며 만덕암 관리도 하였다 . 미륵산 화주였던 최도화와 정산종사의 만남에서 만덕산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고 소태산 대종사는 이곳에서 첫 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 소태산 대종사가 최도화가 관리하는 만덕암에 간 것은 원기 7 년 12 월경이었다 .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만덕산 만덕암에 머무르며 이곳에서 진안지방 교화는 물론 회상창립의 주요 인재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소태산 대종사 만덕산행에 오창건과 송도성이 수행하였고 만덕암에서 3 개월 남짓 머무시는 동안 전삼삼 전음광 모자를 만났다 . 소태산 대종사는 익산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가진 뒤 며칠 후에 다시 만덕암에 행가하셨다 .
이때 진안 성수군 좌포리에 사는 노덕송옥이 원불교 3 대 종법사인 대산종사를 그의 나이 11 세시에 대종사와 인연을 맺게 하였다 .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 , 오창건 , 김광선 , 최도화 , 전음광 , 박사시화 , 이청춘 , 노덕송옥 , 전삼삼 , 이동진화 . 김삼매화 , 대산종사 등 12 명의 제자와 원기 9 년 5 월에 선을 났고 이때 선을 주관한 사람은 팔산 김광선 선진이었다 . 이를 바탕으로 소태산 대종사는 이듬해인 원기 10 년 3 월에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 발표하시고 5 월에 새 훈련법에 의하여 중앙총부에서 첫 정기훈련법으로 하선과 11 월에 동선을 하게 된 것이다 . 결국 만덕산에서의 선은 원불교 회상의 정식 훈련의 효시가 된 것이다 . 더욱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그리고 대산종사가 함께 만난 원불교의 주법자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
3. 만덕산 훈련원
만덕산 초선터가 성적지로서 관리되기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 원기 15 년 소태산 대종사의 권장으로 이공주 교무가 임야 50 정보를 매입하였다 . 그리하여 이준경 이보국 정일지 전일구 이재문 등이 총부에서 파견되어 [ 홍곡당 ( 洪谷堂 )] 을 짓고 감나무 등을 심는 등 산전 개간을 하며 약초를 캐다 팔면서 간고한 생활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
그러나 원기 29 년 중길리 상달에 사는 최내선 교도가 홍곡당에서 간간히 법회를 보다 자신의 집을 희사하여 [ 불법연구회 중길리 출장소 ] 간판을 붙였다 . 그러나 원기 32 년 상달마을에 불이 나 교당도 전소되어 산전개간과 마을교화의 꿈이 깨어지고 말았다 . 그 후 마을법회도 중단되고 농원도 지킬 사람이 없자 , 최내선 교도 가족이 이사와 살았다 .
4. 만덕산 푸른 건강촌
만덕산에 숨어있던 1 인치를 찾았다 . ' 만덕산 ' 하면 만덕산 훈련원과 기도터를 생각하기 쉬운데 만덕산에는 푸른건강촌이있다 . 만덕산 훈련원 가기 전 중길리 교당이 있고 , 교당 뒤로 푸른건강촌이 자리고있다 . 만덕산 훈련원 옆 계곡인 셈인데 여긴 또 다른 별천지이다 .
언덕을 넘으면 비닐하우스와 생산시설이 보인다 . 그 뒤 계곡에는 황토방 4 동이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 이곳은 바람도 쉬어간다고 할 정도로 당터라고 한다 . 양태홍 교무는 “ 계곡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 고 말한다 .
무농약 쌈채와 친환경농산물
그래서 그런지 푸른건강촌 비닐하우스에는 양상치 , 레드치커리 , 치커리 , 케일 , 모시대 , 머우대 , 사슴뿔 질경이 등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다 . 푸른 건강촌이 자랑하는 무농약 쌈채 (3 천원 ) 는 청정지역 만덕산의 맑은 공기와 바람 , 물 , 정성이 빚어낸 것이다 . 그만큼 싱싱하다 .
푸른 건강촌 제품은 모두 친환경농산물이다 . 오리농법으로 재배한 오리농쌀 , 찹쌀 , 무농약 고추 , 매실장아찌 , 고사리 등이다 . 각종 효소액도 생산한다 . 간에 좋은 질경이 효소액을 비롯 쑥 , 야채 , 솔잎 , 매실 , 칡 효소액 등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 유기 농자재도 생산한다 .
숯과 목초액 , 톱밥 , 퇴비 등을 자체 생산 , 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 특히 중길리 마을 주민들이 생산한 오리농쌀의 판매를 맞아 농가들의 소득증대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양 교무는 지난 9 월 진안군이 선정한 신지식인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
정기훈련 도량
푸른 건강촌이 추구하는 것은 정신 · 육신건강에 도움을 주는 종합휴양도량이다 .
육신건강을 위해 1 차적으로 깨끗한 환경에서 기른 먹거리를 공급해왔고 정신건강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 정기훈련이다 . 동 · 하선은 만덕산훈련원에서 하고 부정기적으로 훈련의 장을 열었다 . 2 박 3 일 일정으로 진행되는 푸른건강촌 정기훈련은 교령으로 계신 승산 양제승 종사가 일원상의 진리 강의 , 안다민 선생이 회화 , 양 교무가 요가 , 홍효철 선생이 훈련 지원을 하고 있다 . 황토방에서 잠자고 깨끗한 먹거리를 먹으며 일원상의 진리 소식을 듣노라면 여기가 극락이고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게 된다 .
5. 풍혈 냉천
마이산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약 10km 를 달리면 성수면 양화마을 대두산 기슭에
풍혈냉천 ( 風穴冷泉 ) 이 있다 . 예전에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얼어있었다는 풍혈은 지금은 다만 바위틈사이로 섭씨 4 도의 찬바람이 스며 나와 20 여평의 동굴 안을 섭씨 4 도 정도로 유지해 주고 있다 . 일제 강점기에는 한천 공장과 잠종 보관소로도 이용 되었는데 , 지금은 마을 주민들의 여름철 김치저장에 이용되고 있다 . 자연이 만든 냉장고인 셈이다 . 풍혈 옆에 있는 냉천은 석간수 ( 石間水 ) 로써 사시사철 변함없이 섭씨 3 도의 찬물이 솟아난다 . 한 여름철에도 손발을 씻는 것 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다 . 피부병 , 위장병 등에 특효가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겸해서 찾아오는 곳이다 . 냉천의 물은 " 한국의 명수 " 로 꼽힐 정도로 물맛이 좋은데 , 특히 , 명의 " 허준 " 선생의 약 짓던 물 이라고 알려져 있어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진 명소이다 .
6. 마이산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단양리와 마령면 동촌리의 경계에 있는 산 .
높이 678m. 진안고원에 있는 2 개의 암봉으로 ,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고도 했으며 , 조선시대부터는 산의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 동봉을 숫마이봉 , 서봉을 암마이봉 이라고도 한다 . 동봉과 서봉은 약 20m 간격을 두고 있으며 , 주위에는 부귀산 · 성수산 등이 있다 .
기반암은 수성암이며 , 산 전체가 거대한 암석산이나 정상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 사방이 급경사로 이루어졌으며 , 남쪽과 북쪽 사면에서는 섬진강과 금강의 지류가 각각 발원한다 . 두 산봉은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북 · 서 사면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따라서 습한 북쪽 사면은 식생이 풍부하나 건조한 남쪽 사면은 식생이 빈약한 반면 , 풍화작용으로 암석의 측면에 동굴 형태의 구멍이 생기는 타포니 (taffoni) 가 현저하게 나타난다 . 북쪽 산록에는 사양제 등 저수지가 있으며 , 높이 400m 이상은 계단을 이용하여 산정으로 통한다 .
7. 마이산 탑사
수박크기의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 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 ( 馬耳山塔寺 ). 높이 15m, 둘레 20 여 m 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 .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 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 .
그런데도 1 백여년의 풍상 속에 태풍과 회오리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 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 ( 본명 경의 , 호 석정 ) 는 1860 년 3 월 25 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 대 손이다 . 수행을 위해 25 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
"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 " 는 것이었다 .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
이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 여년을 인근 30 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 상단부분에 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 왔다고 전해진다 .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 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 ( 氣功琺 ) 을 이용하여 쌓았다 .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오행을 뜻하는 오방탑 ( 五方塔 ) 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 ( 天地塔 ) 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쌍의 탑이다 .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 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 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탑사에는 또 하나의 신비가 있다 . 바로 역 고드름이다 .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오른다 .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 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
∎ 참 가 자 명 단
교화단
참 가 자
참석수
해탈단
배수원 , 장옥림화 , 박정명 , 김도형 , 심묘환 , 최대언 , 길혜선
7
정진단
박연순 , 최현숙 , 최성인 , 이지혜 , 김명안
5
진급단
박세옥 , 노지연 , 정여경 , 김덕천 ,
4
솔성단
박화선 , 이은신 , 김홍전 , 이봉진 , 이진선 , 김수명
6
봉공단
김효철 , 황보정 , 박유원
3
보은단
서영교 , 이양기 , 서동원
3
연화단
정보화 , 고성안 , 김희전 , 정인명
4
서원단
송덕훈 , 정심광 , 차장호 , 이도원
4
제중단
박태일 , 손만득 , 예덕훈 , 류종실
4
금강단
임상운 , 양원중 , 강대원 , 장필균 , 김정국 ,
5
기타
주임교무
1
계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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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답사
원기97년 문화답사(만덕산)
서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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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23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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